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눈깨비는 천막으로, 비는 무엇으로
공부...어떻게햇더라
BGM/진흙 속에 피다-cover by 25時、ナイトコードで。 × 初音ミク(원곡: HarryP/vo. 월피스 카터)
6. 다음은 소설 <식충 식물(植忠 植物)>의 일부이다. 보기를 읽고, 아래 물음에 답하시오.
< 보 기 >
“우리 헤어지자.”
“방금 뭐라고 했어?”
“여기서 그만하자고.”
ㄱ. “그 말… 진심이야?”
“나, 내년에 플라엣테랑 결혼해.”
그렇게 말하는 달무리나의 모습은 전혀 이별을 통보하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슬퍼하지도, 아파하지도 않는 의연한 태도 그 자체였다. 드레디어는 그의 태연한 말투에 입을 꾹 다물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애초부터 순탄하게 이루어질 사랑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달무리나는 그와는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이었으니까.
드레디어가 몇 번이고 고민해서 겨우 집어든 큐빅 반지의 몇십 배는 되어보이는 유명 브랜드의 반지를 달무리나는 그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선물하고는 했다. 그럴 때마다 드레디어는 기뻤지만 동시에 알 수 없는 괴리감에 씁쓸해지기도 했다. 그런 괴리감이 쌓이고 쌓여 결국 오늘까지 온 거겠지. 드레디어는 쓴웃음을 지었다.
ㄴ. “넌 사랑이 장난 같지?”
“드레디어, 그런 게 아니야, 난…”
“너희 어머니가 나한테 와서 불잔을 던졌을 때도, 화상을 입었지만 난 가만히 있었어. 나한테 10억을 줄 테니 헤어지라고 해도 받지 않았어. 널 사랑하니까. 근데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래?”
“그냥 받지 그랬어. 어차피 너도 알고 있었잖아? 우리 오래가지 못할 거라는 거.”
“나랑 헤어지고 만나는 게 고작 플라엣테야? 너보다 나이도 한참 어리고, 걔가 집안 말고 나보다 나은 게 뭐가 있는데?”
“…바로 그 집안 때문에 결혼하는 거야. 나도 원해서 선택한 게 아니었어. 그렇지만 세상에는 싫더라도 해야 하는 게 있으니까.”
달무리나는 언젠가 한 단계 더 성장을 거쳐 달고퀸이 되어 기업을 물려받을 것이다. 플라엣테도 언젠가 어엿한 플라제스가 되어 사람들 앞에 서겠지. 그러니까 나만… 나만 드레디어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지 못하고 그대로인 거다. 환경도, 사랑도, 그리고 나 자신조차… 드레디어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잎으로 겨우 닦았다. 달무리나는 눈물을 대신 닦아주지도, 울지 말라 하지도 않았다. 그저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가만히 앉아있을 뿐이었다.
“전에 유학 가고 싶다고 했지? 내가 보내줄게. 필요한 비용도 다 대줄게. 어디든 좋아. 떨어져 있으면 너도 자연스레 잊어버릴 거야. 새로운 사랑도 분명 만날 수 있을 거고.”
ㄷ. “유학이고 뭐고 다 바보 같아.”
“그러지 말고… 전에 생물학 전공하고 싶다며? 넌 머리도 좋으니까 분명 조금만 공부해도 금방 좋은 학교에 갈 수 있을 텐데.”
“네가 곁에 없으면 모든 게 무의미해. 이럴 거면 그냥 내 앞에서 아예 사라져. 이때까지 준 반지고 뭐고 다 돌려줄 테니까.”
드레디어는 반지를 빼서 책상 위로 집어던졌다. 어째서인지 불잔을 그대로 맞았을 때보다 온몸이 더 쓰라렸다. 달무리나는 가만히 그가 던진 반지를 집어들어 주머니에 넣었다. 돌려주려는 시늉도 안 하는구나. 드레디어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언가 더 말하려고 해봤자 자신만 더 비참해질 것 같았다. 달무리나는 붙잡지 않았다.
우린 달라진 게 아니야. 이제서야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왔을 뿐이야. 달무리나는 몇 번이고 되뇌이며 마음을 다잡았다. 곧 플라엣테와의 만남이 있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어머니가 주선한 형식적인 만남이었지만 나가야만 했다. 그래야만 하니까. 아마 몇 번 더 만나면 자연스레 결혼 이야기가 오고가겠지. ㄹ. 모든 게 순탄해지려면 결국 그 방법뿐이다. 더 이상 드레디어에게 상처와 고통을 안겨주고 싶지 않았다. 자신과 결혼한다 해도 그는 불행해질 뿐이라는 걸 달무리나는 누구보다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제 우리는 다시 충실하면 된다. 서로가 아닌, 각자가 있어야 할 자리에.
‘지문이 꽤 기네.’
비파는 이리저리 연필을 굴리며 문제에 집중하려 애썼다. 밖에 진눈깨비가 세차게 내리는 탓에 혹시나 지워질까 그는 분장도, 보스로서의 옷도 입지 않고 맨얼굴에 평범한 트레이닝복 차림을 하고 있었다. 운동복을 입고 공부라니, 이러고 있으니까 진짜 아카데미에 다닐 때로 돌아간 것 같네. 그는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 천막 문을 들추고 밖을 바라보았다. 진눈깨비가 천막을 강타하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렸다. 비도 아니고 눈도 아니고 진눈깨비가 이렇게나 내리는 날이라니. 이제는 집보다 더 집 같은 아지트에서 보이는 풍경이 새삼 낯설게 다가왔다.
기숙사의 넓은 책상이랑 푹신한 의자가 아닌 겨우 책 하나가 올라갈 만한 크기의 간이 책상과 딱딱한 의자였지만 그는 이 천막 안이 누구보다 편안했다. 그가 앉아있는 곳 바로 옆에는 스타모빌이 놓여있었다. 스타 대작전 이후로 써본 적은 없지만 많은 공간을 차지한다 해도 밖에 놔둘 수는 없었다. 친구가 만든 소중한 장치였으니까. 날씨, 앉아있는 곳, 괜히 가라앉는 기분… 공부에 방해가 되는 온갖 것들을 무시하고 그는 다시 문제집을 들여다보았다.
공부에 오랫동안 손을 대지 않아 많이 잊어버렸을 거라고 생각해 쉬운 난이도의 언어학 문제집을 사고 나서야 그는 그가 자신을 얕잡아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시간이 날 때마다 공부에 손대긴 했지만 언어학은 진짜 오랜만인데 이렇게까지 잘 풀린다고? <식충 식물>이라면 언어학 지문에 자주 나오는 고전 중의 고전이었다. 그만큼 익숙하기에 어디서 무슨 문제가 나오는지 무의식중에 알고 있었다고 해도 크게 이상할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뭔가 다른 기억이 있었다.
‘아, 기억났다. 이 지문이 왜 이렇게 익숙했는지…’
그가 무언가를 떠올리려는 순간 스마트로토무가 울렸다.
“피나? 이 새벽에 갑자기 무슨 일이야?”
“그냥 그쪽은 괜찮나 궁금해서? 디제잉 장비를 밖에 내놨다가 방금 겨우 천막 안으로 옮겼거든. 덕분인지 때문인지 잠도 다 깨버려서 연락 한번 해봤어.”
“다른 애들은?”
“…안 받던데. 그보다 무슨 일 있어? 혼자만 깨어있길래.”
직접 보지도 않았는데 비파의 눈에 이미 나머지 세 아지트의 풍경이 그려졌다. 일어나자마자 간밤의 잠을 후회하며 진눈깨비 때문에 망가진 모든 것들을 수습하려고 이리저리 돌아다닐 멜로코, 느긋하게 일어나서 조무래기들이랑 함께 천천히 어지러워진 주변을 정리하는 추명, 밖으로 나가기 전에 우산부터 챙겨 아지트를 둘러보며 조무래기들에게 정리할 것을 부탁하는 오르티가까지. 나중에 어떻게 하든 상관없으니 자는 사이에 어디에도 무너진 천막이 없길 그는 마음속으로 빌었다.
“여긴 괜찮아. 비 소식 있대서 어제 아지트 전체를 재정비해서… 근데 비 말고 진눈깨비가 올 줄은 몰랐네. 별일 없지만 공부하느라고 깨어있었어.”
“공부? 무슨 과목?”
“언어학. 그냥 다른 과목보다 더 많이 잊어버린 것 같아서 긴 지문 하나 보고 있었어.”
“뭐 풀고 있었는지 한번 봐도 돼?”
“응. 잠시만, 스마트로토무로 화면 공유해줄게.”
문제집을 보여주자마자 바로 아, 이거 자주 봤는데 제목이 기억 안 나네. 하는 답이 돌아왔다. 비파가 식충 식물이라고 말하고 나서야 그는 깨달은 눈치였다. 언어학에 조금이라도 제대로 손댔다면 까먹을 리가 없었는데도 제목을 잊어버렸다니. 비파는 새삼 아카데미 밖에서 지낸 시간이 얼마나 길었는지를 체감했다. 학생회장에 우등생이었던 그도, 다방면으로 뛰어난 인기인이었던 자신의 모습도 이제는 흐릿했다. 다 내려놓고 이제는 보스의 이름만을 달고 있는데도 오늘따라 그 이름이 유독 무겁게 느껴졌다.
“최근에 언어학 공부한 적 있어?”
“있긴 한데, 개인적으로 그 지문을 썩 좋아하진 않아서. 문제에 유감이 있다기보단 그냥 내용이 취향이 아닌 거지만.”
“그래? 하긴, 유명한 소설이라고 다 좋아하는 건 아니니까.”
“바로 납득하네? …의외라고 할 줄 알았는데.”
“응? 어느 부분에서? 전혀 그렇게 생각 안 했어.”
“다들 날 정직하게 보니까… 그냥 주는 대로, 답이라는 대로 푸는 것처럼 말하더라고.”
“난 하라는 대로 하는 것보단 자기 생각이 확실한 게 더 정직하다고 생각해.”
“그런가….”
스타단으로 만나기 전에는 그냥 서로가 서로의 존재만을 알고 있을 뿐이었기에 비파는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식으로 공부를 가르쳐줬는지는 알 수 없었다. 정직한 사람이라면 역시 사람들이 답이라는 대로 체크하고 지문에서 주는 대로만 이해하는 이미지일까. 하라는 대로 하고, 옳다고 하니까 옳고 그르다고 하니까 그르고… 그렇다면 다수가 생각하는 정직함의 정의는 한참 잘못된 게 아닐까, 라는 생각에 비파는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그는 다시 지문을 봤다. ㄱ부터 ㄷ까지는 전부 드레디어의 감정이 한껏 담긴 대사였지만 ㄹ 혼자 조용히 생각에 잠기는 달무리나의 독백이었다. 혹시 차이는 사람은 감정이 격해져서 말이 많아지고 차는 사람은 묵묵하게 납득하며 감정을 삭이기만 하는 고전적인 사랑 이야기가 싫은 건가? 피나라면 그럴만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문득 왜인지 궁금해져 그는 문제집 쪽으로 얼굴을 더 가까이 했다. <식충 식물>을 구성하는 모든 단어 하나하나가 책상 위로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어느 부분이 마음에 안 드는데?”
피나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바로 한 군데를 짚었다. ㄹ을 포함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여기? 여기가 왜?”
“널 사랑하니까 떠난다는 정서가 별로야. 이 소설 말고도 많이 보이잖아? 그런 거.”
“그래? 난 모질게 표현했어도 달무리나의 드레디어를 향한 배려심이 드러나서 좋았는데.”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배려에서 비롯된 행동이래도 결국 상대는 상처받잖아.”
“그렇기도 하네… 듣고 나니 네 말도 뭔가 이해가 돼.”
정답은 없었다. 말하는 이의 상황에 집중하냐 듣는 이의 상황에 집중하냐는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사랑하니까 상대에게 상처 주는 짓을 하겠다는 걸 상대를 위해서 하는 일이라 말할 수 있을까? 그 역시도 의견이 갈리겠지만 하나 분명한 건 그 상황에서 누구도 행복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말하는 사람은 말하는 대로, 듣는 사람은 듣는 대로 고통스럽다. 상황이 그들을 모질게 몰고만 가지 않았어도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겠지만, 지문 밖의 일들은 대개 지문 속의 일들보다 배로 복잡하다.
“진짜로 상대를 생각하고 싶었음 자기 상황이든 사실이든 뭐라도 얘기했어야지.”
“이야기를 못한 것조차 뭔가 사정이 있어서라면?”
“듣는 사람이 그것까지 고려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때로는 다 내놓지 않고 적당히 숨기는 게 배려일 수도 있으니까.”
“이해했어. 어차피 언어학이란 게 답은 정해져 있어도 개인적인 해석은 자유잖아?”
그냥 그런 거야. 스마트로토무 너머로 평소보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둘의 생각은 달랐지만 누구도 서로가 틀렸다고 말하지 않았다. 비파는 그가 처했던 상황을 이해하고 그 역시 비파의 상황을 이해한다. 공감의 영역까지는 닿을 수 없어도 그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둘을 포함한 모두가 잘 알고 있었기에.
“역시 언어학은 어렵네.”
“어려워도 다 맞았으면 일단 그걸로 됐지. 나도 다시 문제 풀어봐야 하나….”
“나중에라도 모르는 거 있으면 연락해. 같이 풀어보자.”
“그럴게. 그럼 하던 공부 마저 열심히 해.”
전화가 끊어지고 나서 비파는 다시 지문을 봤다. 피나의 말을 듣고 나니 사뭇 다르게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다 그는 아까 떠올리려다 만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지금과 비슷하긴 했는데 어딘가 분명 달랐던… 진 보스와의 일이었다.
*
“갑자기 무슨 일이야? 밤중에.”
“아, 뭔가 방해했다면 미안. 그냥 공부하다가 잘 안 풀리는 게 있는데, 진 보스의 해석도 듣고 싶어서.”
“아냐, 뭐 하고 있는 건 없어서. 그보다 해석? 해석이라면 언어학… 인가?”
“응. 사실 모의 시험처럼 된 문제집을 풀었는데 언어학 부분에서 많이 틀려서.”
비파는 스마트로토무로 화면을 공유했다. 전부 작대기가 그어진 페이지가 눈에 들어왔다. 와, 완전 비 내리는 시험지 그 자체잖아. 모란은 내심 놀라웠지만 애써 티를 내진 않았다. 평소에 우수했다고 매번 다 맞을 수는 없으니까. 스타 대작전을 준비하며 공부에 열심이던 사람들마저 공부에 소홀해진 탓도 있었다. 스타 대작전을 펼친 이후로는 말할 것도 없었다. 어떻게든 공부를 하는 사람도, 아닌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누가 어떻게 하든 딱히 신경쓸 건 아니었다. 어차피 우리 공부 못해서 학교 안 나가는 거 아니잖아. 혹시나 실망했을 수도 있을 비파에게 모란은 그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그냥 문제에 집중하기로 했다.
“이거 유명한 소설 아냐? 그… 식충 식물인가?”
“응, 맞아.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대로 풀었는데 문제집에서는 그게 아니었나봐.”
“1번 문항은 답이 4번이 아니라 2번이었던 거 같은데?”
“정확해. 나는 달무리나가 드레디어를 위해서 한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여기선 그게 아니었나봐.”
“딱히 그렇다기보단 그냥 2번이 제일 객관적인 사실이잖아. 문제 말고 지문에만 집중하다 보니 너무 인물의 감정적인 부분만 생각해서 그래. 문제에서는 ‘가장 정확한 걸’ 고르라고 나와있잖아?”
비파는 수학도 아니고 언어학 지문에 ‘객관적인 사실’이라는 단어가 조금 낯설다고 여기면서도 생소한 접근이지만 옳은 방식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지문만큼 문제에서 말하는 게 무엇인지도 중요하다. 그 사실을 잠깐 잊고 있었다. 비단 공부만이 아니더라도 자신이 깜빡하거나 잘 몰랐던 부분을 그는 언제나 정확하게 짚어주곤 했다. 아무리 공부 실력이 모든 두뇌와 관련된 걸 입증해주진 않는대도 비파는 처음부터 그가 해킹에 능통하니 공부도 잘할 거라고 예상했고 그 예상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진 보스는 언어학도 잘하는구나. 저번에 수학 문제도 많이 알려줬잖아.”
“그렇게까진 아냐… 사실 굳이 따지자면 언어학이 제일 약한걸.”
“그래? 골고루 잘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네.”
“정말 이것저것 잘하는 건 본인 아냐?”
“그런가? 근데 그것도 이젠 옛날 일인걸.”
옛날 일인걸. 그 말을 듣자마자 모란은 얼마 전 피나랑 짧게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무슨 맥락에서 나온 말인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았으나 그는 학생회장이고 모범생이고 이젠 다 옛날 일이야. 라고 했고, 모란은 모범생이란 건 공부를 잘하느냐 아니냐로 결정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 뭐라 말하려 했으나 무슨 말을 덧붙어도 별 위로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그냥 끝났었나. 그냥 말할 걸 그랬나. 모란은 후회 아닌 후회를 했다. 그는 아직도 말하는 게 무서웠다. 무슨 말을 해도 그건 아니라는 답이 돌아오거나 괜히 비웃음만 살 것 같았다. 그래도 조금 더 용기를 내볼걸. 지금 와서는 의미없는 생각일지도 몰랐다.
“옛날이 뭐 중요한가.”
“진 보스 말대로야. 지나간 건 다시 생각해봤자지….”
“아카데미가 싫어졌으면서 공부를 계속한단 것만으로도 난 대단하다고 봐. 난 고작 집 안에서 컴퓨터만 하는 게 다라서.”
“고작이라니? 우리가 이렇게 함께하고 있는 건 다 네 덕분인걸.”
“고마워.”
그의 대답은 건조했다. 창문을 제대로 닫지 않은 건지 스마트로토무 너머로 빗소리가 들려왔다. 비가 와서 가라앉은 걸까. 밖에서 내리는 비 때문에 가라앉은 사람이랑 과거에서 내리는 비 때문에 가라앉은 두 사람은 잠시 방 안에도 내리는 비를 그대로 맞았다. 때로는 가라앉는 대로 흘러가는 것도 방법이겠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둘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시험지에 내리는 비가 자신의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 같아 비파는 문제집을 덮어버렸다. 단순히 문제를 많이 틀렸다거나 예전과는 달라진 것 같아 기분이 가라앉은 건 아니었다. 이렇게 가다간 영원히 아카데미로 못 돌아갈 수도 있겠구나, 하는 문득 드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그보다 진 보스, 창문 제대로 닫은 거 맞아?”
“아, 맞다!”
무언가 급하게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얼굴도 모르면서 스마트로토무 너머로 허둥대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와… 비 다 들이닥쳤네. 닦기 귀찮은데….”
“그래도 닦아야지?”
“아, 응. 그래야지. 그렇고말고.”
또 무언가를 급하게 꺼내는 소리와 박박 닦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하려고 하면 바로바로 하네. 비파는 그의 그런 점이 좋았다. 우산이 없는데 눈이 내리면 어떻게든 해보겠다고 손으로라도 가려줄 것 같은 어설프면서 짜임새 있는 실행력. 그러면서도 본인은 내리는 눈을 그대로 맞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비파는 가끔 그가 걱정되기도 했다.
“진 보스.”
“응?”
“힘든 거 있으면 언제든지 얘기해.”
“가, 갑자기? 아무튼 고마워.”
“진짜 걱정돼서 그래.”
“응. 꼭 얘기할게.”
그 대답이 무색하게,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그는 사라졌다. 이때까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어떤 마음으로 스타단을 이끌었는지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인물의 감정은 하나도 알 수 없고 진 보스가 스타단을 떠났다는 객관적인 사실만이 남았다. 그가 문제를 푸는 방식대로 그는 떠나갔다. 사실상 자신과의 약속을 저버린 것과 다름없음에도 비파는 그를 원망하지 않았다. 상황을 모름에도, 꼭 얘기할게. 그렇게 말하는 사람의 상황에 집중하고 싶었다.
*
한때는 현재였던 자신의 과거에는 시험지에 비가 내렸고 지금은 눈이 내리고 있다. 겨울이 오면서 비에서 눈이 된 걸까. 비파는 그 사실이 크게 기쁘지는 않았다. 밖에서 내리는 진눈깨비를 어제 단단히 정비한 천막이 막아주고 있었다.
진 보스는 비가 들이치는 것도 모르고 창문을 열어놓고 있었다. 떠나기 전까지도 그랬을까? 비가 들이치는 것도 모르다가 결국 창문을 아예 닫아버리는 걸로 모든 걸 끝냈다. 차라리 내가 막아줄걸. 때로는 모든 걸 닫아버리고 아예 안전한 곳에서 아무것도 맞지 않는 것보다 비가 들이치더라도 옆에서 막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더 위로가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대체 뭘로 막아줘야 했을까….’
진 보스도 방 안보다는 어쩌면 천막 안이 더 편안했을 수도 있는데. 스스로 칩거하길 택했으면서도 비파는 가끔 그에게서 답답함이 비치는 걸 느꼈다. 그 답답함이 계속 갇혀 있다는 데에서 나오는 건지 그걸 택한 게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데에서 나오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비파는 가끔 그의 상태를 물어보기도 했으나 너희가 있으니 괜찮다는 답만 돌아올 뿐이었다. 그게 형식적인 말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비를 피하기보단 좀 더 맞으려고 했어도 괜찮았을 텐데.
비파는 문제집을 덮었다. 비를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도 눈이 내리는 문제집도 더 보고 싶지가 않았다. 차라리 밖에 나가서 비도 눈도 아닌 걸 맞으며 언젠가 진 보스에게도 이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밖에 진눈깨비가 내리는 게 지금 눈과 비 둘 다 맞고 싶지 않다는 자신의 마음과 똑같았다. 모든 곳에서 눈을 돌리고 싶어서 모든 걸 바라보고 있다. 나는 지금 진 보스랑 같은 표정으로 같은 생각을 하고 있기는 한 걸까?
그는 문제집과 간이 책상, 의자를 정리하고 다시 스타모빌을 천막 가운데로 옮겼다. 그제서야 모든 게 다시 맞게 돌아가는 듯했다. 역시 스타단 보스가 있는 천막에서는 스타모빌이 가장 중심인 게 자연스러웠다. 언젠가는 비가 내리더라도 이걸 써야 할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복잡해졌지만 아까 때로는 비를 맞는 편이 좋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 건 바로 자기 자신이다. 한 말은 지켜야지. 걸어온 싸움은 피하지 않는다는 스타단의 규칙처럼 말이다.
비파는 천막을 완전히 걷어올려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얼음도 물도 아닌 무언가가 그의 얼굴에 툭툭 떨어졌다. 비도 눈도 아니기에 둘 다일 수도 있는 무언가.
‘진눈깨비가 이렇게나 세찬데… 왜지? 맞으니까 오히려 후련해지네….’
그는 나갈 준비를 했다. 우산은 챙기지 않았다. 그럴 시간에 한층 더 빠르게 움직여 아지트를 한 바퀴 더 돌아볼 생각이었다. 어설프더라도 빠르게 막아줄 수 있는 사람. 자신 역시 그런 사람이 되길 바랐다. 진 보스가 없으니 그 몫만큼 다른 보스들이 나눠서 무언가를 더 해야 한다. 모두는 각자의 방식대로 진 보스의 무게를 나눠 짊어지고 있었다. 무너질 일은 없을 것이다. 힘듦과 버거움이 얼만큼 들이치더라도 상관없다. 서로가 서로를 어설프게나마 빨리 막아주면 또 그런대로 살아갈 수 있겠지. 어떻게든 버티고 서 있는 아지트의 천막들처럼…
진눈깨비는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디의 누군가가 이걸 맞지 않기를, 맞고 있다면 그걸 막아줄 누군가가 자신이나 다른 친구들이기를 바라며 비파는 천막의 문을 완전히 걷어올렸다.
틀린 문제가 많은 시험지를 비가 내리는 시험지라고, 맞은 문제가 많은 시험지를 눈이 내리는 시험지라고 했나? 그렇다면 이 아지트는 거대한 하나의 시험지일 것이다.
옳음과 그름 중 무엇이 내리든 내가 계속 그걸 맞을 수 있는지, 막을 수 있는지를 알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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