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뭄의 끝

메마른 강바닥 위에 빗방울이 떨어지고

시작

BGM

Warning: 가스라이팅

*리안 18세


역사는 바뀌었다.

특수 부대는 무사히 과업을 성취하고 로타로 생환했다. 왕자는 무사히 특수 부대를 이끌어나갔으며, 시들어갔던 생명의 나무는 다시 살아나고, 엉망으로 어그러졌던 이야기가 올바르게 정립될 수 있었다. 모든 부대원들이 원래 속했던 시대로 돌아온 것은 아니었지만 결말을 따지고 본다면 해피엔딩이라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그런데, 나에게는 해피엔딩이 맞을까?

왕성에서 축하연이 끝난 후 며칠 내내 리안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의문이었다. 분명 그가 바랐던 것은 현실로 이루어낼 수 있었다. '그들'이 소원을 빌어준 덕분에 동생은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리안이 낡은 저택으로 되돌아오자마자 다른 얼굴들은 쳐다도 보지 않은 채로 가장 안쪽에 위치한 방으로 뛰어 들어가서 쌍둥이의 이름을 외쳤을 때, 여느 때처럼 침묵이 답한 것이 아니라 동생의 목소리가 답해온 것을 들었던 그때만큼 희(喜)에 겨웠던 적은, 아마 과거의 로타로 되돌아온 이래로는 없었던 것 같다. 저택에 돌아온 이후로 제게 면담과 대련 요청이 끊임없이 쏟아져 들어왔지만, 리안은 동생을 돌봐야 한다는 이유로 요청을 깡그리 무시해버리고 동생의 침실에만 들락거렸다.

동생이 의식을 차렸다고 해서 완전히 나은 것은 아니었다. 제 쌍둥이는 전쟁에서 입었던 상처를 여태 앓고 있었으며, 그나마 차도가 생겨서 의원들이 달라붙은 끝에 어느 정도는 운신할 수 있게 되었다. 리안은 동생을 차마 힘껏 끌어안지 못하고 어깨를 감싸 안는 정도로 만족하며 중얼거렸다.

"미안해, 네가 아플 필요는 없었는데."

시안이 빙그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여전히 파리한 얼굴빛이 시야에 걸렸다.

"언니가 사과할 필요 없다고 몇 번을 말해."

시안은 제 무릎 위에 쓰러지듯 엎드려서 쿨쿨 잠들어있는 킬리아를 가만히 끌어안으며 질문을 던졌다.

"언니는 괜찮아?"

하기야 저 작은 마수도 마음고생이 심했을 텐데. 몇 달이 지나도록 의식이 돌아오지 않는 주인의 곁에서 얼마나 많은 밤을 눈물로 지새웠을까 상념에 잠겼던 리안은 옅은 청색 눈동자가 저를 향하고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이 제게 향한 질문이었음을 알아차렸다.

"음? 뭐가."

의향을 파악하지 못해서 눈을 끔벅거리고 있으려니 앙상한 손가락이 제 가슴 한가운데를 살짝 찔러왔다.

"언니도 아팠잖아. 그 몸을 이끌고 힘들지 않았어?"

"…하기야, 내가 기침을 좀 심하게 하고 다니긴 했었지."

리안은 지나간 시간을 회상하는 듯이 관자놀이를 긁적였다가 제 동생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숨을 천천히 들이마셔 보였다.

"이것 봐, 나 이제 완전히 멀쩡해졌어. 생명의 나무 근처에 가면 병 낫는다는 소문이 진짜였나 봐. 신기하지?" 비단 그런 이유 뿐만이 아니겠지만, 자세히 말하려면 설명이 복잡해져서 그리 얼버무리고 있으려니 그의 눈동자가 반짝이다가도 이내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지는 것이 보였다. 시안은 킬리아를 곁에 눕혀두고 나서 리안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 동작이 워낙 빨라서 리안은 미처 피하지도 못한 채 그대로 쌍둥이의 품 안에 갇히고 말았다.

"아… 야, 잠깐…."

"…고생하게 만들어서 미안해, 리안."

그의 품 안에서 불편하게 꾸무적대던 리안은 그 소리를 듣고는 움직임을 곧바로 멈추었다. 침대의 휘장 아래로 침묵이 흐트러져 내렸다가 리안의 한숨 소리에 산산이 흩어졌다.

"넌 정말이지 대체 누굴 닮아서 이렇게…."

바보 같니. 리안은 말을 끝맺지 못하고 쌍둥이의 등을 당겨 안았다. 손바닥 아래서 숨죽여 우는 기척이 또렷하게 느껴졌다. 입안에서 쓴맛이 느껴져, 리안은 그의 어깨를 살살 어루만지며 토닥여준다.

"울지마. 그렇게 울면 기력 다 빠져서 또 쓰러질라."

주인의 감정을 감지한 킬리아가 잠에서 깨어나 함께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시안은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울음을 끊지 못했고, 결국 리안이 말했던 대로 제풀에 지쳐서 자리에 다시 눕게 되었다. 리안은 이러다 한숨만 늘겠다는 표정으로 그에게 이불을 덮어주었다.

"좀 더 푹 자고 있어. 난 영감이 대면 좀 하자고 하도 닦달을 하고 있어서. 금방 다녀올게."

시안은 제 뺨을 어루만지는 킬리아의 손을 조그맣게 쥐고 힘없이 웃었다.

"아버님이 많이 걱정하셨대. 너무 심하게 대해드리진 마. …그리고 모험담 있음 나한테도 들려줘야 해."

리안은 앞의 내용에서 눈을 굴리다가는 그다음의 내용에서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시안은 그제야 안심이 되었는지 옅은 미소를 짓고는 눈을 감았고, 리안은 그의 고르게 안정된 숨소리를 듣고 나서 침실을 빠져나왔다. 문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조로아크가 곧바로 그의 뒤를 따라붙는다. 리안은 서늘한 시선으로 복도 너머를 응시하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자그마한 인영과 거대한 요괴여우의 그림자가 달빛으로 어슴푸레 밝혀진 복도 위를 일렁이며 스쳤다.


리안은 확신했다. '이 현실은 나에게는 해피엔딩이 아니'라고.

차라리 지하감옥이 가주의 방 보다 훨씬 안정되고 평온한 삶을 보장해줄 수 있을 것이다.

리신 에브. 한때는 전장에서 승승장구하던 전사였으며 일개 군사에서 장군까지 승격한 무인이었으나, 한 순간의 방심으로 인해 큰 부상을 입은 후로는 가문을 부흥시키는 데 전념해 온 자였다. 남다른 인성 덕분에 적을 숱하게 만들어놓고서 가문을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온갖 권모술수와 패륜을 저지르고, 자식까지 구슬려서 자신이 짜 놓은 판에 직간접적으로 가담하도록 명령한 자이기도 하였다. 괴물이라는 멍에를 뒤집어쓴 채 최면에 걸린 것처럼, 꼭두각시처럼 움직여왔던 리안이 가까스로 깨어나 각성할 수 있었던 계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죽음'이었다. '이상하지, 그렇게라도 살아남고 싶어서 모든 걸 감내했던 것 같은데.'

시안의 말은 맞고 틀린 구석이 있었다. 아버지라는 자가 걱정했다는 바는 자식의 안위에 대한 것이 아니라 충직한 인형을 잃을 지도 모르겠다는 불안감의 의미였을 테고, 금지옥엽하는 둘째 자식에게는 검은 속내를 들키지 않고 싶어서 자상함을 연기했을 것이다.

"표정이 좋지 않군, 세를리안."

'그럼 내가 웃어야 하느냐'는 날선 말이 입천장까지 올라왔다가 그대로 달라붙고 만다. 리안은 제가 방금 들었던 것을 가만히 곱씹다가 가주의 주름진 얼굴을 노려보았다.

"하시는 말씀이 이해가 가질 않는데요."

무미건조한 표정 위로 새치 낀 눈썹이 치켜올라갔다. 아무렴 어떤 헛소리라도 고분고분 들어주던 것이 갑작스레 반항기를 보이기 시작하니 어느 정도 당황은 했을 것이다. 사실은, 리안 스스로조차 당황하고 있었다. 정신이 조금이나마 맑아졌다고 십 수년 간의 눈가리개가 말끔하게 벗겨지다니. 표정을 관리하느라 몰두하는 동안 가주의 차분하게 가다듬은 목소리가 청각을 후볐다.

"말했지 않느냐? 전쟁 탓에 가문의 전사들이 대폭 줄어들어서 가세를 유지하기 힘들 것이라고. 숫자를 어떻게든 보충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런 이유로 부모에게서 아기를 빼앗아 오라는 겁니까? 하나도 아니고 여럿을요."

리안은 목에 핏대를 천천히 올렸다가 멈칫했다. 악의도 이만한 악의가 없어서 현기증이 도는 기분이라 넌지시 본색을 드러내고 말았다. 주인의 곁을 지키고 서 있던 조로아크가 숨죽여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냈다. 가주는 차가운 표정으로 조로아크를 힐끗 눈짓했고, 리안은 반사적으로 조로아크의 앞발을 붙잡고 꾹 내리눌러 조용히 진정시키는 제스쳐를 취했다.

조로아크의 으르렁거림이 잦아들자, 가주의 입가에 비릿한 웃음이 실렸다. 딴에는 어이없다는 실소일 것이다.

"원정에서 무슨 일이 있긴 있었나보군. 아까는 내 부름에도 즉각 달려오지 않더니만, 이제는 네가 내 뜻을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는 경우가 다 생기는구나. 제정신이 아닌 것이냐?"

리안은 자신을 삿대질하는 가주의 손가락을 보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연기는 더 이상 불가했다. 이 곳은 삶의 터전이 아니라 수렁이었고, 이 사실을 깨달은 이상 스스로 자처해서 소속감을 유지할 이유는 없었다. 문득, 시안의 가슴에 못을 박고 말 것이라는 죄책감이 스몄다.

"굳이 저한테 그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러니까, 이건 기싸움이다. 당사자들조차 과거에 상상해본 적 없었던 종류, 한 발이라도 물러나는 순간 끝장나는 싸움이었다. 둘 사이에서 한동안 팽팽한 침묵이 감돌다가 가주의 이질적인 목소리에 의해 깨져버린다. 언뜻 들으면 마치 우자(愚者)를 타이르듯 부드러우면서도 권력이 낭낭하게 깃든 목소리였다.

"나는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적임자에게 친히 부탁을 하는 것이다."

"… …."

"너는 괴물이라는 칭호를 가졌을 정도로 강하고 특출한 힘을 가졌지 않느냐."

아직은, 감정의 틈을 보여 줄 만한 단계가 아니었다. 리안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조로아크의 숨소리를 가늠했다. 조로아크는 주인이 별 다른 기색을 보이지 않아 공격성을 자제하는 듯 했지만, 가끔 헐떡이는 것을 보아 이 장소에 버티고 서 있는 것이 힘겨운 듯 했다. 리안이 뜸을 들이자 가주는 별 수 없다는 투로 말을 이었다.

"네가 하지 않겠다면 프루시안, 그 아이에게 맡기면 될 일이다. 아직은 거동하기 불편하다고 하나, 건강을 꾸준히 회복시킨다면야 필시 제 노릇을 잘 해내줄 테니... 어쩌면 제 언니를 뛰어넘는 실력을 보여줄 수도 있겠구나."

아버지는 딸의 약점을 들먹였고, 효과는 그야말로 굉장했다. 리안은 절절히 깨달았다. 자신이 기꺼이 괴물이 된 이유는 비단 수라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뿐만이 아니라, 제 쌍둥이만큼은 똑같은 길을 걷게 하지 않고 싶어서였음을. 가주는 리안의 충격과 공포로 가득 물든 눈동자를 응시하며 부드럽게 웃었다.

"세를리안, 너도 그 아이가 걱정되지 않겠느냐."

채 가다듬지 못한 파동이 서린 주먹이 가주의 목덜미를 향했으나, 조로아크가 뱉은 울부짖음이 주인의 동작을 멈춰세웠다. 리안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가주의 가소로운 미소를 마주했다.

"행동에 주의를 기해라, 세를리안. 순간의 감정에 휘말려 목숨을 저버리는 우를 저버리지 말라고, 내 누누히 가르치지 않았더냐."

주화입마에 가까운 상태로 부유하는 리안의 의식을 잡아 내리듯 가주의 목소리가 쟁쟁하게 울렸다.

"하루 생각할 시간을 주겠다. 네가 내 명령을 거부한다면 프루시안이 업을 이어받겠지. 그리하면 너는 그 아이 뒤에서 보조만을 해 주면 되는 것이다."

감히 거역을 저지른 자식에게 기회를 주겠다는 식의 시혜적인 말투였다. 주먹을 쥔 손의 손마디가 점차 새하얗게 물들어갔다. 가주는 제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리안의 뒷덜미를 겨누고 있던 비수를 치웠다. 리안은 뒷걸음질쳐 가주와 거리를 다시 벌리고 섰다. 기싸움의 결과는 리안의 일방적인 패배였다.

"네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겠다, 세를리안. 도망칠 생각을 품었다면 일찌감치 포기하거라. 네가 살아남을 수 있는 장소는 여기 뿐이니까."

리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말문이 꽉 막혀 아예 할 수 없었던 것과 다름없었다. 그는 입술만을 꿈틀거리며 가주를 쏘아보다 조로아크의 팔뚝을 붙잡았다. 요괴여우 마수의 붉은 눈매가 진한 증오를 남기고 사라졌다.


가주의 방을 빠져나오자마자 조로아크더러는 다른 마수들을 데리고 자리를 피해 있으라고 이른 후, 리안은 홀로 동생의 방으로 향했다. 그 앞에 서서 보초를 서고 있던 두 명의 경비가 문으로 가까이 다가오는 리안을 발견하고 가로막았다. 보나 마나 자신이 가주의 방에 불려 가 있는 동안 가주가 사람을 이리로 보내두었으리라.

"프루시안 아가씨께서는 절대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설사 세를리안 님이라도 안에 들어가실 순 없습니다."

"아, 그래?"

리안은 아쉽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이런 식으로 당하는 견제는 차라리 익숙했지만, 쌍둥이 간의 의사소통을 막으려고 손을 쓴 것 치고는 꽤 허술했다. '내가 프루시안을 데리고 탈주를 시도할 지, 벌써 시험을 시작한 게지.' 경비라는 자들이 가감없이 드러내는 경계심과 조건부 살기가 그 증거였다. 공교롭게도 리안은 인내심이 고갈나 있는 상태였다.

"비켜."

냉랭한 목소리 뒤로 짤막한 육탄전이 벌어진 이후, 리안은 기절한 경비들을 내버려 두고 문을 열어젖혔다.

"리안? 밖에서 싸우는 소리가..."

리안은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 마냥 시치미를 떼며 방문을 걸어잠근 뒤 시안의 곁에 자리를 잡았다.

"…무슨 일이야…? 표정이 안 좋아."

시안이 조심스레 그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리안은 말없이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이내 눈을 내리감고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탈주는 이미 기정사실화 되었으니 앞으로는 시간 싸움만이 남아있지만, 동생에게 들려 줄 이야기의 서문을 꺼내기 위해서 몇 번이고 마음을 가라앉혀야 했다. 포기해야 할 사항들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시안이 가지고 있는 아버지에 대한 우상을 흔들어야 했으며, 그러려면 쌍둥이 간의 우애는 물론이거니와 시안이 굳게 믿어왔던 세계관까지 제 손으로 우그려뜨려야 했다. 리안은 자기합리화와 자기비하를 번갈아가며 시도한 끝에 입을 열었다.

"잘 들어, 시안. 나는 오늘 여길 떠날 거야."

시안의 눈이 차츰 커다래졌다. 무엇부터 말해야 할 지 갈피를 잡지 못해 사고회로가 엉키는 듯했다. 리안은 빠르게 엉켜드는 감정의 파동을 고스란히 감지하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는 더 이상 여기에 남아있으면 안 돼. 말 없이 떠날까도 생각했는데 네게 꼭 말해줘야 할 게 있어서 온 거야."

시안은 몇 번인가 입을 뻐끔거리다가 겨우 말을 꺼냈다.

"왜…? 아버님이 뭐라고 말씀하셨던 거야?"

리안은 손을 뻗어 시안의 차가운 두 손을 맞잡고, 자신과 가주 사이에 오갔던 모든 대화를 동생에게 빠짐없이 이야기해주었다.

한 번 입 밖으로 흘려낸 이야기는 고삐가 풀린 듯이 어렵지 않게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 자는 인륜을 저버리는 일을 꾸미고 있다고. 자기 손을 더럽히기 싫어서 너와 나에게 떠넘기려 한다고. 나는 한낱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아, 가주는 자기 휘하에 있는 것들을 거머쥐어 제 원하는대로 흔들고자 한다고. 이대로 가다간 우리 둘 다 구렁텅이에 빠지게 될 지도 모른다고. 내가 널 그 길로 이끌고 가지 않으려면 내가 여길 나가야 한다고.

"그게 무슨 말이야. 아버님이 그러실 리가 없잖아."

안타깝게도 시안은 자신의 언니가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 눈치였다. 아니면, 믿기가 어려웠거나 싫었던 것일 수도 있고. 언제나 제게는 자상하고 인자한 모습만을 보였던 아버지가 그런 일을 시킬 것이라는 것도, 그리고 언제나 제 곁을 지켜줄 줄 알았던 언니가 자기를 버리고 혼자 떠나겠다고 하는 것도, 어느 쪽도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리안은 제 동생이 이런 반응을 보일 것을 어느 정도 예상했음에도 깊은 탄식을 흘릴 수밖에 없았다. 리신 에브라는 자는 사람의 마음을 쥐고 흔드는 데 소질이 뛰어났음을 새삼 알았던 것이다.

저와는 달리 따스한 치유의 파동을 가진 동생은 저보다는 조금 더 나은 삶을 살고 있었지만, 결국엔 저와 비슷하게 꼭두각시로 지내왔던 아이였다. 또한 제게 주어진 업을 뿌리치기에 성정이 너무나도 여려서 끝내는 가문에 귀속되는 것을 택해버린 아이였다. 어렸을 때부터 각박하게 보살핌을 받고 애정에 허덕였던 리안은 양지에서 따뜻한 볕을 받고 자라는 형제가 부러웠고, 양지에서 받은 상냥함을 자신에게 멋대로 건네주려는 형제가 사랑스러우면서도 미웠다. 그러면서도 결국은 자신을 연약함 속에 가두어 현실에 안주하고 마는 형제가 못내 안타까웠다.

처음부터 순하게 길들여진 넌 아마 나를 절대 이해하지 못하겠지, 내가 자꾸만 위험을 자처하는 이유를, 괴물의 원죄를 뒤집어써가며 놀아났던 이유를, 세상의 모두에게 가시를 드러낼지언정 네게는 차마 모질게 대하지 못하는 이유를, 하지만 우리는 결국 서로에게 독이 되고 말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 서로를 밀어내거나 당겨대다가, 언젠가 일어날 반목으로 인해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고 말 것이다. 예전에 한 번 그랬듯이, 그리고 바로 지금처럼.

악이 끊임없이 순환하는 시궁창 속에서 해피엔딩이란 허구나 다름없었다. 이 안에서 실컷 구르고 뒹굴면서도 곁에서 일렁이는 빛덩어리에 정신이 팔리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는 밑바닥으로 깊이 가라앉아 두 번 다시 떠오르지 못할 게 뻔했다.

"…차라리 처음부터 돌아오지 말 걸 그랬나 봐."

리안은 자조적으로 중얼거리며 제가 붙잡고 있던 손을 놓아주었다.

"가지 마, 리안!"

시안이 그를 애타게 불렀지만, 리안은 동생의 부름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한테 이러면 안 돼. 날 두고 도망가지 마."

리안은 킬리아의 적대감 어린 시선을 묵묵히 받아내며 쌍둥이를 내려다보았다. 시안은 자기가 울고 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한 채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시안을 정말로 설득시키려면 확실한 악역이 되어 모진 말을 내뱉어야 했으나, 차마 그러지 못했다. 리안은 죄책감에 짓눌릴 것 같은 감정을 추슬러 그의 어깨를 가만히 끌어안았다. 흐느낌에 따라 어깨가 여리게 떨리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이제 살고 싶어, 시안."

계속 여기에 갇혀있다간 숨이 막히거나 미쳐서 죽어버릴지도 몰라. 나는 나로서 살아가고 싶다고, 리안은 제 소망을 감히 꺼낸다.

원정대의 유예 기간이었던 이레는 제가 꿈꾸던 것을 모두 거머쥐기에는 지극히 짧은 시간이었지만, 꿈꿔보지도 못한 것을 체험해서 새로운 미련을 마련하기에는 충분히 긴 시간이었다. 사람 대 사람 간의 교류가 '재미있었다, 달콤했다, 쓰라렸다…'처럼 단편적인 단어로 정의하기에는 복잡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땐 스스로에게 안도했던 것 같다. 또, 미처 인지하지 못한 부분을 알게 되었을 때는 무서웠던 것 같지만, 그건 결국 공감과 이해의 영역에서 다루어질 문제였다. '인간다움이란 이런 거였구나.' 리안에게 있어서는 전부 낯선 개념들이었고, 그랬기 때문에 더욱 빠져들기 쉬웠고, 그래서 가주가 걸었던 최면에서 스스로 깨어날 수 있었다. 

자신이 아무리 비겁하다는 비난을 들어도, 리안은 자신이 18년 만에 새로이 희망을 걸고 욕심을 얹었던 것들을 저버리고 싶지 않았다.

"배신자…."

시안은 자그마하고도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그를 비난했다. 진정성이 담긴 파동이 몰려왔다. 리안은 얼굴을 찡그리거나 화를 내는 대신 조용히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가 날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시안, 이제부터라도 나 없이 살아가야 해."

"… …네가 날 진정으로 사랑했다면, 날 떠나지 않았을 거야."

그 중얼거림을 끝으로, 시안은 제 쌍둥이를 힘껏 밀어내고 뒤로 물러나 앉았다. 리안은 제 몸이 밀려나는 대로 서너 걸음 물러섰다. 그는 입을 꾹 다문 채 자신의 시선을 피하는 동생에게 마지막 말을 건넸다.

"반드시 인간으로서 살아가, 프루시안."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고 나니 문 바깥에서 소란을 피우는 소리가 아스라이 들렸다. 열린 창문 너머로 찬 바람이 흘러들어왔다. 리안은 싸늘한 정적이 내려앉은 공간을 뒤로 하고 창문 너머로 가볍게 뛰어내렸다. 설령 시안이 추적자들에게 도망자의 행방을 알려준다고 하더라도 원망할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낙하하는 감각은 평소보다 몇 배 무겁게 자신을 짓눌러왔다.

보름달이 휘영청 뜬 밤이었다. 몰래 행동하기에는 불리했고, 달빛의 힘을 빌려 앞으로 나아가기에는 유리한 날이었다. 월광으로 인해 유달리 짙어진 그림자 속에서 네 마리 악의 마수들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조로아크가 동료 마수들을 불러 온 것이다. 밤공기를 고독하게 호흡하고 있던 리안으로서는 반가운 조우의 순간이었다. 리안은 제게 괜찮냐고 조심스레 물어오는 조로아크에게 힘없는 미소만을 보이고 다른 마수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많이 기다렸지, 이제 가자."

-어디로 갈 거야?

포푸니라는 이제 곧 모험을 떠난다는 사실에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러니 저리도 발랄하게 눈을 빛내고 있지. 리안은 길게 생각하지 않았다.

"남쪽으로 가볼까."

남쪽에는 무엇이 있느냐는 물음에는 '나도 몰라, 가다 보면 뭔가 나오겠지.' 무신경하게까지 비쳐질 법한 대답을 던지고 담장을 타기 시작했다. 장난스러운 투덜거림과 투덕임이 잠시 이어지고 나서, 인간 하나와 마수 넷은 담벼락을 차례로 넘어갔다.

리안은 담을 완전히 넘어가기 전에 저택 안쪽에서 일렁이는 횃불들을 힐긋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장기말이 값어치 얼마나 하는지 확인도 좀 해보고."

담장에서 뛰어내리기 전, 불현듯 미련이 어깨를 잡아끌어 뒤를 돌아보았다.

열린 창문 사이로 감정을 읽어낼 수 없는 얼굴이 떠올라 있었다. 한 쌍의 연청색 시선이 거리를 두고 서로를 마주했다. 지금이라도 다 포기하고 시안의 옆으로 돌아갈까, 까닭 모를 충동이 꿈틀거리는 순간이었다.

"꼭, 소식 보내줘야 해."

그 아이는 더 울고 있지 않았다. 그 자리에 못 박힌 듯이 서서 자신의 쌍둥이 언니를 내려다보며 그렇게 말했을 뿐이었다. 리안은 하릴없는 웃음을 흘렸다. 내 동생은 거짓말도 못해서 어쩌나, 원망해 마땅할 상대를 끝내 내치지 못하면 어떡하지. 그러는 동안에도 리안은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어느 쪽이나 돌이킬 수 없이 슬픔에 빠질 것 같아 목소리를 남길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입 모양만으로 대답했다.

'건강히 잘 있어.'

소식을 보내주지는 못할 것 같았다.

그냥, 예감이 그랬다.

리안은 자신을 재촉하는 악의 마수들을 따라서 어두컴컴한 배경 속으로 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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