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의 결여

우리가 쉽게 저지르는 오류

_사랑하는 사람이 언제나 곁에 있을 거라는

악셀 케브란사는 이런 일이 다시 생기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왜, 사람은 언제나 비슷한 일만 겪고 산다고 하지 않던가. 눈 앞에 있는 사람이 쓰러지는 순간 체감하는, 아주 익숙한 무력감. 발꿈치 안쪽의 움푹한 곳을 타고 올라오는 소름이라고 해야 했던가. 정확한 단어를 떠올려내질 못한다. 목이 일순 찢어지는 듯한 감각이 날 정도로 이름을 외친다. 묻어난 다급함에 상황을 두루뭉실하게 알아차리던 대원들 조차 고개를 들어 하던 일을 멈춘다.

 

눈 앞의 상이 쓰러진다. 상에 맺히던 사람이 쓰러진다. 아니면 달려나가다 발 끝에 걸린 돌부리 하나 쉽게 넘기지 못해 넘어질 뻔 했거나. 추락은 중요치 않다. 고꾸라져서 무릎이 부딪히는 사실 조차. 신발 끝에서 일렁이는 푸른 파도가 앞으로 나갈 속도를 제공한다. 다시 한 차례 더 사람을 잃을 수 없다. 내가 있는 곳에서, 내가 바라보는 곳에서, 내가 지키고 있는 곳에서 한 차례 더 사람을 잃을 순 없다. 그래, 그럴 수는 없단 말이다. 내가 왜 방호과에 들어왔는데? 공격을 쳐내던 방식에서, 꾸역꾸역 흘려보내는 형태로 익힌 것엔 다 이유가 있다. 브레이커가 아니라 롤러로 다시 구르고자 마음 먹어 파도 위로 몸을 던진 것에는 다-

오래된 감정은 계절 지난 과일과 같이 물렁해지고, 맛과 향이 달라져 품고 있던 분노를 잠재운다. 이젠 화를 낼 여력조차 없어 포기해왔던 걸지도 모른다. 한 차례 사람이 시간에 두들겨진 뒤에야 흐물거려, 그제야 사람을 품에 들였는데 이런 일이 생긴다면. 아. 그래 내 탓이 되고 말 것이다. 기껏 방호과에 들어왔는데 구해내질 못했다. 내 사람 하나 붙잡아 살리질 못했다. 그러니 이건 내가 잘못한 것임에 틀림없어. 배경에서 들리는 폭발음에 정신이 혼미해진다. 검은 아이를 붙잡아 올린다. 꺼져가는 숨과 끊기는 공기 사이를 타고 울음이 터져 나온다. 내 곁을 떠나지 마. 내 곁에 있어. 내가 잘못했으니, 나를 위해 이곳에 남아. 이젠 굳혀져 딱딱해진 조각을 주먹으로 내리쳐 찢긴 틈 사이로 흘러나오게 만든다.

 

손바닥에 검은 머리카락이 쓸린다. 분명 평소처럼 얼굴을 붙여 애교라도 떠는 것이겠지. 그리고 그건 악셀 케브란사의 예상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숨 잠깐 끊기기 전의 얼굴임에도 웃음만 가득해서는. 허리를 굽혀 몸을 숙인 뒤, 겨우겨우 뱉는 말을 듣는다. 난 선배님이 애정을 하다 못해 날 위해 숨까지 끊길 정도로 사랑하는게 좋은 것 같아요. 악셀 케브란사는 헐떡임과 웃음, 다를 바 없는 걸 뱉어내며 답한다. 나도. 그러니까 제발 눈을


_ 언제나 사랑하는 사람의 품에 고갤 묻을 수 있다는

네로 커티스는 놀랍지 않았다. 헌터 생활 한 번 하다가 발 헛디뎌 곤두박질 치는 것 즈음이야, 비유적인 의미나 현실적인 의미. 무엇이 됐든 생길 만한 일이지 않던가. 그런 의미에서 숨이 단숨에 조여오거나 호흡 조절에 문제가 생겨 시야 한 켠에 오류가 생기는 것 즈음은 겁먹을 만한 일이 아니었다. 으레 헌터들은 한 번 즈음 이런 주마등을 겪는다 했으니까. 불유쾌하나 예상하지 못한 일도 아니다. 이번 일은 제 실수였다. 사람 하나 살리겠답시고 그렇게 무리해서 손 뻗을 필요는 없었는데. 사거리가 짧았나? 도구의 정비는? 완벽했으니 그저 환경과 인간, 그 싸움에 있어서 졌다는 수식어를 가져간 사람이 자신이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괜찮다. 예상 안의 일이다.

 

그리고 마주하는 것이 있다면, 어쩔 줄 몰라 제 쪽으로 한걸음에 달려오는… 하하, 왜 저렇게 얼빠진 모습인지! 네로 커티스는 팔을 뻗어 이리 오라고 알린다. 그 품에 알맞게 들어차야 할 사람이 그러지 않자 워낙 당황한 탓에 그런 것이겠거니 싶다. 제 오른쪽 주머니, 그 세번째 칸에 호흡을 진정시킬 약이 있다 고지하여도 듣지 못하고 횡설수설 자기 자신을 얕잡아보는 말만 하고 자빠졌으니. 이건 내가 보고 싶은. 원하는. 좋아하는. 사랑하는… 당신의 모습이 아니다. 그러나 저 모든 낯에 테이프를 붙여 근육을 조작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못해 타인의 설움을 삼키는 것 까진 할 의향 없으니 흘려보내게 둔다. 애초에 이해하고 싶지도 않다. 남의 감당 불가능한 감정 같은 걸 입 벌려 씹어대고 싶지 않다. 제가 물어봤자 송곳니에 의해 찢기기나 하겠지, 아물기나 깔끔하게 뜯겨나가지 않을 것이다. 아, 그러니까 선배. 저는 결코 좋은 사람이 아니라니깐요. 당신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닐테고. 이것 봐요. 나는 지금도 당신이 망가지는 걸 보며 이렇게나 큰 행복을 느끼는데.

 

나는 이기적인 사람인지라 당신의 처절함이 달갑기만 하다. 얼마나 기쁘던지 웃음이 싹 틔울 정도로. 곁에 있던 다른 대원들이 이상을 감지하지만 그건 중요치 않다. 나는 당신의 뺨을 잡아 속닥이기만 하면 된다. 으레 인간이라는 것은 절체절명의 순간에 들은 말이 귓가에 오래 각인된다지. 그렇다면 난 기꺼이 당신에게 말을 퍼부을 거다. 사랑해요. 그러니까 스스로를 아프게 하지 말아요 선배. 나 어디 안 갈 테니 사랑 잊지 말고, 날 사랑함을 까먹지 말고, 사랑이 언제나 살리게 될 거라는 것을


_ 우리가 언젠가 각자의 옛 기억을 발판 삼아 일어설 수 있을 것이라는

눈을 떴다. 그랬더니 옆구리에 붕대를 두르다 못해 손 끝에 특정 장치를 붙여 그 부근을 긁지 못한 처리를 받은 선배가 보였다. 어떤 기분이냐고? 글쎄. 암담한 건지는 모르겠고. 네로 커티스는 예상한 그대로의 일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손목 잡아 끌어오며 재촉했다. 아니, 그게 아니에요 선배. 이 장면에선 날 사랑한다고 이야길 하며 입을 맞춰줘야지. 악셀 케브란사는 암담했다. 정신 차려놓고선 뱉는 말이 고작 그런 것 뿐이라니. 그러나 서로가 서로의 감정을 마저 삼켜둘 방법은 없다. 뻗어오는 손길에 얽혀 안아주지 않을 방법 따윈 알지도 못한다. 그래서 악셀 케브란사는 욕을 삼키며 울음을 토해냈고, 네로 커티스는 몰이해를 걷어차고 포옹을 제공했다. 손가락에 얽히는 곱슬거리는 머리. 분명 그 사이 제 관리를 하지 못했을 것임에 틀림 없는- 무척이나 거친 살갗. 귓가에 닿는 차가운 살덩이.

우리는 언제까지 이 기억에 매몰되어 살아갈까. 우리가 살아가는 곳은 딱딱한 바닥 위임에도 6피트 아래에 심장이 묻혀 숨을 쉬어야 한다니. 골격 피와 살갗 이 모든 것이 땅 위에 있는데 호흡기 만큼은 지하에 박혀 쿱쿱한 향과 눅눅한 흙바닥을 기어다녀야 한다니. 결국 씹힌 입술에서 난 비린 맛이나 눈가에서 나온 짭조름한 맛, 오만 것들이 뒤엉켜 혀 너머로 기어간다. 나 괜찮아요 선배님. 살아 돌아왔어. 당신 곁을 떠나지 않는다고 했어요. 내가 널 다치게 만들었어. 분명 구할 수 있었는데. 아니, 그건 의미 없는 말이에요. 당신은 모두를 구할 수 없어. … 그런 말 하지 마! 기어코 병실에서 큰 소리가 터져나온 뒤에야 언어는 교류의 형태에서 벗어난다.

충돌한다. 어쩌면 엇갈린 걸 이제야 깨달았거나. 그렇지만 붙든 손을 놓지 않고, 마주친 눈을 피하지 않는다. 우리는 대화를 나누지 않고선 살아가는 법을 모르는 족속들이니까. 악셀 케브란사는 기약 없는 침묵을 두려워하고, 네로 커티스는 예정된 만남을 견뎌내지 못한다. 상성이 만나 서서히 녹는다. 긴 침묵 끝에 말이 구슬처럼 튕겨져 나온다. 그러다 다시 상대의 입 안으로 데구르르.

우리는, 무척이나 긴 시간이 지난 뒤에도 비슷한 형태를 지니게 될 것이다. 이별하지 못했고, 떨쳐내지 못했으며, 이겨내지 못한 과거를 지금의 우리들이 견뎌낼 수 있을 리 없다. 계속해서 산 위로 밀어 올려보내는 돌은 건너편으로 넘기면 또 저 개울가 너머로 굴러갈 터. 그렇다고 물길 막은 채로 살게 둘 수는 없으니 다시 굴려 올려보내길 반복하겠지. 선배. 난 우리가 이렇게 불안하게 사는 것도 괜찮아요. 너, 계속 그런 철 없는 소리를… 선배가 책임질 거잖아요. 나 두고 가지 않기로 했잖아요. 나 혼자 두지 않을 거라고요. ……됐다. 울지 마. 울고 싶은 사람은 네가 아니라 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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