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전드 아르세우스 4화
가지 않은 길
이후 임무를 계속하면서 제노의 포켓몬들은 성장했다. 나몰빼미가 빼미스로우로, 꼬링크가 럭시오로 진화했다.
제노가 럭시오의 털을 쓰다듬었다. 녀석이 기분 좋은 듯 만족스러운 울음소리를 흘렸다.
피카츄를 포함해 원래 가지고 있던 포켓몬들은 키우지 않았다. 도감만 완성하고 놓아주었다. 데리고 다니는 것만으로 죄를 짓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포켓몬도, 사람도- 그 누구도 제노를 비난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다만 이브이 한 마리는 어쩔 수 없이 데리고 다니게 되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자꾸만 졸졸 따라다녀서, 마을 사람들이 왜 저 포켓몬은 볼에 넣지 않느냐고 물어보는 지경이었다. 자신이 잡은 포켓몬이 아니라고 하여도 아무도 믿지 않았다. 결국 제노는 마을 사람들의 불만을 감내하는 대신 이브이를 포획하는 쪽을 택했다.
아무튼 정은 주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제노가 럭시오를 밀어내고 제 머리를 들이미는 이브이를 쓰다듬었다.
“이도 님! 얘기 들었습니다. 폭주하는 왕을 겁내지 않고 진정시키시다니, 정말 대단합니다!”
맞다, 저 녀석도 있었지.
월로가 또 어디선가 튀어나와 제노에게로 다가왔다. 이브이의 털이 곤두서는 것이 느껴졌다.
“왕을 진정시켰다는 그 실력. 제게도 보여주시겠어요?”
또 실력을 겨뤄보자는 말이었다. 저런 멀대 같고 음침한 놈이 눈만 마주치면 승부를 걸어오니, 반대쪽 눈마저 머리카락으로 가려줘야 하나 여러 번 생각했었다. 물론 실행에 옮긴 적은 없다. 월로는 난천 씨를 닮은 얼굴에 감사해야 할 것이다.
생각은 이렇게 해도, 제노는 매번 불만을 입 밖으로 내지 않고 승부를 받아들였다. 배틀을 하는 동안에는 잡생각이 없어지니까.
그래도 제법 귀찮으니 다음에는 배틀 대신 술로 해결할까 고민한다. 마을에 술을 팔만한 가게가 있던가, 곰곰이 떠올려보며 제노가 볼을 던졌다.
*
전목의 명령에 따라 붐볼을 진정시키기 위해 동굴로 향하려는 길에 주혜의 소개로 반가운 얼굴을 만났다. 낡고 찢어졌지만 그의 시그니처인 모자와 코트를 걸친 남성.
그러고 보니 상행도 히스이지방에 기억을 잃고 떨어진 상태였다. 그의 안내를 받아 천관산 기슭으로 향했다.
“동굴의 왕은 제가 기억하고 있는 붐볼과는 모습이 다르다고 들었습니다.”
하나지방에서보다 훨씬 나이를 먹은 모습. 이곳에서 지낸 세월이 제법 긴 모양이었다. 상행이 진주단의 캡틴으로서 설명하는 도중에, 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진주단의 캡틴 상행! 그리고 은하단의 조무래기 녀석! 위대한 동굴의 왕, 붐볼을 만나려 하다니 어찌 이리 괘씸한 짓을!”
제노는 그 외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곁눈질로 상행을 살폈다.
시간과 장소가 변해도 트레이너로서의 영혼은 변하지 않는 것인지, 그는 여전히 포켓몬들을 아끼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 상냥한 동백 님께서 특별히 너희가 동굴의 왕을 만날 자격이 있는지 확인해 주도록 하지. 나, 동백의 생각은 이렇다!”
어째서 그가 이곳에 떨어지게 됐는지는 알 수 없다. 그저 일어나기로 예정되어 있던 일일 뿐. 주인공들에겐 예상치 못한 카메오로 등장해 즐거움을 줄진 모르겠지만, 직접 마주하고 있으니 안타까울 뿐이었다.
아니, 어쩌면 자신과 달리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고 꿋꿋하게 살아가고 있으니 동정하는 건 실례일지도. 씁쓸함에 제노가 고개를 떨구었을 때, 혼자 주절거리던 동백이 외쳤다.
“그러니까 얌전히 축복마을로- 좀 들어라 좀!!”
이후 상행은 제노와 동행하면서 자신의 소소한 과거 얘기를 열심히 얘기하기 시작했다.
어딘가로 향할 때마다 혼자 시그니처인 포즈를 취하는 것이 너무나 외로워 보였기에 슬쩍 장단을 맞춰주었더니, 이후 ‘이도 님과 함께 있으면 무언가 떠오르는 것 같다’며 잔뜩 흥분해선 저런 상태다.
그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확실하지도 않은데 어쩌면 괜한 짓을 한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히스이지방에 오기 전의 저는 대체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
어떤 사람이긴요, 서브웨이 마스터죠. 제노는 속으로만 생각하고 침묵했다.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머릿속에 있는 정보로 상행과 하행의 멀티배틀을 상상해 본다. 배틀서브웨이라, 한 번쯤은 가보고 싶을지도.
그런 제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그가 말했다.
“당신과 포켓몬 승부를 하면 뭔가 떠오를 것 같기도 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빤히 쳐다본다. 아니, 상상만 한 거지 진짜 싸우고 싶단 말은 아니었어요. 하지만 상행의 반짝이는 눈을 마주하니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제노는 몬스터볼을 꺼내 들었다.
*
제발 그냥 좀 잡혀라, 응? 도감만 채우고 다시 풀어준다니까.
제노가 열리려는 몬스터볼을 억지로 잡아 눌렀다. 안에는 잔뜩 성이 난 우두머리 포켓몬이 들어있었다. 렌트라의 옆에서 상행이 그것을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폭주하던 붐볼을 원래대로 돌려놓고 나서, 상행은 틈만 나면 제노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능숙하게 포켓몬들을 다루는 제노의 모습에 그가 자신과 같은 세계에서 왔다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완전히 기억이 돌아온 것은 아니었지만 원래 세계의 편린인 제노에게 관성처럼 끌리는 모양이었다.
“이도 님께선 도감을 채우는 데 열심이시군요.”
“그렇죠? 포켓몬들에게 관심이 정말 많으시다니까요.”
어느새 목소리 하나가 더 끼어들었다. 흘긋 바라보니 월로가 자연스럽게 상행의 옆에 서 있었다. 언뜻 월로가 두 배로 늘어난 것 같지만, 상행이 있을 땐 그가 쓸데없는 짓을 하지 않아 오히려 나았다. 제노가 자꾸만 두 사람에게로 정신을 팔자 님피아가 더듬이를 뻗어 팔을 잡아 왔다. 하던 일에 집중하라는 뜻 같았다.
잠시 기다리자 몬스터볼이 얌전해졌다. 도감의 새로운 한 페이지를 완성한 제노는 우두머리 포켓몬을 풀어주었다. 녀석은 푸릉, 콧방귀를 한번 뀌곤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아예 자리를 잡고 앉은 월로가 강한 포켓몬인데 아쉽지 않냐고 말하는 것이 들려왔다. 침묵하는 제노를 대신해 상행이 자신의 의견을 말하며 두 사람이 대화의 장을 열었다.
이럴 거면 그냥 나는 빼고 둘이서 놀았으면 좋겠다. 제발.
“이도 님, 이번에는 크레베이스를 진정시키기 위해 순백 동토로 가실 거죠? 그럴 줄 알고 제가 따뜻한 외투를 준비했답니다!”
짠, 하는 귀여운 효과음과 함께 월로가 두툼한 옷가지 하나를 꺼내 보였다. 이럴 때 보면 행상인인 그가 제법 도움이 되었다. 상행이 대신 제노의 생각과 같은 말을 입밖으로 꺼냈다.
“그거 큰 도움이 되겠군요. 순백 동토는 무척 추운 지역이니까요.”
“후후, 저와 상행 님의 것도 있답니다~”
월로가 눈을 찡긋거리며 크기가 훨씬 큰 외투를 두 벌 더 꺼내 들었다. 상행이 오오- 하고 감탄했다.
아니, 거기까지 따라올 거냐고. 제노가 황당하단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옆에 있던 님피아의 표정 또한 썩어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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