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뭄의 끝

앙상한 가지 끝에서 작은 꽃봉오리가 비로소 움트고

이해

BGM



은엽은 병원의 공기가 썩 달갑지 않았다.

이것은 온전히 경험 탓이라. 은엽은 입원 생활이 얼마나 지루하고 허송으로 시간을 보내는 기분이 들게끔 하는지 잘 알았기 때문에―물론, 이는 지극히 은엽만의 생각이었다―비록 비교적 짧은 기간이라 하더라도 피보호자가 그런 기분을 느끼지 않도록 최대한 신경을 써 주고 싶었다.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친 느낌에 굴복 따위 하지 않겠다는 약간의 각오도 필요하긴 했지만.

조로아크를 위시한 악타입 포켓몬들은 시시각각 바뀌는 환경에 신경을 날카롭게 세우랴, 주인을 만난다는 생각에 들뜬 기색을 겨우 감춰내랴 정신이 없는 듯했다. 건물 내에서는 정숙을 유지해달라는 부탁을 받은 것 만도 벌써 세 번째가 되었을 때, 은엽은 이 장소에 주인이 머무르고 있는 게 맞느냐는 의미를 담은 다수의 눈초리를 받게 되었다.

“이제 거의 다 왔습니다. 바로 저 복도만 지나면 돼요.”

은엽이 방문 기록지에 제 이름을 적으며 달래듯 건넨 말에, 조로아크-시선을 최대한 피하기 위해서 작은 몸집을 가진 곤율랭으로 둔갑한 상태였다-는 희미하게 투덜대는 소리를 내는 것으로 다른 멤버들을 대표해서 불만감을 토로했다.

어떤 꼬마가 겁 없이 쪼르르 뒤따라와서 그라에나의 갈기를 쓰다듬어보려 했다가 보호자가 기겁하며 아이를 안고 자리를 피한 뒤부터는 분위기가 더욱 싸늘해져 버린 상태였다. 괜히 시간을 끌어서 좋을 것은 없겠다는 생각을 한 은엽은 서둘러 포켓몬들을 약속한 목적지까지 바래다주었다. 은엽의 손이 닫힌 문을 두드린 다음 옆으로 밀어젖히기가 무섭게, 악타입 포켓몬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작은 방 안으로 우르르 몰려 들어 간다.

어리둥절한 목소리가 곧바로 들려왔다.

“…얘들아?”

은엽은 포켓몬들의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복도까지 새어나가지 않도록 문을 닫고, 분위기만큼은 족히 10년 간극이 되는 듯한 상봉의 장면을 흐뭇하게 지켜보며 벽에 기대어 섰다. 침상 위에 앉아있던 이의 얼굴에는 오로지 기쁨만이 남아있어, 전날 불안과 긴장으로 잔뜩 얼어붙어 있던 눈빛은 이제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자신의 포켓몬들을 한 번씩 포옹한 리안은 마지막으로 은엽에게 시선을 돌렸다.

“부탁 들어줘서 정말 고마워. 이렇게 일찍 올 줄은 몰랐는데….”

“제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인걸요. 간밤에 크게 불편하셨던 점은 없나요?”

그는 잠시 말이 없었다가 이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심심했던 걸 빼면 그다지. 데려오느라 힘들진 않았어? 아, 그러고 보니 얘들 상태가 꽤 좋아진 것 같기도 하고…?”

조로아크와 은엽의 눈이 아주 잠깐이나마 마주쳤다. 조로아크는 전날 숲에서 있었던 일을 주인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 하는 눈치였고, 은엽은 그 뜻을 이해해 적당히 에둘러서 대답했다.

“리안 씨가 걱정을 많이 하신다고 전달했더니 다들 잘 따라와 주었습니다. 여기에 오기 전에는 포켓몬 센터에서 쉬게 했고요.”

“센터…?”

리안은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자신의 포켓몬들을 다시 훑어보았다. 저마다 가뿐하고 기운찬 태도로 서 있는 포켓몬들을 유심히 살펴보던 그는 대충 납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구나… 당신한테 빚을 한참 졌는걸.”

리안의 중얼거림을 들은 은엽은 손사래를 쳤다.

“어차피 저는 그런 걸 따질 입장이 아닙니다. 그저 당신의 안위를 바랄 뿐인데 그 이상 무엇을 더 요구할까요.”

리안은 묘한 표정으로 그의 말을 듣다가 자신과 가장 가까이 앉아있던 포푸니라를 손짓으로 불렀다. 포푸니라는 당장 뽀르르 달려와서는 리안의 무릎 위가 지정석인 것 마냥 냉큼 앉는다. 리안은 포푸니라의 볼을 손등으로 살며시 쓰다듬으며 넌지시 물어왔다.

“그럼… 앞으로도 내가 뭔가를 부탁하면 당신은 그걸 들어줄 거야?”

은엽은 그의 다른 쪽 손에 몬스터볼이 슬그머니 나타나는 것을 멍하니 지켜보다가 대답했다.

“내용에 따라 여부가 갈라지긴 할 것 같습니다만, 대체로는 그렇겠죠.”

찰칵, 하고 버튼이 눌리는 소리와 특유의 기계음이 연달아 울리기 무섭게, 리안의 손길을 받아 완전히 방심한 채로 한창 골골거리는 소리를 내던 포푸니라는 볼 속으로 순식간에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병실 안에 정적이 무겁게 깔렸다.

“그럼 나 좀 거들어 줘.”

리안의 눈길이 조로아크와 그라에나에게로 향했다. 은엽은 창가 아래 느긋하게 엎드려있는 앱솔의 표정과는 완벽히 대조적인 안색을 띠고 있는 두 포켓몬을 바라보며 문득 소소리가 리오르였을 시절을 갑작스레 떠올려냈다. 스테이크를 사주겠다고 구슬려서 예방 접종을 맞히러 포켓몬 센터에 데려갔을 때 소소리가 딱 저런 표정을 지었었는데. 은엽은 침착하게 되물었다.

“… 어떻게 도와드리면 될까요.”

실상으로 은엽이 한 일이라고는 그저 리안이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자신의 포켓몬들을 설득하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 맞장구를 쳐주는 일 뿐이었다.

“너희가 이 도구를 탐탁지 않아 할 거라는 건 나도 알아. 그렇지만 봐, 우리가 마주하는 세상은 이전보다도 예측 불가능하고 새롭게 위험해지기를 거듭할 거야. 난 이곳에 와서까지 너흴 잃긴 싫어. 그러니 내가 너희를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수단을 쓸 수 있게 해줘. 대신 너희가 원할 때면 언제든 나올 수 있게 해 줄게.”

결국 리안은 남은 두 마리 포켓몬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조로아크와 그라에나, 그리고 포푸니라가 각각 들어간 볼을 내려다보는 그의 표정은 썩 밝지 못했다.

“사실 우리 애들은 이런 거 없어도 별문제 없이 잘 지내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결국 구속을 강요해 버렸네. 이 안에서 날 원망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는걸.”

창가에서 가만히 햇살을 받고 있던 앱솔의 붉은 시선이 느릿하게 세 개의 볼들을 헤아린 후 자신의 주인에게 다다라서 갸우뚱 기울어지는 것이 보였다. 리안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그저 손가락 끝으로 볼의 표면을 어루만지기만 했다. 은엽은 정적과 함께 가라앉은 분위기를 환기해보고자 말머리를 돌렸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리안 씨는 어떤 경로로 그 포켓몬들과 유대를 맺었는지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리안은 문득 고개를 들어 은엽을 바라보고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그게 궁금했구나.”

느닷없는 미소에 은엽이 되려 어리둥절해진 동안, 리안은 몬스터볼들을 일렬로 나열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인스는 내가 어렸을 때 아보에게 잡아먹히기 직전에 구해준 아이야. 세상에 태어난지 얼마 지나지 않았던 조로아가 죽음의 위기 앞에서 강렬한 생존 욕구를 드러내는 걸 느꼈는데 그냥 내버려 둘 수가 없었거든. 지금은 더할 나위 없는 내 소울메이트지.

그다음은 바이엘과 드라인. 둘 다 각자의 무리에서 약하다는 이유로 배척당한 아이들이었어. 나는 그들을 거두면서 강하게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했고, 그 애들은 정말로 강하게 자라줬어.

뷔어는 미신을 믿은 마을 사람들에게 목숨을 잃을 뻔했어. 갓 태어난 앱솔이 마을에 재앙을 가져올까 두려웠나 봐. 작은 생명이 허무하게 죽는 게 안타까워서 재빨리 빼내 와서 손수 길러왔는데, 수년이 지나 성체가 된 지금도 가끔 아기처럼 보여.”

리안은 제게 가까이 다가온 앱솔의 턱을 가볍게 긁어주며 말을 이었다.

“우리는 ‘살고 싶다’는 바람을 중심으로 묶인 운명 공동체야. 만에 하나 우리 중 누구 하나라도 세상에서 사라지게 된다면 나머지는 그 빈자리를 극복하지 못하고 금방 무너져 내리고 말겠지.”

은엽은 그 말을 듣던 중 불현듯 마음속 한구석이 쓰리게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리안은 앱솔과 눈을 마주하느라 그의 미세한 감정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상실을 이미 실제로 겪어보았던 적이 있는 입장에서는 그런 기분이 어떤 것인지 짐작만 해도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은엽이 유일하게 떠올릴 수 있었던 말은 그의 가정을 봉쇄해버리는 내용뿐이었다.

“당신은 지금까지 제가 만나 본 사람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유대관계를 가지고 있는 분입니다. 그 누구도 그런 관계를 끊어내지 못할 테니 당신이 우려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그 말을 듣는 리안의 눈동자에 생경한 빛이 감돌았다. 그는 은엽의 얼굴을 보고는 뭐라 말하려 입술을 달싹이다가, 짧게나마 고마워, 하고 속삭였다.

째깍, 똑. 째깍, 똑. 째깍…

협탁 위의 시계 초침이 돌아가는 소리와 링거병에서 수액이 떨어지는 소리가 번갈아 들릴 만큼의 고요함을 깨고 리안이 입을 연다.

“…그렇지, 우리 애들이 그 숲속에서 말썽을 피웠던 거 꽤 민폐였지. 내가 대신 사과할게.”

은엽은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움찔 놀란 자신을 미처 꾸짖지도 못한 채로 얼른 손을 흔들었다.

“잘 해결되었으니 신경 쓰지 마시고, 지금은 그저 몸을 회복하는 데만 집중해 주십시오. 근심거리가 많아지면 그만큼 회복이 더뎌집니다.”

“그치만.”

리안은 복잡한 표정이 되었지만 은엽은 그저 유순히 눈웃음을 지어 보이기만 했다.

“그 친구들은 주인인 당신을 지키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을 능히 해낸 셈이니까요. 그러니 인간의 관점에서 그들에게 책임을 지울 순 없지 않겠습니까.”

은엽은 하릴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상대방을 잠자코 바라보았다. 이 사람이 어쩌다 상처를 입고 숲에 쓰러져 있었는지, 이 사람의 정확한 신원은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정보를 묻는 일은 조금 더 나중으로 미뤄야 할 것 같았다. 리안은 아직 안정이 요구되는 단계였고, 더군다나 자신의 모든 포켓몬들과 재회했더라도 여기서 말없이 탈출을 감행할 만한 위인도 아닌 듯했으니.

짤막하게 생각을 정리한 은엽은 시간을 확인하고는 떠날 채비를 했다. 리안의 눈길이 자연스레 따라붙었다.

“앞으로도 대략 이 시간대 즈음에 방문하겠습니다. 푹 쉬시고 좋은 하루 되십시오.”

리안은 한참 동안 그를 올려다보다가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봐.”

리안의 입꼬리가 살짝 오르는 듯하다가도 금방 가라앉는다.

병실을 나간 은엽이 문을 닫기 직전, 안쪽에서 여린 한숨과 함께 볼의 개폐장치가 작동하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은엽의 피보호자는 자신이 새롭게 원하는 바를 확고히 나타낼 줄 알았다. 이를테면 '병동 안에 얌전히 갇혀있기만 하면 심심하니까 적당히 시간을 죽일 만한 오락 거리를 구해달라'는 부탁을 하는 것 말이다.

“그 왜, 할 짓 없을 때 흔히 하는 거 있잖아. 글씨를 의미 없이 반복해서 쓴다든지, 아니면 그렇게 쓴 글씨를 이상한 모양으로 꾸민다든지….”

은엽은 전날 리안과 헤어지기 전 그가 했던 말을 떠올리고 병원 근처 서점에서 손글씨 연습용 교본을 사서 가져다주었고, 리안은 그것을 받아들곤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런 게 왜 진짜로 있지?’ 은엽은 그가 소리 없이 중얼거리는 걸 멀뚱하게 바라보다가 넌지시 묻는다.

“원하시던 게 맞습니까?”

“…어, 응, 정확하게… 당신도 이거 써 본 적 있어?”

은엽은 얼떨떨하게 되돌아오는 질문에 잠시 눈을 깜박였다.

“네, 저도 예전에 동생한테 선물 받아서 써 본 적이 있는데, 할 만한 일이 없을 때 그걸로 시간을 보냈던 것 같습니다.”

입원 생활 중의 경험이라는 언급은 굳이 그가 알지 않아도 될 내용이라 쏙 빼 버렸다. 교본의 페이지를 한 장씩 넘겨보던 리안은 골똘한 표정을 짓더니 퍼뜩 떠오른 것처럼 말했다.

“참, 까먹을 뻔했네. 고마워.”

첫날과 비교하면 감사 표현도 이제 제법 자연스러워진 듯해, 은엽은 미소를 싱긋 지어 보였다.

여기서 안정을 취하는 동안 어느 정도 긴장이 풀렸을까 싶어 오늘 그를 찾아온 본 목적, 즉 그가 숲속에서 겪었을 일에 대해 알아보고자 했다.

사실 숲에서 처음 그를 발견하자마자 상태를 살펴보면서 ‘누가 이런 상처를 냈느냐’고 물어보기도 했는데, 리안은 비몽사몽간에도 자신이 숲속에서 길을 헤매다가 다친 것이라 답했었다. 실제로 그 근처에서는 전투의 흔적이나 다른 인간의 발자취 같은 것이 발견되지 않아서 하는 수 없이 피보호자가 ‘조난을 당했다’고 표면 상으로 명시를 해 두긴 했으나, 리안이 등에 입었던 상처는 누군가가 직접 흉기를 휘둘러서 만들어 낸 자상이었다.

은엽이 조심스레 주제를 꺼내 보았지만, 그는 여전히 또렷한 답을 주지 않았다.

“…그건, 내가 당장 말해줄 만한 내용이 별로 없어. 미안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을 일부러 숨기는 뉘앙스였는데, 일종의 망설임마저 섞여 있어 아직 보호자에게 완전히 마음을 터놓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은엽은 이것이 어떠한 잘못을 숨기기 위한 의도가 아니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리안은 범죄자 따위가 아니라 그저 병원에서 심신을 회복하는 중인 환자였고, 따라서 그가 진실을 알려주지 않는다고 해서 조바심을 내거나 그를 탓할 이유는 없었다. 꼬치꼬치 캐묻는 행동은 그에게 오히려 독이 될 것이다.

은엽은 침울하게 제 시선을 피하고 있는 리안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아닙니다, 리안 씨. 미안해하지 마세요. 오히려 제 질문 때문에 불쾌감을 느끼셨을 텐데요. 경찰의 입장에서 위험인물이 어딘가에 남아있는지 확인하고 싶었습니다만, 제가 성급하게 군 감이 없잖아 있군요.”

리안은 순간적으로 고개를 들고 은엽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선뜻 말을 토해내지 못해 살짝 벌어졌던 입술이 금방 꾹 다물리고 말았다.

어색했지만 한편으로는 익숙한 침묵이 뒤따라왔다. 그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은엽은 조용히 그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가?”

리안은 혼란스러움이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은엽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오늘은 일이 조금 많아서….”

그러자 리안은 목소리를 달리 해서 차분하게 묻는다.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는 어조였다.

“…내일도 올 거지?”

그것은 의문문이되 질문이 아닌 확인의 어구였고, 은엽은 여기에서 조급함을 읽어내곤 상대방을 안심시키기 위해 또렷한 눈웃음을 지어 보인다.

“그럼요.”

대답을 들은 리안의 안색에 아주 조금이나마 안도의 빛이 감돌았을까. 은엽은 그다음에 이어지는 말을 듣고 눈을 깜빡였다.

“그럼, 동생에 대한 이야기 들려줄 수 있어?”

다소 뜻밖의 요구를 들은 것과 더불어 그의 눈빛에 언뜻 드러났던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지 고민하느라, 이번에는 대답하기까지 약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호기심이라 하기에는 미묘한 감정이 섞여 있었는데, 저걸 뭐라고 지칭하더라. 간절함과 엇비슷했지만 어째서인지 늪에 잠긴 듯한 처연함이 스민 것 같았다. 덤덤한 표정으로 가려내긴 했어도 그 은닉이 완전하지는 못해서, 은엽은 그가 참 솔직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새삼스레 여겼다.

“물론이죠.”

지금 당장 얘기해드리고 갈 수 있는데요, 하고 덧붙이자 리안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내일 해줘. 그래야 내가 내일을 기대할 수 있어.”

이런 말을 고요한 얼굴로 하면 보호자의 입장에서는 내일 운석이 떨어진대도 반드시 약속을 지키러 와야만 할 것이다.


아무리 작은 약속이더라도 누군가에게는 절실한 가치 그 자체일 수도 있다.

철야를 한 다음날 의도치 않게 늦잠을 자 버려서 허겁지겁 병원에 달려갔을 때 보게 된 리안의 얼굴은 그 가치가 얼마나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지를 확신하게 만들었다. 포켓몬들에게만 보여주던 밝은 표정이 이번에는 다름 아닌 자신에게로 향해왔을 때, 은엽은 전날의 수사에서 겪은 스트레스가 모조리 날아가버려 저절로 얼떨떨해지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리안은 이제 행동에 주의를 기울이는 선에서 어느 정도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다며 좋아했다. 손등에 주렁주렁 매달았던 주삿바늘을 모두 빼내고서 병동 휴게실로 팔랑팔랑 걸어가는 뒷모습이 퍽 가뿐해 보였다. 회복이 빠르다는 건 곧 환자가 기운을 쌩쌩하게 차렸다는 의미와 상통하니 실로 다행인 일이다.

리안은 휴게실 한 쪽에 배치되어 있던 대타인형을 가져오며 기분 좋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오늘은 좀 늦게 왔네. 무슨 일 있었어?”

자연스레 나오는 안부 인사에 은엽은 어디까지 말하면 좋을지 잠시 고민한 끝에 적당히 둘러댔다.

“오는 길에 통행량이 많아 시간이 조금 지체되었습니다. 별일은 없었어요.”

쳘야를 했다는 게 그리 대단한 사실은 아닐지라도 환자에게서 괜히 걱정을 살 만한 여지를 제공하고 싶지는 않았다. 리안은 그를 빤히 바라보다 선선히 수긍하는 빛을 보였다.  

“그럼 됐어. 그보다, 해주기로 했었지? 동생에 대한 이야기.”

인형의 정수리 위에 팔꿈치를 얹고 턱을 괴는 동작만큼은 퍽 느긋하게 비쳤다. 그 목소리에 스며 나오는 조바심이 어디서 비롯된 건지 알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은엽은 들려줄 이야기를 머릿속으로 정리하는 한편으로 리안을 골똘히 응시했다.

이야기를 해 주는 입장에서 바라보자면 리안은 참 모범적인 청자였다.

한 번 운을 뗀 뒤에 이어지는 내용이 (아주 자연스럽고도 당연하게도) 여동생에 대한 자랑 비슷한 내용으로 흘러가는 동안 내내 열심히 들어주고 중간중간에 호응까지 해주니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거니와, 막바지에 가서는 오히려 은엽 쪽에서 슬슬 멋쩍어지는 것이다. ‘제가 혼자서 너무 떠들었던가요,’ 겸연쩍게 중얼거리니 리안은 외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난 좋기만 했는데. 적어도 당신이 동생을 정말 아끼고 있다는 건 알겠더라.”

은회색 눈썹의 꼬리가 드물게 아래로 휘었다. 버릇대로 뒷덜미를 만지작대던 은엽은 다음으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손동작을 멈추었다.

“그 애가 곁에 없어도 깊이 신뢰해주고 있는 데다 가족으로서 진심으로 사랑해주고 있잖아. 당신은 좋은 오빠네. 그 애가 부럽고.”

“… …그런 걸까요.”

은엽의 맥없는 미소를 본 리안은 인형의 머리 위에 턱을 올려둔 그대로 고개를 기울였다.

“연결고리를 계속 이어나간다는 게 그 증거인걸. 당신은 여동생이 누리고 있는 현재의 일부가 되어주고 있다는 뜻이니까. 그러니 그런 우중충한 표정 지을 필요는 없을 텐데.”

조곤조곤한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높낮이가 잘 느껴지지 않았으나, 은엽은 그 내용에서 무언가를 읽어내고 말았다.

“…리안 씨에게도 형제자매분이 계셨습니까?”

결국 그렇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잠깐 얼어붙은 자세로 저를 바라보던 리안이 눈꺼풀을 엷게 접으며 웃는다.

“응. 맞아.”

리안은 짤막한 대답을 한 후 인형을 가만히 끌어안았다. 그 모습을 보면서, 은엽은 일전 그의 눈에서 읽었던 기시감 드는 감정의 정체를 어느 정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것은, 자책과 상실이 한데 섞여 응축된 잔여물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타인이 섣불리 위로하고 감싸주지도 못할 어떤 것이어서, 은엽은 차마 아무런 말도 할 수 없게 되어 마주 침묵에 잠겨 들었다.

이 역시 익숙한 침묵이다.

“…오늘도, 고마워.”

한참 만에야 리안이 입을 열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도 착실히 고맙다는 말을 했건만, 은엽은 먹먹한 심정으로 그를 바라본다. 리안은 인형의 손을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나직이 읊조렸다.

“처음 만난 날, 당신이 내 또래 동생이 있다고 말했었잖아. 그때부터 쭉 듣고 싶었던 주제였어.”

복도 저편에서 다부니가 회진 시간을 알리러 총총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리안은 제가 만지작거리던 인형을 제자리에 놓아두곤 천천히 일어났다.

그는 전날과는 달리 은엽의 재방문 의사를 묻지 않았다. 그래서였는지, 아니면 다른 까닭에서였는지는 몰라도, 약간 다급해진 목소리가 은엽의 입 바깥으로 불쑥 튀어나온다.

“내일은 오늘보다는 더 일찍 올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밝은 청빛 눈동자가 깜박이며 은엽을 돌아보았다. 자신의 돌발성 발언에 놀라서 멍하니 서 있으려니 리안이 미약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기다릴 테니 꼭 와야 해. 내일은 당신한테 내 이야기를 들려줄 차례니까.”

그는 우두커니 선 은엽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 다부니의 뒤를 따라 복도 너머로 걸어가버렸다. 은엽은 엉거주춤하게 들었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리안에게서 느꼈던 감정의 무게가 끝내 그 뒷모습마저 왜소하게 만들어버린 것 같은 기분에, 은엽은 덩그러니 휴게실에 남아 오늘 자신이 피보호자에게서 새롭게 발견했던 요소들을 가만히 곱씹어보기 시작했다.


그다음 날 병원에 도착해보니, 어째서인지 병동 내 분위기가 다른 때보다 어수선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몇몇 병원 관계자들과 간호 보조 포켓몬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모인 가운데서 눈물을 펑펑 쏟고 있는 럭키를 파트너 간호사가 열심히 달래고 있는 중이었다. 은엽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살피러 나온 사람들의 사이를 조심스레 파고들어, 그 무리 속에 섞여서 럭키를 바라보고 있던 리안에게 다가갔다. 그는 은엽의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입니까…?”

은엽이 목소리를 낮추어 물으니, 마찬가지로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게… 막내 핑복이 갑자기 없어졌대.”

리안은 난처한 낯빛으로 럭키를 바라보았고, 은엽도 덩달아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병원 내에서 간호 수련생으로 일하고 있는 핑복은 병원 식구들 중에서 가장 어린 개체였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귀염을 받는 포켓몬이기도 했다. 럭키가 저리 속상하게 우는 까닭은 아마도 그 핑복과 가까운 관계이기 때문일 터다.

리안은 이 상황이 답답하게 느껴졌는지 콧잔등을 찡그렸다가 제 옆의 간호사에게 불쑥 질문을 던졌다.

“핑복을 목격한 사람들은 아무도 없는 거예요?”

간호사는 어두운 낯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정말로 갑자기 없어졌어요. 다들 바쁜 와중에 일어난 일이라…”

구경꾼처럼 서 있던 사람들 중 몇몇이 웅성거리다가 어디론가로 뛰어가 버렸다. 다들 나서서 사라진 핑복을 찾아보려는 분위기였는데, 무심코 그들을 따라 발자국을 옮기던 은엽의 팔을 붙잡아 멈추게 하는 손이 있었다.

“리안 씨…?”

당황한 음성으로 불러도 리안은 그를 돌아보지 않고 럭키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 애가 쓰던 물건 좀 빌려줄래? 이왕이면 체취가 진하게 남아있는 걸로. 그리고 여기서 마… 포켓몬 꺼내도 될까요?”

마지막 말은 간호사를 향한 것이었고, 간호사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리안의 시선이 은엽을 향했다.

“당신은 나랑 같이 가.”

서투른 손놀림으로 몬스터볼에서 그라에나를 꺼내는 모습을 보고서야 은엽은 그의 의도를 깨달았다. 럭키가 급한 걸음으로 돌아와서 리안에게 쿠션 같은 것을 건넸고, 한차례 기지개를 편 후 얌전한 태도로 대기하고 있던 그라에나는 주인이 내미는 물건을 보자마자 익숙하게 코를 대고 냄새를 맡는다.  

“건물 안에 잡냄새가 많아. 그래도 찾아갈 수 있지, 드라인?”

그라에나는 자신감 있는 울음소리를 내기가 무섭게 곧바로 복도 저편으로 달려갔다. 리안은 얼굴에 초조한 빛을 띤 병원 관계자들을 뒤에 남긴 채 은엽을 끌고 그라에나의 뒤를 쫓아갔다. 다행히도 냄새는 뚜렷하게 남아있는 모양인지 그들이 이동한 거리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라에나가 그들을 이끌고 도착한 곳은…

“…이불 수거함.”

리안이 멍하니 표지판의 글씨를 읽는 동안 은엽은 이마를 짚었다가 천천히 마른세수를 했다.

“어쩌다…”

“그런 건 나중에 따져도 되니까,”

리안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수거함의 투입구 안쪽으로 귀를 대고 무언가에 집중하는 듯 싶더니, 다시 은엽의 팔을 낚아채고 비상계단이 있는 곳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은엽은 리안의 팔힘에 질질 끌려가다시피 하면서 당황한 기색으로 물었다.

“그… 길은 아십니까…? 그보다 계단대신 승강기를 이용하심이 어떠실지요, 아직 금간 부분이 완전히 낫지도 않으셨을 텐데요….”

비상구의 출입문이 닫혀 있는 것을 발견한 은엽이 서둘러 문을 열어젖혔고, 리안은 당당하게 안으로 걸어 들어가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당신 없는 동안에 허락받고 여기저기 돌아다녀 봐서 웬만한 장소는 다 알아. 그리고 그 고철덩어리는 너무 느려.”

아래층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눈길을 준 후, 다시 은엽에게로 돌아오는 시선. 단지 눈빛 뿐이었지만 거기엔 명확한 의미가 담겨있었다. 은엽은 애써 침착함을 유지한 채 자세를 수그리고 양팔을 내밀었다.

“절 힘꾼으로 쓰시려고 같이 가자는 말씀을 하신 거군요.”

“응. 부탁할게.”

리안은 어깨를 으쓱하고 냉큼 상대의 어깨에 한쪽 팔을 두르고서 매달리듯 안겼다. 현장 수사를 나갔다가 부상자가 발생할 때면 종종 쓰곤 했던 운반법이라 은엽이 그를 안아 드는 동작은 썩 익숙했다. 그 대신 보행할 때의 충격이 닿지 않게끔 신경 써야 했는데, 여기에 집중하느라 드는 힘이 체중을 지탱하는데 드는 힘보다 더 많이 소모되는 느낌이었다.

“그러고 보면, 핑복은 거기서 혼자 떨어졌던 걸까요.”

소리가 드넓게 울려 퍼지는 층간 복도에 은엽의 목소리가 얹혔다. 은엽에게 제법 편안한 자세로 매달려 있던 리안이 그들 곁에서 총총히 걷고 있는 그라에나와 시선을 교환했다.

“드라인이 말하길 다른 인간이나 포켓몬의 냄새는 없었대. 그러니 혼자 거기서 뭘 하던 도중에 굴러내려가지 않았을까 싶은데.”

“…일단 누군가의 고의로 벌어진 일은 아니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 지요. 그런데 리안 씨는 포켓몬의 말을 이해하실 수 있는 겁니까?”

은엽이 알쏭달쏭해진 투로 묻자, 잠깐의 텀을 두고 애매모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글쎄, 당신도 포켓몬과 대화할 수 있지 않아?”

“…음. 그런 종류인가요.”

딱히 할 말이 없어진 은엽은 지하층에 다다르자마자 곧바로 리안을 내려주었다. 그라에나는 더욱 짙어진 냄새를 쫓아 힘차게 뛰어나갔으며, 리안은 그 뒤를 바짝 따라 나갔고, 은엽 또한 숨 돌릴 틈 없이 둘을 따랐다.

복도 저 편에 문이 반쯤 열린 창고가 있었는데, 그에 가까워질수록 구슬피 우는 소리도 점점 또렷해졌다. 은엽이 미처 말릴 틈도 없이 창고 안으로 황급히 뛰어 들어간 리안은 곧바로 너저분하게 흩어진 세탁물과 수레들 사이를 헤치고 들어가더니 이내 조그마한 포켓몬을 품에 안고 돌아 나왔다. 놀라움과 걱정과 감탄 중 어떤 감정부터 내보여야 할 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와중, 리안은 기진맥진한 상태로 훌쩍거리고 있는 핑복을 은엽에게 다짜고짜 넘기며 말했다.

“다행히 다치진 않은 것 같은데, 품고 있던 돌을 잃어버린 모양이더라. 일단 수분 좀 보충시켜 줘. 난 그동안 돌을 찾아보고 있을게.”

보통의 핑복이라면 복대 안쪽에 지니고 있어야 할 돌이 사라진 모습이 보였다. 은엽은 그가 쑥대밭이 된 창고 안으로 거침없이 걸어 들어가려 하는 것을 가까스로 멈춰세웠다.

“제가 찾아보는 게 낫겠습니다.”

“아니, 내가 움직이는 게 더 확실하고 빨라. 이불 치우는 건 내 포켓몬들이 도와줄 거니까 걱정 마.”

리안은 손을 흔들어 보이고 그라에나와 함께 이불더미 너머로 사라져버렸다. 어찌나 자신감이 가득한 모습이었던지, 은엽은 이 이상 자신이 그에게 관여할 만한 틈이 없다는 사실을 인지해내고는 핑복을 조심스레 고쳐안는다. 

은엽이 여전히 훌쩍이고 있는 아기 포켓몬을 달래가며 물을 떠먹인 후, 상처는 없는 지 살펴보고 있을 무렵이다. 물병을 절반도 비우지 않았는데, 리안이 의기양양한 걸음걸이로 돌아와서 하얗고 동그란 돌을 핑복에게 척하니 건네준다.

“여기 찾아왔어. 역시나 이불 속에 파묻혀 있더라고. 네 돌이 맞지?”

핑복은 돌을 받아들고는 금세 뛸 듯이 기뻐하기 시작했고, 리안은 그런 핑복의 뺨을 손가락으로 약하게 눌러보며 즐겁게 웃었다. 은엽은 핑복을 보듬어주는 한편으로 그를 슬쩍 돌아보았다.

“찾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한데 정말 빨리 찾아내셨네요….”

‘어떻게?’라는 궁금증을 읽었는지, 리안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만물에는 고유의 파장이 깃들어 발산되고 있으니까. 그걸 감지할 수 있으면 찾는 건 일도 아니거든.”

“…파동사셨군요.”

아, 하는 탄성이 흘러나왔다. 은엽 역시 파동 에너지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이들의 존재를 알고는 있었지만, 정작 파동사가 능력을 발휘하는 모습을 직접 지켜본 적은 없었다. 그러고 보면, 포켓몬들과 쉬이 유대를 쌓고 능숙히 소통을 나누는 것도 파동사의 능력 중 일부였던가. 그가 파동사라는 사실이 행운이라고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리안은 자기 앞에 선 사람이 어떤 반응을 보이건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투로 손짓했다.

“이만 올라가자. 핑복도 바래다줘야 하고 당신한테 마저 말해줄 것도 남았으니까.”

핑복은 무사히 럭키의 품으로 돌아갔으며, 병원 관계자들은 거듭 감사를 표하며 안도하는 기색을 비쳤다. 리안은 약간 불편한 듯이 서 있다가, 사건의 경위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에게 핑복을 대신해서 설명해주었다.

“아마… 혼자 힘으로 이불을 밀어 넣다가 자락 같은 데 걸려서 같이 떨어진 모양이야. 이불솜이 완충재 역할을 톡톡히 해준 것 같긴 하지만, 혹시 모르니까 잘 살펴봐.”

리안은 속사포처럼 제 할 말을 쏟아내고는 자신의 곁에 멀뚱히 서 있던 보호자를 끌고 인적이 드문 중앙 정원으로 도망치듯 이동했다. 리안은 중앙 정원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가장 구석자리에 위치한 벤치를 냉큼 차지했다.

“역시 과도한 관심은 피곤해…”

은엽은 근처 자판기에서 뽑아낸 에나코코아를 그에게 건네며 작게 웃는다.

“다들 고마워 하는 거죠. 하지만 그 마음 이해해요.”

리안은 컵 안에 든 내용물을 수상쩍은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은엽은 그 옆에서 한결 태평하게 커피를 한 모금 넘기고는 지나가는 듯이 물었다.

“그래서… 리안 씨가 제게 해 주실 말씀이란 건?”

제 쪽에서 먼저 이렇게 운을 떼지 않으면 시작조차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 동안 어렴풋이 감춰 온 주제를 본인의 입으로 직접 꺼내긴 쉽지 않을 테니까. 은엽이 음료를 마시는 걸 유심히 살펴보던 리안은 자기 것을 한 모금 마셔보고는 오, 하는 소리를 자그맣게 냈다가, 그의 질문을 듣자마자 종이컵을 쥔 손가락을 파듯 떨었다. 그리고는 숨을 고르듯이 띄엄띄엄 문장을 뱉는다.

“아, 음. 그러니까. 당신, 초현실이나 미스터리 같은… 그런 거 잘 믿는 편이야?”

은엽은 뜬금없이 그게 무슨 소리냐고 되묻는 대신 고개를 기울이며 잠자코 대답했다.

“가끔가다 접하는 경우가 있습니다만. 맹신하지는 않으나, 배척하지도 않습니다.”

그 말을 들은 리안의 낯빛이 조금이나마 밝아진 듯했다. 그는 제 가슴 한가운데 손을 얹고 한차례 심호흡을 했다.

“좋아. 딱 한 번만 말해줄 테니까 잘 들어야 해.”

이윽고 리안은 담담한 어조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고, 은엽은 자신이 떠올렸던 모든 생각들을 접어둔 채 그의 목소리를 경청했다.

미리 말해두자면 나는 이 시대의 사람이 아니야. 미래… 아니지, 현재라고 해야 하려나. 어쨌든 지금의 정확한 연대는 모르겠지만, 내가 원래 살고 있던 시대에서 아마 수 백 년이 흐르지 않았을까? 아무튼, 난 고향을 나와서 세상을 방랑하던 떠돌이였어. 밋밋하기만 하던 땅 위를 여행하다가 돈이 떨어지면 상단을 호위하면서 보수를 받고… 그렇게 딱히 재미나게 지내진 못했지. 이러니저러니 해도 인심이 팍팍한 시대여서 길을 돌아다니다 보면 남들 등쳐먹기 좋아하는 작자들을 쉽게 만날 수 있었거든. 도적이나 산적 같은 녀석들 말이야. 근처에 상인들이 많이 드나드는 큰 마을이 있다면 그런 녀석들을 만나기 더 쉬워지겠지. 그때 나는 한 상단과 헤어진 후 그다음의 마을로 가려고 숲을 지나고 있었는데, 재수 없게도 도적 한 무리와 마주치고 말았던 거야. 처음엔 별 볼 일 없는 뜨내기인 줄 알았는데… 아, 물론 내가 방심한 탓도 있었지만, 그걸 차치하고 나서라도 무척이나 강하고 요령 좋게 움직이는 자들이었어. 나와 내 마수들… 그러니까 포켓몬들이 한꺼번에 맞서도 좀처럼 당해내지 못할 정도로 우리가 일방적으로 밀리는 상황이었고, 음… 결국 내가 완전히 지칠 때쯤 갑자기 빛이 번쩍하더니─이 대목에서 그는 손바닥을 활짝 펼쳐서 무언가가 터지는 제스쳐를 취해 보였다─정신을 차려보니까 원래의 너도밤나무로 가득 찬 숲이 아닌 또 다른 숲속에 떨어져 있더라고. 처음엔 나도 꿈인 줄 알았지만, 꿈이 아니었고… 그다음부터는 당신이 아는 대로야.

리안은 이야기를 끝마치고 나서 적당하게 식은 에나코코아를 몇 모금 넘겼다. 그의 낯빛은 어쩐지 지친 듯 초조했으며, 종이컵의 윗부분이 조금씩 짓씹히고 있었다. 은엽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 채로 생각에 빠진 상태였다. 

너도밤나무숲과 정체불명의 빛. 그가 묘사한 대상은 아마도 시간의 여행자라는 이명을 가진 환상의 포켓몬, 세레비일 것이다. 그 신비한 포켓몬은 이미 오래 전부터 실존 사실이 확인되어왔으니 목격담 쯤이야 충분히 현실적인 이야기라고 넘길 수 있다. 다만 실제로 누군가가 세레비의 힘을 빌어 시대를 뛰어넘었다는 케이스는 적어도 은엽이 아는 바로는 전무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리안의 말을 거짓으로 치부하기에는 거짓의 기미 자체가 보이지 않았고, 정황도 딱 맞아떨어져서 사실 여부를 의심할 여지조차 없었다. 

은엽은 자기 몫의 커피가 식어가는 줄도 모르고 턱을 괸 자세로 한참을 곱씹고 있다가, 연청색 눈빛이 초조하게 다가오는 것을 가까스로 알아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리안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힘 빠진 미소를 지었다.

“허무맹랑하게 들릴 말이란 걸 알아. 그래서 저번엔 당신한테 쉽사리 얘기해주지 못했어.”

그가 다시 고개를 떨구려는 순간, 은엽이 그 시선을 붙들었다.

“초반 부분에서 조금 놀라긴 했지만, 리안 씨가 들려주신 이야기의 맥락은 다 알아들었습니다.”

은엽은 한없이 동그래지는 눈을 곧게 들여다보며 옅게 웃었다. 종이컵의 윗테두리 부분을 의미 없이 엄지손톱으로 꾹꾹 눌러대던 움직임이 곧바로 멈추었다.

“…진짜? 다 믿어주는 거야?”

“제가 리안 씨에 대해 궁금해하던 것들이 모두 설명되었는데 믿지 못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사람이 살다 보면 기상천외한 일도 겪을 수 있고 말이죠. 다만…”

깜박. 리안의 눈꺼풀이 한차례 떨렸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은엽은 나직하게 말했다.

“리안 씨가 겪었던 일은 혼자서 감당해내기 어렵지 않았나요. 많이 힘드셨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한없이 허공에 머물던 눈은 기어이 아래로 떨어져 버린다.

그는 켜켜이 쌓인 시간을 타고 흘러내려 온 이방인이었다.

사라진 시간 너머로 놓쳐버린 것들에 대한 회한, 또는 새롭게 쌓여버린 시간 위에 덧입혀진 고립감 사이에서 한창 방황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겉면으로 드러내는 태도는 대부분이 무감각으로 치장된 태연함이었으며, 또한 그것은 위태로운 눈치싸움 위에서 쉬이 균열을 드러내 왔다. 그러나 정작 탄식은 그 모든 감정을 떠안고 있는 쪽이 아니라 전혀 다른 쪽에서 흘러나온다.당신은  그 무거운 것들을 어찌하여 혼자서 묵묵히 감내하려 하는지. 여기에 대고 관찰자적 시선이나 객관적인 태도를 취한다 한들 하등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임을 은엽은 익히도 알고 있었다.

“리안 씨가 스스로에게 좀 더 여유를 주었으면 하는군요.”

이 말을 들은 리안의 표정이 아주 잠시나마 가라앉았다. 그는 손장난 때문에 너덜너덜해진 종이컵을 내려다보았다가 맥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튼 지금 와서야 밝혀서 미안해. 당신이 내 말을 믿어줄 지까지는 확신이 잘 서지 않았거든.”

“용기를 내서 제게 말씀해주셨다는 건 결국 절 믿어주셨다는 의미 아닙니까? 오히려 제가 리안 씨께 감사드려야죠.”

“… …”

이제 리안은 고맙다는 말도, 내일 다시 올 거냐는 질문도 하지 않았다. 익숙하게 눈을 깜박이고, 익숙하게 손을 흔들어주고, 익숙하게 자신의 병실로 돌아갔다.

은엽은 손에 남은 빈 종이컵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다가 반으로 두 번 꾹꾹 눌러접었다.

새로웠던 일상이 무르익어갈 때 즘이면 보호자로서의 의무도 끝이 다가올 터다. 애초 약속했던 기간은 그가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이었는데, 오늘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무래도 그 기간을 조금 더 늘려야 할 것 같았다. 트레이너 카드를 발급받는 데 필요한 서류가 무엇이 있었더라. 은엽은 멀건히 천장을 올려다보며 상념에 잠겨들었다.

문득, 오늘따라 본부에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리안 씨 말인가요? 음… 아까 아침 회진시간 끝나자마자 밖으로 나가시더라고요. 옥상에 바람 쐬러 가신다고 하셨어요.”

그가 자리를 비운 상태이길래 혹시나 해서 담당 간호사에게 물어보니 돌아온 대답이었다. 은엽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날씨가 많이 추운데도요…?”

“계속 실내에만 있는 걸 불편해하셔서… 참. 너무 오래 밖에 계시면 안 되는데. 보호자 분께서 리안 씨를 찾아주시겠어요? 내일이 퇴원일인데 감기라도 걸리신다면 큰일이니까요.”

간호사는 은엽이 걱정하던 것을 그대로 말하며 표정을 흐렸다. 은엽은 바로 알았다고 대답하곤 발걸음을 돌렸다. 옥상으로 나가는 출입문을 열면 역시나 찬바람이 훅 하니 밀려들어 온다. 창백하게 푸른 겨울 하늘을 배경으로 하여, 뇌문시티에 오전의 차가운 햇살이 내리쬐는 시간대였다. 리안은 난간 가까운 곳의 벤치에 앉아서 도심지의 풍경을 관망하고 있었다. 바로 곁에는 조로아크를 세워둔 채로, 환자복 위에 얇은 숄 한장만을 걸치고 고집스레 도시를 내려다보는 뒷모습이 새삼스레 쓸쓸해 보였다. 그는 세상을 낯설게 바라보는 눈빛을 하고, 제 곁으로 다가오는 은엽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중얼거렸다.

“조금만 더 있다가 내려가려고 했는데, 벌써 왔네.”

조로아크가 주인의 추위에 경직된 어깨를 문질러주다가 그 말에 푸념하듯이 툴툴거리는 소리를 냈는데 아무래도 주인의 고집에 대해 한탄을 하는 것 같았다. 리안의 뺨이 빨갛게 물들어 있는 게 여실히 보여서, 은엽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곤 자신이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조로아크에게 내밀었다. 물끄러미 그와 외투를 번갈아 쳐다보던 조로아크는 인간이 내민 것을 집어 들고 주인의 어깨 위로 서툴게나마 걸쳐주었다. 리안은 느닷없는 온기에 흠칫 놀라 옆을 돌아본다.

“…그러다 감기 걸리면 입원 일수 늘어납니다.”

은엽은 차분히 말하며 리안과 약간 거리를 둔 채 벤치에 앉았다. 싸늘한 냉기가 허리와 등줄기를 타고 싸하니 올라와 미간이 찡그려진다. 리안은 어깨 아래로 흘러내리려는 외투를 무의식적으로 붙잡아 여미고 눈을 멍하니 깜박였다.

“화났어…?”

은엽은 제 눈치를 보는 듯한 리안의 시선을 느끼면서 멋쩍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뇨, 천만에요.”

당신을 걱정하고 있었다고, 은엽은 그러한 의미의 눈빛을 띤 채 피보호자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여기서 무얼 하고 계셨습니까? 아인스도 많이 걱정하고 있지 않나요.”

조로아크의 불퉁한 목소리가 그 뒤를 따랐다. 리안은 콧잔등을 살짝 찡그렸다가 시선을 다시 앞으로 향했다. 찬 숨결 너머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평상시처럼 무덤덤하면서도 어딘가 힘이 빠져 있었다.

“여기서 나가기 전에 저 풍경을 눈에 담아두고 싶어서. 난 저런 거 처음 보거든.”

슬그머니 눈길을 옮겨 조로아크를 쳐다보니 고개를 약하게 젓는 얼굴이 보였다. 짐작했던 대로 리안에게는 다른 고민거리가 있는 듯했는데, 낌새를 보아하니 혼자서라도 해결이 안될 것 같으면 끝까지 들어가지 않을 태세였다. 이런 고집을 어디서 본 적이 있었는데. 은엽은 주먹을 꼭 움켜쥐고 있는 리안의 손을 보고는 결국 자신이 끼고 있던 가죽장갑까지 벗어서 건넸다.

“이거라도 끼고 계세요. 적어도 손은 따뜻하게 둬야 하지 않겠습니까.”

리안은 눈을 크게 떴다가,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물어왔다.

“그럼 당신은…?”

“괜찮습니다. 전 추위보다 더위를 훨씬 잘 타니까요. 아니면… 리안 씨 생각이 다 정리될 때까지 저는 저 안에서 기다리고 있을까요?”

은엽이 일부러 떠보듯 되묻자, 리안은 갈등하는 표정을 짓다 말고 자신이 건네받았던 장갑을 도로 돌려주었다.

“그럼 같이 내려가. 이 정도 봤으면 됐어.”

리안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이 그 너머에 앉아있던 조로아크가 신기한 걸 다 보겠다는 눈초리로 은엽을 쓱 훑어보았다. 포켓몬의 마음을 읽는 능력이 없어도 충분히 해석 가능한 표정이다. 대충 ‘소울메이트조차 꺾지 못한 고집을 만난 지 얼마 안 된 인간이 꺾어버리다니-'와 비슷한 의미겠지 싶어, 은엽은 조로아크에게 머쓱한 표정을 지어 보이고 나서 서둘러 리안의 뒤를 따랐다. 조로아크는 실내로 들어오자마자 메리프로 둔갑해서 주인의 다리에 찰싹 달라붙었다. 붉은 갈기가 순식간에 뽀송뽀송한 노란빛 털로 뒤바뀌는 광경을 목격한 어린이 환자가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리안은 그 아이를 향해 어색하게 손을 흔들어 보인 후 자신의 보호자를 올려다보았다.

“나 에나코코아 마시고 싶어.”

은엽은 그가 돌려주는 외투를 팔뚝에 걸치며 미소를 흘렸다.

“거 보세요, 그 추운 날씨에 얼마나 더 버티려고 하셨던 겁니까.”

“당신이 찾아왔으니 됐잖아. 저번처럼 작은 거 말고 큰 거 마실래.”

은엽은 앞부분의 맥락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순순히 그러자고 말한다. 그렇게 그들은 지하 식당가에 있는 카페로 향했고, 점심시간이 되지 않아 비교적 한산한 분위기 속에서 저마다의 음료잔을 거머쥐고 최적의 자리를 차지했다. 리안은 에나코코아가 제법 입맛에 맞았는지 연신 홀짝이고 있는 한편, 메리프-조로아크는 주인이 자신의 몫으로 골라 준 라부탐 열매주스를 뚫어질 듯한 신중한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보다 못한 리안이 ‘그러다 컵에 구멍 뚫려.’ 슬쩍 찌르자 하는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한 모금 마셔보고는, 갑자기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와서 주스를 열심히 들이켜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일루전이 풀릴 만큼 맛있다는 얘기.”

리안은 조로아크의 빠른 태세 전환에 감탄하는 은엽에게 속닥거리면서, 에나코코아를 마시다 말고 턱을 괸 자세로 자신의 소울메이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미래는 무척 편리하게 돌아가네. 저 정도로 맛있는 걸 단시간 내에 후다닥 만들어낼 수 있고 말이야.”

십 년 단위도 아니고 세기 단위의 세대 차 발언이 나와버린 탓에, 은엽은 어떤 적절한 반응을 보여야 할 지 감을 잡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발언을 한 장본인은 연장자의 그런 표정을 보고 푸핫, 웃음을 터뜨려 버렸고, 예고 없이 터져 나온 웃음은 기어코 전염성을 띠고 은엽을 건드리게 되었다. 어느 새 컵을 비우고 입맛을 다시던 조로아크는 두 인간이 서로 실없이 웃는 광경을 보고 너희 참 낯설다, 하는 감상평을 툭 하니 뱉었다. 그러자 리안은 웃음을 터뜨렸을 때만큼 갑작스럽게 정색했고, 은엽도 덩달아 웃음기를 뚝 끊어냈다. 멀찍이 카운터 너머에서 아르바이트생이 커피 원두를 그라인딩 하는 소음이 이들 사이의 침묵을 몰아내주고 있었다.

“…나, 고민 있어.”

조금 전의 대화 내용과는 전혀 딴판의 주제가 리안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네, 말씀하세요.”

은엽은 놀라는 기색 없이 자세를 똑바로 고쳐앉고 진지한 표정으로 그를 응시했다. 이는 옥상에서 그를 만났을 때부터 줄곧 기다려왔던 주제였고, 오랫동안 묵혀왔을 것이 뻔한 고민거리를 입 밖으로 꺼내려면 그에 상응하는 정도의 워밍업이 요구되기 나름이었다. 웃음은 훌륭한 긴장 해소제 역할을 해 주었으며, 그 덕분에 어색함이라는 감정은 일찍이 배제될 수 있었다.

“여기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 모르겠어.”

고민을 어찌나 오랫동안 묵혀뒀으면 그 무뚝뚝하던 목소리에서 텁텁한 감정이 다 묻어나올까. 리안의 시선이 아래로 향하며 속눈썹이 그늘을 만들었다.

"내가 발 디딜 만한 곳이 있어야 하는데, 이 세상에 그런 데가 있을지 모르겠거든."

그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은엽은 커피잔을 옆으로 밀어두고 양손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이는 상대방의 이야기를 가볍게 들어 넘기지 않겠다는 그 나름의 제스쳐였다. 언뜻 들어보면 그 또래의 단순한 진로 고민인 것 같아도, 은엽은 그 밑에 깔린 불안감이 일반적인 감정과는 깊이를 달리 하고 있다는 사실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은엽이 예전에 오랫동안 앓았던 무기력증 속에서 맛본 것과 냄새가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리안 씨가 희망하시는 일은 있을까요? 가령 ‘어떤 특정한 활동을 하고 싶다’ 같은 것 말입니다.”

그러나 과거의 자신과 다른 점을 꼽아보라면, 리안에게는 앞으로 걸어 나갈 수 있는 추진력이 존재했다. 혹자는 이것을 두고 의지력, 또는 야망이라고 하던가.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일.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괜찮아."

‘그게 내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이기도 하고 말야.’ 리안이 마지막에 풀어내는 말을 들은 은엽은 자신의 안목이 틀리지 않았음에 안도했다. 그것 봐요, 당신은 더 헤맬 필요가 없어요.

"그렇다면, 포켓몬 레인저는 어떠십니까.”

“포켓몬 레인저?”

오랫동안 시달렸을 고민에 대한 해결 방안이 이렇게나 금방 나올 리가, 리안은 약간 어안이 벙벙해져서 그의 말을 되풀이했다. 포켓몬 레인저들은 어떤 일을 하느냐고 물어오니, 은엽은 자신이 제시한 추천안의 근거를 상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레인저는 각종 위험으로부터 포켓몬과 인간들을 지키거나 구조활동을 벌이는 직무를 맡고 있습니다. 직업 특성상 위험요소를 자주 맞닥뜨리는 편이긴 합니다만… 리안 씨처럼 포켓몬과 유대를 쉽게 쌓을 수 있는 분들이 선택하기 좋은 직업이기도 하죠. 특히 어제의 일을 떠올려본다면 리안 씨한테 더더욱 레인저의 길을 추천해 드리지 않을 수 없겠는데요."

리안의 안색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이 세상에 자신이 설 수 있는 곳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자마자 당장 의욕이 솟아오르는 얼굴이었다.

"위험 여부는 나한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아. 그 레인저란 게 되려면 어디로 가면 돼?"

은엽은 테이블을 거의 걷어찰 것처럼 몸을 일으키려는 리안을 진정시켰다.

"그 전에 준비해둬야 할 게 있어서 말입니다…. 내일 시간 되실까요? 다른 도시에 방문해야 할 일이라서요."

망설이는 태도도 잠시, 리안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리안은 말문을 터뜨리듯 불쑥 묻는다.

"그럼 우리 그 뒤로는 못 보는 건가?"

은엽은 쿡 찌르듯이 물어온 질문에 흠칫 놀라고는 짐짓 차분히 대꾸했다.

"서로 바쁘면 만나긴 힘들겠죠. 리안 씨의 경우에는 여기 생활에 적응하느라 더 바쁘실 테고요."

은엽의 답변을 들은 리안은 '역시 그런가….' 중얼거리고는 다시 의자에 다소곳하게 앉아 조로아크의 갈기를 만지작댔다. 조로아크는 그 손놀림이 익숙한 듯 시큰둥하니 테이블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괸 자세를 취했다.

"그 동안 피곤하게 굴어서 미안해. 일 다녀오는 것만으로도 힘들었을 텐데 나까지 챙기느라 제대로 쉬지도 못했을 거 아냐."

"아, 아닙니다, 피곤함을 겪어본 적이 없는걸요. 그러니까 리안 씨와 시간을 보낼 때 말입니다…."

붉은 갈기를 어루만지던 손이 우뚝 멈췄다. 은엽은 이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지 고민하는 상대방의 얼굴을 보고서야 자신의 발언이 오해의 여지가 있음을 깨닫고 급히 덧붙인다.

"적어도 여기선 범죄자를 심문하거나 산더미처럼 쌓인 증거물을 분석할 일은 없으니까요."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은엽을 쳐다보던 리안이 그 나름의 해사한 웃음을 짓는다.

"장난 좀 쳐 봤어. 제대로 알아들었으니 안심하고…."

느릿하게 눈을 끔벅이다가는 가느다란 한숨을 내쉰다.

"당신은 정말 좋은 보호자야. 너무 대책없이 선량해서 걱정스럽긴 했어도 말야.”

“…예? 예?”

은엽은 딱 일 년치 식은땀을 흘린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말을 더듬었다. 방금 뭐가 지나간 거지. 보호자가 제 앞에서 혼란스러움을 겪거나 말거나, 리안은 한결 뿌듯해진 움직임으로 기지개를 약하게 펴고는 조로아크의 갈기를 땋기 시작했다.



"홀로 버티다가 손쓸 도리 없이 무너져 내리지 않으려면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는 게 제일 현명할테죠. 당신이 지금까지 제게 청했던 부탁들처럼, 바로 그렇게요. 그러니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걸 두렵게 여기지 마세요. 신뢰를 형성하는 과정은 그다음에 이루어져도 늦지 않습니다. 어차피 이 세상에 존재하는 관계 속에는 화음과 불협화음이 번갈아 발생하고, 우리는 모두 그 안에서 보다 더 이로운 방향을 개척해나가는 데 삶의 중점을 둔 불완전한 창조물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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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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