에이엔야

[에이엔야] 지나가던 조달꾼이 철학자 의회 의원을 납치했다 1: 조달꾼과 철학자 의원

별의 궤적 by 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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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엔야]

지나가던 조달꾼이 철학자 의회 의원을 납치했다 1

: 조달꾼과 철학자 의원

15년 전, 갈레말 제국이 알라미고를 침략한 이후 저지 드라바니아에 위치한 식민도시 샬레이안은 서서히 폐허로 변해갔다. 그곳에 거주 중이던 샬레이안 주민들은 북해에 있는 본국 올드 샬레이안으로 모두 대규모 이동을 하였고,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지 보지 않아도 뻔하다.

그 누구의 관리도 없이 방치된 도시는 온갖 야만족과 마물들이 누비고 다니자 화려함을 잃어갔다. 마물들이 백색 벽을 부수어 별 볼 일 없는 자갈처럼 밟고 다녔을 테고, 그 자리를 식물이 무성히 뒤덮었으리라고 엔야 오르데아는 상상하고 있었다.

그나마 저지 드라바니아의 북쪽 끄트머리 지역은 상대적으로 잘 보존되어, 신흥 도시 ‘이딜샤이어’로 번성하고 있었다.

그 땅을 직접 밟는 건 엔야 오르데아에게 있어서 처음이었기에 당연히 이딜샤이어의 에테라이트도 교감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북해의 샬레이안에서 이딜샤이어까지 약 2주 동안의 항해를 마친 엔야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창백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올드 샬레이안의 날씨에 비해 공기의 온도가 높은 탓인지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차오르는 것이었다.

그 땅과 함께 방치된 성 모샨 식물원에 설마 재배금지 식물로 지정된 무스크말로이가 뿌리를 내리고 있으리라고는, 철학자 의회에서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 식물을 불법으로 사용한 자들에게 철학자 의회에서는 곧바로 추격 명령을 내렸지만, 돌아온 보고에 따르면 사건의 복잡한 내막과 함께 얽힌 사정들로 인해, 추격 명령은 철회되었다.

그리고 지금, 엔야는 무스크말로이를 포함한 각종 위험 식물의 회수와 더불어 성 모샨 식물원에 자라난 마약성 식물까지 철저히 찾아 폐기하기 위해 샬레이안 본국에서 저지 드라바니아 땅까지 조사대와 함께 파견되어 온 것이다.

문제는 엔야가 배를 타고 오는 동안 심한 뱃멀미에 시달려 어지럼증을 호소하고 있었다. 그 여파가 채 가시기도 전에 에테르 멀미까지 겹친 상태로 험한 길을 쉬지 않고 걸어야 했다. 더욱이 그 넓은 식물원 내부를 공복 상태에서 종일 뒤지고 다녔으니.

그 결과, 해안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는 파견대와 뒤처져버렸다.

회수한 식물은 전부 조사대원들에게 맡겼으니 문제없었고, 굳이 함께 배에 올라타기보다는 텔레포로 올드 샬레이안에 돌아가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일이었다. 다만 체력이 바닥난 상태라 당장은 텔레포 마법을 사용할 수 없다는게 화근이었다. 우선은 이딜샤이어로 돌아가 잠시 휴식을 취할 생각이었으나…….

……모든 가로등이 파괴된 저지 드라바니아는 해가 기울 수록 어둠에 가로막혀 방향을 분간하기 힘들어지는 환경임을 뒤늦게 깨달았다.

***

최근 저지 드라바니아에 거대 몰볼이 출몰해 이딜샤이어의 주민들이 골머리를 앓고 있으니 신속히 처리를 부탁한다는 의뢰가 모험가 길드를 통해 심심찮게 들어왔다.

그야 치유사도 없이 몰볼의 커다란 입과 마주했다가는 그 자리에서 별바다 유영 예약이 거의 확정된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기다란 귀로 들려오는 소문대로라면 보상도 여간 큰 게 아니었다.

“에이든 형, 토벌 의뢰 끝나면 밤 11시까지 꼭 그 여관으로 오기예요. 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알았어, 끝나면 갈게.”

“형 그런데 정말 저랑 사귈 생각은 없는 거예요? 이렇게 매일 거절하다니, 정말 너무한 거 아시죠?”

“사귈 생각 없다니까. 앞으로도 누구하고도 생각 없으니까 거기에 대해선 더 보채지 마라.”

“너무하네~. 알겠어요. 그럼 이따 봐요.”

옅은 금발의 청년이 밤에 보낼 시간을 기약하며 흑발의 남성 뺨에 뽀뽀하고는 콧노래를 부르며 유유히 사라졌다.

마지막 남은 술잔을 털어낸 에이든 포스터는 주점의 지저분하게 다 낡아 떨어진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는 바지도 털지 않은 채 옆자리에 두었던 짐을 어깨에 걸쳐 매고는, 주인장과 직원들에게 늘 그랬듯이 인사를 주고받으며 큰 보폭으로 주점을 나섰다.

몰볼, 그것도 높은 마물 등급으로 게시판에까지 수배되어 붙여진 거대 몰볼. 그래봤자 몰볼은 몰볼이라며 그놈의 께름칙한 입속만 멍하니 들여다보지 않으면 된다고 에이든은 머릿속으로 전투 시뮬레이션을 마쳤다.

뼈가 울퉁불퉁하게 도드라진 두꺼운 손이 게시판에서 서슴없이 거대 몰볼 수배서를 뽑아냈다. 옆에 선 마물 수배 담당관이 오, 하고 짤막한 감탄을 내보이자, 에이든은 이번 마물도 자신에게는 별것 아닐 거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마물 사냥을 전문으로 하는 에이든이니 이 바닥에서는 많은 모험가들이 그의 얼굴을 알아볼 정도로 에이든은 마물 처치 기술들에 이골이 나 있었다.

도시 광장에서 푸른 빛을 발산하며 일정하게 회전하는 거대 에테라이트를 올려다 보았다. 그의 금빛 눈동자에 크리스탈의 푸른빛이 섞이며 감돌았고 곧이어 눈꺼풀이 닫혔다.

그대로 잠시 집중하자 이딜샤이어의 에테라이트로 이어지는 수맥에 에이든의 몸이 곧장 빨려 들어갔다.

즉흥적으로 짜인 계획에 따르면 이러했다. 예상 밖의 방해자가 나타나 신경 쓰일 짓만 하지 않는다면 거대 몰볼 사냥 따위 얼마 걸리지 않을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

……해가 떨어져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저지 드라바니아의 거대 몰볼 앞에 멍하니 주저앉아 넋이 나가 있는 웬 샌님과 마주치기 전까지는 말이다.

***

보나마나 과중력에 몸이 짓눌려 주저앉은 상태에서 둔화되어 느려졌을 것이고, 곧 일시적인 실명으로 앞이 안 보이는 데다가 침묵 상태까지 걸려 마법 술식 영창도 불가능할 것이다. 거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몸에 독이 퍼져 마비와 함께 생명력이 빠르게 깎이고 있을 테니. 일반 모험가들도 패닉에 빠질 상황인데 전투와 거리가 먼 도련님께서는 오죽하겠나 싶다.

거대 몰볼의 줄기가 채찍질하려는 듯 높게 처 올려진 순간 에이든이 엔야의 몸을 짐짝처럼 어깨 위에 걸치고 뒤로 점프해 뛰어올랐다. 착지하며 발을 디딘 곳 주변에는 현학 무기가 각각 따로 나뒹굴고 있었다. 이게 이 녀석의 무기인가, 라고 에이든이 생각하는 중에 엔야의 입에서는 저절로 소리 없는 신음이 새어 나왔다.

혼자 다니며 자신의 몸을 스스로 돌본 시간이 꽤 길었던 에이든이 보기에 엔야는 전투능력이 거의 없어 보였다.

“이봐, 정신 좀 차려봐.”

“…….”

“흠……, 이럴 때는 에스나였나?”

공격 위주의 전투를 주로 하지만 스스로를 돌보려면 치유술에 대한 지식도 어느 정도는 필요했다. 에이든이 엔야에게 에스나 마법을 시전하자 다행히 곧바로 독이 풀린 것 같았지만 여전히 축 늘어진 채로 꼼짝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몇 번 더 에스나를 시전하니 드디어 모든 상태 이상에서 벗어난 엔야가 고개를 들고선 에이든의 어깨 위에서 살짝 버둥거렸다.

“윽……, 구해주셔서 감사하지만, 이대로는 배가 너무 졸리는데, 일단 내려주세요.”

“저 몰볼이 또 공격해오면 피할 수 있겠어?”

“몰볼의 공격 패턴은 파악했으니 적어도 같은 실수는 하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제게도 무기가 있……, 어?”

엔야는 그제야 흙탕물에 반쯤 가라앉아있는 자신의 현학 무기를 발견했다.

“잠깐, 설마 저게 내 현학 도구?!”

“였던 거겠지.”

“아, 안 돼…….”

그러거나 말거나 인간의 사정일 뿐 거대 몰볼의 뿌리가 일제히 에이든을 향해 뻗어왔다. 어쩔 수 없이 다시 점프해 날렵하게 피했는데 그다음 순간 엔야는 좌절했다. 방금 전 에이든이 서 있던 바닥을 몰볼의 굵은 뿌리가 철퍽 내리치면서 흙탕물 속에 반쯤 처박힌 현학무기에서 으스러지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기 때문이다.

에이든은 점프 후 이은 동작으로 다른 손에 쥔 도끼를 넓지막하게 휘둘렀다. 문어 다리 자르듯 몰볼의 모든 뿌리들을 동강 내자 다리를 잃은 몰볼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제야 에이든은 엔야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이런 어두운 밤에 폐허를 혼자 돌아다니다니, 용기가 가상하다기 보다는 제법 무모한데? 어디 가던 길이야?”

“……샬레이안 본국으로 돌아가는 배를 타야 하는데, 일행을 쫓아가지 못하고 뒤처졌어요.”

엔야는 다리를 후들거리며 하얀 손을 흙탕물에 집어넣었다. 그 속에서 꺼낸 현학 무기는 이미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박살이 나 있는 것을, 엔야는 두 눈으로 확인하고 나서야 어쩔 수 없이 다시 일어섰다.

로브도 흙으로 더럽혀졌지만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라고 생각한 엔야는 에이든에게 제대로 인사했다.

“신세를 졌네요.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 뭘. 난 그냥 거대 몰볼을 퇴치하러 왔다가 우연히 널 발견한 것뿐인데. 그보다 괜찮아?”

“네. 덕분에 이제 괜찮습니다.”

괜찮다고는 대답하지만 목소리에 영 기운이 없는 엔야가 잠시 입을 다문 순간이었다. 두 사람의 뱃속에서 동시에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천둥처럼 울렸다. 엔야는 방금 전 자신의 뱃속에서 난 소리 때문에 민망했는지 에이든의 시선을 살짝 옆으로 피했다.

“생명을 구해주신 것에 대한 보답으로 뭔가 해드리고 싶은데, 필요한 게 있으신가요.”

“흠…….”

보답이라. 잠시 고민하던 에이든은 자신의 주린 배를 손으로 문지르며, 딱히 큰 건 바라지 않는다는 듯한 투로 시원스레 대답했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괜찮긴 한데, 네가 그렇다면야. 그럼 내가 자주 가는 주점으로 가도 괜찮겠나?”

“네, 편하신 대로.”

즉시 대답하며 엔야가 동시에 자신의 로브 안쪽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다행히 알라그 은화를 넣어둔 주머니는 제자리를 잘 지키고 있었다. 이거라면 호화 레스토랑에 가더라도 문제없을 거다.

***

“윽, 이곳은 대체…….”

에이든의 초코보를 함께 타고 비행해 도착한 곳은 레스토랑도, 평범한 식당도 아니었다. 웬 다 무너져가는 주점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펼쳐진 광경에 엔야의 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코를 찌르며 훅 들어오는 담배 냄새와 찌든 술 냄새, 테이블과 의자는 얼마 동안이나 구른 것인지 여기저기 때가 검게 탔다. 그런 테이블이 질서 없이 혼잡하게 배치되어 있는데 사람까지 많으니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엔야가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들어올리자 천장 모서리마다 드글거리는 거미떼가 무단 점거를 하고 있는게 눈에 들어왔다.

“안 들어오고 뭐해? 아, 혹시 이런 장소는 좀 버거운가?”

어째선지 장난기가 섞인 미소로 말하면서도 에이든이 엔야의 반응을 살폈다. 엔야는 고개를 가로로 저으며 주점 안으로 더 들어왔다. 아무래도 생명을 구해준 은인이 선택한 곳이고, 자신은 그곳에서 식사를 살 생각으로 따라왔으니 그것만 생각하기로 했다.

늘 모든 시설이 청결하게 관리되는 샬레이안 본국에는 이런 혼란한 주점 같은 장소가 없기에 약간 당황했을 뿐이지, 더럽다거나 혐오스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니요.”

“그럼 다행이고. 저쪽으로 가자.”

에이든이 구석 테이블로 향하는 대로 엔야는 그 뒤를 졸졸 따라 걸었다. 몇 발자국 떼자마자 바닥을 흥건하게 적신 술을 밟아버렸지만 진흙탕보다는 나았다.

값비싼 요리를 마음껏 주문해도 괜찮다는 엔야의 말에 에이든은 기회를 잡은 양 고심하며 메뉴판을 눈으로 훑었다. 하지만 아무리 본인이 돈을 지불하지 않는다 한들 다 먹지도 못할 양을 제 욕심에 취해 주문할 정도로 에이든이 양심 없지는 않았다.

“그러고 보니 서로 통성명도 제대로 안 했었네. 이름이 뭐야?”

“올드 샬레이안 출신인 엔야 오르데아입니다. 당신은요?”

“에이든 포스터. 마물 사냥꾼으로 주로 활동 중이다. 요즘은 샬레이안에서 조달꾼 일도 겸하고 있고.”

“……! 그러셨군요.”

“언젠가 스쳐지나간 적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네. 근데 본국에서 무슨 일로 저지 드라바니아까지 온 거야?”

“성 모샨 식물원에서 회수할 것이 있어서 철학자 의회 의원 대표로 파견되었습니다. 이 이상은 더 말씀드릴 수 없지만요.”

철학자 의회 의원이라. 비에라족의 나이는 겉모습만 봐서는 쉽게 가늠할 수 없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기껏해야 20대로밖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앳되어 보였기에 에이든은 적잖이 놀랐다.

엔야는 에이든이 몸 전체에 두르고 있는 단단한 근육과 손에 난 자잘한 상처들, 그리고 등에 맨 도끼를 보고서 ‘역시’라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몰볼과 마주치고 나서는 실명 상태였기 때문에 에이든의 전투를 전부 보지는 못했지만, 그의 날렵한 움직임에서 분명히 느꼈다. 발에 채일 정도로 어중간한 실력에 고여있는 모험가가 아니라는 것을.

서로에 대해 간단히 소개하고 나자 직원이 요리를 차례로 내어왔다.

에이든 앞에는 부드러운 큰뿔산양 안심을 정성스럽게 구워낸 스테이크, 밀가루를 묻힌 연어를 버터에 구운 왕연어구이, 마실 것으로는 포도주가 놓였다. 그에 비해 엔야는 비트가 들어간 보랏빛 크림수프 하나와 물을 주문했을 뿐이었다. 잘게 으깨고 짜낸 비트와 포포토, 사향소 젖과 치즈, 그리고 박하잎을 넣은 수프는 썩 배를 든든하게 채워줄 요리로는 보이지 않았다.

“아까 너도 뱃속에서 나는 소리가 엄청나던데. 든든하게 먹지 왜?”

“저는 이걸로도 괜찮아요.”

늘 식단을 관리해야 한다든가, 아직도 속이 안 좋다든가, 그런 말들을 굳이 입 밖에 내지 않고서 엔야는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스푼을 들어 올렸다.

“먹고 바로 본국으로 돌아갈 거야?”

“원래대로라면 그래야 하지만…….”

엔야는 자신의 왼쪽 소매를 걷어 올렸다. 흙에 엉망이 된 손목시계를 들여다본 엔야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관에서 하루 묵고 체력을 보충한 뒤에 내일 텔레포로 가려고요.”

“그래, 얼굴도 창백한 게 영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데 하루 쉬는 게 낫지.”

“……저는 평소에도 원래 좀 창백한데요…….”

“어쨌든 몸 상태 안 좋잖아. 내 눈도 장식은 아니라서 말이지. 그런 것 정도는 구분한다고.”

붙임성 좋은 에이든의 질문들에 전부 대답하면서도 애써 내색하지 않으려 했던 게 들통난 엔야는 괜히 스푼으로 수프를 두어 번 저어댔다.

“그럼 에이든 씨는요?”

“나도 여관으로 가서 눈 좀 붙여야지. 내일 거대 몰볼 토벌 완료를 보고한 다음에 보상도 챙기고.”

“그러면 혹시 적당한 여관을 소개해 주실 수 있을까요?”

“그거야 어렵지 않지. 같이 가면 되겠네.”

“잘 됐네요. 그럼, 내일 아침 식사도 제가 대접해 드려도 괜찮을까요.”

“뭘 그렇게까지. 괜찮아, 괜찮아.”

이 도련님에게 과한 걸 바랐다간 곤란해하겠지, 초면에 그런 장난을 치기도 좀 그렇고.

그렇게 생각하며 에이든은 손을 두어 번 흔들어 보인 뒤 산양 고기를 큼지막하게 베어 물었다. 육즙이 어찌나 많고 고기가 부드러워 살살 녹는지, 에이든이 저도 모르게 혀로 자신의 입술을 핥았다. 그 모습은 이 저녁 식사를 대접받은 것으로도 충분하니 괜히 마음에 둘 것 없다는 제스처로 보였다.

***

에이든도 엔야도 에오르제아 3개국의 에테라이트와 모두 교감되어 있는 상태였기에 가장 가까운 에테라이트로 텔레포하면 되는 일이었으나…….

에이든처럼 체력은 물론 정신력도 강한 사람들은 텔레포 마법을 연속으로 사용해도 별문제 없다. 하지만 현 상태의 엔야는 체력이 바닥을 치고 있어서 당장은 텔레포할 수 없을 정도다. 그런고로 주점에 올 때 택했던 이동 방법으로, 그나마 가까운 그리다니아까지 또 다시 에이든의 초코보를 얻어타고 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이번에도 에이든이 엔야부터 초코보에 올려 태웠다. 주점까지 날아올 때 엔야는 고소공포증 때문에 꽤 고생했기에 이번에는 뭐라도 붙잡고 싶었다. 당최 뭘 붙잡아야 좋을지 몰라 곤란해하고 있을 때, 보다 못한 에이든은 아까와는 달리 엔야의 뒷자리에 올라탔다.

초코보를 타고 주점까지 날아올 동안 자신의 뒤에 앉아 망토나 겨우 붙잡고 있던 엔야가 안쓰럽기는 했던 모양이다.

“그렇게 불안하면 내 허리라도 안는 게 어때?”

“그, 그렇게까지는……! 그렇게까지 무서워하진 않았다고요.”

“뭐, 그렇다고 칠까. 아까 주점 앞에 내리자마자 다리가 후들거리시던 도련님.”

“그건 단지 허벅지에 내내 힘을 주고 있느라……!”

붙임성 좋은 사람이란 건 충분히 알겠지만 남의 허리를 덥석 안으라니, 타인과의 접촉을 쉽게 하지 않는 엔야로서는 상상해 본 적도 없는 일이다. 그런데 막상 자신보다 훨씬 거대한 덩치를 가진 남자가 초코보 안장 중 뒷자리에 올라타 고삐를 붙잡으니, 그 널찍한 품과 단단한 양팔 사이에 갇힌 것에 놀랍도록 안정감을 느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초코보가 땅을 세차게 박차고 날아오르자마자 엔야는 멀어지는 땅을 내려다보다가 눈을 질끈 감은 채 두 팔로 에이든의 허리를 붙잡았다. 자존심이나 부끄러움은 이 높은 상공에서 알 바 아닐 정도로 아찔했다.

바람에 휘날리는 은회색 머리칼이 에이든의 품 안에서 목 주변을 간지럽게 만들었다.

***

“어디 보자, 오늘은 미 케토 음악당에 행사가 있는 날이어서 투숙객이 많거든요. 다행히 방금 예약 취소된 2인실이 딱 하나 있는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에이든은 초면인 사람과 한 침대에 눕는 것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옆에서 심하게 코를 골거나 잠버릇이 고약하지 않다면 웬만해선 불편감을 느끼기는커녕 오히려 신경 끄고 잠드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도 그럴게 에이든은 이미 수많은 초면들과 원나잇을 즐기고는 했으니까.

하지만 엔야는……

“2인실 하나뿐이라고요?”

“그럼 어쩔 수 없겠네. 가자.”

어렸을 적 젖을 뗀 순간부터 단 한 번도 다른 사람과 함께 잔 적이 없다.

엔야가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뜨고 굳어진 사이에 에이든이 방 열쇠를 받아들고 복도로 유유히 걸어 들어갔다.

“잠깐만요! 어쩔 수 없다니, 에이든 씨는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과 갑자기 함께 자게 됐는데 불편하지 않으세요?!”

큰 보폭으로 먼저 걷는 에이든의 뒤를, 거의 뛰듯이 뒤쫓아가며 엔야가 그의 검은 뒤통수를 올려다보았다. 아무래도 좋다는 듯 저 막힘없이 나아가는 발걸음이 참 빠르기도 하다.

엔야가 겨우 에이든을 따라잡아 옆에 서서 경보로 걷자 에이든이 엔야쪽으로 시선을 내리고는 발걸음 속도를 조금 늦춰주었다.

“난 상관없는데, 도련님께서는 불편하시려나?”

“……그 단어를 비아냥대듯 부르는데 쓰지 마시고요.”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에이든은 잠시 한 박자 쉬고서 금빛 눈동자의 시선을 엔야에게서 거두었다.

“뭐, 샬레이안에서 의원씩이나 하고 있는 사람을 온실 속에서만 귀하게 자란 도련님으로 넘겨짚고 말한 건 아니야.”

“…….”

“몸이 약하면 온 신경이 예민할 거 아냐. 적응력도 현저히 떨어질 거고. 게다가 넌 지금 몸 상태도 안 좋잖아.”

“그건…….”

“시간도 늦었고, 다른 여관으로 갈 여유도 체력도 네겐 안 남았고.”

“그건, 맞지만…….”

도움이 되려고 쫓아온 건데 도리어 에이든 쪽에서 맞춰주고 있으니, 짐이 된 것 같다는 생각에 엔야는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에이든이 어느 방 문 앞에 우뚝 멈춰 서자 엔야가 한두 발자국 더 앞으로 나아갔다가 되돌아왔다. 에이든이 열쇠로 문을 열어젖혔고, 바로 마주 보이는 벽면 한가운데의 창문 너머로 숲과 밤하늘이 탁 트인 풍경이 보였다.

오른쪽 벽에는 2인 침대 하나, 왼쪽 벽면에는 나무의자와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그걸 본 에이든은 무심한 투로 “내가 의자에 앉아서 잘게.”라 말하며 테이블 위에 열쇠를 던져놓았다. 당연히 엔야에게서 당장 반박이 돌아왔다.

“그건 말도 안 돼요. 저를 구해준 은인을 의자에서 주무시게 할 수는 없습니다. 제가 의자든 바닥이든 앉아서 잘게요.”

제법 고집이 있다고 생각하며 에이든은 어깨 위에 둘렀던 가방과 도끼를 방 한구석에 내려놓았다.

“나도 네가 아무 데서나 자는 건 썩 내키지 않는데? 몸도 아픈 애가.”

“애?!”

애. 그렇게 불려 화들짝 놀란 엔야가 에이든을 휙 바라본 순간 그는 상의까지 벗어던지고 있었기에 엔야의 어깨가 튀어 올랐다. 오래된 흉터와 근육으로 뒤덮인 묵직한 상체가 아무 예고도 없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

“일단 먼저 씻고 와. 이야기는 그다음에 마저 하자. 흐아암.”

엔야가 입고 있던 여행용 로브도 흙탕물에 젖었다가 말라 굳어진 채로 심하게 오염되어 있었으니 당장이라도 씻고 싶은 심정인 건 부정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먼저 씻으란 소리를 들은들 순순히 그 말대로 할 리가 없다.

“아니, 에이든 씨가 먼저 씻으세요.”

“네 몸 상태가 괜찮았으면 누가 먼저 씻든 상관없는데, 지금 그렇게 나오는 건 좀 고집이지 않나~?”

“윽…….”

“네가 내게 고마움을 갖고 있다는 것도, 양보를 하고 싶어 하는 것도, 내가 더 빨리 편하게 쉬었으면 하는 마음도 잘 알겠다만, 뭐…… 의원으로서의 희생정신이나 주민을 위한 보살핌 같은 행동은 됐으니 빨리 씻고 와. 네가 그렇게 버티고 있을수록 나도 씻는 시간 더 늦어진다?”

“……….”

무엇 하나 틀린 말은 없어 보였다. 엔야는 깊은 한숨을 내뱉으려다 삼키더니 에이든 말대로 더는 지체 없이 방에 딸린 샤워실 안으로 사라졌다.

피부에 붙은 흙먼지를 씻어낸 후, 여분으로 챙겨온 옷을 가방에서 꺼내 갈아입고나자 드디어 몸과 마음이 개운해졌다. 엔야가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감싸고 방으로 돌아왔을 때 에이든은 자신의 도끼날에 굳은 진흙과 몰볼의 찐득한 액을 천으로 닦아내는 중이었다.

금빛 눈동자가 시선을 들어 올려 엔야를 바라보았다. 급하게 나오느라 은회색 머리칼에서 아직도 물이 똑똑 떨어지는 게 다 보였다.

“왔어?”

“……네.”

“그럼 어디 나도 씻어볼까~. 넌 먼저 자. 한 번 더 말해두지만 침대에서 자라.”

“앗…….”

엔야가 뭐라 대답할 새도 없이 에이든은 샤워실로 휙 들어가 버렸다. 방 한가운데에 어색하게 서서 닫힌 문을 바라보고 있던 엔야는 노곤함이 밀려드는 느릿한 움직임으로 의자에 털썩 앉았다.

금방이라도 잠이 올 것처럼 피로감이 한꺼번에 몰려들지만 낯선 환경에 있어서인지 바로 잠들기는 글렀다고 엔야는 머리를 말리며 생각했다.

방에 놓인 침대는 두 명이 눕기에 충분한 사이즈는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문제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적어도 엔야에게는 그랬다.

에이든이 반팔과 반바지로 갈아입고 시원스러운 모습으로 방에 돌아왔을 때, 엔야는 침대 위에 앉아있기는 했다. 정확히는 벽 쪽에 붙어 앉아 이불로 다리를 덮고, 그 두 다리는 세워서 무릎을 끌어안고 있었다. 한마디로 거의 구석에 쪼그려 있다시피 한 처량한 모양새다.

혼자 어색해하는 엔야에게서 일부러 시선을 거둔 에이든은 침대에 걸터앉아 검은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빗어넘겼다.

“침대도 넓은데 그냥 같이 잘까.”

“…….”

“난 네가 바닥에서 자는 게 싫고, 너도 내가 바닥에서 자는 건 원치 않잖아.”

“……….”

“그리고 침대는 넓지.”

“………….”

“최대한 떨어져서 누울 테니까 너도 그냥 편하게 누워.”

에이든은 침대에 정자세로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일부러 이불을 더 끌어당기지 않고 자신의 몸 위에 살짝 덮고 나서, 슬슬 무거워진 눈꺼풀을 닫았다. 이불 밖으로 나온 근육질의 팔뚝에 엔야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지만.

엔야를 거슬려 하지 않다는 걸 보여주려는 것처럼 에이든은 곧바로 신경을 끈 듯했다. 쪼그려 앉은 채로 굳어있던 엔야는 결국 피곤함에 완패하여 이불 속으로 스르륵 들어가 무거운 몸을 뉘었다. 여전히 몸 옆부분을 벽에 붙인 채로.

“안 불편해?”

“괜찮아요.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진짜로.”

“괜찮긴. 좀 더 이쪽으로 와.”

달빛만 희미하게 겨우 들어오는 방 안에 에이든의 낮은 목소리가 엔야에게 조금 무리한 것을 권했다.

에이든 씨와 살이 직접 닿지만 않으면 돼.

그런 생각으로 엔야는 몸을 살짝 옆으로 움직였다. 그러나 그건 약 3cm 정도 옆으로 꿈틀거린 수준이었을 뿐이다.

“움직인 거야?”

“혹시 오해할까 봐 말하는 거지만 당신과 닿기 싫어서 이러는 건 아니에요. 그냥, 제가 좀……, 지금 이 상황이 낯설어서 그런 것뿐이에요.”

“닿기 싫은 게 아니라니 그건 다행이네. 난 또, 나한테 냄새라도 나는 줄 알았지.”

에이든에게서는 비누 향기가 나고 있으니 그건 아니다. 문제는 엔야 자신과 같은 비누 향기가 나게 되어버린 이 상황인 거다.

엔야는 이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멀어지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 어서 아침아 와라, 아침아 와라, 속으로 반복해 외치면서. 와중에 에이든은 몇 시간 전 금발의 청년과 했던 밤 약속이 뒤늦게 떠올라 아 맞다, 하고 혼잣말을 내었다.

“네?”

“아냐,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니라니 뭐가……, …….” 더 묻기도 애매해졌는지 엔야가 말끝을 흐렸다.

나중에 좀 귀찮아지겠군. 더한 집착을 해오기 전에 끊어내야겠어.

그렇게 내일 할 일을 추가한 에이든은 이 생각도 금방 귀찮아져버렸다.

옆에서 엔야가 가끔 움직이는 소리, 작게 들려오는 숨소리를 듣다 보니 에이든은 어느새 자기도 모르는 사이 깊은 잠에 쑥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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