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한 갈래 길
“그럼 지금부터 체육관전을 시작하겠습니다.”
제노가 인주체육관에 도전한 것은 실버를 구해준 날로부터 이틀 뒤였다.
도전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기엔 늦은 시간에 실버가 배틀이니 뭐니 이상한 소리를 하는 바람에 제노의 순서는 당연히 뒤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포켓몬들과 방울탑도 구경하고, 전통무용 공연도 보면서 푹 쉴 수 있었지만…
아니, 아니지. 저 녀석이 아니었다면 체육관전 없이 편하게 구경하고, 지금쯤 도라지시티로 출발했을 터였다. 속으로 이런저런 불만을 삼켜낸 제노가 필드의 한쪽 끝에 발을 들였다. 맞은편에는 체육관의 관장이 서 있었다.
저건 타일인 걸까. 곳곳에 바위와 촛대도 세워져 있다. 제노가 어둠에 싸여 기묘한 분위기를 내는 체육관을 구경하는 사이 심판이 룰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제대로 듣고는 있는 건지, 그의 시선을 따라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는 모자의 챙을 바라보던 유빈이 쿡쿡 웃었다. 그 소리에 제노가 모자를 한번 매만지곤 정면의 유빈을 바라보았다.
“사용 포켓몬은 각자 세 마리! 관장 또는 도전자 중 어느 한쪽의 포켓몬이 전부 전투 불능이 된 시점에서 시합이 종료됩니다. 시합 중 포켓몬을 교체할 수 있는 건 도전자뿐, 관장은 불가합니다.”
유빈은 오른손에 쥔 자신의 몬스터볼을 살짝 굴렸다. 그는 배틀을 바로 시작하는 대신, 눈앞의 도전자에게 말을 걸었다.
“배지가 한 개라면서요?”
“네.”
“흐음. 내 체육관을 두 번째로 삼는 트레이너는 잘 없거든요.”
“….”
아무래도 그렇지. 주인공의 모험이 시작되는 연두마을과 인주시티의 위치를 생각해 보면 이 체육관은 네 번째 차례쯤 될 거다. 누구만 아니었어도 이럴 일은 없었는데 말이지. 이번엔 눈만 굴려 관중석에 자리 잡은 실버를 흘긋거렸다. 그가 적당한 대답을 찾는 사이, 유빈이 먼저 선수를 쳤다.
“어쨌든, 배지 개수를 고려해서 싸울 테니 너무 긴장하진 마시고요.”
“네.”
낯을 많이 가리는 걸까. 혹은 무언가 숨기는 게 있는 걸까. 유빈은 ‘네’라는 대답 외에 어떤 말도 하지 않는 상대를 유심히 살폈다. 배지 한 개의 도전자는 모자에 후드까지 뒤집어써 얼굴을 꼭꼭 숨기고 있었다. 헐렁한 외투로 몸을 가려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성별을 유추할 수 있었다.
발끝에서부터 스멀거리며 올라오는 묘한 느낌. 허나 부정적이진 않았다. 유빈은 어쩐지, 재밌는 시합이 될 것 같다고 직감했다.
그가 심판에게 눈짓했다. 심판이 고개를 끄덕이곤 오른팔을 들며 크게 외쳤다.
“시합 시작!”
“가라, 고오스!”
“피카츄.”
볼에서 튀어나온 피카츄가 호기롭게 자세를 취했다. 피카츄는 이미 싸울 준비가 되어있었다. 아니, 싸움을 기대하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 피카츄, 훌륭하네요. 첫 타자로 피카츄를 선택한 이유가 있나요?”
“….”
없어, 인마. 굳이 따지자면 피카츄 혼자서도 가능한 일을, 괜히 다른 애를 내보내 귀찮은 상황을 만들기 싫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했다간 배지 한 개 주제에 재수 없게 군다고 생각하겠지.
제노가 대답하지 않자 유빈은 그 행동을 멋대로 해석했다.
“뭔가 계획이 있단 뜻이군요. 좋아요, 그럼 선공할 기회를 드리죠.”
그럼 사양하지 않고. 제노는 감사 인사 대신 피카츄에게 눈짓했다. 피, 하고 작게 답한 피카츄가 온몸에 전기를 둘렀다.
고오스는 고스트, 그리고 독 타입. 어떤 기술을 쓰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전기 타입인 피카츄와는 상성만으로 따지자면 어느 한쪽이 불리하지도 유리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최면술이나 저주 등의 기술은 여러모로 일을 귀찮게 만들었다.
일순 피카츄의 모습이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 고오스를 치고 지나간 섬광이 눈에 들어왔다. 고오스는 급소를 제대로 맞았는지, 원래의 자리에서 밀려난 채 쓰러져있었다.
“… 고, 고오스 시합 불가능!”
뒤늦게 심판의 판정이 내려졌지만 배틀을 하는 유빈은 물론 관중석 또한 고요했다. 모두가 방금 일어난 일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 사람과 한 피카츄만 빼고.
결론적으로 제노가 선택한 방법은 일타일피. 상대가 기술을 쓸 틈을 주지 않고 최대한 빨리 경기를 끝내는 것이었다.
“당신, 배틀에 아주 익숙한가 보네요?”
“….”
“좋습니다. 선공을 내어드리는 건 이번이 마지막인 걸로 하죠.”
고오스를 몬스터볼로 돌려보낸 유빈이 평소와는 다른 미소를 지었다. 그 얼굴에는 호승심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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