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 2차창작 / 구화산 연령반전if] 그저, 한낱, 인간. - 03

구화산 청문, 청명 연령반전 if

**

청문은 마치 시간이 느려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의 목을 향해 똑바로 날아드는 검이 달팽이처럼 느릿느릿 움직인다. 빛나는 검면에 반사되는 하얀 달빛마저도 모조리 눈에 담을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러나 피할 수는 없었다.

청문의 몸은 그보다도 더욱 느리게, 마치 멈춰있는 것처럼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으므로.

 

서걱.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목덜미에서 뜨끈한 통증이 느껴졌다. 핏줄기가 어둠속을 갈랐다.

 

“…아…….”

 

청문의 입에서 잔뜩 억눌린 숨소리가 새어나왔다. 놀란 어깨가 연신 들썩였다.

 

딱 한 치.

그의 목덜미 중심에서 딱 한 치 벗어난 청명의 검이, 그의 살갗을 베어내고 허공에 멈춰섰다.

 

“…쿨럭.”

 

청명의 입에서 시커멓게 죽은피가 울컥 솟아나왔다.

뒤늦게 청문을 알아채고 급격히 검으로 밀어 넣었던 내력을 회수하다가, 기혈이 뒤틀려 내상을 입어버린 탓이다.

청명은 덩어리진 검은 피를 뱉어버리고, 청문의 가슴팍을 거칠게 떠밀었다.

 

“아윽!”

“멍청한 새끼야, 뭘 믿고 무인이 칼을 휘두르는 데 머리를 들이밀어!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

 

청문은 아연한 얼굴로 청명을 올려다보았다.

살았다는 안도감과 함께 현실감이 돌아오자, 억눌렸던 당황과 공포가 울컥 밀려 올라왔다.

온몸이 덜덜 떨리고 눈앞에 눈물로 부옇게 흐려온다. 숨결이 거칠어지며 살 맞은 짐승처럼 헐떡거리는 이상한 소리가 목구멍을 비집고 나왔다.

 

“…쯧.”

 

청명은 들고 있던 검을 바닥에 대충 내던지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청명의 손이 저를 향해 불쑥 다가오자, 청문은 반사적으로 움찔하며 목을 움츠렸다.

 

“요상은 할 줄 알아? 배웠어?”

“요, 요상…?”

“모르면 됐다.”

 

부욱.

 

제 소맷자락을 거칠게 찢어낸 청명이 청문의 상처를 꾸욱 눌렀다.

하얀 천조각 위로 순식간에 번져가는 붉은 얼룩에, 청명의 눈이 가늘어졌다.

짧게 혀를 찬 청명이 순식간에 손을 놀려 청문의 목덜미 몇 군데를 찌르자, 줄줄 흘러나오던 피가 순식간에 멎었다.

 

“의약당에 가서 꿰매달라고 그래.”

“네, 네…. 아니, 응. 알겠습, 아니, 알겠….”

 

횡설수설하던 청문을 잠시 바라보던 청명은 내던졌던 검을 다시 허리춤에 꽂고, 청문의 앞에 등을 보이며 앉았다.

 

“어?”

“업히쇼.”

“어, 업혀?”

“그럼 그 다리로 걸어가기라도 할 거요? 보아하니 지금 다리 다 풀려서 제대로 서지도 못할 것 같은데, 그러다가 절벽에서 굴러 떨어지기라도 하면 시체도 못 찾소. 이 양반이 아직 화산 무서운 줄을 모르네.”

 

퉁명스러운 청명의 목소리에 잠시 눈을 깜빡이던 청문은 머뭇거리며 청명의 등에 업혔다.

아무리 어린아이라 한들 열다섯 소년이 그리 가벼운 무게는 아닐 텐데, 청명은 아무런 무게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가뿐하게 몸을 일으켰다.

 

찌르르-.

 

어디선가 풀벌레의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멎었던 바람이 다시 불기 시작했다. 청문은 밀려오는 어색함을 애써 밀어내며 청명의 어깨를 꼭 잡았다.

따듯하고 넓은 등으로부터 전해지는 느릿한 심박과, 고른 숨소리를 듣고 있자니, 조금 전 놀랐던 마음이 서서히 가라앉으며 몸이 나른히 풀려가기 시작했다.

 

“사형.”

“…응?”

“여긴 왜 온 거요? 이 야밤에.”

 

신발이 흙길을 단단히 내리밟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청문은 은은하게 내리쬐는 달빛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기억이 잘 안 난다.”

“나 참. 겨우 삼대제자인 양반이 밤중에 남몰래 담이나 넘고, 문파 꼴 잘 돌아간다, 잘 돌아가.”

“매일 밤 몰래 빠져나가는 건 너도 마찬가지 아니냐.”

“내가 댁이랑 같소? 내 나이가 몇인데. 까불려면 앞으로 화산밥 한 십 년쯤은 더 먹고 오쇼.”

 

청명은 낄낄대며 경박한 웃음을 흘렸으나, 청문은 그 목소리에서 즐거운 기색 따위는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청문은 청명의 어깨를 잡은 손에 꾸욱 힘을 주었다.

 

“굳이 그리 용쓸 것 없어요, 사형.”

“으응?”

 

청명은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거나 새삼스레 청문을 살피지 않았다.

그러나 청문은 지금 청명의 모든 신경이 제게로 쏠려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이토록 험하고 거친 산길을 내려가면서도 청문의 몸은 마치 평지를 걷는 것처럼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있었으니까.

 

“사형의 두 배, 세 배를 산 양반들도 나를 감당을 못 하는데, 사형이 뭘 해. 이참에 잘 알아둬요. 괜히 내 옆에서 어정거려봐야, 피 말고는 볼 것도 없소.”

“…하지만, 사제.”

“내가 귀찮아서 그래요, 내가. 귀찮아서. 사형이라는 양반을 귀찮다고 두들겨 팰 수도 없으니 이 사제 사정 좀 봐주쇼.”

 

청명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청문은, 청명의 어깨에 뺨을 기댔다. 차분한 숨소리가 그의 머리맡에서 들려왔다.

조용하고 고즈넉한 분위기 때문일까. 아니면 소리 없이 쏟아지는 달빛 때문일까.

청문은 조금씩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천천히 깜빡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매화.”

“엉?”

 

청명의 고개가 살짝 돌아가는 것이 느껴진다. 청문은 눈을 감은 채, 꿈결 속을 헤매는 것처럼 멍하니 중얼거렸다.

 

“나도 그런 매화를 피울 수 있을까?”

 

잠시 뒤 청명이 무어라 대답을 해주긴 했으나, 이미 까무룩 잠들어버린 청문은 그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

 

청문은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옅은 통증에 문득 잠에서 깼다.

청문의 방. 이젠 슬슬 낯이 익은 천장이 보였다.

 

“아얏….”

 

청문은 몸을 일으키려다 움찔하며 목덜미를 조심스레 손으로 쓸어보았다.

단단히 감긴 붕대의 까끌한 감촉이 손끝에 느껴졌다. 자신이 잠든 사이에 치료가 끝난 모양이었다.

아마도 청명이 자신을 데리고 의약당에 다녀왔으리라. 청명의 성격에 이리 꼼꼼하고 정갈하게 붕대를 감아주었을 리는 없으니.

잠시 목에 감긴 붕대를 만지작거리던 청문은, 다시 눈을 감고 잠을 청하려 했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들려오는 낯선 소리만 아니었다면.

 

짜악-.

 

청문은 흠칫하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갑자기 힘이 들어가며 다친 부위가 아파왔지만, 청문은 신음조차 흘리지 못했다.

 

짜아악-.

 

가늘고 낭창한 것이 공기를 가르며 휘둘러지는 소리.

그리고 살갗에 부딪히며 나는 날카로운 소리.

청문은 실례라는 것조차 잊고 허둥지둥 방에서 뛰쳐나와 소리가 들려오는 방, 백오의 처소 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말았다.

 

짜아악!

 

청문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바지자락을 무릎 위까지 걷어 올린 청명과 회초리를 들고 있는 백오의 모습이었다.

이미 몇 개나 되는 회초리가 부러져 바닥을 굴러다닌다.

내력을 두르지 않은 청명의 종아리는 온통 새빨갛게 붓고 터져, 피와 진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스, 스승님!”

 

청문의 외침에, 백오의 손이 허공에서 우뚝 멈췄다.

 

영민한 청문은 한 순간에 모든 것을 눈치 챌 수밖에 없었다.

청명이 왜 이 새벽에 회초리를 맞고 있는지.

청명을 보며 늘 골머리를 썩긴 했어도, 진정으로 화를 내는 일은 없었던 백오가 저토록 심한 매질을 하고 있는지.

 

“사, 사제는 아무것도….”

“나가라.”

“사제는 아무것도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모두 제 실수로 벌어진 일입니다, 벌을 받아야 한다면 제가…!”

“나가라는 말이 안 들리느냐!”

 

언제나 인자한 표정으로 그를 향해 조용히 웃어주던 백오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분노로 눈자위를 붉게 물들인 채, 추상같은 노성을 내지르는 서슬 퍼런 무인이 있을 뿐.

 

저를 향해 쏟아지는 그 위압감에 청문은 숨통이 콱 틀어 막히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헐떡이면서도, 청문은 끝끝내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파랗게 질린 얼굴로 버티는 청문을 보며, 백오의 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사형.”

 

그 순간.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의 끈을 끊어내듯, 청명이 입을 열었다. 그답지 않은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난 됐으니 돌아가시오.”

“…하지만.”

“세상 어느 삼대제자가 스승을 면전에서 들이받아, 들이받길. 그것도 청자배 대제자라는 인간이, 백자배 대제자를.”

 

청명이 슬쩍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문고리를 부여잡고 있던 청문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청명은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는 듯 태연한 표정으로, 그러나 조금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히죽 웃었다.

 

“회초리가 일곱 개 부러졌으니 앞으로 세 개만 더 분지르면 되오. 내 후딱 갈 테니 먼저 방에 가있으시오.”

“….”

“아, 빨리!”

 

결국 청문은 고개를 푹 떨구고 말았다.

그의 어린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으나,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고개를 숙이고 물러나는 것밖엔 없었다.

 

“그럼 이곳에 서있게 해주십시오.”

“뭐…?”

“사제가 벌을 다 받을 때까지, 저도 이곳에 서있게 해주십시오.”

 

청문의 또랑또랑한 목소리에 백오는 슬쩍 미간을 좁혔으나, 그 이상 말을 얹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듯 붉어진 청문의 눈가를, 방 안의 두 사람 모두 똑똑히 보고 말았기에.

백오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문 채 다시 회초리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열 개의 회초리가 모두 부러졌을 때. 하늘 한 켠에선 샛별이 떠오르고 있었다.

 

***

 

“아, 고만 좀 울어요! 누구 죽었소?”

“…안 운다.”

“얼씨구. 코나 좀 닦고 말하시지?”

 

청문은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청명의 종아리에 금창약을 살살 펴발랐다.

살갗은 온통 터져 새빨갛고, 그나마 성한 피부는 시커먼 피멍이 들었다.

단단한 근육이 올라붙은 청명의 종아리는, 차마 손을 대기도 겁이 날 만큼 엉망진창이었다.

 

“하이고, 이 코흘리개가 언제 커서 사람이 되나. 무인이 되면 칼에 베이고 창에 찔리는 것쯤이야 일상다반사인데, 이깟 회초리가 뭐라고 이리 수선이오?”

“사제가 혼나야할 일이 아니었다. 그건 전부 내 잘못이고, 내 실수였는데….”

 

검을 휘두르는 무인이 스스로의 검에 취하고, 무아지경에 이르러 깨달음을 얻는 일이 있다는 것은 청문도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런 광경을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이었지만. 그런 무인 앞에서 무방비로 몸을 내보이고 인기척을 냈으니, 강호에선 목이 달아나도 할 말이 없는 실수였다.

차라리 이 매의 절반을 제가 맞았으면. 그랬더라면 이토록 마음이 무겁고 죄스럽진 않았을 텐데.

 

“뭐, 이러나저러나 사람에게 칼질한 건 맞으니 나도 억울할 건 없지.”

“사제.”

“그것도 사형이 어디 보통 사람이요? 미래의 장문인 되실 분이 내 손에 골로 갈 뻔했으니, 단근참맥을 한 대도 아이고 죄송합니다 하고 엎드렸어야 했을 것을.”

 

청명의 너스레를 들으며 청문은 묵묵히 붕대를 감았다.

그 서툰 손길에 상처가 다시 아파왔을 것이 뻔한데도, 침상에 엎드린 청명은 별다른 불만을 내비치지 않았다.

평소처럼 심드렁한 목소리로, 무심하게 떠들어댈 뿐이었다.

 

“이러는 게 맞으니 궁상 좀 그만 떠시오, 사형. 비무를 한 것도 아니고, 수련을 한 것도 아닌데, 진검을 들고 사형제에게 진검을 빼들고 달려드는 미친놈은 매를 맞아야 하는 거요.”

“하지만 나를 해칠 마음으로 휘두른 칼이 아니지 않느냐.”

“그래서 사형이 안 다쳤소?”

 

청문은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그 반응을 뭐라고 해석한 것인지, 청명은 한숨을 푹 내쉬더니 벌떡 몸을 일으켜 청문을 보며 마주앉았다.

 

“사형. 도문이 어쩌고, 도사가 어쩌고 해도 화산은 결국 무파 아니오. 언젠가 사형도 검을 배우면 강호행도 나갈 거고, 협명도 떨치고 싶을 것 아니오?”

“…그렇지.”

“도사건 산적이건, 허리춤에 칼 찬 놈들은 다 똑같은 인간백정이오. 뭐 좋은 마음으로 휘두른 칼에 맞으면 안 다치나? 실수한 칼에 맞으면 좀 덜 아플 것 같소?”

 

청문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그가 화산에 입문한지 한 해도 되지 않았다 한들. 그리고 진검에는 손도 대보지 못하고 목검이나 조금 쥐어봤을 뿐이라 한들.

검이라는 것이 본디 사람을 상하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물건이라는 것을 모를 수는 없었다.

 

“사형이 어설프게 겉멋 들기 전에 분명히 말해주겠는데, 검에는 마음이 없수다. 의도가 어쩌고, 도(道)가 어쩌고 하는 건 다 개소리요. 어떤 마음으로 휘두르건 검에 베이면 사람은 상하지.”

“그래. 사제가 하고 싶은 말이 뭔지는 알겠다.”

 

청문의 대답을 들은 청명은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피식 헛웃음을 흘렸다.

 

“하. 그래, 뭔지‘는’ 알겠지만, 여전히 납득은 못 하시겠다?”

“당연한 것 아니더냐.”

“와, 쥐방울만한 사형 놈이 뭘 먹고 이리 똥고집이지?”

 

청명은 답답하다는 듯 끄응, 소리를 내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대충 올려 묶은 그의 머리카락이 엉망으로 흐트러졌다.

 

“뭐, 좋아. 이도 저도 다 마음에 안 들면, 그냥 내가 어른이라 책임졌다 칩시다.”

“…뭐?”

“그렇지 않소. 정 그렇게 찝찝하면 사고 친 건 사형이 맞다고 치자고요. 그치만 일단 사형보다야 내가 어른이니, 내가 책임지고 벌 받은 걸로.”

 

황당하기까지 한 그 말에 청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청명을 쳐다보았다.

입만 벙긋거리고 있는 청문을 보며 씩 웃은 청명은, 별 것도 아니라는 양 어깨를 으쓱해보일 뿐이었다.

 

“원래 애들이 친 사고는 어른이 책임져야 하는 거지. 그게 바로 나잇값 아니겠소?”

“아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아아, 됐어요, 됐어. 그냥 그렇다고 해요.”

 

청명은 피식 웃으며 손을 뻗어, 청문의 머리를 마구잡이로 헤집어댔다.

단정하게 빗어 넘겼던 그의 머리가 순식간에 까치집을 지었다.

 

“억울하면 나보다 더 나이 먹고 오시던가.”

 

엉망이 된 머리를 가볍게 툭툭 친 청명은 침상 위에서 훌쩍 뛰어내려 처소 밖으로 나가버렸다.

절뚝이며 멀어지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청문은 한참동안이나 멍하니 앉아있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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