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의 여왕
포켓몬스터 스페셜 / 랙츠×화이츠 / 2017년 6월 28일에 올렸던 글→비문 수정 및 정발판 이름으로 수정
코드네임 핸섬은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되물었다. 눈앞의 소년은 핸섬의 상관으로, 국제 경찰에 소속되어 현재 비밀리에 임무를 수행 중이었다. 그런 그의 입에서 임무 실패의 가능성이 언급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경정”―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까지 오른 이 소년이 얼마나 많은 임무를 맡고 성공으로 이끌었을 지가 감히 상상이나 되겠는가. 국제 경찰에 오래 소속되어있지만 서로의 정체마저도 비밀로 하고 코드네임으로 부르고 있어 서로의 업적 따위는 누구에게도 전해지지 않고 있다. 하나 핸섬이 상관에게 들은바 코드네임 ‘블랙2호’ 경정는 엘리트라고 했다.
“……알고 있다. 답지않은 소리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핸섬 군.”
부정하지 않는 목소리에 핸섬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내려다 이내 삼켰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설마,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한 가지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타겟일 뿐인 저 소녀에게 마음이 생겼다는 것. 잠입수사관에게 가장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녀는 플라스마 단의 일원이었다.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 하지만 그녀가 포켓몬을 아끼는 마음 또한 거짓이 아니야.”
‘블랙2호’, 지금은 ‘랙츠’라고 불리는 이 소년은 진실을 보았다. 과거 플라스마 단에 속해 이상을 바라봤던 소녀의 진실은 마치 그녀처럼 투명했다.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순수한 그녀의 모습을 보고 랙츠가 깨달은 것은 국제 경찰이 악이라고 규정한 조직의 선과 악이었다. 과거에 플라스마단의 포켓몬을 인간에게 해방한다는 신념을 따른 것은 다른 사람들과 다름없는 평범하고 순수한 사람들이었다는 것, 악은 그들을 교화시켜 이용했던 게치스와 간부들이다.
“경정 나리… 당신은…….”
“걱정 말도록 하게, 핸섬 군. 그들의 이상에 감화된 것은 결코 아니니.”
걱정할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을 했지만 랙츠의 표정은 쓸쓸한 표정이었다. 본래 나이의 어린아이들처럼 살아오지 않았을 그의 표정에서 언제나 빈틈을 찾아보기 어려웠건만 그녀 ‘화이츠’의 이야기만 나오면 마치 댐에 금이 간 듯 이내 무너져버린다. 범람해버린다. 그동안 랙츠가 필사적으로 숨기려고 했던 감정이 말이다.
“핸섬, 부탁이 있네.”
“마, 말씀하시죠. 경정 나리.”
“……그녀를 지켜줬으면 좋겠어.”
―만약 내게 무슨 일이 있다면 그녀를 위험에서 구해줄 사람은 자네밖에 없어. 떠오른 상관의 목소리에 핸섬은 눈을 질끈 감았다. 국제 경찰이 악의 조직의 일원이었던 자를 돕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감시대상인 만큼 그녀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서는 안 되었다. 변장하고 나오긴 했지만, 만약 국제 경찰본부에 있는 상관들의 귀에 이 일이 들어가기라고 하는 날에는 책임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하나 핸섬은 랙츠의 명령 아닌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처음으로 본 상관의 감정을 배반할 수 없기에 국제 경찰이라는 신분을 잊고 뛰쳐나왔다.
“괜찮은가, 소녀……!”
가까이서 본 그녀의 얼굴은 파랗게 질려 이빨을 딱딱 부딪치고 있었다. 감각이 사라져가는 발은 한 걸음조차도 내딛기 어려웠을 터, 항상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설산을 두꺼운 옷 몇 겹만 입고 거의 맨몸으로 올랐으니 몸이 얼어붙어 죽는다고 해도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넘어지는 일이 수십, 수백 번. 쉽게 넘어짐에도 다시 일어나는 것은 너무나도 힘들었을 것이다. 순간순간이 고난이었을 게 분명했다. 핸섬은 얼른 담요를 꺼내 화이츠의 몸을 따뜻하게 감싸 녹이고 인근에 있는 동굴로 그녀를 옮기기 위해 두 팔로 안아 올렸다.
화이츠는 악몽을 꾸고 있었다. 단지 꿈이기를 바라지만 이것은 과거의 기억이다. 몇 시간 전, 설산에 산다는 ‘눈여아’가 그녀가 사는 마을인 부채시티에 내려왔다. 사람이 사는 곳에 잘 내려오지 않는 포켓몬이 어째서 이곳까지 내려온 것인지 의문이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아무 일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까닭은 평화로운 일상에 취해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화이츠 양! 오면 안 돼!!”
평소와 다른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주저앉아버렸다. 그리고 눈동자에 비치는 장면이란 언젠가 동화에서 봤던 무서운 이야기……. 남성의 혼을 빨아들여 설산으로 데려간다는 무서운 포켓몬의 동화의 현실. 화이츠는 소년의 이름을 소리쳐 불렀다.
“랙츠!”
“화이츠!”
허나 몸은 잘 움직이지 않았다. 유키메노코가 내뿜는 냉기는 모든 것을 얼려버린다. 소년을 구하려 움직이려는 소녀의 발도, 소년을 향해 뻗는 손도 얼려버렸다. 눈물이 맺혔지만 차가운 기운에 금세 얼음방울이 되어 떨어졌다. 떨어졌다. 소년과 소녀가 떨어져버렸다. 닿을 수 없었다.
“아, 안 돼…….”
아주 어릴 적에 읽었던 동화였기에 그 결말을 기억하고 있지 못하지만, 이야기의 시작은 소년의 감정이 지워지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눈여아가 랙츠의 입안으로 자신의 냉기를 후우 불어넣자 차가워지는 랙츠의 눈동자가 보였다. 그 뜨겁게 타오르는 불꽃과 같은 색의 그 붉은 눈동자가 아주 차갑게 얼어붙어가는 것이다. 저항을 하던 랙츠의 손이 이내 떨어지고 마치 인형처럼 가만히 그 자리에 섰다. 달려갈 수 없지만 목소리만큼은 소년을 계속 찾고 있었다. 계속, 계속. 이 목이 찢어진다고 해도 랙츠가 돌아온다면 이 목소리를 기꺼이 줄 수 있다고. 화이츠는 그의 이름을 계속 부르고 있었다. 그러나 소년은 소녀의 목소리에 더 이상 대답해주지 않았다. 차갑게 얼어붙은 눈은 허공을 바라보고 그의 발걸음은 눈여아의 뒤를 따랐다. 아무리 이름을 불러도, 불러도 그녀를 돌아보지 않은 채 눈여아를 따라 설산으로 가는 그 뒷모습을 화이츠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저 그 자리에서 엉엉 서럽게 울고 있었다. 자신의 얼굴에 뜨겁게 흐르는 무언가에 눈을 뜨니 그것은 화이츠 자신의 진짜 눈물이었다.
“여…여기는……?”
분명 산을 오르다가 의식을 잃고 쓰려졌다. 그녀의 기억은 거기까지. 그 이후의 기억이 없으니 어떻게 혼자 이 동굴까지 온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설마 정말 동화책에 나왔던 것처럼 요정이라도 있었던 것이 아닐지. 화이츠는 두 손을 모아 감사의 인사를 하고 시리는 손을 비비며 그 사이를 호오, 호오. 조그만 입에서 나오는 입김으로 언 손을 녹였다. 그러면 조금은, 아주 조금은 견딜만해졌다. 허나 금방 흩어져버리는 따뜻한 숨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나온다. 파리해진 입술, 평소의 색을 잃은 얼굴은 애처롭고 안타까웠다. 힘들 때 생각이 나는 것은 그 사람이다. 자신이 위험할 때마다 몇 번이나 달려와 줬기에 히어로 같았고 항상 옆에 있어줬기에 그에게 어느 샌가 끌리고 있었다. 화이츠는 랙츠에게 내가 이상하다고 말하자, 랙츠는 그럼 자신도 이상한 것이냐고 되물었다. 소년과 소녀는 서로에게 끌리고 있었다. 이상한 것이 아니라고 그는 알려줬다.
“같이 돌아가는 거야…….”
화이츠는 이내 녹은 몸을 일으켜 동굴 밖으로 나섰다. 어떠한 시련이라도 소녀는 이겨내야만 했다. 살갗을 가르는 매서운 칼바람도 온몸을 얼리는 눈보라도 이 걸음을 막을 수 없다. 모두 뚫고 앞으로 나아가면 분명 그 끝에 소년이 있기에, 아무리 힘들어도 몸이 얼어 움직이지 않더라도 멋대로 올라오는 포기를 누르고 희망을 품었다. 그 희망이야말로 작지만 소녀를 움직이고 있는 큰 원동력이었다.
설산의 정상에 다다르자 눈쓰개와 눈꼬마들이 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곳이 눈 포켓몬들의 요람, 눈여아가 사는 곳. 화이츠는 침을 꼴깍 삼키며 눈 속에 깊게 빠지는 발을 빼 다시 걸음을 옮겼다. 곧 랙츠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니 기운이 조금 생긴 것 같다. 그런 그녀를 근처에서 지켜보는 핸섬은 불안불안한 모양이지만 말이다.
‘경정 나리…….’
요정으로서 도와줄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부하로서 블랙2호 경정의 부탁을 끝까지 들어주고 싶었지만 국제 경찰의 입장이 있는 만큼, 그는 최대한 물러서기로 했다. 지금 누군가 이 상황을 본다면 이상한 점을 느낄 것이다. 어째서 부하인 핸섬이 상관을 구하지 않느냐, 라는 것. 그 의문의 열쇠는 핸섬의 기억 속에 있었다.
“점점 더 추워지고 있어…….”
냉기가 뿜어 나오는 근원을 찾아 신경 쓰이는 방향으로 움직이니 갑자기 눈이 멈췄다. 이것은 자연적인 눈이 아니었다. 포켓몬이 만들어낸 눈, 더 이상 접근을 하지 말라는 경고였다. 허나 여기까지 온 이상 맞이해주려는 모양이다.
“눈여, 아!”
눈결정이 모여 형상을 만들어냈다. 설산이 만들어 낸 포켓몬……. 랙츠를 데려간 바로 그 포켓몬이다.
“랙츠를, 돌려 줘……!”
언 목에서는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의지를 담아 외쳤다. 그를 돌려달라고, 그것이 소녀가 이곳까지 온 이유였다.
“…….”
마치 소매 같은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던 눈여아가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그녀의 눈을 응시했다. 곧은 의지…… 흔들림 없는 눈동자는 눈여아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눈여아는 그런 화이츠를 보고 무어라 말을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화이츠는 포켓몬의 말을 알 수 없었기에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 행동이 무엇을 뜻하는 건지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따라오라는…… 거야?”
갑자기 산에서 내려와 랙츠를 데려간 포켓몬, 때문에 함정일지도 모른다. 그런 작은 가능성이 머릿속에 스쳤지만 왠지 몰라도 화이츠는 눈여아가 자신을 속이려드는 것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저 직감이다. 랙츠를 데려갔지만 나쁜 존재가 아닐 것이라고…….
“혹시 랙츠를 데려간 것, 원해서 그런 게 아니야?”
화이츠의 말에 눈여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얼마나 걸었을까, 바짝 긴장한 상태에서 시간감각이 남아있지 않았지만 아마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은 것 같았다. 어느 샌가 다른 포켓몬은 전혀 보이지 않아서, 아마도 이 포켓몬만이 알고 있는 곳이 아닌가 싶었다. 아무런 말도 없이 어색한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눈여아가 우뚝 멈춰서니 화이츠도 멈춰 섰다. 눈여아가 보라는 듯 길을 비켜서줬다. 그 앞에 랙츠가 있었다.
“랙츠!”
몸이 아팠다. 얼어서 움직이기 힘들었다. 하지만 이 눈동자에 비치는 랙츠로 인해 그 아픔을 잊을 수 있었다. 서두르려다 발이 거려 넘어졌지만, 아무렇지 않게 일어섰다. 일어서서 랙츠에게 다가갔다.
“랙…… 츠.”
창백해진 얼굴을 얼음 인형 같았다. 붉은 눈동자는 본래의 색을 잃어 혼이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가까이에 있지만, 이곳에 랙츠는 없는 것 같았다. 그를 와락 껴안았다. 이 눈길을 달려 더이상 따뜻한 몸이 아니지만 랙츠를 조금이라도 녹여주고 싶었다.
‘경정 나리…, 당신은……’
여기서 나서봤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핸섬을 옥죄였다. 국제 경찰의 임무는 이 세계를 지키는 것이라지만 한 사람 개인의 감정을 우고 사랑하는 사람을 헤어지게 해도 된단 말인가.
저 ‘눈여아’는 국제 경찰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었다. 조난당한 여성이 포켓몬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전설 그리고 또 한 가지 남성의 영혼을 좋아한다고 하는데 눈여아에게는 사람을 홀리고 감정을 얼리는 능력이 있었다. 이전에 이 눈여아는 한 번 사람을 해칠 뻔한 적이 있기에 ‘처리’가 될 수도 있었지만 이런 역할을 위해 국제 경찰을 남겨두었다. 있어서는 안 될 감정이 생긴 요원을, 바로 이 상황같이 말이다.
화이츠가 랙츠를 끌어안고 목 놓아 울자 눈여아는 그 장면을 볼 수 없어 고개를 숙였다. 눈여아는 얼리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존재다. 녹이는 것은, 자기 자신도 녹일 수 있어 불가능했다. 그래도 기적이라는 것은 분명 존재했던 모양이다.
“화이……츠.”
그의 얼굴에 생기가 돌아오는 것이 보였다. 봄이 돌아와 눈이 녹아내리듯 아주 자연스럽게. 랙츠는 봄을 맞이했다. 그의 심장까지 얼려버린 냉기를 녹인 것은 그녀의 눈물이었다. 오직 랙츠만을 생각하는 눈물이야말로 꽁꽁 얼어버린 감정을 녹이는 유일한 매개체였다.
“오지 말라고 했잖아.”
소년은 얼어버린 소녀의 뺨을 만지며 말했다. 고운 얼굴이 얼음장 같아서 마음 아팠다.
“어떻게 오지 말 라고 해. 어떻게…….”
“네가 다칠 까봐 무서웠어.”
겁이 났다. 수백의 임무를 끝낸 국제 경찰의 일원이 무섭다고 말을 했다. 랙츠가 무엇보다 무서운 상황은 자신이 감정을 잃어버리는 것보다도 화이츠의 안위였다. 화이츠와 국제 경찰 그 어느 한쪽을 선택하지 못해 상관의 뜻에 따랐지만 그는 끝까지 화이츠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녀를,
‘……좋아하고 있으니까.’
화이츠를 계속 속이게 되는 것일지라도, 그녀의 옆을 지키고 싶었다. 허나 스스로 임무를 저버릴 수는 없었다. 이 선택에 그녀를 괴롭게 해버렸다. 그건 어쩌면 육체적인 아픔보다도 더욱 괴로운 것이었을 텐데.
“이제 너를 떠나지 않을게, 화이츠.”
약속이야. 그녀의 손가락에 손가락을 걸고 그 눈물에 맹세를 하듯 입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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