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뭄의 끝

이후 바람이 꽃잎에 닿아 부서질 때면

각인

BGM



감정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마치 잔잔한 바람이 부는 것과 더불어 때때로 변덕스레 몰아치는 돌풍과 마주하는 상황을 닮기도 해서, 그것을 예상하고 대비하기가 쉽지 않아 곧잘 휩쓸리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근 일주일 동안에는 나름대로 밤을 편히 넘겼는데, 마지막 날 뜬금없이 다가온 꿈의 내용에 필요 이상의 자극을 받아서 해도 뜨지 않은 시각에 잠에서 깨어버린 직후라거나. 멍하니 침대 맡에 앉아서 허공을 응시하는 동안, 새벽 그림자 속에 잠겨 있던 기척이 조용히 눈을 떴다.

-…무슨 꿈을 꿨길래. 설마, 또…?

길쭉하고 뾰족한 손톱이 다가와 조심스레 뺨을 훑어올렸다. 리안은 그 끝에 맺힌 물방울을 보고서야 자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음을, 또한 숨을 헐떡이고 있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는 제 뺨 위를 흐르는 눈물을 서둘러 소맷자락으로 닦아냈다.

-동요가 심하다. 괜찮아진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건가?

리안은 걱정이 담긴 초록빛 눈동자를 망연히 바라보았다.

“…모르겠어.”

정말로 모르겠다. 한동안 잠잠하다가 어째서 갑자기 그 애가 꿈에 나타났는지, 그 애는 어째서 그토록 서럽게 울고 있었는지, 어째서 연거푸 미안하다는 말을 쏟아냈는지, 그리고 나는 어째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지. 갓 깨어난 꿈이라 머릿속에 남은 내용이 아직 선했다.

“모르겠어….”

방금 전과 같은 말이 무심코 입술 밖으로 흘러나왔지만 아무도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넌 나를 원망해야 마땅할 텐데, 어째서 미안하다고 꿈에서까지 그러는 걸까.

리안은 문득 자신의 왼쪽 귓불을 만져보았다. 귀를 뚫었던 곳이 막혀버린 자리에 돋아난 새살이 언뜻 만져졌다. 이내 그는 손을 내리고 새벽의 어스름을 응시한다. 조로아크는 염려스러운 시선을 거두지 못한 채, 자신이 원래 자리하고 있던 곳으로 돌아가서 창밖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수 백 년이나 되는 단절은 기억과 현실 감각 사이에 잔인할 정도의 괴리감을 남겨놓았다. 리안은 과거의 시간대와 다를 바 하나 없는 여명의 빛을 바라보다가 한손으로 두 눈을 덮었다. 더 이상 여기에 없을 너에게 물어볼 게 생겨버렸는데, 어쩌면 좋아. 희미해진 잠기운과 꿈의 윤곽이 남긴 여운은 눈 아래에 짙은 피로를 남긴 채 의식 너머로 서서히 흩어지기 시작했다.


리안은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이 여러모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붉게 충혈된 눈은 무슨 짓을 해도 영 가라앉지 않았으며, 심지어 부기까지 남아버렸다. 그는 얼음주머니를 눈가에 댄 채 힘없이 벽에 기대어 섰다.

“괜히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은데….”

리안은 쉰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협탁 위에 올려져 있는 탁상시계를 힐끗 쳐다보았다. 조금만 있으면 보호자가 약속한 시간이 되는데, 조금 전 럭키가 퇴원을 예고하러 병실에 찾아왔다가 리안의 몰골을 보고는 깜짝 놀라서 한바탕 야단이 일기도 했었다. 상냥한 마음씨를 가진 마수는 눈의 부기를 빼는 데 냉찜질이 좋다며 리안에게 얼음주머니를 가져다주고, 몇 번이고 환자의 안색을 확인하고 나서야 자리를 떠났다. 럭키만 해도 저 정도인데 그 사람이 이 꼴을 보면 십중팔구 호들갑을 떨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이미 신세를 잔뜩 진 마당에 이 이상으로 약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다.

냉찜질을 시작한 지 어느 정도 시간이 더 흐르자 다행히도 부기는 차츰 빠지기 시작하는 듯했다. 리안은 얼음주머니를 내려놓고 제 미간을 꾹꾹 눌러보며 거울 속 얼굴 상태를 확인했다. 

"좋아, 이 정도면 됐겠지." 

조로아크는 리안의 편집증처럼 느껴지는 노력을 지켜보면서 어깨로 한숨을 살짝 내쉬었다. 리안은 파트너를 돌아보고는 짐짓 밝은 미소를 그려 보인다.

“어제 들었던 의사의 말도 긍정적이었고 조금 있으면 여길 나갈 수 있다잖아. 금방 나아질 거야.”

조로아크는 자신의 주인이 병실을 뚜벅뚜벅 가로질러 병실의 출입문을 활짝 열어젖히는 것을 보고 하는 수 없다는 듯이 팔짱을 꼈다. 그래, 언제나처럼 변덕스럽게 말이야. 아인스는 검은 머리 인간이 병실 앞에 멍청하니 서 있는 모습으로 시선을 옮겼다. 파동으로 누군가의 기척을 선명하게 느낄 줄 안다는 건 이럴 때 참 유용하다. 행동에 우선권을 가지고 여유를 부릴 기회를 얻을 수 있으니 말이다. 은엽은 애써 침착한 태도로 조로아크에게 인사를 건넨 뒤 리안에게 묻는다.

“어디에 가시게요, 리안 씨…?”

“아니, 그냥 문 열어준 거야. 좋은 아침.”

은엽은 당황했던 기색을 숨기려는 듯이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어설프게나마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랬군요. 감사합니다….”

“별 말씀을.”

“간밤엔 잘 주무셨나요?”

리안은 그의 시선이 문득 탁자 위의 얼음주머니에 가 닿는 것을 보고 어깨를 굳혔다. 아, 저걸 다른 데 숨겼어야 했는데. 결국 마지못해 어물어물 대답한다.

“음, 나름대로.”

딱히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도 괜히 찔리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시선을 모로 돌리려는 찰나, 은엽이 ‘이거 받으세요.’라며 그에게 무언가를 불쑥 내밀었다. 갑자기 종이가방을 건네받게 된 리안은 잠시나마 맹한 표정을 지었고, 은엽은 그런 그를 바라보며 겸연쩍게 웃는다.

“리안 씨가 입고 계셨던 옷은 많이 상하고 오염되었는지라 병원 측에서 폐기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퇴원 후 입으실 옷을 따로 챙겨왔습니다.”

“어, 하는 수 없었지, 응…. 이것까지 생각해 줄 줄은 몰랐는데. 고마워. 잘 입을게.”

퇴원할 때쯤 되면 옷을 돌려주겠거니 하고 있었는데, 하긴, 옷이 많이 낡았었다. 그래도 은엽이 그런 것까지 세세하게 신경 써줄 줄은 모르고 있어서 저도 모르게 맹한 반응이 나왔다. 은엽은 빙그레 미소짓고는 복도 쪽으로 물러나 섰다.

“그럼 저는 퇴원수속 밟을 준비를 하고 있겠습니다. 환복하시고 나면 로비에 와 주십시오.”

병실 문이 닫힌 후, 빠른 걸음 소리가 복도 저 편으로 사라져버렸다. 리안은 제자리에 못 박힌 듯이 서 있다가 침대로 돌아가서 그 가장자리에 털썩 주저앉는다. 오늘 아침 울었다는 사실은 다행히 어떻게든 넘어간 것 같았다.

리안은 흩어지는 듯한 한숨을 쉬고 종이가방 속에 들어있던 것들을 하나씩 꺼내서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은엽이 가져다 준 옷은 후드가 달린 연파란색 상의와 거친 질감을 가진 진청색 바지였는데, 리안은 이런 느낌의 차림새를 한 사람들을 병원 안에서 몇 번인가 보았던 걸 떠올리고 이게 요즘 시대에 유행하는 패션 중 하나인가, 하는 생각을 짧게 흘렸다. 이 정도면 무난한가 알 길이 없는 리안으로서는 불평 없이 주섬주섬 환자복을 벗었다. 다행히도 새옷은 그에게 딱 알맞은 사이즈였을 뿐만 아니라 착용감도 편안했다. 은엽이 어떻게 적당한 치수의 옷을 구해왔는지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눈대중 비슷한 걸 했겠지. 리안은 한결 나아진 기분으로 얼마 안 되는 소지품들―여전히 낯선 향기가 남아있는 숄, 귓구멍이 막혀버려 무용지물과 가깝게 되어버린 귀걸이,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꽉꽉 채워 써서 너덜너덜해진 손글씨 교본―을 빈 종이가방 속에 쓸어 담아 넣었다.

“됐다. 이제 가자, 아인스.”

그는 몬스터볼들을 상의의 앞주머니에 조심스레 여며넣고는 조로아크를 불렀다. 요괴여우 마수는 충실히 제 주인의 뒤를 따라나섰다. 병실의 문을 닫기 전, 리안은 자신이 이레 동안 머물렀던 공간을 돌아보았다.

회복의 시간은 조금 더뎠지만 낯설도록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서 그런지 그새 정이 들어버린 것 같았다.

"그래도 또 오고 싶진 않다. 그치?"

문은 소리없이 닫혔다. 

 


리안은 퇴원 후 주의사항을 듣고 나서야 병원에서 완전히 풀려나올 수 있었다. '당분간 무리한 운동은 삼가세요. 목욕은 실밥 제거 후 일주일이 지날 때까지는 자제해주세요. 식사는 끼니마다 영양 밸런스를 맞춰주시고 기름진 음식은 피해 주세요.' 당연한 이야기 같아도, 리안은 첫 번째 사항부터 글렀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떻게든 되겠지. 회복도 깔끔하게 됐다고 하니까.”

리안은 풀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금속 재질의 이상하게 생긴 거대한 상자―은엽은 이것을 자동차라고 불렀다―내부로 기어 올라갔다. 은엽은 그가 차에 오르는 것을 도와준 후 그의 옆자리에 앉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주의해서 나쁠 건 없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퇴원 후 회복기에 꽤 도움이 되는 내용들이니까요. 아무튼 퇴원 축하드려요, 리안 씨.”

리안은 이 축하의 말을 어떻게 받아쳐줘야 할지 고민하다 말고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경험해 본 적이 있는 모양이네?”

“네… 예전 일입니다. 잠시 실례할게요.”

‘어디 아팠어?’라고 물을 틈도 없었다. 은엽은 팔을 불쑥 내뻗어 리안의 자리에 매달린 벨트를 아래로 쭉 끌어당겨 내렸다. 찰칵, 하고 버클에 클립이 채워지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렸다. 리안은 자신의 상체를 가로질러 고정한 벨트를 어루만져보고는 은엽을 어리둥절하게 돌아보았다.

“일종의 안전장치입니다. 차로 이동하는 건 편리하지만 한 번 사고가 났다 하면 위험해지거든요.”

그는 자신이 착용한 벨트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려 보인 뒤, 검은 렌즈가 박힌 안경을 쓰고 동그란 링 형태의 손잡이를 잡는다.

“목적지까지는 대략 30분 정도 걸릴 텐데, 멀미할 것 같다 싶으시면 바로 말씀해 주십시오.”

리안은 낯선 세계에 뚝 떨어진 기분을 새삼스럽게 실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동차란 것을 병원의 창문 너머나 옥상에서 간혹 보았을 때는 마차보다 빨라보여 저 안에 있으면 여러모로 거북하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많았는데, 그걸 실제로 타게 되었을 땐 정작 아무런 감흥이나 걱정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그 대신 리안은 차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을 감상하며 상념에 빠져드는 쪽을 택했다.

'그나저나 이 사람도 숨기고 싶은 게 있구나.' 그가 입원을 할 정도로 아픈 적이 있었다는 건 알게 되었지만 어떻게, 그리고 어느 정도까지 아팠는지는 모르겠다. 평소에는 무척 멀쩡한 것처럼 굴더니 옛날엔 무슨 일을 겪었길래. 조금 궁금해지긴 했으나, 리안은 약간의 갈등 끝에 그냥 묻지 않는 게 낫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어차피 리안 자신도 제 모든 이야기를 밝히지 않은 마당에 남의 과거를 억지로 파헤치는 건 도리에 맞지 않으니까.

날씨는 하늘이 선명한 푸른 빛을 띨 정도로 맑고 구름 한 점 없었으며, 한겨울 날씨가 무색해질 정도로 햇살까지 강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그들이 뇌문시티를 가로지르는 동안 은엽은 이 곳이 사막의 변두리에 위치한 도시라고 언급하며, 지금 그들이 향하고 있는 장소는 사막 건너에 있는 구름시티라는 이름의 대도시임을 알려주었다.

“…대도시? 여기보다도 더 크단 말이야?”

“네, 이 하나지방에서는 가장 큰 도시인 셈이죠. 구름시티는 지방의 중심부 역할을 맡고 있는 곳이라서 관청이나 공공기관들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내 신분을 만들어준다고 했던가, 리안은 은엽의 옆얼굴을 가만히 올려보다가 지나가듯이 툭 질문을 던진다.

“당신 직장도 거기에 있어?”

은엽은 손잡이를 검지로 두어번 톡톡 두드리다 반 박자 늦게 대꾸했다.

“그렇죠.”

그 대화를 끝으로 차 안은 금세 조용해졌다. 별로 할 말이 없다는 의미인지, 운전에 집중하느라 말이 없어진 것인지. 하기야 이런 복잡해 보이는 탈것을 다루려면 많은 집중력이 요구될 것 같긴 했다. 리안은 그를 더 방해하지 않기로 하고 창밖으로 재차 관심을 돌렸다.

가까이에서 보는 뇌문시티의 시가지는 몹시 화려하고 번잡했다. 리안은 차창 옆으로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고층 건물들과 형형색색의 간판들을 관찰하며 냉정을 유지하려고 애를 썼다. 시선을 어느 쪽으로 돌려봐도 복잡한 구조로 땅을 차지하고 있는 건물들에, 하나같이 넓고 탄탄하게 깔린 도로가 도시의 이곳저곳으로 퍼져 있어서, 만약 저 한가운데에 맨몸으로 흘러 들어가게 된다면 꼼짝없이 길을 잃고 말겠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멀찍이서 보았던 도시의 모습을 독특한 꾸밈새로 만들어낸 모형에 빗댄다면, 안쪽에서 두 눈으로 직접 마주하게 된 도시는 벽을 무식하게 드높인 미궁처럼 느껴졌다. 로타의 왕성을 이 도시 한복판에 통째로 옮겨다 두어도 여기에 서 있는 건물들의 평균 높이에도 훨씬 못 미칠 것 같았다. 배경이 워낙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까닭에 눈도 금방 피로해지는 것 같았다. 오늘따라 눈에 무리가 많이 가네. 리안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소심하게 눈을 비비다가 그마저도 눈에 부담이 갈세라 금방 손을 내렸다. 그리곤 시야에 크게 들어온 사물체를 보고 자기도 모르게 입을 헤벌린다.

“아…?”

마침 차는 도로 중간에 멈춰 섰고, 덕분에 리안은 무리 없이 도로 맞은편에 서 있는 기둥의 꼭대기를 자세히 올려다볼 수 있었다. 그 첨단 부분에는 커다란 액자 같은 게 세워져 있었는데, 그 속에 그려져 있는 인물이 매우 낯익었다.

위풍당당한 표정의 조로아크와 나란히 그려진, 자신만만한 미소를 짓고 있는 저 얼굴을 리안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이 낯선 미래에 처음으로 이끌려왔을 적 마주했던 미래인들 중 한 명으로, 악의 힘을 다루는 데 있어 새로운 시각을 열게끔 자신을 도와준 사람이기도 했다. 도시의 혼잡함 때문에 둔해져 있던 머릿속이 점차 반가움으로 들뜨기 시작했다. 비록 그림뿐이긴 하지만 잘 지내고 있을 것이라는 확신과 어디에 가면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설렘이 떠올라, ‘나는 결국 내가 원하던 미래로 돌아와 있었구나.’ 리안은 마음 가득 차오르는 안도감을 힘겹게 삼키며 창문에 이마를 기댔다.

“뭘 보셨습니까?”

정면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던 은엽이 궁금한 투로 물어왔고, 그를 거의 신경 쓰지도 못하고 있던 리안은 제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를 듯이 놀랐다. 자신이 ‘미래에 와본 적이 없는’ 과거인임을 표방해야 했기 때문에, 리안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저, 저기에 그려져 있는 저 사람 옆에 조로아크가 있는 게 뭔가 반가워서….”

은엽은 고개를 기울여서 리안이 가리키는 방향을 확인하고는 금방 수긍하는 소리를 냈다.

“모델 백은 씨와 그 파트너로군요. 악타입 포켓몬 위주의 퍼포먼스로도 유명하시지만 하나지방에서는 패션계에서 더 잘 알려지신 분입니다.”

리안은 모르는 체 하던 것도 금방 잊고 고개를 홱 소리가 나도록 돌렸다.

“아는 사람이야? 어디에 가면 만날 수 있어?”

은엽은 이 갑작스러운 태세 변화에 눈썹을 쓱 치켜올렸다. 리안은 아차 했지만 이왕 궁금했던 것을 물었으니 끝까지 밀고 나가자는 심정이 되어서 그를 바라보는 눈에 힘을 주었다.

“아, 음… 제가 구독하는 잡지에도 자주 올라오시는 분이니 자연히 알게 됐죠. 아마 구름시티의 어느 부티크에서 근무하시던가요… 저도 상세히 아는 건 아닙니다만.”

리안은 그의 얼굴에 떠오르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보고 나서야 기세를 누그러뜨리며 얼버무렸다.

“조로아크를 데리고 있기도 하고, 악타입을 다룬다고 했으니 나랑 잘 맞을 것 같아 관심이 생겼거든.”

“아하, 그러실 수 있겠군요.”

은엽은 순순히 그의 말을 받아들이고, 나란히 멈춰서 있던 다른 차들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따라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제게서 이상한 낌새를 읽어내지 못한 모양이니 이걸로 위기는 겨우 넘긴 걸까. 리안은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파묻었다. 급격한 심경 변화를 겪으니 굳이 멀미 때문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어지럼증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어느 새 도심지를 벗어나 뇌문시티의 외곽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리안은 옆창문의 바깥에 달린 작은 거울로 도시가 멀어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긴장과 불안이 한꺼번에 풀려버린 반동으로 졸음 기운이 쏟아지는 걸 느끼고 눈꺼풀을 무겁게 깜박였다. 조금씩 희미해지는 시야에 황량한 대지가 드넓게 펼쳐지는 풍경, 그리고 그 하늘에서 커다란 날개를 가진 새 마수가 큰 원을 그리며 활강하는 광경이 들어온다. 그런 가운데서도 차량의 일정한 흔들림과 높낮이 고른 기계음이 어쩐지 편안하고 노곤하게 느껴져, 그는 차츰 의식을 놓고 외부에서 들어오는 감각을 자신에게서 차단했다.

 


리안은 신선한 공기의 냄새를 맡고 소스라치듯 정신을 되찾았다. 그는 혼란스러운 기분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자신이 잠들었다는 사실마저 깨닫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긴 어디…?”

무심코 뱉은 말에 익숙한 목소리가 곧바로 대답해온다.

“거의 다 왔습니다. 속이 메스껍다거나 하진 않나요?”

“응, 괜찮아….”

리안은 눈을 억지로 끔벅여 졸음기를 쫓아냈다. 앞 차창 너머 일직선으로 쭉 뻗은 도로의 끝에서 뾰족한 첨탑의 실루엣이 언뜻 보였다. 아직 초점이 제대로 맞지 않는 눈으로 그 방향을 한참 응시하던 리안은 문득 고개를 들고 공기의 흐름을 느꼈다. 차의 지붕에 뚫린 창에서 바깥 공기가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거기서 뭘 하면 돼?”

리안은 머리 위에서 느껴지는 찬바람에 천천히 제정신을 차리며 물었다. 무슨 심문같은 절차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정작 자기가 준비해둔 사항은 하나도 없었다. 은엽은 그를 향해 고개를 살짝 끄덕여 보인다.

“지참해야 할 서류는 제가 다 준비해 뒀습니다. 리안 씨는 거기서 제공하는 서류에 본인의 간단한 인적사항만 기재하고 서명해 주시면 돼요. 이름이나 출신지, 나이, 데리고 계신 포켓몬들의 정보 같은 것 말입니다.”

“당신이 다? 번거롭지 않았어?”

리안이 놀라서 되물으며 그에게 멍한 눈길을 돌렸다. 까만 렌즈 안쪽에서 싱긋 웃는 눈이 희미하게나마 보였다. 그는 리안이 추위를 타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고는 창문을 닫으며 말했다.

“저는 당신이 이 세계에서 어느 정도 위치를 잡고 앞으로의 삶을 원활히 살 수 있도록 도움을 드리는 것 뿐입니다. 당신은 그럴 권리가 있고, 보호자인 저는 그 권리가 묻히지 않도록 신경을 쓸 의무가 있어요.”

리안은 입을 꾹 다물었다. 역시 이런 빚지는 느낌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기분 탓인지도 모르겠지만 어쩐지 이 사람은 남을 챙겨주는 데 묘한 집착을 가지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과거 시대의 신분제도는 어땠습니까? 리안 씨가 살던 시대에 대한 이야기를 얼마 듣지 못했네요.”

지극히 미래인 다운 호기심이었다. 리안은 몸을 웅크리며, 꾸준히 가까워지는 대도시의 풍경을 아스라한 시선으로 관망했다.

“그냥… 왕국 안에 소속한 가문마다 증표를 내리고, 그 가문 안의 개개인이 증표가 새겨진 패나 문서 같은 걸 지니고 있도록 하는 거지. 이 자는 어느 가문의 어느 위치에 있는 사람이다, 대충 이런 식이었어.”

리안은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는 은엽의 모습을 보고 피식 웃음을 흘렸다.

“나도 그런 게 있긴 했는데, 여기로 넘어오면서 흘렸나 봐. 어차피 여기선 별 쓸모도 없을 테니 신경 안 쓰고 있었거든….”

대화를 나누는 내내 시원하게 질주하던 차는 길게 굽어지는 길을 따라 구름시티로 진입한다. 리안은 커브길을 도느라 기울어졌던 몸을 미처 바로 세우지도 못한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 멀리서 봤을 때 첨탑인 줄 알았던 것들이 전부 다 건물이었다니! 리안은 얼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런 데서 용케도 길을 잃지 않는구나.”

“저도 처음 왔을 땐 꼼짝없이 헤맸답니다.”

은엽은 검은 안경을 벗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이윽고 그는 자동차들의 행렬에서 빠져나와, 어느 건물 아래의 지하로 통하는 입구로 삼켜지듯이 차를 몰고 들어갔다. 리안은 미간을 찡그리며 입속으로 투덜거렸다.

“너무 복잡해. 속 울렁거려…. 나한텐 가혹한 환경이야.”

이럴 때면 은엽은 어김없이 달래는 목소리를 낸다.

“우리의 일은 금방 끝납니다. 그다음 점심 식사 후 다른 곳으로 이동할 거예요.”

리안은 그의 말에 고개를 대강 끄덕이고 나서 허리를 똑바로 세운다. 아무리 새로운 환경에 열심히 적응하겠다고 다짐한 입장이더라도, 이 복잡한 곳에서는 도무지 맥을 못 추리겠지 싶었다. 이런 곳에서 탈없이 지내는 미래인들이 제법 대단하다고까지 여겨질 지경이었다.


현대에서 신분을 만드는 절차는 은엽이 말했던 대로 신속하고 간단했다. 리안을 담당한 직원은 그에게 범죄 경력이 있는지 물어보는 것 외엔 딱히 이렇다 할 특별한 질문을 하지 않았고, 지문을 등록하고 얼굴 사진을 찍는 과정만을 거치도록 했다. 리안은 어안이 벙벙해진 표정으로 직원이 내민 종이에 자신의 인적사항을 적어내렸다. 이름, 세를리안 에브(사실 성까지 적고 싶지는 않았지만). 출신지, 뇌문시티(내가 이 시간대에 새로 떨어진 장소 바로 옆이니까 이렇게 써 놔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나이, 19세(작년─과거 시간 기준으로─에 시안이 열 여덟 번째 가을을 넘겼다고 했으니 내 나이도 그쯤 되겠지). 생일, 10월 8일(시안이 해마다 생일 잔칫상을 받던 날을 겨우 떠올려 적었다. 쌍둥이가 있었다는 게 이럴 때 편하단 걸 뒤늦게 깨달은 기분이다). …

직원은 리안이 제출한 서류를 가지고 어떤 장치를 손가락으로 복잡하게 두드리더니 잠시 후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

“네, 시민권 등록 완료되셨습니다. 추가로 처리해드릴 업무가 있을까요?”

이게 끝? 증명서로 나온 빳빳한 종이 재질의 카드를 건네받으며 어리둥절하게 직원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곁에서 기다리고 있던 은엽이 조금 전과는 또 다른 서류를 직원에게 건넨다.

“여권도 발급 신청하겠습니다. 이건 이분에 대한 제 추천서예요.”

“뭐…”

“흠…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서류를 빠르게 훑어본 직원은 그들에게 양해를 구한 후 사무실로 보이는 곳으로 들어갔다. 그 사이 리안은 자신의 보호자를 자청했던 이를 본격적으로 노려보기 시작했다.

“추천서라니? 뭘 또 해주겠다고?”

딴청을 부리듯이 벽에 걸린 시계를 응시하던 은엽은 눈을 가만히 굴리다가 시선을 맞춰왔다.

“현대 사회에서는 다른 지방으로 여행을 하려면 별도의 신분증이 필요하거든요. 더군다나 일상생활에서도 트레이너 활동 증명의 용도로 이래저래 다양하게 쓰일 수 있고요. 그러니 과거 출신이신 리안 씨에겐 특히 필수적인 사항인 셈이죠. 당신은 자유로운 여행을 즐기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유로운 여행'이라... 울림이 좋긴 한데. 그거 꼭 남의 추천서가 있어야 하는 거야? 내가 직접 신청한다거나 그런 방법은 없고?”

은엽은 그의 톡 쏘는 질문에 그저 어깨를 으쓱였을 뿐이다.

“다른 방법이 있기야 합니다만 그러려면 시간이 꽤 오래 걸려서요. 공권력은 이럴 때 써먹어야죠.”

“당신 진짜…”

리안은 능청스레 웃기만 하는 그를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그래서 추천서에 뭐라고 썼는데? 그것만 알려줘.”

리안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질문을 더했다. 은엽은 애매모호한 어조로 ‘글쎄요…’ 말끝을 늘이기만 하다가, 그의 성난 시선을 재차 받고 나서야 하는 수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요지는 당신이 범죄이력 없는 선량한 시민임을 보증하겠다는 내용이에요. 그 이외의 자세한 내용은 장본인에게 알려드릴 수 없어요. 그런 법이 있습니다.”

“…당신 진짜 나중에 두고 봐….”

리안은 ‘법이 있다고 하면 다인 줄 아느냐’고 따질 기세로 씩씩거리다가, 자리를 비웠던 직원이 제자리로 돌아오자 흥분을 간신히 누그러뜨렸다. 직원은 그 사이 무슨 기류가 흘러갔는지 알 도리 없이 리안에게 또 다른 종이를 내밀었다.

“여기 있는 빈칸들 안에 아까 적어주신 내용 그대로 기재해주시고, 맨 아래 서약도 확인 후 서명해주세요.”

리안은 입술을 뾰로통하니 내민 채 또박또박한 글씨체로 항목을 써 내려갔다. 마지막에는 ‘본인은 위 내용을 거짓없이 작성하였음을 확인함' 서명란이 있었는데, 출신 시대를 왜곡하느라 억지로 맞춰넣은 항목들을 떠올리자니 미미하게 양심이 찔렸다. 그렇지만 경찰이 직접 신분을 보증해주겠다고 하는데 무엇이 문제가 될까 싶었다. 리안은 작게 콧방귀를 뀌고는 서명을 휘갈겼다.

리안의 언짢은 기분은 점심을 배불리 먹고 나서야 어느 정도 해소될 수 있었다. 그는 여권에 찍혀 나온 사진을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눈빛으로 들여다보며 꿍얼거렸다.

“표정이 이상해. 내 얼굴이 이렇게 박제될 줄도 몰랐단 말야.”

은엽은 쿡쿡 웃음을 흘리다가 눈총을 받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나중에 갱신하실 때 새로 찍어서 등록할 수 있으니까 괜찮습니다.”

“갱신… …뭐, 됐어. 아무튼 그래서 다음은 어디로 갈 거야?”

리안은 삐죽이 튀어나온 입술을 도로 집어넣고는 협회 사무실 안에서 챙겨 온 지도를 테이블 위에 펼쳐놓았다. 은엽은 제 턱을 가만히 쓸던 손가락을 내리고 지도에 그려진 길을 따라 궤적을 그리듯 움직여 보였다.

“여기, 이 다리를 건너서 지방의 동쪽으로 건너갈 거예요. 그다음엔 바람개비숲을 그대로 관통하고, 칠보시티를 지나서 성신시티까지 이동할 예정입니다. 레인저 스쿨이 거기 있거든요. 여기서 대략 한 시간 정도 되는 거리입니다.”

그가 그리는 경로를 눈으로 따라가 보던 리안은 어깨를 조금 움츠렸다.

“꽤 멀리 가는구나…. 성신시티란 곳은 여기랑 비교하면 어때? 거기도 많이 복잡해?”

은엽은 고개를 살짝 저었다.

“성신시티는 작은 도시에 속하는 축입니다. 그 근처에 작은 숲도 있고, 음… 직접 가 보시면 될 것 같군요. 이제 다들 식사를 끝마친 것 같으니 슬슬 움직여 볼까요?”

리안은 잠깐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래, 그러자.’ 하고 지도를 다시 차곡차곡 접어서 챙겼다. 그들은 저마다 배불리 포식한 마수들을 각자의 볼 속에 되돌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서 빨리 이 혼잡한 도시를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과 더불어 이제 여기서 더 움직이면 정말로 헤어질 때구나 싶어서, 주차장으로 향하는 리안의 발걸음은 꽤 심란하게 보였다.

그는 제 앞에 선 은엽의 등을 뚫어지라 쳐다보며 지나가듯이 툭 묻는다.

“그럼 당신은 나 거기까지 데려다준 뒤에 또 여기로 와야겠네?”

많이 피곤하겠다, 하는 중얼거림이 덧붙여졌지만 은엽은 그저 고개를 흔들기만 했다.

“아예 오늘 일정을 싹 비워뒀습니다. 피곤하다 싶으면 센터에서 쉬다 가면 되니 전 걱정 마십시오.”

“…그렇구나.”

어쩐지 마음이 놓이게 된 리안은 검은색 자동차에 뽀르르 달려가 운전자보다 먼저 냉큼 올라탄다. 이번엔 자신이 직접 안전벨트를 채우고 호기롭게 ‘빨리 가자!’하고 외치는 리안의 눈에 늘 보아왔던 잔잔한 눈웃음과는 조금 다른 무언가가 들어왔다. 다만 아주 순간적인 것이라, 리안은 그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지 포착하는 타이밍을 놓치고 기계적인 속력에 몸이 실려 가는 데 주의가 넘어가게 되었다.

식후 포만감 탓인지 그들이 출발한 지도 십 분이 지나지도 않아서 리안은 구름시티로 올 때처럼 급격한 잠기운에 휩쓸리기 시작했다.

“도착할 때쯤 깨워드릴 테니 잠시 눈붙이고 계세요."

리안은 미약하게 웅웅거리는 낮은 목소리에 고개를 약하게 끄덕이며 눈을 내리감았고, 아까와 비슷하게 무의식 속으로 금세 빠져들었다.




감각의 혼란에 취해 접어든 수면은 기묘하게 옅고도 깊었으며, 따라서 리안은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한창 아슬아슬하게 거닐고 있었다. 자동차의 바퀴가 지면에 마찰하면서 끊임없이 전해져 오던 흔들림과 소음이 모두 멎었다고 인식하자마자 다가온 정적이 그대로 그의 의식줄을 붙잡고 슬그머니 끌어올린다. 리안은 좁은 공간 안에 정체된 공기를 답답하게 호흡하며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냈다. 그 무게가 생각보다 무거워 파르륵 하고 떨렸지만, 어쨌든 그는 외부의 감각정보를 간소하게나마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자신의 옆자리에서 꾸준히 흐르던 파동은 어느 새 사라져 있었고, 끊임없이 파도를 이루던 풍경은 어느덧 멈춰 있었고, 배경에서는 간혹 가다가 다양한 색깔의 덩어리들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일직선으로 지나치고 있었다. 어디서 새어 들어오는 것일지 모르는 바람이 코 끝을 스쳤을 때, 리안은 어렵사리 그 안에 섞인 짭조름한 내음을 잡아낼 수 있었다. 근처에 바다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몽롱한 의식을 억지로 쥐어짜 언젠가 머릿속에 저장해 두었던 정보를 찾아 헤맸다. 여기가 어디더라. 나는 어디로 가고 있었지. 분명히 그 사람이 알려준 게 있었는데, 그걸 떠올려내기가 너무나도 어렵다. 끝내 리안은 무언가를 깨달아내려는 노력을 관두기로 하고, 그 대신 사라진 파동을 탐지해보려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어딜 둘러보아도 온통 무기물, 무기물… 인공적인 무기물 뿐이다. 익숙하게 여기던 존재의 부재에 지레 집어먹은 겁이 그 주인으로 하여금 눈꺼풀을 조금 더 들어 올리는 데 힘을 보탰다. 리안은 망막에 제대로 맺혀지지 않는 형체들을 하나하나 구분하려 애를 쓰기 시작한다. 그러나 안타까워질 정도로 둔해진 감각 때문에 리안은 무력하게 고개를 꺾어내리려고 했다.

‘… … …!’

그 순간 저 앞에서 무언가가 움직이자 번쩍 뜨인 시야 속으로 기억에 익은 실루엣이 들어왔다. 거리감각이 뒤틀려진 탓에 바닥이 아니라 허공 위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어쨌거나 그 사람은 그 곳에 서 있었다. 리안은 이상한 만족감에 젖어들며 안도했다. 지금 그가 뭘 하고 있는지는 중요치 않다. 그가 저기에 있고, 멀리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리안은 덜 깨어난 감각을 혹사한 대가로 지독한 피로감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나는 버림받지 않았다. 그는 조금 있으면 돌아올 거야.’

나중엔 의식에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는 자체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저 사람은 내가 자기를 애타게 찾았다는 사실을 알지도 못하겠지. 리안은 수마에 자신을 내맡기며 꺼질 듯한 미소를 지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깨우는 일이 좀체 없다 보니, 리안은 제 몸이 조금씩 흔들리는 원인이 무엇인지 판단해내기 어려웠다. 리안은 제 얼굴을 근심스레 들여다보는 바다색 눈동자를 초점없이 마주 보았다.

“리안 씨, 다 왔습니다. …괜찮으신가요?”

은엽은 그의 어깨에 얹었던 손을 거두며 물었고, 리안은 한참을 멍하니 그 말을 곱씹다가 뒤늦게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괜찮아, 멀쩡해.”

그는 여전히 몽롱한 정신으로 미끄러지듯이 하차했다. 차 안에서 옹송그리고 있었던 내내 바닥에서 올라온 충격이 체내에 꽤 축적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리안은 등허리를 짚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고통을 삭혔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커브길이 많았습니다…. 괜찮으신 거 맞나요?”

“멀쩡해, 괜찮아.”

찌뿌둥한 몸으로 기지개를 켜고 나서야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입원 기간 내내 쿡쿡 쑤시던 가슴 속 통증이나 등의 상처도 이젠 말끔히 나은 듯해 차라리 개운했다.

중천에 뜬 따사로운 햇빛이 한적한 도시를 뒤덮고 있는 겨울의 냉기를 한결 걷어내고 있었다. 리안은 미약하게 데워진 공기 속에서 상록이 내뿜는 향기를 언뜻 맡을 수 있었다. 그다지 높지 않은 건물들이 길목을 따라 질서정연하게 서 있는 가운데, 길 건너편의 어떤 건물에서는 가방을 멘 아이들이 무리 지어 나오며 재잘거리는 모습도 보였다.

리안은 평화로운 기류에 만족하며 짧은 관찰을 마치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은엽에게 다가갔다. 은엽은 외벽이 깔끔하게 도색된 건물로 안내하며 조용히 말했다.

“지금 말씀드리는 게 낫겠군요. 저는 구름시티로 돌아가 봐야 해서, 리안 씨의 입학절차만 도와드리고 가겠습니다.”

리안은 무심코 놀라는 소리를 내고는 얼른 목소리를 가다듬고 정면의 복도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했어?”

“호출을 받아서요. 딱히 큰일은 아니겠지만…”

리안은 그가 말을 흐리자 덩달아 입을 다물었다. 본인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만 떨떠름해하는 기색이 마음에 걸렸다. 리안은 제 손에 만져지는 가방의 손잡이가 새삼스레 거칠다 느끼며 사무실로 보이는 장소에 발을 들였다.

그 안에는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 너덧 명, 그리고 여행자 차림의 여성 한 명이 저마다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 리안은 창가에 앉은 여행자가 제게 손을 흔들어주자 어색하게 마주 손을 흔들었다. '미래인들의 초면인사란 이런 걸까.' 은엽은 책상 자리에 앉은 직원에게 다가가서 방문 목적에 대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고, 리안은 그 옆에 서서 이야기를 멍하니 들었다. 그가 가끔 알아들은 단어라고는 ‘입학요건, 테스트, 입학일, 반배정’ 따위의 단편적인 것들 뿐이었다.

“지원자님, 따로 지정해두신 파트너 포켓몬이 있나요?”

리안은 직원의 질문을 듣고 ‘파트너’라는 단어에 무의식적으로 볼에서 조로아크를 꺼냈다. 조로아크는 갑자기 밖으로 불려나온 상황에 어리둥절하게 시선을 굴렸다. 사무실 한쪽에서 그들의 모습을 구경하던 여행자가 조로아크의 거대한 풍채를 보고 눈을 휘둥그레 뜬다. 직원은 잠시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파트너 포켓몬은 단 한 마리만 둘 수 있고, 엔트리에 있는 다른 포켓몬들과 교체가 가능하지만 트레이너의 활동과는 달리 한꺼번에 다수를 데리고 다닐 순 없다는 점 유의해 주시고요.”

직원은 설명을 마치고 일정표와 안내사항이 적힌 종이를 리안에게 건넸다.

“테스트는 내일 진행됩니다. 숙소를 배정해드릴 때까지 여기서 잠시 대기해주세요.”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다 못해 점점 커지는 기분이 든 리안은 조로아크와 눈을 마주쳤다. 아인스는 제 주인을 보고는 천장을 향해 한숨 한번, 땅을 향해 한숨 한번 내쉬고 나직이 뇌까렸다.

-네가 하는 일이 다 그렇다. 내가 그러려니 해야지….

리안은 조용히 수긍했다. 아무래도 내가 자처한 일이니까. 은엽은 천천히 고개를 까닥여 보인 후 나긋하게 말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앞으로 혼자서도 잘 해내실 거예요, 리안 씨.”

“응.”

그는 손을 앞으로 불쑥 내밀었다. 리안이 영문을 몰라서 그 손을 멀뚱히 내려다보고 있으려니, 은엽은 씁쓸하게 웃으며 손을 도로 거두고는 가벼운 목례를 하고 사무실을 나갔다. 리안은 묵직한 발소리가 복도 바깥으로 서서히 사라질 때까지도 우두커니 섰다가, 조로아크에게 ‘여기서 딱 1분만 기다려.’라는 말을 남기며 사무실 바깥으로 다급히 뛰쳐나갔다. 벽에 붙어있는 ‘복도에서 뛰지 마시오’ 경고문도 가뿐히 무시해버리고 앞서갔던 이를 단숨에 따라잡아 버린다. 놀란 눈이 저를 돌아보았다.

“리안 씨? 무슨 일….”

리안은 그 목소리를 중간에서 뚝 잘라버렸다.

“이제 나한테 더 해줄 거 없지?”

상대방의 눈동자가 한차례 의아하게 깜빡이는 것을 본 리안은 그의 대답을 재촉했다.

“그렇지? 더 남길 거 없지?”

“…그렇지요. 예.”

리안은 그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다가, 사무실을 나오기 직전에 챙겨온 물건을 그의 손에 억지로 쥐여주었다.

“그럼 이거 가져가.”

은엽은 제 손에 들린 것을 얼빠진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리안은 곧바로 등을 돌리고 자신이 뛰어왔던 길을 그대로 되짚어서 돌아간다. 뒤쪽에서 무어라 말하는 소리가 들려도 돌아보지 않았다. 비록 당장은 저것으로 만족하겠지만, 이 세계에 다다른 이후 지금까지 자신이 그에게 받아왔던 것들을 죄다 갚으려면 한참 멀었다. 어렴풋이 남아버린 미련을 어떻게 해소할 지에 대해선 차차 고민해보기로 했다.

 


은엽은 회벽색 천장을 멀거니 올려다보며 가만히 읊조렸다.

“에단 씨. 부탁 좀 하나 합시다.”

“… …말씀하세요… ….”

넋이 반쯤 나간 목소리를 들으니 헛웃음이 슬며시 새어 나온다. 은엽은 양손을 명치 위에 가지런히 모아쥔 자세로 의자 등받이에 길게 몸을 늘어뜨렸다. 제 무게를 견디는 의자의 연결부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모아 둔 쿠폰 다 넘겨드릴 테니 만료되기 전에 모두 써주세요. 공짜 커피 열 잔 분량 있습니다.”

“… 선배님 농담 진짜 구려요… …”

“언제는 잘 한다고 하셨으면서. 그리고 농담 아니라 진담입니다. 당신이 제 자리 메꾸려면 뭐라도 남기고 가야죠.”

“그건 부탁이 아니잖아요…….”

후배는 급기야 우는 소리를 냈다. 은엽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손가락 끝으로 문지르며 허심탄회하게 중얼거렸다.

“저라고 좋아서 이런 말 하는 거 아녜요. …몇 달 만의 휴일에 불려와서 잠입 지령을 받은 제 심정은 어떻겠어요.”

일주일 전 미혹의 숲에서 검거한 포켓몬 헌터가 그간 내내 진술을 하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오늘 오전을 넘겨서 결국 자백을 했던 것이 시초였다. 당시는 은엽이 한창 스카이애로 브릿지를 통해 성신시티로 향하던 때였다. 취조를 맡았던 후배가 은엽과 상부에 차례로 보고를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상부가 회의 일정을 급히 잡아버렸고, 개인적인 일로 휴가를 냈던 인원도 예외 없이 당일에 소환을 당해야 했다. 헌터가 자백했다는 내용이 ‘모 업체에서 포켓몬 밀렵 활동을 요청하며 다수의 헌터에게 지원을 해 주었고, 그 모 업체는 밀매를 주직으로 삼고 있는 조직이 직접 운영하는 다단계 회사’라면, 그리고 그 조직이 국제 경찰의 주요 타깃 중 하나라면 당연히 발칵 뒤집힐 만 했다. 여기까지는 얼마든지 납득할 수 있었다. 이 이후 회의에 회의를 거듭해서 나온 결론은 그 업체에 ‘어떻게든’ 침투해서 앞으로 타깃이 벌이는 밀매 범죄에 대해 대대적인 검거활동을 벌일 수 있도록 밑밥을 까는 것이었고, 그 작업을 벌일 적임자로 자신이 지목되었을 때 은엽은 아주 잠깐 사고가 멎는 것을 느꼈다. 사실 각오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잠입은 자신이 특화되어 있는 분야 중 하나였고, 그러므로 언젠가는 제가 맡게 될 임무 중 하나였고, 임무를 수행하면서 부딪치게 될 위험과 손해도 제가 감수해야 할 부분이었다. 다만, 시기가 좋지 않은 게 문제였다. 팀에 인력이 부족하다는 걸 상부가 모를 리도 없는데, 예상 기간이 얼마나 될 지 모르는 임무가 팀장급에게 덜커덕 내려온 것이다. 여기까지는 십분 이해할 수 있다 치더라도, 충원 계획이 있느냐고 물었을 때 그런 건 아직 계획에 없다는 답을 듣게 되니 은엽으로서도 속이 꽉 막힌 기분이 들었다. 잠입 임무 시행 날짜까지는 여유가 있다는 정도가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은엽은 한참 동안 천장을 노려보고 나서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후배는 무슨 말을 해야 좋을 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럼, 선배가 저쪽으로 옮겨가면 우리 밴드 모임은 당분간 못하는 거예요? 그나마 삶의 낙이었는데."

"제가 없다고 꼭 못하는 건 아닐테니까요. 그 부분은 방법을 잘 찾아보세요. 그게 에단 씨 특기잖습니까."

은엽은 잠자코 팔을 뻗어 시무룩해진 후배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후배는 알 수 없는 웅얼거림을 뱉었다.

“영 안 되겠다 싶으면 인원을 더 넣어주겠죠. 희망을 가져봅시다.”

은엽은 양손으로 얼굴을 문지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나갔다 올게요. 처리해야 할 게 있어서.”

후배는 서류 봉투 하나와 라이브캐스터를 챙기는 은엽을 보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오세요….”


라이브캐스터 화면 너머에서 들려온 목소리의 톤은 그가 예상한 범위를 훌쩍 벗어난 어딘가에 있었다. 은엽은 제 손가락에 감아놓았던 머리칼을 놓치고 놀란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화… 안내?”

-이 양반은 내가 시도 때도 없이 화를 내는 줄 아나 봐.

어이없어 하던 여동생은 턱을 괴고 화면을 응시하며 침착한 투로 말한다.

-내가 화를 꼭 내야겠다면 오빠네 직장에다 내야 할 걸. 갓 퇴원한 사람 데려다가 자리에 앉혀놓곤 반년도 안 지났는데 그런 일을 맡긴다고? 내가 진짜 이런 말은 안 하고 싶었는데 그쪽 동네는 무슨 블랙기업이라도 된대?

은엽은 그 독설에 넋을 잠깐 잃었다가 겨우 제정신을 차렸다.

“조만간 더 뽑겠지. 사정을 보느라 시기가 좀 늦어지는 것 뿐이야.”

-그거 공식입장도 아닐 텐데. 마음에도 없는 변호 같은 거 하지 말아.

하운의 눈매가 가늘어지는가 싶더니, 결국 한숨이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여하튼 이번엔 오빠가 먼저 나한테 소식 알려줬으니 그걸로 됐어. 은엽 씨는 강하니까 자기 몸 알아서 잘 챙길 테고요, 연락을 자주 못한다는 게 아쉽긴 하지만….

무덤덤하게 말하는 내용과는 달리 하운의 얼굴빛은 빈말로도 좋다고 할 수 없었다. 은엽은 쓰게 웃으며 위안의 말을 건넸다.

“괜찮을 거야.”

하운의 초조한 눈빛이 은엽의 미소 짓는 얼굴을 천천히 훑었다.

-누가 누굴 위로하는 건지…. 만약 다치면 산재 신청 꼭 해. 임무 들어가기 전까지 꼬박꼬박 연락하는 거 잊지 말고.

다소 퉁명스러운 대꾸가 이어졌다. 곧 그는 시선을 다른 방향으로 옮기고 나서 평이한 목소리로 말한다.

-끊어. 여기 이제 아침이라 슬슬 준비해야 하거든.

“어….”

순식간에 화면이 검게 변하고, 통화가 종료되었다는 표시가 그 위에서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은엽은 씁쓸하게 라이브캐스터를 종료시켰다. 동생과의 대화는 언제나 짧고 굵었다. 잠입을 맡은 요원은 보안적인 이유로 주변 인물들과 직접 개인적인 연락을 취하지 않기를 권고받기에 앞으로는 이렇게 대화할 기회도 거의 없을 텐데, 조금이라도 더 오래 대화하고 싶다는 욕심이 없잖아 있었다. 은엽은 아래층 사무실에서부터 계속 묵혀왔던 한숨을 깊이 토해냈다. 이러니 누구한테서 세월을 정면으로 맞는다는 소리를 듣는구나 싶었다.

그리곤 문득, 자기한테 더 줄 게 없느냐고 묻던 이를 떠올렸다. 보통의 보호자라면 앞으로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사용할 수 있는 비상연락망을 제공할 텐데, 자신의 직업 때문에 피보호자에게 선뜻 연락처를 내줄 수 없었던 은엽으로서는 마음에 덜컥 걸렸던 질문이었다. 은엽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다, 문득 제가 가져왔던 것을 꺼냈다. 그것은 일전 리안이 제게 사 달라고 부탁했던 손글씨 교본이었는데, 헤어지기 직전 급히 남기고 가길래 짬이 날 때 확인해 보려고도 했던 것이다.

과거의 문자는 현재 사용되는 체계와 일부 차이가 있다고 들었다. 그래서 과거인인 리안이 현대의 문자 체계를 스스로 익히기 위해 이런 것을 주문했던 듯 싶다고 추측했고, 실제로 은엽은 표지를 넘긴 후부터 이어지는 페이지에 채워진 글자들의 모양에 일련의 변화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떤 여백에는 오밀조밀한 글씨체로 ‘과거에는 이런 형태의 글자가 있었는데, 요즘엔 쓰이지 않더라’는 잡담도 적혀 있었다. 또 어떤 여백에는 자신이 데리고 있던 악타입 포켓몬들을 실물처럼 그려 넣은 그림도 있었다. 거의 마지막 페이지의 여백에서는, ‘에나코코아’라는 글씨와 그 테두리에 장식을 붙인 낙서도 발견할 수 있었다. 은엽은 모든 칸이 꽉꽉 채워진 페이지들을 넘기며 마음속으로 감탄했다. 여동생에게 받았던 동일한 책을 딱 세 바닥 채우고 기력이 달려 나머지는 포기해버렸던 과거의 자신이 떠올랐다.

그리고 맨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러서는 일정하게 흐르던 손가락들이 모조리 멈추어 버린다.

“…아.”

연약한 탄성이 허공에 흩어졌다. 정갈한 글씨체로 쓰인 한 문장이 읽던 이의 주목을 이끌고 있었다.


「그 동안 고마웠어,

은엽.」


짤막한 문장이었음에도 그는 여기서 여러 의미를 읽어낼 수 있었다.

하나, 리안이 마지막 순간에 확인하듯 던졌던 질문은 보호와 피보호 관계를 분명히 종결짓고자 했던 것이었고,

둘, 리안은 더 이상 남길 것이 없다는 은엽에게 자신에 대한 기억을 남겨놓고 갔다는 것.

그 사람답게 어느 쪽이든 막무가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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