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CP

어느 수류(殊類)의 일주일

다른 우리가 같이 흘러간다면

BGM / 수류의 록(水流のロック)-cover by DAZBEE(원곡: 닛쇼쿠 나츠코)

월요일. 모란은 일어나자마자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애써 넘기고 나니 어쩐지 목구멍이 쓴 느낌이었다.

정말 별거 없어 보이는 무난한 일주일의 시작이었지만 모란에게는 요즈음이 특별했다. 활자와 그림만 가득했던 스마트로토무 너머에서 이제는 여러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목소리는 때로 다정하고, 제멋대로에, 낯설지만 정감 가고, 격양되어 있거나 올곧다. 아직은 이런 생활이 익숙하지 않지만 나쁘지도 않았다. 내심 이런 하루하루가 계속되었으면 좋겠다고 바라고 있는지도 몰랐다. 방은 여전히 자신과 이브이들 외의 무엇으로도 채워져 있지 않았지만 전과 같은 공허함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진 보스! 일어났어?

새 노래를 작곡했다고. 들어봐!

아침 일찍부터 피나에게서 문자가 와 있었다. 그가 항상 기상시간보다 일찍 문자를 보내는 탓에 모란은 항상 몇 시간 지나서야 답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 각자가 활동하는 시간은 조금씩 어긋나 있지만 누구도 빠르고 늦음에 신경쓰지 않았다. 모란은 그런 분위기가 내심 고마웠다. 생활 패턴이 가장 어긋나 있는 건 누가 봐도 자신이었지만, 그럼에도 아무도 일정한 박자에 맞추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아서.

모란은 메시지와 함께 보낸 파일을 열어보았다. 자주 듣지 않았던 형태의 언어들이 귓가에서 제각기의 일정한 흐름을 가지고 맴돌았다. 모란은 음악에 대해 잘 알지는 못했지만 얼핏 듣기엔 귀를 째는 멜로디가 자신의 마음을 꼬매주고 있는 느낌이 들어 저도 모르게 얼굴이 환하졌다. 피나의 노래는 항상 그런 느낌이었다. 곡에서 누군가를 위한 마음을 전방위로 외치는 노래. 멀리서 들어도 누굴 향하고 있는지 단번에 알 수 있는 노래. 그렇기에 낯선데도 이렇게까지나 가까이 와닿을 수 있는 거겠지.

노래 들어봤어. 잘 만들었던데?

스피커에서 나오는 것도 직접 듣고 싶다. ...나중에.

아직은 말하는 건 물론이고 타자를 치는 것조차 어색했지만 피나는 자신의 엇나감도 느림도 빠름도 잘 엮어서 하나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이라고 모란은 확신했다. 아직 잘 알지도 못하는데 이렇게나 편안함을 주다니. 모란은 그의 음악을 쓴물이 배어나올 때까지 몇 번이고 곱씹었다. 다음에는 또 어떤 곡을 들려줄까. 아니, 곡이 아니라 목소리라도 좋았다. 당장 눈앞에 있지는 않더라도 눈을 감고 그의 노래와 목소리를 떠올리면 부유하는 마음이 목적지마저 잃어버릴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모란은 침대에 걸터앉아 피나의 박자대로 발끝으로 몇 번 바닥을 두드렸다. 나쁘지 않은 월요일이었다.


화요일. 모란은 일어나자마자 세수하고 거울을 봤다. 애써 웃고 나니 어쩐지 눈가가 시큰한 느낌이었다.

평소보다 주변이 추운 것 같아 모란은 침대에 웅크리고 앉아 이불을 온몸에 돌돌 말았다. 스마트로토무와 컴퓨터, 그리고 브이브이들만 있으면 다른 건 필요 없다고 얼마 전까지 생각했지만, 지금은 왜인지 방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야만 마음이 편안해졌다. 뭐하고 있냐고 연락이라도 해볼까? 생각한 순간 스마트로토무가 울렸다. 멜로코였다.

"요. 좋은 아침. 아니 점심인가? 아무튼, 지금 뭐해?"

"나? 그냥 침대에서 이불 두르고 앉아 있어."

티가 날까 애써 덤덤하게 대답했지만 모란은 사뭇 놀랐다. 같은 시간에 나랑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그걸 생각으로만 끝내지 않고 바로 전화를 걸어주다니. 이렇게 자신을 궁금해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실로 오랜만이라 모란은 얼떨떨하면서도 지금이 싫지 않았다. 문자든 전화든 멜로코의 말투는 언제나 거칠었지만 말 사이사이로 걱정하는 마음이 배어난다는 걸 모란은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머뭇거리지 않고 언제나 먼저 나서서 행동할 수 있는 거겠지. 모란은 그의 그런 면이 내심 부럽다고 생각하다가도 고개를 저어 잡념을 떨쳐내곤 했다. 다른 우리가 모였기에 이렇게나 조화로울 수 있는 거야. 그것만큼은 변하지 않는 하나의 확실한 사실이었다.

"카르본들을 키우고 있어. 사진 보여줘?"

"아, 응."

말을 한참 동안 하지 않다가 하루에도 몇 번이고 내뱉으려니 어색하고 자꾸 꼬여 모란은 아직 뭐라 긴 대답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도 다음엔 더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겠지. 앞으로를 약속할 친구들이 있다는 건 다행이었다. 경쾌한 알림음과 함께 사진이 왔다. 카르본 바로 옆에 멜로코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누가 찍었는지 모르지만 꽤 현장감 있는 사진에 모란은 자연스레 미소지었다. 잘 하고 있구나. 내가 없는데도. 멜로코는 항상 그에게 믿음과 안정감을 주었다. 타오르는 불꽃 자체는 뜨겁지만 주변에 있으면 따뜻한 것처럼, 멜로코는 넘치는 열의와 추진력으로 주변을 따스히 데워주는 사람이었다.

"고마워, 번거로울 수도 있는데 자주 연락해줘서."

"고맙긴, 당연하잖아? 친구가 신경쓰이는 건. 그런 말은 됐어, 끊는다."

친구라는 말에 모란의 가슴이 철렁했다. 마음이 내려앉는 철렁함이 아닌 신나는 놀이기구를 탈 때의 즐거운 하강이었다. 친구. 정말 보편적이고 익숙한 단어인데도 이렇게나 낯설고 쑥쓰러워지기까지 하는 건 왜일까. 모란은 끊긴 전화를 한참 바라보았다.

모란은 자리에서 일어나 멜로코의 말로 한층 따뜻해진 방을 잠시 서성였다. 나쁘지 않은 화요일이었다.


수요일. 모란은 일어나자마자 왜인지 모를 눈물이 났다. 애써 닦고 나니 어쩐지 코끝이 매운 느낌이었다.

일어나니 별 이유 없이 축 처지는 기분이 모란은 별로였지만 애써 침대 밖으로 나왔다. 모란에게는 중요한 약속이 있었다. 누군가랑 뭔가 같이 하기로 정한 건 오랜만이라 모란은 들뜬 티를 숨길 수 없었다. 밥은 이거면 충분하겠지. 모란은 택배 박스에서 컵라면이랑 과자를 꺼내고 냉장고를 열어 콜라를 챙겼다. 밥과 간식을 아무렇게나 놓다가 무언가를 잊어버렸다는 생각에 그는 급히 휴대폰을 꺼내 추명에게 문자를 보냈다.

나 방금 일어났어. 곧 컴퓨터 켤게.

답장 대신 알겠다는 이모티콘이 왔다. 무슨 캐릭터인지는 잘 몰랐지만 아마 그가 요즘 빠져있는 애니메이션 중 하나이리라 모란은 확신했다. 모란도 답장 대신 이모티콘을 보냈다. 휴대폰 안에서 이브이들이 둥글게 모여 O.K라는 글자를 만들고 있었다. 모란은 컴퓨터를 켜 추명이 보내준 링크를 타고 사이트에 접속했다. 네모난 화면 안에 개굴닌자가 비장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모란은 얼마 전 추명으로부터 갑작스러운 연락을 받았다. 통화는 조금 길었지만 결국 새로 나온 웹 애니메이션을 같이 보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이후 공식 사이트에 전 회차가 무료로 공개되어 있어 시청에 부담이 없다는 말을 시작으로 왜 이걸 진 보스도 봐야 하는지에 대한 기나긴 설명이 이어졌다. 같이 본다고 해봤자 비슷한 시간에 영상을 각자의 컴퓨터에서 재생하는 것뿐이었지만 그는 꽤나 진심인 듯했다.

나야 좋지. 기대된다. 라는 자신의 답에 그가 뭐라 답했는지 모란은 기억하지 못했지만 굉장히 들뜬 목소리가 스마트로토무 너머로 들려왔다는 것만은 확실하게 기억했다. 너도 이런 게 오랜만이려나? 그동안 이런 말을 쉽게 꺼내지 못했을까? 모란은 문득 궁금해졌지만 굳이 캐내어 묻진 않았다. 이미 깊게 꽃힌 수리검을 굳이 다시 빼내어 던지는 짓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모란은 과자를 품에 끌어안고 의자의 등받이를 뒤로 뺀 채 가만히 감상을 시작했다. 개굴닌자가 재빠르게 움직이며 물수리검으로 철조망을 끊고 그 위를 뛰어넘었다. 안에 갇혀있던 개구마르들은 자신들을 구해준 그에게 감사하며 환호했다. 몰입하며 보던 모란은 1화가 끝나고 정지된 화면을 바라보았다.

'추명은 이런 걸 좋아하는구나.'

그가 닌자를 동경한다는 건 모란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이 멋지다고 생각하는지는 몰랐다. 그러나 이제는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나랑 좋아하는 대상은 다르대도 결과적으로 우린 누구보다 동류인 거야.

모란은 2화를 틀다 애니를 보며 의상을 스케치했다는 추명의 문자를 받았다. 나쁘지 않은 수요일이었다.


목요일. 모란은 일어나자마자 라면에 물을 부어먹었다. 애써 삼키고 나니 어쩐지 입안이 짠 느낌이었다.

그냥 편한 생활을 위해 하던 식사에서 언젠가부터 맛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습관처럼 과자 부스러기를 집어먹고 냉장고에는 콜라가 가득했지만 딱히 맛있어서 먹는 건 아니었다. 익숙해서.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맛으로 무언가를 먹는다는 건 그에게는 꽤나 오래된 일이었다. 그랬던 자신이 새삼 라면이 짜다고 생각하다니. 모란은 잔잔하지만 커다란 변화가 놀라웠으나 동요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앞으로도 쭉 이대로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모란은 얼마 전 오르티가에게 부탁을 했다. 그와의 통화에서 그가 스타모빌을 만들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 완성 전이라도 좋으니 사진을 한 장 찍어달라는 사소하지만 흔치 않은 부탁이었다. 바깥의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해하는 건 확실히 답지 않은 행동이었지만, 스타단의 일이었다. 부담되는 말일까 싶었으나 오르티가는 흔쾌히 수락했다. 난 그렇게 한가한 사람은 아니지만, 진 보스의 부탁이니 생각 정도는 해볼게! 그의 통명스러웠던 말투가 생각나 모란은 웃음이 나왔다.

아직은 모두와 어색했지만, 다른 보스들에 비해 모란은 오르티가와 연락을 자주 하는 편은 아니었다. 둘 중 별 일이 없을 때도 먼저 연락을 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다. 본인이 나서서 무언갈 하는 타입은 아니구나. 짧은 시간이었지만 모란은 그를 파악할 수 있었다. 철없고 세상 물정 모르는 아직 아이같은 사람. 누군가는 그를 그렇게 이야기했다. 모란은 그 말이 틀리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나쁘지도 않았다. 자신만의 고집이 있기에 해낼 수 있는 일도 분명 있을 테니까.

때마침 오르티가로부터 문자가 왔다. 진 보스! 부탁했던 거. 내가 굳이 바쁜 시간 써가면서 직접 찍었다고. 누가 봐도 자신이 이만큼이나 움직였으니 고마워하라는 말이었다. 모란은 그가 보낸 파일을 열어보았다. 사진을 부탁했으나 도착한 건 영상이었다. 카메라가 이제야 겨우 자동차라고 말할 수 있을 듯한 형상의 무언가를 전방위로 담아내고 있었다.

모란은 잠시 가만히 앉아 영상을 몇 번이고 감상했다. 화면은 고요했지만 생동감 넘쳤다. 그가 실제로 보고 있는 풍경을 모란도 옆에 서서 같이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귀찮은 척했지만 방안에만 있는 내게 이만큼이나 네가 만들고 있는 걸 보여주고 싶었구나. 모란은 화면을 바라보았다. 유독 일어나기 힘들다 싶을 때 영상을 틀면 될 것 같았다. 고마워. 티가. 두고두고 볼게. 그는 답장을 남기고 영상을 저장했다.

모란은 다시 침대에 누워 오르티가가 그린 모빌에 자신의 상상을 덧대었다. 나쁘지 않은 목요일이었다.


금요일. 모란은 일어나자마자 어제의 꿈에 휩쓸렸다. 애써 곱씹고 나니 어쩐지 혓바닥이 단 느낌이었다.

그에게는 악몽은커녕 꿈조차 꾸지 않는 날들이 훨씬 많았다. 꿈조차 꾸지 않는 잠은 깊게 자는 잠이라고 했다. 그가 꿈을 꾸지 않았던 건 깊이 잠들어야만 기나긴 밤을 버텨낼 수 있기에 그랬는지도 몰랐다. 반대로 꿈을 꾸기 시작했다는 건 현실을 잊을 정도로 푹 잠을 자지 않아도 피곤하지 않다는 뜻이리라. 모란은 기지개를 켜지 않아도 몸이 뻐근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스마트로토무를 보니 문자가 와 있었다. 비파였다. 별일 없다지만 며칠 연락이 없으니 역시 안 되겠네! 밥은 잘 먹고 있어? 잠은 잘 자고 있고? 귀찮다고 또 아무때나 자고 일어나서 아무거나 먹는 건 아니지? 쏟아지는 질문들에 모란은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차분하게 답을 보내기 시작했다. 

나름대로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고 있어. 다음 건... 노코멘트할게. 모란은 스마트로토무를 끄고 한숨을 쉬었다. 걱정이나 피곤함이 아닌 역시 언니는 어쩔 수 없네, 싶은 안도의 한숨이었다. 일어나기 귀찮아 다시 돌아누우려는데 스마트로토무가 울렸다. 비파였다. 모란은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정자세로 침대에 걸터앉아 전화를 받았다.

"여, 여보세요?"

"진 보스! 잘 있는 거 맞지?"

"응... 진짜 별일 없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

"꼭 무슨 일이 있을 것 같을 때만 걱정해야 해? 친구 사이에 그건 아니지!"

아. 그렇네. 모란은 친구 사이라는 단어에 정신이 돌아왔다. 마주보고 함께해 온 것도 아니면서 걱정하지 말라는 건 좀 아니었나. 모란은 주춤했지만 미안하다고 하면 비파가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더 화낼 거 같아 그냥 넘어갔다. 비파도 웃을 뿐 뭐라 더 말하지 않았다. 아닐 땐 아니라 말하지만 지나치게 타인을 파고들지 않는 사람. 모란은 그런 비파에게 항상 감사했다.

"이따 괜찮으면 다같이 보지 않을래? 트레이닝하려고 전부 모였는데 모인 김에 어떻게 되어가는지 겸사겸사 이야기도 할까 해서."

"응. 그러자. 비파 언니는 항상 열심이네... 무리하지 마."

"그럴게. 걱정해줘서 고마워. 진 보스."

이따 봐! 라는 말과 함께 비파는 스마트로토무 너머로 사라졌다. 모란은 그와의 통화에서 그가 가진 책임감을 느꼈다. 혼자서 하기도 힘든 게 트레이닝인데 하물며 여럿이 같이라니, 모란은 그의 능력에 감탄하면서도 그 혼자서 너무 무거운 짐을 지지 않게 자신도 할 수 있는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모란은 침대에 돌아누운 채 비파의 다정했던 목소리를 몇 번이고 떠올렸다. 나쁘지 않은 금요일이었다.


토요일. 모란은 일어나자마자 빗소리를 들었다. 애써 차단하고 나니 어쩐지 아무 느낌도 들지 않았다.

비가 오는 날이든 아니든 항상 비슷한 기분이었지만 요즈음 그는 비가 오면 걱정이 됐다. 비가 오는데 친구들은 괜찮을까. 각자 할 일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을까. 비가 온다고 막히지는 않을까... 비를 제대로 피하고는 있을까? 자신 아닌 누군가의 일을 걱정하는 것도 실로 오랜만이었다. 자신에게만 쏟던 에너지를 남에게도 쏟으니 전보다 피곤하다는 느낌이 가끔 들었지만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모란은 컴퓨터를 켰다. 딱히 무언갈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도. 그가 가진 습관들 중 하나였다. 그는 아무 이유 없이 학생들의 sns를 뒤져보거나 여러 사이트를 찾아보곤 했다. 화면이 주는 무수한 정보값에 생각 없이 빠져드는 건 현실의 괴로운 일을 잊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었다. 웹 서핑이 질리면 게임을 하고, 게임이 질리면 별 의미 없이 사이트의 코드도 뜯어보고, 그조차 질리면 컴퓨터로 또 다른 일을 하면 되었다. 굳이 방바닥에 발을 딛지 않아도 할 일은 차고 넘쳐났다.

언젠가부터 그는 아무 일 없이 보내는 시간이 무료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스트레스와 트라우마의 소용돌이 속으로 제발로 걸어들어가기보다 온라인의 파도 속으로 빨려들어가길 택했다. 방 밖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방 안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시대였다. 그에게 세계는 자신의 방 안, 모니터 속이면 충분했다. 그렇게 일어나고 다시 잠드는 시간들이 쌓여갔다. 어느새 그는 눈을 뜨자마자 어딘가에 가도 되지 않는다는 생각에 안도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그런 생활이 행복하지 않다고 말하겠지만 그는 이것이 그가 지금 누릴 수 있는 최선의 행복이라고 생각했다. 어렵게 행복해지는 길로 가느니 차라리 등을 돌리고 어둠 속으로 돌아가길 택했다.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생각할 게 없었다. 신경쓸 것도 없었다. 신경쓸 것이 없으니 편안했다. 편안하다... 그렇게 생각하며 모란은 눈을 감았다 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스타단의 로고가 그려진 파일이 눈앞에 열려있었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았지만 다른 보스들 중 하나가 쓰고 싶은 곳에 쓰라고 보내준 파일이었다.

'그래. 역시 이 생활은... 난... 불편하더라도 신경쓰고 싶은 게 있어. 생각하고, 마주보고 싶은 게 있어.'

모란은 다시금 정신을 차리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는 포트에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그래. 일단은 밥부터 먹어야지.

모란은 부엌에 바로 서서 냉장고를 열고 전자레인지에 데울 음식을 꺼냈다. 나쁘지 않은 토요일이었다.


일요일. 모란은 일어나자마자 따뜻한 물로 몸을 싹 씻었다. 애써 말리고 나니 여러 가지 느낌이 들었다.

모란은 스마트로토무를 열어보았다. 피나가 보내준 곡이 최신 재생목록에 들어가있었다. 모란은 그 곡을 방 안에 희미하게 울려퍼지도록 틀어놓았다. 뒤이어 그는 컴퓨터로 멜로코가 보낸 카르본들의 사진 파일을 열었다. 추명과 애니메이션을 감상하며 그가 스케치했다는 옷의 사진도 같이 화면에 띄워놓았다. 오르티가가 찍어준 미완성된 스타모빌의 사진도 그 아래에 띄워놓았다. 그러고선 다시 스마트로토무를 열어 비파가 보내준 메시지를 쭉 다시 읽었다.

친구들과 함께 있지 않는데도 어쩐지 마음이 풍족해졌다. 그의 방안에 지금 흘러가고 있는 것들은 평소 그의 방이라면 없었을 낯선 것들 투성이었지만 모란은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곧 이런 풍경이 더 익숙해지겠지. 그런 날이 하루라도 더 빨리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모란은 미소지었다. 음악을 들으며 사진들과 문자를 쭉 보고 있자니 뭐라도 하고 싶어졌다. 지금, 친구들을 위해.

눈이 따가워 눈물이 한 방울 나오는 걸 바로 닦았다. 빗소리가 들려 화장실로 가니 세면대와 샤워기에서 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는 그걸 틀어잠그고 안 좋은 기억에 휩쓸리려는 것도 함께 틀어잠갔다. 그는 화장실에서 나와 포트에 물을 끓였다. 미지근해진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막혀있던 무언가도 자연스레 뚫려있었다.

'나 혼자라면 불가능했을 거야. 이건 전부 너희가 함께했기에 가능했던 일이야.'

그는 더 이상 도피하기 위해 무언가를 하지 않았다. 앞으로를 위한 하루하루를 더욱 즐겁게 보내기 위해서 살았다. 친구들이 있어 그의 삶에는 한층 더 생기가 돌았다. 흘러가는 대로 살다 보면 어디로든 도달해 있을 거라 생각했던 예전과 달리, 지금의 그에게는 목표가 있었다. 하고자 하는, 해내야만 하는 일이.

그의 바람은 언젠가 어디에든 닿을 것이다. 그에게는 이젠 그가 도달하고자 하는 목적지만큼 중요한 것이 생겼다. 자신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마시지 않으면 살 수 없는 물과 같은 존재가. 그는 그 흐름의 끝이 추락이든 하늘 끝이든, 폭포가 되든 급류가 되든, 강으로 흘러가든 계곡으로 흘러가든 절대 이곳에서 빠져나가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몸을 맡기고 함께 흘러갈 것이다. 그는 스마트로토무를 들고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번호를 눌렀다.

"...나야. 카시오페아. 잘 지내고 있어? 그냥."

보고 싶어서. 자연스레 나온 말에도 그는 이제 놀라지 않았다.

모란은 방 한가운데에 가만히 서서 친구들의 대답을 기다렸다. 누가 뭐라 해도, 정말 좋은 일요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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