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약한 것은 마찬가지로 부서져 내리더라
발단
*Warning: 가스라이팅, 유혈, 동물(포켓몬) 학대 묘사.
*봄. 리안 21세, 은엽 32세.
마지막으로 햇빛을 보았던 날이 언제였더라. 은엽은 김이 서린 차창을 지그시 노려보며 진지하게 고민했다.
창을 투과해 들어오는 동안 잔뜩 뭉개진 가로등의 불빛이 차의 내부를 비추는 둥 마는 둥 했다. 이는 모란만 앞바다에서 꾸준히 몰려오는 해무와 공장지대에서 쉼 없이 뿜어져 나오는 연기가 합쳐져 이루어낸 결과물로, 모란만시티의 형편없는 일조량에도 크게 기여하고 있을 것이다. 차라리 물풍경시티처럼 비라도 자주 내리면 좋을 텐데, 어쩌다 한번 내려서 오히려 심기만 거슬리기 일쑤였다.
오늘은 본부와의 소식 전달책으로 후배가 파견되어 온 날이다. 항구의 으슥한 지점에 주차된 승용차, 그 비좁은 공간 안에서 우락부락한 남자 둘이 나란히 앉아있으려니 후배는 갑갑한 나머지 창문을 열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이를 행동에 옮기지 않을 정도의 참을성과 이성을 착실하게 챙기고 있었다.
은엽은 자신을 걱정스레 쳐다보는 후배의 시선을 느끼고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햇빛이 그립네요.”
그러자 후배의 눈썹이 힘없이 축 처졌다.
“그래도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얼마예요, 정말. 거기서 열심히 일해주신 덕분에 검거율도 많이 늘어났는걸요. 선배님 하루빨리 복귀하셔서 보너스랑 휴가 두둑이 받아가셔야 한다고요!”
그는 평소보다도 힘이 더 들어간 호들갑을 듣고 속절없이 웃음을 지었다. 그래봤자 허울뿐인 웃음이었지만.
은엽이 위장 신분을 이용하여 회사에 침투해 들어가서 자리를 잡은 부서는 '시설관리팀'이었고, 그 곳에서 최종적으로 맡게 된 업무는 ‘상품’의 밀매 및 밀수 루트를 짜는 일이었다. 이는 용의자가 루트대로 움직이면 해당 정보를 그대로 아군 측에 넘겨주어 범죄 현장을 급습할 수 있도록 유도해내는 일이기도 했다. 발각될 위험이 충분히 존재했음에도 햇수가 지나도록 자리에 무사히 남을 수 있었던 까닭은 아마도 운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여기까지 오르는 데 많은 힘을 소모하여 이 이상 무엇을 더 쏟아 넣을 수 없을 지경이 되었어도, 은엽은 그 이상으로는 고충을 밝히지 않았다. 나 혼자만 힘든 것도 아니고, 톱니바퀴는 이빨이 닳을 때까지 일한다는 이야기도 있지 않던가.
“하긴 요즘 들어서 알로라에 놀러 가고 싶다는 생각이 부쩍 들기는 하더군요…. 하루의 대부분을 실내에 갇혀있다 보니 몸이 예전 같지 않아요.”
실은 알로라의 풍경이 어땠는지 떠올리기 힘들 정도로 가물가물해진 지도 오래였다. 예전에 경호원 생활을 했을 때 여러 차례 방문했었던 장소에서 본 것들 중 기억에 남는 것이라고는 단지 해가 쨍쨍하게 내리쬐던 풍경뿐이다. 이러다 보면 정말 일부러라도 휴가를 내고 알로라에 휴양을 가야 하나 하는 쓸데없는 생각마저 들었다. '내가 피곤한 게 맞긴 한가 보지.' 은엽은 눈 밑을 손가락으로 비빈 후 흘러가듯이 물었다.
“처리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습니까? 현장과 본부 양쪽의 상황을 알려주세요.”
후배는 질문을 듣자마자 지금껏 겉에 둘렀던 가벼운 태도를 벗어내고 충실하게 응답했다.
“하나지방의 트레이너들 및 레인저들과 계속 협동해서 현장을 잡고 있는 중입니다만, 때로는 아군이 피해를 입기도 해서 고전 중이에요. 타깃 쪽에서 손해를 입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다음 번의 접촉 때 조심성과 공격성이 동시에 늘어나는 바람에… 다행히도 지금까지 실패하거나 누락시킨 건은 없었지만요, 얼마 전 레인저 측에서 현장에 파견보낼 인원들이 점점 부족해지고 있다는 실정을 알려왔어요. 본부도 마찬가지로 인력에 허덕이는 상황이고요. …결국 예전에 퇴직했던 요원들을 다시 불렀더라구요.”
은엽은 수염이 무성한 턱을 매만지다 한숨을 뱉었다.
“…갈수록 위태로워지겠군요.”
“그렇죠...”
한창 위험한 시기였다. 지금 자신이 몸담은 상황은 하나의 전투 자체나 다름없었으며, 여기 참전한 아군 진영의 한쪽이라도 밀리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싸움터를 만들어내는 입장에서는 이에 대한 책임감과 중압감에 적잖게 시달리기 마련이었다. 이 와중에 그의 머릿속에서 불현듯 떠오른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지금쯤 어떤 활동을 벌이고 있을까. 은엽은 레인저 스쿨 졸업식에 익명으로 꽃다발을 보냈던 게 넉 달이 훌쩍 넘었음을 깨닫곤 잠시 마른 세수를 했다. 시간이 벌써 그렇게나 흘렀구나. 마지막으로 본 지가 일 년이 넘었는데도 신기할 정도로 기억에 선한 얼굴이었다. 그가 무슨 일을 하고 있든 다치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는데, 혹여나 그 또한 여기에 참전한 상태라면, 그러다 임무 중에 부상을 당하기라도 한다면, …
“저… 선배님?”
그새 저도 모르게 상념에 빠져있던 은엽은 옆에서 부르는 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치를 보고 있던 후배는 상대의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온 것을 확인하고 조심스레 물었다.
“선배님 근무하시는 업체의 운영진이나 간부들 만나보신 적 있나요? 위에서 잘 알려주지 않아서 그런가, 정확히 어떤 작자들인지 개인적으로 궁금해져서요. 선배님도 나름 높은 직책까지 오르셨잖아요.”
은엽은 제 뒷덜미에 손을 가져다 댄 채로 고개를 미세하게 기울였다.
“저도 직접 얼굴을 대해본 적은 손에 꼽습니다만…. 워낙 주도면밀한 자들이라 이력을 알아내기가 썩 쉽진 않더군요. 연구팀의 수장은 두문불출이고, 제가 들어오기 이전의 시설팀장은 아예 행방불명된 상태입니다. 그나마 현장팀의 반장과는 업무 때문에 몇 번 대해봤는데... 음. 마주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정도라고만 해 두죠. 밀수꾼들 사이에서 들은 소문에 의하면, 플라스마단 사태가 터졌을 때 그 밑에서 단물을 빨아먹었다든지, 플라스마단의 간부가 자행했던 포켓몬 실험에 사용될 샘플들을 납품했다든지. …그런 식으로 돈을 벌어온 전적이 꽤 있는 모양입니다.”
"선배가 그런 식으로 표현하실 정도면 진짜 지독한 인간인가 봐요."
은엽은 후배가 미간을 팍 일그러뜨리며 드러내는 역겨움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조용히 공감을 표했다. 후배가 열을 내는 것 때문에 창문의 김이 한층 더 짙어져 가니, 은엽은 김 서림 방지용 통풍 스위치를 누르며 나직이 한숨을 내쉰다.
“아무튼… 정보가 충분히 모이면 취합해서 따로 보내드리겠습니다. 나머지는 여기 적힌 일정대로 진행해주세요. 이게 이번 달 마지막 루트입니다.”
후배는 그에게서 작은 쪽지를 받아 챙기며 다시금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솔직히 이번 잠입 아슬아슬하단 느낌이 들어요. …얼른 복귀하시면 좋겠어요, 선배님. 듣다 보니 거기서 일하시는 환경이 너무 힘들게 느껴진다고요. 그리고 동호회분들도 우리 베이스님 언제쯤 돌아오시느냐고 화근이란 말예요. 특히 사라가요. 아, 그리고 또 선배님네 포켓몬들도 PC 안에서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을 텐데….”
잠시 표정이 없던 은엽의 입가에 유한 미소가 떠올랐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건 참 좋네요. 저도 여기서 하루라도 일찍 빠져나가고 싶어요.”
그 말만 들어도 기분이 조금이나마 나아지긴 했는지, 후배도 미약하게나마 마주 웃었다. 그러다가도 뭔가가 더 떠올랐다는 듯 분주히 제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렇지, 동생 분이랑 통화하시겠어요? 마지막으로 통화하신 게 석 달 전이잖아요.”
은엽은 어깨를 살짝 굳힌 채로 후배가 내미는 라이브캐스터를 내려다보다, 이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나중에 본부에 복귀했을 때 따로 연락하도록 할게요. 생각해주셔서 고마워요.”
“아… 네, 그럼. 임무 도중 유사시 쓰라고 보급된 건데, 선배 몫도 챙겨가세요. 예전에 신오지부에서 개발했던 도구의 개선 버전이래요. 사용법은... 아시나요? 아시겠죠?”
은엽은 후배가 넘겨 준 물체를 만져보고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가급적 쓸 일이 생기지 않으면 좋겠지만, 감사히 받아두겠습니다."
후배는 그제야 조금 안심이 된 낯으로 문손잡이를 잡아당겼다. 바야흐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은엽은 후배가 음번을 타고 본부로 귀환하는 뒷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다가, 그들이 어둠 속으로 사라질 무렵 시선을 거두고 발걸음을 돌렸다. 물안개 너머로 아스라이 들리던 날개소리마저 완전히 잦아들고, 이제는 항구의 방파제 밑으로 작은 파도가 부딪치는 소리만이 감돌고 있었다. 을씨년스러운 공기가 적막한 항구를 한가득 채운 가운데, 은엽은 이대로 여기에 남아서 일출을 기다릴까 하는 생각을 흘리다 금방 접어버렸다. 다음 번 있을 방해 작전을 준비하려면 시간을 허비할 새는 없었다.
은엽은 그림자가 짙게 퍼진 골라 공장지대를 향해 걸음을 옮기며 감정을 차분히 다스렸다. 장기간 지속해서 겪어온 정신적 부담이 언제쯤 끝날 수 있을 지 가늠하려니 감정이 흐려지다 못해 자꾸만 붕 떠오르는 느낌이었다. 제아무리 잠입이 특기라지만, 끝없이 이어져 온 스트레스에 지친 상태를 부정하고 아직 멀쩡하다며 자기암시를 걸어왔던 것마저 이제 슬슬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아까 전 스치듯 떠올렸던 알로라 휴양에 대한 계획이 지금은 아예 머릿속을 가득 채우기 직전이라는 게 그 증거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번 일이 모두 끝나고 나면 알로라에 가서 무엇을 할까. 아무래도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선배님과 만나는 일이다. 얼굴을 뵈는 건 워낙 오랜만인지라 만나자마자 호통을 들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그것도 기꺼워할 수 있는데. 그분께 잠시 신세를 진 후에는 친우가 살고 있는 마을에도 방문해서 오랜만에 회포를 풀어야지. 그 다음에는 알로라의 풍경을 본격적으로 감상할 겸 섬을 여기저기 돌아다녀 보는 것도 좋겠다. 홀로 다니는 여행은 익숙하지만, 그 근사한 풍경을 혼자 즐기기에는 조금 아깝겠는걸. 이번에는 동행할 사람을 물색해볼까. 기왕이면 알로라지방에 방문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 좋겠다. 에단 씨나 사라 씨는 열대의 날씨를 견디질 못한다고 하니 안 되겠고, 하운이는 제수씨와의 시간을 더 가지고 싶어할 테고... 그럼... 아.'
그리고, 그 곳에 따라큐가 있었다.
은엽은 좁은 골목에 들어서자마자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것은 의도된 동작이 아닌, 본능에 따른 무의식적 동작이었다. 방금 전까지 머릿속에 그리고 있던 계획은 이미 말끔히 날아가 버린 상태였다. 불쾌한 오한이 정수리에서부터 어깨 위로 진득하게 흘러내렸다.
왜 하나지방의 공장지대에서 알로라지방의 포켓몬이 돌아다니고 있는 걸까. 은엽이 탈포켓몬을 응시하는 동안, 녀석도 멀찍이 마주 선 인간을 가만히 관찰하고 있었다. 야생포켓몬이 아니라면, 누군가에게 버림받은 포켓몬인가? 스쳐 지나가는 의문에 부정문이 곧바로 떠올랐다. 저 녀석은 길목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도대체, 누구를?
따라큐의 탈 밑에서 큼직한 손톱 형태의 그림자가 솟아올라 허공을 날카롭게 그어내며 명백한 적대의사를 보였다. 은엽은 반사적으로 얼굴 앞을 막아낸 팔을 내리고 곧장 이어롭을 내보냈다. 처리할 적이 늘어나자 따라큐의 탈 밑에서 번뜩이던 눈빛이 음침하게 가늘어지는 것이 보였다. 공격의 우선권을 잃고 틈을 재어보는 듯한 모양새였다. 어차피 이쪽의 공격을 한차례 흘려낼 수 있는 탈의 존재를 믿고 여유를 부리는 것 같기도 했다.
빠르게 주위를 살펴 다른 누군가가 있는지 확인한 은엽은 이어롭에게 공격지시를 남겼고, 이어롭은 트레이너의 지시를 듣자마자 줄곧 날카로이 벼르고 있었던 경계태세를 무기로써 내세웠다. 냉기를 머금은 주먹이 바로 근처에 고여있던 물웅덩이를 가격하자 물이 솟구쳐오르다가 그 모양 그대로 얼어붙었다. 이어롭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얼음기둥을 힘껏 걷어차낸다. 공중을 부유하던 고드름이 따라큐의 탈을 찢어내자, 따라큐는 노기어린 울음소리를 내며 손톱을 치켜세웠다. 이어롭은 분노한 따라큐가 칼춤을 추는 모습을 차디찬 눈길로 바라보았다. 저게 야생인지 주인을 가진 포켓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제가 애정하는 주인에게 해를 가하려 했다는 것, '그러니까 넌 이제부터 내 밥이다!' 이어롭은 난폭하게 발을 구르며 으르렁거리다, 새로이 떨어지는 지시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쫙 펼친 손바닥에서 한가득 뭉쳐낸 새까만 그림자 덩어리를 제게 날렵하게 달려들어 오는 녀석에게 그대로 쏘아 보낸 것이다. 효과가 굉장한 기술을 직격으로 받아버린 따라큐는 일격에 쓰러지고 만다.
승부는 갑작스럽게 일어났던 것처럼 갑작스럽게 끝났다.
“…보라, 이쪽으로 와요.”
이어롭은 따라큐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자신의 트레이너가 부르는 소리를 따랐다. 은엽은 골목길을 피해 가로등이 자리한 장소로 이동한 후, 피가 흐르는 왼손을 손수건으로 지혈하며 낮게 말했다.
“그 따라큐, 당신이 아니라 끝까지 절 노리고 공격을 시도했었죠. 처음부터 제가 타깃이었던 것처럼.”
이어롭은 하얀 손수건에 흥건히 묻어나오는 붉은 것을 불안하게 지켜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은엽은 왼손을 약하게 쥐었다 펴내곤 방금 전 빠져나온 길을 돌아보았다.
“…계획을 조금 수정해야 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지점에 포켓몬 센터가 있었지만 은엽은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이대로 일터에 돌아가는 것은 제 발로 무덤에 들어가는 것과 다름없겠지. 하지만 민간 시설에 도움을 요청했다가 무슨 위험이 올지도 모르고, 모란만 경찰서에 협조를 구해볼까도 싶었지만 여전히 리스크가 남아있을 것이다.
그럼 이를 어쩐다.
은엽은 경계를 늦추지 않는 이어롭을 다독여주는 한편으로 호주머니 속에서 꺼낸 비상용 호출기를 만지작거렸다. 완벽을 기하려면 아직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이 있는데, 마저 검토해야 할 게 남았는데. 하지만……
"그 계획이란 거, 궁금하거든. 나한테도 살짝 얘기해주지 않을래, 매니저님?"
따라큐를 마주쳤을 때보다도 더한 한기가 찾아들었다. 한껏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귀청을 때린 다음으로, 없던 인기척이 갑자기 생겨난 것이다. 이어롭의 경고성 짙은 울음소리와 함께 은엽의 몸이 뒤쪽으로 홱 잡아당겨졌다. 은엽은 손가락에서 미끄러져 나간 호출기가 공중에서 박살이 나는 장면을 보며 가까스로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이어롭은 잠시나마 딴생각에 빠졌던 트레이너를 나무라지 않았다. 제 주인이 스트레스를 과도하게 받는 것을 그 동안 지켜본 게 있는데, 아무렴, 그 강박 때문에 마음속 여유가 얼마든지 부족해질 수도 있지. 하지만 그의 주인은 방금 정말로 치명적인 위기에 빠질 뻔했다. 긴장과 분노로 인해 축소된 이어롭의 눈동자가 적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관상은 착실해 보여서 참 좋았는데 꿍꿍이를 숨기고 있었을 줄이야, 우리 매니저님은 보기보다 음험하구나. 아주 마음에 들었어."
은엽은 그 목소리의 주인을 알고 있었다. '마주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인물... 그러나 지금의 제 시야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적의 위치파악을 먼저 해야 할 지, 공격당한 상황으로부터 먼저 벗어나야 할 지.' 은엽은 이 순간에도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놀라는 한편, 갑작스레 벌어진 긴급 상황에 평정심을 잃지 않으려 애를 쓰면서 이어롭을 따라 주위를 경계했다. 가로등 밑으로 드리워진 그림자들이 유독 현란하게 움직인다는 느낌을 받는 것도 잠시. 시야가 이상하게 깜박이는가 싶더니 은엽은 현기증이 스멀스멀 엄습해오는 것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기분 나쁘게 킬킬거리는 웃음소리가 귓가에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이것은 인간이 만들어내는 웃음이 아니었다.
"그림자... 팬텀이군."
"정답! 혼란스러울 텐데도 머리는 여전히 잘 굴러가네. 멍청한 다른 녀석들과는 한참 달라. 당신 진짜 대단하다?"
은엽이 주춤하는 사이, 한발 앞선 이어롭이 서둘러 방어를 펼쳤다. 트레이너의 뒤를 노리고 날아온 섀도볼이 순식간에 형성된 막에 부딪혀 무력하게 조각났다. 짤막한 공방이 이루어지는 사이에 은엽은 거리가 기이하게 뒤틀리는 모습을 보며 침음성을 흘렸다. 혼란 상태이상에 도대체 언제 걸려들었는지, 이 상태에서는 승산이 거의 없음을 깨달은 그는 허탈함 섞인 웃음을 흘렸다.
"저를 언제부터 지켜보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고스트타입을 이 경지까지 다루는 실력자라면 의심가는 분자 하나를 색출해내는 건 식은죽 먹기겠군요, 실장님. 어디에 계십니까? 모습이라도 보여주시죠."
"어머, 난 술래니까 모습을 숨길 권리가 있거든. 그리고 매니저님이 제대로 혼란에 걸린 건 맞나보다. 자기 입으로 의심 분자라고 하네. 그래서 당신 정체가 뭐야? 산업스파이? 잠입한 레인저? 웬만해서는 회사 밖으로 잘 안 나가는 사람의 출입기록을 조회해보니 좀 궁금해져서 말야, 당신 뒤를 몰래 밟았거든. 항구에는 왜 간 거야? 어떤 꿍꿍이를 세웠지? 빨리 말 안 해?"
은엽이 던진 말에 신나서 종알거리던 실장은 마지막 마디에서 쇳소리를 냈다. 그게 신호라도 된 듯 주변의 그림자들이 은엽에게로 몰려들어 발목을 묶었다. 그와 동시에 은엽은 제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린 것을 느꼈다. 놀란 이어롭이 그림자를 주먹으로 가격하나 변화하는 것은 전혀 없었다. 실장은 이어롭의 필사적인 태도를 마치 재롱잔치로 여기듯 하며 경박하게 웃었다.
"쉽게 털어놓을 생각은 없나 보네. 그래, 그렇게 나와야 더 재밌어지지. 그럼 재미를 더하기 위해... 우리 게임 한 판 하자, 매니저님."
"...악취미를 가지셨군요."
함정에 걸려 옴짝달싹 못하는 상황이라. 꼬리가 생각보다 길었던 모양이었다. 이런 실책을 저지르다니 어디 가서 명함도 못 내밀 것이다. 은엽은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고 싶은 욕구를 느끼며 허공을 쏘아보았다.
"눈빛 좋네... 탐난다니까, 정말. 흠흠, 이렇게 하자. 당신이 나와 팬텀에게서 도망치는 데 성공하면 목숨만큼은 살려줄게. 단, 제한시간이 있어. 그 안에 도망치지 못하면 당신도 잔뜩 괴롭혀준 다음에 팬텀의 밥으로 넘겨줄 거야. 전임 시설팀장은 이 게임에서 졌는데, 당신은 어떨까."
딱, 하고 손가락을 가볍게 튕기는 소리가 들렸던 것 같다. 은엽의 발 밑에서 도사리고 있던 그림자가 급격히 솟아올라 대못의 형태를 띠었다. 이어롭은 찰나에 그림자의 궤적을 놓치고 고개를 홱 치켜들었다. 그 다음 순간 이어롭의 시야에 든 장면은 가슴이 커다란 못으로 꿰뚫린 주인의 모습이었다.
“… … … …!”
"걱정 마렴, 그것에 찔렸다고 죽지는 않을 거야. ...아마도? 그럼 게임 시작한다?"
그림자 대못은 이어롭이 비명을 지르며 휘두른 주먹에 의해 산산이 바스라졌다. 은엽은 제 움직임을 구속하던 그림자가 사라지자마자 관통당했던 부위를 손으로 더듬었다. 외상은 없었지만, 잔존하는 통각 너머로 저주의 기운이 숨통을 천천히 조이는 것을 어슴푸레나마 느낄 수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이전보다 정도가 심해진 현기증이 두통을 유발했다. 은엽은 완전히 패닉 상태에 빠져서 자신을 부축해 주는 이어롭에게 나지막이 속삭였다.
"배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에요. 뒤... 항구 방향으로 돌아갑시다. 눈 감고 있어요. 준비되면 신호를 줄게요."
어느 새 슬슬 호흡이 힘들어지고 있었다. 은엽은 밭은 기침을 뱉고는 이어롭의 품에 안겼다. 예전에, 누군가를 똑같은 자세로 안아들고 이동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는 짧은 상념을 뒤로 하고 눈을 감은 채로 소리없이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 펑, 번쩍.
후배가 남기고 간 도구는 제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시제품으로 나왔던 시절에는 연기가 옅고 빛이 약해서 사용성이 떨어졌는데, 이번에 나온 건 연기가 두껍고 강한 빛도 발산할 수 있다더라고요.' 즉, 시력 보호에만 주의한다면 교란 효과를 충분히 낼 수 있는 연막탄이었다. 사방을 짙게 뒤덮은 연막을 가뿐히 헤쳐나온 이어롭이 항구 방향으로 달려가는 동안, 은엽은 몸이 붕 뜨는 듯한 감각을 느끼며 힘겹게 숨을 쉬었다. 나중에 후배를 만나면 감사 표시를 어떻게 해야 할까. 이어롭의 심장이 거칠게 뛰는 소리가 이와중에도 맵싸한 죄책감을 불러일으킨다.
"주인이 되어놓고, 이런... 민폐를. 미안해요, 보라..."
이어롭은 주인의 말을 듣고 왈칵 성을 냈다. 허튼 소리 말라는 의미였다. 실시간으로 생명이 갉아먹히고 있는 중인데도, 당장 병원에 가야 할 처지인데도 자신을 탓하는 말만 중얼거리는 꼴이라니. 이어롭은 트레이너가 어째서 병원으로 가라 지시하지 않고 항구로 가 달라 했는지 의문스러워 했다. 그나마 달리는 속도가 빠른 덕분에 목적지가 목전이었다. 트레이너는 그새 혼수상태에 빠져들려는 듯 무엇인가를 헛소리처럼 뱉고 있었다. 겁에 질린 이어롭이 속도를 더욱 높여 항구의 가장 구석진 곳까지 순식간에 다다르자, 간신히 의식을 붙잡은 은엽은 기침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를 흘리며 이어롭의 팔에 손을 얹었다. 이제 내려달라는 의미였다.
은엽은 바닥에 주저앉아서 얼마 동안 헛구역질을 한 뒤, 덜덜 떨리는 손짓으로 이어롭을 불렀다. 트레이너의 등을 토닥여주랴, 주변을 경계하랴 정신이 없던 파트너 포켓몬이 후닥닥 시선을 맞춰왔다.
“이 안에 든 물건들, 잘… 지니고 있도록… 하고….”
주인에게서 피 묻은 손수건으로 감싸여진 무언가를 건네받은 이어롭은 잠시 어리둥절해 했다. 은엽은 그저 지친 기색으로 웃기만 하고, 히든카드로 숨겨 뒀던 두 번째 볼에서 플라이곤을 불러냈다. 플라이곤은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보이는 트레이너의 상태에 소스라치게 놀랐으나, 냉정한 목소리가 곧장 들려오는 바람에 아무런 말도 건넬 수 없었다.
“높…새, 보라를 데리고… 바다를 건너요. 저는 여기에… 내버려… 두고… 둘이서… 본부로 돌아가… 요.”
자기들이 대체 뭘 들었는지 고민하느라 만들어냈던 침묵도 아주 잠시, 이내 두 포켓몬들이 대경실색해서 동시에 항의하지만 은엽의 음성은 단호하기 그지없었다.
“제 안전과 당신들의 안전, 다른 사람들과, 붙잡힌 포켓몬들 안전까지 한꺼번에 고려했을 때… 이게 가장 최선입니다. 얼마 뒤면 전 행동불능에 빠지겠죠. 애초부터 붙잡힐 처지였습니다. 저쪽에 전력이 얼마나 남아있는지 모르는 이상, 당신들도 위험해질 수 있어요. 그것만큼은 제가 절대로 용납 못하니, 빨리 여기서 벗어나요. 그다음에, 제가 방금 보라에게 넘긴 것들을 본부에 전달하세요. 그리고, …”
그는 빠른 속도로 말을 잇다 말고 상체를 앞으로 푹 수그리며 격렬한 기침을 쏟아냈다. 그 바람에 목구멍이 찢어졌는지 역류하는 쇠맛을 견디지 못하고 입 바깥으로 피 섞인 것을 내뱉고 말았다. 온몸 구석구석 맺힌 식은땀이 천천히 식어가며 오싹한 한기를 남긴다. 가슴속부터 갈가리 찢겨나가는 느낌이 이만저만한 고통이 아닌데도 그는 자신의 포켓몬들을 의식하며 억지로 기침을 끊었다.
“…저… 안 죽는… 다니까… 요, …걱정 말고, 어서… 가요.”
방금 전의 기침 소리로 위치가 발각되어 항구의 입구 쪽에서 그림자가 일렁이는 것이 보였다. 이어롭은 이빨을 으드득 갈고 나서 작은 보따리를 거머쥔 채로 플라이곤의 등에 올라탔고, 플라이곤은 구슬픈 눈으로 은엽을 응시하곤 명령대로 제 동료만을 데리고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만일 소소리까지 데리고 왔더라면 그 아이는 틀림없이 끝까지 남겠다고 버텼겠지. 은엽은 두 포켓몬들이 그림자가 닿지 않을 곳까지 멀어지는 것을 지켜보며, 조금 전 미처 뱉지 못했던 단어를 비로소 흘려냈다.
“…미안합니다.”
소중한 사람에게 연락을 해둘 걸 그랬나, 은엽은 덧없는 후회를 떠올렸다. 그리곤 내내 아슬아슬하게 붙잡고 있었던 동아줄을 놓치듯이 의식을 잃었다.
춥고, 캄캄하고, 냄새나고, 축축해.
여기, 어디인지 모르겠다. 원래 살던 곳과는 아득한 차이가 있는 장소, 너무나도 비좁아서 답답하기만 한 곳, 차갑고 단단한 것이 앞을 가로막아, 발톱으로 아무리 할퀴고 긁어보아도 소름 끼치는 소리만 들릴 뿐이다.
꼬마는 잠들었다 막 깨어났을 때 무언가가 자신을 비좁은 공간 안에 우악스럽게 밀어 넣었던 것을 기억했다. 깨어나기 직전에는 귀가 아픈 소리가 났었다는 걸 떠올릴 수 있었다. 이거, 나 이 냄새 싫어요, 꼬마는 본디 따뜻했던 것이 차가워지는 냄새를 맡고 감각을 바짝 곤두세우기 시작했다.
나를 막지 마, 나를 내보내 달라고, 꼬마는 애달프게 울어댔다. 애타는 부르짖음은 허무하게 공간을 맴돌이치기만 할 뿐이었다. 그가 부르는 대상은 응답을 하지 않는다. 움직이지도 않는다. 그 서늘한 공백이 몸서리쳐지도록 무서웠다. 나 여기에 있어요, 날 불러주세요, 기다리라고 해서 착하게 기다렸는데, 이제 그만 답해주세요, 목소리를 들려줘요, 무사하다고 알려줘요...
꼬마는 다시 제 앞을 가로막은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긁어내렸다. 발톱이 부러져도 계속 긁어댔다. 발톱이 더 소용없을 것 같으면 힘껏 몸을 부딪치고, 그렇게 몸이 부서질 것 것 같아도 계속해서 부딪쳐댔다.
나는 여기에서 반드시 나가야 한다고, 꼬마는 조그마한 앞발로 철창을 두드리며 큰 소리로 울었다.
그러다가,
쾅, 하고, 바닥 채로 들썩이고,
깜짝 놀란 쌔비냥이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서니, 어두컴컴했던 공간 안으로 밝은 빛이 가득히 쏟아져 들어오고, 몹시 낯선 목소리가 공포에 질린 포켓몬의 혼미한 정신을 일깨운다.
“…우리가 왔어, 많이 기다렸지. 늦어서 미안해.”
누군가가 목이 메는 듯한 음성을 최대한 가라앉혀 상냥하게 말을 건넨 후, 흠집 하나 없이 매끈한 철창살을 손으로 꽉 잡으며 나직이 덧붙였다.
“뒤로 더 물러서.”
굳은 듯이 서 있던 쌔비냥이 겁을 잔뜩 집어먹은 표정으로 뒤에 바짝 붙어섰다. 말을 꺼낸 이는 고개를 한번 끄덕여주고 철창을 붙든 손아귀에 서서히 힘을 가하기 시작했다. 쌔비냥의 갈고리 같은 꼬리가 정신 사납게 휙휙 움직이다가 익숙한 악의 기운을 감지하고 우뚝 멈출 무렵, 금속 창살이 엿가락처럼 휘어지다 별안간 뚝 소리를 내며 간단히 떨어져 나갔다.
쌔비냥은 제 앞을 가로막은 장애물이 사라지자마자 쏜살같이 뛰쳐나가더니, 바로 앞에 있던 커다란 철창으로 박치기를 할 것처럼 달려들었다. 다급한 손길이 그 동작을 가로막았다.
“그만둬, 그러다 다쳐. …아, 아얏.”
할퀴기 공격을 받은 손등에서 핏줄기가 흘러나왔지만, 리안은 아픈 기색조차 비치지 않은 채로 포켓몬의 움직임을 꽉 붙들었다. 쌔비냥은 사납게 울부짖으며 이것 놓으라고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처절한 움직임마저 금방 구속당하고 말아, 작은 포켓몬은 결국 서글픈 울음을 터뜨렸다.
리안은 쌔비냥의 상처투성이 앞발을 치료해주는 와중에도 생생하게 울부짖는 파동과 텅 비어버린 파동을 동시에 느끼고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는 레파르다스의 시신이 보이지 않도록 천으로 덮어둔 철창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파트너에게 다가가 쌔비냥을 안겨주었다.
“잠깐 그 애를 맡아줘.”
묵묵히 고개를 주억거린 조로아크는 쌔비냥을 데리고 트레일러와 거리가 떨어진 지점으로 자리를 피했다. 리안은 트레일러의 가장자리에 걸터앉아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람개비숲 앞마당의 으슥한 장소, 이 곳에서 밀렵을 벌였던 헌터 일당들이 다른 레인저들과 경관들에게 붙잡혀 감시를 당하고 있는 중이었다. 사위가 조용한 가운데 멀찌감치 떨어진 장소에서 터져나오는 쌔비냥의 울음소리만이 생경했다. 리안은 무심코 눈가를 문질러내고 스타일러를 조작해 통신 모드로 바꾸었다. 통신 화면 너머에서 곧장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인저 리안… 이에요.”
제게는 여전히 어색한 존대가 흘러나왔지만, 상대방은 그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듯 무심하게 응답한다.
-그래, 어찌 되었냐.
“…바람개비숲 근방에서 발생한 밀렵 저지 미션을 완수했음을 보고합니다. 검거한 일당은 전부 셋, 그들에게 포획되었던 포켓몬들은 둘, 그 중 한 마리는 구출에 성공했지만 다른 한 마리는 현장에 도착했을 때 이미 사망한 상태였습니다. 이 외의 피해 사항은 없어요.”
문장을 줄줄이 읊는 동안 감정이 서서히 식어갔다가 마지막에 가서는 약하게 떨리는 소리를 내고 만다. 이어지는 짧은 침묵. 상대방은 작게 한숨 쉬었다.
-…수고 많았다. 마무리 짓고 바로 복귀해.
통화는 거기서 툭 끊어지고, 리안은 스타일러를 무릎 위에 내려놓으며 기나긴 한숨을 내쉬었다.
'마무리라.' 그는 건조한 눈빛으로 하늘을 한차례 올려다보고는 땅으로 내려와 동료 레인저들이 모여있는 지점으로 향했다. 그들은 제각기 다른 기지에서 지원을 나온 레인저들로, 동일한 임무를 완수하고 각자의 관할을 의논하고 있었다. 그들 중 한 명이 리안의 손등을 보고 힉, 하는 소리를 냈다.
“피가 엄청 나는데, 괜찮아요?”
리안은 눈을 끔벅이다가 자신이 그새 손등에 상처를 입었던 걸 잊고 있었음을 자각해내고 쓴웃음을 지었다.
“별거 아냐. 그보다 저 안에 있는 레파르다스. …꺼내려면 열쇠가 필요해.”
“그건 내가 방금 압수했다. 금방 다녀오지.”
또 다른 레인저가 열쇠를 쥐고 자리를 떠났다. 언제나와 같은 마무리 절차가 이어진다. 그쪽이 레파르다스의 시신을 수습하고, 헌터들의 신변과 장비들을 경찰 측에 인수인계하는 역할은 저쪽이, 그리고 홀로 남게 된 쌔비냥을 보호하는 역할은 이쪽이. 리안은 현장 철수를 준비하는 레인저들에게 인사를 남긴 뒤 파트너를 호출했다. 쌔비냥을 달래는 데 여념이 없었던 조로아크는 한박자 늦게서야 자리로 되돌아왔다.
기지에서 대여해 온 망나뇽에 올라타기 직전, 리안은 멀리서 경관들에게 체포되어 가는 헌터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누군가에게 일생동안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아무렇지 않게 남겨놓으면, 그 누군가는 그 상처를 안고 살아야 하는데, 고통은 어째서 항상 피해를 입은 이들의 몫인 걸까. 예전 같았으면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주먹을 휘둘렀을 텐데, 그런 행동이 덧없는 화풀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이후에는 마음이 허해지기만 했다.
리안이 소속된 레인저 기지는 사시사철 모래바람이 부는 4번도로의 구석에 위치하고 있었다. 다른 기지에 비해 비교적 소규모의 인원으로 운영되고 있었지만, 엄격하고 까다롭기로 이름난 리더 레인저 밑에서 직업의식과 책임감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근무하고 있는 만큼 퍽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조직이기도 했다.
레인저 시오레는 현장에서 복귀한 동기를 맞이하려다 손의 상태를 보고 기겁해서 그를 의무실로 끌고 들어왔으며, 리안은 시오레가 종알종알 늘어놓는 잔소리를 한쪽 귀로 흘려듣고 있었다.
“…제때 치료 안 하고, 어? 모래바람 속을 날아오면 어떻게 해! 어? 그러다 파상풍 걸린다고. 포켓몬 센터에서 해주는 응급치료가 괜히 무료인 게 아니라니까 그러네.”
“어쩔 수 없었는걸. 쌔비냥이 많이 불안해하기도 했고… 복귀도 서둘러야 했으니까.”
리안은 중얼중얼 말대꾸하다가 등을 찰싹 얻어맞고 윽 하는 신음을 냈다. 시오레는 눈을 흘기며 그의 손등 위에 거즈를 대고 붕대로 꽉꽉 눌러 감기 시작했다.
“아직 미란다 씨 성격 몰라? 빨리빨리 정신보다 멤버들 건강을 중시하는 사람이란 거, 너 그러다가 건강 관리 못했다고 또 혼난다.”
“시오레… …나 이거 아파.”
“아프라고 일부러 한 거야.”
시오레는 가볍게 쏘아붙이면서도 붕대를 조금 느슨하게 풀어주었고, 눈물을 찔끔거리던 리안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쌔비냥은 어딨어?”
“휴게실에서 우리 애들이랑 같이 있을 거야. 아무래도 같은 악타입이 편하긴 한가 봐.”
리안은 조로아크의 풍성한 갈기에 아예 딱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던 쌔비냥을 회상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어미도 없이 낯선 환경에 들어와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을 텐데, 그래도 조금씩은 안정을 되찾아가는 기미라서 다행이다 싶었다. 시오레는 제 턱을 손가락으로 짚어보곤 지나가는 듯이 말했다.
“그럼 조만간 너네 식구가 될 지도 모르겠다.”
리안은 손등에 감긴 붕대의 까칠한 표면을 문질러보다가 눈을 깜박였다.
“…어?”
“잘됐네, 넌 악타입 전문가잖아? 그 쌔비냥, 어린 나이에 갈 곳도 없을 텐데 네가 돌봐주면 되겠다. 그치? 마침 엔트리에 자리도 남았잖아.”
“어….”
리안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을 아예 안 하고 있었던 게 아니긴 한데, 그것보다 전문가라니, 리안은 이 호칭에 다소 낯선 감정을 느끼면서도 미묘하게 수긍하는 반응을 보였다. 시오레는 키 높이 의자에 걸터앉은 채로 다리를 대롱거리고 있다가 땅으로 내려왔다.
“그럼 쌔비냥은 네 포켓몬들한테 맡겨놓고, 나랑 같이 미란다 씨 만나러 가자. 너 치료 다 받는 대로 오라셨거든.”
“어… 지금?”
“너랑 나한테 하실 말씀 있댔어. 뭐 보나마나 오늘의 잔소리겠지.”
그는 알 만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고 총총걸음으로 의무실을 빠져나갔다. 리안은 자리에 멍하니 앉아있다가, 복도에서 채근하는 목소리를 듣고는 화닥닥 놀라서 뒤를 따라 나갔다.
“뭘 그렇게 한참 생각하고 있어?”
시오레는 좀처럼 멍한 기색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동기가 신경 쓰여 소곤소곤 물어왔다. 아무런 말도 없이 복도를 걷고 있던 리안은 다시금 움찔하는 반응을 보였다.
“그게, …새로운 포켓몬을 영입하는 건 정말 오랜만이라서.”
‘내가 지켜야 할 대상이 늘어나는 건데, 내가 잘 지켜줄 수 있을 지 자신이 없어서.’ 리안은 본래의 의미를 그대로 말하지 않고 얼버무렸다. 그래봤자 눈치가 네이티오 급인 동기의 관심을 넘길 수는 없었지만. 시오레는 골똘한 표정을 그대로 방긋 웃는 표정으로 바꾸며 말했다.
“어떻게 양육하면 좋을 지 신경이 쓰이는 걸까나?”
리안은 이런 식으로 속마음이 꿰뚫릴 때면 언제나처럼 눈이 동그래지고는 했다. "아, 이 솔직한 반응을 어쩌면 좋아." 시오레는 즐겁게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면담 끝나고 시간 잡을래?”
또 상담 같은 걸 해준다는 의미겠지. 그가 때때로 부리는 오지랖이 싫지 않아, 리안은 하릴없는 웃음을 짓고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리더 레인저의 사무실에 이르러서 시오레가 문고리를 잡아당기려고 하는 순간에 문이 안쪽에서 벌컥 열리고, 시오레는 리더 레인저와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뻘쭘하게 웃었다.
“… …앗. 음, 좋은~…”
“그래, 좋은 밤이지. 언제 오나 했다. 들어와.”
리더는 둘을 보고 퉁명스럽게 대꾸한 뒤 다시 방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가 버렸다. 두 레인저는 동시에 한숨을 내쉰 후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가, 뜬금없이 자기들에게 제각각 던져지는 튼튼밀크를 받아들고 더욱 더 영문을 잃은 얼굴이 되었다.
“음, 미란다 씨…?”
어쩐 일로 저희를 부르셨나요, 하고 시오레가 물을 새도 없었다. 매사에 형식 따지기를 싫어하는 그들의 리더는 이미 책상에 걸터앉은 채 시큰둥하게 제 몫의 튼튼밀크를 한모금 들이키고 있었다. 그는 두 명에게 아무 데나 앉으라는 눈짓을 하고 대뜸 말을 꺼낸다.
“일 많이 힘들지 않냐?”
플라스틱제 스툴에 쭈뼛쭈뼛한 자세로 자리를 잡은 리안은 리더의 잿빛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눈을 깜빡거렸다.
“아니…, 그다지요.”
리더의 시선이 이번에는 그의 동기를 향했고, 시오레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리더는 조금 실망하는 기색을 띄었다.
“솔직히 말해도 해코지 안 하는데 말이다. 늬들 의욕 넘치는 것과 별개로 스트레스 많이 받고 있다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았냐.”
리안은 그제야 아까 전 보고를 올릴 때 리더가 막바지에 한숨을 흘렸던 걸 기억해내고 그를 멀거니 쳐다보았다. 리더는 병을 옆자리에 두고 팔짱을 끼며 말을 잇는다.
“좋은 소식인지는 모르겠지만, 급습이나 잠입 미션이 계속 이어져 오던 거 말이다. 그거 원래 국제경찰 측에서 의뢰가 들어오던 건데, 조만간 종료될 것 같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갑작스러운 전달이라 조금 의아스럽긴 한데, 어쨌든 너희 아차모들이 초년부터 고난도 미션에 치여 지내는 생활도 더 없을 것이고, 내 업무보고 칸을 2년 가까이 차지하고 있던 국제경찰이라는 단어가 드디어 지워진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흠… 이렇게 말하고 보니 좋은 소식이 맞긴 맞는군. 이거 알려주려고 너희를 부른 거야.”
시오레조차 어디서부터 대화의 줄기를 잡아야 할 지 도통 모르는 얼굴이다. 리더는 막내 레인저들의 표정을 들여다보며 피식 미소를 지었다.
“튼튼밀크는 그 축하의 의미로 준 거다. 각자 마시든 파트너한테 주든 마음대로 해. 보너스는 다음 달에 지급될 거고… 휴가는 자꾸 이월하지 말고 제때 좀 써라. 그리고 너희 둘 다 랭크 승급은 아직 멀었으니 괜한 기대는 말고….”
“의뢰의 주체가 국제경찰이었다고요?” 폭포수 쏟아지듯 하는 말을 중간에서 먼저 끊고 들어간 쪽은 시오레였다. 그는 자신이 방금 단어를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의심스러워하는 표정이었다. 리더는 대충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하긴 둘 다 갓 견습 딱지를 뗐으니 잘 모르겠군. 정확히는 레인저 유니온을 통해서 들어온 의뢰들이었고 예전에도 가끔 들어오곤 했던 건데, 요새가 좀 유별났잖냐. 그 쪽이 정확히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는 도통 알려주지 않으니 잘 모르겠다만, 뭔가 큰 건을 했고 얼추 끝이 났으니 이런 소식을 날려준 거겠지. 나도 정보 공유 제대로 안 되는 녀석들과 일하려니 하도 갑갑해서 죽는 줄 알았지 뭐냐. 내 휘하 레인저들이 미션지에서 부상을 입는 경우도 줄어들 지 기대를 해봐야겠군.”
리더는 마지막 마디를 뱉으며 리안의 손등을 유심히 쳐다봤다. 리안은 손을 괜히 꿈지럭거리다 시오레 쪽을 흘끔 돌아보았다. ‘국제경찰이 뭐 하는 조직인데?’ 눈빛으로 보낸 질문에 시오레는 고개를 미미하게 흔들며 입 모양으로 말했다. ‘나중에 말해줄게.’
“여하튼…. 젊은것들끼리 알아서 파티를 벌이든지, 나는 이제부터라도 내 말년 계획 좀 세워야 쓰겠다.”
둘의 시선 교환의 의미를 오해했는지, 리더는 불퉁스럽게 중얼거린 뒤 책상에서 내려와 허리를 툭툭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 모양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던 리안이 불쑥 질문을 던졌다.
“리더, 그럼… 잠입 미션이 줄어들면 그다음부터는 무얼 해야 해요?”
질문을 들은 리더가 얼굴에 물음표를 띄우자 시오레가 그를 대신해서 설명해주었다.
“그냥 다른 미션을 잡으면 돼. 우리가 잠입 지망이라고 해서 반드시 그런 종류만 잡아야 하는 건 아니고….”
“…시오레 말대로다. 지망은 미션을 배정할 때 우선순위 요소로만 고려되는 항목이니 전체적인 미션 참여 횟수는 늘 일정하게 유지될 거야. …근데 요즘 학교에서 이런 거 안 가르쳐 주나?”
시오레는 어깨를 으쓱이고, 리안은 얼굴이 빨개진 채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리더는 헛웃음을 터뜨리고 문을 가리켰다.
“질문 더 없지? 수고 많았고, 저녁 다 먹으면 잘 씻고 애들이랑 잘 놀아주다 잘 자라. 늦잠 자면 키 안 큰다. 그럼 이제 해… 뭐냐, 또 저건?”
시오레는 미션이 날아오는 타이밍이 참 기가 막힌다고 여겼다. 사무실의 벽에 걸려 있던 스크린의 구석에서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알림이 요란하게 깜박거렸고, 리더는 그것을 보며 못마땅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이번엔 또 뭐... 긴급?”
메시지의 머리말에 붙은 ‘긴급’이라는 단어가 눈에 걸렸는지, 리더는 레인저들이 보는 눈앞에서 그대로 본문을 스크린 화면에 띄워버렸다. 긴급이라고 하기엔 묘하게 짤막한 내용인데, 시오레는 고개를 기우뚱하다가, 그 안에서 상호명을 알아보고 안면을 굳혔다. 이내 그는 자신의 동기가 새하얗게 질려 있는 모습을 보고 더 놀라버렸다. 얘가 저런 표정 짓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는데, 싶은 순간 본문에 걸려 있는 사진을 보고 다시 한번 더 고개를 갸우뚱했다. 코드네임 아스펜(Aspen)? 어라, 어디서 본 적이 있는 얼굴인데…
시오레는 그 순간 리안과 함께 입학 사무실에 들어왔던 한 사람을 떠올려낼 수 있었다.
“…리더, 나 저 사람 알아, 알아요. 이름은 다른데, 어쨌든, ….”
리안은 말까지 더듬거리면서 리더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리더는 두 레인저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나서 툭 물음을 던졌다.
“참여 인원에 넣어주랴?”
그들은 거의 필사적이다 싶을 정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리더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고 스크린 속 버튼을 짚었다.
“리안은 먼저 나가서 채비를 하고 있도록. 이거 아무래도 밤샘 미션이 될 게 뻔하니 컨디션 괜찮은 녀석을 파트너로 선정해둬라. 그 엉망으로 난리 난 감정 좀 단단히 추스려놓고. 그리고 시오레는 여기 남아서 나 좀 보자.”
리안은 숨까지 조금씩 헐떡이며 자신의 동기를 쳐다보다가, 그가 ‘먼저 가봐.’ 속삭이는 것을 듣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갔다. 시오레는 그의 발소리가 복도 저 편으로 멀어질 때까지 기다린 후 리더에게 고개를 돌렸다.
“…리안을 보내도 괜찮을까요?”
시오레의 걱정스러운 물음에도 리더는 표정의 변화 없이 대꾸할 뿐이었다.
“참여 못하게 하면 더 야단날 거다. 저렇게 맹한 녀석이 저 정도 반응을 보이는 상대라면 아무래도 보통 놈은 아닌가 보지. 만약 네가 소중하게 여기는 대상이 어딘가로 납치돼서 생사불명이라는 소식을 들었는데, 그를 구출한다는 옵션이 주어진다면 넌 어떨 것 같으냐?”
리더는 머리칼을 하나로 묶어 쥔 채로 창 바깥을 내다보며 무뚝뚝하게 물었고, 시오레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조용히 답했다.
“구하러 죽자고 달려들겠죠.”
“…어째서 ‘구하다’와 ‘죽다’가 한 문장 안에 함께 들어갈 수 있는지는 나중에 따져보기로 하고, 아무튼 그래, 나는 그런 의미에서 널 같이 붙여주는 거다.”
리더는 유리창에 비치는 시오레의 노란 눈동자를 응시했다.
“난 네 복수심에는 별로 관심이 없지만 내 레인저들의 안전에는 대단히 관심이 많거든. 너희, 교육생 시절에 미션 파트너로 같이 다녔다며? 그럼 둘이서 합도 잘 맞을 테고, 네 동기의 브레이크 역할도 잘 해내겠지. 물론 저런 현장에 아차모들만 내보낼 순 없으니 나도 백업으로 참여할 거다.”
“… ….”
리더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시오레를 직접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넌 거기 사로잡힌 포켓몬들을 구해내는 데 집중해라. 너라면 예전의 리안처럼 주먹을 마구잡이로 휘두르고 다니진 않겠지만…. 그놈들이 가지고 있던 카드들을 전부 빼앗고 나서 엿을 똑바로 먹여야 제대로 된 복수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내 표현이 이 모양인 건 네가 대충 이해해라.”
시오레의 표정이 단번에 밝아졌다. 리더는 ‘하여간 요즘 젊은것들은,’ 어쩌고 하며 투덜거리다 턱짓으로 문밖을 가리킨다.
“알아들었으면 가봐. 리안이 뭐 빠뜨리는 거 없는지 네가 다시 검토해서 채비하고.”
시오레는 흥분한 기색이 얼굴 위로 다 드러나지 않도록 의젓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뒤돌아섰다. 사무실을 나서는 그의 등 뒤로 잔뜩 골이 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국제경찰씩이나 되어서 뭘 하고 다니는 건지… 철저할 것 같으면서도 희한하게 엉성한 녀석들이라니까.”
우당탕!
휴게실에 옹기종기 모여있던 네 마리의 악타입 포켓몬들은 일제히 고개를 돌려 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보았다. 리안이 휴게실 문의 모서리를 붙잡고 서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주인이 안색이 엉망이 되어서 돌아오니 술렁이는 분위기가 자연스레 생성되는 가운데, 주인의 파동이 심상치 않게 흔들리고 있는 것을 감지한 아인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제 갈기 속에 파묻혀 있던 쌔비냥을 꺼내 바닥에 내려놓으며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아인스, 날 좀 도와줘.”
다른 때 같으면 누가 이번에 같이 미션에 나가겠느냐고 물어왔을 텐데, 이번에는 조로아크를 정확히 지목하니 모두의 얼굴에 어리둥절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러나 주인은 거의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이어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누구도 감히 묻지 못하고 있었다. 아인스만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가자.
별다른 질문 없이 앞서서 휴게실을 나간 조로아크의 뒤를 따라 나가려는 리안의 발목을 누군가가 붙잡았다. 그에 주춤했던 리안은 쌔비냥 앞에 천천히 무릎을 꿇고 시선을 맞추었다. 여태껏 갈피를 잡지 못해 뒤죽박죽으로 뒤엉킨 감정 사이로 속삭임이 밀려들었다.
-나도 같이 가.
두려움과 외로움이 한꺼번에 섞여들어간 그 속삭임에, 리안은 마음속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조급함을 억지로 저만치 밀어놓았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려.”
그러나 쌔비냥은 고개를 젓기만 했다. 절박한 심정이 묻어나는 움직임이었다.
-엄마도 나한테 기다리라고 했는데 결국 돌아오지 않았어. 이번에는 나도 같이 갈래. 내가 같이 가야 돌아올 거잖아. 그러니까 나도 가게 해줘.
어린 아이다운 삼단논법이었음에도 리안은 웃음을 지을 수가 없었다.
아니, 그렇다고 지금 울면 안 되는데, 그 속삭이는 목소리는 자신이 강제로 틀어막아 놓았던 감정에 도리어 물꼬를 틀어버리고 말아, 리안은 결국 눈물을 왈칵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울면 안 되는데. 지금 울면 미션을 앞두고 감정을 다스리질 못하는데, …
“나는 반드시 돌아와. 그러니까 나를 기다려. 난 널 다시 만나기 위해 돌아올 거야.”
리안이 쌔비냥을 품에 끌어안고 마주 속삭이지만, 아이는 이번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자그마한 포옹만이 이어졌을 뿐이다.
“핀프(fünf). 그 이름 가지고 있어. 다시 돌아와서 꼭 불러줄 테니까.”
쌔비냥은 그제야 그를 놓아준 후 마지막으로, 자신이 상처를 남겼던 손등에 얼굴을 대고 뺨을 비볐다. 리안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이 작은 아이에게 힘겹게나마 웃어주었다.
“고마워.”
리안은 무너질 듯한 발걸음을 억지로 일으키곤 자신의 파트너가 기다리고 있는 장소로 걸어 나갔다.
Q: 팬텀과 이어롭의 기배는...
A: 팬텀 - 섀도볼, 저주, 검은눈빛, 이상한빛
이어롭 - 방어, 무릎차기, 냉동펀치, 섀도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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