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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없던 사람에게 갑작스럽게 나서서 말을 하라고 하면 제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아마 거의 없을 거라 봐도 무방할 것이다. 모란 역시 빠지면 섭한 사람이었다. 물론 스마트로토무 뒤로 지령을 내린 적이야 차고 넘치지만… 현실에서 면대면으로 마주보고 이야기하는 건 아직 글쎄, 였다. 상대가 무슨 말을 하든 거의 당황하지 않고 자연스레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오히려 더더욱.

햇살이 결국 나그네의 옷을 벗긴다지만 그건 따사로워서가 아니라 더워서니까, 그래서 매서운 바람같은 사람 앞에서보다 내리쬐는 햇살같은 사람에게 모란은 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냥 옆에 있으면 더워서, 라는 말을 모란은 잘 코팅된 양산 삼아 보고만 있어도 얼굴이 타버릴 거 같을 때 자주 써먹고는 했다.

“모란아? 갑자기 왜 그래?”

“아아… 아무것도 아니야. 오, 오늘 햇살이 좀 눈부시지?”

“커튼 쳐놨는데….”

“나, 나는 원래 이 정도로도 좀 눈이 부셔! 맨날 불 끄고 사니까.”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멋진 모습만 보여도 모자랄망정 이미 한 번 푸름이 확인한 모란은 생활력 없는 히키코모리입니다. 라는 문장을 재확인시켜주는 거나 다름없었다. 이게 아닌데… 모란은 언젠가부터 푸름의 앞에만 서면 말이 헛나오는 것을 느꼈다. 널 처음 보고 스타터스트 대작전을 떠올릴 때만 해도 말을 정말 또박또박 잘했었는데. 아, 물론 그것도 정체를 모른 채 스마트로토무로 대화할 때뿐이었지만.

모란은 처음 푸름을 마주했을 때를 떠올렸다. 가장 먼저 본 건 그의 앞모습이 아닌 뒷모습이었지만, 자신과 비슷한 체구를 가진 소녀의 모습이 감히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게 느껴졌다. 자신과 달리 그 뒷모습에는 별로 여러 그림자가 끌려 있지는 않은 듯 보였으나 오히려 그렇기에 모란은 푸름이 순수하게 놀라웠다. 아무것도 매달려 있지 않은데 저렇게 나서서 움직일 수 있다니. 앞으로 잡아끄는 힘이 없이도 스스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사람. 모란은 푸름을 그렇게 생각했다.

위험에 처한 친구가 있으면 도와줘야 한다는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 교과서적인 내용에 불과했다. 실제로 그게 가능한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은 그 누구보다도 모란이 제일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친구가 곤란에 처하면 도와줘야 하지만 그냥 못 본 체 넘어가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그건 마치 동화에는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게 결국 햇님이라고 나와있어도 실제로는 나그네를 넘어뜨리려고 돌풍 수준의 바람을 불어대는 사람들 천지인 것과 같았다.

그런 사람들의 틈 사이에서 푸름은 마치 어떤 영향도 받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아직 받지 못한 건지, 별로 받을만한 일이 없었던 건지, 둘 다 아닌데도 비바람 사이의 태양이 된 건지 모란은 잘 몰랐지만 어쨌든 지금 그런 사람이 되었으니 이때까지 잘 자랐다, 라고 말해도 전혀 이상할 건 없었다. 반면 나는 어땠더라… 모란은 또 나서지 못하고 그대로인 채였다.

몇 분 안 되는 그 짧은 순간 모란의 눈에 스쳐지나갔던 건 아주 짧지만 환한 빛, 그러나 마음의 일부는 빛을 견디지 못하고 조금씩 가라앉아갔다. 스마트로토무의 힘을 빌려야만 겨우 모두의 앞에 나서서 말할 수 있는 자신과 푸름은 너무나도 대조적이었다. 자신은 기꺼이 어둠에 묻힌 사람들에게 같이 별이 되자 약속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신도 어둠 속에 있었기에 가능했다.

줄곧 어두운 곳에 살던 사람이 갑자기 밝은 곳으로 들어가면 명순응이 일어나 눈을 뜨지 못한다. 모란은 그 빛에 눈이 부셔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시간을 견디기 싫어 결국 눈을 뜨길 거부하고 방 안에서 스마트로토무로 자신의 눈을 대신했다. 적응하려고 노력하다 좌절한 경험이 있는 사람에게 원래대로 돌아오라고 말하는 건 뭐랄까, 빛에게 내몰려 커튼을 닫아버린 사람에게 아무리 그래도 사람은 빛이 익숙해져야 하니 커튼을 걷고 살아야 하지 않겠냐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푸름은 어땠을까. 그는 눈에 암순응이 일어나는 것에도 개의치 않고 어두운 곳에 있는 모란에게 기꺼이 손을 내밀었다. 그건 자신이 갑자기 어두운 곳에 들어가도 누구든 잘 볼 수 있는 특별한 사람이라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기꺼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시간을 견디고서라도 손을 내밀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 그건 분명 어디에서도 무엇이든 잘 보이는 눈을 가진 사람보다 더욱 찾기 힘들고, 빛나는 사람이라고 모란은 확신했다.

“푸름.”

“응?”

“좀 뜬금없긴 한데… 내 첫인상 어땠어?”

“첫인상? 음, 수줍음이 많다?”

“왜 그렇게 생각했는데?”

“고맙다고 하고 바로 후다닥 도망쳐서 굉장히 수줍음을 잘 타나 보다, 라고 생각했거든.”

그렇기도 하지만 그때부터 스타더스트 대작전의 틀을 세우고 있었으니까, 라고 말하는 건 역시 좀 그렇겠지. 그저 수줍음을 잘 타는 학생에서부터 친구가 되기까지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우리 관계가 또 다른 형태로 변하려면 여기서 더 얼마나 기다려야 할까? 자신이 노력한대도 반드시 원하는 결말로 이어지지는 않을 거라는 것 역시 모란은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감당해야 할 무게는 다르대도 어쩌면 그때처럼 바랐던 방향이랑 반대로 이루어질 수도 있다. 아니, 더 최악이 될 수도 있다. 그래도 괜찮을까? 무수한 고민 끝에 말을 고르고 골라 모란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건 이 정도였다.

“나는 네가 멋지다고 생각했어.”

“와, 진짜? 어느 부분에서?”

“그냥…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나서서 구해줬잖아.”

“고마워! 근데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음?

그런가….

아니, 그렇지 않다.

“고마워. 그렇지만 난 너랑은 달라. 비겁하게 숨어서 밖으로 나가지도 못했고… 겁쟁이처럼 굴었는걸.”

“무슨 소리야? 그렇지 않아!”

“푸름….”

“꼭 앞에 나서야만 구해줄 수 있는 게 아니잖아? 난 그렇게 생각해.”

“…그런 걸까?”

“응. 그러니까 넌 도망치거나 피한 게 아니야. 난 네가 그렇게 생각해줬으면 좋겠어.”

너랑 나는 다르다고 선을 그어버린 모란의 말이 무색하게도 푸름은 모란마저 기꺼이 ‘나’의 바운더리에 포함시켰다. 아, 그랬지. 이게 바로 너를 사랑했던 이유다. 뭐든 ‘나’와 무관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서, 그냥 지나치지 않아서 모르는 사람이 하는 부탁도 기꺼이 들어주고 남들이 위험하니까 엮이지 말라는 일에도 주저없이 뛰어들고… 잔인하리만치 쉽게 나와 남을 선 그러버리는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푸름이 더 소중하게 다가왔던 건 바로 그런 모습 때문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도록 노력해볼게.”

“뭔가 모호한 대답인데?”

“아냐. 그러겠다는 말보다 더 진심이야.”

“그래? 알았어. 네 말이니까 믿어줄게!”

그렇게 답하는 푸름의 얼굴에서는 한 치의 거짓도 보이지 않았다. 한 번 정체를 속인 적이 있는데도 나를 믿는다는 것은 그만큼 나를 좋아해서… 라고 생각해도 될까. 모란은 스스로 생각하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며 눈을 감고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을 본 푸름이 모란에게 한층 더 가까이 다가와 한층 심각해진 얼굴로 물었다.

“모란아, 왜 그래? 설마 아직도 눈부셔서 그래?”

“아, 아니? 이젠 진짜 눈 안 감을 거거든?”

“이젠 진짜가 무슨 말이야? 아무튼 너무 따가우면 얘기해. 커튼 끝까지 쳐줄 테니까.”

“아니야! 이젠 진짜 괜찮아. 괜찮으니까 어두우면 커튼 좀 걷어도 돼! 물론 너무 다 걷지는 말고… 아직 시간이 필요해서.”

“아하하, 그게 무슨 말이야? 아무튼 알았어!”

그렇게 말하고선 푸름은 커튼을 걷어올렸다. 순식간에 따뜻한 빛이 한번에 방으로 새어들어와 모란은 언제나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했지만, 금방 눈을 뜰 수 있었다. 흐릿해지다 선명해져 가는 시야 사이로 푸름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건 빛을 마주하고 처음 본 사람의 모습 같기도 해 모란은 잠시 푸름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어쩌면 오늘처럼 커튼을 걷을 수 있는 것도, 바로 눈을 뜰 수 있었던 것도 전부 네가 옆에 있어서 가능했던 건지도 몰라.

“푸름.”

“응?”

“고마워?”

“뭐가?”

“…커튼을 걷어줘서.”

“무슨 소리야? 내 방이니까 내가 걷는 게 당연하지!”

아니야. 그래도 고마워.

모란은 그 말 대신 푸름에게 환한 미소로 대답했다.

BGM / 인연 - Aim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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