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엔야

[에이엔야] 지나가던 조달꾼이 철학자 의회 의원을 납치했다 2: 빚에는 이자가 붙는 법이지

별의 궤적 by 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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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엔야]

지나가던 조달꾼이 철학자 의회 의원을 납치했다 2

: 빚에는 이자가 붙는 법이지

어김없이 신체 리듬의 지배에 따라 잠에서 깬 엔야는 뻑뻑한 눈으로 여관 천장을 올려다 보았다. 나무로 지어진 낯선 벽, 그리고 그것보다 훨씬 더 낯선 옆사람의 숨소리.

엔야가 누운 그대로 고개를 옆으로 틀자 아직 꿈 속에 있는 에이든의 얼굴과 마주쳤다. 순간적으로 놀라 바로 시선을 거두려 했지만, 곧 그렇게까지 당황할 필요는 없다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약간 곱슬기 있는 에이든의 검은 머리칼이 머리와 베개 사이에 찌그러지거나 위로 삐죽 솟아난 게 엔야의 시야에 들어왔다.

아주 어렸을 적부터 쭉 자신의 방에서 혼자 잠을 잔 엔야로서, 솔직한 심정으로는 옆자리에 다른 사람이 함께 누워 잠을 자는 일이 이렇게까지 거슬리는 일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천이 스치는 소리도, 숨소리도, 자신이 긴장에 침을 삼키는 소리도 전부 신경이 곤두설 정도로 크게 증폭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덕분에 잠을 깊게 자질 못하니 엔야는 날이 갈 수록 집중력과 효율이 떨어지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래도 목숨을 구해준 사람인데 이 정도쯤은.’

뭐라 자문할 때마다 돌아오는 대답이다. 그렇다. 딱히 큰 문제도 아니거니와—최대한 그렇게 믿는 중이다— 지금 이런 상황에 대해 불만스럽다고 여기는 것도 아니다.

에이든이 아무리 엔야를 향해 ‘샌님’, ‘도련님’이라고 부르면서 공부만 한 기계같다고 말해도.

에이든의 큰 보폭을 엔야가 거의 경보로 뒤쫓아가며 헐떡일 때마다 약한 체력에 대고 놀리는 투로 말해도.

서로 편하게 취침하기 위해 엔야가 여관에 돈을 더 내겠다고 할 때마다 한 방을 쓰면 돈이 절약된다며 굳이, 계속, 2인실을 고집하는 것도.

“하아…….”

머리맡에 풀어 둔 손목시계를 집어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일정상 오늘은 반드시 올드 샬레이안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며 엔야는 내쉬었던 숨을 다시 조용히 들이켰다.

창밖에서 들어오는 어렴풋한 아침 햇살이 에이든의 피부 위에 닿는 것을 보고 있으면서도 역시 현실감이 멀게만 느껴졌다.

***

몰볼에게 죽을 뻔한 목숨을 에이든이 구해주었으니 짧은 시간 동안만이라도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다면 돕겠다며 동행한 지 오늘로 무려 4일 째. 이렇게까지 본래 계획에서 벗어날 일을 자처하다니, 엔야는 스스로도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그러나 정작 엔야가 에이든에게 도움이 된 일은 여관 숙박비와 식비를 제공한 것 외에 많지는 않았다.

임시로 사용할 현학 무기를 구하고 그의 치유사로서 마물 사냥길에 합류했지만, 에이든의 전투 스타일은 철저할 정도로 다른 이의 손길을 필요로 하지 않는 방식이었다.

혼자 싸우더라도 절대로 적에게 무방비한 등을 내어주는 일이 없고, 뒷통수에도 눈이 달린 것마냥 뛰어난 청각으로 적의 기척을 감지해 공격을 흘러넘겼으며, 그가 휘두르는 도끼는 베어넘길 상대의 껍질이 얼마나 질기고 단단한들 상관없이 난장을 만들어 놓았다.

엔야는 그런 에이든의 모습을 보며 잔인하면서도 과격하다고 느꼈다.

역겹게 풍기는 쇠 비린내에 엔야는 손등으로 코를 가렸다. 피 웅덩이가 고인 바닥을 까치발로 피해 걸으며 에이든에게 다가가면, 그는 이미 마물의 사체에서 쓸만한 재료를 뜯어내느라 집중하는 중이었다.

“오늘도 제 치유술은 그다지 필요없었네요.”

“뭘, 그래도 똑똑한 도련님 덕분에 전투중에 직접 치유술을 안 써도 되니까 좋던데. 도끼 휘두르는 데 집중도 잘 되고.”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마물에게서 뜯어낸 재료를 낡아빠진 가죽가방에 대충 쑤셔넣고서 무릎을 털고 일어선 에이든이 몸을 뒤돌렸다. 그 사이 엔야는 에이든의 전신을 눈으로만 위에서 아래로 훑으며 스캔했고, 새로운 생채기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현학 무기를 등 뒤로 되돌렸다. 그리고는 자신의 손목에 둘러진 작은 시계를 들여다 보았다.

오늘은 올드 샬레이안으로 돌아갈 예정이라고, 엔야는 에이든에게도 어제 밤에 미리 말해뒀었다. 그 시간을 확인하고 있는 듯했다.

“당신은 조달꾼 일도 겸하고 있다고 했었죠? 혹시 올드 샬레이안에는 언제쯤 갈 예정이신가요?”

“글쎄. 조만간 들어갈 예정이긴 한데. 왜? 나한테 맡기고 싶은 일 있어?”

“아뇨, 그런건 아니고. 계속 주점만 드나들 게 아니라 이왕이면 저택에서 제대로 된 식사를 대접할까 해서요.”

“네 저택에서 식사를 하자고?”

“네. 그리고 저도 이만 제 자리로 복귀해야 하고요. 링크펄로 의회에 설명해두긴 했지만 자리를 너무 오래 비웠어요.”

굳이 저택에서? 그리 말하려다 말고 에이든이 눈알을 옆으로 굴렸다. 갑자기 귀차니즘이 확 치고 올라왔다.

분위기가 딱딱하게 경직된 저택에 초대받는 건 좀 별론데. 떠들썩한 파티 자리라면 모를까. 하지만 저택에는 보통 훌륭한 쉐프를 고용해 쓴다. 즉 쉽게 경험하기 힘든 진미를 맛 볼 기회이기도 하다.

“그래, 가보지 뭐. 텔레포로 갈 거지?”

“물론이죠.”

“괜찮겠어?”

“네?”

“도련님 체력이 워낙 갓 태어난 초코보 같으시니 자꾸 물어보게 되네.”

‘아니……. 갓 태어난 초코보라고?’

엔야의 눈썹이 예민하게 꿈틀거렸다.

“그런식으로 비아냥거리면서 말하지 말라고 첫날부터 계속 요청하고 있는데요.”

“나는 나름 걱정하는 건데?”

에이든의 이런 태도에 엔야는 점점 신경이 긁히기 시작했다.

방금 불린 ‘갓 태어난 초코보’는 차라리 나은 쪽에 속한다. ‘걸음마 연습하는 아기 커얼’, ‘초코보가 깨고 남긴 하얀 알 껍데기’, ‘빗물에 휩쓸리는 올챙이’ 등 에이든은 엔야의 저질 체력에 대고 이상한 수식어를 갖다 붙이고 있었다.

그야 물론 에이든의 마물 사냥에 협동하는게 엔야에게는 무리가 가는 일정인 건 본인도 부정 못할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만난 지 겨우 며칠밖에 안 된 사람을 이렇게까지 놀려도 되나.

아무리 텔레포 마법이 많은 체력을 필요로 한다지만, 그래도 엔야는 도망치지도 못하는 선박 위에서 배멀미에 시달리느니 차라리 일시적인 에테르 멀미가 나았다.

‘에이든 씨 앞에서는 절대로 에테르 멀미에 시달리는 티를 내지 말아야겠어.’

신체적 반응을 과연 얼마나 거스를 수 있을지 모를 다짐을 하며 엔야는 자신의 머리 위로 후드를 끌어올렸다.

***

올드 샬레이안 에테라이트 앞에 도착하자마자 에테르 멀미 때문에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린 엔야는 에이든에게서 급히 등을 돌려 안색을 숨겼다.

“라스트 스탠드에서 기다려주세요. 의사당에 잠시 다녀올게요.”

“그런 상태로?”

에이든의 목소리는 엔야의 귀에 닿지 못했다. 며칠 새 흙먼지에 더러워진 로브의 끝단을 바라보던 에이든은 일부러 느릿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체력이 저렇게 약해서는. 하지만 비실대는 것 치고는 잘도 내 뒤를 따라다녔네.’

에이든은 라스트 스탠드에 가는 대신 철학자 광장방향으로 이어지는 백색 계단을 느릿하게 밟아 올라가며,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성냥에 붙은 불이 담배 끝으로 옮겨가는 동안 바람이 세게 불어 손으로 불을 감쌌다.

도련님의 목숨을 구해준 보답으로 앞으로 뭘 더 받아낼까. 담배를 문 채 호흡을 들이킨 에이든은 엔야와 지낸 며칠을 다시 떠올렸다.

딱히 더 안 받아내도 상관은 없다만, 이왕 이렇게 된 거 더 다채롭게 뽑아 먹어야겠는데. 공부 벌레라 제대로 놀아본 적도 없는지 놀릴 때마다 사나운 길고양이 마냥 튀어오르는 반응이 재밌었다. 전투 시에는 그 녀석의 현학 기술이 미리 몸을 감싸주니 마물로부터 대미지를 받는다고 해도 보호 마법만 깨질 뿐이고.

뭐, 어차피 저쪽은 바쁜 의원님이니 이번에도 자연스레 관계가 흐지부지 끊어지려나.

하지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계단을 전부 오른 에이든은 철학자 의사당 건물 옆 벤치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 보니 구름이 몰려오는 중이라 날씨가 흐리다. 금방이라도 비나 눈이 내릴 것처럼.

에이든은 자신의 목에 걸린 작은 크리스탈을 꺼내 들어올렸다. 기다란 육각기둥 모양으로 깎인 크리스탈 윗부분이 가느다란 실버와이어로 고정되어 가죽줄에 이어져 있었다.

평소에는 옷 속에 넣고 다녀서 보이지 않았던 목걸이가, 빛을 받아 투명하게 반짝이며 잔잔한 색을 띠었다.

‘왜 그 녀석과 있을 때만 크리스탈 색이 잔잔한 거지.

아니. 잔잔하다기 보다, 이건…….’

기다린 시간은 얼마 길지 않았다. 건물에서 하얀 의원복을 입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나오는 것을 보고, 에이든은 목걸이를 다시 옷 속에 집어넣었다. 그 사이에 섞여있던 엔야는 벤치에 앉아있는 에이든을 발견하자마자 발걸음을 틀어 성큼성큼 다가갔다.

“라스트 스탠드에서 편하게 기다려도 됐었는데 말이에요.”

“윗공기 좀 마시려고, 겸사겸사.”

“막상 마시고 있는 건 담배 연기잖아요. 그리고 철학자 광장 주변은 금연이거든요.”

“그랬어? 그럼 빨리 다 피워서 없애버려야겠네.”

“?”

그래, 이런 표정. 자기 생각대로 되자 에이든이 만족스레 피식 웃었다.

이런 식의 대화를 4일간 했지만 엔야는 일일히 어처구니를 잃은 표정으로 에이든을 바라보다 시선을 거뒀다. 그러면 에이든은 픽 웃으며 최연소 의원님 놀려먹기 재밌다는 얼굴을 하는 것이다.

담배 연기가 어지간히도 싫은건지, 아니면 이런 에이든의 태도가 거슬리는 건지 엔야는 미간을 찌푸리며 허공에 손을 살짝 휘저었다. 다행히 에이든은 정말로 담배를 끝까지 피울 생각이 아니었다. 담뱃불을 비벼서 끄고 꽁초는 도로 곽 안에 집어넣어 쓰레기가 생기지 않게 했다.

‘다행히 지킬 건 지킨다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상한 사람이라는 인상은…… 덕분에 전혀, 조금도, 눈꼽만큼도, 바뀌지 않지만.’

엔야는 자신의 두 팔을 엇갈려 팔짱을 낀 채 에이든을 다시 바라보았다가, 그가 벤치에서 일어서자 시선을 거두고 앞서 계단을 내려갔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푸르른 풀과 나무가 곳곳에 들어선 언덕. 그 길로 이어지는 올드 샬레이안의 뒷편을 걸으며 몇 채의 건물을 지나쳤다. 10분쯤 걸어 올라갔을 때, 엔야는 어느 저택 앞에 멈춰섰고 미리 나와있던 사용인들이 열을 맞춰 서서 허리숙여 인사했다.

에이든은 문득 자신의 부츠를 내려다 보았다. 흙먼지가 묻어 굳은 신발로 들어가도 되나,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 정도로 바닥은 샹들리에의 빛을 반사해 광이 났고 그 위에 깔린 카펫도 무척이나 고급스러워 보였다.

홀을 지나 복도를 걷는 동안에도 벽에 걸린 몇 점의 그림과 장식이 지나갔고, 식당에 들어섰을 때에는 많은 의자가 늘어선 긴 식탁이 바로 시야에 들어왔다.

적당히 앉으라는 엔야의 말에 에이든이 아무 의자에 착석하자, 바로 그 앞을 마주보는 자리에 엔야가 앉았다. 식탁 위를 내려다 본 에이든은 미리 세팅된 식기들을 시선으로 훑었다. 적당한 크기의 스푼, 작은 크기의 스푼, 더 작은 크기의 스푼, 포크, 작은 포크, 나이프 등. 분명히 각각의 용도와 사용순서가 있겠지만 그런 깐깐한 식사예절 같은 건 에이든은 자세히 알지 못했다.

곧 줄줄이 등장하는 요리의 향연에 식탁 위가 순식간에 다양한 색채로 가득 들어찼다.

“잘 먹을게.”

“네.”

덕분에 이런 음식도 먹네, 하며 에이든은 약간 호들갑을 떨 뻔했지만 분위기 때문인지 목구멍 안에 넣어두었다. 그 대신 평소에 사용하던 것과 비슷한 크기의 포크와 나이프를 집어 들었다. 포크로 고기를 붙잡고 나이프로 썰다가 가끔 눈동자를 들어 엔야를 바라보았는데, 가장 바깥에 놓인 식기부터 들어 작은 빵에 잼을 바르고 있었다. 빛을 반사하는 은빛의 식기와 그것을 잡은 하얀 손, 꺾인 손가락과 손목에서 풍겨지는 기품. 지난 며칠간 나무 스푼과 포크를 쥘 때도 비슷한 분위기를 느꼈지만 역시 이런 저택에서 식사하는 모습을 보니 도련님이 맞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게다가 나이프로 고기를 썰 때 평소처럼 힘을 주었다가 깜짝 놀랐다. 질긴살이라고는 하나도 나이프에 걸리지 않는 부드러운 고기였다.

식사 내내 눈만 들어 앞사람을 확인하는 건 엔야도 마찬가지였다. 딱딱한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원하는 만큼 크게 썬 고기를 입 안에 넣는 에이든의 모습은 평소와 비슷해 보이면서도 조금은 달랐다.

편하게 먹고 있는 게 맞나. 하지만 불편했다면 미리 말 했겠지 싶다.

식사를 시작한 지 약 15분 정도 지났을 때, 다시 식당 문이 열리는 소리에 에이든과 엔야가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그 시선 끝에 보인 것은 하얀색의 고급스러운 코트를 두른 훤칠한 남성이었다. 비에라족이기에 나이를 바로 가늠할 수는 없었지만 엔야가 바로 의자에서 일어선 것을 보아 윗사람임에는 분명했다.

“……아버지.”

아버지. 그렇게 불린 남자는 무안할 정도로 엔야의 인사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에이든은 문을 등지고 앉아 있었기에 의자에 앉은 채로 상체를 반쯤 돌려서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에이든의 금빛 눈동자와 그 남자의 차디 찬 눈동자가 마주쳤다. 얼음송곳 같은 시선이 예의라고는 한 점도 느껴지지 않는 눈으로 에이든을 위에서 아래로 기분나쁘게 훑었다.

지저분한 옷차림. 위험한 일을 많이 해 여기저기 흉터가 남은 손과 팔뚝. 정리되지 않고 아무렇게나 뻗친 칠흑색의 머리칼. 저택의 하얀 바닥 위를 더럽히는 가죽장화.

그렇게 몇 초도 안되어서 엔야의 아버지는 에이든의 평가를 끝마쳤다. 그리고 그 평가의 결과가 얼굴에 그대로 쓰여있는 것이 에이든의 눈에도 여실히 보였다.

더러운 벌레를 보는 듯한 날 선 시선.

‘뭐, 그렇게 생각하고 있겠지. 잘나셨네.’

에이든은 그 시선을 신경쓰지 않고 식사를 계속하려고 했지만, 오히려 엔야가 아버지의 시선을 불편해하며 식기를 쥔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링크펄로 말씀드렸던, 저를 구해준 사람이에요.”

“알고 있다. 적당히 돈만 쥐어주고 끝내면 될 것을, 유난이군.”

“……이 사람이 아니었다면 저는 죽은 목숨이었다고요.” 엔야가 목에 좀 더 힘을 주어 말했다.

“그래. 이런 요리는 처음이실텐데 입맛에 안맞을까 걱정이군. 그래도 냄새나는 주점에서 파는 가축의 죽 같은 음식과는 비교할 수 없는 최고급 요리이니 즐기다 가시길.”

“아버지……!”

엔야의 아버지는 그대로 식당을 나가버렸다.

아들이 의원인데 아버지가 이따위라니? 에이든은 거리낌없이 남을 모욕하는 저 남자의 언행을 듣고 조금 황당해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장 맞설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저런 작자들은 어차피 자기 좋을 대로 생각하니 귀찮아질 바에야 그대로 놔두는 게 낫다.

하지만 이미 입맛이 뚝 떨어져버린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불쾌하게 만들어 죄송합니다.”

짧은 정적을 깬 엔야의 사과에서 미세한 떨림이 섞였다. 아버지가 저택에 돌아오는 시간을 철저히 피해서 일정을 계산했는데도 생긴 최악의 변수에 엔야는 순간 두통이 일었다.

“아니, 뭐. 크게 신경 안쓰니까 너도 신경쓰지 마.”

“하지만,”

“그래도 그 기계 같던 도련님이 대신 화내주고 걱정까지 해주다니. 누가 내 걱정 해주는 거 엄청 오래간만이라서 기분 좋네?”

방금 전까지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던 엔야의 눈이 확 커졌다.

“갑자기 그게 무슨……. 걱정이라기 보다는, 아버지의 무례에 대신 사과드린 것 뿐이에요.”

“아니. 내 기분이 상했을까봐 걱정돼서 ‘아버지~!’ 하고 화내주려던 거 아니었어? 내가 장난 걸 때 화내던 목소리와는 많이 달라서 놀랐는데.”

“이런 상황에서 또 놀리는 건가요?”

“그래서, 아니야?”

“제가 에이든 씨 걱정을 왜 합니까? 저보다 10살이나 연상인 어른이면서, 틈만 나면 저를 놀려대고 어린애 취급하는데.”

“진짜 아니야……?”

에이든이 실망한 척하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어깨뿐만이 아니다. 귀와 눈썹까지도 불쌍하게 축 처진 모습을 보이자 엔야는 그 연기에 깜빡 속아버리고 말았다. 안절부절 못하며 뭐라 대답해야 좋을지 빠르게 답을 찾아 헤맸다.

“……아니라고요! 아니, 완전히 아닌 건 아니지만, 아니라고요…….”

바보같은 대답만 흘러나왔다.

“풉……. 뭐야, 그게. 그럼 내 걱정한 거 맞는 거지?”

“……몰라요. 마음대로 생각해요.”

‘굳어진 분위기를 풀어주려고 일부러 이러는 건가. ……아냐, 설마 그럴 리가. 저 사람은 며칠 내내 이런 식으로 나를 놀려댔는데.’

능글거리며 웃는 에이든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엔야는 괜한 ‘걱정’을 했다는 생각에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덕분에 분위기는 조금 전환되었다. 아버지가 무례하게 던지고 간 불쾌한 감정 따위, 내것으로 만들지 않으리라. 엔야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에서 완전히 일어섰다.

***

호화로운 식사를 대접하는 대신 몇 년을 놀고 먹을 수 있을 정도의 값비싼 보석은 어떠냐고 에이든에게 물었지만, 거절됐다.

“그거 말고 다른 걸로 받고 싶은데.”

“사실 저도 돈이나 보석으로 때울 생각은 없었어요. 혹시나 원하실까 물어보았을 뿐이지.”

솔직히 저택에서의 식사가 성공적으로 끝나면 엔야는 더 이상 에이든과 만날 일이 거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식사는 성공적이지도 못했고 오히려 에이든의 입맛을 뚝 떨어지게 만들고 말았다.

“그러면…… 저는 다시 의사당에 가봐야 해서, 오늘은 이만 헤어지죠. 다음에 필요한 일이 생기면 철학자 의회를 통해 추가로 요청해주세요. 요청사항이 타당하다고 판단되면 긍정적으로 고려해 볼 테니까요.”

“이제 갈 길 가자고?”

“일단은요. 저도 더 이상 자리를 비울 수 없으니까요.”

“빚이라는 건 두면 둘 수록 이자가 붙는 법인데 말이지.”

“네?”

엔야는 황당함에 눈이 커져선 에이든을 올려다 보았다. 늘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농담인지 알 수 없었음에도, 이번만큼은 아무리 봐도 에이든이 장난으로 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링크펄 교환도 없이 의회에 말하라니. 빚 안 갚고 어물쩍 넘어가겠다는 건 아니죠, 도련님?”

“네? 아니, 그러니까 저도 제 할 일이 있고, 연락은 의회를 통해서도 충분히,”

“그건 일반 샬레이안 시민들을 대하는 태도와 별반 다르지 않잖아?”

“………하……?”

이제는 어이가 없어서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인간 불신인가? 아니면 또 장난치는 건가? 내가 빚도 안 갚고 모른 체 할 것처럼 보이나? 요 며칠간 내가 신뢰를 주지 못했나? 그렇게나 힘들게 뒤따라다니면서 치유마법을 걸어주었는데? 아니, 워낙 혼자서도 잘 싸우는 타입이라 많은 치유술이 필요하진 않았었지만, 어쨌든 도움이 되긴 했잖아? 튄 적 없잖아? 계속 장난치고 어린애 취급하고 놀린 건 저쪽이잖아? 설마 며칠 내내 여관에서 굳이 2인실 한 방을 함께 사용하길 고집한 것도 내가 도망칠까봐여서? 난 샬레이안 의원인데도? 빚을 그대로 두면 이자가 늘어나? 요 며칠간 계속 따라다녔더니 나를 꼬마친구 인형쯤으로 보는 거 아니야? 지금 이 사람은 또 왜 슬슬 입꼬리가 올라가는 건데? 내가 고민하고 있는 게 웃기신가? 그렇게 웃지마, 역시 놀리는 거지? 이 아저씨야.

진짜 이 사람 뭐야?

“알았어, 알았다고~. 속으로 그만 욕해. 앞으로는 의회에 이야기할 테니까.”

“하아, 다행이다.”

“다행이야?”

“아, ‘저도 모르게’ 속 마음이 입 밖으로 튀어 나와버렸네요.”

“아이고. 제가 눈치껏 듣지 말았어야 했네요?”

엔야는 에이든에게서 휙 뒤돌아 섰다. 에이든이 뒤쫓아오는 발걸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게 오히려 신경쓰여서 몇 번 뒤돌아 볼 뻔 했지만, 한편으로는 저 어린애 취급하거나 놀리는 소리를 듣지 않아도 된다니 이제야 조용히 제자리로 돌아가 자신의 할 일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더니 마음이 가벼워지고 발걸음도 빨라졌다.

에이든의 시야에서 엔야의 등이 점점 더 빠르게 멀어졌다.

그래, 의회에 말하는 게 낫지. 개인적인 일로 연락해봤자 바쁘신 의원님 시간 쪼개서 어중간하게 쓰는 것도 별로 마음에 안 내키고. 그럴 바에는 의회에 물어다 줄 정도의 내용으로 의원님을 불러내는 게 낫지. 정당하게 의원님 시간 쓰기. 좋네.

그래서, 얼마나 남았는지도 모를 이 빚을 어떻게 더 갚으라고 할까.

크리스탈 목걸이를 옷 위로 쥐며 에이든은 엔야가 완전히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다 반대 방향으로 발길을 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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