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뭄의 끝

언제쯤이면 이 폭염이 물러날까요?

번외-프루시안 에브의 시점.

*Warning: 독살로 인한 사망 묘사

BGM



쌍둥이 언니가 행방불명된 이후로 4년, 눈물이 완전히 말라붙을 때까지 걸린 기간이었다.

프루시안 에브는 이 기간동안 자신이 속부터 바스러져 내리는 듯한 느낌을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떠난 자가 남긴 짐의 무게는 그만큼 견뎌내기가 버거웠다. 그의 빈자리를 체감하고, 그의 자리까지 도맡아 채워내는 과정은,

“마치 긴 악몽을 꾸는 것 같았어요.”

그렇게 읊조리던 이는 한숨을 삼키려는 듯이 입술을 손으로 잠시 가렸다. 희고 기다란 손가락들이 부드럽게 흐르듯 마주 깍지를 끼었다. 나긋나긋한 목소리는 지독한 상냥함을 깔고 흐름을 거듭했다.

“그래서 처음엔 얼마나 그 애를 원망했는지. 최소한 중간에 스스로 마음을 돌려 되돌아오기를 바랐어요. 나를 영원히 떠나지 못할 거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에 말이죠. 저는 하다못해 소식이라도 가끔 알려달라고 일렀었는데….”

그 어조와는 달리 청자색 홍채는 차게 가라앉아 있었다. 시안은 모든 감정이 깔끔하게 배제되어 있는 청명함 그 자체로 정면을 응시한 후 동화를 구연하듯이 뇌까렸다.

“…하지만 리안은 서신조차 단 한 번도 보내주지 않았어요. 적어도 ‘어딘가에서 지내고 있다’정도의 간단한 소식마저 일절 없었고. 이해를 전혀 할 수 없었어요. 날 그토록 아꼈으면서, 왜 그렇게 매정히 가 버렸을까? 오지도 않을 파발꾼을 일 년 내내 기다리던 사람만 우스운 꼴이 되었죠.”

그는 눈매를 곱게 접어웃고는 나른한 태도로 턱을 괴었다. 그렇게 방만한 자세를 유지하던 시안은 적당한 침묵이 흘렀을 때쯤 입술 끝을 내렸다.

“아버님께서는 퍽 편안하셨겠어요. 두 딸이 모두 멍청해서, 위에서 혀를 놀리는 것만으로 쉽게 조종하실 수 있었으니까요.”

입술 사이로 조소와 자조가 동시에 섞여 나왔다. 가느다란 웃음기였지만 정적이 감돌고 있는 방 안의 분위기를 화들짝 놀라게 하기에는 썩 충분한 음색이었다. 시안은 정말 우습다는 듯이 즐겁게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아버님 계산대로 흘러갔다면 저는 괴물을 등에 업고 폭정을 휘두르는 허수아비 가주가 되었을 거예요. 아버님이 부와 명예를 손가락 까딱하지 않고 오랫동안 누리실 수 있는 가장 간단하고도 빠른 방법이었겠죠.”

그는 맞은편의 벽에 걸린 초상화를 감상하는 시선으로 찬찬히 훑었다. 그림 속의 노인은 근엄하고 권위있는 표정으로 화폭 바깥의 세계를 굽어보고 있건만, 정작 초상화의 주인은 침상에 시든 듯이 누워서 생사를 헤매고 있었다. 시안은 이런 아이러니한 풍경을 썩 마음에 들어했다.

“열여덟 해… 결코 적은 햇수가 아니고, 아버님께서는 그보다 더 오래 전부터 계산에 검토를 더하셨을 거예요. 뛰어난 파동술의 재능을 노리려면 어떤 파동사와 혼인을 해야 할지, 그렇게 태어난 아이들을 어떤 식으로 짓누르고 구슬려서 길들일지… 타인을 인격체가 아닌 인형으로 여기고 장기말처럼 움직이는 방법밖에 모르시던 분이셨죠. 거기에 놀아나 모든 걸 혼자서 짊어졌던 언니도 바보 같았고, 그걸 당연하게 여겼던 저도 바보 같았어요.”

원을 그리던 손가락 끝이 은연중에 탁자 표면을 꾹 눌러, 손톱 안쪽의 살이 더욱 희게 질려갔다. 시안은 건조한 낯으로 한동안 제 앞에 누워있는 이를 응시하다가 고개를 찬찬히 기울였다. 고요한 방 안을 정답게 울리던 목소리가 차츰 가라앉았다.

“슬슬 궁금하시죠? 언니를 탓하다가 갑자기 주제를 여기로 돌린 이유.”

들릴 리 없는 대답을 구하듯 질문을 던진 뒤, 시안은 자신의 독백을 꿋꿋이 이어갔다. 조곤조곤한 목소리로부터 음률이 점점 물러나고 있었다.

“요행 만으로 성공 가도를 걷고자 하시다가 실패의 기미를 맛보시니 얼마나 겁이 나셨을까요? 애써 기른 괴물이 도망쳐 나갔다가 갑자기 앙심을 품고 돌아와서 난동을 부릴 줄 아셨나보죠? 그렇게 부족하다던 가문의 전사들을 자객으로 보내실 정도였잖아요. 전 처음엔 그게 언니를 설득해서 여기로 돌아오게 하기 위한 건 줄 알았는데, 알아요, 저도 그때까지 순진해 빠졌었단 걸.”

시안은 가볍게 코웃음을 치고, 품속에서 자그마한 직사각형 모양의 나무패를 꺼내어 탁자 위에 세웠다. 그의 손가락 끝이 이번에는 나무패의 테두리를 어루만진다. 지금껏 감정 하나 없었던 눈동자의 겉면에 노기가 조금씩 스며들었다.

“…솔직히 말해볼까요? 아버님께서는 언니의 사망 소식을 공표하셨지만, 전 그거 믿지 않거든요. 언니의 죽음은 이런 나무 쪼가리 따위로 증명될 게 아니에요. 그래서 이걸 왜 제게 주셨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어요. 설마, ‘너도 말을 듣지 않으면 숙청해 버리겠다’… 그런 의미였던 건가요? 저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

조금씩 빈정거리던 어투에마저 선명한 분노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시안은 나무패를 거머쥔 그대로 탁자의 표면을 내리누르며 짓씹듯이 속삭였다.

“듣자 하니 '암살조'가 그 애를 몰아넣고 제 언어를 빌어 이간질했다더군요. 보나마나 아버님의 지시였겠죠.”

여전히 묵묵부답. 간혹 가다 들리는 희미한 숨소리만이 간신히 침묵을 희석하고 있었다. 시안은 천천히 심호흡을 하고는 한결 가라앉은 어조로 말했다.

“제가 화풀이를 하는 것 같다 생각하신다면 유감이에요. 언니에 대한 일은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에 지나지 않거든요.”

시안은 이제껏 다리를 꼬고 있던 자세를 풀어내며 올곧게 상대방을 노려보았다. 그가 보내는 냉엄한 시선과 싸늘한 목소리가 주위를 감싸고 있던 공기마저 스산하게 냉각시켰다.

“아버님… 당신이야말로 괴물이란 사실을 알고 계실까요? 지금까지 아버님 때문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고통스러워하며 눈물을 흘렸는지 헤아리고 계실까요? 아버님의 탐욕이 얼마나 많은 업을 쌓게 되었는지 알고 계실까요? 아버님께서는 그 모든 것들을 청산하고 참회할 만한 양심을 추호라도 갖고 계실까요?”

매섭던 언행이 평소처럼 사근사근해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뒤이어지는 목소리는 한숨처럼 옅었다.

“아마 지금 아버님이 겪고 계실 고통은 그에 비하면 새발의 피일 거예요. 당신의 삶 전체에 비해 사 년이란 시간은 너무나도 짧잖아요. …조금 있으면 그 고통도 끝날 거란 사실이 안타깝게 느껴질 지경이에요. 사실 당신의 최후는 이렇게 간단하고 허무하게 이루어지면 안 됐는데.”

시안은 매초 초라하게 죽어가는 자신의 혈육을 고요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바라보다가, 이 이상 볼 일 없다는 듯이 자리를 걷어내고 일어났다.

“…내일 마지막 약을 지어드릴게요. 아무리 저라도 당신 목숨줄을 여기까지 붙잡고 늘리는 건 버겁거든요. 그때까지 푹 주무시고 계세요.”

그는 무미건조한 말을 남겨놓고 그 방에서 걸어 나갔다. 작은 그림자조차 남지 않은 어두운 공간에는 바스러진 신음만이 감돌고 있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고독한 장소였다.



가주의 죽음은 예정되어 있었으며 필수 불가결한 것, 동시에 불가피한 것이기도 했다.

인륜을 숱하게 저버린 해악 덩어리를 오래 방치하면 그것은 자연히 깊은 수렁을 만들어내고 주변의 것들을 나락으로 끌어당겨 내리고 만다. 그리고 이 현실은 자신이 편안함에 안주한 나머지 외면을 일삼아왔던 것에 대한 업보나 마찬가지였다. 당장 제 쌍둥이가 고통에 몸부림치는 광경을 목도해도 시안은 그림자 안쪽에 서서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다. 리안이 혹독한 훈련을 버티다 못해 쓰러지더라도 ‘너는 그냥 내 옆에 있어 주면 돼.’ 시안은 그 말 하나만 믿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가주가 만들어 낸 그 자그마한 사회가 시커멓게 물들어 있었음에도, 시안은 그게 자신의 세상 그 자체인 줄 알고 제 세상이 깨질까 봐 마냥 불안해하기만 했었다. 되돌이켜보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모를 일이다. 등만 떠밀릴 줄 알았지 자신의 의지로 뭔가를 해낼 생각도 떠올리지 못하다니. 그런 면에서 리안은 오히려 현명했다. 제 언니가 새장을 부수지 않았더라면 그 동생은 꼼짝없이 안에 갇힌 채로 서서히 말라죽어갔겠지. 시안은 자신의 언니가 지옥같던 현실을 참지 못해 도망을 택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신을 그 지옥에서 해방해주려 했던 것이란 사실을 뒤늦게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결국 시안은 새장 바깥의 일그러진 형체들을 몸소 마주하며 스스로 죄를 짊어지기로 했다.

이 집안을 이루는 틀을 뜯어고치는 일이란 고역 그 자체였지만 그만한 가치는 분명 있었다.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하는 중요성을 톡톡히 깨달은 바가 있어, 시안은 자신의 쌍둥이가 자취를 감추고 첫 해를 넘긴 후부터 실권을 거머쥐기 위해 모든 역량을 쏟아부어왔던 것이다. 사람이 독기를 품게 되니 안 될 일도 딱히 없었다.

시안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가주를 무력화시키는 작업이었다. 가장 큰 장애물을 없애야 그다음의 일들이 한결 수월해질 테니. 시안은 오랫동안 독 자체로서 군림한 이에게 형벌로써 독을 내렸다. 이후 시안은 권세를 바깥으로 늘리는 대신 내부를 살피고 비뚤어진 부분을 바로잡는 일에 집중하려 했다. 폐단이나 다름없었던 가문 내 관습들을 없애거나 뜯어고치기 위해 자신의 편에 서 줄 이들을 최대한 끌어모았다. 이 단계에서 유혈 사태만큼은 피하고자 했으나, 세력 간의 충돌은 결국 불가피했다.

숱한 암살 시도에서 살아남는 데 성공한 시안은 본격적으로 치유파동사로서의 자질을 펼치기 시작했다. 전쟁의 폐허 밑에서 신음하는 사람들과 마수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한편, 가주가 그 동안 세워 온 탑으로부터 벽돌을 하나씩 뽑아서 제 방식으로 차근차근 허물었다. 만일 리안이 긴 여행에서 돌아온다면, 달라진 저택의 분위기를 보고 ‘이게 정녕 내가 기억하던 그 곳이 맞는가’라는 질문을 던져서 시안으로 하여금 뿌듯한 감정을 느낄 수 있도록 말이다.

'…과연 뿌듯해할 수 있을까?'

시안은 스스로 되물었다. 리안은 나더러 반드시 인간으로서 살아가라고 말했었다. 그가 생존 방침으로 위악의 길을 택했다면, 나는 여기에서 살아남기 위해 위선의 길을 택했다. 그 길을 쉼 없이 걸어온 나는 아직 인간이 맞는가?

시안은 가디안의 슬픈 눈빛을 애써 모르는 척했다. 킬리아에서 가디안으로 성장한 파트너는 폭풍같은 4년이 지나가는 동안 주인을 든든하게 보좌해 주었지만, 가끔씩 제 주인에 대해 연민의 감정을 품는 것을 숨기지 못했다. 시안은 쓸쓸하게 미소했다. 자기연민 따위는 하지 않는 성정인데도, 영혼의 짝꿍인 가디안에게조차 그런 눈빛을 받을 정도면 과연 얼마나 제 속이 망가져 있을지 궁금했다. 시안은 자신의 손으로 가슴을 도려내고 심장을 꺼내어 확인해보는 상상을 해보다가 얼마 안 가 그만두고 말았다.

“가자, 리브라. 할 일이 아직 많이 남았어.”

시안은 제 뒤를 소리 없이 따르는 가디안과 함께 텅 빈 복도를 따라 걸었다.



장례를 치를 준비를 하라 일렀는데도 얼굴빛이 크게 변한 이들은 딱히 보이지 않았다. 그저 다들 ‘때가 되었구나’ 하고 납득할 뿐이었다. 식은 간소히 진행될 예정이라 크게 준비할 만한 사안은 없었다. 시안은 저택 안을 돌아다니며 구성원들에게 간단한 지시를 남기고, 어느 정도 틀이 잡혀갈 때쯤에야 겨우 숨 돌릴 틈을 얻어낼 수 있었다. 가디안과 함께 정원의 한 구석에 앉아 짧은 휴식을 취하고 있던 그는 머리 위에 분홍빛 동그란 공처럼 생긴 마수를 얹어 둔 꼬마가 건물의 벽 뒤에 숨어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4년 전에 쌍둥이가 사라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가주의 손에 이끌려 들어온 아이로, 말마따나 전쟁통에 가족을 잃고 길을 떠돌고 있었다고 하였다. 그게 사실인지는 알 도리가 없었지만, 공교롭게도 치유파동의 자질이 있었기에 시안이 거두겠다고 뜻을 밝힌 이후 쭉 보살펴 온 아이였다.

시안은 밝은 미소를 지으며 아이를 향해 손짓했다. 아이는 푸린을 꼭 끌어안고 쪼르르 달음질쳐 그에게 다가온다.

“무슨 일이니?”

“언니랑 오빠들이 놀아주지 않아요. 다들 바쁘다고 다른 데 가서 놀라고 했어요.”

아이가 부루퉁한 표정으로 일러바치고는 말간 시선으로 시안을 올려다보았다. 시안은 티끌없이 초롱초롱한 눈동자를 보며 까닭 모를 울렁임을 느끼다가 가까스로 말했다.

“오늘은 다 바쁠 거야. 지금도 많이 심심해? 내가 잠깐 놀아줄 순 있을 텐데.”

이것도 나 때문이구나. 시안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는 한편 상냥함을 유지하며 아이에게 물었다. 아이는 입술을 뾰족하니 내밀다, 갑자기 그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이야기꾼 아저씨가 광장에 와있대요. 같이 들으러 가요. 다른 애들도 다 모일 거라고요!”

시안은 눈을 두어번 깜빡이다가 빙그레 웃었다.

“그럴까?”

아이는 신난 발걸음으로 시안을 이끌고 마을의 광장으로 향했다. 마을의 다른 아이들이 광장의 분수 근처에 와글와글 모여있는 한가운데서 로브 차림의 사내가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 옆에 선 강철의 마수는 장난꾸러기 꼬마들에게 둘러싸여 익숙하게 놀이상대 역할을 해주고 있었다. 작은 마수들이 내는 울음소리와 마을 아이들이 내는 웃음소리가 한데 섞여 들리는 가운데, 시안은 이야기꾼의 목소리가 잘 들릴 만한 위치를 찾아서 아이와 나란히 자리를 잡았다. 이야기꾼은 모여드는 관중 사이에서 시안을 발견하고 빙그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시안은 둥글게 휘어지는 새파란 눈이 언제나처럼 맑은 하늘같다고 여겼다.

그 이야기꾼은 세상을 방방곡곡 돌아다니며 만나는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곤 하는 이였다. 그가 전해주는 이야기들은 하나같이 흥미진진하고 혼을 쏙 빼놓는 듯한 맛이 있었기 때문에 어딜 가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인기가 많았다. 이야기꾼이 아이들에게 쓸데없는 환상을 품게 만든다며 못마땅하게 여기는 어른들도 있었지만, 그의 방문 날짜를 손꼽아 기다리는 이들도 적잖았다. 시안 역시 한때는 그러했던 아이들 중 하나였다.

이야기꾼이 이번에 가져온 이야기는 어느 머나먼 지방에 끝없는 겨울을 몰고 온 거대한 마수와, 그 마수를 물리치는 원정을 떠난 기사단의 모험을 노래한 서사시였다. 원대한 각오를 안고 소중한 것들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기사단, 패배와 후퇴를 겪어도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 이들의 이야기는 특히 아이들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모양이었다. 시안은 제 곁에 앉은 아이가 또래들과 덩달아 깊이 몰입하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저도 모르게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려냈다.

눈 앞에 펼쳐지는 오아시스에 마음을 뺏겨 다른 상념들은 모조리 던져버릴 수 있었던 순간. 지금으로서는 드물기만 한 감정인데, 그 옛날에는 자주 맛볼 수 있었다는 게 새삼스러웠다. 그때마다 제 곁에 어김없이 붙어있었던 이도 자신과 같은 감정을 느끼곤 했을까.

그렇게 다른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 이야기꾼은 진도가 늘어지지 않도록 적당한 지점에서 절묘하게 이야기를 끊어버렸다. 여기저기서 아쉬움과 감칠맛 다분한 감정들이 속속들이 튀어나왔다. 이야기꾼은 더 들려달라 조르는 아이들을 향해서 '날이 어두워질 테니 내일 같은 시각에 이어서 이야기를 들려주겠노라'고 약속한다. 결국 관중들은 진한 아쉬움을 남긴 채 뿔뿔이 흩어졌으며, 몇몇 아이들은 여운을 못 이기고 저들끼리 역할극을 한답시고 부산을 떨기 시작했다. 시안의 곁에서 푸린을 꼭 껴안고 있던 아이가 불쑥 허락을 구했다. "저도 저 애들이랑 같이 놀고 싶어요." 그리고는 푸린과 사이좋게 반짝거리는 눈빛을 보내오니, 시안은 못이기는 척 어두컴컴해지기 전에 돌아오라고 일렀다. 아이는 제 또래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팔짝거리며 뛰어갔다. 시안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보스로라의 갑주를 닦아주고 있는 이야기꾼에게 다가갔다. 이야기꾼은 시안의 얼굴을 보고 활짝 웃는다.

“우리 몇 년 만에 만나는 것 같지 않아요? 그새 많이 핼쑥해졌어요.”

시안은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가만 고개를 젓고는 이야기꾼이 등지고 있던 분수대의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이야기꾼도 제 마수를 살피는 일을 끝마치고 그 곁에 나란히 앉는다. 이야기꾼은 지금껏 눌러썼던 로브의 후드를 벗으며 대화의 문을 열었다.

“몇 년 전 찾아왔을 때만 해도 이야기 들으러 오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는데, 근래 들어서는 부쩍 늘었더라고요. 이곳도 살기 꽤 좋아졌나봐요.”

사내의 흉내를 벗어던진 이야기꾼을 잠자코 바라보던 시안이 미소를 지었다.

“이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으니까요. 저는 그 뒷수습을 하느라 정신없이 살다 보니, 이거 좀 볼래요? 벌써 머리가 하얗게 샜어요.”

“에이. 아무리 오랫동안 못봤어도 어떻게 단골 손님의 모습을 까먹겠어요. 원래부터 그런 색이었잖아.”

이야기꾼은 재치있게 대꾸하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괜히 제 머리카락을 매만져보던 시안도 마찬가지로 미소를 흘렸다. 호탕한 웃음소리는 골목 어귀에 이르러 흩어져버리고, 찰나의 침묵이 찾아들었다. 이야기꾼은 지팡이의 손잡이 부분을 어루만지다가 톡 튀듯이 물어왔다.

“그러고 보니 오늘 그 분은 안 오셨네요. 시안의 쌍둥이… 아, 리안이요. 오늘 이야기 들려준다고 기대 많이 하고 있었는데~…”

그는 시안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보고 재잘재잘하던 목소리를 흐려냈다. 보스로라가 눈치를 잠깐 잃었던 조련사의 등을 툭 건드리는 사이, 시안은 표정 위로 떠올려버린 감정을 붙들어 구겨버리고 고개를 흔들어 괜찮다는 시늉을 했다.

“먼 곳으로 여행 떠났어요. 죽은 거 절대 아녜요. 진짜로요.”

상대방을 안심시키기 위해 뱉은 목소리가 도중에 울컥 튀어 올랐다. 이야기꾼은 이 갑작스러운 반응에 도리어 놀라서 얼른 손을 들어 진정시키는 제스쳐를 취한다.

“진정해요! 그래도 그렇지 그런 생각 추호도 하지 않았는데도.”

이야기꾼은 셀러처럼 입을 꾹 다물어버리는 시안의 얼굴을 멀거니 들여다보다가, 곧 시선을 거두고 정면의 광장 풍경을 응시했다.

“…언젠가 돌아온다는 말은 했었나요?”

시안은 그가 일부러 주어를 빠뜨렸음을 알아차리고 마음속으로 감사를 표했다. 평소엔 감정을 가다듬는 게 숨을 쉬는 것처럼 편안했는데 지금만큼은 동요해버린 감정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할 것 같았다.

“…아뇨. 돌아오지 않을 거예요.”

그의 중얼거림에 이야기꾼이 고개를 갸웃하니 기울인다.

“왜죠? 시안이 여기에 있는데도요?”

시안은 그 질문을 들으며 멍하니 하늘을 응시했다. 지는 해가 하늘을 차츰 물들여가고 있었다.

“제가 여기 있어서요. 제가 그 애한테 잘못을 저질렀거든요….”

그는 무심코 말을 뱉고 나서 흠칫 어깨를 떨었다. 눈을 데록데록 굴리던 이야기꾼은 시선을 앞으로 던지며 지나가는 듯이 말했다.

“이상한걸. 제가 기억하는 한 그분은 당신과 있을 때 행복해 보였는데도요. 그러니까, 둘이서 제 이야기를 들어주러 올 때마다요.”

“리안이요…? 제가 늘 졸라대서 지겨워했던 것 같았는데.”

그는 시안의 의아한 눈빛을 곁눈질하고는 가만히 보스로라의 팔뚝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글쎄? 숱하게 돌아다니는 동안 내 얘기 들으면서 지루해한 사람들은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는데요. 아직도 기억나네요, 숲의 신에 대한 전설을 얘기해줬을 때 두 사람 눈에서 빛이 반짝반짝 쏟아졌던 거.”

그랬던가? 시안은 자신의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그가 흔히 지었던 시큰둥한 표정이 그때도 얼굴에서 떠나지 않았던 것 같았는데…. 이마저도 워낙 오래된 기억이라 시안은 정신이 약간 혼란스러워지는 기미를 느꼈다. 이야기꾼은 그의 표정을 눈여겨보고 넌지시 말을 이었다.

“리안은 당신이 즐거워하는 걸 보고 덩달아 즐거워했어요. 비슷하게, 시안이 속상해하면 같이 속상해했고, 음, 뭐라고 해야 할지… 감정의 우선순위를 자기 자신이 아니라 시안에게 둔 느낌이었달까. 전 두 사람처럼 파동사는 아니더라도 그 정도는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는걸요.”

시안은 말문이 막히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땅을 내려다보았고, 그러자 제 곁에 자리했던 가디안이 살며시 손을 뻗어 그의 손가락을 쥐었다. 시안은 제 마수의 염려 섞인 도움을 받아 마구 요동치는 감정을 억누르며 한숨 비슷한 것을 토해냈다. 그러는 동안 이야기꾼은 팔을 뻗어 그의 어깨를 다정하게 두드려준다.

“그분은 그 정도로 시안을 소중히 여기고 있었다는 거예요. 먼 곳으로 떠난 지금이라고 해서 달라진 건 없을테고요. 당신을 끔찍이 그리워하면 그리워했지, 당신이 밉다고 팽할 것 같지는 않아요. 시안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저로선 모를 일이겠지만요, 음, 그래도 당신을 이해해주지 못할 위인은 아니란 걸 알아요. 돌아오지 않는 이유는 다른 뭔가의 사정이 있어서겠죠. 혹시 들은 소식은 있어요?”

시안은 조금 힘겨운 심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가주가 자객으로 보냈던 자들을 사로잡아 몇 번이고 행선지를 추궁했는데도 들은 대답은 없었다. 그들은 그에 대한 내용을 무덤까지 물고 갈 기세로 침묵했었다.

이야기꾼은 상대방의 우울한 기색을 지켜보며 고민에 잠기는 듯한 얼굴을 했다.

“…설마하니 숲의 신님한테 붙잡혀 다른 시대에 떨어지기라도 한 건가…?”

밑도 끝도 없는 혼잣말을 들은 두 마리 마수가 동시에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시안은 다시금 멍한 얼굴이 되었다. 이야기꾼은 그들의 모습을 보고 양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미안! 농담, 농담이에요. 기분 상하게 할 의도는 없었어요.”

마수들의 질타 섞인 눈총을 얻어맞으며 ‘말실수를 했네, 미안해요.’하고 쩔쩔매는 이야기꾼을 보던 시안의 입가에 어렴풋이 미소가 떠올랐다. 그것을 느낀 가디안이 제일 먼저 시선을 돌렸고, 뒤이어 이야기꾼과 보스로라의 시선이 같은 곳, 즉 시안의 얼굴을 향했다. 순간의 정적이 흐른 후, 시안은 한결 평화로운 어조로 중얼거리듯 답했다.

“…앞으로 돌아오지 않더라도 어딘가에서 행복하게 살아간다면… 전 그걸로도 만족할 것 같아요.”

시안은 자신만의 굳은 믿음을 토로하며 고개를 올렸다. 완연한 석양이 하늘을 온통 주홍빛으로 물들여놓고 마을 멀리 보이는 지평선에 땅거미를 내리고 있었다. 이야기꾼은 시안의 기색을 조심스러운 태도로 살펴보았다. 애초 궁금증을 꺼냈던 건 제 쪽이었지만, 답을 해 준 쪽도 어지간히 고민스러웠던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처음엔 핼쑥하기 그지없었던 낯빛에 이만한 안정감이 깃들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야기꾼은 점차 어둠이 깔리는 골목을 응시하며 나직이 말했다.

“어릴 적에 고모님이 말씀해주셨던 게 있어요. 인생에서 가장 복 받은 사람은 이별 이후에도 언제나 행복하기를 기원받은 사람이라고….”

사고를 텅 비운 채로 그 말을 듣던 시안은 갑작스레 제 파트너가 크게 동요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는 궁금증을 느낄 새도 없이 입을 손으로 가렸다. 목 아래 깊숙한 곳으로부터 치솟아 오르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으나, 단지 그런 행동만으로는 능히 막을 수 없음을 금방 깨닫고 말았다. 이야기꾼은 작은 흐느낌을 들으며 걱정스러운 기색을 띠었지만 말을 멈추지 않았다.

“리안은 당신이 이런 식으로 두려워하길 원치 않을 거예요. 당신이 방금 그의 행복을 빌었듯이, 리안도 당신이 언제나 행복하길 바랄 거라고요. 시안이 그에게 있어서 행복 그 자체였단 사실을 잊지 말아주셨으면 해요.”

이야기꾼의 목소리가 귓가에 아른아른 울리는 것 같았다.

“…쌍둥이가 함께 행복해야죠.”

결국, 시안은 줄곧 참아왔던 것을 풀어놓고 말았다. 그것은 죄책감, 그리움, 원망, 서러움, 회한, 고독감, 그 외 다른 모든 감정들이 한꺼번에 뒤엉켜 만들어진 울음이었다. 그는 이야기꾼이 제 손을 잡아주는 걸 깨닫지도 못한 채로 눈물을 펑펑 흘렸다.


4년 만에 쏟아내는 눈물은 지나치게 쓰라리고 달았다.




*<겨울을 가져온 마수와 원정대> 이야기는 러닝커(그겨울의 끝) 스토리에서 차용했습니다..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