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행성 엇박자 스탠다드 스텝
오타쿠가 서로의 캐해를 못함
모란은 새벽에 컴퓨터 앞에 앉아 아무 생각 없이 웹 사이트를 스크롤하고 있었다.
탄산음료 마시고 싶다. 그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불행히도 냉장고 안에는 아무런 단 음료도 없었고, 인터넷 배송으로 시킨 각종 군것질거리들은 빨라도 내일 도착이었다. 그는 잠깐 민첩하지 못했던 자신을 원망했다. 한 다섯 개쯤 남았을 때 새로 주문했어야 했는데.
'밖에 나가긴 귀찮은데, 어쩔 수 없지.'
불행 중 다행으로 기숙사 안 자판기에는 탄산음료를 팔았다. 그는 굳이 이 시간에 복도를 걸어가기 싫다는 게으름과 지금 탄산을 마셔야겠다는 욕구 사이에서 끊임없이 저울질하다 결국 후자의 손을 들어주었다. 탄산음료와 같이 먹을 감자칩 한 봉지를 미리 빼두고 그는 조용히 기숙사 방문을 열었다. 모두 잠들어 있을 시간이라 조명은 최소한만 켜져 있었고, 복도는 숨죽일 듯 고요했다.
모란이 스마트로토무 불빛으로 앞을 밝히며 조심스럽게 움직이는데 옆에서 무언가가 번쩍, 하고 스쳐 지나갔다. 이, 이런 곳에 고스트 타입 포켓몬? 아니면 누가 이 시간에 포켓몬과 놀아주기라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불쑥하고 얼굴을 내밀었다.
“으아아악!”
“헉, 누구…. 모, 모란 나리? 괜찮소?”
“까, 깜짝이야. 추명?!”
“모란 나리를 여기서 마주칠 줄은 몰랐는데……. 미안하오.”
“괜찮아. 그것보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닌자 수행 중이었소. 오늘의 수행은 은신술…. 누구도 소인의 인기척을 느끼지 않고 기숙사 끝에서 끝까지 이동하면 성공이오.”
“그, 그랬구나. 괜히 방해한 거 같아서 미안하네.”
"모란 나리에게 들켰으니 수행은 실패지만, 다음에 다시 하면 되니 별 상관없소이다. 그보다 모란 나리는 무슨 일이오?"
"아, 나? 탄산음료가 마시고 싶은데 다 떨어져서…. 급한 대로 자판기에서라도 뽑으려고 나왔어."
"그렇소이까? 그럼 이거 받으시오."
"응? 무슨…."
모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손바닥으로 콜라 한 캔이 떨어졌다. 그는 그것을 겨우 붙들고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으로 추명을 바라보았다. 콜라는 잠깐이나마 사람이 갖고 있었단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차갑다 못해 손이 시렸다.
"고, 고마워, 근데 이건 어디서 났어?"
"파우치에 있던 것이오. 수행이 끝나고 목이 마를까 넣어두었소이다."
"그냥 받아도 되는 거야? 그럼 너는?"
"음? 다시 사면 되지 않소?"
"내가 사줄게."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소만…."
"신세 질 수는 없으니까."
"...알았소."
모란은 앞장서 걸었다. 추명은 답지 않게 한 발짝 뒤에서 그의 뒤를 따라갔다. 죄지은 것도 아닌데 숨죽여 걷는 발소리가 복도에 울려퍼졌다. 새벽이란, 그런 시간대다. 소리를 죽이려 해도 어쩔 수 없이 배로 크게 들릴 수밖에 없는. 그리고 모란과 추명은 스타단 안에서 그 시간대에 대체로 깨어 있는 유이한 사람이었다.
"뭐 마시고 싶어? 역시 콜라?"
"마음이 바뀌었소, 물이면 충분하오."
"...내가 사주는 거라고 신경 안 써도 돼."
"그런 게 아니라 진심으로 마음이 바뀌었소."
"...알았어."
자판기는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추명은 가만히 자판기를 보고 서서 모란이 뽑은 물이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덜컥, 하는 소리와 함께 모란이 물을 꺼내 추명에게 건넸다. 고맙소. 추명은 짧은 감사인사와 함께 물을 받아들었다. 그는 그것을 잠시 들여다보다 다시 모란을 바라보았다. 그가 손에 들고 있는 건 작은 콜라 한 캔뿐인데도, 어쩐지 그걸 들고 있는 손이 무거워보였다.
"모란 나리."
"응?"
"우연히 만난 김에 괜찮으면 잠깐 걷지 않겠소? 할 이야기가 생각났소이다."
"가, 갑자기? 이 밤에? 어디서?"
"갑자기 생각난 건 맞소. 모란 나리는 돌아간다고 해도 분명 컴퓨터를 할 터이고, 복도는 혹시 울릴 수도 있으니 운동장이 좋을 거 같소이다."
"윽, 맞는 말이라 할 말이 없네. 뭔진 모르겠지만…. 알았어."
운동장까지 걷는 동안 둘은 말이 없었다. 둘 사이의 침묵은 긍정도 부정도 뜻하지 않은 채 제자리를 맴돌기만 했다. 제안을 추명이 했음에도 불구하고 먼저 앞에 나서서 걷는 건 모란이었다. 운동장에 도착해서도, 둘은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계속 걸었다.
야행성 인간이래도 역시 밤 산책은 어색하기만 한 모란과는 달리 추명은 익숙해 보였다. 모란은 곁눈질로 계속 그를 흘끔거렸다. 혹시 이것도 닌자 수행의 일종인가? 둘은 어느새 운동장 트랙을 따라 뺑뺑 걷는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평소 걸음보다 빠르게 한 바퀴를 걷고 나자, 추명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모란 나리."
"왜?"
"이런 말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모르겠소만…. 너무 과하게 숨을 필요는 없는 것 같소."
"나? 나 말이야? 내가 숨는다고?"
"뒤로 숨는다는 말이 아니라, 항상 소인을 포함하여 다른 스타단 나리들을 우선시하니까…. 전에는 나리에 관한 이야기를 잘 하지도 않았잖소? 그러니까 이젠 가끔은 나리를 드러내고 나리가 하고 싶은 걸 먼저 했으면 좋겠다는 뜻이오."
"아…. 그래?"
모란의 표정이 순식간에 복잡미묘해졌다. 그 얼굴을 보고서도 추명은 아차, 하는 기색이 없었다. 자신이 해야 할 말을 했으니 되었다는 듯 그는 살짝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모란은 잠시 땅을 내려다보았다. 척 봐도 무언가를 깊게 고민하고 있는 얼굴이었다. 잠시 입술을 굳게 다문 것도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어렵게 입을 뗐다.
"생각해줘서 고마워. 네가 날 생각하는 마음은 충분히 알겠어. 다른 스타단 친구들도 마찬가지지만 너에게도 항상 고마워하고 있어…. 네가 좋은 뜻으로 말한 것도 알고 있어. 근데, 정말 미안한데, 네가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모르겠는데…."
"...그냥 말해도 상관없소."
"다른 친구들이 말했으면 이해했을 거야. 근데, 네가 할 말은 아닌 거 같아."
모란의 말은 그를 찌르지는 않았지만 빠져나올 수 없는 고리가 되어 그를 에워쌌다. 평소 자신의 주장을 펼칠 때면 항상 반짝거리던 눈은 차마 감추지도 못하고 심각하게 흔들렸다.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을 뿐인데도 그는 순식간에 난처한 기색이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는 아까의 말을 정정하거나 미안해, 같은 말은 나오지 않았다.
"내 생각에는…. 내가 내 이야기를 안 한 만큼 너도 네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것 같거든."
"…."
모란은 스타더스트 대작전 당시의 자신을 떠올렸다. 다른 친구들의 아지트 앞에서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무얼 하는 사람인지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한 반면, 팀 시의 아지트 앞에서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그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은 속을 알 수 없다. 어떻게 대처할지 알 수 없다, 정도. 결국 전부 추명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기에 나오는 말이었다.
"으음….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도 평소에 네가 무슨 생각을 하며 지내는지 잘 모르겠어.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야. 그냥 네가 그런 사람인 거니까…. 근데 그렇다면 나한테 이런 말은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 이기적이라거나 네 잘못을 묻는 게 아니라. 너는 여전히 널 감추며 사는데 나는 드러내도 좋다, 라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모순 같거든."
"그렇게 생각하오?"
"...그래. 생각해서 해준 말인 건 정말 고마워. 하지만, 너도 그럴 수 있다면 나도 그럴 수 있어야지."
카시오페아인 시절 모란은 자신을 숨겼기에 다른 친구들은 그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그를 떠나보냈다. 추명 역시, 닌자답게 자신을 숨겼기에 모란은 그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팀 시의 해체를 계획할 수밖에 없었다. 둘은 야행성인 것도, 무언가를 동경하여 그처럼 되고 싶어하는 것도, 속내를 내비치지 않는 것도 같았다. 그들은 끔찍하게도 또 다행스럽게도 많은 부분에서 동류였고, 그렇지만 파고들면 너무나도 달랐다.
그래서 서로를 누구보다 잘 이해했고, 동시에 잘 이해할 수 없었으며, 그렇기에 누구보다도 좋은 친구였다. 그러나 그렇기에, 오늘 같은 일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교집합이 너무 많은 나머지 서로가 원래는 무슨 색인지 잘 알 수 없고, 교집합이 거의 없는 나머지 서로가 추구하는 바와 그들만의의 개성이 뚜렷함을 알 수 있다. 모순적인 사람들의 모순이 쌓여 모순적이라는 말을 내뱉게 된다.
"사람이 매번 솔직할 수 없다는 건 알아. 네게 그런 걸 바라는 건 아니지만, 그냥…. 때로는 나를 드러내지 않는 것도 친구들을 생각하는 하나의 방법인 걸 알아줬으면 좋겠어. 네가 그러는 것처럼."
"지금 소인과 모란 나리가 같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오?"
"아니, 우리는 비슷해보여도 달라. 근데 생각해보면 다른데도 분명 비슷해. 갑자기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인가 싶지만, 아무튼…. 그러니까 할 수 있는 말이야."
"잘 이해할 수 없소이다."
"아는 게 이상하지. 서로 숨기지 않고 이야기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이해하겠어. ...웃기는 소리이긴 한데, 네가 똑같은 말 했어도 나도 너처럼 답했을 거야. 그냥…. 이대로 내버려둬도 나는 괜찮다는 거야."
"진짜 괜찮소?"
"그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확신하는 사람들이 확신 없는 말을 주고받는다. 누구도 상처입지 않는 만큼 대화의 흐름도 제자리다. 그건 두 사람에게 결국 답이 나오지 않는 답답한 문제일 수도, 끝내 서로를 진정으로 이해하게 되는 길을 터 주는 별일 수도 있다. 빙빙 돌리고 피해서 희미해서 잡을 수도 없는 답을 낸다. 말하자면, 결국 앞으로의 문제다. 두 사람의 앞에 달린 일이다.
"...모란 나리가 그렇다면 알겠소."
"미안, 너무 이상한 말만 했지…. 나도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지금이 좋아. 지금대로라도 괜찮아. 그러니까, 너도 쭉 그랬으면 좋겠어."
"알았소이다. ...그래도,"
"그래도?"
"그러다가 갑자기 안 괜찮아진다면 언제든 이야기해줬으면 좋겠소. ...숨기지 말고."
"아? 뭐야, 아까랑 같은 말이네. 그래도…. 노력해 볼게. 네 마음 충분히 잘 전해졌으니까."
고마워. 이제 들어가자. 모란의 말이 끝나자마자 돌아가던 운동장은 거짓말처럼 다시 제자리로, 기숙사로 향하는 입구를 비추고 있다. 저 길을 건너도 우리는 그대로겠지. 이때까지 변하지 않은 만큼 변할 것이고, 변한 만큼 변하지 않을 것이고, 모순덩어리인 자신과 그 마음을 끌어안고 적당히 숨고 드러내지 않고 자신의 감정은 되도록이면 자신만이 끌어안으며 살 것이다. 제멋대로 굴면서도 책임감을 버리지 않고, 동경하는 걸 계속 동경하면서.
그래도….
"아! 모란 나리. 괜찮다면 이 곡, 들어보지 않겠소?"
"음? 무슨 노래? 피나가 작곡한 거야?"
"그건 아니오. 오늘 아침에 문득 생각나 들은 노래인데, 사실은 모란 나리가 없을 때 꽤 자주 들었소. 아직도 무슨 음악을 좋아하는지 잘은 모르지만…. 그래도 듣는 분야는 비슷하니 말이오."
"알았어. 어차피 안 잘 거니까 한번 들어볼게. ...궁금하기도 하고."
"소인도 비디오 게임이나 하다 자야겠소."
둘은 말을 맞춘 것처럼 잠에 들지 않겠다고 한 뒤 찢어지는 길목에서 게임 재밌게 해, 같은 짧지만 결코 형식적이지 않은 인사와 함께 손을 흔들면서 서로를 다시 각자의 세계로 떠나보냈다. 누구보다도 견고하고 부서지지 않는, 그러기에 흔들리거나 깨지기도 쉬운 세상으로.
모란은 기숙사에 돌아오자마자 침대에 누워 스마트로토무로 아까 추명이 전송해준 노래를 재생했다. 한치의 예상도 빗나감 없이 오타쿠들이나 자주 듣는 노래였으나, 의외로 시끄럽지 않고 잔잔한 멜로디였다. 닌자 애니에도 가끔 이런 노래가 나오는 건가.
노래가 끝난 뒤, 모란은 자신의 취향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괜히 한 번 더 듣고 싶다는 생각 역시 했다. 이왕 오랜만에 노래를 추천받은 거, 그는 잠들기 전까지 노래를 계속 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행이게도 또한 끔찍하게도 동류이며, 잘 이해하면서도 이해하지 못하고, 그러나 그렇기에 친구인, 그리고 앞으로도 친구일 추명을 떠올리면서.
모란은 재생 버튼을 한 번 더 눌렀다. 스마트로토무 안에서 그가 후드를 뒤집어쓰고 누워있었다.
BGM / 커틀러리 - 유기산(vo. 하츠네 미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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