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뭄의 끝

홀로 버티는 나무의 뿌리에 빗물이 스미니

시작

BGM

*은엽 30세.

서사 흐름의 이해를 위해 먼저 읽으면 좋을 로그...


가을의 선선한 공기가 짧게 친 머리카락을 한차례 훑고 지나친다. 훤히 드러난 목덜미가 어쩐지 허전해서 괜히 손바닥으로 문지르고 있으려니 여동생이 다가와 등을 툭 건드린다.

"드디어 퇴원하는구나. 그 동안 오빠네 포켓몬들 돌봐준 수고비는 언제쯤 보내줄 거야?"

하운이 눈을 부리부리하게 떠 보이는 걸 보고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은엽은 짐짓 딴청을 부리며 동생에게서 돌려받은 볼들을 하나씩 갈무리했다.

"일단 일자리좀 알아본 다음에 생각해볼게. 나 잘렸거든."

"아~ 저런."

살짝 솟아올랐던 눈썹 끝이 축 늘어졌다. 은엽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하운의 등을 마주 두드려주었다.

"병원에 꼼짝없이 갇힌 시간이 자그마치 3개월인데 뭐... 계약직이 별 수 없잖니. 그것보다 네 휴가는 거의 다 끝나가지 않아?"

"해고당했다는 사람이 표정은 왜 그렇게 밝지요? 오빠 때문에 연차를 싹싹 긁었으니까 다음 분기엔 빠져나오지도 못할 거야. 아무튼 웬수야, 웬수."

그 심통난 표정이 이제는 완전히 익숙해져서 은엽은 그저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 말았다. 그가 만지작거리던 몬스터볼의 개폐장치를 건드리자, 그 속으로부터 루카리오가 기다렸다는 듯이 튀어나와서는 제 주인을 발견하자마자 등에 휙 매달린다.

"소소리… 반가운 마음은 알겠는데 네 덩치 좀 생각해줄래?"

하운은 루카리오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휘청거리는 은엽의 모습을 구경하면서 한마디 던졌다.

"소소리가 누굴 걱정하느라 밥도 제대로 못먹더라고."

낑낑대며 루카리오의 응석을 받아주고 있던 은엽의 눈이 잠시 휘둥그레지더니 곧 못 말리겠다는 표정으로 제 포켓몬을 바라보았고, 루카리오는 퉁명스러운 꿍얼거림을 늘어놓으면서 제 트레이너를 빤히 노려보았다. 은엽은 리오르 시절의 어린애 같은 성격이 그대로 남아있는 눈빛과 마주하곤 하릴없이 쓰다듬어줄 수밖에 없었다.

"거참, 나 안 죽는다니까… 악!"

기어코 강철주먹으로 한 대 얻어맞고 말았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방금 건 오빠가 잘못 했네. 집에 가면 소소리한테 맛있는 거 많이 챙겨줘야 해."

캥, 하고 맞장구를 치던 루카리오는 제 주인이 숨차하는 것을 보고 그제야 땅으로 내려왔다. 은엽은 허리를 꺾은 채로 무릎을 짚고 헉헉거렸다가, 루카리오와 하운이 비슷한 표정을 짓고서 자신을 나란히 바라보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머쓱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 동안 운동을 못 해서 그래. 괜찮아, 진짜."

"안 되겠다, 몸 보신 하러 가자. 소소리, 연행해."

하운은 마치 제가 루카리오의 트레이너라도 되는 마냥 은엽을 가리키며 지시를 내렸고, 당황해서 주춤거리는 은엽에게 루카리오가 득달같이 달려들어 그의 팔뚝을 붙잡는다. 그와 동시에 하운도 반대쪽 팔뚝을 덥석 붙들고 자신에게 어이없는 눈빛을 보내오는 은엽을 향해 시니컬하게 웃어 보였다. 은엽은 입을 딱 벌리고 어처구니 잃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젠 둘이서 손발이 척척 맞는구나. 나 어디 안 도망가는데 좀 놔주면 안 되겠니?"

그들이 서 있는 곳은 장막시티 한복판이었고, 늦은 오전의 시간대라 그런지 거리 위를 활보하는 행인들의 수도 적지 않은 편이었다. 은엽은 여기저기서 흘끔대오는 시선에 불편해하며 팔을 꿈지럭거렸고 하운은 결국 그의 팔을 놓아주었다.

"어디 딴 데로 새지 마."

장막시티의 길은 도시답지 않게 구불구불하고 경사가 져 있는 까닭에 폐활량이 딸리는 사람에게는 무척 불리한 활동 조건을 제시하고 있었다. 하운이 제게 발걸음을 맞춰주고 있다는 점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정신없이 걷는 동안 잡생각에 빠져있던 은엽은 '다 왔어.'라는 목소리에 발걸음을 우뚝 멈췄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병원에서 불과 두 블록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골목이었다. 은엽은 제 체력이 심각하게 저하되었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그 정도 걸었다고 이마에 땀이 맺힐 건  또 뭔지. 루카리오가 골목 안쪽을 신기하게 기웃거리고 있는 동안에 하운이 제게 손부채를 몇 번 부쳐주다가는, '이정도면 됐지,' 하고 맞은편 상가에 위치한 작은 식당으로 일행을 이끌고 들어갔다. 물론 은엽은 제 포켓몬에 의해 바닷속을 힘없이 부유하는 해초마냥 '어어어…'하고 끌려가고 마는 것이다.


그들이 들어간 장소는 홀에는 테이블이 다섯 개 정도 들어선, 규모가 작은 식당이었다. 이런 곳을 척척 찾아올 정도라면 하운이 숨겨 둔 맛집인 모양이다. 남매 외에도 손님은 딱 한 명 뿐, 주방 쪽에서는 식자재를 다듬고 끓이는 움직임이 조금씩 보였다. 공기를 어느 정도 채운 구수한 냄새는 그 동안 가라앉아 있던 식욕을 일깨우는 데 충분했다. 테이블 하나를 잡고 앉아서 하운이 익숙하게 두 사람과 한 포켓몬 분량의 식사를 주문하는 동안 은엽은 자동적으로 수저 세팅을 하면서 손님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타인에 대한 호기심이라기보다는 직업병에 가까운 관찰 행동이었다. 가을을 감안하더라도 두툼해 보이는 코트에 중절모까지 눌러쓴 차림. 벽을 보고 뒤돌아있는 자세라서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귓가에 걸린 마스크줄만큼은 잘 보였다. 그 인물은 저를 관찰하는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듯 독서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여긴 어차피 메뉴가 고정되어 있어서 주문하기 편하단 말야."

하운이 제 오빠의 분산된 정신을 일깨우듯 종알거렸다. "일 끝나고 종종 여기 들르는데 정말 좋아. 좋아하는 사람이랑 오붓하게 있기에도 제격이고."

"아하. 제수씨랑 자주 오는 곳이야?"

"자주... 는 아니지만서도, 가끔? 오빠 얘기도 좀 해봐. 새로 입맛 들인 요리는 있는지 같은 거. 내 마지막 업데이트가 무려 2년... 아니, 3년 전이네." 은엽은 손가락 끝으로 턱을 긁적거리다 멋없이 웃었다.

"솔직히, 이젠 조미료 들어간 요리면 뭐든 마음에 쏙 들 것 같긴 해. 이를테면 오늘 먹게 될 국밥이라든지... 아, 왔다."

사장은 요령 좋은 솜씨로 홀 내에 있는 손님들의 서빙을 끝내고 주방으로 사라졌다. 뜨끈한 육수 안에 뼈 붙은 고기와 야채가 풍부하게 들어가 고깃국 특유의 고소한 풍미를 김처럼 모락모락 올리고 있었다. 루카리오는 이미 자기 몫으로 나온 요리를 신나게 먹어 치우고 있는 중이었다. 하운도 '맛있게 먹겠습니다,' 발랄하게 읊고 나서 바로 제 몫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은엽은 저보다 작은 크기의 그릇을 가져간 자기 동생을 떨떠름하게 바라보았다.

"보통 크기는 내 건 줄 알았는데 왜 네가 가져가? 구조대 일 힘들 텐데 많이 좀 먹지…."

어림없다는 대답이 곧바로 날아온다.

"몸 보신하러 온 사람이 그런 말 하지 말자."

"…옙."

'네 몫을 나에게 넘길 생각이거들랑 말라'는 협박조까지 섞여 있는 바람에 그는 얌전히 숟가락을 들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밥값도 내가 낼 텐데 어느 정도 남긴다고 해서 구박 같은 게 날아오진 않겠지.

은엽이 그릇 절반 정도를 겨우 비웠을 무렵, 제 그릇을 진작에 비워먹고 루카리오와 한가로이 손장난을 치고 있던 하운이 전화가 왔다며 슬금슬금 일어났다. 그는 매너모드로 진동하는 포켓기어를 거머쥐고 딱 한 마디를 남긴 채 식당문 바깥으로 달려 나갔다.

"천천히 먹어, 체할라." 제가 어릴 적의 하운에게 늘상 했던 잔소리를 돌려받는 순간이었다.

문에 달린 종이 미약한 딸랑 소리를 내고 어느 덧 실내에는 고요가 내려앉았다. 은엽은 가만히 패배 선언을 올리며 유리창 너머로 하운을 바라보았다. 밝은 표정으로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얼굴이 어쩐지 낯설어 보였다.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다는 표정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은엽이 흐뭇하게나마 그 모습을 감상하고 있던 중이다. 구석에 앉아서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있던 손님이 자리에서 일어나는가 싶더니 이쪽 테이블로 슬쩍 다가와 앉자, 은엽은 고개를 느슨히 기울여 제 앞에 앉은 사람의 얼굴을 확인했다. 의심이 확신으로 굳어지자, 그는 졸린 낯으로 배를 두드리는 루카리오를 볼 속으로 돌려넣는다. 상대방은 창밖에 서 있는 하운과 주방 쪽의 움직임을 한 번씩 살피고는 은엽에게 고개를 한 차례 꾸벅였다.

"이제야 대화를 할 수 있게 되었네요. 전 니스라고 합니다. 아스펜 선배님이시죠? 수습 시절에 선배님 이야기를 자주 들었어요."

"아, 네. 니스 씨... 본부에서 연락을 취하겠다는 말은 진작에 들었지만... 요즘에는 랑데뷰를 이런 식으로도 하는가 봅니다. 솔직히, 좀 놀랐어요. 장소도 그렇고 말이죠." 은엽은 다소 얼떨떨하게 중얼거리며 무심코 동생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운은 그새 통화를 마치고 포켓기어로 무언가를 검색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은엽이 설마, 하는 사이 식당 내부를 흘깃 바라보던 하운의 시선이 이쪽과 맞닥뜨렸다. 미묘하게 씁쓸한 미소가 동생의 입가에 떠오르는 걸 은엽은 똑똑히 보고 부지불식간에 탄식을 흘렸다.

"민간인과 접촉해서 주선 장소를 중개한 겁니까... 굳이 이런 방식을, 아니, 그보다 하운이가, 제 동생이 납득해 주던가요?"

은엽이 위험천만한 직업에 종사했으며 실제로 위험천만한 사건에 휩쓸려서 사색이 되다못해 질색팔색을 하던 동생의 모습이 선했다. 사내는 덩달아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결국엔 이해해주셨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본인께 직접 들어보시면 될 것 같아요." 사내가 출입증 카드 하나를 내밀며 자연스레 화제를 돌렸다. "이 출입증을 가지고 복귀하시면 됩니다. 하나지방 쪽은 지금 발칵 뒤집힌 상태라… 저도 일하던 도중에 잠시 빠져나온 거거든요."

"들었습니다. 아직 빙결 사건의 여파가 가시지 않았고, 인원 보충도 필요한 상황이라고요."

"다들 선배님의 복귀를 환영할 거예요. 그런 일을 겪으셨는데도 용기를 내주신 거잖아요. 선배님이 존경스럽습니다."

자신을 사뭇 우러르듯 바라보는 남자를 흐릿하게 응시하던 은엽이 고개를 저었다.

"제가 복귀해서 적응이나 잘 할 수 있으면 다행일 겁니다. 체력도 많이 떨어져서 파견 임무도 당장은 힘들지만... 대략 한 달 정도 회복기간이 주어진다면 합류는 가능할 겁니다." 은엽은 허심탄회하게 이르며 카드의 테두리를 손끝으로 어루만져보고 품속에 챙겨넣었다. 은엽의 복귀의사를 확인한 사내의 얼굴이 활짝 피어났다. 그 정도까지 인력이 부족하구나 싶은 절박함이 느껴졌다.

"아! 이 식당은 걱정 마세요. 여기 사장님이 신오지부에서 은퇴하신 분이거든요."

"아하..."

그건 개인정보 아닌가, 속으로 중얼거리는 때마침 주방 쪽에서 호령이 날아왔다.

"말이 많수, 총각! 국밥 다 식었겠구먼."

"악, 죄송해요."

은엽은 화드득 놀라는 니스 요원을 보고 불현듯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사 마저 드십시오. 먼길 와주셔서 감사드리고요.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하나지방에서 다시 뵙기를 바라지요."

"예! 살펴가세요."

왠지 열정적인 악수를 받은 은엽은 식사 계산을 치른 끝으로 식당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시간은 정오를 훌쩍 넘어 낮 한가운데로 흘러가고 있었다. 비록 계절은 가을이더라도 해가 하늘의 정중앙에 떠오르고 난 이후에는 어김없이 지면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기 마련이다. 동생은 아주 간단하고도 당당하게 은엽의 돈을 뜯어내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소프트 콘 하나를 거머쥐고 돌아왔다. '오빠는 아이스크림 안 먹을 거지?'하는 그의 질문에 고개를 저어 보인 다음 일어난 일이었다.

"오빤 속 찬 거 안 좋아한다며."

"으음, 그렇지."

남매는 언덕 옆에 위치한 공원의 어느 벤치에 나란히 앉아서 더위를 식히고 있는 중이었다. 가끔 언덕 위쪽에서 바람이 불어와 피부가 선뜻해지기는 했으나 그마저도 아주 잠깐에 그칠 뿐이다.

은엽은 동생의 옆얼굴을 힐끔 내려다보았다. 이쪽으로는 시선을 주지도 않은 채 먼 곳을 응시하기를 벌써 수 분이 지나간 것 같았다. 그는 동생이 이런 반응을 보일 때 주로 어떤 기분인지 어렴풋이 알았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는 경우였던가. 다시 살피자면 눈썹이 예처럼 매서운 모양이 아니라서, 그런 것도 딱히 아닌 듯 했다. 은엽은 상대방의 심중을 곧잘 꿰뚫는다고 자신하는 편이었지만 하운에 한해서는 어려움을 겪는다는 사실을 자각하며 물었다.

"뭐 하나 물어봐도 되겠니?"

식당에서 뜻밖의 만남을 가진 뒤로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던 의문을 해소할 수 있는 타이밍은 지금 뿐이었다. 하운은 절반 남은 소프트콘을 입속으로 천천히 욱여넣고는 손에 묻은 부스러기를 툭툭 털어내었다. 시간을 들여가며 먹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한꺼번에 처리할 줄은 몰랐다는 얼굴로 바라보고 있으려니, 하운이 빵빵해진 볼을 하고 검지를 치켜세웠다.

"우으음."

"...아니, 그거 다 먹고 나서. 안 급한 거야."

"웅."

다행히 동생의 기분이 나쁜 건 아닌 듯 하다. 은엽은 마음이 한결 편안해진 채로 손깍지를 끼고 그의 다음 반응을 기다렸다.

"...그러니까 오빠가 궁금하다는 건 그거겠지. 아까 그 사람이랑 어떻게 접촉했고 왜 그런 식으로 작당해서 오빠를 놀래켰는지."

"작당... 까지는 아니지만, 응."

"니스라고 했던가? 본명이 따로 있겠지만, 그건 제치고. 그 분이 오빠를 직접 대면해야 한다고, 오빠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녔나 보더라고. 그런데 오빠는 그 당시 폐쇄병동에 갇혀 있었고 외부와의 연락도 제대로 나눌 수 없었던 상태였잖아.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오빠의 직계가족인 나한테 연락을 취했대. 오간 이야기가 좀... 있었지만, 이것도 기니까 일단 패스. 여기까지가 삼 주 전쯤의 일이야."

가장 핵심적인 궁금증이었던 '국제경찰의 설득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건너 뛸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은엽이 캐묻지 못했던 이유는 하운의 매끄럽고 단조로운 음성이 만들어내는 묘한 이질감 탓이었다. 도시의 소음이 백색소음처럼 가라앉는 느낌이 들 때까지 제자리에서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도 않고 있던 하운이 느닷없이 웃음기를 띄우며 말했다.

"어째서 오빠네 직장동료와 몰래 약속을 잡고 정작 오빠한테는 아무 언질도 주지 않았을까? 그야 간단하지. 심술 부리고 싶어서."

"...응?"

은엽은 순간 말뜻을 이해하지 못해 약간 탁해진 시선으로 그 미소를 쳐다보았다. 동생은 가만히 숨을 들이쉬었다가 불쑥 질문을 던진다.

"오빠는 왜 국제경찰이 된 거야?"

은엽은 갑작스레 자신을 향해 찔러들어오는 질문에 주춤 눌릴 수밖에 없었다. 대답하기 어려운 내용이 아니었는데도 입 밖으로 다시 꺼내기에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소중한 사람들이 다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라고나 할까, 조금 광범위하지만, 그런 느낌으로. 그리고 내가 힘을 키운다면 널 그 저택에서 데리고 나올 수 있겠다는 생각도 컸어. ...정말이야."

은엽은 마지막 문장을 덧붙이고는 변명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후회했다. 답을 들은 하운은 고개를 기울여 표정을 숨겼다. 길게 땋아내린 머리가 어깨의 움직임에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그럼 이거 하나만 더. 오빠는 국제경찰에 복직할 거야?"

"그러기로... 했지."

"그 결정, 무슨 일이 있어도 무르지 않을 거고."

"...응."

"그렇구나."

불과 몇 분전의 '내 동생은 기분이 상한 상태가 아니다'라는 판단은 완전히 틀렸다. 하운은 인내심을 한계점까지 발휘하고 있었던 것이고, 방금의 자신의 답이 그 인내심을 무너뜨리는 기폭제가 되어버렸다. 은엽은 다가올 폭풍을 각오하며 동생이 다음으로 할 말을 조용히 기다렸다.

"솔직히, 니스라는 요원이랑 얘기하면서 화가 치밀었어. 그쪽 말로는 상황이 미쳐돌아가기 직전이고 해결하려면 오빠같은 우수한 인재가 있어야 한다는데, 나한테는 마치 맡겨놓은 물건을 되찾아가겠다는 뉘앙스로 들렸거든. 그 분이 그런 의미로 얘기한 건 아니었겠지만, 한참 투병 생활을 하고 나서도 회복을 못해 골골거리는 사람을 데려가겠다고 하니까 썩 고운 생각이 들지는 않았어."

하운은 긴 한숨을 내쉰 뒤, 자신의 오빠가 말할 틈을 내주지 않고 덧붙이듯 나아갔다.

"물러나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오빠라면 얼마든지 국제경찰로 복귀할 수 있겠더라. 오빠는 정의롭고, 자기자신보다는 남이 우선이고, 꺾였어도 어떻게든 회복해서 일어나는 사람이잖아. 그러니까 저쪽에서도 오빠의 복귀를 학수고대하고 있는 거고. 무엇보다 서리가, 가장 소중한 파트너가 그렇게... 되었는데도 오빠는 희생을 헛되게 하면 안 된다고 뛰쳐나갔어. 그런 오빠를 내가 어떻게 막을 수 있겠어? 오빠가 정한 길을 가족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가로막을 권리 따위, 나한테는 없는걸. 우리 둘다 끔찍하게 잘 알고 있잖아, 그렇지?"

부지불식간에 막혔던 숨통이 잠시나마 트였다. 하운은 어느 순간부터 바짓자락을 꽉 움켜쥐고 숨을 고르는 중이었다. 남매가 애써 외면해 왔던 상흔은 오히려 존재감을 불려 행동양식 그 자체가 되었음을, 은엽은 자신을 올려다보는 하운의 눈시울이 붉어진 것을 보고도 입을 열지 못했다. 잠시나마 묵혀두었던 수두룩한 상실감이 그 시선 속에 담긴 감정과 맞물려 목구멍을 콱 틀어막듯 하였다. 은엽은 제 동생을 무척이나 아끼고 사랑한다고 자부할 순 있었어도 동생의 마음 전부를 알 순 없었다. 애초 그 애는 전부를 다 말하지 않는 타입이었고, 지금도 도리어 무언가를 꾹꾹 눌러참는 태가 은연 중에 느껴졌다. 은엽은 어쩌다 동생이 그런 시각과 태도를 가지게 되었는지 짐작만 할 뿐이고, 그래서 더더욱 짙은 후회감을 느꼈다. 후회의 원인도 모두 제게 있는 것과 다름없었다. 문득 은엽은 자기 자신이 몹시 부끄럽게 느껴졌다.

하운은 천천히 벤치에서 일어나 자신의 오빠를 내려다보고 대뜸 강한 어조로 말했다.

"나랑 배틀해."

"배틀... ...?"

은엽이 멍한 얼굴로 멍하니 되풀이하자 하운은 빙그레 미소지었다.

"응. 트레이너 사이의 명실상부한 대화수단이니까. 오빠와의 배틀은 흔치 않은 기회이기도 하고."

거부할 명분은 없었다.

하운은 대답을 듣지 않고 그대로 앞서서 걸어나갔다. 그 뒤를 따르는 발걸음은 무겁기 그지없었다.


214번 도로는 한적했으며 어딜 둘러보아도 황폐한 들판 밖에 보이지 않는 장소, 즉 별 다른 장애물 없이 난전 배틀이 가능한 지형이었다.

남매는 바위 언덕 위의 넓은 평지 위에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서로를 마주 보았다. 하운의 잿빛 머리카락이 바람에 헝클어지듯 흩날리는 가운데서도 그의 표정만큼은 평온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하이퍼볼을 들어 올리며 건조한 음성으로 말했다.

"사용 포켓몬은 한 마리. 한쪽이 쓰러질 때 끝나는 거야."

은엽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몬스터볼의 크기를 키웠다. 누구의 볼이 먼저랄 것 없이 허공에 띄워 올려지며 빛을 토해내고 두 마리의 드래곤들이 필드 위에 강림했다. 한쪽에서는 플라이곤이 매섭게 일으킨 모래바람이, 또 다른 한쪽에서는 킹드라가 휘몰아낸 물방울의 베일이 아른거렸다. 킹드라는 트레이너의 감정을 넘겨받아 눈을 흉흉하게 빛내고 있었다. 필드에 흐르는 긴장감과는 동떨어질 만큼 조용한 목소리가 은엽에게 들려왔다.

"증명해 봐. 내가 오빠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오빠가 강하단 사실을 나한테 보여줘."

하운의 눈매가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대화를 마저 하고 싶다면 배틀에 제대로 임하도록 해."

짤막한 지시에 킹드라의 광포한 기세가 몰려왔다. 은엽은 서둘러 플라이곤에게 높이 날아오르기를 지시하며 초조하게 하운의 기색을 살폈다. 동생은 지금 자기 눈치를 볼 때냐고 다그치듯 냉랭한 눈빛을 보내오곤 적을 주시하고 있던 자신의 포켓몬에게 명령을 내린다. 하이드로펌프로 적을 노려. 그 즉시 킹드라의 주둥이에서 강한 물살이 쏘아져 나와 허공에서 부유하고 있던 플라이곤에게 쇄도했다. 공중에 높이 비산한 물방울들이 햇빛을 굴절하여 작은 무지개를 만들어내니, 멀찍이서 보면 아름답다고 느껴질 정도의 장면이 연출되었지만 플라이곤은 공격을 순순히 맞아주지는 않겠다는 듯이 곡예비행으로 물줄기를 이리저리 피해다니며 킹드라의 사각지대를 노리기 시작했다. 높이 솟아올랐던 하이드로펌프는 목표 지점을 잃고 가파른 포물선을 그리며 추락해, 지면 위에 작은 물웅덩이들을 만들어내고 사그라들어간다.

기술이 맞지 않았음에도 하운은 실망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무언가를 노리고 있구나, 은엽은 오랜 훈련으로 단련된 직감을 즉시 따라서 플라이곤의 공격 태세에 힘을 실었다. 불대문자, 명중시키지 않아도 좋으니 가급적 지면을 향할 것. 곧바로 공중에서 곤두박질치듯 하강하던 플라이곤이 중간 정도의 높이에서 거대한 불꽃 덩어리를 힘껏 내뿜었다. 위치에너지를 실은 불대문자가 지면을 강타하면서 어마어마한 열기를 주변에 퍼뜨려 곳곳에 남아있던 웅덩이들이 삽시간에 말라붙는다. 자욱한 수증기가 아지랑이와 함께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가운데서 하운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날아간 물기는 신경 쓰지 말고 냉동빔.

필드가 얼음으로 뒤덮이게 될 것을 경계하고 있던 은엽은 킹드라가 쏘아 보낸 냉동빔이 열기마저 꿰뚫고 수증기까지 얼어붙게 만드는 것을 보며 잠시 말을 잃었다. 맹렬하게 날아온 얼음 광선은 플라이곤에게 회피할 겨를을 주지 않고 그의 비행 궤도를 붙잡아냈으며, 플라이곤은 갑작스레 다가온 냉기에 잠깐 비틀거리다 결국 꼬리에 동상을 입고 만다. 균형을 잃어버린 플라이곤이 땅에 떨어져 몸을 제대로 일으키지 못하는 사이 킹드라는 의기양양하게 등지느러미를 일렁이며 다음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음이 상당히 유효한 타격을 주었는지라 플라이곤이 몸을 운신하는 데만도 시간이 지체되는 듯했다. 하운은 배틀이 성에 차지 않는 것처럼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기어코 배틀의 끝을 보고 말 의지는 충만해 보여서 은엽은 제 동생의 기대에 따라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든 반격은 해야 했으니 기술을 과감하게 선택해야 했다. 플라이곤은 버텨낼 수 있다며 우렁찬 울음소리를 냈다. 은엽은 그 울음을 들으며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고 한숨을 흘리듯 새로운 지시를 내린다. 지진, 있는 모든 힘을 쏟아서 땅을 흔들어라. 

플라이곤은 그를 기다렸다는 듯이 날개를 활짝 펼친 채로 힘껏 솟구친 후 하반신에 무게를 가득 실어 땅을 밟았다. 육중한 발구름이 단시간 내에 여러 차례 반복되는 동안 플라이곤의 꼬리를 옭아매고 있던 얼음덩어리가 충격에 의해 산산조각났고, 동상에서 해방된 플라이곤이 마지막으로 난동을 부리듯 진원점을 꼬리로 내리찍음으로써 그 최후의 충격이 필드 내를 흐르던 진동파와 얽혀 더욱 더 강렬하게 땅을 뒤흔들었다.

플라이곤이 신중하게 힘 조절을 한 덕분에 트레이너들이 있는 곳까지 지진의 충격이 닿지는 않았지만, 그 공격은 킹드라를 옴짝달싹 못하게 할 만큼 충분히 강력했다. 지표면이 우그러지고 비틀리는 동안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나 필드 위를 서서히 뒤덮어가는 가운데서, 은엽은 제 동생이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버티고 서 있는 것을 보며 한편으로는 안도감을 느꼈다. 그는 여차하면 뛰쳐나가려 했던 발걸음을 뒤로 물리며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서로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아 지친 기색이 뚜렷해 보이는 양쪽의 드래곤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빠르게 결말을 내야 한다는 생각이 전장 위를 관통하고 지난 것처럼 어느 쪽이 먼저랄 것도 없이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용의파동을.

하운의 단호한 음성과 은엽의 나직한 음성이 섞여 각자의 포켓몬들에게 전달되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은엽은 자신이 무언가를 까맣게 잊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방금 전의 지시 어디엔가 문제가 있는 것처럼, 그러나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깨닫기도 전에 청보랏빛 파동이 사방으로 드넓게 퍼져나가는 것을 지켜보다, 제 동생의 얼굴 위로 경악과 낭패감이 스치는 걸 보며 그대로 필드를 가로질러서 달려간다.

상대방을 강하게 밀쳤을 때의 반동으로 인한 부유감은 아주 잠시, 은엽은 하운의 머리 뒷부분을 보호하듯 손으로 감싼 채로 바닥을 굴렀다.

한 쌍의 광포한 파동이 충돌하는 순간에 생성된 크고 작은 스파크들이 주위의 흙먼지를 집어삼켜 나가기를 삽시간, 빛이 섬뜩하리만치 일고 귀가 먹먹해질 정도의 굉음이 울려 퍼졌다. 열기를 머금은 흙덩어리와 돌조각들이 이리저리 튕겨 나가고, 소란에 놀란 야생 포켓몬들이 사방팔방으로 흩어지며 요란한 아우성을 남긴다.

폭발은 찰나에 일어났던 것처럼 빠르게 사그라들어, 이내 거뭇거뭇하게 탄 무기물 잔해들만이 땅바닥 위를 뒹굴고 있었다.

"…괜찮니…? 다친 덴 없고?"

동생의 안부를 묻는 은엽의 목소리는 과도한 긴장과 스트레스로 인해 잔뜩 쉬어 있었다. 은엽은 뻐근해진 팔근육을 억지로 움직여서 동생을 감쌌던 자세를 풀어주었다. 하운은 그때까지도 얼떨떨한 표정으로 제 오빠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뒤로 물러나 앉았다.

"나는, 괜찮아. 오빠는?"

은엽은 돌조각들에 긁혀 생채기가 생겨난 팔뚝을 옷소매로 가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하운은 잠시 눈썹을 일그러뜨리고 나서 몸을 일으켰다.

"그럼 마저 승부를,"

"이미 끝났어, 하운아."

하운은 땅 위에 쓰러진 자신의 킹드라를 발견하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는 제 포켓몬을 볼 안으로 불러들인 후 그것을 양손으로 감싸 쥐고 한참을 말없이 서서 내려다보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은엽이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하운아, 네가 정확히 뭘 말하고 싶은 건지 이제 알려주지 않을래? 네가 말해주지 않으면 난 계속 겉돌 수 밖에 없어."

동생의 속내를 짐작만 하고 있다가는 앞으로 어떤 섣부른 판단을 하게 될 지 알 수 없었다. 은엽은 자신이 가진 죄책감을 또렷하게 바라보고자 했다. 오빠란 사람이 이렇게 멍청해서 미안하다고 스스로 확신을 갖고자 했다.

하운은 그런 제 오빠를 향해 힐끔 시선을 던지고는 힘없이 주저앉아 있는 플라이곤에게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방금 전의 격렬한 배틀로 기력을 거의 모두 소진한 까닭이었는지, 플라이곤은 그저 맥없는 울음소리를 흘리며 기다란 몸체를 웅크리고 있었다. 하운은 그런 플라이곤의 목을 조심스럽게 쓸어준 뒤 상처약을 상처들 위로 골고루 펴 바르기 시작했다. 그는 다가오는 은엽의 손등을 찰싹 때려서 막아내고 플라이곤의 치료를 이어나가면서 가만가만 읊조렸다.

"오빠가 내 기분을 알긴 알까. 평범한 일상이 전화 하나로 무너져내리는 기분이 어떤 건지. 아무 소식도 주지 않다가 덜커덕 전달받은 이야기가 매번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내용일 때면 나는 어떤 기분이 들 지. 가족한테도 연락처를 남기지 않은 사람의 안부를 낯선 사람한테서 들었을 때 어떤 기분이었는지…."

은엽은 플라이곤의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날갯죽지를 손으로 쓸며 하운의 목소리에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하운의 목소리는 마치 오늘의 일정으로 무엇이 있는지 알려주는 것처럼 평이한 어조였지만 어느 것 하나 감히 짚어낼 수가 없어서 은엽은 동생의 이야기가 이어지는 대로 그저 듣기만 했다.

하운은 동상의 흔적이 아직껏 남아있는 플라이곤의 꼬리로 시선을 돌리며 여상스럽게 말을 이어간다.

"왜 오빠는 어디론가 사라지지 않고선 못 배기는 걸까. 왜 아무 이야기도 않는 걸까, 왜 항상 다쳐오는 걸까? 오빠가 안 보이는 곳에서 그렇게 굴러다니고 있었는데도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단 말야. 그렇다고 겨우 돌아와서 제대로 알려준 적도 거의 없고, 난 도대체 언제까지 오빠를 붙잡고 캐묻다가 지쳐야 해?"

평정을 유지하기로 애쓴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투였으나, 내용이 이어질 수록 점점 감정에 물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듯했다. '왜'라는 한 단어를 내뱉고서부터 미약하게 떨리기 시작한 목소리는 조금씩 원망을 담아내고 있었다. 플라이곤의 꼬리를 어루만지던 손길이 한가운데서 우뚝 멈춰 섰다. 은엽은 자신을 똑바로 쏘아보는 상록색 눈을 바라보면서도 여전히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운이 때때로 내뱉었던 불만들을 애매한 태도로 달래줄 때마다 차곡차곡 쌓였을 서러움이 터져 나오는 순간이다. 은엽은 부지불식간에 제 동생의 이름을 불렀으나, 그 목소리는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문장들에 의해 속절없이 묻혀버린다.

"아픈 사람한테 화도 못 내고 혼자 앓다가 까먹은 것도 벌써 몇 개 있어. 그런 주제에 오빠는 아무렇지도 않게 웃고 괜찮은 척을 하고 있잖아. 자기가 아팠다는 건 결국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듯이 구는 걸 지켜보기도 지쳤어. 오빠가 언젠가 또 말없이 갈까 봐, 그리고 다음 번에는 또 어떤 전화가 올 지 몰라서, 그렇게 불안하게 살아가는 게 무서워. 오빠의 얼굴 보기를 기대하는 것보다 오빠가 어떤 모습으로 돌아올 지 걱정해야 한다는 게 정말 싫어. 어렸을 땐 오빠 등만 봐도 좋기만 했는데 이제는 오빠가 등을 보이면 무서워진단 말야."

"… …하운아,"

"오빠가 내 부모 노릇 해주느라 고생한 거 다 알고 있어. 오빠가 내 유년기 전부를 돌봐줬기 때문에 나는 어머니나 아버지보다 오빠를 더 많이 알고 이해하고 싶었어. 오빠는, 오빠도 나한테 무척이나 소중한 사람이란 말이야. 나한테 그렇게나 희생해줬으면서 정작 왜 이걸 몰라주는 거야..."

"…하운아."

"그냥, 잘 지내고 있다고 가끔 목소리 들려주고 얼굴 보여주면 되는건데, 숨기지 말고 미루지도 말고 제때 말해주면 되는건데. 내가 오빠 가지 못하게 붙잡고 늘어질 것도 아닌데."

하운이 마지막 마디를 짓씹듯이 내뱉을 무렵 덜커덕 하고 은엽의 가슴 속에서 뭔가가 걸리는 듯했다.

자신이 안고 있는 딜레마와 모순점을 줄곧 외면하고 있던 쪽은 자기 자신이었음을, 오히려 제 동생이 그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꿰고 있었음을, 이전에는 자신을 깊이 믿고 따랐던 아이에게 이해를 해 줄 것을 무의식중에 강요하고 있었음을, 그걸 여태까지 깨닫지 못한 탓에 이 아이의 신뢰가 불신으로, 이 아이의 동경이 실망으로 바뀌어버리고 만 사실이 뼈아프게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무엇보다, 이 아이가 나를 가장 필요로 할 때 곁에 남아주지 않았다. '나는 이 애 가족으로서 실격이구나.' 은엽은 깊은 후회감에 몸서리를 치고 말았다.

하운은 플라이곤의 목을 끌어안은 채로 얼굴을 보이지 않고 있었고, 플라이곤은 영문 모를 울음소리를 내면서 그의 팔을 토닥여주려 애를 쓰는 중이었다. 은엽은 동생의 손을 조심스럽게 쥐었고, 그 손아귀를 뿌리치려는 듯이 손가락들이 몇 번인가 꿈지럭거렸으나 그뿐이었다. 은엽은 하운이 제게 더 거부를 보이지 않는 것에 고마움을 느끼며 조곤조곤하게 속삭였다.

보호자의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떠났던 것부터 내 잘못이었다고, 국제경찰 신분에 가족들이 위험해질까 차마 연락을 못했지만 이건 그저 변명일 뿐이고, 네가 나를 용서하지 않아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네게 그토록 많은 짐을 떠넘겨서 미안하고, 내게 털어놓아 줘서 고맙다고, 이제는 네게 상처를 입힐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은엽의 목소리를 듣는 내내 묵묵부답이었던 하운은 끄트머리에 가서 이제껏 참아왔던 섧은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울음소리를 있는 힘껏 삼키는 버릇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오빠가 싫다고, 미워 죽겠다고 타박을 마구 뱉으면서도 옷깃을 꽉 끌어쥐고 놓지 않는 것도 변함이 없다. 그토록 무뎌지고 자신을 다듬어 왔으면서도 이런 건 하나도 변하지 않았구나. 은엽은 깊은 한숨을 토해내곤 플라이곤에게서 동생을 떨어트린 후, 살며시 어깨를 감싸 안고 등을 도닥여주었다. 그 탓인지, 간신히 참는가 싶었던 하운의 울음이 다시 터져버리고 말았다.


"...이거 하나는 확실히 하자. 내가 그 저택을 벗어나려고 정말 여러가지를 시도하긴 했지만 그 과정 중에 오빠의 도움같은 건 받은 기억이 일절 없거든. 따라서, 이 점에 대해 나는 오빠한테 빚진 거 하나도 없어."

"... ...?"

"바꿔말하자면 오빠는 본가 관련으로 나한테 빚진 거 없다는 뜻이야. 그러니까 내 앞에서 그거 때문에 땅 파지 마. 아주 속 터져 죽겠어."

하운은 제 말에 강하게 얻어맞은 듯한 표정의 은엽을 무시하고 얼굴에 묻어난 눈물자국을 없애려 애쓰며 잔뜩 골을 냈다.

"…유이가 여기 없어서 다행이다. 진짜, 전부 다 엉망진창이란 말이야…."

플라이곤의 상태를 마저 살펴보고 있던 은엽은 그 말을 듣자마자 몸을 일으켰다.

"가자. 내가 데려다줄게."

"됐어, 난 바람꽃 타고 가면 되니까 오빠는 높새 데리고 가서 쉬기나 해. 천관산 요즘 추운 때인 거 알잖아."

아까 그 난리에 다치기까지 했으면서 어딜 가려고. 동생은 무장조를 꺼내놓고 날개를 살펴보는 동안에도 제게 핀잔을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오늘 퇴원한 사람은 얼른 귀가해서 발 닦고 주무시라고."

은엽은 어설프게 웃었다. 아무래도 동생의 화가 풀리려면 시간이 더 지나야 할 것 같지 싶었다. 마지막으로 플라이곤과 작별 인사 겸 포옹을 나눈 후 자신의 오빠는 매정하게 무시해버리는 하운의 행동은 은엽의 가정에 어느 정도 힘을 실어주었다. 하운은 은엽에게 인사를 건네는 대신 다른 질문을 던졌다.

"복귀 언제 해?"

적어도 어디로 가느냐고 묻지는 않는구나. 은엽은 아주 잠깐 뜸을 들인 후 대답한다.

"다음 달에 하나지방으로 갈 거야."

제 오빠의 얼굴을 뚫어지라 바라보던 하운은 능숙한 동작으로 무장조에 올라탔다. 눈높이가 높아진 지점에서 하운의 그늘진 눈동자가 은엽을 향했다.

"…가끔 시간 날 때마다 꼭 전화해. 아니면 문자도 좋아."

다짐을 시키는 목소리 음절 하나하나에 힘이 실려 있었고, 은엽은 절대적인 명령을 듣는 것처럼 유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

"너무 무리하지 말고. 몸 조심하고. 아프면 휴가 내고 푹 쉬어야 해."

"…그래."

"끼니 대충 때우지 말고 꼬박꼬박 잘 챙겨먹어."

"응."

"연애도 좀 해봐. 오빠는 소중한 사람을 지켜주고 싶다고 하지만 정작 오빠를 지켜주는 사람은 없잖아."

"...응...?"

제때 알아듣지 못해 입만 벙긋거리는 은엽을 두고 하운은 무장조의 목 언저리를 쓸었다. 은엽은 멍하니 뒤로 물러나서 그들의 비상을 지켜보았다.

강철의 날개가 일으키는 바람이 주변의 것들을 휩쓸어내듯 하고, 무쇠 갑주가 태양 빛을 반사해 잠시나마 눈을 멀게 만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살풍경한 들판 위에는 인간 하나와 포켓몬 한 마리만이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이 장소에서는 처음부터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이 정적이 무겁게 내려앉고 있었다.

적막 속에서 우두커니 서 있던 은엽은 불현듯 자신의 얼굴을 손으로 길게 쓸어내렸다. 이제 겨우 하루의 반나절을 지나쳤는데도 종일은 족히 지난 것 같은 피로를 느꼈다. 곁으로 다가온 플라이곤이 어깨를 툭 치며 낮게 그르릉거렸다.

"우리도 가죠… 높새. 오늘 고생 많았습니다."

자신의 엔트리들과는 거의 두 달 만에 한 지붕 아래서 지내게 된 셈일까. 은엽은 약간 불편하게 플라이곤의 등 위에 오르며 사색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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