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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신인 분명, 수신지 불명(발신인 불명, 발신지 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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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천성의 약함 - 164 feat.GUMI

그는 주소도 적을 수 없는 편지에 무언가를 적다 구겨던졌다. 자신이 대체 모란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도 모르는 채였다. 아무리 애쓴들 닿을 수 없는 마음임을 그도 알고 있었지만, 가끔 새벽에 잠이 오지 않아 천장에 모란의 얼굴만이 아른거릴 때는 차라리 몇 마디 종이에 적는 게 그의 잔상을 떨쳐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습관적인 탄식이 입 밖으로 새어나왔다. 그는 의자에 기댄 채 등받이를 뒤로 젖히고 눈을 감았다. 눈을 감는다고 모란의 얼굴이 보이지 않을 리 없었지만 지금은 절대 눈앞에서 볼 수 없는 모습이 눈을 감으니 더 선명하게 보인다고 자기합리화하면 그만이었다.

문득 모란과의 셀 수 없이 많은 기억이 떠올라 그는 늘 그랬듯 생각나는 대로 되짚어보았다. 뭐가 그렇게 즐거웠는지 나직하게 웃던 목소리. 이브이 이야기를 꺼내자 이브이의 어디가 왜 좋은지 장황하게 설명하던 모습. 새 굿즈가 나왔는데 방의 어디에 어떻게 전시하면 좋을지에 대한 시시콜콜한 토론. 우울하다고 말하자 위로해주면서 어떻게 하면 기분이 나아질지 함께 고민해주던 순간. 간편식만 먹으면 안 된다고 다그치니 이미 컵라면에 물을 부어버렸다고 내빼던 어느 날. 그를 생각했던 사소한 마음들이 쌓이고 쌓여 자신도 모르는 새 겉잡을 수 없이 커져가고 있는 걸 그는 애써 무시했다.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생각의 1%라도 내뱉으면 하루하루 애쓰고 있는 그에게 100배, 혹은 그 이상의 짐이 되어 돌아갈 것만 같았다.

지금의 처지에 비하면 저 하늘의 별처럼 과분한 꿈을 꾸었다고 그는 생각했다. 얼굴, 목소리를 보지도 듣지도 못한 채 지내는 사이는 남이 보기엔 냉정하게 말해 친구라고도 할 수 없었다. 지금 보기엔 아무것도 아니지만 예전에는 분명 친구였던, 아직도 자신은 친구라고 생각하는, 그리고 제 딴엔 이곳에 돌아온다면 어떤 식으로든 다시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일방적인지 아닌지도 모를 욕심과 바람만 남은 사이라고 정의하는 게 더 맞는지도 몰랐다. 생각해보면, 이것도 자신의 편의대로 해석한 결론일 수 있다. 그는 허무감과 허탈함에 조소했다. 예전보다 나아진 사이는커녕 예전만큼이라도 좋으니 제발, 이라며 어딘가에 빌어야 하는 게 현실이었다.

모란이 일방적으로 사라지기 전까지도 그는 모란에게 언제나 진심만을 이야기했지만, 무슨 감정에서 비롯된 진심인지는 그조차도 알 수 없었다. 조금 더 자신의 본심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려 하지 않았다는 걸 그는 모란이 떠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우습게도, 지금 당장 모란이 눈앞에 있다 해도 그는 본심의 어떤 부분도 말할 수 없었다. 그는 눈앞에서 사라졌지만, 무엇을 가지고 어떤 마음으로 사라졌는지도 몰랐으며 언제쯤 돌아오는지도 알 수 없었다. 다시 만나서도 타인의 넘쳐흐르는 감정을 받아줄 여유가 없는 상태라면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별 보듯 뻔했다. 그건 그가 생각하는 모란과의 배드엔딩 중에서도 단연 최악이었다.

머리가 아파 귀찮은 생각들을 애써 털어내고 나면 ‘보고 싶다.’라는 네 글자만이 남았다. 그는 모란이 어째서 자신의 눈앞에서 사라지기를 택했는지 아직도 알 수 없었다. 반드시 돌아올 거라고, 우린 아직 친구라고 믿어 의심치 않다가도 시간이 지나 벌어진 틈 사이로 가끔 부정적인 감정들이 흘러내려왔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너는 보고 싶지 않아? 진짜로 나를, 다른 친구들을 더 이상 보지 않아도 괜찮아? 차라리 붙잡아 세워 묻거나 따지고 싶은 마음이었다. 모란이 자신과 같은 마음이라면 어떨까, 이루어지기도 힘든 일을 막연히 상상했던 과거의 자신이 어리석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마음의 크기가 기울어져 있다면 결국 기울어진 쪽이 더 낮은 위치에서 위를 올려다봐야 하는 것이 정답이었다. 만날 수 없는 상황임에도 감히 그리워하고, 과거를 떠올리고, 미래의 행복한 너를 상상하고…. 모란이 그러길 바라기보단 자신이 후회와 체념, 기대 사이에 사로잡혀 있는 편이 훨씬 편했다. 그는 모란을 걱정하다가도 아주 가끔은 그가 원망스러웠다. 그렇다 해도 그 모든 복잡다양한 감정들의 끝은 언제나 하나였다. 좋아해. 언제인지 기억나지도 않는 아주 오래전부터.

그는 돌고돌아 오늘도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믿는 마음으로 기다리기. 기다리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기. 그건 간단하지만 마음먹기까지 수없이 괴롭고 편하지만 불편한 일이었다. 자신의 감정은 오늘도 모란의 안위에 자연스럽게 뒤로 밀려난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말하지 않아 생길 일보다 말하고 나서 생길 일들이 그는 훨씬 두려웠다. 그래서 그는 언젠가 모란이 돌아온다면, 이라는 가정을 수천번 넘게 할 때 언젠가 내가 달라진다면, 이라는 가정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 편이 자신에겐 불편했지만 모란에게는 편할 거라는 걸 그도 잘 알고 있었기에.

오늘도 그의 감정은 친구들 모두, 혹은 두루뭉술한 불특정 다수의 마음이 되어 모란에게 전해져 갔다. 그는 결국 자신의 마음이 모란에게 닿을 수 없을 거라 확신했다. 말하고자 하는 바가 확고해도 말하는 이가 누군지 모른다면 결국 반쪽짜리 전달일 뿐이니까. 그는 창밖을 올려다보았다. 별이 형체도 모를 정도로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별의 빛은 약했지만 선명하게 자신이 서 있는 방향을 비추고 있다는 걸 그가 깨달은 순간, 그는 구겨버린 편지를 다시 책상 위에 펼쳤다. 그리고 받는 사람의 이름과 보내는 사람의 주소만 적혀져 있는 편지지에 자신의 이름을 또박또박 적어내렸다. 절반은 비어있고 절반은 채워져 있던 편지가 한층 더 선명해졌다.

여전히 이 편지를 어디로 보내야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수신지가 확고해졌을 때도 보낼 수는 있을지 그는 확신하지 못했다. 그래도, 편지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자신의 마음이 별빛에 반사되어 더욱 강하게 빛을 내고 있는 듯했다. 편지는 여전히 그가 가진 마음의 전부를 담고 있지는 않았다. 그래도 이거면 된 거야. 그러니까, 어찌되었든 돌아와줘. 기다리고 있을게.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편지봉투에 편지를 넣었다. 편지에 받는 사람의 주소가 없더라도 일단 부치기만 한다면 어떻게든 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누구도 아닌 너에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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