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편
유료

57화

두 갈래 길

160.

성도지방, 너도밤나무숲.

어두운 밤, 실버는 길을 벗어나 숲속을 걷고 있었다. 조금 앞에서 그의 포켓몬을 발견한 실버가 풀숲을 헤치며 걸어갔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이제는 포푸니라로 진화한 포켓몬이 그를 바라보았다.

“나 참, 이미 진화한 지가 언젠데, 배틀 약간에 신이 나기라도 한 거냐?”

익숙한 투덜거림에 아랑곳하지 않은 포푸니라가 그를 이끌고 어딘가로 다가갔다. 나무가 한적해진 공간, 풀숲 한가운데에 목재로 만들어진 작은 집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건….”

사당인가? 잠시 살핀 실버가 이내 흥미를 잃고 돌아섰다. 가자, 포푸니라, 이런 건 괜히 건드려서 좋지 않다고. 포푸니라가 무언가 말하고 싶은 듯 울었지만 실버는 그것을 무시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앞을 막아선 것은 허공에 떠 있는 포켓몬 한 마리였다.

251.

춤을 추는듯한 움직임. 그 포켓몬은 요정과도 같이 작은 날개를 팔랑이며 유유히 실버에게로 다가왔다. 한 쌍의 더듬이 아래에 위치한 푸른 눈동자. 실버가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고 있자, 수수께끼의 포켓몬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지금-”

웃은 거야? 실버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이내 시야가 환하게 물들었기 때문이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다른 장소였다. 사당은 눈앞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포푸니라만이 같은 모습으로 그의 곁에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뭐야, 여기는….”

실버가 황급히 주머니에서 포켓기어를 꺼내 들었다. 화면에 표기된 날짜는 약 십 년 전의 초겨울을 가리키고 있었다.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설마 내가 과거의 다른 장소로 이동했단 말인가? 실버가 상황을 살피던 그때, 근처의 풀숲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언가 빠르게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실버와 포푸니라가 경계 태세를 취한다. 이윽고 튀어나온 것은 작은 피츄 한 마리였다.

“뭐야, 피츈가.”

안심한 실버의 눈에 무언가 들어왔다. 다른 개체들과 다르게 뾰족한 한쪽 귀.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고 있자, 피츄가 헐레벌떡 다가와 그의 바짓단을 붙들었다.

“피! 피, 피!”

“… 뭐라는 거야, 따라오라고?”

“피!!”

실버의 물음에 격하게 긍정한 피츄가 어디론가 달려 나갔다. 실버가 그 뒤를 따라 움직였다.

*

한 소녀가 절벽 위를 바라보았다. 낮아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즉사였다. 발을 디딘 흙이 무너진 순간 그대로 미끄러져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마구잡이로 손을 짚는 바람에 찢어진 손바닥에선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가 점차 어두워지는 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다행히도 같이 있던 피츄는 휩쓸리지 않았다. 위쪽에서 안절부절못하며 피, 피, 울어대는 포켓몬을 향해 소녀는 어서 가버리라고 소리쳤다. 괜히 구하겠답시고 피츄까지 내려왔다가 둘 다 여기서 굶어 죽을 필요는 없었다. 자신의 매서운 말에 울먹거리던 피츄는 빠르게 어디론가 달려갔다.

포켓몬들은 야생에서도 잘 살 수 있으니 괜찮겠지. 그걸로 됐다며 스스로를 위로한 그가 다시 한번 절벽을 오르기 위해 팔을 뻗었다.

떨어진다고 크게 다칠 정도는 아니지만 부상을 입은 어린아이가 오르기엔 높았다. 신중에 신중을 가했지만, 바위를 짚을 때마다 찢어진 손바닥이 불에 타듯이 아파왔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이를 악물고 통증을 참아낸 그가 한 손을 뻗어내었을 때, 오른손에 힘이 풀리며 몸이 뒤쪽으로 기울었다.

아, 떨어진다. 짧은 판단에 비해 허공에 부유한 시간이 무척이나 느리게 느껴졌다. 만약 이대로 머리를 부딪히면 언제 깨어날 수 있을까. 어쩌면 아예 눈을 뜰 수 없을지도 모르지.

그렇게 생각하던 그때, 무언가 소녀의 팔을 낚아챘다. 후드득, 돌멩이 몇 개가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졸지에 허공에 매달린 소녀가 위를 올려다보았다.

자신보다 훨씬 큰 손. 흘러내리는 붉은 머리카락. 달려온 것인지 호흡은 거칠었고, 찡그린 인상이 제법 사나웠다.

“… 젠장, 위험할 뻔했잖아.”

“피! 피!!”

그렇게 중얼거리는 낯선 이의 옆에서 피츄가 소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다.

뭐야, 멀리 가버리라고 했더니, 결국 다시 돌아왔잖아. 소녀의 눈시울 또한 붉게 물들었다.

*

“….”

“….”

커다란 나무의 뿌리가 만들어낸 작은 굴 안에 두 사람이 나란히 자리 잡았다. 오가는 대화는 없었다. 다만 남자가 소녀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무섭게 왜 저래. 소녀는 몸을 더욱 웅크렸다.

실버는 혼란에 빠져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에 맑은 물빛 눈동자, 거기에 귀가 특이한 피츄까지. 누가 봐도 자신이 아는 사람이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그가 입을 열었다.

“… 너, 이름은?”

“…… 몰라요.”

없어요, 그런 거. 조그맣게 돌아온 답에 반사적으로 황당하다는 감탄사를 내뱉자 소녀가 더욱 몸을 웅크렸다. 그 모습에 실버가 급하게 입을 다물곤 찡그렸던 미간을 풀었다. 보아하니 거짓은 아닌 것 같았다. 괜히 겁을 주지 않기 위해 최대한 힘을 뺀 실버가 말했다.

“그렇구나, 당신… 이제 모험을 시작한 거군.”

모험이란 단어에 소녀가 조심스레 실버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잠시 고민하던 실버가 한 손으로 제 머리를 헤집었다.

“이름. 지어줄게.”

“네?”

“필요하잖아.”

그렇긴 한데 그쪽이 왜…. 잠시 고민하던 제노가 고개를 내저었다.

“됐어요. 불러줄 사람도 없는데요 뭐.”

틀린 말은 아니었다. 사람이라곤 보이지 않는 깊은 숲속. 어디로 가야 할지, 얼마나 가야 할지 모른다. 애초에 무엇을 위해 움직여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웅크린 몸에 그늘이 지며 안 그래도 작은 몸이 더욱 위축되어 보였다.

음울한 기운을 한순간에 날려버린 것은 실버의 손짓이었다. 쬐끄만 게 뭐라는 거야, 일순 그가 소녀의 코를 잡고 튕겼다. 따끔한 감각에 소녀가 억울한 표정을 하고 그를 올려다보았으나, 이 인상 더러운 사람이 화내는 게 무서워 굳이 입을 열진 않았다. 그가 툭, 내뱉었다.

“제노.”

“….”

“내가 아는 트레이너 중에 가장 강한 사람의 이름이야.”

“….”

“강해져야 해. 강해져서 살아남는 거야.”

남의 이름을 왜 함부로 가져다 쓰냐고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부를 이름이 생겼다는 것에 자신보다 피츄가 더 기뻐했기에 반박하지 않았다.

소녀는, 그러니까 제노는, 별생각 없이 피츄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다 통증에 반사적으로 손을 떼고 말았다. 피츄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야….”

“다쳤어?”

“별거 아니에요.”

그렇게 말하며 숨기는 오른손을 실버가 잡아챘다. 강제로 펼쳐보자 손바닥에 큰 상처가 있었다. 아물지 않은 상처에선 피가 조금씩 배어났다.

그것을 확인한 실버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당장 치료약 같은 건 가지고 있지 않은데, 어떡하지. 가진 물건을 살핀다. 문득 손목에 차고 있던 손수건이 눈에 들어왔다.

“자.”

손수건을 풀어내어 아이의 손에 조심스럽게 감아준다. 단단하게 매듭을 묶자, 자그마한 손등에 남색의 리본이 생겨났다.

“… 감사합니다.”

제노가 작게 말했다. 실버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오르던 그때, 밖에서 빛나는 무언가가 보였다. 실버를 이곳으로 보낸 포켓몬이 반짝반짝 빛을 내며 다시 허공을 유영하고 있었다.

그가 굴 밖으로 튀어 나갔다. 소녀 또한 반사적으로 그의 뒤를 따라 나왔다. 점점 강해지는 빛에, 실버는 자신이 원래의 시간대로 돌아가게 될 것임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그가 다급하게 제노를 바라보았다. 어두운 밤, 제노의 눈이 별빛을 머금고 빛났다. 자신이 알던 것과는 다른, 너무나도 무력하고 작은 모습.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타임 패러독스니 뭐니 하는 어려운 이론은 잘 모른다, 다만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고 싶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잘 들어. 당신이 그렇게 떠나고 나서, 나는 강해졌어.”

제노가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을 지었다. 실버가 계속해서 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을 찾아낼 거야. 그리고 약속했던 대로 당신을 이겨서, 당신에게 인정받고야 말겠어!”

“….”

“그러니까 기대하고 있으라고.”

실버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악동처럼 웃었다. 제노는 자신도 모르게 그 미소가 무척이나 그답다고 생각해 버렸다.

“이거, 다시 돌려주길 기다릴 테니까.”

그렇게 말한 그가 손가락 끝으로 손수건을 가리켰다. 제노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그는 환한 빛에 휩싸여 사라져 버렸다.

다시 고요해진 숲. 사람이라곤 제노 혼자뿐이다. 멍하니 그가 사라진 허공을 바라보던 제노가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그의 이름을 듣지 못했다. 어둠 속에서도 강렬했던 붉은색의 머리카락을 떠올린 제노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가장 강한 트레이너인가….

피, 피! 제노의 옆에서 피츄가 폴짝폴짝 뛰었다. 그 머리를 쓰다듬으려 손을 뻗자, 짙푸른 색의 매듭이 눈에 들어왔다.

“꿈이 아니야….”

“피!”

“… 정말 이상한 사람이었어, 그치?”

“피이.”

피츄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작게 웃은 제노가 다시 굴 안으로 향하며 말했다.

들어가자, 밤은 위험하니 오늘은 여기서 자는 거야.

그리고 내일은 다시 길을 떠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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