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두 갈래 길
“하늘이…!”
“원래대로 돌아왔어…!”
비가 그친 뒤의 하늘은 더욱 깨끗하고 파랬다. 때 한점 끼지 않은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사람들이 한목소리로 외쳤다. 루네시티의 모두가 걸어 잠갔던 창문을 활짝 열고 햇살을 맞이했다.
“자, 이제 괜찮을 거야.”
곳곳에서 들려오는 환호 소리를 뒤로 한 채, 제노가 품에 안긴 야생 지그제구리를 놓아주었다. 비바람에 쓰러진 나무를 이상해꽃이 치워내고, 제노가 그 아래 깔려있던 야생 지그제구리를 치료했다.
놀랐을 뿐 크게 다치진 않았다. 응급처치를 해두었으니 나머지는 스스로 회복할 수 있을 터였다. 품에서 내려와 땅에 발을 디딘 녀석이 제노를 한번 뒤돌아보곤, 곧장 어디론가 달려갔다. 가족으로 보이는 직구리 두 마리가 온몸으로 녀석을 반겼다.
파사삭, 야생 포켓몬들이 풀숲을 헤치는 소리가 멀어지는데도 제노는 그 자리에서 멍하니 쪼그려 앉아 있었다. 햇빛 아래 선 많은 사람들과 달리 나무 그늘에 위치한 그에게로 실버가 다가섰다.
읏챠. 종아리에 묻은 풀들을 털어내며 일어선 제노가 말했다.
“실버, 호텔 카드키 가지고 있지?”
“어? 어… 그렇긴 한데.”
실버의 답에 제노가 당당히 한 손을 내밀었다. 내놓으라는 의미. 그에 실버가 한쪽 눈썹을 삐딱하게 기울이며 물었다.
“바로 돌아가려고?”
“응. 씻고 옷 갈아입고 싶어.”
“챔피언이랑 관장은?”
“실버가 말 좀 전해줘.”
직접 얘기하면 되잖아. 불만스럽게 한숨을 내쉰 그가 먼저 앞장섰다.
“그냥 같이 가. 장크로다일을 타고 가면 금방이니까.”
“그럼 성호 씨한텐 누가 알려줘?”
“문자 남겨둘게.”
그런 방법이 있었군.
언니, 저흰 먼저 가볼게요. 언니도 리더에게 가보세요. 신경 쓰이잖아요?
그렇게 말하며 구열에게 손을 흔들자 마주 흔들어 보인 구열이 잽싸게 어디론가 달려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제노가 조용히 장크로다일의 등에 올라탔다. 실버의 셔츠를 붙잡자 그가 말했다.
“… 진짜 이대로 가도 되는 거야? 안 남아 봐도 돼?”
“실버, 원래 이런 일은 뒤처리가 제일 귀찮은 법이야.”
그리고 저런 분위기는 이제 질렸어.
나직하게 이어진 뒷말에 무어라 더 묻고 싶었으나, 제 옷자락을 흔들며 재촉하는 손길에 실버는 장크로다일을 출발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
탁. 욕실의 문을 가볍게 닫은 실버가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시선의 끝에는 이쪽으로부터 등을 돌린 채 침대에 걸터앉은 제노가 피카츄를 놀아주고 있는 모습이 있었다.
어깨에 걸친 수건으로 머리에서 떨어지는 물기를 대충 닦아낸 실버가 그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처음 제노에게서 ‘먼저 씻고 나오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의 충격이 아직도 생생했다.
벙찐 그를 두고 제노는 아무렇지 않게 갈아입을 옷을 챙겨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곧이어 물줄기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멍하니 있던 실버가 정신을 차렸다.
아니, 먼저 씻을 거니까 먼저 씻겠다고 말했겠지? 당연한 말이잖아?
하지만 머리로 납득이 되는 것과 달리 몸은 뭐 마려운 개 포켓몬처럼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그 관장 놈의 압박에 못 이겨 여태 목욕은 다른 방에서 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결국 옷을 갈아입은 제노가 개운하게 욕실 밖으로 나오고 난 뒤에는 실버를 발코니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거기서 뭐 해, 인마.
막 씻고 나온 이의 모습을 하고 자신을 부르던 제노의 모습을 기억했다. 따끈한 기운과 함께 풍기던 샴푸 냄새.
지금은 거의 다 마른 그 머리카락을 향해 실버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진정하자, 대체 뭘 긴장하고 있는 거야?
그리고 그런 실버의 생각이 무색하게도 인기척을 느끼고 돌아본 제노의 얼굴은 참… 맹했다. 순간 실버는 답지 않게 쫄아있던 자신이 한심해져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특유의 멍한 눈을 하고 제노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다 씻었어?”
“어.”
그가 여전히 머리에서 떨어지는 물기를 닦아내며 옆에 자리 잡자, 제노가 손을 뻗어 그에게서 수건을 뺏어갔다.
“제대로 말려야지.”
“난 원래 이렇게 했어.”
“설마 이대로 묶고 다녔던 건 아니지?”
머리에서 냄새날 수도 있다고. 그렇게 말한 제노가 대뜸 실버의 머리카락을 한 움큼 잡아 제 얼굴에 가져다 댔다. 킁킁, 강아지 포켓몬처럼 냄새를 맡는 그 소리에 실버가 기겁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뭐 하는 거야!”
“냄새나나 맡아보려고.”
“… 내, 냄새나?”
“아니, 샴푸 향밖에 안 나는데?”
대수롭지 않게 답한 제노가 실버의 고개를 다시 반대로 돌리곤, 수건으로 그의 머리카락을 살살 매만지기 시작했다.
문득 실버는 자신과 제노에게서 같은 향이 날 것이란 사실에 움찔했다가, 성호와 윤진도 마찬가지일 것에까지 이어져 짜게 식어버렸다.
그리고 실버의 뒤에서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던 제노는 생각했다. 얘는 진짜 뭐, 꼬르륵스위치가 있는 것도 아니면서 기분을 종잡을 수가 없네.
“찾고 싶은 건 다 찾았어?”
대충 관리하는 것치곤 제법 부드러운 머릿결을 바라보던 도중, 그에게서 툭 질문이 던져졌다. 제노가 잠시 성호와 나누었던 약속을 떠올렸다.
“곧 그렇게 될 것 같아.”
“여기서 볼일이 다 끝나면 다시 신오로 돌아갈 거야?”
“아마 그렇게 되겠지?”
곧, 아마. 그런 애매한 표현에 실버가 입을 다물었다. 그를 대신해 이번엔 제노가 물었다.
“너는 어쩔 셈이야? 계속 호연에 남을 거야?”
“당신이 남는 것도 아닌데 내가 왜.”
“이참에 호연의 리그에 도전해 보는 건 어때? 윤진 씨도 성호 씨도 강하니까 좋은 경험이 될 거야.”
“관심 없어.”
계속해서 제노의 질문과 실버의 답이 이어졌다.
그럼 석영고원에 다시 도전할 거야? 거길 또 왜 가. 그린과는 싸워봤으니 이번엔 레드와 배틀해보는 건 어때? 딱히. 아니면 다시 성도로 돌아가서 간만에 심향이 얼굴이라도 보는 건-
“이봐.”
실버가 제노의 말을 끊으며 그를 돌아보았다. 입꼬리는 비스듬하게 올라가 있지만 미간을 잔뜩 찡그린 것이 어딘가 불쾌해 보이는 미소였다.
“나를 떼어내고 싶어서 안달인 것 같은데, 내가 신오로 가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
“네가 신오에 와서 뭐 할 건데….”
“배지를 모아서 신오의 챔피언에게 도전해 보는 것도 좋겠지. 난천이라고 했던가? 당신하고 종종 연락하던 사람 말이야.”
“….”
제노가 시선을 피하며 입을 꾹 다물었다. 그 명백한 거부에 실버가 코웃음을 쳤다.
그가 타인에게 관심이 없는 이유는 간단했다. 마찬가지로 타인에게 자신의 정보를 넘기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대체 얼마나 대단한 목적이길래 숨기는 거야? 매번 중요한 순간마다 집요하게 도망치는 그 모습에 실버는 이골이 난 상태였다. 이번에야말로 놓치고 싶지 않았다.
어린애도 아니고, 관계를 맺었다면 어느 정도 불편함을 감수할 줄 알아야했다. 그래,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적어도 자신을 이렇게 만든 책임은 져야지.
두 사람이 각자 고집을 굽히지 않으며 생긴 미묘한 침묵은 포켓기어에서 울린 벨 소리로 인해 끊어졌다.
사건의 뒷정리를 마친 성호와 윤진은 해가 뉘엿뉘엿 바다 너머로 지기 시작한 후에야 호텔로 돌아왔다.
“문자 하나만 달랑 남기고 먼저 가버리다니, 정말 너무한 거 아니니.”
“죄송해요.”
“어디 다친 건 아니지?”
“네. 그냥 조금 피곤해서 먼저 돌아왔어요.”
“다행이야.”
그렇게 말하며 윤진이 제노에게 매달리듯 붙어왔다.
그것을 두 남자가 고깝게 바라보았지만, 윤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꼬우면 자기들도 하던지.
그 팽팽한 기싸움을 가르고 튀어나온 것은 제노의 피카츄였다. 피카츄가 곧장 성호에게로 달려가 그의 발치를 어슬렁거리며 애교를 부렸다. 저거 저거, 또 시작이네.
“피카츄, 간식 먹고 싶어?”
“피까아-”
성호의 바짓단을 붙잡은 피카츄가 최대한 귀여운 표정을 하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정확히는, 그의 손에 들린 종이상자를.
이게 대체 누구 포켓몬이야. 그 기가 막힌 광경에 제노가 말문이 막힌 사이, 피카츄를 쓰다듬은 성호가 상자를 열어 보였다.
“이것 봐, 사라사블레야.”
안에는 다양하게 장식된 과자들이 가지런히 포장되어 있었다. 바삭한 과자 겉면에 묻힌 설탕이 햇살 아래 해변의 모래알처럼 반짝반짝, 예쁘게 빛났다.
“피카아!”
“다 같이 나눠 먹을까요?”
피카츄가 자그마한 손으로 제 양 뺨을 붙잡으며 감탄했다.
오라, 달콤한 사라사블레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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