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는 해
벽록~남청 사이 카지가 챔피언이 된 날 날조 글 어쩌구
테라스탈 결정체가 빛을 발하며 배틀 코트에 입자를 이리저리 휘날리기 시작했다. 빛이 반사되어 마치 무지개 같은 느낌을 주는 이 입자들은 보는 이들 눈에 즐거움을 선사했지만 배틀 코트에 선 두 명의 트레이너에게는 기쁨과 아쉬움 혹은 슬픔을 나누어 전해주는 전령과도 같았다. 보통 이런 작은 별빛들이 가장 아름답게 빛날 때는 상대 포켓몬의 전투 불능으로 감싸고 있던 빛이 스러지며 퍼질 때니 말이다. 연습 경기가 아닌 로비의 배틀 코트에 퍼진 별빛의 주인공은 리그부 부장인 제빈의 도전자들의 것이었지만.
“…정말? 내가 본 게 맞아?”
오늘 이 자리를 가득 채운 스러지는 별빛의 주인공은 제빈의 것이었다.
뜻밖의 결과에 모두가 입을 다문채 침묵을 지켰다. 침묵을 지키는 와중에도 누군가는 웅성거렸지만 정작 당사자인 제빈은 잠시 예상외였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고선 언제나 같은 여유로운 표정을 보이고선 에이스인 브리두라스를 볼에 불러 넣었다. 브리두라스가 볼에 들어가자, 침묵을 깨고 저 멀리서 어느 누군가의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신호탄이라도 된 듯 침묵을 지키고 있던 관중들은 하나둘 따라 박수를 치기 시작했고 새로운 챔피언의 이름을 부르며 각자 관람한 시합의 소감을 하나둘 내뱉었다.
“…정말 대단해! 설마하니 제빈 선배를 꺾을 줄은!”
“그럴만하지. 연습하는 거 봤잖아? 카지라면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조금 분위기가 바뀐 거 같긴 하지만?”
새로 탄생한 챔피언에 대한 찬사 속에서도 오랫동안 자리를 지켜왔던 챔피언에 대한 걱정이 담긴 작은 소리 또한 주변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그… 선배가 졌다고? 아니, 평소에 조금 느긋하게 있는 사람이라고는 해도…”
“배틀할 때만큼은 진심이잖아? 최강이고.”
“…이제 전 최강 아니야?”
“야, 너는 무슨 말을 그렇게…”
이런 이야기들이 오고 가던 도중 제빈의 시선이 한순간 벤치에 향했다. 이런 말들이 제빈의 귓가에 새어 들어갔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와 눈이 마주치자 수군거리던 소리가 이내 잠잠해졌다. 표정의 변화는 없었지만 아마 들었다 한들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이내 제빈의 시선은 자신의 도전자, 새롭게 왕좌에 오른 현 챔피언에게 향했다. 오랫동안 챔피언의 자리에 있던 여유인지 원래 제빈의 성격으로 인한 건지는 모르지만 패배한 사람의 걸음걸이로는 보이지 않는 여유로운 발걸음을 보이며 카지의 앞으로 다가갔다.
한 걸음씩 카지를 향해 다가가 둘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제빈은 배틀 도중 잊고 있던 복잡한 감정의 불씨가 다시 한번 피어오르는 게 느껴졌다. 패배의 분함으로 인한 건 아니었다.
“여, 축하해. 카지. 아니, 이제 챔피언이라고 불러야겠지? 아니면… 음, 부장이 좋으려나?”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보이며 살갑게 말을 걸었다. 한참을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을 둘러보던 카지가 제빈의 목소리를 듣고선 그에게 시선을 맞추었다.
“깜짝 놀랐어. 뭐, 아마도 네가 최근 아카데미 안에서 가장 노력했던 사람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긴 하지만… 이렇게 단기간에 강해진 사람은 아마도 네가 처음-.”
“아무래도 좋아. 그런 건 다른 사람들도 알 거니까. 제빈, 너를 이긴 순간 그건 증명 됐어.”
“…아하, 그래? 어, 응. 그렇지.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둘 사이의 짧은 대화가 오고 갔다. 그제야 제빈은 자신이 느끼고 있는 이 복잡한 감정이 누구에 의해 피어난 건지 알 수 있었다. 둘 사이에 개인적인 교류가 있던 편은 아니었다.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거나 인사를 나누어도 그 사이에는 시유가 항상 껴있었으니, 제대로 된 교류를 시작한 건…
“저번 자연학교 이후 엄청 강해진 거 같네? 몰라볼 정도야. 아마… 네 누나도 깜짝 놀라겠는걸? 동생이 챔피언이라니!”
“…”
스스로가 생각해도 시답지 않은 소리였다. 굳이 이런 말을 할 필요가 있었나? 하는 생각과 함께 괜한 트러블을 만들어 귀찮은 일이 생기지만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말을 이어나갔다.
“…뭐어, 그건 그런 거니까. 아차, 맡아둔 게 있었지. 챔피언이 되면 주는 깜짝선물 같은 게 있거든. 어디보자… 아, 타로한테 맡겨뒀지. 타로~”
제빈의 부름에 짙은 분홍 머리의 트레이너가 제빈과 카지를 향해 다가오며 말했다.
“제빈, 직접 전해준다더니만 또 까먹었지?”
“…아 그랬나? 배틀 때문에 맡아둔 거까진 기억했는데. 미안~”
“하여간… 아, 맞다. 카지. 그… 챔피언이 된 거 축하해. 방금 시합의 결과로 새로운 블루베리그의 챔피언이 되었어. 약간의 절차는 필요하겠지만. 그리고-. …이건 제빈이 줄 거지?”
“응? 아, 응. 그리고 이건- 뭐, 기념품 같은 거야.”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싶었지만, 타로가 건넨 물건을 받은 제빈은 다시 한번 새로운 챔피언을 향해 건네었다. 진한 보랏빛을 띈 몬스터볼, 자주 볼 기회는 없지만 모르는 이가 보더라도 한 눈에 중요한 물건이라는 걸 알아 차릴 거 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감사의 인사를 대신 하는 듯 볼과 제빈을 번갈아 보고선 카지는 제빈이 건넨 마스터볼을 손에 쥐었다.
“아, 잠깐. 건네기 전에~”
‘“?”
“응?”
서로 마스터볼의 양쪽을 쥐고 있는 이상한 모양새가 되긴 했지만 제빈은 개의치 않다는 듯 그대로 카지를 바라보았다. 검정과 보랏빛이 섞인 머리카락과 금빛 눈동자는 여전했지만 자신이 알고 있던 그 눈동자와는 달리 총기를 잃은 채 위압감을 뽐내고 있었다.
정말, 내가 아는 녀석이랑 많이 달라졌구먼.
“새로운 챔피언에게 물어볼 게 있어서! 잠깐이면 돼. 괜찮지?”
“뭔데?”
“음~ 별 건 아니고. 오늘 시합. 어땠어? 뭐, 아무렇게나 대답해도 좋아. 재밌었다. 빡셌다…”
“제빈! 말 좀!”
제빈의 단어 선택에 타로가 불만을 표했지만 가벼운 사과와 함께 얼렁뚱땅 넘어가려는 듯 헛기침을 하고선 질문을 이어나갔다.
“아무튼, 어땠어? 이제 내려오는 사람으로서 언제 너한테 도전하게 될지 모르니까. 참고 삼을 겸 들어보려고.”
“…어땠냐고?”
말을 멈춘 카지는 대답을 고민하는 듯 꽤 긴 침묵과 함께 제빈을 바라보았다. 주변의 모두가 카지의 답을 기다리고 있었고 짧지 않은 시간이 지나자 기다리고 있던 대답이 카지의 입을 통해 나왔다.
“…시시했어. 마치 이게 끝이라고 생각하는 거 같은데. 아니, 이건 시작일 뿐이야. …제빈, 참고 삼는다고 했지? 그럼, 현 챔피언이 전 챔피언한테 조언 하나 해줄게.”
“…오호, 뭔데? 이거 돈 주고도 못 살 경험이구먼.”
“…오늘 네가 진 이유는 그 태도 때문이야. ”
모두가 예상했던 답은 아니었다. 지금의 카지가 예전에 비하면 많은 변화를 이뤘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실력과 태도 모두 단기간에 급격히 변한 것이었기에 예상했던 답과 다른 것이 나오자 몇몇 이들은 어색함을 또 어떤 이들은 새로운 챔피언의 당돌한 모습에 박수를 보냈다. 타로의 경우 전자에 해당했다.
“….아, 그리고 또 한 가지 더. 시합 말인데. 즐거웠어?”
“…대답해야 해? 아무래도 좋을 질문인 거 같은데. 알아서 생각해.”
서로 손을 마주 잡고 있지는 않았지만 쥐고 있는 볼을 통해 카지의 손에 힘이 꽤 들어간 게 느껴졌다. 볼을 빤히 바라본 후 이내 시선을 카지에게 옮긴 제빈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음~ 그렇구만. ...귀중한 경험이었어! 고마워. 챔피언.”
“고맙기는, 앞으로 잘… 지내보자고. 전 챔피언.”
“그래, 그래야지. …아, 타로. 슬슬 갈까? 이거 관련해서 처리 할 일도 많은데.”
“…어, 응? 으응. 그렇지? …뭐야 갑자기? 평소에는 귀찮다면서 내일모레 하자고 하더니.”
타로의 말에 제빈은 헤실 미소를 지어 보임과 동시에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이제 챔피언도 아닌데 사천왕으로서 할 일은 해야지. 어디 보자 순위도 갱신됐으니까… 이크, 골치 아픈 일 천지겠구만. 일단 할 건 다 했으니까. 부실로 돌아가자."
“흐응… 그래. 알았어.”
“아차, 그리고. 챔피언은 여기서 좀 더 즐기고 와도 좋아. 저기 봐. 지금 네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어후 많아라. 아무튼, 이 자리에 처음 올라왔을 때 만큼 기분 좋은 게 없거든. 그럼! 주연에게 자리를 맡길 게 이만.”
틀린 말은 하나 없었다. 제빈은 자기가 경험했던 모든 것들을 새로운 챔피언에게 전해주었다. 타로와 함께 자리를 나서는 이 순간에도 벤치의 다른 학생들은 카지의 이름을 외치고 있었다. 뜨는 해가 있으면 지는 해도 있는 법이라고 했던가. 아마 오늘, 이 순간을 상징하는 말임이 틀림없었다.
게이트를 지나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르자 곧바로 문이 열렸다. 평소라면 시간을 덜었다고 말했을 제빈이었지만 이상하게 아무런 말이 나오지 않았고 그런 모습을 본 타로는 이상함을 느끼고 물었다.
“…제빈, 혹시 화난 거야?”
타로의 대답에 제빈은 뜬금없다는 듯 대답했다.
“응? 갑자기? 그럴 리가. 설마하니 이 제빈님이 사천왕으로 강등됐다고 화내는 사람으로 보였어?”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아니다 됐어! 이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내가 알던 그 사람 맞네.”
“하하, 그럼, 다행이고.”
짧은 대화가 오고 간 후 엘리베이터의 안은 기계장치의 소리만이 가득했다. 이 적응하기 힘든 고요함에 타로는 다시 입을 열어 혼잣말하듯 일정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일단 돌아가서… 사천왕도 새로 바꿔야 할 거고… 부실 청소랑… 아, 그러고 보니까.”
“응?”
“교장 선생님한테 들었는데. 팔데아에서 곧 교환학생이 올지도 모른다고 하더라.”
“교환학생?”
제빈의 물음에 타로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이름이 아마-”
타로의 대답과 동시에 리그부가 있는 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는 도착 알림음과 함께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며 나오는 순간에도 두 사람의 대화는 이어졌다.
“그래? 신기한 이름이네. 으음… 교환학생이라.”
“왜? 아는 이름이야?”
“아니, 그건 아닌데.”
잠시 걸음을 멈춘 제빈은 한참을 고민하다 묘한 표정을 지어 보인 후 다시 미소를 지었다. 그런 제빈의 표정을 타로는 보지 못했는지 걸음을 멈춰 자신의 뒤에 있는 제빈을 빤히 바라만 보았다. 이내 제빈이 평소와 같은 느긋한 어투로 대답했다.
“그냥, 귀찮고 재밌는 일이 많이 생길 거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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