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쯤이면 이 안개가 걷힐까요?
번외-시오레의 시점.
리안의 레인저 스쿨 입학 후 동급생의 시점에서 바라본 1년 간의 기록입니다.
트레이너 활동을 길게 하다 보면 제아무리 싹싹한 인간성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대인 관계를 만드는 데 있어서 어쩔 수 없이 편식성이 생기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이 사람은 나와 견줄 수 있을 만큼 강한가, 저 사람은 포켓몬과 괜찮은 유대를 맺고 있는가, 그 사람이 지닌 트레이너의 긍지는 내가 인정할 만한가, 기타등등. 자신에게 유해할 것 같으면 경계하고, 무난할 것 같으면 손을 내밀었다. 두 번째 사항을 제외한 나머지는 트레이너의 길을 포기한 사람에게는 더 이상 유효한 지표가 되지 못하겠지만 습관적으로나마 판단하게 되는 종류들이었으며, 타인에 대한 첫인상이 흔히 여기서 결정되고는 했다.
시오레 칼란도스는 트레이너 생활을 모두 청산한 후 허전함과 막막함 사이에서 한창 헤매고 있던 중이었다. 누군가가 보호자와 함께 들어와서 제가 앞서 행했던 입학 사전절차를 밟는 모습을 지켜보게 되었는데, 그때 그에게서 느낀 첫인상은 꽤 다양했던 편이었다. 멋진 조로아크를 데리고 있는 트레이너, 남과의 거리감을 더 익숙하게 느낄 것 같은 사람, 주변의 모든 걸 낯설어 할 듯한 초년생. 몬스터볼을 소지한 걸로 보아하니 그 역시 트레이너에서 레인저로 전향을 하려나 보다 하는 생각에 반가운 마음이 떠오르기도 했다. 아무튼 사무실에 지원자 둘이 덩그러니 남게 된 이후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 시오레는 자기 쪽에서 먼저 인사를 건네보기로 하였다.
“그 쪽도 트레이너였나봐요? 저도 그런데. 우리 잘 하면 동기가 되겠네요.”
거대한 풍채의 조로아크와 나란히 다소곳하게 앉아있던 그는 갑작스레 걸려오는 말에 화들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더랬다. 긴장을 많이 했나 싶어서 그다음에는 "시오레 칼란도스, 성은 빼고 그냥 시오레라 불러요."라고 자기소개를 했더니, 그이는 어물어물하게나마 자신의 이름을 말해주었다. "리안이라고 부르면 돼."
한 번 말을 붙이니 대화에 살을 붙여나가는 것도 그다지 어렵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낯선 환경에 주눅이 들어있는 것처럼 보였던 그가 띄엄띄엄 말문을 이어주는 모습은 퍽 고맙고 기특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나는 궐수시티에서 왔어요, 풍란 관장님이 계신 곳! …어라, 어딘지 몰라요?”
“먼 지방에서 온 지 얼마 안 됐거든. 난 그냥 이름 없는 시골 출신이야.”
“아하, 여기까지 와서 많이 낯설겠네. 같이 오셨던 분은 누구예요? 친척?”
“아니, 그냥... 음, 나랑 가까운 사람.”
"흐응, 악수를 안 받아주길래 사이가 안 좋은 줄 알았는데요."
남자 쪽이 먼저 청한 악수를 받아주지 않았던 모습을 상기하며 말하자 리안은 의아한 반응을 보였다. 저건 꼭... 악수가 무엇인지 모른다는 태도였다.
"악수...?"
"어라, 악수, 그 왜 있잖아요. 만났을 때나 헤어질 때 나누는 인사요. 제가 이렇게 손을 내밀면, 자, 그쪽이 손을 잡는 거예요."
리안은 시오레가 내민 손을 특유의 멍한 얼굴로 바라보다, 자기도 머뭇머뭇 손을 내밀었다. 시오레는 빙긋 웃어주곤 그 손을 맞잡고 한 번 힘차게 흔들었다.
"이렇게요. 잘 기억해둬야 나중에 곧잘 써먹을 수 있답니다?"
"어, 어어... 고마워."
어물어물 감사의 말을 중얼거리던 리안은 당황스러운 감정을 숨기려는 듯이 다른 주제를 어물쩍 꺼냈다.
"그으, 파트너, 누굴 데리고 왔어?”
“워글이요, 나랑은 마음이 잘 맞는데 워낙에 덩치가 큰 새 포켓몬이라서 실내에서는 볼 밖으로 잘 못 꺼내요. 그나저나 조로아크 친구도 엄청 크다~ 어디서 만났어요?”
“어렸을 때 동네 골목길에서 만났던 포켓몬이야. 이름은 아인스.”
“진짜로 의젓해보이네요! 평소엔 조로아크를 장난꾸러기 이미지로 보고 있었는데, 이 친구는 그렇게 보면 안 될 것 같아.”
서로의 겉면을 확인하듯 시작되었던 일련의 대화는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게 도란도란 이어졌고, 덤으로 서로 자연스레 말도 놓는 사이가 되어버렸고. 덕분에 시오레는 그에 대한 첫인상을 ‘보기보다 정다운 사람’이라고 대폭 수정할 수 있었다. 상대방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모를 일이겠지만, 어쨌든 이 정도면 가까운 사이로 지내는데 큰 무리는 없을 것이라 여겼다. 더군다나 리안은 인간 친구를 적극적으로 사귀기 힘들어할 타입이 확연했는지라 아무래도 자신이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레인저 양성학교에서 받는 교육의 이수 기간이 1년이라지만 결코 짧지 않은 기간인데, 그 동안 수료생들과 외따로 떨어져 지낸다면 얼마나 쓸쓸하겠는가. 마침 기숙사도 같은 방으로 배정받아 당분간 같은 공간을 공유하게 되었으니 그가 어떤 사람인지 관찰해 볼 기회도 늘어날 참이었다. 다만, 무엇 때문에 레인저의 길에 들어왔는지에 대해서는 물어볼 생각이 없었다. 그건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에 들어서 있는 궁금증이고, 아직은 그런 내용에 대한 질문을 던질 적절한 시기가 아니었으니까.
그다음 날 지원자들을 대상으로 입학 테스트가 치러졌을 때, 시오레는 이 친구가 꽤 비범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레인저들은 험한 자연 속을 거침없이 뛰어다녀야 할 일이 많은지라, 그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기본적인 체력을 지녀야 했다. 따라서 레인저의 길을 가볍게 여겼다가 여기서부터 낙방하게 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들은 적이 있었는데,
“…이제 그만 내려오셔도 됩니다.”
매달리기를 측정할 때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살아남아도 철봉에서 내려오지 않는 리안에게 교관이 침착하게 던진 말이다. 리안은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철봉에서 손을 놓고 땅 위에 가볍게 착지했다. 밑에서 숨을 돌리고 있던 지원자들의 시선은 진작부터 그에게 쏠려있었다. 근육몬은 자신이 측정한 시간값과 리안을 번갈아 쳐다보다 교관에게 기록을 조용히 전달한다.
“안 힘들어…?”
시오레가 슬며시 다가가서 물어보니, 리안은 차분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좀 숨이 찬 거 빼고는 딱히.”
“'좀'?”
“응. 원래는 이것보다도 더 버틸 수 있었는데.”
리안은 주머니에서 체크리스트를 꺼내 방금 완료한 종목 옆에 가위표를 치며 중얼거렸다. 시오레는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아까도 아인스랑 윗몸일으키기 경쟁을 하던데, 가급적 무리하지 마. 지금까지 끝낸 것만 채점해 보더라도 넌 진작 통과했을걸. 뭐 남았어?”
“단거리 달리기.”
시오레는 여러 번 접었다 펴서 너덜너덜해진 종이로 부채질을 하다 어깨를 으쓱했다.
“같이 수분 보충하고 쉬었다가 갈까?”
리안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시오레는 그런 그를 보며 힘을 숨긴 무림고수의 이미지를 떠올리고는, 호루라기 소리와 열기가 가득한 체육관 건물의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달리기 종목 시험을 치르기 위해 모인 지원자들의 무리에 합류한 뒤의 일이다. 자신의 차례가 되어 출발점에 서는 리안에게 묘한 눈길이 집중되는 게 그새 입소문이 돈 모양이었다. 출발 신호가 떨어지고, 그가 날쌩마처럼 트랙을 질주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학기 생활 중에 체육대회 같은 게 있으면 저 애가 관심을 유독 많이 받겠다 싶은 생각을 떠올리는 동안, 곁에 있던 누군가가 다른 이에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얼핏 들려왔다.
“괴물이 들어왔네. 생긴 건 맹한데 혼자서 앞서나가는 걸 보니까 생각보다 독한가 봐.”
"저런 애랑 같은 베이스에 배정받는다면 짜증날 걸..."
시오레는 제 근처에 서서 대기하고 있던 조로아크의 시선을 눈여겨보고는 가만히 팔짱을 끼었다.
“순수하게 감탄만 하면 될 걸 왜 뒤에서 수군거려요?”
시오레는 힐긋 저를 돌아보던 얼굴이 움찔 놀라서 다시 앞으로 향하는 걸 지켜보며 입술을 비죽였다. 하여간, 어딜 가나 속이 꼬인 사람들이 있다. 제가 끼어들지 않았더라면 이 과묵한 조로아크가 길길이 날뛰었을 거라고, 어째서 아인스가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는지는 모를 일이었지만 ‘괴물’이라는 단어를 상당히 거슬려 하고 있음은 굳이 트레이너의 감을 내세우지 않아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어쨌거나, 천재는 피곤한 법이라고 하던가? 그는 여유롭게 도착지점을 지나 돌아오는 리안에게서 순서를 이어받으며 생각에 잠겼다. 옛날에 다녔던 트레이너 스쿨에서는 어느 반에 영재가 나타났다 하면 분위기의 중심점이 그 쪽으로 몰리기 일쑤였는데, 여기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레인저 스쿨에서 첫 학기를 보내는 동안 곁에서 지켜본 리안은 실전에 있어서는 ‘재능형 천재’ 그 자체였다.
레인저들이 사용하는 ‘스타일러’는 트레이너의 ‘몬스터볼’에 대응되는 장비였는데, 기기의 본체에서 발사한 디스크로 포켓몬을 감싸 레인저의 의지를 전달함으로써 일시적 협력 관계를 맺는 것이 핵심으로 적용되는 물건이었다. 신입생 대다수가 이 기계를 처음 접해보는 까닭에 시오레는 물론이거니와 리안 역시 스타일러 실습 초기 때 숱한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지만―디스크를 엉뚱한 곳에 발사해버린다든지, 거기서 힘 조절을 잘못해 라인과 충돌한 나뭇가지가 부러진다든지…―포켓몬을 한 번 캡쳐하는데 성공한 이후에는 곧바로 스타일러를 능숙히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거… 몬스터볼보다 더 마음에 들어.”
기세만 보면 세상의 온 포켓몬들을 속속들이 캡쳐해버릴 것 같다. 시오레는 그가 드물게 들뜬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보며 가만히 웃었다.
“어쩌면 너한텐 레인저가 천직일지도 모르겠는데?”
리안은 캡쳐에서 풀려난 유토브가 어디론가로 바삐 날아가는 뒷모습을 지켜보며 순순히 수긍했다.
“그럴지도…. 파동사라서 능력 궁합이 잘 맞나봐.”
“야, 너 파동사였어?”
시오레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니 그도 따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말 안했던가?”
시오레는 그 말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고민하는 기색을 떠올리곤 고개를 얼른 흔들었다.
“네가 네 입으로 자기 이야기를 한 적이 손에 꼽는다고. 어쩐지 교관들이 널 유심히 지켜보더라니.”
리안은 아무 생각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곤 자신의 스타일러 기록을 제출하러 먼저 자리를 떴다. 아직 할당량을 채우지 못한 시오레는 한숨을 쉬듯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가, 허공을 가로질러 날아가는 피죤을 발견하고 가볍게 스타일러를 휘두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역시 타고난 사람은 뭔가 다르구나. 어쨌든, 시오레의 동기는 전반적으로 기묘하게 우수한 학생이었는데, 주변 환경에 빠르게 적응하는 모습과 더불어 야외 활동에서 파트너 포켓몬과 기막힌 합을 보여주는 것은 기본이었으며, 아무리 까칠한 야생 포켓몬을 마주치더라도 백이면 백 캡쳐해내고, 길 위에서 다친 포켓몬을 마주했을 때 가장 먼저 반응해 치료 활동에 나서기도 하고… 여러모로 교관들의 사랑을 받기 딱 좋은 실력을 갖춘 레인저 지망생이었다.
반면, 리안은 이론 수업에서는 미묘하게 약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 사실은 시오레처럼 성적에 경쟁의식을 가지는 학생들에게는 나름의 희소식이었다. 수업 내용을 아예 따라가지 못하는 건 아닌데도, 간혹 가다 집중력을 잃는다든지, 심화적인 이론을 다루는 부문에서는 어김없이 갈팡질팡하기 일쑤였다. 그런데도 이론마저 완전히 놓을 생각은 없는 모양인지, 리안은 시간이 날 때마다면 제 필기노트의 빈 부분을 채우러 시오레를 찾아오곤 했다. 시오레는 그럴 때마다 ‘너한텐 나 밖에 없지,’ 하고 한숨을 내쉬는 시늉을 하면서도 그를 외면하지는 않았다.
“신기하네, 너라면 열매에 대해서는 다 꿰고 있을 줄 알았는데….”
시오레는 자신의 캔음료를 앞에 둔 채로 리안의 필기를 훑어보며 중얼거렸다. 워글과 조로아크는 볕이 잘 드는 곳에서 느긋하게 낮잠을 즐기고 있었다. 리안은 사이좋게 꾸벅거리는 두 포켓몬을 바라보다 동기의 말에 고개를 느릿하게 기울인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야 파동사는 자연인의 이미지가 강하니까? 흠... 선입견이긴 하지만.”
리안은 되돌아온 말을 듣고는 실소를 흘리듯이 웃었다.
“내가 살던 동네에선 교배종 같은 거 없었거든. 끽해봤자 오랭이나 복슝, 복분 같은 아주 기초적인 종류만 있었지, 그 외 종류는 보기도 어려웠고.”
“음. 그랬구나.”
무척이나 동떨어진 시골 출신이라고 했던가? 시오레는 문명에 특히나 어두운 모습을 보이던 그를 떠올리며 펜을 고쳐쥐었다. 얼떨결에 떠오르는 기억 하나가 있었는데, 가륜마을에 견학을 가던 날 “서브웨이를 탈 땐 신발을 벗고 타야 해!”라는 농담에 리안이 홀라당 넘어갔다가 ‘보르쥐는 속았습니다’ 표정을 지었을 때…. 시오레는 뜬금없이 떠오른 이 기억에 웃음을 터뜨리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서 빈칸 채우기에 집중하는 척 자연스레 화제를 돌렸다.
“나 이거 설명해주는 대신 너도 파동사에 대해서 얘기해주면 안 될까? 그러니까 어떤 능력을 쓸 수 있는지~ 같은 거.”
마침 옥상정원에는 그들만 있었으니 비밀스런 궁금증도 풀 겸 꺼낸 질문이었다. 리안은 시오레의 글씨를 골똘히 들여다보는 척하다, 약간의 텀을 두고 입을 열었다.
“그냥… 포켓몬들과 교감이 쉽고, 대강의 의사소통도 가능하고…. 파동으로 뭔가를 탐지할 수도 있고.”
시오레는 필기를 보충하던 것도 놓고 흥미진진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트레이너 활동을 하던 시절, 에스퍼들을 종종 마주치긴 했어도 파동사와는 만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멀리 신오지방에서 어느 파동사가 활동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은 있었지만, 소문으로 듣던 것과 눈앞에서 직접 보는 것 사이엔 많은 차이가 있었다. 시오레는 방금의 말을 듣고 나서야 평소 제 동기가 포켓몬들에게 대화하듯이 말을 걸던 모습, 그리고 친밀감을 쉽게 형성하던 모습을 되짚어볼 수 있었다. 그가 포켓몬과 곧잘 친해질 수 있는 성향을 가진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럼 길도 헤매지 않고 잘 찾을 수 있어? 치유파동도 쓸 줄 알고? 파동탄도 막 쏘고?”
궁금증을 모조리 풀고 말겠다는 특유의 흥분감이 새어 나온다. 리안은 캔 속에 든 음료를 들이켜다 줄줄이 이어지는 질문을 듣고 가슴을 좀 두드렸다. 목넘김이 더딘 듯해, 시오레는 살짝 주춤하곤 천천히 대답해달라는 제스쳐를 취해 보였다.
“그건 개인차가 있지. 특기라고 해야 하려나…. 훈련을 골고루 하느냐, 아니면 특정 분야에 집중하느냐에 따라 달라. 어떤 파동사는 네가 말한 전부를 쓸 수 있고, 또 누군가는 한 가지에 집중해서 능력을 쓰기도 해. 나는 여기서 후자의 경우.”
리안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
“고도로 숙련된 파동사는 타인의 파동도 어느 정도 조율해낼 수 있다고 들었어.”
“예를 들어서…?”
이제 노트 필기는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리안은 시오레의 눈빛에서 매지컬샤인을 쏟아내는 님피아를 연상하며 작게 키득거렸다.
“흥분한 사람을 진정시킨다든가, 음, 아니면 의식 없는 사람을 깨워낸다든가…? 어차피 난 못하는 거지만.”
"그렇구나아..."
그래도 멋진데, 하고 혼자서 중얼거리던 시오레는 갑자기 또렷한 시선으로 자신의 동기를 쳐다보기 시작했고, 리안은 캔을 전부 비워내던 중에 기어코 사레들리고 말았다.
“왜, 왜 그런 눈으로 날 보는 거야.”
“리안이 파동 쏘는 거 보여주면 소원이 없겠다.”
그 말을 들은 리안의 표정이 미미하게 굳어들었지만, 필기를 봐주는 동기의 부탁을 거절할 만한 재간은 없었던 것 같았다. 잠시 망설이던 그는 빈 캔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장애물의 영향을 받지 않을 만한 지점을 찾아서 바닥에 내려놓고는 다시 시오레의 곁으로 돌아왔다.
“…내가 이걸 너한테 보여줬다는 거 아무한테도 얘기하면 안 돼.”
시오레는 마치 제게 비밀을 말하듯 신신당부를 해오는 리안에게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고, 그가 손을 치켜들어 목표물을 겨냥하는 모양을 약간의 불안감과 다량의 기대감이 섞인 감정으로 지켜보았다. 그 손가락 끝이 검보랏빛으로 물드는 것처럼 보이는가 싶은 순간이었다.
캉, 하는 쇳소리와 함께 캔이 뒤쪽으로 쭉 밀려나 풀썩 쓰러졌다. 뭔가가 발사되는 기미도 보이지 않았는데, 시오레는 동기가 캔을 주워서 돌아오는 모습을 어리둥절하게 바라보다 그가 내민 것을 보고 무심결에 놀라는 소리를 내버렸다. 알루미늄 캔의 겉면에 손가락 네 개가 한꺼번에 들어갈 만큼의 큼직한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그것을 내려다보는 리안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아 보였다. 시오레는 구멍의 깔끔한 단면을 보며 포켓몬의 파동탄 기술이 이런 날카로운 느낌이었나 의문에 잠겼다가, ‘만약 살아있는 생명체에게 이런 힘이 가해졌다면,’하는 생각을 무심코 떠올리고 등골을 따라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봤지? 이런 건 드러내지 않는 편이 나아.”
그는 무뚝뚝한 목소리로 중얼거리고, 단잠에서 깨어난 포켓몬들을 달래기 위해 등을 돌렸다. 시오레는 황급히 캔을 우그러뜨려 쓰레기통에 던졌다. 캔이 어딘가에 부딪히는 소리만 이상하게 요란했다.
시오레는 트레이너 스쿨 시절과는 정도가 다른 편안함을 길게 누려오고 있었다. 룸메이트가 청소에 게으름을 부려서 방의 청결도가 떨어지는 경우도 거의 없었고, 밤에 외부인을 데리고 와서 파티를 열지도 않을뿐더러, 자다가 이를 갈거나 하지도 않고, 어디서 거나하게 취해 와서 오밤중 숙취에 앓는 소리를 내는 경우도 일절 없었으니, 한때 공동생활에 고통을 잔뜩 받곤 했던 시오레로서는 지금의 룸메이트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다고 여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이번 기숙사 생활 중 가장 소동이라고 할 만한 사건이 무엇인지 질문을 받는다면, 자다가 갈증을 느껴서 물을 마시려고 일어났을 때 잠깐 스쳐본 룸메이트가 베개보를 적실 정도로 울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꼽을 수 있겠다. 그 동안 아무 탈 없이 잘 자던 애가 왜 갑자기 이러나 싶은 마음에 조심스레 깨워보려는 찰나, 방 안이 어두워서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검고 붉은 털덩어리가 거대한 몸을 갑자기 일으키는 바람에 시오레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아인스…!’
조로아크는 제 이름을 소리없이 외치는 인간에게 고개를 천천히 저어 보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던 시오레는 조로아크가 긴 손톱을 주둥이 앞에 세워 올리는 모습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한두 번 이랬던 게 아닌 듯한 침착한 표정이었다. 시오레는 하는 수 없이 물에 적신 수건을 조로아크에게 전달해준 다음, 자신의 침대로 기어올라가서 요괴여우 포켓몬이 파트너의 얼굴을 닦아주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처음에는 자연스럽게 ‘왜’ 라는 의문이 떠올랐으나, ‘얼마나’ 슬프길래 자면서까지 저리 서글프게 우는 걸까 싶은 생각이 뒤를 이었다.
'못본 척하는 게 나으려나.' 시오레는 조용히 등을 돌려 눕고는 제 옆자리에 웅크리고 있는 깃털 무더기 속에 얼굴을 파묻었다. 신경이 쓰이는 게 어쩔 수 없었다. 그저 악몽을 꾸고 있는 것이라면, 자고 일어난 뒤에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멀쩡해질 텐데.
...하지만 아무래도 괜한 게 아니었나 보다.
“눈 좀 봐, 잉어킹이 친구라고 부르겠어.”
“…난 괜찮아…”
괜찮냐고 묻지도 않았는데 자기가 먼저 괜찮단다. 안색은 전혀 안 그래 보이는데도. 시오레는 뒤에서 조로아크가 한숨을 내쉬는 소리를 듣고는 저와 같은 심정으로 보이는 동기의 파트너를 위로해주었다. 모르긴 몰라도 아마 그 날은 리안에게 최악의 날이었을 것이다. 이론 강의 중에 집중을 영 못하고 지적을 당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실습에서도 초보적인 실수를 저지르는 바람에 거의 다 캡쳐한 대형 포켓몬을 놓쳐버리고 말았으니. 그는 교관들의 못마땅함과 걱정 어린 눈초리가 날아오는 것마저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어찌어찌 오전 수업을 모두 끝내고 점심을 먹으러 동기를 찾아갔는데, 항상 기다리고 있던 자리에 사람은 보이지 않고 포켓몬 한 마리만이 덩그러니 서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시오레는 조로아크의 쩔쩔매는 표정을 보고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쉽게 눈치챘다.
“얘가 파트너도 버려두고 어디로 간 거야?”
조로아크가 작게 구시렁거리는 소리를 들어보니 그게 맞는 것 같아서, 시오레는 한숨을 푹 내쉬어 답답함을 토한 뒤 워글에게 부탁을 건넨다.
“하늘에서 우리 말썽꾸러기 동기 좀 찾아봐 줄래?”
시오레의 말끝에 조로아크가 무어라 덧붙이니 워글은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이곤 순식간에 하늘 저편으로 날아가버렸다. 뭘 말했는지 물어봤자 포켓몬의 언어를 알아듣지도 못할 테니, 시오레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즉 건물 안을 수색해보기로 했다. 그러나 리안이 혼자서 갈 만한 곳을 찾아 열심히 돌아다녀 봤는데도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게 역시나 바깥으로 나가버린 게 분명했다.
다행히도 시오레의 파트너는 넓은 시야를 가진 덕에 하늘에서 무언가를 찾아내는데 발군이었다. 시오레는 자기보다 앞서서 저만치 달려가는 조로아크의 뒷모습을 보며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챙겨줘야 할 거리가 생각보다 많은 동기로구나.
워글은 그들을 성신시티의 외곽에 위치한 꿈터까지 안내했다. 낙엽까지 모두 땅에 떨어지고 난 이후의 휑뎅그레한 느낌이 가득한 작은 숲속, 인적마저 가장 드문 폐건물의 너머, 날이 따뜻할 시기라면 어린 트레이너들이 수련을 벌이느라 크고 작은 소란이 끊이지 않았을 장소, 가끔 레인저 지망생들이 연습 미션을 하러 찾아오기도 하는 장소. 리안은 그 속의 풀숲에 덩그러니 주저앉아서 양손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그러다가 자신을 찾고 있던 일행들의 기척을 느꼈는지 멍하니 고개를 들어 올리는데, 붉게 물든 눈이 참으로 가관이다. 조로아크가 혀 차는 소리를 내며 자신의 파트너를 부축해주는 사이 시오레는 워글의 앞에서 팔짱을 낀 자세로 그들의 모습을 빤히 지켜보았다.
“여기까지 와서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야, 네 파트너가 엄청 걱정했는데….”
그는 동기가 ‘그런 일이 있어서,’라고 작게 웅얼거리는 것을 듣는다.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그냥 내버려 뒀다가는 언젠가 또 비슷한 일이 일어날 것이란 예감이 강하게 들어, 이참에 문제를 아예 해결해버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혼자서 끙끙 앓고 있는 걸 보고 있자면 속이 답답해 죽겠다는 성정이 강렬하게 작용한 까닭이었다.
“리안.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
시오레는 조바심이 묻어나는 어조로 다그치듯 물었지만 리안은 그저 입술을 꾹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어쭈, 이것 봐라. …서로 기를 내세우고 있다간 해가 질 때까지 해결이 안될 게 틀림없었다. 이렇게 자꾸 져주기만 하면 나쁜 버릇 들 텐데. 시오레는 눈을 세모꼴로 떴다가 어휴, 한숨을 내쉬곤 근처 바위를 찾아 털썩 주저앉았다. 으, 궁둥이가 차갑다. 리안은 한동안 멍청한 표정으로 서 있다가도 이내 자리를 찾아서 주춤거리며 앉았다. 뒤늦게서야 마주 보는 구도가 완성되고 나니 조금은 흡족해져서, 시오레는 비스듬하게 턱을 괸 자세를 취했다.
“여긴 아무도 안 오니까 마음 놓아도 돼."
“내가 이 지방으로 오기 전에 말이야,”
살살 달래서 말문을 꺼내게끔 만들려고 했는데 갑작스레 저쪽에서 말이 튀어나오니 말을 먼저 꺼낸 쪽이 되려 놀라서 턱이 손에서 미끄러질 뻔했다.
“…어어, 옳지. 어서 말해봐.”
시오레는 이번엔 팔짱을 얌전히 끼고 머쓱함을 숨긴 채로 중얼거렸다. 리안은 콧잔등을 잠시 긁다가 고개를 끄덕인 뒤, 자신의 고민을 천천히 풀어놓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내용을 간략히 서술해보자면, 복잡한 집안 사정 때문에 자신이 아끼고 사랑하던 여동생과 헤어지게 되었으며, 그 애가 너무나도 걱정되는 한편 혼자 남게 만들어서 너무나도 미안한데, 지금으로선 그 애와 연락할 방법이 전혀 없었고, 최근에 동생이 자길 원망하는 말을 들어버렸다고, 만일 그게 진심이라면 영원히 용서를 받을 수 없을 것 같아서 무섭다고. 또 이렇게 용서받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자기가 이기적으로 느껴진다고….
시오레는 룸메이트의 두서없는 이야기를 한창 듣다가, 중간에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고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그러니까 네 고민을 요약하자면 이렇게 되려나? ‘여동생이 용서를 받아주지 않을 정도로 화가 나 있는 상태일까 봐 궁금하고 무섭다. 근데 그걸 확인할 방법이 없어서 답답하다’.”
“… ….”
아무 말이 없는 걸 보니 일단은 제대로 알아들은 것 같은데. 시오레는 이마를 양손으로 감싸며 생각에 잠겼다. 두루뭉술한 상황이지만 감이 잡힐 듯 안 잡혀서 사실 파악을 확실히 해야 했다.
“나는 네 여동생을 직접 만난 적이 없어서 너희 관계에 대해선 딱히 얘기할 만한 게 없지만, 그래도 몇 가지만 물어볼게. 네 동생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는 처지인 걸까? 또 둘이서 연락을 나눌 방도가 없다고 했는데, 넌 어떤 식으로 네 동생의 원망을 들었다는 거지…? 혹시 누가 전달자 노릇을 했어?”
리안은 두 눈을 멍하니 뜨더니 고개를 한참 끄덕였다. 모두 긍정이란 뜻. 시오레는 그 모양을 보며 옆으로 늘어진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꼬아내기 시작했다. 세상에는 별의별 가정사가 다 있다지만 이렇게 복잡하고도 각이 간단히 잡히는 경우는 또 처음 접해본다. 시오레는 손가락에 감았던 머리카락을 쭉 잡아당겨보다가 그대로 놓아버렸다.
“그럼 그 전달자는 너랑 아주 남남이야, 아니면 널 싫어하던 사람?”
“날 싫어했…지.”
시오레는 리안이 웅얼웅얼 뱉은 답을 듣고 머릿속에서 윤곽을 만들어낸 문장을 불쑥 꺼내놓았다.
“…그거 이간질 당한 거 아냐?”
이런 생각을 하게 되어 좀 미안하게 됐지만 저 동그란 시선이 퍽 웃기고 딱하고 안쓰럽다.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아하니 본인도 이간질을 당했을 경우의 수를 아예 떠올리지 않은 건 아닌 듯한데, 긴가민가 하다가 결국 혼자서 한쪽으로 결론을 내렸던 모양이었다. 시오레는 저를 앞에 두고 머리를 부여잡는 리안에게 제 답안을 성실하게 풀이해주었다.
“네 성격상 네가 사랑한다던 동생한테 직접적인 해를 끼치거나 하진 않았을 테고, 집안 사정이 복잡했단 걸 고려한다면 어쩔 수 없이 거기서 빠져나와야 했다거나 그랬겠지. 근데 나중에 너희 둘의 관계를 아는 사람이 널 쫄래쫄래 쫓아와서 ‘네 동생이 이랬다더라~’ 식으로 말을 하는데, 그 사람이 네 동생보다도 믿음직스러운 편이었니?”
시오레는 넌지시 질문을 던지고, 동기의 얼굴에서 새로운 충격을 받은 듯한 감정을 읽어내고 한발 물러서기로 했다.
“…아, 뭐. 인간의 감정은 생각보다 연약하고 교활하다잖아. 네 입장에서는 심각한 딜레마였을 테니 이간질이고 뭐고 정상적인 판단이 불가능했을 수도 있을 테고. 그리고 네가 가진 그 죄책감은. 음… 더 이상 만날 수 없고, 더 이상 연락도 못하는 사이가 되었다면, 그저 그 애가 앞으로 잘 되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어. …그러니까 친구로서 충고하건대 이제 그만 내려놓아. 그 이상은 자격지심에 지나지 않을, 네 속을 갉아먹기만 할 감정이니까.”
시오레는 타인의 개인사에 함부로 말을 얹기를 기피하는 타입이었지만 지금은 이렇게라도 찔러줄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고선 그의 앞에 있는 친구가 쓸데없는 감정소모를 평생 붙들고 놓지 않을 기세였기 때문에. 리안은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잠시 후 약하게 서너 번 끄덕이는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시오레는 그 모습을 보고 나서야 만족스럽게 웃었다.
“노트 필기도 봐주고, 고민 상담도 해주고, 나 진짜 착한 동기지? 어때, 고민이 좀 해결된 것 같니?”
잠자코 앉아있던 리안은 그 말을 듣고 비로소 미약한 웃음기를 떠올렸다.
“…시간이 좀 더 필요하겠지만, 어느 정도는. …고마워, 시오레.”
시오레는 마지막 말에 기분 나쁘지 않게 킬킬거리는 웃음소리를 냈다.
“우리 애가 감사 인사도 하고 다 컸네. 어느 정도 마음 정리됐으면 카페에 같이 가자. 내가 숨겨둔 곳인데, 거기서 파는 디저트도 엄청 맛있거든? 단 거 잔뜩 먹고 행복해지자, 응? 내가 특별히 쏠게.”
그러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리안에게 손을 내밀었고, 그는 멍하니 손을 붙잡고 몸을 비틀비틀 일으켰다. 사태가 모두 끝났음을 인지한 방청객 포켓몬들은 저마다 후련한 표정을 떠올리며 각자의 파트너를 따라 움직였다. 고민을 대체 얼마 동안이나 묵혔는지에 대해서는 일부러 묻지 않았다. 기간을 들으면 현기증이 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레인저 스쿨의 2학기 커리큘럼부터는 학생 개개인의 지망을 집중적으로 이수하게 된다. 스쿨 입학이 결정되었을 때 각자 특화되어 있는 지형과 임무―이를테면 수색이나 구조, 정찰, 잠입 같은 종류―를 고르는데, 1학기에는 지망에 대해 기초적인 내용을 배우게 된다면, 2학기에는 본격적인 실전을 상정하고 감각을 익히는 데 중심을 둔다는 요지였다. 시오레와 그 동기의 경우에는 특화 지망으로 ‘잠입’을 선택했으며, 올해 따라 이수 인원이 부족하다는 학교 측 사정에 따라 역시 자연스럽게 서로의 임무 파트너로 지정될 수 있었다. 한 공동생활 기관에서 이 정도까지 타의로 붙어 다니는 관계가 지속되니, 트레이너 시절 오랫동안 개인 활동을 지속해오고 여행 동료를 만들지 않았던 시오레는 이를 신기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동료적인 입장에서 리안을 평가해본다면, 상호 협력 위주로 돌아가는 미션에서도 개인적인 성향을 곧잘 드러내곤 하는… 맡은 일을 잘 하긴 하는데, 그런데도 요주의가 필요한… 그런 의미에서 조금 골치 아픈 파트너였다. 지난 학기에는 거진 이론 수업뿐이라서 팀플레이 같은 걸 해볼 일이 잘 없었는데 이번 학기 들어서부터 직접 합을 맞춰 볼 기회가 늘어났다 보니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서로 부딪치는 경우가 생기기 시작했다. 지도 교관은 아직 초기라서 다들 실수를 많이 저지른다고 격려해주고 있다지만, 서로를 불편하게 여기는 상황이 지속된다면 아무에게도 이득 될 것이 없다는 판단 하, 시오레는 이 문제를 근본적인 부분에서 따져보기로 마음먹었다.
“이러다간 우리 나중에 졸업 시험에서 나란히 낙방하고 말 거야.”
어느 주말, 그들은 잔디 운동장의 양지에 자리를 펴놓고서 지난 주간에 참여했던 간이 미션을 복기하고 있었다. 시오레는 종이 위에 그려놓은 갖가지 그림들을 검토하다 그 말을 툭 뱉었고, 리안은 그 곁에 앉아서 진중한 표정―사실 리안에게는 좀 어울리지 않는 표정이긴 했지만… 그래도 그 역시 문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표시이기도 했으니 어느 면에서는 꽤 볼 만하다 싶었다―을 지었다.
“실외라면 문제가 없는데 역시 실내가 어렵네. 넌 구조대상이 보인다 싶으면 곧바로 몸부터 튀어 나가는 모양이더라.”
구조대상을 의미하는 철창 이미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모퉁이에 숨겨지듯 그려 넣어진 트랩 이미지, 그리고 두 명의 레인저를 의미하는 자갈의 위치를 주의 깊게 비교하고 있던 리안이 잠자코 인정했다.
“파동을 계속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숲보다는 나무에 더 집중하게 되거든. 함정이 차라리 매복한 적이라면 피해서 가기도 수월해질 텐데…. 바로 앞에 구조대상이 있으면 얼른 구해야겠다는 생각부터 들기도 하고.”
리안은 제 무릎 위에 웅크리고 앉은 피카츄―조로아크의 등을 쓰다듬으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시오레는 은연중에 피카츄 특유의 보드라운 털을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을 흘리다가 얼른 제정신을 차렸다. 의외로 간단한 해법이 보였기 때문이다.
“난 너랑은 반대로 이것저것 다 따지느라 적당한 시기를 놓치는 게 대다수지…. 사실 이건 상호 간에 정보만 잘 공유된다면 별 문제 안될 거란 말이야. 그러니까 네가 현장에서 뭔가를 읽어낼 때마다 내게 알려줘, 그게 작든 크든 말이야. 그럼 그다음부터는 최적의 잠입루트를 함께 설계할 수 있을 테니까."
시오레는 종알종알 말하며 뒤로 벌러덩 드러누웠다. 리안은 소리 없이 웃다가 그 곁에 나란히 누워서 아인스를 고쳐안았고, 그 조로아크는 피카츄의 순한 표정으로 제 파트너의 얼굴에 대고 뺨을 마음껏 비비기 시작했다. 녀석, 작은 몸집의 이점을 톡톡히 누릴 줄 아는구먼. 시오레는 그들의 모습을 부러움 가득 담긴 눈길로 쳐다보고 나서, 워글이 큰 원을 그리며 활강하고 있는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그보다 더 높은 하늘 위, 비행기가 하얀 궤적을 그리며 성층권의 길을 한창 가로지르고 있었다. 시오레는 초점을 완전히 놓고 비행운이 뭉게뭉게 퍼져나가는 모양을 구경하다, 제 옆에서 눈을 감고 있는 리안을 힐긋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너, 잠입 미션은 왜 지망하게 된 거야? 워낙 위험하다니까 이번에는 인원도 얼마 없댔는데.”
가볍게 감겼던 눈꺼풀이 고요히 열리고, 연청색 눈이 이쪽 방향으로 살짝 굴러왔다. 말을 고르는 모양인지 침묵이 잠깐이나마 돌았다.
“나쁜 놈들이 나쁜 짓으로 실컷 벌어먹는 게 꼴 보기 싫어서… 라고 해야 하나. 나는 악의를 갖고 일을 저지르는 인간이 싫거든. 거기에 무고한 생명이 희생되는 걸 막고 싶어서 고른 지망이야.”
시오레는 그의 옆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시선을 다시 하늘로 향했다.
“너다운 선택이네….”
어느샌가 워글은 낮은 구름 속으로 모습을 감춘 상태였다. 한가롭게 창공을 만끽하는 파트너마저 부러워하고 있으려니, 곁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도 너한테 같은 내용 물어봐도 될까?”
“…안될 건 뭐가 있겠니.”
끔뻑. 햇볕의 나른한 기운이 눈꺼풀 위를 언뜻 스쳤다.
“너보다는 개인적인 사유 때문에 택한 길이야. 몇 년 전 어떤 트레이너가 우연히 수상쩍은 장소를 발견하고 들어갔다가 밀렵당한 포켓몬들이 잔뜩 갇혀있는 걸 목격했고, 그 장소에 치명적인 함정이 설치된 줄도 모르고 성급하게 나섰다가 그만 소중한 동료를 잃고 말았고, 절망감에 빠진 나머지 결국 트레이너의 길을 포기하게 된 일이 있었지.”
이번에는 저쪽에서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시오레는 여전히 하늘을 올려다보기만 했다. 날씨가 건조한 탓인지 목소리마저 건조해지고 있었다.
“나는 원래 구질구질하게 구는 거 싫어하는데, 그것만큼은 그냥 못 넘어가겠더라. 그때 구하지 못했던 아이들이랑 내 눈앞에서 쓰러진 친구의 모습들이 계속 떠올라서 미칠 것 같았고, 그 악당들을 어떻게든... 붙잡고 싶은데 더 이상 트레이너 구실을 못하게 됐으니, 그 대안으로 레인저가 된 거야. 다분히 개인적인 복수심이 가득한 이유지."
시오레는 조용히 읊조리며 눈을 깜빡였다. 그리곤 슬쩍 고개를 돌려 동기와 눈을 마주쳤다.
"너는 이런 나를 어떻게 생각해, 리안?"
아주 고맙게도, 그는 동정의 빛을 보내지 않았다. 리안이 던진 질문은 그런 것과는 전혀 다른 내용을 담고 있었다.
“만일 네 복수를 끝낸다면, 그다음에는 무엇을 목표로 할 거야?”
뼈가 제법 함유된 질문이었는지라, 시오레는 그에게 답을 주기 전에 고민하는 시간을 들여야 했다.
“…글쎄. 자세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아마도 다른 쪽으로 지망 미션을 바꿔서 계속 레인저로 활동하지 않을까.”
하얀 구름 속에서 붉고 푸른 형체가 빠져나와 지상으로 강하해온다. 시오레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앉아서 자신의 동기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니까, 네가 나 좀 도와줬으면 해. 난 내 목표를 잃고 싶지 않거든.”
리안은 시오레를 뚫어져라 올려다보다가 마찬가지로 일어나 앉는다. 그는 금세 잠들어버린 파트너 포켓몬을 제 무릎 위에 얹어주는 한편으로 덤덤하고도 나긋한 어조로 답했다.
“앞으로 걱정할 필요 없게 만들어줄 테니까 걱정 마.”
시오레는 머리 위로 드리워지는 거대한 새의 그림자 아래에서 활짝 미소 지었다.
학기 일정을 바삐 소화해내다 보니 일년 세월 보내는 것도 삽시간이었다. 특히 레인저 스쿨의 졸업 시즌은 학생들에게 더더욱 가혹한 일정을 선사해주었고, 덕분에 시오레와 그의 동기는 폭풍 같은 일정에 시달리느라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분간이 되지 않는 생활을 거듭했다. 그 동안 삶이 나아지긴 했는지 굳이 따져본다면야, 시오레는 긍정적인 입장을 취할 수 있었다. 우선, 그의 룸메이트는 이전처럼 자면서 우는 빈도수가 확 줄어들어―조로아크의 증언에 따르면 완전히 제로는 아닌 모양이지만, 괴로워하는 모습은 잘 보이지 않았으니 충분히 다행이라고 할 만했다―취침 중 평화가 깨진 경우가 없어졌으며, 둘이서 나란히 힘낸 덕에 반에서도 나란히 좋은 성적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고. 그리고 한때는 졸업에 낙방하게 될까 전전긍긍하던 적도 있었는데, 전일까지 이어졌던 졸업시험이 끝나고 각자 수석과 차석을 차지하게 되니 학기 내내 어깨 위를 짓누르고 있었던 무게감이 모조리 사라진 듯한 기분이었다.
시오레는 앞으로 남은 학사일정을 확인하다 말고 그의 룸메이트에게 불쑥 물었다.
“살아있니?”
리안은 다꼬리 특대인형과 다꼬리로 둔갑한 조로아크를 양옆에 끌어안은 채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무덤 속에 누운 기분이야….”
조로아크는 다꼬리의 깜찍한 얼굴로 한껏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시오레는 거기서 형언하지 못할 괴리감을 느끼고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그는 웃음소리를 기침소리로 힘겹게 둔갑시키고 고개를 흔들었다.
“이제 큼직한 일은 다 끝났으니 졸업식까지 여유를 즐겨보도록 하자꾸나.”
“…졸업식이 언젠데?”
저런, 일정을 다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정신이 없었던 모양이군. 시오레는 자신의 침대 자리에 큰대자로 털썩 드러누웠다.
“이번 주 금요일. 그러니까… 이제 나흘 남았네. 그때까지는 자유롭게 외박할 수 있대. 요즘 뇌문시티는 엄청 덥다더라, 대관람차도 낮엔 거의 텅텅 빈대. 곧 여름 되고 나서 관람차에 탄다면 찜통이나 프라이팬 속 만두가 된 기분을 느끼게 되겠지…. 그것도 꽤 좋을지도...”
시오레 자신조차도 힘겨운 나머지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아무 말이나 천장에 던져댔다. 덧없어진 의식이 방 안을 하염없이 흐르는 가운데, 기력이 모두 꺼진 목소리가 건너편 자리에서 웅얼댄다.
“…어디 나갈 기력도 없어… 이대로 그냥 눈 감았다 뜨면 바로 졸업식 날이었으면 좋겠어….”
저런…, 흔한 번아웃 증상을 겪고 있는 모양이군. 애석하게도 시오레 역시 그를 북돋워 줄 만한 힘마저 모조리 방전된 상태였으며, 그렇게 둘은 자연스럽게 찾아온 정적 속에서 무기력에 깔린 채로 끙끙 앓아대기만 했다. 이따금 다꼬리―조로아크가 매트리스를 기다란 꼬리로 맥없이 두드리는 소리만이 들렸다.
“리안, 그러고 보니 베이스는 어디에 배정받았어?”
“구름시티와 뇌문시티 중간 어딘가… …라던데. 희망 임무 써서 냈더니 그렇게 배정이 오더라고.”
리안은 자신이 차지하고 있던 다꼬리 인형을 건너편으로 휙 던져서 넘겼다. 시오레는 누운 채로 팔만 들어 올려서 인형을 받아낸 뒤 그대로 인형의 얼굴과 몸통 가운데 부분을 힘주어 꽉 끌어안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 4번 도로 쪽 말이지. 내 레인저 친구가 그러던데, 거기 리더 레인저가 되게 빡센 성격이래.”
“… ….”
의욕없는 눈동자가 스르륵 굴러와 시오레를 응시했다. 시오레는 인형 안쪽에 채워진 솜을 꾹꾹 눌러대며 한탄하듯이 뇌까린다.
“……지독한 완벽주의자랬어. 친구가 거기서 근무하는데 자기는 견습 딱지를 1년 만에 뗐대. 그리고 지금은 만년 B랭크라고….”
“…너도 나랑 같은 데 배정받았구나?”
순식간에 방긋 웃는 저 얼굴은 역시나 솔직함 그 자체여서 시오레는 피식 웃고 말았다.
“그렇게 좋니? 우리 정식으로 레인저 활동을 시작하면 한동안 바삐 움직여야 할 텐데. 친구한테 들어보니 밀렵 현장을 급습하는 미션이 요즘 들어서 꽤 많이 나온다나봐, 그러니 이렇게 힘들다고 드러누울 수 있는 기회는 없을 거야.”
시오레가 은근한 어조로 겁을 준대도 리안은 더없이 평이한 어조로 대꾸했을 뿐이었다.
“…현장에 나가는 게 펜 잡는 것보단 훨씬 나아.”
“그건… 확실히 그래.”
방 안의 분위기에는 대화로 인해 아주 미약하게나마 열기가 일어난 듯했으나,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아까와 같은 침묵이 금세 찾아들고 말았다.
…―따르릉!
두 번째 정적은 난데없는 전화벨소리에 의해 산산조각났고, 죽은 듯이 침대에 누워있었던 인간 둘과 포켓몬 하나는 저마다 다른 방향으로 튕겨 나가듯이 일어났다. 그 동안 울릴 일이 거의 없었던 기숙사 방의 전화기가 요란하게 울리고 있었다. 리안은 놀라서 털이 부숭부숭하게 일어난 자기 파트너를 진정시키느라 여념이 없었기에 시오레가 그를 대신해서 수화기를 들었다. 저도 모르게 얼떨떨한 목소리가 나온다.
“네, 303호입니다.”
왁자지껄하게 울리는 배경음 사이로 묵직한 목소리가 용건을 뱉는다.
“칼란도스 씨와 에브 씨 앞으로 택배 하나씩 도착했습니다. 관리실에 오셔서 찾아가세요.”
통화음이 뚝 끊어진 뒤, 시오레는 자신이 들은 내용을 그대로 리안에게 전달해주었다. 리안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나 뭐 주문한 거 없는데? 나한테 뭘 보내줄 사람도 없고.”
시오레는 잠시 덩달아 비슷한 표정을 짓다가 룸메이트의 손을 잡아끌었다.
“바람도 쐴 겸 일단 가서 확인해보기나 하자.”
아인스는 신경질적으로 귀를 파드득 털고 일루전을 풀어버렸다. 좁은 실내 공기가 답답하긴 했던 모양인데, 시오레는 전화기가 마치 자기들을 방 바깥으로 쫓아낸 것 같다는 느낌을 받으며 방문을 닫았다.
관리실로 내려와 보니, 그 입구에서부터 택배 상자들이 수북이 쌓여있는 광경과 택배를 수령하기 위해 찾아온 학생들의 모습이 시야에 가득 들어왔으며, 관리실 직원들은 상자들을 배분하느라 한창 정신이 없는 와중이었다. 시오레는 그 소란스러운 분위기 속에서도 택배의 태반이 졸업생들을 축하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보내진 선물이라는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 거기 모인 학생들 대부분이 동급생들이었기 때문이다. 시오레는 혼잡함을 뚫고 택배를 걷어오는 데 성공한 후, 이제는 기력마저 거덜 난 표정을 짓고 있는 리안을 끌고 기숙사 건물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그들은 교정의 벤치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서 가져온 상자들을 나누기 시작했다. 각자 포장을 뜯는 동안 상자 속에 내내 갇혀있었던 꽃향기가 공기 중으로 흩날려 은은히 퍼져나간다.
“이건 내 거고, 이게 네 거.”
시오레가 리안에게 내민 것은 화려한 꽃다발이 한 아름 들어있는 바구니였다. 송장을 슬쩍 훔쳐보니 칠보시티의 어느 유명한 꽃집에서 수주를 받아 룸메이트에게 전달된 듯싶었다.
“수신자 이름이 네 풀네임으로 떡하니 적혀있으니 잘못 배송된 건 더더욱 아니겠고…. 발신자가 아예 꽃집 이름으로 적혀있네. 진짜 네가 따로 주문한 게 아니란 말이야?”
리안과 조로아크는 동시에 수상쩍은 표정으로 바구니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리안은 그의 말을 듣고 고개를 냅다 도리도리 저었다.
“아니야, 내가 무슨 돈이 있어서 이런 걸 주문하겠어.”
“그렇단 말이지…. 어, 여기 카드도 있다.”
시오레가 가리킨 바구니 몸체의 틈새에는 손바닥 크기만 한 카드가 고정되어 있었다. 리안은 그것을 조심스레 뽑아서 펼쳐 들었고, 곧장 세 쌍의 시선이 그 안의 내용으로 쏠려 들었다.
<졸업 축하해요. -A>
짤막한 글귀마저도 손글씨가 아니라 인쇄되어 나온 것이었다. 부지불식간의 의문이 리안의 입술 새로 흘러나왔다.
“A가 누구야…?”
“…네가 모르는데 내가 어떻게 알겠니. …설마 입학 사무실에 너랑 같이 왔던 그 사람 아닐까…? 너랑 가까운 사이라며.”
연고도 친분도 없는 리안이 자신의 입으로 '가까운 사람'이라고 칭했던 것이 갑작스럽게 떠올라 추측성으로 물어보았지만, 리안은 고개를 맹렬히 저어 극구 부정의 뜻을 내비쳤다.
"아닐 거야. 그날 이후로 연락이 끊겨서 그 사람은 내 졸업날짜가 언제인지도 전혀 모를테니까. 설령 알아냈더라도 이런 이니셜을 쓰지는 않거든."
저토록 단호하니 아니라면 아닌가 보다. 리안과 그의 파트너 포켓몬은 카드를 가만히 노려보고 있었다. 제 나름대로 발신자를 추정해보고 있는지 미간이 가운데로 서서히 모여드는 모양이, 저러다 곧 카드에 구멍이 뻥 뚫리지 않을까 싶어서 시오레는 일부러 고개를 돌리고 제 손에 들려있는 꽃다발에 코를 묻었다. 궐수시티에서 부모님이 보내주신 꽃은 싱싱하고 향기가 진했다. 그래도 새 출발을 하려는 딸을 격려해주시긴 하는구나. 그에게 전해진 카드 같은 건 없었지만, 이 정도면 이번 졸업식은 잘 보내볼 만했다. 시오레는 자신의 룸메이트가 카드를 주머니에 접어넣는 모습을 곁눈질로 보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거 어쩔 거야? 모르는 사람이 보낸 건데.”
“뭘 어쩌긴, 그냥 이대로 졸업식에 들고 가야지. 버리기도 아깝잖아.”
조금 전까지만 해도 요테리가 쌔비냥 쳐다보듯 제 몫의 선물을 노려보던 리안은 어느 새 표정을 깔끔히 되돌리고 바구니에서 꽃다발을 꺼내 안고 있었다.
“온실에 보관해야 할 텐데 자리가 남아있을 지 모르겠네.”
시오레는 그 모습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먼저 차지하는 사람이 임자랬어. 빨리 가자.”
꽃다발까지 받고 나니 이제는 레인저 스쿨 생활도 정말 끝이 다가왔음을 자각할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난 사람 보는 데 꽤 괜찮은 안목을 가졌단 말야.' 시오레는 스스로 뿌듯해하며 제 동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신경이 많이 가는 타입이긴 해도, 저만한 동료면 앞으로의 고생길이 그렇게 고단하지도 않을 것 같았다.
- 카테고리
-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
썰 커미션 샘플 (수위)
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