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뭄의 끝

그이는 오래도록 멈추었던 숨을 다시 터뜨렸더라

조우

BGM

*겨울. 리안 19세, 은엽 30세.



"목격된 적 없는 포켓몬이 출몰한다고요?"

오랫동안 모니터를 들여다보느라 뻐근해진 목근육을 손수 안마하고 있던 중, 후배 요원이 달려와 법석을 부리는 바람에 숨 돌릴 틈을 잃어버린 은엽이 약간 풀죽은 음성으로 되물었다. 선배의 꿀 같은 휴식을 방해했다는 죄책감 때문인지, 그게 아니면 새로 떨어진 건에 기가 눌렸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에 답하는 후배의 목소리 또한 풀이 죽어 있었다.

"네에, 더 정확하게는 서식지가 아닌 곳에서 발견되는 포켓몬이라고… 그것도 다수라고 하네요. 그런 민원이 이틀 전부터 뇌문시티 경찰서에서 여러 번 접수되었다고 해요. 심지어는 녀석들이 미혹의 숲 근처를 지나는 백팩커들을 습격해서 물품을 탈취해가는 일도 있었다고 하고요."

후배가 설명해주는 틈을 타, 은엽은 너저분하게 풀린 머리카락들을 도로 정갈하게 묶고는 그가 넘겨준 파일을 들춰보기 시작했다. 문서 뒷장에는 풀숲 너머로 포푸니라와 그라에나의 실루엣이 찍힌 사진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야생 포켓몬들이 월동기마다 가끔 그런 양상을 보이긴 하는데 서식지 외의 개체라는 점이 걸리는군요. 더군다나 동일한 종이 아닌 포켓몬들끼리 무리를 지었다…. 거기에 도난당한 물품들 중에는 식량 뿐만 아니라 보온기구나 의약용품도 있고요. 흥미롭네요, 포켓몬들이 직접 쓸 법한 물건들도 아닌데."

"포획을 시도했는데 번번이 실패했다고 하는데, 주인이 있기라도 한  건지, 아니면 트레이너에게서 버림을 받은 건지 잘 모르겠다더라구요."

후배는 은엽의 책상 위에 차곡차곡 세워져 있는 파일 꽂이들과 그 안쪽에 꽉꽉 채워져 있는 파일들을 보면서 조심스레 말했다. 1년 전에 벌어졌던 하나 지방 빙결 사건이 완전히 마무리되지도 않았는데, 거기에 대규모 포켓몬 밀매 사건까지 도맡게 되었으니 업무량이 순식간에 두 배로 불어나 버렸던 것이다.

은엽이 국제경찰 하나지부에 복귀한 이후의 근무 일수가 이제 석 달이 지나가고 있는 동안에도 사건이 끊일 일은 없어서 업무에 적응하긴 쉬웠지만, 일손 하나가 급하단 사실을 톡톡히 체감하는 중이기도 했다. 은엽은 수염이 듬성듬성하게 자란 턱을 문지르다가 한숨을 나직이 내쉬었다.

"정보 하나하나가 귀하니 뭐든 확인해보는 게 좋겠죠."

"아, 특이사항이 있는데…."

은엽은 후배의 손가락이 짚는 부분을 다시 읽어보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문제의 두 마리가 미혹의 숲 내부로 들어갔다는 증언이 다수 확보되었어요."

"그러네요. '쫓아 들어간 숲에서 한참을 헤매다가는 어느 길로 들어서든 반드시 출입구로 돌아 나왔다…' 미혹의 숲이 예전에도 이랬다고 했는데 말입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하던 후배는 문득 선배의 살인적인 스케줄이 걱정스러워졌는지 넌지시 물어왔다.

"그러고 보면 선배님이 잡고 계신 밀매 건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나요? 감식반에서도 흔적 잡아내기가 무지 힘들다고 그러던데. 사라가 입사 이래 처음으로 신경질내는 걸 보고 온 참이거든요."

"글쎄요… 이러다 저 은퇴할 때까지 내내 여기에 매달리는 거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드는 중이긴 합니다만. 정황만 들어오고 현장은 잡아내기가 쉽지 않네요. 사라 씨한테는 미안하다고 전해주세요."

은엽은 농담과 진담을 반반씩 섞어 대꾸한 후 서랍을 열고 야외 조사에 필요한 물품 이것저것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 동안 후배는 커피가 담긴 컵을 입에 가져가며 종알종알 말을 잇는다.

"신 플라스마단 사건은 조만간 종결이 날 것 같으니까요, 그거 끝나면 저도 합류할게요. 솔직히 선배님이 혼자서 몇 사람 분을 해내고 계신데, 심지어 복귀하시고 나서 휴가 한 번도 안 쓰셨는데 그러다 훅 가실까 봐 겁난다구요. 동생 분이 뭐라고 안 하세요…?"

후배는 자기가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손전등의 불이 제대로 들어오는 지 확인하고 있던 은엽은 그 말에 불현듯 웃음을 짓고 말았다. '저 아저씨가 세월을 피하기는 커녕 고스란히 맞고 있다'며 라이브캐스터 화면 너머로 걱정 겸 구박을 마구 쏘아 보내던 동생의 목소리가 다시금 귓가에 아른거리는 참이다.

"아직 별 말은 없었네요. 휴가야 여유가 생기면 자연스레 쓰게 될 테니 걱정 마시고요."

"아니, 여유 챙기라고 휴가가 있는 거잖아요… …?"

후배는 황당한 나머지 커피를 머금었던 것도 까먹고 입을 딱 벌렸고, 은엽은 태연자약한 표정으로 서랍에서 꺼낸 물티슈를 그에게 건넸다.

"이런 건 행동이 빠를수록 확인하기 용이하겠죠. 길 안내는 제 루카리오가 맡아줄 테니 후딱 다녀오겠습니다. 일러줘서 고마워요, 에단 씨."

"선배님 부탁이라서 거절하지도 못하는데, 케이스 가가져올 때마다 죄짓는 느낌 드는 후배의 고충도 알아주세요. 무슨 일 생기면 꼭 연락하시구요."

후배는 셔츠에 흘린 커피를 분주히 닦아내며 투덜거렸다. 은엽은 피식 웃으며 알았다고 답하곤 외투의 소매에 팔을 꿰어 입는다.

후배가 보여주는 걱정도 얼마든지 이해할 만한 맥락이었으나, 아무리 증원을 요청해도 상부에서는 이 정도 인원이면 아직 충분하다고 버티는 실상인데 그럼 어쩌면 좋을 지 모르겠다. 은엽은 머리 한 구석이 지끈거리는 까닭이 실내에 너무 오랫동안 갇혀있었기 때문이라고 지레짐작하며, 다른 요원들이 분주히 돌아다니는 복도를 지나서 승강기 스위치를 눌렀다.



석양이 가라앉는 숲은 쓸쓸하고 삭막한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겨울의 메마른 공기에 숨이 죽은 풀이 발에 밟힐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힘없이 뭉개졌다. 은엽은 허공에 흩어지는 숨결을 잠깐 응시하다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숲으로 들어서는 길목에서부터 이어져 온 나무들은 깊은 곳으로 향할수록 점차 빼곡해져 마치 하나의 거대한 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는 큰 시내가 숲을 가로질러 흐르는 가운데 살얼음만 간신히 끼어있는 수면 아래로 콘치와 배쓰나이들이 평화로이 잠들어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은엽은 루카리오를 옆에 대동한 채로 낡은 다리를 조심조심 건너가며 외투를 여몄다. 이제 완전히 날이 저물면 저 시냇물도 더 두껍게 얼어붙기 시작할 테고, 겨울이 깊어가는 동안 무럭무럭 자라난 추위는 더 많은 숨을 죽여놓을 것이다.

은엽의 입가에서 후우, 하는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그는 겨울 공기에 노출되어 까슬까슬해진 뺨을 장갑 낀 손으로 문지르다 앞의 오솔길 너머 숲속을 열심히 주시하고 있는 루카리오에게 귀띔했다.

"그 두 마리 외에도 어떤 포켓몬이 또 있을 지 모르니 주의하도록 하자."

루카리오는 충실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트레이너의 앞으로 나서서 눈을 감는다. 은엽은 거리낌 없이 앞으로 쭉쭉 걸어 나가는 루카리오의 뒤를 따르며 머릿속을 비워냈다. 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정리하는 그로서는 무념무상히 걷는 게 익숙하지 않았지만 파트너의 일을 방해하지 않으려면 별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은엽은 기묘하게 꼬여 들어가는 어두컴컴한 흙길을 손전등의 불빛으로 착실히 밝히는 한편으로 파동을 감지하는 루카리오를 흉내 내듯 오감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미혹의 숲 전체에 내려앉은 고요는 그 안에 침입해 들어온 외부인들에게 도무지 떨쳐낼 수 없을 것 같은 긴장감을 주었다. 은엽은 근 10분 동안 풀숲을 지나오는 내내 야생 포켓몬들을 마주쳐본 일이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불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제아무리 월동기라고 해도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없을 텐데, 은엽은 조금씩 초조해지려고 하는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며 묵혀두었던 가능성을 하나씩 재고하기 시작했다. 그 문제의 포켓몬들이 이 근방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게 아니라면 누군가가 이 곳의 야생 포켓몬들을 싹 포획해 갔다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정체불명의 무언가가 이 장소를 지나는 이들로 하여금 아무도 없다는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거나, …

어떤 것을 스치듯 떠올린 은엽이 부지불식간에 작은 탄성을 내뱉는 순간 루카리오가 이빨 사이로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들의 왼편에 무성한 풀숲 너머에서 무언가가 날카롭게 번쩍이기를 찰나, 은엽은 앞으로 내딛던 발자국을 빠르게 걷어내며 지시를 남겼다.

"파동탄으로 가로막아!"

은엽의 코 앞을 쌩하니 스쳐 지나간 푸른 구체가 이쪽으로 맹렬히 쏘아져 오던 냉동빔과 타이밍 좋게 맞부딪치며 쩡 하는 기이한 굉음을 만들어냈다. 그는 어깨에 묻은 얼음 가루를 빠르게 털어내고는 공격이 날아온 방향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루카리오가 서둘러 트레이너의 앞으로 다가와 서서 어둠 너머의 적을 경계했다. 방금 전의 소란은 꿈속의 일이었다는 마냥, 숲속은 다시금 정적을 되찾고 있었다.

은엽은 루카리오의 귀가 불안하게 움직이는 모양을 지켜보며 나직이 침음했다. 루카리오의 통찰과 그 트레이너의 직감에 힘을 실어주듯, 이번에는 사방에서 술렁거리는 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이건 좀 좋지 않은데…."

경계 태세로 조사를 한다는 게 그만 적진 한가운데로 걸어들어온 꼴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이 이상으로 날아오는 공격은 없다는 것일까. 누군가의 지시로 공격을 가한 것인지, 아니면 자의로 습격을 해온 것인지 알 수 없어서 아쉬운 감정이 들 무렵, 그때까지 그늘 속에 숨어있었던 포켓몬들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정면에서 걸어 나온 포푸니라가 호전적인 태도로 손톱을 치켜세우며 이쪽을 노리는 동안, 좌측에서 나타난 그라에나는 등털을 거칠게 곤두세우며 숨죽여 으르렁댔다. 마치 사냥감을 궁지에 몰아넣고 어떻게 끝장을 낼 지 궁리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은엽은 조용히 허리춤의 다른 몬스터볼에 손을 가져다 대면서도 고민에 잠겨 들었다. 힘으로 어떻게 밀어붙일 수는 있겠지만 행동에 옮기기가 탐탁지 않았다. 이들이 보이는 행동 양상은 야생의 그것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저 포켓몬들에게 진정으로 해를 가할 의도가 있었다면 목이 진작 손톱에 베이거나 이빨에 깨물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저 둘은 일정 거리 이내로 더 접근하지 않고 있다. 포켓몬들이 어느 정도 자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훈련을 시킨, 실력이 우수한 트레이너가 근처에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예전 같았으면 복잡하게 따지지 않고 곧바로 싸움에 뛰어들었을 텐데. 은엽은 추위와 긴장으로 굳은 어깨근육을 억지로 움직여 루카리오를 물러서게 만들고 제 주변을 에워싼 포켓몬들을 쳐다보았다. 안광을 희번득이던 포푸니라와 그라에나는 자기들 앞에 선 인간이 대항할 기색을 보이지 않자 서로의 눈치를 보는 듯했다. 은엽은 내심 피로 섞인 한숨을 쉬고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제게 뭔가 원하시는 바가 있습니까.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저는 여러분께 해를 가할 생각이 없으니까요."

낮지만 힘 있는 목소리가 침묵하는 수풀 사이를 울리고 지나갔다.

그 음성에 화들짝 놀라기라도 하는 듯 숲의 모든 배경이 어지럽게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바람은 불지 않는데도 한바탕 광풍이 휘몰아치는 것 같은 착시 현상 속에서, 은엽과 루카리오는 자신들 눈앞에 서 있던 거대한 나무가 붉은 갈기를 지닌 요괴여우 포켓몬으로 변해가는 광경을 숨죽여 지켜보았다.



앱솔 뷔어는 근래 들어 생애 최대의 우울을 겪고 있는 중이었다.

그라에나 녀석이 귀찮게 구는 것과는 차원이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사실 우울한 걸 따지자면 그 녀석도 만만찮게 축 처져 있었다. 이 식구 전체가 다 그런 분위기였고, 이 낯선 장소에서 보내는 하루하루는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주인이 허약해진 상태에서 뷔어에게는 모든 것이 전부 어두워 보이기만 했다. 재앙을 감지하는 능력이 이때는 제대로 빛을 내지 못하고 있었는데, 제가 겪고 있는 현실 자체가 재앙이었기 때문에 무엇을 따로 골라내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그나마 단 한 가지 직감한 바가 있었다. '우리는 얼마나 될 지 모르는 시간을 타고 흘러내려 온 듯하다'는 사실을.

미약하게 일렁거리는 모닥불을 뚫어져라 응시하던 뷔어는 제 곁의 두터운 모포 덩어리에 바싹 붙어 앉았다. 그 주변으로는 바이엘과 드라인이 함께 숲 곳곳에서 긁어모아온 열매의 속들이 뒹굴고 있었다. 겨울철이라 숲속에서 열매를 찾는 게 상당히 어려웠지만, 바이엘과 드라인은 대담한 성격의 소유자들답게 이 문제를 아주 대담한 방식으로 해결해버렸다. 드라인이 냄새를 맡아서 근방을 지나가는 누군가를 탐색하면 바이엘은 포푸니라의 사냥 능력을 십분 활용해서 희생양이 가지고 있는 식량을 탈취해오곤 했던 것이다.

그들은 몸을 따뜻하게 만들어 줄 모포라든지 상처를 치료하는 데 쓸 붕대 따위를 겸사겸사 얻어오기도 했는데, 물론, 아인스는 이런 방식을 몹시 싫어했다. 앙심을 품은 인간이 쫓아들어와서 해코지를 하면 어떡하느냐고. 뷔어는 '행인들의 인상착의가 언젠가 거대한 나무 주변에서 마주했던 사람들처럼 특이했더라'는 증언으로 제 직감이 맞아떨어졌다고 기뻐할 틈조차 갖지 못했다. 아인스에게 혼쭐이 난 두 녀석은 감히 리더에게 대들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막내인 뷔어에게 괜히 심술을 부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미지의 힘에 의해 이 숲으로 이끌려 들어온 이후, 악의 마수들 사이에서는 앞으로의 생존에 대한 치열한 토론이 시시때때로 벌어지기 일쑤였다. 누군가를 찾아가 도움을 청하는 방법도 생각해봤으나 그런 의견은 금방 묵살되고 말았다. 다른 인간들에게 도움을 청하기에는 모두의 마음속에 불신이 뿌리 깊게 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인은 마수들의 고뇌를 듣고도 태연함을 유지했다. 그냥 어느 정도 회복을 한 다음에 민가로 내려가면 될 거라고 말하는데, 그는 이런 점에서 쓸데없이 낙천적이었다. 등에 생긴 깊은 상처가 이런 추위 속에서 순탄히 회복되기를 바란다니 어불성설이다. 아인스가 우려했던 대로 주인은 시간이 지나도 제자리에서 일어나기는커녕 오히려 시름시름 앓아눕게 되었고, 그런 주인의 모습을 보며 고민을 거듭하던 아인스는 오늘 밤 결국 제 아래 두 마리 마수들을 데리고 어디론가로 사라져 버렸다. 형제들이 무얼 하러 갔는지 신경 쓰기 지쳐버린 뷔어는 여느 때처럼 주인의 곁에서 보초를 서는 역할을 맡는다.

앱솔의 목 언저리를 쓰다듬어오는 손길이 실낱같았다. 복슬복슬한 털 속으로 들어오는 손이 차디차다. 뷔어는 애달픈 울음소리를 내며 주인의 품 안에 더욱 깊숙하게 파고들었다. 겨울 공기 때문에 체온도 떨어지는 것 같아서 제 털복숭이 몸뚱아리를 있는 대로 주인에게 내어주고자 했다. 여전히 짙게 풍기는 혈향이 영 불안스럽기만 했다.

뷔어는 일전에 벌어졌던 일들을 차근히 곱씹어보았다. 어쩌다 일이 이 지경이 되어버렸는지, 이것도 따지고 보면 전부 인간 때문이었는데. 원래 살던 땅에서 남쪽으로 멀리 떨어진 지역까지 내려오는 동안 내내 뒤쫓아오던 그 넌덜머리 나는 인간들을 겨우 떨어뜨려 놓은 이후로도 잊을 만한 때가 되면 어김없이 또 다른 괴한의 습격이 찾아오곤 했다. 주인은 그냥 운 나쁘게 마주친 도적일 뿐이라고 했지만, 뷔어는 그들의 체취가 낯설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더랬다. 냄새를 맡는 데 대해서라면 틀릴 일이 거의 없는 드라인이 뷔어의 의견에 힘을 실어주었지만 주인은 그 의미를 한사코 부정하기만 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자면 주인은 이미 전말을 파악하고 있었음에도 진실을 외면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지금 있는 장소보다도 훨씬 더 울창한 숲속에서 괴한들과 정면으로 맞닥뜨리고 사력을 다한 전투가 벌어지기 한창이었을 무렵, 뷔어는 주인의 죽음을 '다시 한번 더' 예지하고 말았다. 그의 주인은 강력한 힘을 소유한 인간이었지만, 지형의 불리함과 완벽한 수적열세의 상황은 그런 힘을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렸다.

칼날을 쥐고 주인을 향해 달려드는 자들에게서 목도했던, 살의로 번들거리는 그 흰자위들이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그들'은 어째서 주인을 죽이려고 했던걸까?
그 순간에 신묘한 마수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뷔어는 시야가 캄캄해져 이 이상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이미 지나쳐 온 일이었고, 자신의 예지가 운 좋게 빗나가기는 했지만, 뷔어는 그 순간을 떠올릴 때마다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듯한 감각에 시달려야 했다. 그런 후에는 제 주인을 지켜내지 못할 뻔했다는 자괴감이 반드시 찾아와서, 뷔어는 늘어날 대로 늘어난 신경이 제 속을 나날이 파먹고 들어가는 것을 고스란히 느끼고 있었다. 뷔어의 어지러운 심정을 읽어낸 주인은 갈기 안쪽에 손을 집어넣고 쓰다듬어준다. 다른 때 같았으면 아무리 언짢았던 기분도 금방 풀릴 만한 스킨십이었겠지만….

"…걱정 마. 아프지 않아."

주인은 거짓말을 정말 못했다.

이미 몇 번인가 붕대를 갈았는데도 짙은 색 액체가 흥건하게 묻어나오고, 갈수록 숨을 쉬는 것마저 어려워하는 게 눈에 빤히 보이는데, 자기가 아프다는 사실은 어떻게든 감추려고 드는 저 고집이 영 못마땅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아픈 사람에게 화를 낼 수는 없었는지라 뷔어는 그저 기운없는 동작으로 주인의 옆구리에 고개를 기대기만 했을 뿐이다. 주인에게 상처를 입혔던 괴한들은 시간에 밀려 일찍이 스러졌을 테니, 뷔어는 화풀이를 할 대상을 잃은 자신의 처지가 괜히 분해져서 얼어붙은 땅을 발톱으로 긁어대기 시작했다.

주인은 그의 앞발을 붙잡아 진정시키며 조용조용히 목소리를 꺼낸다.

"너희가 무사한 것만으로도 나는 얼마든지 버틸 수 있어. 너희가 내 곁에 남아있다는 사실이 내게 있어서는 얼마 안 되는 일생의 행운일 거야."

그 말은 뷔어로 하여금 겁에 덜컥 질리도록 만들고야 말았다. 그런 말은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나 하라고, 단 둘이서만 남아있는 자리에서 금방이라도 꺼질 듯한 목소리로 그런 내용을 말하면 나는 마치 유언을 듣는 기분이라고, 뷔어는 아연한 심정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주인을 바라보았다. 파리한 안색에 떠오르는 미소가 지독히도 쓰라렸다. 실제로 그는 의식을 잃어가고 있었다...

바스락, 하고 수풀이 흔들리는 소리.

뷔어는 미처 인지하지도 못했던 인기척에 소스라치게 놀라 털을 잔뜩 곤두세웠다. 가까운 곳으로부터 발소리가 들려오고 있었고, 뷔어는 주인의 앞을 가로막고 서서 위협하는 소리를 흘리기 시작했다. 흐르는 공기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아보면 익숙한 냄새들 가운데 낯선 냄새가 섞여들어온다.

이건 뭐지. 내가 아는 냄새가 맞긴 맞는데, 도대체 누굴 데려온 거지.

뷔어는 가지가 앙상하게 우거진 수풀 너머를 뚫어져라 응시한다.

형제들의 뒤로 처음 보는 인간과 루카리오가 따라 걸어오고 있었다.



너도밤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찬 숲속은 지독히도 어두웠다. 등에 깊이 새겨진 상처가 지독한 통각을 남기고 있었다.

리안은 지친 기색으로 시선을 들어 올려 제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전신에 검은 로브를 두르고 복면으로 꼼꼼하게 얼굴을 덮어씌운 모습이 아주 전형적인 괴한의 용모다. 상대가 들고 있는 칼날에 살의가 찌꺼기처럼 덕지덕지 달라붙어서 둔하고도 섬찟한 빛을 내었다.

도망 생활은 이제 끝났다고, 그가 말했다. 그러니까 이 이상 남들 번거롭게 만드는 헛짓거리 말고 그만 죽어달라고. 어쩐지 익숙하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리안은 그가 뱉는 건조한 문장에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했지만, 무의식이 입을 단단히 틀어막아서 어떤 목소리도 내뱉을 수 없었다.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으며, 조련사를 지키기 위해 맹렬히 맞서싸우던 마수들은 차가운 시체가 된 채로 뭉근한 피웅덩이를 만들어내고, 홀로 덩그러니 남겨진 조련사는 제가 만들어낸 핏물 한가운데 무력하게 앉아있다. 리안은 이런 그림 속에서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까닭을 강제적인 침묵 탓으로 돌렸다. '이건 분명 꿈이니까,' 그는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한기와 열기 속에서 몸을 떨면서도 혼잣말을 꾸준히 삼키고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목석같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너 같은 도망자의 바람이 이루어질 일은 없을 거라고. 자신이 사랑해 마지않던 사람의 목소리를 흉내 냈던걸로 기억한다. 현실에서는 분명히 어설픈 감이 있었는데 꿈으로 재현된 기억 속에서는 어째선지 자연스레 원주인의 목소리로 재생된다. "프루시안 아가씨께서 전해달라 하시더군. '당신을 버리고 떠난 누이를 기다려줘야 할 의미는 없으니 객사하라'고."

리안은 정작 이때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기억할 수 없었다.

이렇게까지 잔인할 필요는 없는데도!
몸서리치고 싶었지만 몸이 묶인 듯한 착각 탓에 그러질 못했다.

끊임없이 겹쳐지는 절망감 때문에 그 애가 정말 그런 말을 했는지, 나는 여기서 죽어 마땅한 것인지 의구심을 품는 것마저 포기해버렸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 꿈은 과거의 일을 단순히 되감기한다기보다는 불필요한 확신을 심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꿈과 현실의 경계를 걷는 동안의 모호한 감각은 길 위에 체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판단력을 흐물흐물하게 녹여내기만 한다. 이대로 숨이 끊어져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쪽과 끝까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쪽, 둘 중 어느 게 스스로에게 이득인지 분간하기 어려워지는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면 간신히 남아있던 자각성마저 흔적 없이 증발해 버리고 말 것이다.

검날이 갑자기 횃불로 바뀌었고, 괴한은 복면 너머에서 만족스럽게 눈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갈등하느라 기력을 소모하느니 차라리 불에 타서 고통스럽게 죽어가렴.

리안은 아무런 저항 없이 웃으면서 흐느꼈다.
머리 위에 던져진 불이 기름 먹인 허수아비를 태우듯이 전신을 뒤덮는다.

──숲그림자 너머로부터 홀연히 나타난 이가 그의 손을 붙잡고 이끌어당기지 않았다면, 그렇게 불꽃 속에서 영겁동안 타올랐을 테다.

짙은 푸른색이 제게 시선을 맞춰올 무렵, 리안은 알 수 없는 충격에 사로잡혀 손을 놓치고 기어코 꿈의 경계면으로부터 추락하고 말았다.



땀으로 흥건하게 젖은 침상 위에서 눈을 뜨자마자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목소리를 한껏 삭힌 신음을 내뱉는 것이었다. 숨을 쉴 때마다 등이 기분 나쁘게 욱신거리고 가슴 안쪽에서도 저릿한 통각이 타고 올라와서 전신의 신경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었다. 상반신이 붕대에 감싸인 채로 고정되어 있는 탓에 몸을 비틀지도 웅크리지도 못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힘없이 누워서 하염없이 천장을 올려다보는 게 전부였다. 다행인지는 몰라도, 그의 머릿속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던 악몽의 내용은 통증에 시달리는 동안에 안개처럼 깨끗이 흩어져버렸다.

리안은 자신이 처한 상황낯선 장소에 꼼짝없이 누워있는 상황을 가능한 한 객관적으로 받아들이려 애쓰는 데 한참의 시간을 소모했다. 흰색과 연두색의 벽지로 도배된 이 작은 공간에는 난생처음 보는 기구들이 제각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환자의 상태를 확인하러 온 간호사가 언질을 주지 않았다면 리안은 제 손등에 꽂힌 바늘들을 별 생각 없이 뽑아내 버렸을 것이다. 진통제를 더 넣어드리겠다, 조금만 있으면 의사선생님이 회진하러 오실 테니 기다려 달라, 아직 상태가 완전히 나아진 것도 아니니 안정을 더 취하셔야 한다고, 리안은 간호사가 타이르는 말을 듣고는─의미를 제대로 알 수 없었지만─그러겠노라 얌전하게 답할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의사가 찾아와서 해 주는 설명은 리안의 현실에 대한 저항 의지를 훌륭하게 꺾어내주었다.

"환자분께서 여기 오셨을 당시 등의 상처가 꽤 깊었는데 갈비뼈에 금까지 가 있었습니다. 지혈은 어찌어찌 되었던 것 같지만 상처가 벌어지거나 금이 퍼지면 더 위험해질 수 있었고요. 빈혈 증상도 있는데 영양실조까지 앓고 계셨어요. 신고자 분께서 환자 분을 제때 발견하지 못하셨더라면 큰일 났을 거예요." 의사는 잔뜩 주눅이 든 리안을 두고 차트를 넘겨가며 차분하게 설명을 이었다.

"다행히 상처는 많이 상하진 않았는데 봉합할 때 들어간 바늘 수가 워낙에 많아서 흉터가 남을 수 있어요. 갈비뼈 금 간 거 잘 붙으려면 행동을 최대한 조심히 유지하셔야만 하고요. 앞으로 일주일 동안 입원해 계시면서 회복 상태를 지켜보도록 합시다."

쉴 새 없이 휘몰아치는 정보값을 꾸역꾸역 받아내느라 기력이 쇠해진 리안은 자신의 궁금증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도 못하고 의사와 간호사를 떠나보내야 했다. 병실 안은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고요해졌다. 리안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어서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조차 없었다.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해보자면, 여기는 제가 본래 속해 있던 시간대가 아니기에 가문에서 보낸 자객들에게 시달릴 일도 더 없을 터였다. 리안은 자신과 마수들을 미래로 이끌고 온 존재를 분명히 인지할 수 있었다. 싱그럽고 따스한 파동이 유독 기억에 남았는데, 어쩐지 어릴 적에 이야기꾼에게서 들었던 숲의 신에 대한 전설을 저절로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 존재가 어떤 의도로 자기들을 살려주었는지는 짐작할 수 없었지만 기적이 실존하긴 한다는 두 번째 증거가 되어주기도 했으니, 앞으로의 삶에 조금이나마 낙관적인 태도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도 비관적인 사고관은 어김없이 빛을 발했다.

하나, 곁을 떠나지 않으려 하던 마수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서 불안하고 우울했으며, 둘, 이 시간대의 문화에 완전히 적응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 지 가늠이 되질 않아서 한없이 착잡해지기만 했다.

결국 리안은 갑갑하기만 한 고뇌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다른 주제, 즉 제가 정신을 잃기 직전의 상황을 떠올려보기 시작했다.

까무러치기 전에 어떤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 것 까지는 기억하는데… 그 남자는 자기 자신을 경찰이라고 소개하며, '당신을 돕기 위해 찾아왔다'고 말했던 것 같다. 목소리의 울림이 좋아 어렴풋이 뇌리에 박힌 듯했는데, 기억에 안개가 낀 탓에 그 외의 대화가 제대로 기억나지 않아서 금방 실망하게 되었다. 하지만 어쨌든 그의 도움 덕택에 자신이 지금 무사히 여기 누워있다는 결론만큼은 새삼스레 도출해낼 수 있었다. 그렇지만 감사 인사도 못했는데, 무엇보다 내 마수들의 행적을 알고 있을 사람은 그 밖에 없을 텐데.

시기적절한 때에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지 않았더라면 리안은 자신이 손수 쌓아 올리는 감정의 늪에 빠져들고 말았을 것이다. 귀에 익은 목소리가 갈고리처럼 리안의 주의를 낚아채서 수면 바깥으로 끌어낸다.

"…아! 마침 일어나 계셨군요. 컨디션은 이제 좀 괜찮으십니까?"

열린 문 사이로 빼꼼히 들이밀어진 얼굴을 본 리안은 튀어오를 듯이 놀랐다가 우거지상이 되어서 가슴께를 부여잡았다. 놀란 이어롤 눈을 하고 안으로 걸어들어온 남자가 그를 부축해주려 했으나, 리안은 괜찮다며 남자의 손을 밀어내고 간신히 침대 위에 앉은 자세를 취했다. 그때 하얗고 커다란 털 뭉치가 휙 뛰쳐들어와 침대를 향해 맹렬히 달려들었고, 리안은 무의식적으로 양팔을 벌려내며 환희의 탄성을 질렀다. 가슴 속이 또 쑤셔왔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뷔어!"

침대를 뒤집을 기세로 뛰어 들어오던 앱솔은 난간 앞에 겨우 멈춰서서 주인의 품속에 머리를 마구 들이밀고 애교를 부리기 시작한다. 리안은 앱솔의 정신없는 응석을 받는 동안에도 남자에게 감사를 표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누군진 모르겠지만… 덕분에 살았어. 고마워."

"천만에요, 제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오히려 무사히 일어나주신 게 감사할 따름이죠."

자신의 이름은 '은엽'이며, 미혹의 숲에서 당신을 발견한 사람이라고 간단히 자기소개를 한 그는 별안간 눈썹을 둥글게 휘어 보이는 것이다. 리안은 눈을 깜빡이며 남자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깊고 푸른 눈이 어쩐지 낯익은 느낌이다 싶었다. 은엽은 리안의 얼굴을 마주 보더니 작은 웃음소리를 냈다.

"묻고 싶으신 게 많아 보이는 얼굴이네요. 그러잖아도 제 쪽에서 말씀드리려 한 것도 있었는데… 일단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리안이라고 부르면 돼."

리안은 엉겁결에 제 애칭으로 쓰이곤 했던 이름을 내뱉고 나서도 별 위화감을 느끼지 못한 채로 앱솔의 목을 멍하니 쓰다듬는다.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헷갈리는 기분을 느끼는 건 비단 그 뿐만이 아닌 듯했다. 앱솔은 이 공간에 리안 말고 다른 인간이 있다는 사실조차 까먹은 모양이었다. 그토록 죽을상이던 마수의 얼굴이 이제야 활짝 폈구나 싶어 리안은 복슬복슬한 털 속에 가만히 얼굴을 묻었다. 흐뭇함 섞인 목소리가 곁에서 들려왔다.

"그 친구들이 아니었으면 리안 씨를 제때 도와드릴 수 없었을 겁니다. 아, 다른 포켓몬들은 아직 미혹의 숲에 머무르고 있는 중이고요. 조로아크의 일루전이 일품이었습니다만… 앱솔이 당신을 제일 보고 싶어 하는 것 같길래 멋대로 데려와 버렸네요."

리안은 그의 말을 듣고 어색하게 고개를 들었다. 그 동안 궁금해서 미칠 것 같았던 마수들의 안부를 듣게 되니 마음속을 가득 메웠던 불안감이 눈 녹듯 사라진 한편 다른 의문이 퐁퐁 솟아났다.

아인스가 가림막 역할을 제대로 하는 중인가 본데, 예전 떠돌이 생활때도 종종 그런 일을 했었으니 은엽의 말은 어느 정도 납득이 갔다. 하지만 다른 시각에서 분석해본다면 주인 외 다른 인간들에게는 쉽사리 신뢰를 주지 않는 자기 마수들이 이 미래인과는 원활하게 안면을 텄다는 이야기도 된다. 그 점만 생각해보아도 충분히 놀라웠는데, 그렇다면 자기와 마수들 사이의 애정 관계가 진하다는 사실을 금방 눈치채서 가장 가까이 붙어있던 앱솔을 여기로 데리고 온 걸까, 그리고 자신이 은연 중에 모르는 사람에게 경계심을 드러낼 수도 있는데, 이를 가라앉히고자 일부러 마수를 데려와 준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리안은 신기한 표정으로 은엽을 응시했다. 통찰력이 보통이 아닌 듯 하고, 사람이 좋아 보이는 것도 예사 성격이 아니다.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상념은 은엽이 넌지시 던져온 질문에 무참히 끊겨버렸다.

"리안 씨의 가족 분들께 연락을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연락처는 가지고 계신지요."

─가족, 그 두 글자가 뭐라고 아무 생각도 들지 않게 만드는지. 리안은 이제 완전히 흐릿해진 악몽 너머 과거의 일을 떠올리고는 은엽의 어깨 너머 허공으로 시선을 던지며 웅얼대듯 답했다.

"나한텐 가족 같은 거 없어."

화기애애하던 분위기는 리안의 무미건조한 음성에 조금씩 쇠해졌다. 짧은 침묵이 이어지더니 마침내는 '그렇군요.' 조용히 수긍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 속에 미안한 감정은 섞여 있을지언정 동정심 같은 것은 없었기 때문에 리안은 오히려 그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다음 질문이 매끄럽게 이어져 오는 게, 어쩌면 은엽이라는 사람은 이런 주제의 대화에 익숙한 것 같다는 생각마저 떠오른다.

"그렇다면 가깝게 지내시는 지인분들은요?"

리안은 이번에도 대답하기 직전에 입을 다물었다.

알고 있는 미래인들이야 몇 명 있긴 했지만 리안은 제 이야기를 타인에게 섣불리 밝힐 수 없었다. 일단, 자신이 그들과 동일한 시대에 있는지도 확신할 수 없었을 뿐더러 이 남자가 자신의 입으로 경찰이라고 밝힌 이상─리안은 일찍이 이 시대 문명에 대해 희박한 지식을 습득한 상태였기 때문에 '경찰'이라는 직업이 '왕성 경비대' 정도의 위상을 가졌다고만 인식하고 있었다─어떤 특정한 정보를 넘겨줌으로써 미래인들에게 무슨 폐가 갈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들 입장에서 보자면 리안은 어떤 적당한 신분도 가지지 못한 완벽한 외지인이었고, 그는 이런 처지 때문에 자신의 입지가 여러모로 불리하게 작용하게 될 것을 계산한 참이었다. 자신을 챙기기도 벅찰 텐데 다른 사람들까지 곤란하게 만들어버리는 건 리안으로서는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었다.

리안이 생각에 잠기느라 뜻하지 않게 침묵을 길게 유지하고 있는 사이에도 은엽은 그의 대답을 참을성있게 기다렸다. 끝내 리안의 입에서 흘러나온 대답은 부정형이다.

"마찬가지로, 없어."

대답에 비해 고민하는 시간이 길었다. 리안은 상대방이 거짓말을 금방 눈치챌 것이라고 여기며 시선을 떨구었다. 이번에는 은엽 쪽에서 아무런 응답을 들려주지 않아, 그다음으로 이어져 나오는 리안의 목소리는 자연스레 어색해진 톤이었다.

"…여기 사람들이 말하는 걸 들었어. 며칠 동안 이 곳에 머무르면서 경과를 지켜봐야 한다고…."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으려니 리안은 마음 한구석에서 저를 괴롭히고 있던 정체불명의 체증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이제부터 어떻게 하면 좋을 지 감이 하나도 잡히지 않았다. 회복이야 잘 하면 되겠지만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자신이 이 세계에서 발 디딜 곳을 찾아야 하는데 방도를 도무지 가늠할 수가 없다. 미래로 돌아오고 싶다는 바람은 수백 번이나 떠올렸으면서도 진짜로 돌아올 수 있으리란 생각은 감히 하지도 못했는데, 정작 정말로 미래에 떨어지고 나자마자 앞날에 대한 불확실성이 리안이 품고 있는 희망마저 가차 없이 동강내고 있었던 것이다.

너무나도 커다란 행운을 바란 나머지 이를 감당해 내기는커녕 오히려 짓눌려버리는 게 아닐까 생각하는 동안 앱솔의 털결을 쓰다듬는 리안의 손가락들이 차츰 굳어갔다.

잔뜩 혼탁해져 있던 리안의 정신을 문득 일깨운 것은 어김없이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자, 이렇게 하는 건 어떨까요. 리안 씨가 여기에 입원해 있는 동안 제가 당신의 보호자 역할을 하도록 하죠."

리안은 숨을 쉬는 것도 잊은 채로 고개를 쳐들었다. 보호자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기분이 몹시 묘해졌는데, 자존심이 상하는 여부를 한참 떠나서 자신에게 적용하기에는 한참 낯설었기 때문이었다. 누군가에게서 보호를 받아볼 일이 좀처럼 없던 그에게는 전혀 생소한 개념이었다. '그 보호자라는 게 대체 뭘 하는 역할인데?'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음에도 끝끝내 입밖으로 꺼내지 않은 까닭은 온전히 제 머릿속을 잔잔히 울리는 혼란 때문이었다.

주인이 심리적으로 고장 난 낌새를 눈치챘는지 그의 무릎에 가만히 누웠던 앱솔이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둘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은엽은 자신의 두 손을 마주 깍지끼고 상체를 기울여온다.

"리안 씨가 절 경계하고 계시다는 걸 이해하고 있습니다. 애초에 면식조차 모르는 사람이 이런 제안을 한다는 게 당황스럽고 불쾌하게 느껴지실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지금 리안 씨의 처지를 고려해보자면, 이런 낯선 환경에서 당신께 도움을 줄 만한 사람은 감히 저라고 자신할 수 있겠습니다."

리안은 그의 말을 듣는 동안 멈췄던 숨을 천천히 내쉬다가 마지막 문장에서 다시 멈추었다. 은엽은 상대가 자신의 말을 귀 기울여 듣고 있는 것을 인지한 듯이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곤란한 상황에 빠진 분들을 도우라고 경찰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 역시, 당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는 상태인데다 리안 씨가 과거에 어떤 일을 겪으셨는지도 모르지만… 나중에 서로에 대해서 천천히 알아가면 될 테니 조급해할 문제는 아닙니다."

그가 조곤조곤 들려주는 내용을 정신없이 들으면서도 갈피를 좀처럼 잡지 못하고 있던 리안이 불쑥 되물었다.

"단순히 당신이 경찰이라서, 정말 그 이유 뿐이야?"

'초면인 사람에게 호의를 베푼 걸로도 모자라서 조건 없이 남을 돕겠다고?'

리안은 그가 이런 제안을 해 오는 의중을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간혹 대책없이 선량한 사람들이 있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대뜸 관계를 제안해오는 경우는 거의 없을 텐데.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게 아닐까 싶었지만 이 사람이 내비치는 감정 중에 적어도 거짓의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곤란한 상황을 타개해주겠다고 하니 이런 것도 어찌 보면 행운이라고 할 순 있겠지만, 숨겨진 목적이 있을 지 어떻게 알고.

은엽은 리안의 의심 섞인 시선에도 그저 선량한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뭐… 굳이 이유를 더 물으신다면, 제게는 당신 또래의 여동생이 있거든요. 그래서 그냥 지나치기가 더더욱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이 정도면 되겠냐고 눈짓으로 물어오는 은엽에게 리안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다가 한참 만에야 고개를 주억였다. 이렇게까지 말한다면 계속 의심을 하기도 미안해지고. 진심인 것처럼 느껴지니 이 사람을 믿을 수밖에 없겠다는 결론을 내려야 할 것 같았다. 대책없이 선량한 사람이 맞긴 한가 보다.

아직도 '보호자'라는 단어 때문에 머릿속 어딘가가 고장 난 듯한 기분으로, 리안은 어물어물하게 다른 말을 꺼냈다.

"…그럼 부탁이 있는데."

"네, 말씀해 주십시오."

부탁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은엽의 표정이 한층 더 밝아지는 걸 보고 리안은 고개를 의아하게 기울였다. 이 사람, 부탁 들어주는 걸 좋아하나. 일단 부탁을 한다고 손해를 볼 것 같지는 않으니, 리안은 자신의 몫을 챙길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내 마…, 음, 그러니까, 포... 포켓몬들. 나머지 아이들도 여기로 데려와 줄 수 있어?"

리안은 제 무릎 위에 머리를 대고 잠든 앱솔을 조금 더 강하게 끌어안으며 물었다.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다른 마수들을 한꺼번에 데려올 수 있을까 싶었지만, 아무래도 낯선 시대에서 조련사와 떨어져 지내는 동안 마수들에게 어떤 위험이 찾아올 지 걱정이 들었다. 미래인들이 소지하고 다니는 몬스터볼이 참 유용한 물건이라는 생각이 부쩍 늘어나는 순간이었다. 간절하고도 막연한 기분으로 은엽을 바라보던 리안은 그가 선뜻 고개를 끄덕여오는 바람에 긴장이 탁 풀려버리고 말았다.

"마침 병원 측에 양해를 구하려던 참이었습니다. 아무리 훈련이 잘 된 포켓몬이라도 트레이너와 멀리 떨어지게 되면 여러 위험에 쉽게 노출될 수 있으니까요. 오늘은 시간이 너무 늦었으니, 내일 리안 씨의 포켓몬들과 함께 다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순식간에 안심이 되는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표정이 한껏 풀렸다가 은엽에게 들킬세라 얼른 가다듬지만, 그래봤자 이미 몇 박자나 늦어서 상대방의 웃는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고, 리안은 겸연쩍어진 나머지 고개를 홱 돌리고는 '고마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감사의 말을 중얼거렸다. 때마침 문 너머 복도 쪽에서 면회 시간이 끝났다는 목소리가 들려왔고, 한시 빨리 이 무안한 상황에서 벗어나고팠던 리안은 숨통이 트이는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이건 제가 따로 챙겨둔 리안 씨 물건인데, 오늘 돌려드리고 가도록 할게요."

"아, 으응…."

리안은 종이가방을 엉거주춤한 동작으로 받아들곤 은엽을 올려다보았다. '내일 언제 올 거야?'라는 질문이 입천장에 들러붙었다. 뜻 모를 아쉬움이 들었지만 입 밖으로 선뜻 내긴 어려웠다.

은엽은 자리에서 일어나기 직전에 그에게 시선을 마주쳐 왔다. 푸른 눈동자가 고요한 미소를 틔워올린다.

"안심하시고 잘 회복하실 수 있기를 바라요, 리안 씨. 푹 주무시고,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리안은 멍하니 손을 흔들어 그를 배웅해준 후 약간 흐리멍덩해진 기분으로 가방을 열어보았다. 아마 숲에서 병원으로 옮겨져 오는 동안에 흘린 게 좀 있었던 모양이었다.

벌어진 틈 사이로 상쾌하고 풍부한 향이 올라와 후각을 덮치는 동안 앱솔의 잠을 방해하지 않도록 주의하며 숄을 꺼내고─숄의 상태는 자신이 기억하던 것보다 한층 보송보송하고 부드러웠는데, 향기 또한 여기서 나고 있었다. 이 사람, 내 물건에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가방을 뒤집어서 바닥에 있던 것들을 이불 위에 쏟았다. 네 개의 몬스터볼들이 먼저 굴러나오고, 그 다음에는 손바닥 크기보다도 작은 상자가 무릎 위에 툭 떨어져 내렸다. 몬스터볼이라. 원래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내심 필요로 했던 물건마저 챙겨넣어준 세심함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고민하는 일은 나중으로 미뤄두기로 했다. 호신용으로 지참했던 무기와 제 신분패는 이 시대로 날아오기 직전에 흘린 모양이었다.

그는 허전한 귓불을 느릿하게 매만져보고는 제 손아귀 속 상자를 천천히 열었다. 뚜껑 밑에서 모습을 드러낸 금빛 귀걸이는 여느 때보다도 초라해 보였다. 리안은 그 이유를 알 것 같은 기분에 저도 모르게 공허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쓸데없이 친절하네. 진짜 이상한 사람이다, 그치."

앱솔은 주인이 뺨을 어루만지는 것도 모르는 채 코 고는 소리를 낼 뿐이었다. 리안은 편한 자세로 앱솔을 고쳐안고는 그 몸뚱이 위에 숄을 넓게 펼쳐서 덮었다. 그리고는 향긋한 내음이 나는 숄에 얼굴을 묻고 조용히 울었다.

찌르는 듯한 가슴 통증 탓인지, 머릿속을 채우고 들어오는 향기 탓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주인을 진득하게 괴롭히는 감정 탓인지, 그는 숨이 막히는 까닭을 알 수 없었다.



"그 누구보다도 사람의 본성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해왔는데 그게 아니었나봐, 이제는 어떤 걸 믿어야 할 지 모르겠어. 누군가에게 기대를 건 만큼 돌아오는 상처가 너무 커서 이제는 나도 모르게 의심부터 하게 되는데, 타인이 주는 호의는 너무나도 달게 느껴져서 차마 내치지도 못하겠어. 인간처럼 살아보려고 했는데 인간이 무섭고 어려워. 그런데도 사람들한테 미련이 남아서 포기를 못하겠어. 정말 웃기지 않아?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고, 서로를 망가뜨리지 못해서 안달인데도, 그게 전부가 아니라서… 남의 본질을 읽어내려고 하면 다 괜찮은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어. 앞으론 어떻게 사람을 대해야 할 지 잘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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