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전드 아르세우스 5화
가지 않은 길
어느 날 월로가 제노에게 물었다.
“이도 님께서 시공의 균열에서 떨어지기 전에 지내던 세계는 어떤 곳인가요?
상행은 잠깐 자리를 비운 상황. 그는 과묵한 제노를 배려하여 월로가 던지는 난처한 질문들을 대신 받아치곤 했다. 월로는 그런 그가 없는 때를 호시탐탐 노렸다.
아마 이 질문은 상행이 돌아오고 나서도 계속되겠지. 덩치 큰 두 사람의 미묘한 기싸움 사이에 더 이상 끼고 싶지 않았던 제노가 대충 답했다.
“미래요.”
“예?”
“저는 미래의 히스이에서 왔어요.”
너무 성의 없는 말투에 월로는 그가 자신을 놀리는 것인지 아닌지 긴가민가했다. 잠시 고민하던 월로가 계속해서 물었다.
“미래의 히스이지방이라, 거긴 어떤 곳인가요?”
“포켓몬과 사람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곳이에요. 그중에서도 포켓몬 트레이너라고, 승부를 거듭해 단련하는 사람들이 있죠.”
문득 이 말이 거짓이 아닐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포켓몬 트레이너라는 존재가 정말 있다고 하면, 상행과 그의 싸움 실력이 납득이 갔다.
“포켓몬 트레이너라… 제가 이도 님과 같은 세상에 살았다면, 저 역시 트레이너였을까요?”
“….”
회색빛 시선. 웬일로 제노가 피하지 않고 그것을 마주했다. 허나 월로는 그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제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미 있어요, 월로 씨 같은 사람.”
“네? 이미 있다니요?”
“월로 씨랑 똑 닮은 생김새를 가진, 아주 강한 트레이너가 있거든요.”
정말 멋진 사람이에요. 그렇게 말하며 제노가 살포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월로는 처음 보는 그의 미소에 놀랐다가, 이내 표정을 갈무리지었다. 자신을 눈앞에 두고 다른 사람을 겹쳐보면서 저런 얼굴을 하다니.
설명할 수 없는 불쾌감이 뱃속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
모든 왕들을 진정시키고 나서 이변은 발생했다.
붉게 물든 하늘, 사람들 모두가 불안에 빠졌다. 부름에 단장실로 향한 제노에게 전목은 말했다.
“자네를 은하단에서 퇴단시키도록 하겠다.”
마을에서의 추방은 곧 객사. 전목의 잔인한 결정에 주혜와 찬석이 반박했으나, 오히려 제노가 순순히 그러겠노라 답했다. 이번에도 말없이 떠나는 그에게 주혜가 외쳤다.
“너는 억울하지도 않아? 모두를 그렇게 열심히 도왔는데,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널 의심하고 있잖아!”
“….”
주혜에게 답할 말이 없었다. 딱히 억울하지도 않았고, 남을 돕기 위해 움직인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자면 진주단의 두령이란 지위를 내걸고 전목의 앞에서 자신을 감싸는 주혜가 더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주혜와 눈을 마주하던 제노는 조용히 본부를 떠났다. 주혜의 시선이 뒤통수를 따끔따끔하게 찔러왔다.
곧 멸망할 것만 같은 무시무시한 색의 하늘 아래. 마을을 나선 제노는 라벤, 그리고 금경과 함께 들판을 걸었다.
“너무한 결정입니다! 과학자로서 단호히 항의할 겁니다!”
끝까지 따라온 라벤이 추방에 불만을 보이자 금경이 그것을 진정시켰다. 추방자를 감싸려다 덩달아 화를 입을 수 있다는 말. 제노까지 그 말에 동의하자 라벤은 침음을 흘리며 입을 다물었다.
“명령을 내리겠다. 죽지 말고 살아남아라.”
제노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두 사람과 작별했다. 어디론가 걸어가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라벤이 말했다.
“이도 님은 정말 대단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저렇게 침착하시다니….”
“글쎄. 나는 가끔 두렵군.”
금경의 입에서 나온 답에 라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금경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타인의 감정도, 자신의 감정도 상관없다는 저 태도. 그렇다면 대체 무엇을 확신하고 나아가는 것인가….”
말끝을 흐린 금경이 들판 먼 곳을 바라보았다. 제노의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제노는 말 그대로, 발길이 닿는 대로 걸었다. 자신은 원래 노숙이 특기다. 이곳 사람들과 달리 야생 포켓몬이 두렵지 않으니 적당한 곳을 찾아 대충 자면 될 것이었다. 하늘이 이 모양이니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 확실하지 않은 것은 별로였지만, 어쩔 수 없지.
“이도 님!”
라벤이 금강단이나 진주단에 도움을 청할 것을 제안했었지만, 제노는 그 둘 중 어디로도 향하지 않았다. 애초에 도움을 청할 생각이 없기도 하고, 어차피 거절당하기만 한다.
“이도 님?”
그러고 보니 상행도 진주단 소속이지. 자신과 가깝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들이 제법 되니 혹여나 도움을 주지 못하도록 그에게 붙은 감시가 엄중할 것이다.
“이이도오 니임~”
제노가 걸음을 더욱 빨리했다. 미래인끼리 정이라도 든 것인지, 잠깐 그가 보이지 않는다고 조금 섭섭했다. 하지만 빨리 잠자리를 구하는 것이 우선이겠지.
“에잇! 비기, 배후-”
제노가 급히 몸을 틀어 뒤에서 덮쳐오는 월로의 손길을 피했다. 그의 뚱한 표정과 마주한 월로가 속도 없는지 방긋방긋 웃었다.
“역시 이도 님. 저의 비기를 피하시다니, 날이 갈수록 실력이 훌륭해지시는군요!”
“….”
제노는 답하지 않았다. 다만 더 이상 그를 피하는 것을 멈추고 얘기를 들었다. 사정은 들었다며 떠들어댄 월로는 자신만 믿으라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제노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을 상대하는 건 참 피곤한 일이다.
*
“또 농땡이를 피우러 온 게냐? 하늘이 붉게 변해도 여전한 녀석이구나.”
월로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곳은 어느 공터의 허름한 캠프였다. 그곳에는 그와 마찬가지로 난천을 닮은, 검은색 드레스를 입은 여성이 있었다.
여기에 난천까지 더해지면 뿌요뿌요처럼 터지는 거 아냐? 제노가 멍하니 이상한 생각이나 하고 있을 때 월로가 코기토에게 그를 소개했다.
코기토가 말했다.
“지난번에 말했던 시공의 방랑자로군. 그대 덕분에 겨우 나의 사명을 다할 수 있을 것 같구나.”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군, 따라와라.
그렇게 말한 코기토가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향했다.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만 보는 제노를 월로가 붙잡고 이끌었다.
이 세계의 단점 중 하나는 게임 주제에 스토리 스킵이 안된다는 것이다. 잠시 눈을 감은 제노가 어린 시절, 오 박사에게 포켓몬 수업을 듣던 때를 떠올리며 정신을 다잡았다.
안으로 들어서자 코기토 교수님께서 히스이지방 신화학의 유일한 두 수강자와의 수업을 위해 기다리고 계셨다.
“왕고래금 위지주 사방상하 위지우-”
강의 후기: 교수님이 예쁘고 수업이 어려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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