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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화

샛길 하나

“저 줄기가 문제란 말이지. 그렇다면 한카리아스, 줄기를 끊어버려!”

발톱에 기운을 모은 한카리아스가 호수를 향해 달려들었다. 날카로운 발톱이 줄기들을 하나둘 끊기 시작하자, 제노가 팔을 뻗으며 외쳤다.

“지금이야!”

그때 호수의 물이 출렁이더니, 순식간에 솟아올랐다. 파도타기에 맞은 한카리아스의 몸이 위로 밀려났다.

“내리꽂아!”

피카츄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단단한 꼬리로 한카리아스를 때렸다. 첨벙- 빠른 속도로 떨어진 한카리아스의 몸이 수면에 부딪히며 큰 소리가 났다.

피카츄는 여전히 높게 솟은 식물의 줄기 위에서 건재한 상태. 한카리아스가 수면 위로 올라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난천이 외쳤다.

“한카리아스, 용의파동!”

“다시 파도타기!”

용의파동이 줄기를 끊어내며 쏘아졌다. 뛰어서 그것을 피한 피카츄가 다시 한번 파도를 일으켰다. 높게 솟아오른 거센 물살이 출렁이며 발목까지 튀었다. 그로 인해 한카리아스의 공격이 마구잡이로 발사되며 그 궤적을 따라 줄기들이 우지끈,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줄기에서 내려와 얼음 위에 착지한 피카츄가 발가락에 바짝 힘을 주고 제자리에 섰다.

“달려들어서 깨트리다!”

“피카츄, 아이언테일이야!”

난천의 외침에 응하듯 물속에서 빠져나온 한카리아스가 곧장 피카츄에게로 달려들었다. 피카츄가 제노의 지시에 따라 꼬리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한카리아스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한카리아스의 깨트리다를 피한 피카츄가 부드럽게 얼음 위에서 움직였다. 허나 이상해꽃처럼 마구잡이로 미끄러지는 것이 아닌, 스스로 방향과 속도를 조종하고 있는 모습.

그렇구나, 마치 스케이트를 타는 사람처럼 꼬리로 방향을 바꾸고 있는 거야. 그 방법을 깨달은 난천이 미소 지었다. 제노는 언제나 배틀에서 생각지도 못한 전략을 보여주어서, 그와 싸우는 것은 처음 트레이너가 되었을 때처럼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나도 질 수야 없지! 오른팔을 뻗은 난천이 큰 소리로 외쳤다.

“한카리아스, 날아서 드래곤- 츄!”

그리고 한카리아스가 난천을 돌아보았다. 드래곤- 츄는 대체 무슨 기술이지. 피카츄도 같은 생각을 한 것인지 한카리아스의 공격을 대비하던 자세 그대로 고개를 기울였다.

파도타기의 영향으로 물에 젖은 난천이 얼어붙은 몸으로 덜덜 떨고 있었다. 킁, 그가 손을 뻗은 채로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찬가지로 바짓자락이 얼기 시작한 제노가 말했다.

“… 여기까지 할까요?”

“아직 승부가 나, 나지 않았어!”

“그냥 제가 진 걸로 해요.”

“그런 건 싫어!”

“그럼 무승부?”

… 좋아! 잠시 고민하던 난천이 그렇게 답하며 뻗은 팔을 몸쪽으로 모았다. 더 이상 견디기 힘든 모양이었다. 극적으로 합의를 본 두 사람이 서둘러 자리를 옮겼다.

*

타닥, 타닥. 모닥불 타는 소리가 들려왔다. 먼저 포켓몬들을 회복시키고 호숫물에 젖은 옷을 불가에 널어놓은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몸을 녹이고 있었다.

돌아가서 앓는 거 아냐? 그렇게 생각하던 제노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입을 열었다.

“저기, 그래서 시합이 끝나면 준다던 보상은 뭔가요?”

난천이 그 말만을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따라와 보면 알아. 그렇게 말하며 서둘러 외투를 입은 그가 제노에게도 나갈 준비를 하라고 종용했다. 오늘은 더 이상 움직이고 싶지 않았던 제노가 미적미적 두꺼운 패딩에 팔을 끼우고 난천을 따라나섰다.

그리고 도착한 곳은 근처에 있는 또 다른 동굴이었다. 머무는 장소를 옮기자는 걸까? 의문을 가지며 난천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자 그가 왜 이곳으로 데려왔는지 알 수 있었다.

동굴의 안쪽에 천연 온천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래, 모락모락 김이 솟아오르는 그것은 아마도 온천이 맞을 터였다. 제노가 눈만 끔뻑이고 있자, 난천이 그를 물가로 이끌었다.

“어제 네가 자리를 비운 사이 한카리아스가 찾은 거야.”

그렇게 말하는 난천은 제법 들떠 보였다. 하긴, 제노 또한 여기서 머무는 동안 씻지도 않은 상태로 난천과 함께 지낸다는 것이 꽤 신경이 쓰이던 중이었다. 24시간 우아한 난천의 곁에 꼬질꼬질한 상태로 있는 자신의 모습은 자각하는 것만으로도 괴로운 일이었다. 더군다나 배틀로 열기가 오른 지금 더욱 필요한 것이 바로 목욕.

“이런 걸 노천온천이라고 하나요?”

“글쎄. 확실한 건 유황천은 아니란 거지.”

난천의 말대로 조금 뿌연 물에서는 유황 특유의 악취가 나지 않았다. 온천으로 다가간 제노가 물에 손끝을 조금 담가본다. 뜨끈한 온기가 곧장 피부에서 느껴졌다. 이거, 들어가도 되는 거죠?

“저기 난천 씨- 으아아아!!”

그렇게 물어보기 위해 난천을 돌아본 제노가 곧장 소리를 지르며 양손으로 제 눈을 가렸다. 난천이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제노에겐 보이지 않았다. 벌게진 얼굴을 옆으로 획 돌린 제노가 난천에게 말했다.

“왜, 왜왜, 옷을 벗으신 거예요…?”

“응? 그야 옷을 입은 채로 씻을 순 없으니까…?”

*

풍덩. 다행히도 난천이 가져온 수건으로 몸을 가린 제노가 조심스레 온천 안으로 들어갔다. 발끝에서부터 올라온 열기가 온몸에 퍼지며 근육의 피로가 녹아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반사적으로 한숨을 내쉰 제노가 난천을 바라보았다.

난천 또한 긴 머리를 위로 올려묶고 온천에 몸을 담근 상태였다. 누군가와 함께 탕에 들어간 건 어린 시절 남나리가 목욕을 도와줬을 때 이후로 처음인지라 조금 부끄러워졌다.

하지만 그 긴장된 마음은 곧 온천의 따끈함에 녹아내렸다. 흐어, 좋다. 동네 목욕탕에 한 명씩 있는 아저씨처럼 벽에 완전히 몸을 기댄 제노가 목을 꺾고 위쪽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곁으로 난천이 다가왔다.

“밤하늘이 보였다면 더 좋았을지도 모르겠네.”

“그렇네요. … 그런데 왜 점점 다가오시는 거죠?”

“후후, 좋지 않아? 둘이서 같이 목욕한다는 거.”

제노가 느긋하게 온천을 즐기는 이브이를 바라보았다. 포켓몬들도 있는데 단 둘은 아니지 않나? 그가 애매하게 답했다.

“글쎄요….”

“어릴 적엔 여동생하고 자주 이렇게 있었는데 말이야.”

웃으며 그렇게 말하는 난천에 제노는 자연스레 관동에 남아있을 사람들을 떠올렸다.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는 그 눈에 잠시 침묵했던 난천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너는 한 번도 가족에 대해 말한 적이 없네.”

“네?”

제노의 되물음에 난천이 그의 옆에 자리 잡으며 벽에 등을 기댔다. 마찬가지로 동굴의 천장을 올려다보던 난천이 말했다.

“나, 모험을 시작하고 챔피언이 된 이후로 가족들과는 떨어져서 살고 있어. 할머니와 여동생은 고향인 봉신마을에서 지내고 있지.”

“….”

“너는 어때? 관동에 두고 온 가족들이 그립거나 하진 않니?”

“….”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를 바라보던 난천이 살포시 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제노는 이상한 부분에서 은근히 고집이 세서, 피하고 싶은 주제에 있어선 절대 입을 열지 않았다.

내가 아직 그 정도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란 걸까. 대답을 듣길 포기하고 수면에서 발장구를 친다. 그런 난천의 옆얼굴을 바라보던 제노가 입을 열었다.

“… 당연히 보고 싶죠.”

그 목소리에 놀라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낼뻔한 것을 난천이 겨우 참아냈다. 그가 놀란 표정을 갈무리하고 제노를 흘긋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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