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한 갈래 길
거하게 뒤통수를 맞은 목호가 시원하게 웃었다. 가디안을 제외하더라도 결국 남은 것은 제노의 포켓몬이었으므로, 제노와 실버의 승리였다.
“너희들의 콤비, 훌륭했다.”
“거의 제노가 혼자 다 했지만 말이야.”
칭찬에 익숙하지 않은 실버가 불퉁하게 답했다. 그러자 목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실버가 목호를 바라보았다. 그가 계속해서 말했다.
“혼자서 강함을 추구하며 한없이 위를 향해 도전하는 것도 좋겠지… 하지만 포켓몬과 싸우는 즐거움은 그것뿐만이 아니다.”
실버를 마주 보던 목호가 천천히 시선을 제노에게로 옮겼다.
“뭐, 일부러 말해주지 않아도 너희들은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지만.”
그 말에 실버는 잠시 생각에 빠진듯했다. 제노는 말 없이 모자를 고쳐 쓸 뿐이었다. 한층 더 깊이 모자를 눌러쓴 제노가 볼 하나를 꺼내 들었다.
“아, 그러고 보니 목호 씨께 보여드릴 게 있어요.”
“음? 뭐지?”
펑. 볼에서 나온 딥상어동이 새로운 사람들을 마주하고 기쁜 지 크왕 울며 목호를 향해 짧은 팔을 뻗었다.
오, 아기 드래곤 포켓몬. 목호와 이향의 얼굴이 순식간에 풀어졌다.
“새로 데려온 포켓몬인가?”
“네. 신오지방에서 알일 때부터 함께했던 아이예요.”
“… 귀엽다….”
이향이 눈을 빛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몸을 배배 꼬는 것이 딥상어동을 가까이서 보고 싶어 안달이 난 모양이었다. 제노가 말했다.
“자, 관장님. 저희가 이겼으니 어서 라이징배지를 주시죠.”
“으, 으으, 그치만…!”
“이향.”
목호가 낮은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자 이향의 얼굴이 거의 울상으로 변했다. 제노는 마지막 한 방을 날리기로 했다. 이향을 향해 방실방실 웃는 딥상어동을 들이민다.
“자, 딥상어동, ‘누나 빨리 배지 주세요~’ 해.”
“주, 준다고! 주면 되잖아!!”
*
이걸로 실버는 성도지방의 배지 8개를 모두 모았다. 목호는 ‘리그에서 보자’며 석영고원으로 향했고, 이향 또한 사라졌다.
실버와 제노도 용의굴을 나가려던 그때, 사당의 입구에서 심향과 마주쳤다.
“누나! 실버!”
“여긴 어쩐 일이야?”
“그게, 체육관에 가니까 관장님께서 여기에 있으시다고 해서요.”
“아.”
이향이 체육관을 비우게 한 원인이나 다름없는 제노가 짧은 감탄사를 흘렸다. 이제 체육관에서 볼 수 있을 거야. 제노의 말에 심향은 두 사람이 방금까지 체육관 관장과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가 실버에게 물었다.
“실버, 너 그럼-”
심향의 물음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실버가 제 외투의 지퍼를 열고 안쪽을 보여주었다. 안감에 매달린 배지 8개. 심향의 눈이 반짝였다.
“우와, 대단하다!”
“흥. 이 정도야 당연하지.”
심향의 감탄에 실버가 어깨를 으쓱였다. 얼씨구, 곧 있으면 하늘을 뚫을 기세다. 심향이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좋아, 나도 마지막 배지를 획득하고 금방 따라잡아 주겠어!”
“… 그러시던지.”
웬일로 실버가 심향의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놀란 심향과 제노가 그를 바라보자, 고개를 휙 돌렸다.
“착각하지 마! 네놈이 배지를 모두 모으지 않으면, 대등한 조건에서 싸울 수 없잖아?”
그러니까 너무 늦지 말라고. 그 말을 남기고 그가 먼저 사당을 떠나려다, 멈칫했다. 제노와 실버를 여기까지 데려다준 엘리게이는 현재 지쳐서 쉬고 있는 상태. 그런 엘리게이를 타고 굴을 나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
“….”
“….”
그 사실을 깨달았는지 실버의 발걸음이 물길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멈췄다. 어색한 침묵. 실버의 귀가 새빨개지는 것이 보였다. 제노가 상황을 무마하기 위해 심향에게 말했다.
“혹시 라프라스로 바깥까지 데려다줄 수 있을까? 주고 싶은 것도 있고.”
“네, 문제없어요! 주고 싶은 거라니, 저한테요?”
“응. 포켓몬 센터에 두고 왔어.”
“우와! 뭐예요?”
비밀. 제노가 그렇게 말하며 웃자 심향이 기대된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실버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세 사람은 사이좋게 라프라스의 등에 타고 용의굴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다시 검은먹시티, 포켓몬 센터. 간호순에게 맡긴 포켓몬들을 돌려받은 제노가 두 사람과 함께 센터의 입구에 섰다. 그는 등에 멘 가방에서 상자 하나를 꺼내 심향에게 건넸다. 심플한 디자인의, 어쩐지 고급스러운 느낌의 상자. 상자를 들고 이리저리 돌려보던 심향이 제노에게 물었다.
“지금 열어봐도 돼요?”
“당연하지.”
뚜껑을 열자, 안에는 빛의돌이 들어있었다. 토게틱을 토게키스로 진화시킬 수 있는 물건. 심향의 눈이 커졌다.
“정말 제가 받아도 되나요?”
제노가 고개를 끄덕이자 심향의 표정이 화악 밝아졌다.
“우와아, 감사합니다!”
크게 감사 인사를 한 심향이 당장 토게틱을 몬스터볼에서 꺼냈다. 새하얀 아기 천사 같은 모습의 포켓몬이 작은 날개를 파닥이며 심향의 앞에 자리 잡았다.
“이것 봐, 토게틱! 이게 있으면 토게키스가 될 수 있어!”
그의 말에 답하듯 높게 운 토게틱이 코끝을 빛의돌에 가져다 대자, 몸에서 빛이 났다. 빛이 사그라든 자리에 있는 것은 전보다 배로 커진 날개를 가진 토게키스였다. 토게키스가 즐거운 듯 울며 심향의 주위를 한 바퀴 빙글, 돌았다. 다시 제 앞으로 온 토게키스를 심향이 껴안았다. 제노의 시선이 이번엔 실버에게로 옮겨갔다.
“자, 이건 네 거.”
제노가 실버의 손에 무언갈 쥐여줬다. 실버가 반사적으로 내밀었던 손을 확인해 보자, 날카로운 갈고리 형태의 손톱이 있었다.
“이건 포푸니한테 줘. 도움이 될 거야.”
훈련도 게을리하지 말고. 제노가 그렇게 덧붙이자 실버는 작게 투덜거리며 예리한손톱을 제 주머니에 넣었다.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제노가 입을 열었다.
“이별 선물이야.”
제노의 입에서 나온 단어에 두 사람의 눈이 동그래진다. 어느새 노을이 지고 있었다. 붉은 태양빛의 반대 방향으로 길게 늘어지는 제 그림자를 바라보던 제노가 말했다.
“난 리그에 같이 갈 수 없어. 애초에 도전할 생각도 없었고.”
“그럼 이제 어디로 가시나요?”
“도라지시티. 원래 거기가 목적이었거든.”
너희를 만나서 일정이 틀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즐거웠어. 담백하게 말하고 떠나는 제노의 뒤를 향해 심향이 외쳤다.
“누나! 저, 꼭 챔피언이 될 거예요! 더 강해져서, 포켓몬 마스터가 되겠다는 꿈을 이루겠어요!”
“….”
“그러니까… 다음에 다시 만나면 그때는 저랑 배틀해주세요!”
“그래. 다음에 만나면.”
심향이 말한 조건을 반복한 제노가 미련 없이 떠나갔다.
그리고 그런 그를 실버가 쫓았다.
*
연두마을과 무궁시티로 향하는 45번도로의 초입. 제노가 뒤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멈춰 섰다. 천천히 뒤돌아 실버를 바라보는 얼굴에는 아무것도 담겨있지 않았다. 그 표정에 잠시 망설이던 실버가 말했다.
“데려다줄게. 당신, 혼자선 길도 제대로 못 찾잖아.”
“괜찮아.”
“어?”
제노가 고민도 하지 않고 거절했다.
“실버가 업데이트해 준 타운맵이 있잖아. 그러니까 괜찮아. 게다가 챔피언로드와 무궁시티는 정반대 방향인걸.”
“….”
그 말이 맞았다. 리그까지 향하는 길은 멀다. 괜히 포켓몬들의 체력만 빼는 일을 할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그런데… 어째선지 제노가 꼭 아버지처럼 사라질 것 같았다.
두 번 다시 누군가의 등을 붙잡지 않으리라 다짐했건만. 이상한 기분이 들어 실버는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왼손에서 손수건의 감촉이 느껴졌다.
“돌려줄게, 이거. … 다음에 만나면.”
“….”
“소중한 거잖아?”
아무리 잘 관리해도 시간의 흔적까지 지울 순 없다. 실버는 제노가 손에 손수건을 감아줄 때부터 이것이 제법 오래된 물건이고, 그가 소중히 보관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심향과 같은 조건을 내걸며 실버가 고개를 살짝 돌렸다.
제노는 잠시 침묵했다. 실버의 말에 제게 손수건을 주었던 이를 떠올렸다. 이상하게도 그에 관한 기억은 희미해서, 생김도, 목소리도 이미 머릿속에서 지워지고 이제는 그가 했던 말밖에 기억나지 않았다.
다시 돌려주기를 기다리겠다던 말, 지키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멍하니 실버를 바라보던 제노가 말했다.
“괜찮아. 네가 가지고 있는 게 좋을 것 같아. 나한테는… 이제 필요 없거든.”
“… 당신을 이해할 수 없어.”
실버가 어쩐지 분한 사람처럼 얘기했다. 제노는 조용히 눈만 깜빡일 뿐이었다.
“로켓단 녀석들과 싸운 뒤에, 당신은 내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했어. 무엇도 묻지 않았지. 당신은 아무것도 알려고 들지 않고,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아.”
“….”
제노는 굳이 그런 노력을 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다. 이미 모든 걸 알고 있으니까.
“당신한테 난 대체 뭐야? … … 제길, 무슨 말이라도 해! 처음부터 날 제자 따위로 생각하지도 않았잖아!“
혼자 말하는 상황에 지친 실버가 감정을 토해내듯 소리쳤다.
“당신은 내가 궁금하지도 않아? 난 항상 궁금했어. 당신이 강해지고 싶은 이유가 뭔지, 나에게서 누구를 겹쳐보는 건지, 진짜 목적이 뭔지!!”
제노야말로 소리치고 싶었다. 네가 이러는 이유를 알고 싶다고. 이해할 수 없다고. 하지만 저주라도 걸린 것처럼 모든 말들이 나오지 못하고 목구멍에서 걸려 숨통만 죄고 있었다.
잠시 숨을 고른 실버가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어두워진 숲에 드리운 달빛 아래, 그의 눈동자가 묘한 보랏빛을 띠었다.
“답하고 싶지 않다면 하지 않아도 돼. 다만 잘 들어. 난 지금보다 몇 배는 강해질 거야. 그리고-”
“그리고, 다음에야말로 당신을 이겨 보이겠어.”
별이 수놓은 밤하늘. 달처럼 빛나는 소년이 흔들림 없이 서 있다. 마주 선 이는 그 빛을 피하고 싶기라도 한 것처럼 까맣다. 눈이 부셔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 그래, 기대하고 있을게.”
그 말을 마지막으로 제노는 떠나갔다. 이후 그의 모습을 성도에서 다시는 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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