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뭄의 끝

언제쯤이면 이 폭우가 그칠까요?

번외-에단의 시점

*Warning: 동물(포켓몬) 학대 묘사

3편에서 리안이 구조되어 병원에 실려간 후~은엽이 병원에 방문한 사이에 벌어진 일을 다루고 있습니다.

BGM



"가끔가다 보면요, 포켓몬들은 개체 하나하나가 무궁무진한 잠재력과 힘을 가지고 있는데도 어째서 인간을 지배하지 않는지 궁금해질 때가 있어요. 선배님도 그런 생각 종종 들지 않아요? 포켓몬에 비하면 하찮을 정도로 약한 동물인 인간이, 뭘 믿고 포켓몬들을 핍박하고 함부로 대하는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다니까요. 안 그래도 없는 인류애 떨어지게시리…"

"글쎄요… 여기 있는 사람들은 에단 씨와 비슷한 생각을 전부 적어도 한 번 이상씩은 해봤을 겁니다. 따지고 보면 참 서글픈 일이긴 하죠. 고작 이런 도구 하나로 포켓몬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강제할 수 있다니. 어쩌면 이게 인간의 오만을 부추긴 요소인지도 모르겠군요."

"누가 이런 걸 만들 생각을 했을까요… 참, 아주 옛날에는 몬스터볼도 없었을 거 아녜요? 그럼 옛날 사람들은 포켓몬과 어떤 방법으로 어떻게 관계를 쌓았으려나요…. 전설로 내려오는 얘기들을 보면 다들 어찌저찌 부대끼면서 살긴 했을 것 같은데."

"음… 사료를 뒤져보면 그에 대한 기록 몇 정도는 찾아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고대인을 불러다 앉혀놓고 옛날이야기를 해달라고 부탁할 순 없겠죠. 그나저나 에단 씨가 이런 주제의 이야기를 꺼내는 경우는 거의 처음인데. 무슨 일 있었나요?"

"그냥... 사라의 고민 들어주다 보니 저도 옮았나봐요."

"저런. 입사 초기라면 누구나 겪을 법한 고민이군요."

"그런 셈이죠…."

 


하나지방 빙결 사건의 뒤처리가 얼추 마무리되어 조금은 숨통이 트인 기분으로 늘어질 무렵이다. 플라스마단이라는 이름만 떠올려도 이제는 신물이 나올 것 같다고, 동료 요원들과 사이좋게 푸념을 터뜨리며 귀중한 휴식 시간을 한창 허비하고 있을 무렵에 조금 전 미혹의 숲으로 현장 조사를 나간 선배로부터 연락이 들어왔다. 내용인즉슨, '미혹의 숲에 갔다가 조난당한 민간인을 발견했다, 조난자를 병원까지 인도하는 동안 숲의 입구를 감시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에단은 뜻밖의 외근에 옳다구나 생각하며 선배가 있는 장소까지 한달음에 달려갔다. 구급차의 바퀴 자국이 선명하게 남은 숲길 위에서 처음 보는 앱솔을 대동하고 있던 선배는 에단에게 현장을 인계하며 다음의 두 가지 주의사항을 일러주었다.

"신원 불명의 포켓몬들 중에는 조로아크도 있는데, 지금 미혹의 숲에 들어가면 그 조로아크의 일루전에 속절없이 홀리게 될 테니 숲에 함부로 접근하지도 말고 외부인의 접근도 차단해주세요. 또, 이 장소에 강한 포켓몬이 출현했다는 소문을 듣고 좋지 않은 의도로 찾아오는 자들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만에 하나 그런 자들을 만났을 경우에는 대응을 해주시되, 필요하다면 본부에 지원을 요청하시거나 절 호출하세요. 단독행동이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요."

‘설마하니 이 밤중에 이런 외진 곳까지 누가 찾아오겠어?’하는 생각이 드는 한편으로는 일리 있는 내용이었다. 선배에게 귀띔을 들은 바로는 조난자가 이 앱솔을 비롯한 화제의 포켓몬들의 주인이라고 하였다.

“아니, 그럼 몬스터볼에 넣어서 병원에 같이 데려가면 될 일이잖아요?”

에단이 의아하게 지적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말문을 잃게 하는 종류의 무언가였다.

“그분은 전용 몬스터볼을 소지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남의 포켓몬들을 몬스터볼에 무작정 넣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더군다나 그 포켓몬들은 다른 인간들에 대한 경계심도 워낙 높아서 인간의 시설인 센터에서 보호를 받는다거나 몬스터볼에 들어가는 자체를 거부할 태도더군요. 만약을 기해 여분의 몬스터볼을 챙겨드릴 예정이긴 합니다만...”

“그 사람, 정식 트레이너가 맞긴 맞대요? 허가도 받지 않고 활동하는 사람 아녜요?”

선배의 근처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 앱솔을 빤히 바라보며 묻자니 녀석의 희번득이는 시선과 선배의 나긋한 목소리가 나란히 되돌아왔다.

“글쎄요, 제가 잠깐이나마 지켜본 바로는 최소 엘리트급 역량이긴 했습니다만 당신이 염려하는 문제는 그런 게 아닐 테죠. 제가 잘 확인해 볼 테니 걱정은 마세요. 아무튼 에단 씨, 제가 이 앱솔을 원주인께 바래다주고 오는 동안 시간 벌이 좀 부탁합니다. 있다가 다시 돌아와서 저기 남아있는 친구들을 설득해보긴 할 텐데, 제가 자리를 비운 동안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요.”

에단은 잠시 뚱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짐짓 히죽이 웃어 보였다.

“별일 일어날 건덕지도 없게끔 잘 지키고 있을 테니 얼른 다녀오세요.”

“에단 씨 꽤 기뻐보여요. 집 잘 지켜주세요.”

에단은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체하며 어깨를 으쓱여 보이고는 그들을 배웅해주었다. 선배의 SUV 차량이 후미등의 붉은 불빛을 아스라이 남기고 비포장도로 너머로 사라진 이후에는 사위가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바야흐로 스산해지는 분위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에단은 평온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자차 앞좌석에 앉아 바깥 풍경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감상이라고 해 봤자 앙상마른 나무와 시들어버린 관목들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사건과 뒷처리 업무에 치여 사는 동안에는 이런 자연 구경도 감지덕지한 수준이었다. "으음, 사라도 콧바람 좀 쐬어줘야 하는데. 현장에 나가지 않으려 하니 걱정이네." 감식반에 갇혀 있을 소꿉친구를 떠올리며 소리내서 중얼거려 본 에단은 피식 새는 웃음을 지었다. 있다 복귀하기 전에 소꿉친구가 좋아하는 간식 사들고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을 마지막으로 창밖의 풍경에 다시 신경을 기울인다.

어두컴컴한 장소 안에서 홀로 있으려니 시간이 몇 배는 느리게 흘러가는 듯한 착각도 슬슬 들 때쯤이다. 후방의 비포장도로 방향에서 차량의 전조등 불빛이 희미하게 쬐어들어오는 게 보여 차 문을 벌컥 열어젖히려던 에단은 순간적으로 행동을 굳혔다.

'선배가 돌아오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았을 텐데, 이 한밤중에 선배 말고 달리 들어올 사람이 있던가? 더욱이 이 숲은 밤 산책을 즐기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곳인데.'

설마가 사람을 잡는다고 했던가, 가끔 괴상하리만치 예민해지는 신경이 이럴 때 도움이 된다는 게 썩 다행이긴 했다.

에단은 차에서 내리기 직전 선배에게 무전을 친 뒤, 근처의 수풀 속에 어둠대신과 함께 몸을 숨기고 방문자의 동향을 지켜보았다. 다행히 선배는 병원을 출발한 지 좀 되었다고 하니 조금만 더 버티기만 하면 될 것 같았다.

기척이 온 곳에서는 한참 동안 반응이 없었다가, 몬스터볼의 빛이 만들어 낸 그림자 너머로 헬가의 실루엣이 반짝 드러나는 것이 보였다. 에단은 그 뒤에서 무언가를 몸에 잔뜩 매단 듯한 인영이 천천히 걸음을 옮겨오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 파트너에게 속닥거렸다.

‘미키, 사이코키네시스로 저 작자 속박할 수 있어?’

한밤중의 숨바꼭질에 기분이 좋아져 있던 어둠대신은 에단의 말을 듣고 인영 쪽을 홱 돌아보았다. 그러나 어둠대신의 눈이 사이코 파워로 반짝반짝 빛을 내는 동안에도 저쪽은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은 듯이 태연하게 거리를 좁혀오고만 있었다. 결국 어둠대신은 데덴네가 우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에단은 어둠대신을 쓰다듬어주며 고민에 잠겼다.

어떤 기술력을 썼길래 저런 저항력을 가질 수 있는 걸까, 그걸 깊이 따져보기에는 시간이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그나저나 선배님도 참 귀신같지 말이에요, 상황을 어떻게 이리 딱 알아맞히셨대.' 에단이 속으로 감탄하고 있는 와중에 괴한은 바닥에 구급 차량의 바퀴 자국이 진하게 남아있는 것을 발견했는지 도중에 멈춰 서서 땅을 한동안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때마침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낯선 이의 냄새를 맡은 헬가가 날카로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에단은 이 상황에서 자신이 우위를 점하기 위해 과감히 나서야 할 것을 직감했다. 그는 수풀 속에서 당당히 뛰쳐나온 후 충분한 거리를 두고 괴한의 앞을 떡하니 가로막았다. 괴한은 체격이 꽤 있어 보이는 듯한 성인 남성이었는데, 양 어깨에 둘러메고 있는 포획 도구들이며 맹수의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효율성 있게 막아주는 옷차림새까지 ‘나 포켓몬 헌터요’하고 외치고 있는 모습이었다. 앞을 냅다 가로막아야 할 게 아니라 뒤를 붙잡고 제압해야 했었나, 에단은 이상하리만치 동공이 축소된 포켓몬 헌터의 눈을 보며 찰나의 아쉬움을 느꼈다.


이후의 모든 일은 급박하고도 순식간에 흘러가 버렸다.

불안스레 으르릉거리던 헬가가 한 차례 크게 짖는 것을 신호로 삼아 그 주인이 총을 장전하는 소리가 들렸고, 그렇잖아도 바짝 긴장을 올리고 있던 에단은 헌터가 총을 들어 올리는 순간 앞뒤 따지지 않고 그의 옆구리를 노리고 달려들었으며, 어둠대신이 헬가의 화염방사를 봉인함으로써 숲에 화재를 일으킬 가능성을 차단하는 동안, 에단은 헌터의 몸부림을 제압하느라 여념이 없고, 어둠대신이 악에 받친 이빨에 물어뜯기지 않기 위해 요리조리 피하고 있는 걸 약오르게 노려보던 헬가는 어느덧 자신의 주인에게 ‘해’를 끼치고 있는 인간에게로 시선을 집중시키고, 에단이 거센 저항을 하는 헌터의 손목에 어렵게 수갑을 채우는 찰나, 그의 몸뚱이가 느닷없는 사이코 파워에 의해 저절로 뒤로 밀쳐지고, 에단이 있던 위치로 쏜살같이 달려들던 헬가는 목표물을 잃고 자신의 주인과 한데 뒤엉켜서 바닥을 구르니, 에단은 그 틈을 타 헌터가 땅에 떨어트렸던 무기들을 보이는 대로 빼앗아서 시야 밖으로 던져버리고, …

잠시간 그로기 상태에 빠져 볼썽사납게 끙끙거리고 있던 헌터는 무기들이 사라지자 눈에서 불을 일으키더니, “이, 쓸모없는 쓰레기가!!” 고함을 지르며 헬가를 발길질로 험하게 밀쳐낸다. 어찌나 우악스러웠던지 헬가가 그 힘에 속절없이 밀리는 게 에단의 눈에 선하게 들어왔다. 그 발길질마저도 성에 차지 않았는지, 헌터는 조금 전까지 자기와 몸싸움을 벌였던 에단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헬가에게 성큼성큼 다가간다. 그다음에 어떤 꼴이 벌어질 지 직감한 에단이 다급히 허리춤에 손을 가져가려던 찰나였다.

눈을 한 번 깜빡이는 그 짧은 사이에 숲 근처 일대가 새카맣게 타오르고, 그 풍경 사이사이에서 불어닥쳐 온 바람이 재를 실어와 공기를 매캐하게 물들이고, 그 공간 안에 있던 이들을 완전히 얼어붙게 하는 광경이 펼쳐졌다. 아마 세계가 통째로 불타 사라진다면 이런 풍경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글거리는 아지랑이 속에서 유기체와 무기체를 가리지 않은 만물이 마치 잉걸과도 같은 모습으로 녹아 사라져갔다. 에단은 자신의 몸이 손끝부터 미세하게 재로 변해가는 광경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털썩, 하고 헌터의 다리가 풀려 자리에 주저앉는 소리가 들렸으나 거기까지 신경 쓸 여지는 없었다. 에단은 이것이 조로아크의 일루전이라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그보다도 앞서서 인간의 정신력은 생각보다도 훨씬 연약하다는 사실을 몸소 체험해야 했다. 어둠대신은 혼비백산해서 에단의 품으로 뛰어든 지 오래였다.

그가 작은 유령을 품에 안은 채로 얼어붙은 듯이 서 있던 와중에 갑자기 누군가가 제 어깨를 강하게 움켜잡는 것이 느껴졌다. 흠칫 놀라서 고개를 돌려보니 선배가 미간을 잔뜩 일그러뜨린 채로 헌터를 쏘아보고 있었다. 선배의 눈짓에 따라 반대편에서 헬가를 헌터와 멀리 떨어뜨려 놓는 이어롭의 모습도 보였다. 선배와 그의 포켓몬 양쪽 다 환영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제가 늦었죠. 다친 덴?”

에단은 고개를 가로저어 보이고는 힘겹게 미소를 지었다.

“일루전이 이렇게 무시무시하단 얘기는 안 하셨잖아요.”

“저도 이런 건 처음 봐서 뭐라 말씀드리기가 어렵네요...”

선배가 말을 모호하게 흐렸을 때, 주변을 가득 메웠던 재앙의 환영은 처음 일어났을 때처럼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버렸다.

처음부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숲은 평화롭고 우울한 분위기 아래 잠들어 있었다. 일루전을 만들어냈을 조로아크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주위를 한참동안 둘러본 에단이 긴 한숨을 내뱉어 속에 묵혀두었던 긴장을 토해내고 품 안의 어둠대신을 달래고 있을 때였다.

방금 전까지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헌터가 어디서 나왔는지 모를 나이프를 갑자기 뽑아들고서, 의미를 해석하기 어려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에단을 향해 돌진했다.

“어… …?”

벼락같은 상황을 미처 대처하지 못한 에단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외마디 소리를 냈다. 원래라면 막거나 피하는 행동이 조건반사처럼 튀어나와야 했는데 환영으로 둔해진 감각이 반사 반응마저 마비시켜 버린 듯했다.

“안 피하고 뭐 해, 정신 차려요!”

일말의 외침 직후, 자신을 옆으로 밀어내고 난입한 선배가 헌터의 손목을 강하게 낚아챔과 동시에 팔을 붙잡아 무자비하게 비틀어 꺾는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연쇄적인 충격으로 뼈가 통째로 비틀리는 고통을 겪은 헌터는 자지러지는 비명을 지르며 흉기를 놓치고 땅에 넘어졌다.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고, 당신의 발언은 법정에서 불리하게 사용될 수 있다. 또한 당신은 변호인을 선임할 수 있으며, 선임할 수 없을 경우 국선 변호사가 당신의 변호를 맡게 됩니다. 알아들었습니까?”

그는 딱딱하고 냉기어린 목소리로 원칙을 읊으며 수갑을 채운 헌터를 거칠게 일으켜 세웠다. 헌터는 완전히 전의를 상실했는지, 아니면 방금 전의 충격 때문에 정신이 간당간당해졌는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앞을 멍하니 응시했다. 에단은 선배의 차갑게 타오르던 눈동자가 빛을 달리해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가까스로 눈치채고 그를 마주 보았다. 얼어붙은 분노는 간데없이 순수하게 걱정만이 가득한 시선이었다.

“둘 다 괜찮습니까? 아까는 소리쳐서 미안해요, 진작에 붙잡아 놨어야 했는데.”

에단은 자신의 어린 파트너가 분기탱천하여 헌터에게 달려드는 것을 가까스로 말리는 데 성공하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괜찮아요, 제가 오히려 감사하고 죄송하죠,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어야 했는데요…”

어둠대신을 볼에 돌려넣은 에단은 나직하게 숨을 돌리고 나서 헌터를 바라보았다.

"그놈 기절한 거예요?”

선배는 그 질문에 부정을 표했다.

“기절이라기보다는 뭔가에 잔뜩 취한 듯합니다. 거동이 좀 이상해보이는데... 이 자의 차량을 수색해봐야 할 것 같네요.”

선배는 에단에게 헌터를 넘기며 피로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에단은 지금 자기 손아귀에 잡힌 사람이 방금 전까지 포기를 모르고 날뛰었던 것을 떠올리곤 문득 눈을 깜빡였다.

“지금 찾아볼까요?”

“일단 지금은 이 자를 본부로 이송할 수 있도록 준비해 주세요. 저는,”

선배의 탁하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숲 속을 향했다. 그는 볼에서 새롭게 꺼낸 루카리오를 데리고 이어롭을 불러들이며 에단에게 말했다.

“빠르게 설득 마치고 돌아오겠습니다. 차량 수색은 그 다음에 함께 하도록 하죠.”

“어, 어, 배틀하실 거예요?”

축 늘어지다시피 한 성인 남성을 차량 뒷좌석에 밀어 넣느라 정신이 없던 에단이 어벙한 목소리로 물었지만 선배는 그저 손만을 흔들어 보이며 루카리오를 데리고 숲 쪽으로 걸어갔을 뿐이었다. 에단은 멍하니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한숨을 푹푹 쉬며 본부에 연락을 걸기 시작했다.

 


사람마다 가진 성격이 천차만별이라지만 어느 부분에서는 일맥상통하는 성향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 왜, 언제나 조용하게 지내고 있거나 화를 잘 내지 않는 사람이 한 번 분노하면 천지가 뒤집어진다고 흔히들 그러지 않던가. 취조실에서 범죄자를 상대하고 있는 사람의 뒷모습이 딱 그런 분위기… 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직전까지 도달한 상태인 것처럼 보였다. 헌터를 제압하던 순간에 선배가 지었던 표정이 아직도 선하거늘, 더군다나 딱 한 번만 화를 내고 말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여하튼, 처음에는 단순히 민원에 지나지 않았던 작은 소동이 이렇게 복잡한 사건으로 발전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에단은 자신이 타이핑하고 있던 내용을 난감한 기분으로 훑어보았다.

피의자의 직업, 포켓몬 헌터. 20xx년 xx월 xx일 오후 x시경, 미혹의 숲에서 밀렵 행위를 준비하고 있던 피고를 현장에서 체포하였음. 나이는 30대 중반으로 추정 중이며 수사 데이터베이스에 기록된 전과는 없음. 피고가 소지하고 있던 헬가는 센터로 이송 후 보호관찰을 받을 예정. 피해 인력 및 포켓몬의 수는 전무하며, 불법 개조된 총기 2정과 포획 장비 4종을 압수하였음. 아울러, 피의자의 차량에서 향정신성 약물 및 주사기를 다량 확보하였으며… (중략) 특이사항으로 피고 당사자는 현재 극심한 환각 증세를 보이고 있어 기타 유효한 진술을 얻기 힘든 상태.

이 정도 정황만 놓고 보자면 교도소에 붙잡아 넣는 데까지는 충분히 가능하겠지만, 국제경찰 측에서 원하는 정보는 따로 더 있었다. 밀렵 행위 뒤에 배후가 존재하는지에 대한 여부라나. 전과 기록이 없는 것 치고는 그가 소지하고 있던 장비가 고도의 정밀함과 위력을 갖추고 있어서 누군가가 뒤에서 이 포켓몬 헌터를 지원해 주고 있었다는 추측이 나오게 되었고, 이 때문에 상부에서는 이 자에게서 정보를 있는 만큼 최대한 뽑아먹을 작정인 것 같았다. 그러니 환영의 후폭풍과 마약의 부작용에 정신을 제대로 못 차리고 있는 작자를 취조실에 집어넣으라는 소리를 하지. 감식반 일원들은 하룻밤 사이에 업무 잭팟이 터졌다고 구슬픈 환호성을 질렀다.

선배가 취조실에 들어간 이후 대화가 한 시간도 넘게 진전되지 않는 걸 보자면 과연 이런 절차가 소용이 있을까 싶었다. 현행범으로 체포해오긴 했는데 자신의 신원이나 배경에 대한 진술은 일절 하지도 않고 세상이 썩어 문드러지고 있다느니, 자기는 포켓몬들을 구원해주는 의무를 졌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이 금수 같은 기생충들 때문에 약한 인간들이 피해를 입고 있다는, 앞뒤가 하나도 맞지 않는 헛소리만 늘어놓고 있었으니 그걸 가만히 듣는 에단마저 아득함을 느끼게 되는데 직접 대면하고 있는 선배는 오죽할까 싶었다.

‘솔직히 선배님 대신 제가 들어갔으면 정신 좀 차리라고 물리적 충격을 가했을지도 모르겠네요.’

에단이 차츰 넋을 놓게 될 무렵 창문 너머에서 “오늘은 이쯤 하고 끝내도록 하지요.”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상태에서 뭔가를 더 끄집어내긴 힘들어요. 제정신을 차릴 때까지 시간을 두고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참관실로 들어온 선배가 피로한 낯으로 눈을 문지르며 말했다. 에단은 착잡해진 심정으로 그에게 물병을 건넸다.

“언제쯤 제정신이 들까요, 순순히 자백을 할지 여부보다 그게 더 문제인 것 같은데.”

선배는 대답하지 않고 묵묵히 물을 들이켰다. 에단은 감시요원이 포켓몬 헌터를 데리고 취조실을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콧잔등을 찡그린다.

“그나저나 그… 조로아크, 보통 포켓몬이 아니던데요. 일루전도 어마어마하던데 그런 녀석을 길들인 사람이 있다는 것도 놀랍고… 그, 트레이너…? 그분의 도움을 받아도 되지 않을까요?”

그가 넌지시 제안을 했지만 되돌아오는 선배의 반응은 단호하기만 했다.

“그건 그다지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습니다. 민간인을 함부로 끌어들이기에는 리스크가 너무 커요. 그럴 책임도 없는 분께 당장 뭔가를 요구하는 건 부담이 될 수 있고, 지금은 몸이 좋지 않아 입원하신 상태이기도 하니까 며칠 좀 더 지켜보고 판단해보도록 합시다.”

선배는 조금 시무룩해진 에단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중요한 건 아무도 다치지 않고 범죄자 한 명을 잡아낼 수 있었다는 거죠. 에단 씨가 잘해 주셨습니다. 저 자의 무장이 해제되어 있지 않았더라면 힘든 싸움이 되었을 거예요.”

칭찬을 들으니 금방 기분이 나아지는 것 같았다. 에단은 눈썹의 꼬리를 살짝 떨군 채로 웃음을 지었다.

“저랑 미키 진짜 열심히 했으니까요…! 아, 참, 그 조로아크랑 나머지 녀석들은 어떻게 됐어요? 선배님이 진짜로 포켓몬을 상대로 담판을 지어내신 거예요? 루카리오를 데리고 들어가시길래 힘으로 설득하시려나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사실 힘들여 설득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워낙에 영리한 포켓몬들이라 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기도 했고요. 제가 강조했던 부분은 단지 ‘주인이 걱정을 많이 하고 있다’는 내용 뿐이었습니다. 지금쯤 센터에서 각자 케어를 받으며 쉬고 있을 테니 내일은 원주인 분께 바로 돌려보내야겠죠.”

에단의 궁금증에 선선히 대답해 주던 선배는 갑작스럽게 부담스러운 시선을 받고 천장을 잠시 올려다봤다.

“선배님은 못하시는 게 대체 뭔가요? 나흘 연속 철야도 거뜬히 해내시지, 범죄자 제압도 척척 해내시지, 강력하고 사나운 포켓몬들을 말빨로 설득해내시다니…! 진짜 존경스럽다 못해 탄복이 나올 지경이라구요.”

사방팔방으로 흩어지는 호들갑을 견디다 못한 선배는 결국 미간을 짚고 말았다.

“…비행기 조종 못 합니다. 그쯤 해서 멈춰주세요….”

“…! 방금 그거 농담하신 거예요? 우와, 누구랑은 다르게 농담도 진짜 잘하셔.”

“잠깐만요, 에단 씨. 그 전에 사라 씨가 찾아오셨으니 칭찬 세례는 나중으로 미뤄주세요.”

"에."

선배는 뭐라 첨언하는 대신 참관실의 출입문을 열어젖혔다. 에단은 복도에 서 있는 소꿉친구의 그늘진 눈이 형형하게 빛나는 것을 보며 침을 무심코 삼켰다. 저건 '네 잘못을 네가 알렷다'는 표정이다.

"어쩐 일로...? 왜요?!"

"에단 씨... 안전은 정말로, 아주 중요하답니다. 사라 씨, 너무 세게 나가진 마시고요."

선배는 뜻 모를 말을 남기며 방을 떠났고, 사라는 상사에게 가벼운 목례를 보내고는 문을 쾅 닫았다.





Q: 조로아크는 숲 밖에서 무얼 하고 있었나요?
A: 인간들이 싸우는 거 구경하다가 웬놈이 악타입 친구에게 해코지를 하길래 빡돌아서 광역기(전방위 일루전)를 놓아버렸습니다. 좋은 녀석들도 얼떨결에 얻어걸린 것 같지만요... (0.1g정도 미안함) 

Q2: 참관실에서 에단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나요

A2: 현장에서 방심하다 사고나면 어쩔 거냐고 감식반 소꿉친구에게 일장연설을 들었습니다. (은엽이 사라에게 현장에서 있었던 일 다 말해줬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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