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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화

두 갈래 길

호텔의 모닝콜 서비스보다 빠르게 울린 벨 소리에 제노가 눈을 떴다. 부스스한 머리를 하고 옆을 바라보자 침대의 반대쪽 끝에 실버가 등을 돌린 채 누워있는 것이 보였다. 제노로부터 최대한 멀찍이 떨어진 것이, 잘못 움직였다간 곧 침대에서 떨어질 것 같았다. 잠들기 직전까지 놀려댄 것이 아무래도 많이 신경 쓰인 모양이었다.

계속해서 들리는 소리에 그가 몸을 조금 뒤척였다. 지금이 대체 몇 시야. 협탁 위에 올려둔 제 포켓기어를 확인한다. 내장된 시계가 새벽 5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화면에 뜬 발신인은 오 박사. 실버가 깨기 전에 조용하지만 빠른 움직임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제노가 기어를 들고 화장실로 향했다.

“네, 박사님.”

- 좋은 아침이구나, 제노야. 혹시 내가 깨운 거니?

어디 보자, 그러니까 호연은 지금…. 조금 잠긴 제노의 목소리에 오 박사가 허둥지둥 호연지방과 관동지방의 시차를 확인했다.

“미안하다. 지금 그쪽은 새벽이겠구나.”

“괜찮아요, 안 그래도 일어나려던 참이었어요.”

되지도 않는 거짓말을 한 제노가 세면대의 거울을 바라보며 눈을 비볐다. 오 박사 또한 그것을 알았지만 굳이 지적하진 않았다. 무슨 일 있으세요? 제노의 물음에 오 박사가 용건을 떠올리곤 다시 말했다.

“님피아의 연구가 끝났단다. 빌려주어 고맙구나.”

“아니에요, 도움이 되었다니 제가 기쁘죠.”

생각보다 빨리 끝내셨네요? 님피아가 오 박사 연구소에서 지낸 기간을 가늠해 보던 제노가 말했다. 그에 오 박사가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내었다.

“그게… 님피아가 나는 물론이고 다른 연구원들의 손길을 너무 싫어해서 말이다.”

“아….”

이럴 줄 알았다.

너는 최고로 강하고 아름다운 페어리 타입이 될 거야, 진화를 하기 전부터 습관적으로 그렇게 말했던 탓일까. 항상 우월감에 차 있던 이브이는 정말 님피아로 진화하고 나서 그 성질머리가 더욱 강해졌다.

떨어지기 싫다는 걸 겨우겨우 달래 보내놨더니 연구소 안을 발칵 뒤집어 놓은 모양이었다. 이 정도면 오래 버텨준 편인 박사님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님피아도 널 많이 보고 싶어 하고, 다시 돌려보내고 싶은데 괜찮겠니?”

어차피 마그마단은 박살 냈으니 물 타입 포켓몬의 활약은 끝이 났다. 엔트리를 다시 정규 멤버로 구성해야 할 때가 된 것 같았다. 제노가 답했다.

“네. 샤미드랑 교환할게요.”

“정말 고맙다!”

전화기 너머로도 환해진 오 박사의 기운이 느껴졌다. 제노의 포켓몬들 중 온순하고 사람을 좋아하는 편에 속하는 샤미드가 그렇게나 반가운 모양이었다.

오랜만에 함께하게 되었는데 다시 이별이구나. 제노가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샤미드는 다른 아이들에 비해 호전적이지 못한 데다 제노의 계획을 모르니, 애초에 이렇게 될 수순이긴 했다.

“그럼 곧장 센터로 갈게요.”

“괜찮겠니?”

“네. 바로 근처인 걸요.”

“그래. 그럼 부탁하마.”

자주 연락하고, 언제든 좋으니 시간 나면 관동으로 돌아오렴.

오 박사가 늘 하던 작별 인사를 입에 담았다. 제노가 단 한 번도 지키지 못한 문장이었다. 그렇게 할게요, 처음과같이 거짓을 입에 담은 그가 전화를 끊고 수도꼭지를 틀었다. 물줄기가 세차게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

“아,”

깜짝이야…. 제노가 뒷말을 꿀꺽 삼켰다. 세안을 마치고 나오자 실버가 화장실 문 앞에 서 있었다. 사용할 건가 싶어 자리를 비켜주자 그가 물었다.

“어디 가?”

“잠깐 포켓몬 센터에.”

“기다려. 금방 나올 테니까.”

반려 포켓몬에게 하듯 명령한 그가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탁, 문이 닫히고 뒤이어 물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뭐, 같이 나가자 이건가? 제노는 잠시 동안 정신을 못 차리고 문앞에 그렇게 서 있었다.

실버는 정말 포켓몬 센터까지 따라왔다. 샤미드를 보내고 대신 익숙한 몬스터볼 하나가 전송되어 왔다. 오래되어 색이 조금 바래고 곳곳에 흠집이 난 몬스터볼에 손을 뻗는 순간, 안에서 포켓몬이 제멋대로 튀어나왔다.

“님피아.”

높은 울음소리로 애교스럽게 답한 님피아가 곧장 제노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그것을 받아들자 양팔에서 그리워하던 무게가 느껴졌다.

“살이 조금 빠진 것 같은데?”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는 듯 님피아는 제노에게 몸을 비비는 것에 열중했다. 억지로 떨어져 마음고생이 심했을 녀석을 마구 쓰다듬었다. 사방팔방으로 하얀 털이 계절에 맞지 않는 첫눈처럼 폴폴 날리기 시작했다.

그 꼴을 보고 있던 실버의 표정이 썩어들어갔다. 극성맞은 모습을 보아하니 저쪽이 예전의 그 이브이군. 그때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님피아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

“….”

“님피아, 오랜만이지? 실버랑 인사해.”

그르르릉. 제노의 말과 달리 님피아에게선 위협적인 목 울림이 들려왔다. 네가 왜 여기 있냐는 눈빛이었다. 인사 한번 살벌하네, 실버가 맞받아치자 님피아의 얼굴이 더욱 사나워졌다.

잠깐 동안 이루어진 기싸움은 님피아가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돌림으로써 일단락되었다. 아예 실버를 비가시화할 셈인 듯, 더욱 깊게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제노는 습관적으로 그 동글동글한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당신이 자꾸 그렇게 오냐오냐해주니까 애가 그런 거 아냐.”

“….”

듣지 마, 님피아. 실버가 하는 맞는 말들은 무시했다.

포켓몬 센터에서 나오자 하늘이 막 밝아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다시 호텔로 돌아가려고 하던 그때, 그가 갑작스레 제안했다.

“당신, 몬스터볼 다 챙겨서 왔지?”

“응? 응.”

허리에 맨 벨트에 빼곡히 찬 몬스터볼 여섯 개를 실버에게 보여주었다. 그것을 확인한 실버가 센터의 뒤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온 김에 배틀 한판 어때?”

“너랑?”

“그럼 또 누가 있다는 거야.”

그의 투덜거림에 잠시 고민하던 제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진화하자마자 연구실에만 있었던 님피아의 몸을 풀어줄 필요가 있었다. 할 수 있겠어? 제노가 님피아를 내려다보며 속삭였다. 님피아가 당연하다는 듯 짧게 울며 제노의 입술에 제 머리를 갖다 댔다.

*

사용하는 포켓몬은 각자 세 마리. 교체는 자유, 한쪽의 포켓몬이 모두 전투 불능이 되면 끝.

간단하게 규칙을 합의하고 필드의 양 끝으로 향한다. 이른 아침,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이 조용한 배틀 필드에 새 포켓몬들이 우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경기의 시작을 알리듯 실버가 볼을 던졌다.

“가라!”

“부탁할게.”

제노의 부름에 님피아가 품에서 튀어 나가 땅에 네 발을 디뎠다. 실버의 볼에서 나온 것은 크로뱃. 페어리 타입에게 치명적인 독 타입 공격은 주의해야 할 터.

“맹독!”

곧바로 선공이 날아왔다. 님피아가 재빠르게 발을 놀리며 그것을 피했다. 그렇다면 우선…!

크로뱃의 공격이 잠시 멈춘 틈을 타 님피아가 높게 울었다. 님피아를 중심으로 달콤한 바람이 불어오고, 필드 전체가 따뜻한 기운에 휩싸였다.

“이건….”

“미스트필드야. 드래곤타입의 기술을 절반으로 만들고, 땅에 있는 포켓몬은 상태 이상에 걸리지 않지.”

굳이 기술을 사용해 필드를 바꾸는 귀찮은 짓을 선호하진 않았지만, 맹독과 같은 기술을 견제하기에는 좋았다. 제노의 설명에 실버가 작게 혀를 찼다.

“그렇다면 에어슬래시다!”

지시에 따라 크로뱃이 날개를 크게 휘둘렀다. 날카로운 바람이 칼날의 형태로 날아들었다. 필드를 넓게 사용하며 뛰어 도망친 님피아가 필드의 가장자리에까지 몰렸다. 충격에 의해 땅에서 먼지가 일고, 공격에 스친 님피아가 몸을 웅크렸다.

“괜찮아?”

제노의 목소리에 푸르르, 몸을 한번 털어낸 님피아가 금세 자세를 바로 하며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역시 진화하고 나니 맷집도 제법 붙은 모양이었다. 제노가 오른팔을 뻗었다.

“이번엔 우리 차례야!”

님피아의 입에서 보랏빛의 기이한 파동이 쏘아져 나갔다. 일직선으로 빠르게 쏘아지는 힘에 순간 크로뱃이 몸을 비틀어 종이 한 장 차이로 그것을 겨우 피한다. 어마어마한 위력, 맞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실버가 외쳤다.

“왜 단일 페어리 타입 포켓몬이 에스퍼 타입 기술을 배우고 있는 건데!”

“내 맘이지, 뭐!”

그리고 당연히 불리한 상성에 대한 대비책은 하나쯤 세우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니겠어?

제노가 그렇게 답하며 미소 지었다. 실버의 미간에 생겨난 골이 더욱 깊어졌다. 날 쓰러트리겠다고 했으면 이 정도 각오는 했어야지.

“이런 것도 할 수 있다고!”

다리에 힘을 준 님피아가 순간 크로뱃의 눈높이까지 뛰어올랐다. 님피아는 특수공격 특화 포켓몬, 설마 물리공격을 할 셈인가? 실버와 크로뱃이 당황한 사이 님피아가 앞발에 쥐고 있던 모래를 크로뱃의 얼굴에 흩뿌렸다.

이브이 시절부터 야무지게 사용하던 모래뿌리기였다. 크로뱃이 순간 눈을 질끈 감고 허공에서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당황하지 마! 일단 거리를 벌리는 거야!”

“놓치지 마.”

진짜 공격은 지금이었다. 크로뱃이 정신을 차리기 전, 뜨거운 불꽃이 쏟아졌다. 직격으로 맞은 크로뱃이 고통에 지면에 닿을 듯이 내려왔다가, 금세 회전으로 몸에 남은 잔불을 털어내며 다시 위로 솟구쳤다.

효과는… 그렇게까지 강하지 않군. 기술의 완성도를 확인하던 제노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강철 타입을 견제한 불꽃 타입 기술까지 가르치는 건 역시 욕심이었나. 차라리 에스퍼 타입이나 페어리 타입 기술에 집중하는 게….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님피아가 뒤를 돌아보며 작게 울었다. 나 잘했어? 칭찬을 기대하는 눈빛에 제노가 살며시 미소 지으며 말했다. 잘했어, 잘했어, 네가 최고야.

아무튼, 데미지는 크지 않았지만 중요한 건 기술의 효과였다. 매지컬플레임은 100% 확률로 상대의 특수공격을 떨어트리는 기술. 안 그래도 특수방어력이 높은 님피아이기에, 이제 특수공격을 계속하는 건 살살 긁어주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렇다면-

“크로뱃, 가까이 붙어!”

빠르다! 크로뱃이 빠른 속도로 하강하며 님피아에게 달려들었다. 피할 새도 없이 다가온 크로뱃이 님피아를 물어뜯었다. 그대로 위를 향해 날아간다.

고통에 찬 신음을 흘리던 님피아가 기운을 모았다. 님피아의 위에서 빛난 달빛이 근거리에서 크로뱃에게 쏟아졌다.

콰앙- 충격으로 인해 크로뱃이 님피아를 놓치면서 두 포켓몬이 지면으로 떨어졌다. 서로에게 반감이 되는 공격이라지만, 제법 가까운 거리였으니 충격이 꽤 컸을 것이다.

“수고했어, 돌아와.”

님피아의 상태를 살핀 제노가 교체를 택했다. 크게 다친 건 아니었지만 앞으로의 일을 생각해 부담이 되지 않는 선에서 끝내고 싶었다. 그렇다고 해도-

“배틀에서 내 포켓몬을 교체시킨 건 처음 아냐?”

“….”

비틀비틀, 다시 날갯짓을 시작한 크로뱃을 보며 말했다. 실버가 그다지 여유롭진 못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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