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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KMN:SwSh/금랑] Bless You

네가 지키는 보물이 오래도록 빛나기를, 다채로운 보물들이 너의 영혼을 수놓기를.

2022.08.14. 야생의 배포전이 나타났다!에 발간했던 인외 용금랑 Bless You를 유료발행합니다(후기페이지 제외)

* 포스타입/투비에서 구매하셨던 분들은 그쪽에서 소장본으로 계속 열람이 가능합니다. 구매를 재고해주세요.

샘플은 포스타입 내 용금랑/무제로 대체합니다

[ 읽기 전에 ]

- 이하 소설은 포켓몬스터 시리즈의 2차창작으로, 원작 및 게임사와는 일절 관계가 없습니다

- 금랑이 진짜 용이라는 설정을 바탕으로 진행됩니다

-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모브캐가 일부 등장합니다

- 시계열은 소드실드 본편 이전부터 무한다이노 사태 즈음까지

- 목호 님에 대한 일부 설정은 포켓몬스터 스페셜(포케스페)에서 발췌되었습니다

- 원작 및 타 매체에 등장하지 않은 설정은 전부 팬피셜입니다

- 이야기를 일부 틀었기 때문에, 소드실드 본편과는 다소 차이가 나는 부분이 있습니다


용들이 있다. 드래곤 타입 포켓몬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전설 속에 나오는 그런 용들이. 비단 가라르에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다. 창조신이 아르세우스라는 포켓몬인 것처럼, 시공간을 가르는 것이 디아루가와 펄기아인 것처럼, 그저 창세부터 이 땅에, 시계열에 드문드문하게 박혀있는 존재였다.

드래곤 포켓몬의 서식지는 그 수가 얼마 안 된다고 알려진, 꼭 트레이너가 아니더라도 모두가 널리 알고 있는 상식이다. 그리고 진짜 용들이 태어나고 자라는 곳은 그보다 훨씬 더 적었다.

드래곤 포켓몬의 성지로 유명한 성도의 검은먹시티라거나, 용과 함께 살아온 하나 지방의 쌍용시티는 비단 드래곤 포켓몬만을 품는 땅은 아니었다. 쌍용시티 근방의 산맥은 실제로도 용이 사는 땅이었고, 드물게나마 검은먹시티에서도 용이 태어나곤 했다. 동족과 그들과 소통할 수 있는 극소수의 인간만이 그 존재를 인지했다.

현재 세대의 드래곤 로드는 목호였고, 그가 자리에 앉은 이후에 태어난 어린 용은 셋이었다. 둘은 고향인 쌍용에, 관찰자인 용으로서 자연의 배경이 되어 머무는 길을 택했고, 딱 하나, 제일 막내용은 당시엔 쌍용시티의 관장이었던 아이리스와 자주 어울린 영향이었을까 사람 사이에서 살겠다고 생떼를 부렸다. 한때 인간의 존재를 참지 못하고 다 엎어버릴 뻔했던 전적이 있는 목호로서는 그 말랑한 주장을 쥐어뜯어 말리고 싶었지만 그러지는 않았다. 우선 그 일은 로드 자리를 받기 이전, 치기 어린 시절의 일이었으며(물론 그때의 견해가 크게 바뀌지는 않았다. 다만 괜찮은 인간의 면면을 보아 덮어두기로 한 것이지)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는 용의 절대적인 공리 때문이었다. 모든 용은 자유로워야 한다. 그가 머문다면 오로지 스스로 택했기 때문이어야 하며, 그가 떠난다면 그조차도 자의에 의해서야만 했다.

쌍용시티는 막 알에서 깬 용들이 제 몸 하나 가누기까지를 익히는 용들의 요람이기도 했다. 아르세우스가 혼돈과 질서를 가르고 펄기아와 디아루가를 만들어 공간과 시간을 창조한 이래, 쌍용시티는 늘 그래왔다. 용과 더불어 살아가는 그곳은 편리한 문명을 받아들이기는 했어도, 끝끝내 역사와 전통을 중요시하여 소중하게 여기는 마을이었다. 지금까지도 용과 대화할 수 있는 이들이 남아있는 곳이고 전 지방을 통틀어서 유일하게 드래곤 로드와 소통하는 곳이기도 했다. 그들이 남긴 유전자쐐기를 감히 보관하게 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아이리스가 사간과 더불어 그곳의 관장이었던 시절, 아직 폴리모프조차 불가능했던 해츨링인 금랑은 곧잘 쌍용시티 체육관 옆의 작은 숲에서 놀았다. 날 때부터 용의 존재를 알고 더불어 살아가는 쌍용시티 주민이면 모를까, 외부인에게는 모습을 보이는 건 삼가라는 당부에 따라 그 숲은 어린 용의 아지트였다. 때때로 포켓몬 배틀을 곁눈질로 구경하고, 아직은 어린아이기도 한 아이리스가 멋대로 창문을 넘어와 같이 놀기도 하고. 인간사회에서 살아갈 때 알아야 할 것들을 차근차근 배워나갔다.

그렇게 다섯 해가 지났고, 조금씩 세를 늘리던 플라스마단에 의해 하나 지방이 어수선해졌다. 인간이 만든 난리통은 본래 관망하는 것이 기본인지라, 자연의 일부로 남은 용들은 산이 깨어지고 샘이 넘치는 것을 방조했고 사람 사이에 살겠다고 선언한 금랑이 겨우 유전자쐐기의 힘을 배워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폴리모프해 목호와 함께 성도의 검은먹시티로 넘어갔다.

인간사회에 산다고 하면 대체 무엇을 할 것인가에 관한 질문은 검은먹시티에서 이뤄졌다. 챔피언인 목호가 피후견인이라며 데리고 온 붙임성 있는 아이는 유적이나 보물에 관심이 많았고, 마지막 배지를 지키는 마을인 만큼 챌린저가 드물어 여유시간이 나는 이향이 아예 나서서 용의 사당을 비롯한 드래곤 관련 유적은 싹 구경시켜줬다. 급기야는 아르세우스를 부르지 않고서는 갈 수가 없는 신도 유적마저 본신의 모습으로 문을 열고 들어가 보여주기까지 했다. 물론 돌연 드래곤 타입의 신화 트리오를 만난 어린 용은 무척이나 기뻐했다.

목호는 역사에 열렬한 관심을 보이는 어린 용이 신오 지방에 정착할 거라고 예상했다. 그래서 신오 지방의 챔피언이자 그가 용임을 밝히기도 한 믿을만한 사람인 난천을 통해 봉신마을로 보낼 준비를 해야지 않을까, 했을 무렵의 일이었다.

가라르 지방에 변혁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2만 년 전에 그 지하에 갇혀버린 오랜 용이 있는 땅. 틀림없이 그 용의 기운 때문에 생겨났을 다이맥스 현상이 간신히 과학의 틀 안에 들어왔고, 그건 가라르인의 괄괄한 성정과 합쳐져 다이맥스 배틀이라는 것을 만들어냈다. 가라르 외의 지방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인지라 관련 영상을 받아온 목호가 배틀 비디오를 틀었고, 당연히 이향도 금랑도 그걸 보았다.

18년 동안, 그러니까 목호가 인간 나이로도 아직 치기 어렸을 무렵부터 쭉 바뀌지 않았던 가라르의 챔피언이 겨우 열 살의 샛별에게 자리를 내어준 날의 결승전 비디오였다. 클래식 배틀을 주로 하는 목호나 이향은 금방 그 뒷면에 남아있는 어른들의 사정을 읽어내긴 했으나, 저 샛별의 재능만큼은 진짜라는 데에 의견이 모였다. 그리고 금랑은, 숨도 안 쉬고 경기를 쭉 보더니만 벌떡 일어나 외쳤다.

“이몸은 가라르로 갈래! 저기가 좋아!!”

필드 위에서 반짝반짝 빛나던 순금의 눈동자가 이 어린 용을 사로잡은 것이 분명했다. 용의 선택은, 그것도 이렇게 자발적인 선택은 그 누구라도 막을 수가 없다. 목호는 그길로 용이 잠들어 있는 땅, 너클시티의 짐리더 브람에게 연락했다. 고룡은 젊은 용의 연락을 기쁘게 받았고, 갓 태어난 거나 다름이 없는 아가 용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흔쾌히 수락했다. 성도의 챔피언이 너클짐으로 한 달짜리 연수를 간 데에는 그런 배경이 있었다.

브람이 고룡이기는 하지만 너클시티에 제 정체를 밝히지는 않았다. 애시당초 가라르는 용의 존재가 알려진 땅은 아닌 탓이었다. 본인의 연수를 빙자한, 금랑의 가라르 적응기 동안 목호는 조금 더 오래 산 용으로 남길 수 있는 간섭을 최대한으로 했다.

“가라르에선 본신으로 있을 날이 없을 거야.”

“괜찮아요~.”

“네 보물은 잘 선별하도록 해. 모든 사람이 네 보물일 수는 없어. 무슨 말인지 이해 못 하더라도 일단 새겨두렴.”

“음, 그치만 여기 너클시티 사람들은 다들 이몸한테 소중한—네에~ 알겠습니다.”

목호가 질책하듯 쏘아보자 금랑은 애교스러운 눈길로 무마하려고 들었고, 이 애가 도무지 제 말을 알아먹지 못했다는 것을 확인한 드래곤 로드는 다시금 한 글자씩 또박또박 말했다.

“하아, 어쨌거나 너도 용에게는 자기가 지키는 보물이 소중한 건 알겠지. 로드된 나로서, 금랑 너는 내가 지켜야 할 보물 중 하나란다. 네 보물이 너를 상처입힌다면, 난 너를 보호할 의무이자 권리가 있어. 그런 날이 온다면 나는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멀뚱멀뚱 이쪽을 바라보는 말라콰이트가 어쨌거나 자기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목호 님이 달려온다, 정도만 파악한 듯은 했다. 됐다, 그것만 알아도 밑밥은 깔린 셈이다. 이 어린 용은 아직 인간의 악의와 추악함을 겪어보지 못했다. 목호는 그저 이 애가 충분히 강인한 개체이거나, 만일의 사태가 벌어졌을 때 제가 늦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것도 아니면, 차라리 이 바닥에 잠들어 있는 고대의 용이 날뛰어주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지. 같은 용이 아니고서야 기척조차 희미한 감이 있는 아주 오래된 존재를 느끼며 목호는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가라르에 오랜 용이 잠들어 있다는 사실은 용들이 아닌 이상에야 모르는 일이었다. 블랙 나이트와 두 용사로 기록되어있는 그것은 용의 존재를 은연중에 암시하고 있지만 썩 많이 왜곡되어있어, 가라르 내의 학계에서도 비주류 파로 통했다. 때문에 너클시티의 수장은 제가 용임을 밝히지 않았다. 아니, 저를 비롯하여 선대에 있던 용도 그랬다. 굳이 인간사회에 풍파를 일으킬 필요는 없다. 이 세상에는 신비한 생명체가 있고, 그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데 굳이 저희마저 끼어들 필요는 없다. 게다가 인간이 어디까지 악독해질 수 있는지, 이미 잘 알고 있기도 하고.

브람은 신문 기사 하나를 다 읽고서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챌린저에서 사업가로 변신한 로즈. 이 자는 ‘용’을 눈치챘다. 매크로코스모스를 선두로 온갖 곳에 발을 들이민 로즈가 에너지사업에도 뛰어들었다는 기사였다. 나라가 붙들어야 할 에너지사업을 사익추구의 기업가가 하겠다고 덤비는 건 명백하게 이상했다. 로즈가 그럴싸한 말로 포장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인간들에게나 통할 이야기다. 곧 그의 시선이 신문 아래에 깔린 편지로 향했다. 발신인은 예의 그 사업가, 로즈다. 에너지 플랜트 관련으로 너클시티의 수장을 만나고 싶다는 요청이다. 너클시티의 수장은 지금쯤 마을 구석구석을 쏘다니며 주민들과 놀고 있을 어린 용을 떠올리며 결심했다.

인간이 불러올 재앙에 용은 대체로 개입하지 않는다. 그건 옛날이야기에서처럼 언제나 용사가 안배되어있기 때문이다. 아니, 누군가는 용사가 된다고 해야 맞을까. 이야기는 늘 벌어진 후에야 기록되기 때문에, 용사는 처음부터 그리 태어난 게 아니다. 고룡 브람은 제가 해츨링일 적에 얼핏 보았던 다른 용의 입으로 들었던 두 청년의 평범한 모습을 떠올리며 추억에 잠겼다. 인간은 늘, 인간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힘이 있다. 용에게 격언처럼 주어지는 말이다.

가라르에 정착하겠노라 선언한 귀여운 꼬마용을 위해 만 년은 족히 산 고룡은 지혜를 전수한다. 인간은 인간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힘이 있단다, 아가. 우리는 지켜볼 뿐이야. 우리 보물이 어떻게 나아가는지, 그 눈부심이야말로 최고의 반짝임이지. 그들이 절대로 손을 못 쓸 자연재해를 막아주는 정도는 해도 괜찮단다. 알겠니? 아주 오래전에, 한때는 로드의 좌도 겪은 용이 화톳불 앞에서 조곤조곤 해주는 이야기는 이면에 숨겨져 있으면서 사실은 드러나 있는 것들이었다. 예를 들어, 전통이라는 이름 아래 남아있는 너클시티에만 전해지는 가사들, 가라르 대부분의 지방과는 결이 다른 동화들, 대립하는 용이 아니라 사람과 함께 몸을 누이며 더불어 사는 용, 보물을 소중히 여기며 굳건하게 지키는 용….

먼 옛날, 아직 포켓몬과 인간의 구분이 뚜렷하지 않던 시대에는 이곳이 드래곤의 성지라는 인식이 퍼지는 건 쉬웠다. 우리는 모두 유서 깊은 용의 후예이며, 가라르 지방에 퍼져있는 사특한 무리와는 결이 다르다는 자긍심이 있는 너클시티 시민들은 정말로 용과도 같아 보였다. 물론 그럼에도 본인들이 정말 용과 같은 공기를 마신다는 생각은 못 한 듯하지만. 땅 아래에도, 땅 위에도.

 

와일드 에리어 중에서도 유독 거친 땅에 터를 잡고 살아온 너클시티의 사람들이 지켜낸 도시는 그 자체로 커다란 둥지였다. 어른들은 모두가 아이들이 보호자였고, 아이들은 모든 이들의 자녀. 친부모를 잃은 아이도 보살핌의 손길이 그 무엇 하나 끊기지 않은 채로 한 명의 어른으로 자라날 수 있는 곳이었다.

때문에 성도 지방에서 수행을 위해 들린 목호가 예닐곱쯤 되어 보이는 남자애를 브람에게 맡아줄 수 있느냐고 물었을 때, 그도 마을 사람들도 모두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나이 들고 현명한 용이 거절하지 않았으니, 저 애는 저희와 함께 살 어린 용이었다.

와일드 에리어가 쾌청일 때처럼 쨍쨍한 말라콰이트 빛깔의 눈동자를 지닌 아이, 금랑은 금세 너클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과 어울렸다. 드래곤 타입 포켓몬이 유독 그 아이를 따랐다. 때때로 너클시티 자경단은 와일드 에리어에서 유기됐거나 무리 경쟁에서 밀린 소수 개체의 포켓몬을 보호소로 데리고 오곤 했다. 지금 금랑의 파트너 중 하나인 플라이곤, 어릴 적의 톱치는 그렇게 처음 만났다.

발견은 금랑이 했다. 그날은 드물게도 금랑이 순찰에 따라가고 싶다 말을 꺼냈고, 브람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으며, 유독 감이 좋은 소년을 알고 있는 어른들은 아직 몬스터볼을 움켜쥐기엔 작은 손이 가리키는 방향을 위주로 순찰했다. 너클 구릉을 지나, 모래구덩이로. 때때로 모래가 이는 사막의 한구석을 아이가 가리켰다. 원뿔형으로 무너진 모래구덩이가 있다. 톱치의 흔적이었다. 다만, 그 주변에 깜눈크 두세 마리가 얼쩡거린다는 게 차이였다. 마치, 콩고물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듯한 분위기로.

깜눈크는 이곳 와일드 에리어의 토종 포켓몬은 아니다. 스파이크 마을 옆의 바다를 건너 자리한 갑옷섬에 서식하는 포켓몬이지만, 사람 손길이 닿은 곳이라면 흔히들 방생을 가장한 유기가 벌어지기 마련이고 그런 식으로 흘러들어온 외래종 같은 거다. 그렇게 큰 세력을 이루고 있지는 않지만, 가뜩이나 영역 내의 다른 포식자들과 먹이를 나누어 먹을 정도로 성정이 유한 플라이곤의 개체수 유지에는 치명적이었다. 깜눈크와 톱치가 같은 환경에서 자라나니 당연했다. 톱치가 제아무리 많을지라도 한 번도 안 뒤집히는 때는 없을 것이며, 때때로 거센 바람이 불어닥치는 이곳 와일드 에리어에서는 더하다. 너클의 어린 용은 망설임 없이 그 구덩이로 뛰어들었고, 곧 베테랑 트레이너 두엇이 구조대에게 이것저것을 지시하며 따라 내려갔다.

톱치가 있었다. 모래구덩이에서 뒤집힌 채로. 드러난 뱃가죽을 깜눈크 두 마리, 악비르 한 마리가 갉작이고 있었다. 껍데기를 깨서 속살을 파먹으려는 게 분명했다. 금랑은 겁도 없이 발을 굴러 그들의 주의를 끌었다. 새까만 눈동자들과 파랗게 일렁이는 눈길이 마주쳤다. 자경단 순찰조 조장은 전투를 예상하고 볼 홀스터의 제 파트너를 꺼내려 했으나 이내 멈추었다.

깜눈크는 물론이고 악비르조차 제 몸집보다 조그마한 아이의 눈길에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나더니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 같은 것을 내고는 모래를 파고 사라졌다. 도망친 것이다. 잠시간 의아해하던 톱치는 딱딱 집게를 부딪치며 버둥거렸다. 당황한 듯했다. 그렇지만 곧, 아이가 손을 대었을 때는, 놀랍도록 얌전해졌다.

“그건 꼭 기적 같았죠. 하긴, 브람 님이 데려온 아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이해했던 것 같네요.”

“어머니한테 들었던 옛날이야기랑 똑같았다니까요? 지금 브람 님이 데리고 있는 액스라이즈도 저런 식으로 만났다고 했어요. 색이 다른 녀석이라 무리에서 배척받던 모습을 보시고, 발을 굴러 일갈하더니 액스라이즈며 액손도가 보는 앞에서 그 터검니를 안아 들고 왔다고 했거든요.”

브람은 자경단원에게 그 소식을 듣더니, 곧 그 애를 자신의 뒤를 이어갈 수호룡으로 지목했고 마을은 만장일치로 그 결정을 따랐다.

 

포플러 관장은 브람이 고룡이라는 사실을 아는 유일한 가라르인이었다. 우스갯소리로 루미너스 숲에서 태어난 요정이 대를 이어가며 사람 흉내를 낸 게 포플러 님이라는 이야기가 돌았지만, 그는 명실상부하게 인간이었고 페어리 타입같이 이종의 마음을 이해하는 자일 뿐이다. 마치 저 하나 지방에 용의 마음을 아는 소녀가 있다는 것처럼.

존재를 이해받는 것은 상당히 중요하다. 자아는 저 스스로도 서 있는 법이라지만 누군가와의 교류를 통해서 다채로워지기도 한다. 때문에 유일한 인간 이해자로서 그는 종종 너클시티에 방문하곤 한다. 숲을 산책하다가 길을 잃거나 보물고 안쪽 수장고로 숨어든 요정을 데려오기 위한 적도 있고, 지금처럼 단순히 놀러 오는 일도 있었다.

“어머나.”

“오랜만이야, 포플러. 이 애는—.”

“안녕하세요~ 이몸은 금랑! 브람 님, 이 사람이 그때 말한?”

포플러는 브람의 곁에서 낯가림도 없이 불쑥 튀어나온 꼬마애를 보았고 곧 눈을 갸름하게 떴다. 말하는 투나 태도에서 용들은 이렇게나 차이가 나는데, 어째 사람들은 알아보지를 못하나. 뭐, 핑크함도 분간 못하는 이들이 천지에 널렸으니 그럴 수도 있나. 포플러는 아이의 골격을 되짚고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보더니 불쑥 물었다.

“갓 태어난 새끼용이구나.”

“이몸 9살이거든요?! 저기 비브라바 길 톰슨 아저씨 아줌마네 둘째 애가 갓 태어난 사람이겠지!”

“그건 사람 나이로 정한 거잖니. 금랑, 아가야, 용으로 치면 넌 정말 갓난아기란다.”

“그치만 이몸은 사람들 사이에서 살 거니까, 사람 나이로 말해도 되는 거 아녜요? 용인 거 들키는 것도 문제라고 했으면서!”

포플러는 햇빛 아래에 잘 그을린 양 뺨을 부풀리고 발을 동동 구르는 아이에게서 시선을 들어 제 오랜 친우를 바라보며 웃었다.

“브람, 당신도 고생이 많구나.”

“오히려 보람차지, 포플러. 내 생에 두 번은 없을 일인데. 그러는 너는 아직 네 맘에 드는 핑크한 아이는 나타나지 않았나 봐?”

“요정과 같이 살 수 있을 핑크한 사람이 그리 쉽게 나타나는 건 아니니까 말이지. 어머님이야 나라는 행운이 있어서 쉬웠다지만, 흐음, 너희를 보니 굳이 혈연으로 이을 필요가 있나 싶어지더라고.”

옆에서 부루퉁해진 아가를 달래면서 티 타임이 이어졌다. 극단 중간 관리자가 포플러를 데리러 오고 난 뒤, 식은 잔을 만지작거리던 금랑에게 브람이 넌지시 말을 건넸다.

“인간의 조언이 필요할 때는 우선 포플러를 찾으렴, 아가. 내 오랜 친구는 이 땅에 잠든 존재를 알아. 의논 상대가 되어줄 게다.”

금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이지만 때때로 인간을 초월해서 말하곤 하는 아라베스크의 수장은 정말 요정이나 다름이 없어 보였다.

브람은 제 집무실 책상에 올라와 있던 에너지 플랜트 관련 서류를 다시 한번 떠올렸다. 그는 다음 세대가 품고 있는 가능성을 믿었다. 인간과 더불어 살아갈 이 어린 용이라면 분명 오랜 시간 묻혀있던 용을 설득해낼 수 있을 테지.


인간 나이로 열 살이 되자마자 덤벼든 챌린지 시즌에서 금랑은 당당히 세미 파이널 우승을 따내고 챔피언컵 출전권을 획득했다. 혜성처럼 나타난 신예 트레이너, 아직 한창 성장 중인지 팔다리가 유독 길쭉한 소년은 기어이 새로운 샛별 단델의 앞에 섰다.

소년, 금랑은 덩달아 기세가 오른 파트너들과 함께 눈을 빛내고 있었다. 곧 저 앞에 그의 보물이 나타난다. 바람처럼 자유로운 용의 마음을 사로잡아 이 땅에 내려앉게 한 금빛이. 심장이 두근거렸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이었다. 배틀하기 좋은 날이다. 단델은 입장 통로에 서서 저만치 울리는 로즈 위원장의 연설을 듣고 있다. 한낮의 스타디움은 관객들의 함성과 1라운드, 2라운드를 거쳐 달아오른 분위기로 후끈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일 년에 몇 번 볼 수가 없는 챔피언의 공식전이다. 보여주기가 아니라, 진짜 싸울 수 있는 배틀. 액시비션 매치야 심심찮게 한다지만, 챔피언의 자리는 이전에 챌린저 트레이너가 돌아다녔을 때만큼 마음껏 배틀을 하고 돌아다니지는 못했다. 무엇보다 많은 이들이 저와 승부하고 나면 떨어져 나가곤 했다. 오히려 챌린저 때가 더 즐겁지 않았을까, 하고 의구심마저 들 무렵에 나타난 엄청난 챌린저가 있었고 소년의 기대대로 그 애가, 파이널 매치의 상대로 올라왔다! 아주 오랜만에 느껴지는 기대감에 먼지가 내려앉았던 금안이 서서히 빛을 머금기 시작했다.

“기다리셨습니다, 챔피언 입장!”

귀가 먹먹한 함성, 들끓다 못해 터져나갈 듯한 열기, 맞은편에서 흉흉할 정도의 호승심을 지우지 않은 챌린저까지. 이곳만큼은 단델이 처음 트레이너가 된 이래로 바뀌지 않은 성지다. 여기서의 배틀만큼은 아직 바뀌지 않았다. 걸음은 천천히, 사방을 다 의식하면서 손을 흔들어주고, 미소는 잊지 않기. 로즈 씨가 몇 번이고 강조한 사항을 다 지키고서 지정된 위치에서 리자몽 포즈까지 취해주고 나면,

“얼굴 보기가 어렵더라, 너.”

—이제부터는 제 세상이다. 필드 위의 트레이너를 말릴 수 있는 게 파트너 말고는 또 누가 있나. 단델은 송곳니를 빼죽 내놓은 챌린저-금랑의 쭉 찢어진 미소를 기꺼이 맞이했다. 저 애의 경기를 직관으로 본 적은 없지만, 영상은 몇 번이고 돌려봤다. 단델이 알고 있던 드래곤 조련사들과는 어째 궤가 다른 배틀을 하는 소년.

오죽하면 단델은 챌린지 기간 내내도록 평소 찾지도 않던 아르세우스께 기도까지 올렸다. 제발 부탁이니 저 애가 올해 파이널 매치에 올라오게 해달라고. 저 애라면 정말 최고로 즐거운 배틀을 할 수 있을 것 같으니 불의의 사고가 일어나지 않게 해달라고. 금랑이 아라베스크의 포플러에게서 배지를 받아낸 직후의 일이었다.

눈앞에는 스마트로토무 화면을 통해서가 아닌, 날 것의 모습이 있다. 단델은 허리춤의 몬스터볼을 매만졌다.

“그러게. 나도 배틀 많이 하고 싶은데, 안 된다더라. 그래서 이날을 기다렸어. 네가 올라오기를 말이야.”

“오, 이몸을 아주 콕 점찍어 줬다 이거야? 영광으로 알아야 하나?”

가볍게 주고받는 말은 열 살이나 겨우 넘긴 애들이 하기엔 뭣한 감이 있긴 해도, 이곳에서는 괜찮았다.

트레이너 대 트레이너니까. 필드에 고여가는 긴장감에 주위의 소음이 잡아먹힌 순간, 다시 한번 눈과 눈이 마주쳤고,

“승부다!”

“와라!”

챌린저 금랑이 챔피언 단델에게 승부를 걸었다.

 

...피할 기력조차 남지 않아 마지막 결정타를 서로 얻어맞은 리자몽과 두랄루돈이 몇 초간 멈춰 섰고, 두랄루돈의 몸체가 기울었다. 최후의 최후까지 버티고 선 건, 챔피언의 리자몽이었다.

챌린저로서 전 챔피언에게 도전하기 직전에 진화했다던 그 일이 년의 차이 때문이라고 하기엔, 새로운 챔피언에게 도전해온 소년의 엔트리는 훌륭하게 목을 죄었더랬다. 실제로 몇몇 대목에서 관중은 물론이요 단델조차도 자칫하면 진다고 생각했으니까.

“아아, 졌네. 고생 많았어, 두랄루돈.”

동화에서 나오던 용처럼 살벌하게 저의 목덜미를 물어뜯으려 덤벼들던 챌린저는 마치 신기루처럼, 그 시퍼런 불길을 단번에 꺼뜨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제 파트너를 보듬었다. 반면에 단델은 목울림을 낼 기력도 없어진 리자몽을 볼로 되돌리고서도 여전히 핏줄을 바작바작 태우는 전율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서 있었다. 온갖 감정이 뱃속에서 뒤엉켜 구르다가, 기어이는 한 문장으로 터져 나왔다.

“금랑, 내 라이벌이 되어줘!”

머리 위에서 카메라 플래시가 번쩍번쩍 터져나갔다. 로즈 씨가 이마를 짚을 일을 터뜨렸을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단델에겐 그런 잡상 따위가 끼어들 틈이 없었다. 호적수를 만났다는 기쁨, 뇌까지 녹여낼 것 같은 배틀의 열기, 그리고 너는 꺾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염원까지. 금랑은 눈꼬리가 처진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무지개 같은 곡선으로 휘었다.

“좋아, 이몸이 네 라이벌이 되어주지! 내년에는 반드시 그 콧대를 꺾어주고 말겠어!!”

소년들의 낭랑한 웃음소리가 스타디움에 울려 퍼졌다. 그 순간 모든 사람이 실감했다. 명백하게 새날이 도래했노라고.

 

시대는 무서운 속도로 바뀐다. 저 끝에서 여기까지를 늘어놓고 보면 어떻게 이 격류 속에서 살아갔었나 의아할 정도로. 이제 자신이 표면에서 주체적으로 지낼 시간이 다 지났다는 것을 안다. 마냥 천방지축이던 어린 용은 훌륭하게 하나의 개체로 성장했고, 자신의 존재를 똑똑하게 새겼다. 이걸로 충분하다. 브람은 인수인계서류에 마지막 서명을 적고서 집무실 의자에서 일어났다. 용의 보존마법이 걸려있는 드래곤 점퍼를 벗어, 이제 퍽이나 사람테 나게 구는 꺽다리 소년에게 걸쳐주었다.

“자, 지금 이 시각부터는, 금랑, 네가 너클시티의 수호룡이란다.”

오랜 시간 이 마을을 지켰던 고룡은 어깨를 들어 오랜만에 제 날개를 꺼내 몸을 풀었다. 오래간만에 펼친 날개뼈에서는 으드득 소리가 났다. 방 하나를 감쌀 정도로 널따란 날개가 둥글게 두 사람을 감아 안았다. 마법진 같은 공간에서 브람은 이번에는 짐리더가 아닌, 이곳을 지켰던 수호자이고 자신이 꾸며온 굴을 비워주는 원주인으로서 금랑을 축복했다.

네가 지키는 보물이 오래도록 빛나기를, 다채로운 보물들이 너의 영혼을 수놓기를.

나직한 고대의 언어. 수장고 안쪽에 놓인 언어들보다 훨씬 더 오래전부터 존재하던 용언 몇 마디가 흘렀다. 일종의 성인식이기도 했다. 온전히 자기 보물고를 가지게 된 용이라는 증명과 그 자유에 따른 책임도 함께 짊어지게 된, 이 시대의 용이다. 브람은 부드럽게 웃어 보이고서는 집무실을 나갔다. 이 변화를 반쯤 깨어난 오랜 용이 모를 리 없었다. 지난 시대의 그림자는 자리를 비킬 때였다.

 

브람 님이 집무실을 나서기가 무섭게, 생경한 감각이 들었다. 적당히 조도가 낮은 방이 마치 생물의 몸체처럼 꿈틀대며 맥동을 뿌리는 듯한. 아, 그제야 깨달았다. 너클 지하에 잠들어있다던 오랜 용의 기척이다.

“안녕? 이몸은 금랑이야.”

마치 탐색하듯 샅샅이 훑는 느낌이 들었다. 이만 년 묵은 용이라더니, 하는 짓은 어째 와일드 에리어 역린호수 물가를 기웃대는 미끄메라나 다름이 없네. 하기사 브람 님이 그랬다. 삶을 살아보기도 전에 지하에 가둬진 존재라고. 자기 보물을 가져본 적도 없는 용이라니. 엄청 불쌍하잖아! 금랑은 지난달에 있었던, 제 찬연한 보물과의 배틀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태양을 머금어 쨍쨍하게 빛나던 그 금안을, 심장을 터뜨릴 것 같은 두근거림에 어쩔 줄을 몰라 살며시 벌어져 있던 그 입가를, 결판이 난 후에 아주 찰나 놀라움과 기쁨으로 물들던 눈동자를, 그 무엇보다도 환하게 웃으며 저를 부르던 목소리를.

제아무리 앞가림할 줄 아는 개체가 되었다 하더라도 덜 여문 애는 애라서 금랑은 저도 모르게 속에 있던 말을 툭 던지고 말았다.

“자기 보물도 가진 적이 없어봐서 어떡해. 안 태어난 거나 다름이 없잖아. 불쌍해.”

허공을 울린 목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온 공간이 화를 내다가, 그 이상한 감각이 끊겼다. 아, 화냈다. 삐졌나 봐. 그래도 제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는 건 꽤나 다행이었다. 이몸이 말을 가르쳐야 하는 줄 알고 얼마나 쫄았는데! 브람 님도 제가 말벗이 되어줬으면 한다 했으니 가끔 문이나 두드려봐야겠다, 하고 새 시대를 연 용이 속없는 소리를 중얼거렸다.

 


금랑은 사람을 좋아한다. 영원한 시간을 사는 듯이 모든 순간이 현재라고 봐도 무방한 용은 찰나를 쪼개가며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생명체들이 무엇보다도 신기했다. 특히나 그를 단단히 사로잡은 보물은 단델이라는 이름을 가진 인간이었다. 태양을 끄는 마차가 떠오를 만큼 타오르는 금안은, 아, 그거야말로 감히 보화에 어울리는 게 아닐까. 금랑에게 있어서 최초의 보물은 아니었으나, 그 이상의 무언가를 비하기 어려운 찬연한 보석.

단델은 유독 반짝이는 모먼텀으로 달려 나가는 유성이었고, 다른 사람들도 저마다의 빛깔을 뽐내며 다채로운 우주를 이루고 있었다. 인간이 개념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는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고, 보물고와 역사를 뒤적이며 왜 하필 이 일화가 이런 전승으로 되었는지 추측하는 일도 재밌었다. 인간은 정말로 즐겁기가 짝이 없는 생물이었다. 그렇지만, 때때로 연락해오곤 하는 목호에게 이런 이야기는 영 못마땅한 듯했다.

“모든 인간이 네 보물일 수는 없어, 금랑. 오히려 보물로 여길 수 있는 사람은 드물지. 잘 선별해야 할 거야.”

연락만 했다 하면 잔소리처럼 저 말을 꺼내느냐고 불평할 수도 있겠지만, 금랑은 목호 님이 참 어른스럽게 잘 참아준다고 생각했다. 목호가 인간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웬만한 용이면 다 안다. 그가 이미 한 차례 인간을 멸종시켜버리려던 때가 있었다는 건 이향에게서도 브람에게서도 들었으니 그랬다. 용이 인간을 죽이는 건, 정말로 간단한 일이지만 그러지 않고 있잖아? 얼마나 마음이 넓고 친절하셔! 역시 포켓몬들과 함께 지내는 존재치고 나쁜 녀석은 없다니까? 안 그러면 이렇게 상냥한 포켓몬들이 함께할 리가 없잖아?

브람 님은 제 생각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으셨다. 그저 옥석을 가리는 눈은 용이라도 타고나는 것이 아니고 배워나가는 거라고 빙그레 웃으셨을 뿐이다. 용도 완전한 생물은 아니라고, 이 땅에 실체를 가지고 살아가는 그 모든 것들은 어딘가 모자란 데가 있고 그걸 어떻게 가꾸어나가느냐가 중요하다고. 다만 그 길을 찾아가는 데에 자신을 스스로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중심을 지키는 건 생각보다 까다로운 일이란다, 아가. 독존해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해서 남에게 매몰되어서 자신을 잃는 것도 안 돼. 그 사이의 어딘가에서 너울거리며 지내는 것이야말로 삶이란다. 자기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렴. 보물이 있기 전에, 네가 있어야 해.”

독존이야 그렇다 쳐도 남에게 매몰된다는 건 무슨 뜻인지 썩 와닿지를 않았다. 어쨌거나 선대의 말은 자기를 사랑하라는 것으로 귀결되었으며 금랑은 그거 하나는 특별히 자신이 있었다.

너클시티가 금랑의 레어굴이 된 이후로 날개를 펼친 수호룡은 더더욱 사람들이 좋아졌다. 짐리더 후계라는 이름을 달고 들어왔을 때부터 보아온 동숙이나 레나, 파트너인 마휘핑과 닮은 웃음을 보이며 스콘을 건네곤 하는 배틀카페 오너 아저씨, 광활한 와일드 에리어를 자부심을 품고 순찰하는 자경단 사람들, 햇빛마저 온화하게 닳아가는 보물고와 그 속에 고여있는 시간을 연구하는 너클대학 사람들, 평범하고도 강인한 삶을 이어가는 마을 주민들…. 어느 하나 사랑스럽지 않은 데가 없었다. 만족스러운 시간이다. 배부르게 먹은 맹수처럼 이 이상은 별다른 게 필요 없다 싶을 정도로.

가라르의 모두가 저를 사랑해 주지는 않지만, 금랑은 누군가의 보물이 다른 사람에게는 아닐 수 있다는 것 또한 이해하고 있었으므로 소위 안티라 불리는 이들의 비방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만의 보물을 쫓고 있을 뿐이니까.

저를 아끼는 사람들은 안티들을 무척이나 못마땅해했다. 저런 녀석들은 법으로 본때를 보여야 해요! 거 우리 짐리더 님한테 헛소리하는 것들은 싸그리 모아다가 저기 역린호수에 갸라도스 먹이로 던져줘야 한다니깐? 저 사람들 나빠요! 금랑 님이 뭘 어쨌다구! 가라르를 택하고서 날개 아래 모인 온갖 반짝거리는 이들은 이토록이나 저를 아껴주었고, 때문에 금랑은 그저 허허로이 웃으며 넘겼다. 어쩌다 제게 테러 비스름한 걸 해내는 녀석들이 있긴 했지만, 그런 포화쯤이야 지고한 용에게는 별 게 아니었다. 어차피 위협한 거리도 안 될 녀석들이 입만 살았음을, 약한 것이 괜히 허세를 부리며 짖는 것에 하나하나 반응하다 보면 끝이 없음을 만고의 끝자락에 걸친 용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탓도 있었다.

오만했다, 고 훗날 목호 님에게 혼날 일이었다.

용을 상처입히는 것은 그에게 아가리를 들이미는 총포 따위가 아니다. 용에게 치명상을 입히려거든, 그의 보물을 망가뜨리면 된다. 단단한 생명체의 가장 여린 부분은 그 몸뚱이에 붙은 것이 아니므로.

본인에 대한 악플이나 악의 따위에 금랑 스스로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안티들의 타겟이 바뀌었다. 너클의 수호룡은 제 것에 대해서는 끔찍이 보호하는 기색이 있었으므로, 그들은 때때로 출퇴근 중인 짐 트레이너들에게 협박하곤 했다. 경범죄로 잡아가기에는 미묘한 수준으로.

그러자 금랑의 반응이 드라마틱하게 변했다. 자기 앞에서 칼부림해도 눈 하나 꿈쩍 않던 수문장은 짐트레이너가 출근할 때 자기네가 고함 한 번 내질렀다고 안광을 시퍼렇게 빛내며 스타디움으로 통하는 도개교에 버티고 섰다. 이거구나. 안티들은 감을 잡았다.

너클의 신진 짐리더가 기반을 잡은 지 삼 년쯤 됐을 무렵의 일이었다. 금랑이 짐리더가 된 이래 처음, 제 손으로 뽑은 트레이너들이 들어왔다. 수습 딱지를 달고 있는 이들 중 태반은 너클시티 자경단이 될 사람일 테고(너클 청소년단은 이런 진로체험을 적극적으로 권장했다), 다시 반의반은 전문 트레이너보다는 맡기미집이나 포켓몬 협회 스태프나 하여튼 한 발자국 건너의 일을 택할 것이며, 나머지 사람 중에 한둘이나 간신히 동숙이나 레나 같은 너클짐 전속 트레이너가 될 터였다.

예상대로 1년이 지나는 동안 짐 트레이너 코스를 밟는 인원은 팍팍 줄어들었고 다시 반년이 지나는 동안 딱 한 명만이 남게 되었다. 용길이었다. 챌린저 시절에 너클 스타디움까지 도달해서 몇 번의 도전 끝에, 제패 대신 오히려 이곳에 남고 싶다 자청한 트레이너다. 도전 당시의 기개도 그렇고, 가라르에서는 드문 더블배틀에 관심이 있는 것도 그렇고 금랑 뿐만 아니라 최장근속연수를 가지고 있는 동숙마저도 점 찍어둔 애다.

챌린저에서 짐 트레이너로 소속을 옮긴다면 제일 먼저 엔트리에 변화가 가기 마련이다. 속할 짐이 추구하는 바와 트레이너 본인의 타협점을 찾는 일 년 반 사이에 용길은 원래 파트너였던 갈모매를 패리퍼로 진화시켰고, 동숙과 레나가 각을 잡고 훈련 시킨 더블배틀 모의전도 따라왔으며, 마침내는 역린 호수에 사는 미끄메라도 엔트리에 들였다. 넌 비 파티를 맡으면 되겠다. 그 방향성을 제시받고서 한참 낑낑대던 용길의 멋진 답이었다. 낯섦에도 이곳저곳에 촉수를 들이미는 용길의 미끄메라를 본 금랑 역시 환하게 웃으며 축하해줬더랬다.

“이대로 사소한 조정만 끝나면 그땐 이몸하고도 모의전 가질 거니까, 각오해두라고~.”

“네!”

그 사소한 조정이 문제였다. 원래 해 뜨기 직전이 가장 어두운 법이라고, 트레이너도 포켓몬도 습관이 되었다기엔 아직 몸에는 덜 익은 전술을 펼치는 때가 제일 불안정한 시기다. 사람마다 그 기간은 다르다지만 이건 그 무패의 챔피언마저도 와일드 에리어에는 나가지 않는 때이기도 했다. 그러니 평범한 축에 드는, 막 조정작업에 열을 올리는 중의 트레이너는 얼마나 손쉬운 먹잇감이었을까.

 

용길 역시 금랑이 안티에게 취하는 미적지근한 태도에 입술이 댓 발 나온 사람 중 하나였다. 겁쟁이 녀석들은 금랑 님 앞에선 결국 아무것도 못 할 주제에 저나 다른 트레이너 심지어는 짐 스태프 사람한테 폭언을 퍼붓고 달아나기 일쑤였다. 짐 트레이너 코스를 밟던 중에도 금랑 님한테는 칼부림이, 저희한테는 애매한 말시비가 붙곤 했는데 금랑 님은 매번 저희 쪽 일에만 촉각을 곤두세우곤 했다. 그냥 내버려 두라는 무언의 지시가 없었더라면 애진작 줄줄이 굴비처럼 엮어서 고소했을 거라고 레나 씨가 분통을 터뜨리는 모습을 본 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므로 용길은 금랑의 안티가 도를 넘어선다면 당연히 저를 공격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너클짐 식구들과 나름대로 방책을 마련하기도 했다. 그 판단은 옳았다.

아직 역린 호수 바깥이 전부 낯선 미끄메라를 위해서라도 용길은 그 애를 데리고 마을 산책을 나서곤 했다. 너클 토박이는 아닌 제가 마을 사람들과 얼굴을 익히라는 뜻이기도 했으며, 문자 그대로 미끄메라가 너클시티 어디든 겁을 내지 않고 익숙하게 만드는 게 목표였다. 시간대도 코스도, 전부 예측이 가능했다.

그러니 용길은 돌연 제 품에 안겨있던 미끄메라가 무언가를 감지해서 새된 소리를 내는 것도, 피하기에는 반 박자 빠른 각목이 왼 정강이뼈에 내리꽂히는 것도 전부 침착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파트너들이 몬스터볼 안에 갇히거나 저 인간들의 손에 잡히는 사태를 막기 위해서 그는 재빨리 볼 스트랩을 풀며 패리퍼를 꺼냈다. 영특한 제 파트너는 진화한 지 얼마 안 된 낯선 몸으로도 친구들의 볼을 부리에 담아 물고서 너클짐으로 빠르게 날아갔다. 미끄메라는 아직 볼에 들어가는 걸 싫어하기도 했고 난데없는 폭력 사태에 놀라 그럴 정신이 없는 채로 제 품에 파고들었기에 용길은 그대로 몸을 옹송그렸다. 패리퍼가 금방 동숙 씨나 레나 씨를 부를 테고 아무리 못난 트레이너라도 제 포켓몬 하나 품에 안고 지켜낼 수는 있다. 용길은 너클시티에 오래도록 전해 내려진다는 격언 하나를 속으로 되새겼다.

모든 용은 지킬 것이 있을 때 강하다.

머리 위에서 금랑 님을 향한 폭언이 떨어진다고 울컥해서 가드를 풀었다간, 이 애가 다친다. 금랑 님도 지키는 법을 먼저 가르쳤지 굳이 제 살을 내어가며 억지로 공격하는 법을 알려준 적은 없다. 미끄메라가 놀라 내뱉은 점액이 스멀스멀 옷을 적셔왔지만 상관없었다.

“넌 내가 지켜줄 테니까—.”

끼이잉, 우는 소리가 났지만 그건 겁에 질린 울음이 아니었다. 그저 제 트레이너를 걱정하는 울음이었지.

 

용길의 예측처럼 그리 오래지 않아 사태는 수습됐다. 전속력으로 짐에 날아간 패리퍼, 그 부리 안에 물려있는 볼 스트랩만 가지고도 너클짐 제일가는 행동가는 사태를 파악했다. 레나가 파트너인 나인테일의 등에 올라타며 내달렸고, 동숙은 곧장 경찰에 신고함과 동시에 짐리더 권한대행을 발동해 소란을 수습했다. 오늘 오후 내내도록 보물고에서 유물 복원과 분류작업을 하는 용에게 소음이 닿지 않게. 뭐, 그것보다도 안티들에게조차 유하게 구는 금랑 님이 손을 댈 바에야 저희 선에서 가차 없이 쳐내는 게 나으리라는 판단이기도 했다.

노련한 용들의 활약으로 금랑이 이 모든 사태를 전해 들은 것은 해가 뉘엿뉘엿 기울 즈음이었다. 용길이 산재처리를 하고, 병원에서 반깁스하고, 미끄메라의 점액이 상처에 들어갔을지 몰라 항생제를 투여받고, 입원 수속을 밟고, 진단서를 떼고, 파트너들을 검진에 맡겼다가 올 클리어을 받고 돌아온 후의 일이다.

“용길, 괜찮아!?”

수숫대처럼 쭉쭉 크고 있는 금랑의 길쭉한 팔다리가 병실에 난입했다. 보물고부터 여기까지 전속력으로 뛰어온 듯, 어깨까지 달싹이는 그는 떡하니 걸려있는 깁스에 바로 눈가를 무너뜨렸다. 반다나를 아래로 끌어내리는 통에 오래 보지 못했지만, 그건 틀림없이 자책하는 눈이었다. 180cm는 거뜬하게 넘는 몸피가 꾸깃꾸깃하게 침상 옆에 구겨졌다.

“왼 다리에 금 간 정도고, 전치 4주랬어요. 괜찮아요, 금랑 님.”

상하관계에서 있어서 주고받을 말은 이미 대행자인 동숙이 진작에 끝을 냈다. 미리 이야기한 대로 기민하게 행동해서 포켓몬을 무사히 지켜낸 것에 대한 칭찬부터 자기 몸을 지키는 데에 소홀했다는 질책 아닌 질책까지. 전자야 당연하다 쳐도 후자를 들었을 때, 용길은 영문을 몰랐다. 동숙이 그 행동 자체를 나무란 게 아니라는 눈치는 있었지만, 왜냐고 물을 분위기가 아니어서 삼킨 질문이었다.

그 답이 지금 튀어나왔다.

“미안, 이몸 때문에 다쳐서.”

“아녜요, 그건 제가 모자라서!”

이래서였구나. 용길은 동숙이 전하고 싶었던 말을 금랑의 반응을 보고서 깨달았다. 모든 용은 지킬 것이 있을 때 강하다. 그리고 동시에, 둥지 안 보물이 상처 입는 것에 극도로 예민하게 반응한다. 그건 용의 심장에 칼을 꽂아 넣는 것보다 훨씬 더 치명적이었다.

안타까움도 억울함도 밀어닥치는 건 동시였다. 제가 조금 더 힘이 있었더라면, 미끄메라를 지키는 정도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제대로 반격하고 사지 멀쩡하게 돌아올 수 있었더라면. 아니, 저희 수호룡을 공격한 놈들에게 한 방 먹일 수만 있었더라면, 이렇게 분하지는 않을 텐데. 갑자기 얻어맞고만 있었던 수 분이 들끓듯이 되감겼다. 물론 그 상황이 다시 찾아오면 저는 똑같이 행동할 거였다. 제겐 미끄메라 하나는 지킬 힘이 있고, 패리퍼가 다른 포켓몬들을 데리고 무사히 도망치고 지원군을 불러오리라는 믿음이 있었으니까. 분노와 고통은 있었지만, 두려움만큼은 없던 그 순간. 왜냐하면, 모든 용은, 지킬 것이 있을 때 강하다 하였으니까. 그렇지만 다 지켜낸 게 아니었다.

“아니지, 내 휘하의 트레이너를 못 지킨 건 이몸이야. 그리고 용길 너는 충분히 강했어. 미끄메라한테는 상처 하나도 없었다며? 지키는 게, 그래, 그게 제일 어려운 법이지.”

남의 말을 빌려오듯 약간은 어색한 발음과 함께, 금랑이 희미하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옹송그렸던 사지를 펼친 용은 마치 필드 위에서처럼 새파랗게 흉흉한 눈을 들었다. 따습고 안온한 땅에 몸을 말고 앉아 무해함을 어필하던 용이 처음으로, 그 무거운 날개를 일으켰다.

 

다음날 신문 기사 1면에 너클시티 금랑 관장이 안티들에게 소송을 걸었다는 소식이 실렸다. 동시에 SNS에는 수십 건의 고소장이 떡하니 찍힌 사진이 올라왔다. 이몸이 가만히 있으니까 가마니로 보였나? 싸움 걸려면 직접 걸라고, 머저리들아. 댓글은 막혀 있었다.

 

민형사 고발 건을 기점으로 금랑은 유례없는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아예 제 휘하 트레이너의 회복도모 및 차후 대책 마련 같은 것을 이유로 이 주가 넘도록 대외활동을 제쳐버린 것은 물론이요 못해도 예닐곱 시간을 기점으로 업데이트되던 모든 SNS가 포스팅을 멈췄다. 스폰서를 생각하면 예약된 일정을 무르기도 뭣할 텐데도, 수석관장은 그조차 무시해버리고 말았다. 다음 시즌 비용은 어쩔 거냐는 외침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금랑은 기어코 딱 한 줄만 내놓았다.

"이몸 사비로 충당해도 문제없으니까 신경 끄지?"

배틀필드 외에서 처음으로 보이는 금랑의 흉포함에 메이저 사의 기자부터 삼사 류 가십지 라이터까지 먹잇감을 찾았다는 양 카메라와 마이크와 녹음기를 들이밀었지만, 정작 전신을 난도질하는 듯한 살기 어린 시선 앞에서 입조차 열지 못했다. 무모하기까지 한 용기(그걸 용기라 부를 수 있다면!)를 내서 질문을 날렸던 모 가십지 라이터에게 다음 고소장이 날아가자, 이제 그 누구도 너클시티에 흙발을 딛고 그곳의 용을 만나러 갈 만용을 부리지 못했다. 성벽 바깥의 모두가 용의 분노라며 숨을 죽였다.

너클시티는 오히려 금랑의 행보에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애초부터가 외지인에게 경계심이 강하고 자존심도 높은 너클시민들은 이제 안티고 기자고 눈에 띄기만 했다 하면 서늘한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너희가 사지 멀쩡히 너클의 행정구역을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저희 수호룡이 주먹이 아니고 법으로 패겠다고 결정했으니 그 뜻을 존중할 뿐이라는 메시지였다. 그들은 상처 입은 용을 알았고, 보았으며, 지켜내고 있었다.

 

그래서 당사자인 금랑은 무엇을 하고 있느냐면, 절찬리에 칩거 중이었다. 고소 파티에 쌍수를 들고 환영한 동숙이 법적 절차는 우선 자기한테 맡겨만 주시라며 법무사와 머리를 맞댔고, 레나는 동숙 씨에게는 못 미쳐도 자기 역시 너클짐 근속연차가 꽤 빵빵하다며 잠시간 맘 추스르고 오라고 멋대로 연차를 써다 주었다. 병문안이라도 갈까 싶어서 용길이 입원해있는 너클대학 병원으로 갔더니 웬걸, 저희 막내용은 저도 모르는 새에 통원 치료로 전환하고 집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해야 할 일거리가 전부 사라졌다. 따라서 빈 자리에는 필연적으로 생각이 들어찼다. 루틴으로라도 잠시나마 회피해보려고 한 생각들이. 이몸, 인간이 보물인데, 지금—내가 내 보물을 싫어했어? 화가 나? 이몸이 좋아했던 걸, 이렇게 미워할 수 있는 거야...? 그치만, 그 녀석들이 먼저 우리 용길이를 쳤고, 아니 그래도…. 꺼지지 않는 불처럼, 마냥 활활 타오르기만 하던 애정이 단델의 에이스가 내쏘는 거다이옥염만큼이나 짙붉게 주위를 살라 먹었다. 보물에게 갖는 애정은 영원불멸이라고만 믿어온 어린 용은 자신의 분노에 충격을 받았다. 좋아하는 것을 싫어하게 되어버리면, 지금 소중하다 느낀 것들이 다 가치가 없다고 느껴버리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지? 내가 정말로 이걸 좋아하는 게 맞기는 한 건가? 혼란은 마치 연약한 깜부기불처럼 금랑을 옅게 묽혀댔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트레이너의 상태를 파트너들이 모를 리가 없다. 그 애들은 저마다 침대에 옹송그려있는 금랑의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정물처럼 가만히, 그렇지만 살아있는 것들 특유의 맥동하는 온기와 오르락내리락하는 호흡으로 계속해서 존재를 알렸다. 한참 만에야, 아이들의 끼니를 기계적으로 챙겨주다 말고 금랑은 저를 순하게 바라보는 쌍쌍의 눈동자들과 새삼스럽게 마주치고서, 간신히 숨을 틔워냈다. 그것은 이정표였다. 불순물 하나 깃들지 않은 신뢰와 애정. 그 반짝임에, 방향을 모르고 흔들리던 용은 상하좌우를 분간해냈다.

—이 온 세상이 통째로 저의 보물일 수는 없다.

정수리부터 뚝, 쪼개지듯이 떨어진 깨달음이었다. 겨우 한 뼘짜리의 단단한 기반에 서서, 금랑은 찬찬히 제 보물들을 되짚어본다. 단 하나의 빛무리에 이끌려 이곳에 정착한 이래로 제게는 생각지도 못했던 반짝이는 것들이 참 많이도 생겼다. 최고의 보물을 꼽으라면 여전히 단델의 그 순금을 고아 만든 듯한 눈동자를 들겠지만, 가장 확고하게 저의 기반을 다져주고 있는 것들은 달랐다. 한결같고 상냥하고 영리한 엔트리 아이들이라거나 동숙, 레나, 용길을 비롯한 너클짐 식구들이며, 돌연 나타난 저를 흔쾌히 받아 들여주고 지금 이 순간에도 아껴주고 응원해주고 있는 너클시티의 주민들. 금랑은 몇 년 전, 전대 관장이자 고룡이 제게 속삭였던 축복을 문득 떠올렸다.

네가 지키는 보물이 오래도록 빛나기를, 다채로운 보물들이 너의 영혼을 수놓기를.

보물을 지킨다는 표현이며 영혼과 연결한 표현법이 이제야 와닿았다. 저는 보물을 선택했고, 보물 역시 저를 따라주었다. 이제 이 아름다운 빛무리들은 제 영혼을 이루는 일부였다. 밤하늘을 수놓는 별들을 자유의지로 골라 심어내 그렇게 꾸며가고 가꾸어나가는 것이 바로 삶이다. 자연의 일부가 되어 조용히 살아가는 것과는 아주 결이 다른. 세상에 발을 딛고 걸어가자 마음먹었다면 온전하게 누려야 할 것들이었다. 이 흔들림조차도.

인간들이 흔히들 말하는 슬럼프에 빠졌던 걸지도 몰랐다. 단델과의 배틀은 여전히 해를 거듭하며 더더욱 즐거웠고, 그럼에도 몇 년째 이기지 못하는 것에 높디높은 용의 자긍심에 잔금을 가게 했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그 실금마저도 사랑스럽다. 제가 직접 선택하고 살아낸 삶의 흔적이니까. 보물들과 함께 쌓아 올린 순간들이 이렇게 분명하게 존재한다.

문득 스마트로토무가 울렸다. 문자였다. 발신인은 단델.

금랑, 소식은 들었다. 늦긴 했지만…. 괜찮아?

배틀필드에서의 용맹한 사자는 때때로 이렇게, 조심스러운 몸짓을 보이곤 했다. 마치, 뭐라고 했지, 부모님이 민들레Dandelion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했던가? 브로치 크기나 될 법한 그 앙증맞은 꽃을 떠올리며 금랑은 답장을 날렸다.

그럼, 이몸은 끄떡없지!

용의 심상에 폭풍우가 지나가고 노오란 햇빛이 내려앉았다.


세상만사 타이밍이라는 건 참 얄궂은 법이다. 금랑에게서 폭풍우가 가셨더니 이번엔 바우해 방면에 태풍이 몰려오고 있다는 뉴스가 떴다. 앞으로 열흘 후, 가라르 먼바다를 통해 들어왔다가 그대로 통과할 거라는 내용이었다. 이 예보에 관심을 가진 이는 드물었다. 날씨 예보란 그냥 가능성 점치기에 불과하다는 통념이 큰 탓이었다. 현재 날씨를 캐스트하는 시스템만 갖춰진 가라르였으니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그나마 태풍의 영향을 크게 받는 바우마을이나 스파이크 마을이 의례적으로 태풍 대비를 시작했을 뿐이다.

가라르에는 태풍이 들이치는 편이 아니었다. 23호 태풍 테일로가 북상하는 사이에 마주한 날씨와 습도와 기온과 그 모든 것이 태풍을 키워내 진로가 덜 꺾인 모양이라고, 가끔 타 지방으로 향하던 태풍이 이쪽으로 오기도 했으니 이번도 마찬가지인 거라고.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태풍이 말도 안 되는 속도로 북상하기 시작하기 전까지는.

호연의 날씨 연구소는 발 빠르게 사태를 파악했다. 가뜩이나 후파의 짓궂은 장난으로 온갖 전설의 포켓몬이 자연을 휘젓고 있는 호연 지방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테일로가 가속하기 시작한 시점부터 원인분석에 들어갔고, 곧 규명해냈다. 원인은 호연 해역의 거의 끝에서 뚝 떨어진 토네로스였다. 폭풍을 다스리는 포켓몬이 해봐야 중소형급 태풍을 보았으면 무엇을 하겠나. 사람이 막을 수 있는 요소가 하나도 없었다. 날씨 연구소 직원들은 이제는 대형급 태풍으로 변모한 테일로의 시간대별 예측경로를 다시 뽑아내 곧장 가라르를 비롯한 영향권 하의 지방들에 전했다.

문제는 이후로 토네로스의 에너지 추적 결과가 묘연해, 어쩌면 폭풍의 핵이 그 선풍포켓몬일 가능성이 있다는 거였다. 날씨 연구소에서 보낸 공문 끝에는 가능하면 태풍 대비는 예측 데이터보다 빠르게 준비되어야 할 것이라는 설명이 붙어있었다.

 

바우마을은 북상해오는 태풍이 제일 많이 부딪히는 곳이었다. 태풍이 한번 휩쓸어준 바다는 이후를 위해 풍족한 영양을 공급해주고 바닷물을 골고루 섞어주는 이점이 있었지만 그걸 무던히 넘기는 건 아주 다른 일이었다. 바닷가를 낀 마을에서 태어나 쭉 살아온 이들은 그것을 잘 알았다. 바다는 마냥 상냥하기만 한 곳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포악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어느 쪽이건 저희는 거기에 맞추어 어우러져 사는 거다.

바다의 아이 야청은 자연의 변덕에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그에게 자연이란, 바다란 애초에 변덕스러운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야청은 수석 짐 트레이너와 바우 수상구조대를 진두지휘하며 제1대 짐리더 때부터 지금까지 수정·보완을 거친 재해대비 매뉴얼을 따라 침착하게 대처했다. 방파제를 점검하고, 바람에 날릴 법한 것들을 미리 묶어두고, 포켓몬들의 힘을 빌려 배를 셸터 안에 옮겨 보호하고, 태풍 발생 소식이 떴을 때부터 스타디움 수질을 바꾸어 양식하던 물고기를 대피시키고…. 그러면서도 모두는 낙관했다. 아무리 태풍의 규모가 커져야 위로 세 대는 거슬러 가야 있었던 최악의 태풍, 아이스크를 넘을 리가 없다고.

그렇지만 야청은 태풍의 끝자락으로 밀려오는 바람결을 받아보고서 판단을 바꾸었다. 물 타입 전문가이자 날 때부터 바다내음을 맡고 자란 바닷사람으로서의 직감이었다. 이번 재해는 인간이 버티고 자시고 할 게 못 됐다. 오히려 셸터 째 무너져 인명피해가 발생할지도 모른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제아무리 사랑하는 고향 땅이라지만 사람과 포켓몬의 생명이 우선이었으니까. 그들이 있어야 바우마을이 있는 거 아니겠나.

태풍 상륙 한 시간 반 전, 바우마을의 총책임자는 피난 명령을 내렸다.

피난은 일사불란하게 이뤄졌다. 북부로 올라갈수록 도시가 많아지는 가라르의 지형 특성상, 바우마을은 시골에 속하다 보니 이동 수단을 마련하는 것부터가 일이었다. 사십 여분 만에 급하게 소집한 아머까오 택시로 노약자와 어린이를 안전한 내륙으로 이송했고, 그의 가족들은 연이어 수배한 기차로 따라갔다. 마을 사람의 절반이 빠져나가는 데에만 한 시간은 족히 넘게 걸렸다.

이미 태풍의 영향권에 든 바다는 온 수평선이 부옇게 물보라를 일으키고 있었다. 해안가 상점가를 둘러싼 바람막이용 수목들이 갈대처럼 몸을 누이기 시작했고, 덩치가 좀 작다 싶은 사람이면 몸이 죽죽 밀렸다. 야청은 입고 있어야 소용이 없는 우비를 벗어 던지고 저만치서 위압적으로 다가오는 태풍을, 그리고 피난 대피를 돕고 마을 자산을 최대한 안전한 셸터에 밀어 넣느라 남아있던 청년들과 저희 짐 식구들과 구조대원을 번갈아 바라보며 저들의 예상 대피 시간을 점쳐봤다. 지금부터라도 빠듯했다. 모두가 턱밑까지 남아준 덕에 이 정도면 처음 구상한 것보다 많은 것을 남길 수 있었으니, 이제 됐다. 야청은 목소리를 높였다.

“청년회는 그만 나가! 짐 트레이너들도 매뉴얼에 따라 퇴각한다!”

“그렇지만 야청 님!”

“우리가 왜 지금까지 남았는지 기억해! 잔말 말고 얼른!!”

호연 날씨 연구소의 예측은 불길할 정도로 들어맞았다. 야청은 스타일링을 무시하고 대충 동여맨 머리칼을 훑어치우며 결연하게 버티고 섰다. 허리춤의 파트너들도 모두 다 나와 있다. 지난 며칠간 자연재해를 대비할 기술배치로 바꾼, 저와 끝을 함께 할 용맹한 이들이다. 구조대나 남아있는 짐 트레이너들 역시 다 엇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연재해 앞에 우리는 모두 연약하지만, 그래도 최대한 버둥대는 것이 지킬 게 있는 사람 아니겠나. 이곳의 피해를 최소한으로 만들어 무사히 재건할 토대를 만드는 것이 저희의 마지막 사명일 것이다.

“갈가부기, 거다이맥스야! 나머지는 준비한 대로!!”

다이맥스 스폿이 붉게 빛나 솟아오르고 듬직한 파트너가 거다이맥스 폼으로 바뀌어 바닷가에 섰다. 그아아아, 호탕한 울부짖음과 함께 다이록이 시전됐다. 곧 더시마사리는 와이드가드를, 갑주무사와 누오, 패리퍼는 파도타기로 거대한 해일을 조금이라도 약하게 만들려 했다.

한껏 예민해져 있던 야청의 청각이 밀려드는 바람과는 다른 기색을 읽어냈다. 맞바람을 뚫고 휘젓는 날갯소리다. 누가 미쳤다고 되돌아오는 건지, 아니면 용감한 아머까오 기사가 조금이라도 더 대피시키려고 온 건가. 급하게 뒤를 돌아본 청량한 파랑이 본 것은 녹색 몸통을 가진 사막의 정령과, 진회색 하늘에 도드라지는 주황색 반다나였다.

“금랑?!”

마지막으로 파트너들에게 지시를 내린 이후, 거센 바람에 목소리는 전부 다 묻히고 있던 통이라 야청의 삑사리 난 외침은 누구에게도 닿지 않았다. 쟤는 칩거 중이라더니 왜 갑자기 바우마을에? 아니, 것보다 지금 저거 자살특공대도 아니고 도대체가!

이목을 끄는 건 원하는 바가 아니었는지, 그것도 아니면 정말로 제가 봤음을 아는 것인지 하늘에 주황색 점으로 박혀있던 것이 사라지고, 거의 동시에 다이 월에 바투 붙은 채 비행하던 플라이곤의 몸체가 사라졌다. 벽 너머로, 그 미친 해일과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로 금랑이 향한 것이다. 쟤가 정말 미쳤나? 죽을 자리를 찾으려거든 적어도 자신의 이 아름답고 자랑스러운 마을이어서는 안 됐다. 야청은 사태도 잊고 저 미친 짓을 하는 못난 친구 놈을 건지러 바닷가를 향해 뛰었다. 그래, 먼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해룡의 우짖음을 듣지만 않았더라도, 분명히 그랬을 거였다.

 

금랑은 앞뒤 잴 것 없이 플라이곤에게 전속력으로 날아가 줄 것을 부탁했다. 너클에서 바우까지 기류만 잘 탄다면 한 시간 반 안에는 어떻게든 맞춰서 갈 수 있다. 태풍 경로상 맞바람이 불 테니 보험 삼아서 여기부터 거기까지 하늘길도 열어두었다. 여차하면 본신으로 돌아가 최고 속력으로 날면 된다. 직접 비행한 지는 오래되었지만, 용이 하늘을 나는 것은 인간이 걷기를 배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연스러운 일이니 잊을 리가 없다.

다른 땅에서 나고 자랐던 용은 이제 이 가라르가 제 굴이고 고향이었다. 모든 인간을 보물로 삼을 수는 없어. 그렇지만 이몸 보물이 너클에만 있는 건 아니잖아. 당장 단델도 있고. 바우마을에는 제 절친한 친구가 있다. 유연하고 강인한 야청. 바다의 아이. 금랑은 그 표현이 참 맘에 들었다. 그가 소중하게 여기는 마을. 바우마을은 야청의 보물이고, 바우 사람들에게 있어 야청 또한 보물이다. 무엇보다 저 역시 그곳의 경치와 색을 사랑한다.

바람에 점점 바다의 짭조름한 내가 섞이기 시작했다. 저만치 먼 데에서 하늘을 까맣게 채운 아머까오 택시들이 보였다. 바우마을에서부터다. 평소에는 운행하지 않던 열차들도 뻗어 나온다. 전부 피난민일 테지. 야청이 침착하게 모든 풍파를 맞서 싸우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플라이곤의 목덜미를 쓰다듬자 이 똑똑한 아이는 가늘고 긴, 휘파람 소리 같은 울음을 내며 한층 더 가속했다. 맞바람에도 지지 않는 용감한 애다.

시야에 바우마을이 들어왔다. 스타디움 지하의 다이맥스 스폿이 시뻘겋게 빛나더니 곧 거다이맥스 갈가부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야청의 갈가부기다. 그를 필두로 몇몇 거다이맥스 또는 다이맥스 포켓몬이 모습을 드러냈고, 진득한 땅울림과 함께 곳곳에서 다이 월이 솟아났다. 밀려오는 폭풍을 향해 파도타기가 달겨들거나, 세워둔 다이 월 주변에 얼다바람, 냉동빔 따위로 얼음벽을 세우는 움직임이 바지런들 했다.

금랑은 고도를 조정해 건물 틈을 비끼며 최대한 인간의 저항이 세워낸 벽에 다가갔다. 문득, 야청이 저를 보고 악을 쓴 듯도 하여 반다나를 품에 감추었다. 이미 들킨 것 같지만, 뭐, 그건 나중에 생각하고.

맞바람이 거셌다. 순간 플라이곤의 자세가 크게 흐트러졌다. 하기사 이 애의 한계점은 엔진시티와 바우마을의 경계선 그 근방이었을 테다.

“플라이곤, 조금만 더 힘내줘. 저 벽만 넘어가면 이거 들고, 음, 넌 똑똑하니까 무슨 소리인지 알지?”

금랑은 볼 스트랩을 풀어다 플라이곤에게 쥐여주었다. 이제 마주 불어오는 바람은 더는 바람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어려운 지경이 되었다. 다이 월을 넘어서자마자 플라이곤은 날개를 몸통에 붙여 급강하를 시작했고, 금랑은 그 등을 살포시 밟고 허공으로 날았다.

금랑은 그 짧은 사이에 이 벽 너머 사람들의 분투를 되짚었다. 이기지 못할 자연 앞에서도 저렇게 발버둥 치고 서로를 지켜가고 명예로운 끝을 맞이하려는, 저런 사람들을 어떻게 저버릴 수가 있을까. 인간이 만든 재앙은 그들 스스로가 풀게 놔두렴. 다만 그들이 해결하지 못할 자연의 일은, 그때는 나서도 괜찮단다. 브람 님이 오래전에 이야기했던 그 말도. 내 입으로 말하기 뭣하지만, 인간들이 제아무리 악하고 멍청하더라도 전부를 없애기엔, 그래, 아깝긴 하더군. 그 말을 하며 희미하게 웃어 보이던 목호 님도 지금은 다 이해가 갔다. 모두가 보물일 수는 없어도 제가 아끼는 보물들을 위해서라면 그들 정도는 감내할 만하다. 먼지가 무서워서 보석을 꺼내두지 못하는 건, 적어도 용에게는 말도 안 되는 일이니까.

이 땅에 살아가기로 결심한 용은 아주 오랜만에 날개를 펼쳤다. 등골부터 너르게 퍼지는 날개 골격과 주홍빛이 도는 금색으로 휘황한 피막, 미드나잇블루의 검푸르게 반짝이는 비늘, 유선형으로 늘씬하게 빠진 몸체 그리고 선득하리만치 빛나고 있는 터키석과도 같은 눈동자.

흐읍, 깊게 숨을 들이켠 용이 태풍을 향해 고함을 내질렀다.

 

그건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고, 구조대원 하나는 회상했다. 정말로 죽음을 각오한 순간이었다. 두렵지만 침착하게 고작 눈짓으로 제 파트너들을 독려하며 서 있는데, 어디선가 용의 울음소리가 났다. 아주 어릴 적에 할머니 할아버지가 머리맡에서 해주시곤 했던 동화에 나오는 것과 아주 많이 닮아있었다. 그 소리가 닿는 곳곳마다 거친 바람결이 곱게 가라앉고 시꺼멓게 찌푸려져 있던 하늘이 개어갔다. 태풍의 핵을 맡고 있던 토네로스만이 덩그러니 남아있다가, 곧 몸을 돌려 사라졌다. 몇 초의 정적 후에 바우 부둣가에 모여있던 사람들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사방에서 울리는 환호성을 아랑곳하지 않은 야청은 잰걸음을 하고서 다이맥스가 풀린 제 파트너를 불러다 바다에 몸을 던졌다. 예상대로 좀 전 다이 월이 펼쳐진 해안가에 아주 익숙한 플라이곤이 앉아있었고 방금 막 바다에 빠졌다 나온 듯한 금랑이 드래곤점퍼가 먹은 물을 짜내고 있었다.

"야청! 어…?"

기백이 흉흉한 채로 야청은 금랑을 질질 끌고 나갔다. 이 미터짜리 거구가 팔목을 잡힌 채 어정쩡하게 끌려가는 꼴이라면 퍽 눈에 띌 법했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다들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앞에서 기뻐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야청이 묵묵하게 걷기만 하다가 도착한 곳은 바우 스타디움이었다. 도중에 그들을 발견한 수석 트레이너조차 물려놓고 독대할 준비를 한 그가 금랑을 그 안에 밀어 넣자마자 씹어뱉듯이 물었다.

“너, 뭐야?”

아니, 그건 질문이 아니다. 확신이었다. 금랑은 저도 모르게 딸꾹질했다.

야청은 금랑을 아주 레파르디스가 꼬렛 잡듯이 털었다. 죽음을 목전에 두었던 인간의 기백이란 이런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야청이라는 사람이 원체 뚝심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어디의 짐리더 님처럼 활활 타오르는 검푸른 눈동자 앞에서 금랑은 아직 제 둥지의 식구들에게도 알리지 못한 비밀을 술술 불고야 말았다.

말하던 도중에 아차 싶기는 했다. 가라르는 기본적으로 너클시티를 제하면 용에 대해 고운 소리가 나오지 않는 지방이었으니까. 여기는 너클이 아니다. 저를 보는 야청의 눈이 바뀌면 그건 그것대로 슬프겠군 싶어서 금랑은 제가 줄줄이 읊은 정보를 갈무리하고 있는 야청을 흘끔거렸다. 차마 그 심해 같은 눈동자와 마주칠 용기가 나지 않았다.

“허. 그러니까, 너는 원래 용이다, 이거지?”

“으응….”

“날씨도 다룰 수 있다는 건 신뇽 같네.”

“그렇, 지…?”

“근데 왜 우리 바우마을에서 내려오는 해룡 전설에서 나온 거랑 같은 소리가 나?”

“그거야, 폭풍 보고 잠잠해지라고 하는 말은 다 비슷할 테니까…?”

그 말에 야청이 눈을 갸름하게 뜨더니 중얼거렸다. 그럼 해룡이 아니었을 수 있겠구나, 그 전승. 가볍게 혀를 차는 소리에 금랑은 무어라 말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어쩌면 해룡으로 오인당한 게 브람 님일지도 모른다. 그것도 아니면 또 다른 용이 있었거나. 바다는 제 구역은 아니지만 어떤 용은 바다를 선택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어쨌거나 지금 꺼낼 말은 아니라 속으로만 상념을 삼킨 금랑은 조심조심 시선을 올렸다. 야청의 눈을 보고 확인해야만 했다. 제 또 다른 보물 중 하나를 멀리서 지켜보기만 해야 할지 아니면 지금과 비슷한 거리에서 있어도 되는지를. 저의 보물들은 모두가 자기 삶을 살아가는 존재이고 그 의사를 존중해야 마땅하므로.

“야청. 그,”

“왜?”

“아직도 화났어?”

이 미터짜리 거구가 최대한 몸을 구겨 앉은 채로 조용조용 물어오는 꼴에 야청은 그만 웃고 말았다. 저는 기어 다니던 시절부터 잠자리 동화로 해룡 전설을 들어온, 나름대로 용에 대한 환상을 품은 이들 중 하나였다. 거기에 나오는 용은 똬리를 틀면 바우마을을 다 덮을 만큼 크고 그 포효는 저기 슛시티 북쪽 설원까지도 울린다고 했다. 그게 포켓몬이어도 좋고, 그저 다른 생명체여도 좋았다. 그냥, 살면서 한 번쯤은 보고 싶었다.

그런데 지금 제 앞에 있는 진짜 용은. 이래서 전설은 전설로만 남겨야 하는 모양이라고, 야청은 생각했다.

“난 네가 내 자랑스러운 마을에서 목숨 끊는 줄 알고 빡쳤던 것뿐이거든. 사지 멀쩡히 살아있는 거 보고선 별생각 안 했지. 그런데 그냥—그럴 수 있었으면 전화라도 한 통 하고 왔어야지 않겠냐고!!”

악, 야청 아직 화났잖아! 아니거든! 한참 꽥꽥거리면서 주거니 받거니 하던, 푸른 빛을 머금은 눈동자들은 마주치자마자 약속이라도 한 듯이 까르륵 웃어댔다. 의외로 변하는 건 없었다. 야청에게 금랑은 끝까지 금랑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다 보니 돌연 궁금해졌다. 브람 님은 포플러 님한테 어쩌다가 들키신 걸까? 듣자 하니 목호 님이 용인 걸 아는 사람도 뜨문뜨문하게 있다던데.

분위기도 풀렸겠다 뒷수습을 도와줄까 묻자 야청은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여긴 내 마을의 일이니, 본인이 알아서 하겠단다. 맞는 말이었다. 거기에다 가라르의 라이징 웨이브는 참으로 강한 사람이었으므로. 오히려 그가 저의 안위를 걱정해와서 금랑은 고개를 갸웃했다. 도무지 영문을 모를 말이었다. 피난령이 풀려 돌아온 아머까오 하나를 태워주면서도 야청은 끝까지 “너 돌아가면 싹싹 빌어.”라고 말했고 용은 그때까지도 친구의 조언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너클시티 외성 위에 진을 치고 있는 자경단 순찰대원을 보기까지는, 금랑은 정말로 결단코, 아르세우스께 맹세컨대 몰랐다.

누가 지금의 너클시티를 보면 전쟁이라도 난 줄 알았을 거다. 언제라도 본대에 정보를 알릴 수 있게 텔레포트를 익힐 수 있는 포켓몬과 비행 타입의 포켓몬을 양옆에 낀 레인저들을 보자면 역사서 한 자락에 들어온 것 같은 착각이 들 법했다. 개중에 찐득한 체리 색 머리칼을 가진 사람이 저와 눈이 마주쳤고, 그의 옆 자락을 맴돌던 음번이 무서운 속도로 너클 스타디움을 향해 날아갔다. 곧이어 그가 주변에 무언가를 알리는 듯 손을 모아 외쳤고, 너클시티 자경단이 자랑하는 신속의 순찰대가 속속들이 외벽을 내려갔다. 일사불란한 모습에 뿌듯한 것도 잠시, 금랑은 동숙의 파비코리가 날아오르는 모습에 드디어 야청의 조언, 아니, 경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았다.

‘아, 이몸 아무 말도 없이 나갔었지.’

등골이 서늘했다. 동숙은 화가 나면 아주 무섭다. 얼마나 무섭냐면, 그가 다루는 눈싸라기 파티 멤버와도 같은 차가운 기운은 때때로 고대의 마법인가 착각될 정도로, 정말 체감 온도를 낮추곤 하는 거다. 벌써 그 한기가 주변에 맴도는 것 같았다. 부르르 어깨가 떨렸다.

아머까오 기사조차 기가 죽은 채 동숙의 안내에 따라 스타디움 앞 도개교에 착륙했고 금랑은 잔뜩 골이 나 있는 짐 트레이너들과 자경단원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을 마주했다. 사람이 무서운 얼굴이나 검은 눈빛을 쓸 수 있다면 딱 저런 모습이겠지. 금랑은 마른침을 삼키면서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아, 안녕…?”

“안녕하지 못하네요. 누구 씨 덕분에.”

“안녕은 뭐가 안녕이예욧!!”

어유, 귀청 떨어질라. 평소에는 재잘거리던 목소리들이 하나같이 저를 질타한다. 악의가 있어서도 아니고, 전부 다 저를 걱정한 음색이었다. 그렇지, 무서운 얼굴을 하고 갑자기 플라이곤을 타고 날아오른 저희 짐리더만 해도 놀랄 지경인데, 그 방향에 바우마을이 있음을 알고 있다면 별 상상을 다 했을 거다. 게다가 바다에 빠지고 나서는 스마트로토무도 고장이 났고(로토무는 미리 볼에 빼두었다), 야청과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까지 연락 한 번 넣지 않았으니 이들이 걱정하고도 남았다. 그 걱정이 하도 기꺼워 흐물하게 웃는 낯으로 잔소리를 다 듣고 있었더니 차차로 성난 기세가 가라앉다가, 마지막에는 대표자 격으로 동숙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 말했다.

“...그래도,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아, 가슴이 뿌듯하게 차올랐다. 제 보물고, 그 안의 반짝반짝한 보석들, 제 뒤를 졸졸 따라오는 어린 용들. 무엇이 보물이고 무엇이 돌멩이인지 이제는 망설이지 않고 구분 지을 수 있었다. 이들을 위해서라도 저는 결단코 지키는 용이 될 것이다. 터키석을 닮은 눈동자가 너클 성 한쪽을 응시했다. 이만 년의 공백 속에 분노만 삭이는 용이 저기에 있다. 도래할 재앙. 선대 짐리더가 당신의 권한을 가지고 마지막으로 승인을 내렸던 건이 에너지 플랜트였다. 막 취임했을 당시야 고룡의 뜻이거니 했었지만, 이제는 달랐다. 이번엔 오롯하게 저의 의지였다. 고대의 용에게 응당 주어졌어야 할 자유를 돌려주는 것도, 그 용이 내뿜을 분노로부터 제 보물들을 지키는 것도 전부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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