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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료

82화

샛길 둘

연구실에서의 생활은 편안했다.

다치고 기억을 잃은 불쌍한 아이. 동정을 사기 쉬운 포지션이었기에 연구원들은 모두 제노를 상냥하게 대했다. 제노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언제나 밝은 얼굴로 틈틈이 연구원들을 보조하며 좋은 인상을 남기려 노력했다. 보조라고 해도, 어린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커피를 타오는 등의 잔심부름뿐이었지만 말이다.

며칠 뒤, 경찰 두 명이 연구실에 방문했다. 저번에 만났던 경찰도 있었다.

“안녕, 우리 또 보는구나?”

“안녕하세요. 커피랑 차 중에 어떤 게 좋으세요?”

“오늘은 잠깐만 들렀다 갈 거라 괜찮아.”

“그래, 제노야. 어른들 얘기하게 잠시 비켜주겠니?”

오 박사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제노를 응접실에서 내보냈다. 제노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심정으로 복도로 향했다. 오 박사와 경찰들이 자신의 처우에 대해 어떤 결론을 내렸을지 궁금했으나, 그는 눈치껏 그들의 대화를 모르는 체했다.

복도에 쪼그려 앉아 심호흡을 하며 울렁이는 마음을 진정시키던 제노는 응접실에서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에 황급히 소매로 눈가를 비볐다. 문이 열리고, 안에서 경찰들이 오 박사와 함께 나왔다.

“응? 여기서 계속 기다린 거니?”

“아, 저기, 그게… 저번에 감사 인사를 제대로 못 드린 것 같아서요.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야. 이게 우리 일인걸.”

경찰은 제노가 급하게 짜낸 변명을 웃으며 받아주었다. 제노의 머리를 쓰다듬은 그가 떠나며 말했다.

“그럼, 앞으로 건강하게 잘 지내렴.”

웬만하면 언니랑 마주치는 일은 없도록 하고. 마지막 말은 농담이라는 듯 그가 웃으며 제노에게 손을 흔들었다. 제노도 오른손을 들어 마주 흔들어 보였다.

난 망했구나.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

*

그리고 다시 일주일. 박사가 그에게 무어라 얘길 꺼내진 않았지만, 제노는 혼자 보육원에 가기까지 남은 기간을 추측하며 피 말리는 시간을 보냈다. 애가 점점 말라간다며 연구원들이 사탕이며 초콜릿 같은 간식을 한가득 주었지만 뭘 입에 댈 기분이 아니었기에 하나도 손대지 않고 전부 냉장고 속에 넣었다. 쌓여가는 초콜릿만큼 마음속은 불안으로 채워졌다. 자다가 새벽에 깨는 일도 종종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오 박사가 함께 외출할 것을 권했다. 사실상 선택지는 없었기에 제노는 고개를 끄덕였다. 박사는 평소 살가죽처럼 입고 다니던 가운을 벗고 평범한 외출복 차림을 한 채였다. 그거 벗을 수도 있는 거였군요.

박사가 제노와 함께 향한 곳은 백화점이었다. 태초마을을 벗어나 제법 큰 도시까지 와야 했다. 제노가 조심스레 차에서 내리자 백화점의 입구 앞에서 기다리던 사람이 다가왔다.

“안녕? 네가 제노구나?”

“내 손녀 남나리란다.”

반갑게 손을 내미는 여자는 자신과 나이 차이가 꽤 있어 보였다. 밝은색의 긴 머리, 오 박사의 손녀. 제노는 곧바로 그가 그린의 누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조심스럽게 손을 마주 잡았다. 남나리는 제노의 손을 잡은 채로 백화점 안으로 들어갔다. 남나리와 오 박사가 제노에게 이런저런 옷을 대어볼 때까지도 제노는 두 사람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돌아오는 차 안. 뒷좌석에 앉은 제노는 남나리가 고른 원피스를 입은 상태였다. 전체적으로 짙푸른 원단에, 흰색 칼라로 포인트를 주었다. 치마 끝에 달린 레이스가 귀여움을 더했다. 제노의 옆자리는 쇼핑백으로 가득했다. 안은 외출복뿐 아니라 잠옷이나 속옷, 양말 등으로 채워져 있었다. 보육원에 보내기 전 마지막 선물인가 보다. 제노의 그런 생각을 깬 것은 남나리의 말이었다.

“옷이 모자라진 않을까?”

“에이, 그럼 내가 입던 거 주면 되죠~ 동생한테 옷 물려줘 보는 게 꿈이었는데, 제노 같은 여동생이 생겨서 소원 성취했네요! 그린은 죽어도 안 입는다고 고집을 부려서.”

툴툴거리는 남나리를 가만 바라보던 제노가 겨우 입을 열었다.

“저기… 저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응? 할아버지, 제노한테 설명 안 해줬어요?”

“어이쿠. 애 데려올 준비 하느라 바빠서 제일 중요한 걸 까먹었구나!”

남나리가 장난스레 오 박사를 타박했다. 상체를 뒤로 돌려 제노와 마주한 남나리가 간단하게 말했다. 우리가 너의 보호자가 되기로 했다고, 이제부터 가족이라고.

제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미안해,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지? 네가 원치 않는다면 지금이라도… 어머, 할아버지, 휴지 어딨어요?”

*

제노는 혹시 싫어서 우는 거냐는 남나리의 질문에 코맹맹이 소리로 몇 번이고 아니라고 답해야 했다. 다행히도 차가 멈춰 설 때쯤 눈물은 그쳤고, 눈가가 조금 발개진 소녀가 남아있을 뿐이었다.

제노는 오 박사, 그리고 남나리와 함께 차에서 내렸다. 제노가 손 쓸 틈도 없이 짐은 두 사람이 모두 가져갔다. 발이 땅에 닿자마자 눈에 들어온 것은 제법 커다란 이층 주택이었다. 하얀 벽에 붉은색 지붕이 인상적인 집. 고개를 위로 젖히고 집을 바라보는 제노에게로 남나리가 다가왔다.

“이제 여기에서 함께 지낼 거야.”

다시 내밀어진 손. 가늘고 흰 손가락 위로 조심스럽게 손을 겹친다. 제노를 향해 미소 지어 보인 남나리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제노, 가족이 한 명 더 있단다. 지금 집에서 널 기다리고 있어.”

알고 있다. 제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나리가 계속해서 말했다.

“그린이라고, 네 또래의 남자아이인데, 그게, 음… 조금 짓궂긴 하지만 나쁜 애는 아니니까.”

자존심도 승부욕도 강한 라이벌. 어느 분야에서도 자기가 최고이지 않으면 안 되는 자만심 강한 사람. 그래도 나이를 먹으면서 좀 어른스러워졌던가.

부디 사이좋게 지내달라는 남나리의 말에 제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린이 괴롭히면 곧장 말하라고, 자신이 따끔하게 혼쭐을 내주겠다는 말에는 조금 웃었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소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남나리보다 조금 더 진한 머리색. 제노는 현관에 삐딱하게 서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와 눈을 마주했다.

“뭐야, 이 못난이는.”

“설마 얘가 걔야? 오늘부터 우리 집에서 지낸다는?”

뭐야, 이 싸가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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