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홀

3회차, 나후 님

B에게 by HB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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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질 수 있는 조각은 전시회장 뒤편에 위치하여 있습니다

여자는 표지 설치의 마무리 작업 중에 아리송해진다 우리가 삼차원의 세계에 어떤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무엇을 조각한다고 해도 그것이 결국 인간의 시신경에 의해서만 감상될 때 그는 자신이 깎아 문지른 시간이 일차원이나 이차원과 무엇이 다른지 의문해진다 그것은 펼쳐질 수도 없고 이어질 수도 없어서 궤적을 따라 사람이 걸어나가야만 전체의 상을 추상할 수 있는 것이 되는데 그렇다면 삼차원은 누구도 상상할 수 없고 누구도 바로 감각할 수 없는 무의미가 되지 않는지

공들여 깎은 누군가의 모조에 대한 모조는 어떤 사람들이 그것을 파악할 수 있도록 촉감이 재현되었으나 애시당초 저것과는 별개의 작품이 된다 크기와 모양이 다르며 그가 보기에는 그것의 숨쉬는 구멍들까지도 다르다 여자는 처음 자신이 왜 그것을 저 크기로, 모양으로 언어화하였는지 기억한다 지금 손에 들린 작은 상에는 아무런 호흡이 없다 부드럽게 계산된 곡률이 삼차원 프린터로 입력되어 조금 더 유려해졌단들 자신의 손이 닿았던 시간의 비늘이 없다 바늘이 없다, 찔러서 틔워 줄 폐도 싹도 없으며 가엾을 가생이마저 없다

진짜 코끼리라면 살갗에 손독이 오를 테니까 가령 거짓 코끼리를 만진다고 가정하였을 때 몇천 명의 사람이 다른 대답을 한다고 해도 사실은, 그것만이 온전한 이해가 아닌가 겹쳐지고 겹쳐져서 공통의 무엇이 생겨날 때까지 만지고 닳고 사라지고 부서져야 그것은 온전한 조각이 되는 것일까 이것의 모조가 무엇의 모조인지 밝혀낼 수 없는 것은 자신이 살아있는 것을 담아내고자 머리에 그것을 잡아 묶어두고 석고에 그은 첫 획이 원관념에 대한 살해였기 때문일까

상에서 이마가 도드라진 여자는 웃고 있다 사실, 뒷편은 없다 매끄럽고 반지르르한 뒤통수나 따끔거릴 정도로 튀어나온 옷의 라벨 같은 것이 숨어들었을 뒷편은 없다 이차원을 삼차원으로 옮길 용기도 애초에 그는 없었다 뒤로 가서 무엇이 보이는지 말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다른 여자는 비겁이 보인다고 했고 또다른 여자는 정직이 보인다고 했다 솔직하게 모르는 것도 비겁하게 용기있는 일이라고

등을 두드리며 떠난 곳에 우뚝 걸린 저의 조각은 만난 적 없는 여자의 사진처럼 삼차원 프린터로 계산될 수 없는 구조를 지녔다 몇 개의 쉼표와 긴 한숨이 굽이쳐 긁어낸 피부 위 고통 나의 언니를 만지게 해 주세요 요청 받은 대로 만들었으나 뒤늦게 알아버린 것은 조각은 촉각 외의 모든 것을 제공한다고 동생은 하루종일 그 앞에 서 있을 것이다

전시가 시작되어도 동생은 오지 않았고 만질 수 있는 조각을 걸면서 그것을 어루만지다 가져가고 싶어하는 여자애를 보다가 여자는 그래, 원래 조각은 훔쳐내는 것이라며 들리어보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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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댓글 2


  • 수집하는 나비

    우와 정말 어렵네요... 전 역시 길이가 길거나 호흡이 긴 시를 읽는 것을 어려워 하는 듯 합니다 ㅋㅋㅋ 근데 한 주제를 이렇게 조각조각 내어서 골똘히 들여다보실 줄 안다는 것이 대단하게 느껴져요 그런 의미에서 조각이라는 단어는 이 시 뿐만이 아니라 나후 님과도 잘 어울리는 것처럼 느껴지네요 전 2연이 너무 좋았어요 살아가면서 우연히 톡 떠오르는 감상과 고뇌를 시에 온전히 풀어 녹일 수 있다는 건 멋진 재능 같아요 잘 읽었습니다아아

  • HBD 창작자

    나후 님 시의 강점은 '일상의 감각을 시의 언어로 재구성한다'에 있는 듯합니다. 제가 한창 글을 처음 쓰기 시작했을 땐 있어 보이는 감성을 따라하려고 대상도 청자도 이미지도 없는 문장을 남발하곤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건 마치 광인이 혼자 중얼거리는 것과도 같은 글이었지요. 나 좋자고 쓰는 독단적인 글도 아니고 그렇다고 청자를 고려하는 글도 아니고. 그 시절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나후 님과 만났고 나후 님의 글을 통해 제가 많이 성장했음을 느낍니다. 그때 제 행보가 무척 부끄럽긴 합니다만 그 당시에 나후 님을 뵈어서 교류할 수 있던 건 정말 행운이었어요. 지금처럼 이렇게 귀한 글을 써 주시는 분과 함께 할 수 있으니까요. 사담이 무척 길어졌습니다. 이번 글은 실존하는 모양과 그것의 관념적인 모양과 그것을 모방한 조각품에 대한 시네요. 처음 원고를 받았을 때 길이에 1차로 놀랐습니다만, 그 내용의 통일성에 2차로 다시 놀랐습니다. 나후 님의 강점 두 번째. 무척 긴 글을 쓰시면서도 그 중심이 되는 코어를 결코 놓지 않으십니다. 그러니까 읽는 동안 피로감도 느껴지지 않고 중심이 단단하니 세부적으로 어떤 감각을 전하려고 하시는지 온전히 음미할 수 있어요. 이번 글은 개인의 고찰이 담긴 것이므로 그 내용을 지적하는 건 몹시 무의미한 일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후반부에 동생과 동생 대신 찾아온 어떤 여자아이가 등장하면서 단순한 공상 내지 독백으로 끝나지 않고 일련의 서사가 부여되었네요. 시를 마무리하는 데 있어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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