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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KMN/레드그린&단델금랑] Anchor

찬란하게 강한 라이벌의 등 뒤를 쫓다가 결국은 고꾸라진 사람

2022.08.14. 야생의 배포전이 나타났다!에 발간했던 Anchor를 유료발행합니다(후기페이지 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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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존 공개된 샘플분량을 조금 늘렸습니다

[ 읽기 전에 ]

- 이하 소설은 포켓몬스터 시리즈의 2차창작으로, 원작 및 게임사와는 일절 관계가 없습니다

- 시계열은 소드실드 본편 이후, 소도실디 사건 전입니다

- 커플링 요소는 희박하나, 편하실 대로 읽어주셔도 됩니다

- 확실한 시간의 흐름이 나오지 않은 세대 간을 1년으로 계산하여(RG-GSC 3년, BW-BW2 2년), 어쨌든 1세대 조가 한 살이라도 연상으로 가정하고 썼습니다

- 원작 및 타 매체에 등장하지 않은 설정은 전부 팬피셜입니다


까만 스냅백이 허공에 떠올랐다가, 툭, 하고 엉망진창이 된 배틀필드 위에 떨어졌다.

챔피언타임은 끝났어... 최고의 시합을 만들어줘서 고맙다!

와아아―!

일순 정적에 휩싸였던 경기장은 눈앞에서 벌어진, 지금껏 정지되어있던 어느 톱니바퀴가 끼익 움직여 앞으로 나아갔음을 직관적으로 인지했다. 온 사방이 쩌렁쩌렁하게 울린다.

단델과 우리의 승부 도중에 저도 모르게 일어난 관람객은 많았고, 특등석에 있는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금랑 역시 제가 언제부터 자리에서 일어났는지 기억에 없지만, 그만큼 이번 시합이 흥미진진했다는 증거였다. 귀 따갑도록 함성이 울려 퍼지는 와중에 금랑은 일말의 안도를 느낀다. 이제 단델도 오로지 쫓기기만 할 필요가 없어졌다. 모두가 강한 가라르. 그래서 더 신나는 배틀을 할 수 있기를 바라온 건 저나 그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뒤이어 찾아드는 건 약간의 씁쓸함이다. 십여 년을 시뮬레이션했을 적에는 제가 필드 위에서 이 함성을 듣고 성취감에 젖었으니.

곧 생각을 바꾼다. 모두가 강한 가라르, 이래저래 꿈꿔왔던 미래가 실현된 거 아닌가. 라이벌이 하나 더 늘었을 뿐이지. 신·구 챔피언은 배틀 스타일 자체가 다르니 전략을 짜는 재미가 두 배가 된 거다.

후련하면서도 어딘가 시원섭섭했다. 어쩌면 단델의 유일한 라이벌이라는 칭호는 느끼지 못했을지언정 짐이었을지도 몰랐다. 이것이 허탈함을 닮았다고 깨닫는 것은 좀 더 후의 이야기다.

아침햇살이 창 너머로 비추고 있다. 널찍한 책상 위에는 신문 몇 가지가 놓여있다. 문을 열고 들어온 밝은 갈색 머리칼의 남자는 자연스럽게 개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온라인 매체가 발달한 시대여도 종이 위의 활자는 꽤 각별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마을 소식을 접하는 데에는 신문만 한 것이 없다. 태초마을, 상록시티, 회색시티를 아우르는 관동 서쪽의 지방지에는 별다른 소식은 없다. 관동 전체를 보더라도 평화롭다. 하기사 두 차례나 악의 조직이 격파된 땅이고, 각 관장을 비롯하여 이곳의 트레이너들은 충분히 강하니까, 웬만한 일은 지방지나 신문에 날 일 없이 알아서들 처리했을 테지.

햇빛에 닿아 녹색으로 보이는 눈동자가 이내 외국어로 된 신문을 집어 들었다. 호연, 신오, 칼로스, 얼마 전에 들렀던 알로라에 이어 가라르 신문을 집어 든 그가 눈을 크게 떴다. 1면부터 대문짝만하게 실려있는 스타디움의 한가운데, 우승컵을 든 사람이 낯선 트레이너였기 때문이다. 지난 몇 년간은 거의 똑같은 구도의 사진만 봤었는데.

남자, 그린은 곧 익숙한 모양새로 스마트로토무를 부르고 동시에 포켓기어를 꺼내 들었다. 스마트로토무에 자기가 찾는 착신 기록이 없는 걸 확인한 그는 짧게 혀를 차고서 포켓기어의 단축키를 눌렀다.

“레드 녀석, 이번에도 안 받았다간 한 대 쥐어박아야지.”

알로라 지방에 다녀왔던 즈음부터야 열에 네 번은 연락받게 된 소꿉친구 녀석의 이름을 읊조린 그린의 시선은 제 주변을 뱅뱅 맴도는 스마트로토무의 화면에 떠 있는, 작년까지만 해도 저 1면을 나란히 장식했어야 할 누군가를 걱정했다.

“그건 그렇고 저 녀석, 괜찮을지 모르겠네.”


세상은 그리 쉽게 무너져 내리지 않는다. 그건 지난 십 년 동안 끈덕지게 가라르의 최정점을 물고 늘어져 왔던 드래곤스톰이 제일 잘 안다. 겨우 한 번의 패배가 결정짓는 파멸이란 있을 수 없고(이번 블랙 나이트처럼 대륙의 사활을 건 게 아닌 이상!), 무너진 공든 탑이라도 그걸 쌓으며 다져온 내실은 분명히 남는다.

매스컴에서 무어라 물어뜯건 금랑의 일상은 여전했다. 너클시티는 누구보다 오롯하게 저의 편이고, 전설의 재현에 유물의 발굴까지 겸해서 박차가 가해진 사학계는 뜨거워서 새로 나오는 저널과 논문을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예나 지금이나 똑같이, 단델과는 틈나면 비공식전을 가졌다. 예전부터 직책이고 시간이고 무관하게 그래왔던 거라 위원장직을 인계받고 있다는 중에 연락이 왔을 때는 그냥 허탈하게 웃었더랬다. 서류 작업이 생각보다 스트레스를 준다고 밤 10시가 가까워서 대뜸 불러내는 게 어디 있나. 거기에 신나게 응한 저도 똑같은 놈이겠지만.

이제 거기에 캠핑 중이던 우리가 배틀하자고 끼어들거나, 시간 되는 누군가를 불러서 저기 알로라에서 한다는 배틀로얄 룰로 온종일을 불태우기도 했다. 하나 지방의 트리플 배틀 정도가 고작이었던 그때에 비하면 상당히 풍성한 배틀 라인업이 아닐 수가 없다.

그렇게 몇 차례 질풍노도의 배틀을 마쳤던 어느 날에 고무받은 단델이 예전부터 구상했었다던, 배틀타워를 들고 오는 바람에 더욱 바빠지긴 했다. 호연 지방에 있다는 배틀 프런티어만큼 다양한 걸 갖추기는 현재로선 무리니까, 그 외 다른 지방에도 손쉽게 도입되었다는 배틀타워부터 도입하고 싶다고 말하며 눈을 빛내는 그 순수한 열망이란 예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모두가 강한 가라르를 만들고 싶다던 라이벌의 소원을 처음 들었을 때처럼, 금랑은 즐거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아주 문득, 한편에 빠끔히 난 구멍을 느꼈다.

그리고 보면 이제 단델의 라이벌은 저뿐만이 아니다. 아니, 단델은 언제라도 가라르의 모두를 라이벌로 생각해왔다. 유일무이하다고 여겼던 건 저 혼자만의 이야기가 아닌가.

그날의 함성이, 왠지 먼 데에서 울리는 듯한 그때의 어지럼이 되살아났다. 유리된 듯한 이 느낌은 어니언이 언젠가 유체이탈에 관해 설명했던 감각과 비슷할지도 몰랐다.

“금랑, 표정이 안 좋은데, 상태가 안 좋은 거면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까? 네가 수석관장으로서 할 일이 많은 건 아니까, 여기에 배틀타워 더블배틀 부문 자문위원까지 얹는 건…….”

“뭔 소리야, 단델. 이몸이 아니면 가라르의 누구한테 더블배틀 자문하려고? 하나 지방의 서브웨이 마스터라도 초청할 셈이야?”

단델이 제 안색이 안 좋다고 말을 꺼냈다. 표정 관리에는 자신이 있지만 그게 드러날 정도로 충격이 컸던 건지, 그게 아니면 단순히 오래된 사이가 그러하듯이 단델이 미약한 변화를 알아차린 건지 모르겠다. 어느 쪽이 되었든, 금랑은 더블배틀 부문 자문위원의 자리는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단델 딴에야 저를 걱정한다고 한 소리지만 완전히 역효과다. 스파이크마을이 클래식배틀을 강경하게 고집하는 것처럼 너클시티 역시 더블배틀을 고수하고 있다. 두송과는 그런 점에서 반골 기질이 잘 맞는다.

싱글·다이맥스배틀이 만연한 가라르에 새로운 바람을, 그것도 저의 주특기인 더블배틀을 도입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남의 손에 맡기는 건 여덟 배지의 지킴이이고 수석관장이며 감히 가라르 최고의 더블배틀 유저라고 자신하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자문위원 자리를 다른 사람한테 넘기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 그랬다간 십 년은 사석에서 얼굴 맞댈 생각하지 말라고 단단히 으름장을 놓아두고서 금랑은 너클시티 외곽의 제집으로 돌아갔다. 머리가 아팠다. 어쩌면, 저는 지금 목표를 잃어버린 걸지도 몰랐다.


가라르의 남단에 있는 브래시마을에 아머까오 택시가 내렸다. 강철 합금으로 만들어졌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가벼운 소리로 승차함이 내리자, 안에 타고 있던 남자 하나가 가볍게 휘파람을 불었고 그 옆의 동행자는 말없이 눈을 빛냈다. 무릎 위에 올라타 있던 피카츄 역시 꺄아, 소리를 내며 귀를 쫑긋거렸다.

허리춤의 볼 홀더를 보지 않더라도 두 사람은 트레이너가 분명했다. 한적한 마을임에도 저희에게 별다른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은 이곳이 유동인구가 많다는 증거이기도 할 것이다. 하긴, 이 바로 아래에 있는 펄롱마을에서 두 번이나 연속으로 챔피언이 나왔으니 관광객도 많을 것이고, 갑옷섬이나 왕관설원이라는 곳으로 가는 노선이 있으니 낯선 트레이너가 오가는 것쯤은 특이한 일이 아닐지도 몰랐다. 이런 점은 평화로운 저희 태초마을이나 상록시티하고는 다르다고 생각하면서, 그린은 이미 택시에서 내려 새로운 땅에 흥미를 느끼는 오랜 친구를 내버려 두고 아머까오 택시기사에게 운행비를 냈다. 팁까지 얹어 꽤 두둑한 값이었다.

“무리하게 장거리 비행을 부탁드렸네요. 제 멍청한 친구 놈 때문에 아머까오가 고생이 많았어요.”

“하하, 뭘요. 손님께서 적당한 때에 휴식 시간도 제안해주시고, 그때마다 우리 애를 잘 먹이기까지 하셨잖습니까? 팁은 넣어두세요.”

“아뇨, 이렇게 잘 육성된 아머까오를 만난 것도 행운인걸요. 이 애한테 수고했다고 뭐라도 해주시는 거로 부탁드립니다. 그건 그렇고―야, 레드! 너도 뭐라도 인사는 해야 할 거 아냐!”

“……감사합니다.”

“너, 너어는 진짜! 얘는 배틀하려고 육성된 애가 아니니까 눈 빛내지 마, 멍청아! 죄송합니다. 이 녀석, 완전 배틀바보라서요.”

택시기사는 두 사람의 아웅다웅에 껄껄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확실히 이 두 사람은 외지인이 맞다. 가라르 사람 열에 아홉은 전문적인 트레이너가 아니더라도 포켓몬 배틀하면 다 같이 열광하는 족속들이니까. 제 파트너인 아머까오도 얌전한 성격이어서 그렇지, 택시조합 내에서 친선경기를 하면 내빼지 않는 녀석이다. 물론 지금은 장거리 비행 직후라 레드라고 불린 손님의 소원을 이뤄주기는 무리지만.

“그런데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그러다가 줄곧 제게 어른스러운 대응을 하던 쪽의 손님마저 아머까오의 육성을 어떻게 했는지 물어왔다. 그리고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그 애를 쓰다듬어봐도 괜찮겠냐고도. 아까와는 달리 훨씬 나잇값을 하는, 반짝반짝하는 눈이었다. 이 지방의 챌린저들이 흔히 그러하듯이.

“…….”

“뭐, 왜, 뭐! 너도 쟤는 쓰다듬어보고 싶어 했잖아?! 내가 대신 말해준, 아니, 왜 말이 그렇게 되는 건데? 네가 열 살배기 애야?!”

대체 저 과묵한 손님하고 어떻게 대화가 되는지는 내도록 수수께끼지만. 어쨌거나 유쾌한 사람들이고 좋은 트레이너임은 분명하니 괜찮았다. 게다가 파트너를 좋게 봐주기도 했고. 택시기사는 다음에 슛시티로 돌아가게 된다면 한번 부르라고 명함을 건넸다. 이대로 바우마을 쪽으로 가서 관광객의 호출을 받으면 딱 맞겠지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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