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CP

흩날리는 바람에, 흩어지는 바람에 上

브금으로오타쿠노래그만써. 네! 클래식 쓸게요.

BGM / 가브리엘 포레 - 시실리안느 op. 78

지상화를 보러 갈 거야.

어느 날 모란은 그렇게 말하곤 니아에게 함께 가고 싶다고 말했다. 평소 그가 니아의 손에 이끌려 이리저리 다닌 적은 있었지만 그가 어딜 같이 가자고 말한 건 니아의 기억에서는 거의 처음이라, 그는 낯선 기분이었지만 흔쾌히 알았다고 했다.

터프마을로 향하는 날 모란은 늘 입던 후드티를 푹 눌러쓰고 이브이 가방을 멨지만 부츠 대신 운동화를, 투명 치마 대신 운동복 바지를 입고 있었다. 터프마을엔 철도도 없어서 내려서 걸어가야 하잖아. 그리고 지상화 보러 올라가는 거 힘드니까. 평소 그의 체력을 생각하면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지만 니아는 알 수 없는 기시감에 그를 바라보았다. 왜 갑자기… 네가 팔데아에서 다시 여기로 돌아왔을 때가 생각나는 걸까?

터프마을로 향하는 동안 모란은 아무 말이 없었다. 오늘 바람이 많이 부네. 비가 올 것 같진 않은데. 니아가 애써 뭐라도 말해보려 시시콜콜한 날씨 이야기를 꺼내도 소용없었다. 한번 하늘을 바라보곤 고개를 작게 끄덕이는 게 다였다. 평소와 같은 표정, 같은 걸음걸이, 늘 짓는 표정과 익숙한 말투까지. 갑자기 나가자고 말을 꺼낸 것 빼곤 아는 그대로의 모란이었다.

모란은 중간에 쉬자고 하거나 힘든 기색 없이 척척 걸어나갔다. 지금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영원히 멈춰설 것만 같은 사람의 걸음 같기도 했다. 그리 높지 않은 언덕임에도 불구하고 지상화를 보러 올라갈 땐 숨이 차는 티가 나기도 했지만 그래도 꿋꿋이 걸어 지상화가 있는 곳까지 도달했다.

바람이 불어 지상화 주변의 풀이 흔들리고 있었다. 지상화 바로 앞에서 모란은 몸을 한껏 내밀고 서서 흔들림 없는 눈으로 니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 팔데아로 안 돌아갈 거야.”

“뭐라고?”

“말 그대로야. 아카데미로 다시 갈 생각 없다고.”

“아… 그래?”

갑작스러운 말에 니아는 조금 혼란스러웠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하고 싶으면 그렇게 해. 그가 아카데미에서 겪은 일을 생각하면 납득하지 못할 건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본인이 납득하고 말고 할 일도 아니라는 건 그도 잘 알고 있었다.

니아는 평소 모란이 하는 일에 대해 매번 걸고넘어지는 언니는 아니었다. 나 차 말고 콜라 마실래. 마음대로 해. 새벽 한 시인데 안 자? 응. 게임할 거야. 그래? 알아서 하다 자. 그런 식이었다. 물론 아닐 때도 있었지만 그럴 때는 보통 모란도 고집을 부리다 결국 한 발 물러섰다. 도저히 의견 일치가 안 되면 모란은 그렇게 했다. 당장은 인정하되 고집을 아예 꺾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이유를 물어보고 싶었다. 물어보는 것 자체가 어쩌면 큰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처음 팔데아의 아카데미로 가겠다고 말했을 때 미래에 대한 기대감으로 빛나던 모란의 눈을 잊을 수 없어서였다. 힘든 일만큼 분명 좋은 일도 있었을 텐데… 니아는 그렇게 생각하다 고개를 가로질렀다. 그때 어땠을 거라고 자신이 섣불리 단정지을 수는 없었다.

역시 그래도 한번 물어는 봐야겠어. 왜인지 그냥 지나치면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았다. 잠깐의 깊은 고민 끝에 니아의 입에서 나온 말은 단순했다.

“왜?”

한 글자. 그 한 글자에 모란은 지상화가 있는 방향으로 기대고 있던 몸을 아예 니아가 있는 쪽으로 돌리며 말했다.

“이유가 필요해?”

“뭐라고?”

“뭐라니? 난 뭐라 할 말이 없어. 아무것도.”

“아무 이유 없이 그런 중요한 선택을…”

“할 수도 있지.”

왜? 이번에는 모란이 니아에게 물었다. 자신의 말에 어딘가 이상한 부분이라도 있냐는 듯 모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모습은 화나 보인 것 같지도 않았고, 되묻는 얼굴은 한 치의 악의도 없이 순수해서 니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미안. 굳이 이런 말 하려고 여기까지 끌고 와서. 근데 말하려니 집은 너무 답답하고, 경치 좋고 탁 트인 곳에서 이야기하고 싶었어. 언니한테 제일 먼저… 모란은 방금 자신의 태도가 차갑다고 느꼈을 수도 있겠다 생각했는지 뭐라 계속 말을 덧붙였지만 니아에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이유가 필요해? 할 말이 없어. 그 두 문장만이 귓가에서 계속 맴돌았다.

사람은 때로 거창한 이유 없이 무언가를 선택하고 무언가를 포기하고 무언가에 도전한다. 많은 사람이 왜 그랬어? 를 긍정적인 혹은 부정적인 의미로 물어보지만 모두가 거기에 그럴싸한 대답을 할 수는 없다. 그냥, 멋있어서요. 친구가 하니까요. 재밌어 보여서요. 그때 왜인지 그냥 그러고 싶었어요. 그런 식의 대답도 돌아온다. 그걸 납득하지 않는대도 그렇구나, 라고 대답할 수는 있다. 그러나 니아는 그럴 수 없었다. 왜? 그에게도 별 이유는 없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한대도 어쩔 건데?”

“…….”

“내 마음이야.”

대답하지 않은 말에 대한 대답조차도 정말 평소 그대로의 모란다웠다. 그래, 넌 항상 이런 식이었지. 항상 막무가내에 고집에, 자기가 우선이고 제멋대로에, 투정부리고 떼쓰고… 스타단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때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쪽이 비일상이다. 일상은 이곳이다. 지금 나와 네가 서 있는 여기. 넌 다시 완전히 일상으로 되돌아가겠다 말했다. 그저 그뿐이다.

그닥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하늘에 부는 바람 때문에 후드를 푹 뒤집어쓴 모란의 얼굴에 반 정도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 순간 니아는 그의 얼굴에서 완전한 후련함과 후회를 동시에 읽었다. 다시 아카데미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건 더 이상 팔데아에서 있었던 모든 일에 대해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겠다는 것, 그리고 책임을 지지 않는 대신 소중한 인연을 포기하겠다는 것. 그는 해방을 원했고 결국 해방되었다. 책임감과 고통에 맞서지 않고 도망치는 걸로.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대도 모란에게는 낙원이 필요한 게 아니었다. 낙원은 이미 만들었다. 이제는 더 이상 자신에게 그곳은 낙원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낙원이 곧 모두의 안식처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인간은 천국이 좋고 지옥은 끔찍하다 말하지만 천사에게는 천국이 낙원이고 악마에게는 지옥이 낙원이다. 그는 가라르인이니 가라르지방이 낙원이다. 그걸로 끝이다.

모란은 바람에 흩날리는 후드를 붙잡았다. 정면으로 바람을 맞고 싶지 않았다.

“이유가 아니라 그냥 내 얘기라면 할 수 있어.”

“무슨 이야기?”

“난 지쳤어.”

그건 이유가 아니고 상태였다. 사실은 둘 다 될 수 있었지만 모란은 이유라 생각하고 싶진 않았다.

“지쳤어, 너무 힘들어, 모든 게 버겁다고.”

“모란아….”

“여기 있다고 모든 게 좋아질 거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야.”

누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모란은 눈을 꼭 감고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방금 한 말을 온몸으로 증명해보이려는 마냥. 그러곤 다시 니아를 바라봤다. 그의 눈동자는 초점이 없거나 공허해 보이기는커녕 빛나고 있었다. 그 눈빛이 반짝이는 별보다는 자신을 불살라 타들어가는 태양 같아 니아는 잠깐 고개를 돌려 지상화를 바라보았다. 하늘이 흐리고, 바람이 계속 부는데도 이글거리는 태양빛 때문인지 계속 그를 마주하고 있자니 눈이 시려워졌다.

“근데 여기엔 날 무겁게 하는 게 없어. 내가 질 짐도 없고, 안 돌아가면 난 더 이상 보스도 뭣도 아니게 돼. 그럼 난 모란이야.”

“그걸로 괜찮아?”

“그래. 하나로 충분해. 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어. 질 수 있는 책임도 다 졌어. 그러니까 이젠 다 내려놓고 싶어.”

확실히 이름이 셋에서 하나가 되면 덜 무거울 거 같기도 하다. 원래 사람은 이름이 늘어날수록 책임질 게 많아지잖아. 생각해보면 학생 때부터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모란은 그렇게 했다. 아카데미 재학생에 모란이라는 이름에, 가명과 보스의 직함을 또 달았다. 그래서인지 더, 일찍이 책임에 대해 알았으니 일찍이 내려놓고 싶었다. 어린아이치곤 과한 책임감을 졌다. 그러니까 아예 모든 것을 떨쳐내고 싶다 말한대도 그 말에 대해 누구라도 덧붙일 건 없다. 그게 설령 그의 소중한 다른 친구들이라도.

어린아이의 고집이다. 그러나 그는 아직 어른이 아니며, 그는 얼마인지 가늠하기도 힘든 긴 시간 동안 너무 많이 의젓했다.

“내려놓으면 그 다음은?”

“학교는 다시 다닐 거야. 여기 있는 트레이너스쿨을 알아보고 있어. …전에 다니던 아카데미하고 규모는 비교도 안 되지만.”

“그리고?”

“공부도 다시 할 거야. 힘들겠지만 친구도 다시 사귀려고 노력할 거야.”

그냥 다 버리고 여기서 새로 시작하는 것처럼. 모란의 말은 단단하고 시렸다. 시린 동시에 상쾌했다. 상쾌하면서 후련하고 후련하면서 답답했다. 절대 겹쳐질 수 없는 듯한 두 개의 감정이 여러 번 겹쳐지고 나서야 모란은 바람 때문에 흔들리던 지상화가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어쩌면 바람 때문이 아닐지도 몰랐다.

지상화가 제대로 보이자 그의 눈에 문득 다른 게 들어왔다. 지상화가 보이는 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돌헨진과 요씽리스가 신나게 뛰어다니는 그림이 그려진 스탠드가 있었다. 돌헨진… 팔데아의 체육관 관장이 쓴다고 어렴풋이 들어본 거 같은데. 무슨 마을인지 누구인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렇게 모든 게 흐릿해져 가는 걸까. 그는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모호하게, 맴도는 잔바람처럼 남아 자신을 괴롭히는 게 아니라.

모란은 스탠드를 가리키며 니아에게 한번 보라는 듯 손짓했다. 눈은 어느새 그대로의 모란으로 돌아와 있었다. 진지한 이야기를 하고 나서 다시 시작하겠다 말했으니 거창한 다짐은 이제 끝이다. 이제는 늘 하던 대로 하면 된다. 평소처럼. 언니에게 투정부리고 내 마음이거든. 을 반복하는 아이처럼.

“뭐, 뭐야? 뜬금없이. 저건 왜?”

“팔데아에도 저런 스탠드 있다?”

“그래? 가봤어? 사진은 찍었고?”

“응. 마리네이드마을이라는 곳에 있는데 무려 돌핀맨이야. 아, 알지? 내가 좋아하는 포켓몬인 건? 인터넷에서 보자마자 바로 달려갔어. 스탠드만 놓고 사진 찍기도 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찍어달라 부탁도 하고, …많이 어려웠지만. 내가 찍힌 사진은 안 보여줬지만 나중에 스타단 친구들에게 자랑도 했어. 그리고, 그리고… 즐거웠어.”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는데 순간 정적이 일었다. 그렇네. 즐거웠네 나. 아무도 그때 즐거웠냐고 물어보지 않았음에도 그는 혼자 말하고 혼자 불현듯 깨닫고 이내 허심탄회하게 웃었다. 그는 계속해서 미소짓고 있었지만 니아는 웃을 수 없었다. 즐거웠지만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그 간극에 얼마나 많은 무게가 끼어들었을지 그는 감히 가늠도 되지 않았다.

모란은 한번 더 스탠드를 바라보곤 다시 지상화 쪽으로 걸어 난간에 몸을 기댔다. 푹 뒤집어쓴 후드가 바람에 휘날렸다. 니아는 말없이 그의 옆에 섰다. 난간에 기대 선 그는 어딘가 위태로워 보였다. 어디라도 좋으니 마음에 기댈 곳이 필요해서 대신 난간에 몸을 기댄 것 같기도 했다.

지상화 진짜 예쁘다. 모란이 말했다. 공백을 채우기 힘들어 어떻게든 하는 빈말이 아닌 순수한 감탄이었다. 그렇네. 니아도 대답하고 지상화 쪽을 바라보았다. 근데 저 그림은 뭐였지, 다이맥스였나? 모르겠어. 애초에 네가 끌고 왔잖아. 아, 그랬지, 참… 늘상 하는 대화가 이어졌다. 바람을 한껏 맞고 있는 모란은 평온하고 편안해 보였다. 위태롭게 기대 선 주제에 표정은 밝았다. 팔데아에선 항상 그렇게 살아갔을까? 위태로운데 괜찮은 척 하면서?

“언니.”

“응?”

“나 다시 열심히 해볼게. 여기에서, 아까 말한 것처럼.”

“그래… 그래도 지치면 좀 쉬어가야 돼.”

“응. 그럴게. 쉬어가는 건 걱정하지 마. 집이 있잖아.”

집이라면 쉬고 싶을 때 언제든 쉴 수 있으니까. 모란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니아는 선뜻 답할 수 없었다. 그래. 네 집은 언제나 여기에 있어, 라고.

아까보다 더 거센 바람이 불어왔다. 모란은 여전히 바람을 맞기 싫어 후드를 푹 뒤집어쓴 채였지만 시선만은 꿋꿋하게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람이 불어 자신을 흔들리게 하는 건 싫지만 아예 바람으로부터 등을 돌려버리기도 싫은 듯했다. 둘은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 후드를 쓰고 있는데도 머리카락이 휘날릴 정도로 바람이 세차게 불 때쯤 모란이 다시 입을 열었다.

“결정하고 나서 바로 말할까 조금 고민했는데 이렇게 말하니까 한결 나아졌어.”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다.”

“응. 역시 보스고 스타단이고 다 내려놓으니까 마음이 편하-”

순간 흩날리는 바람에 후드티가 흩어지는 바람에 후드가 벗겨지고 모란의 얼굴이 완전히 드러났다.

후드는 답답해하다 그제서야 자유를 찾았다는 듯 일정함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이 되는 대로 이리저리 흩날렸다. 후드가 흩날려 앞이 똑바로 보일 때마다 모란의 바람도 함께 흩어진다. 애초에 자신이 진정으로 바랐던 건 뭐였는지, 지금 흩날리고 있는 게 자신이 맞는지 이제 그는 기억도 나지 않았다. 기억이 나지 않는 건지 기억하기 싫은 건지조차도 알 수 없었다.

그냥 이 바람에 곧 미련으로 남을 자신의 바람도 함께 흩어져가길 바랄 뿐이었다.

“모란아!”

“어…?”

니아가 그대로 중심을 잃을 뻔한 모란을 붙잡았다. 금방이라도 바람에 흩날려 몸이 죄다 흩어질 것 같이 보였는지 니아는 그를 붙잡다 못해 어깨를 꽉 쥐고 있었다. 그의 눈이 흔들렸다. 모란의 눈은 미동도 없었다. 토네이도가 아닌 이상 사람은 바람에 날아가지 않는다. 그걸 알면서도 니아는 그를 붙들고 싶었다. 바람이 너무 강한 탓에 그가 날아갈 것 같았다. 너무 강하게 바란 탓에 그가 어디로든 날아버릴 것 같았다.

모란의 눈에서도 무언가 흩날리고 있었다. 그게 곧 흩어져서 아무것도 아닌 게 될 거란 걸 알고 있음에도 니아는 말을 꺼냈다.

“너 울어.”

“울고 있다고? 내가?”

“그래. 모르겠어?”

“아, 갑자기 바람이 얼굴에 확 들이쳐서 눈이 시렸나봐. …이래서 정면으로 바람을 맞고 싶지 않다니까.”

모란은 옷으로 안경을 닦고 나서 눈을 비볐다. 그 손을 니아가 탁 낚아챘다. 닦지 마. 병균 들어가. 차라리 그냥 흘려보내든가 세수라도 해. …여기선 못하지만. 진짜 바람 때문에 우는 건지 아닌지는 묻지 않았다. 비로소 후련해져서 우는 건지, 도망쳤다는 데서 나오는 부채감 때문인지, 말 못할 슬픔 때문인지는 물어도 대답할 리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니아는 모란의 손을 놓고 그를 말없이 끌어안았다. 모란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안겨있었다. 그는 더 이상 울지 않았다. 물론 웃지도 않았다. 모든 감정이 바람에 흩날려서 흩어졌다는 듯 그는 입을 꾹 다물고 가만히 제자리에 서 있었다. 손만큼은 니아의 옷을 꽉 준 채였다.

몇 분 후 모란은 니아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언니, 그만 돌아가자. 계속 이러고 서 있다간 진짜 바람에 날아갈 거 같으니까. 니아는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마지막으로 흩날리는 풀들 사이 지상화를 바라보았다. 바람이 도저히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자신도 모르는 새에 휩쓸려서 후회하기 전에 돌아가는 게 맞았다.

다음에 또 지상화를 보러 갈까 해. 그래. 그땐 바람이 좀 덜 불었으면 좋겠네. 둘은 그렇게 이야기하며 나란히 걸었다. 집까지 돌아가는 길은 시리지도 힘들지도 않았다.

다만 아주 멀게, 멀게 느껴질 뿐이었다.

*

얼마 뒤 모란은 친구들에게 편지를 보내기로 했다. 집 주소는 해킹으로 알아냈다. 그들을 마주보기 위해 한 마지막 해킹이었다.

자신보다 컴퓨터에 해박한 사람은 없겠지만, 혹시 정체가 들킬 여지가 있을까 이메일로는 보내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화면 속 텍스트보다는 직접 쓴 글씨가 그나마 나을 것 같았다. 결국 도망쳤으면서 이제 와서 마음을 전한다는 게 우습기도 했다. 그러나 진심을 전하지 않는다는 건 애초에 그에게 존재하지도 않는 선택지였다.

편지를 쓰며 그는 글씨를 평소보다 더욱 휘날리듯 적었다. 편지지도 편지를 적을 펜도 최대한 무난한 것으로 골랐다. 무의식중에 자주 쓰던 어휘가 드러날까 머리를 굴리기도 했다. 아직 자신의 방이 기숙사에서 빠지지 않았기에 무사히 자신의 집 주소 대신 기숙사 주소를 적을 수 있었다. 아니라면 결국 이메일을 쓸 수밖에 없었겠지…. 그는 가빈에게 마음속으로 감사를 표했다.

편지에 자신에 관한 구체적인 정보와 왜 갑자기 도망갔는지에 대한 내용은 아무것도 적지 않았다. 단지 자신은 지금 지쳐있는 상태고 휴식을 위해 고향에 있음을, 그리고 다시 그리로는 돌아가지 않을 것임을 확실하게 말해두었다. 거짓말은 적지 않았다. 너희가 처벌받길 원치 않았어. 그 말만을 뺐을 뿐이었다.

감사와 미안함에 대한 말들도 빼곡히 적었다. 최대한 감정을 빼고 적으려고 했던 마음과는 달리 어떻게 써도 형식적이고 틀에 박힌 건조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적어야 조금 덜 상처받을 텐데. 조금 덜 그리워할 텐데.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제대로 안 적힌다고 편지를 보내지 않을 수는 없었기에 그는 어떻게든 끝까지 펜을 잡았다.

친구들과의 연락처 차단은 풀었지만 대신 그는 전화번호를 바꾸었다. 죄송합니다. 그는 다음에 자신의 번호를 쓰게 될 불운한 사람에게 미리 사과의 말을 전했다. 몇 명이랑 되어 있던 게임 친구 추가는 일방적으로 해지한 뒤 닉네임을 바꾸었다. 바꾼 닉네임은 게임을 시작할 때 나타나는 랜덤 닉네임 중 하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친구들과 함께했다는 모든 기록이나 스타 대작전을 준비하며 모은 자료같이 형태가 남아있는 추억은 컴퓨터에 전부 백업해두었다. 어리석고 이기적인 짓이었다. 친구들은 자신을 기억하지 않길 바라면서 자신은 그들을 영원히 기억하려 하다니. 그래도 상관없었다. 그는 더 이상 진 보스도 카시오페아도 아니었기에 어리석고 이기적이게 행동해도 아무 문제없었다.

정체를 아예 숨겨버려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게 한다. 자신은 이제 아무것도 아니고 그냥 모란이라고 이야기했으면서 그야말로 딱 카시오페아에 어울리는 방법이잖아. 도망쳤으니 결국 완전히 떳떳해질 수는 없나…. 모란은 쓴웃음을 지었다.

며칠 후 모란은 오랫동안 고민한 마지막 인사가 담긴 편지를 부쳤다. 지상화를 보러 나가고 나서 처음 하는 외출이었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전에는 그렇게 휘몰아치더니 그새 좀 사그라들었네… 그렇게 생각하는 자신도 퍽이나 마음이 안정된 듯했다. 며칠간 그의 방은 죽을 듯이 고요했다. 그의 책상 위에는 가라르지방의 트레이너 스쿨에 대한 정보가 담긴 자료와 팜플렛이 있었다. 바람을 맞기 힘들다면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나아가면 될 것이다.

모란은 팔을 뻗어 편지를 태양빛에 비췄다.

편지에는 카시오페아의 이름을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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