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뭄의 끝

하나 마지막까지 버틴 것이 여무는 과정에 이르니

실로(失路)

*Warning: 동물(포켓몬) 학대, 동물(포켓몬) 실험, 사망 묘사 있음.

BGM


20번 도로 골짜기의 가파른 경사 밑으로 교묘하게 숨겨진 컨테이너식 건물의 정체가 외부에 발각된 날, 근처의 빽빽한 숲 속에 서둘러 설비된 회의소의 분위기는 지나치게 묵직하고도 팽팽했다. 앞으로 레인저의 삶을 사는 동안 몇 번이나 이런 분위기를 접해야 하는 걸까 싶었던 리안은 이 순간에마저도 엉뚱한 생각을 흘리는 스스로가 못마땅하게 느껴졌다. 저런 시설물을 어째서 일찍 조사하지 않았느냐는 논조의 실책과 항변이 담긴 설전이 오간 참이었다. 국제경찰 측의 폐쇄적인 스탠스와 쏟아지는 업무량에 그간 불만이 켜켜이 쌓여왔던 레인저들은 할 말이 아주 많다는 태도를 표했으나, 상황이 파국으로 흘러가기 직전 레인저 미란다의 호령이 시기 적절하게 분위기를 가라앉혔다. 그 덕분에, 작전 브리핑을 맡게 된 국제경찰 요원은 발언의 기회를 겨우 얻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임무에 쓰는 가명이 ‘니스(Neath)’라고 했던가. 그는 이곳으로 파견된 두 국제경찰 중 한 명으로, 서글서글하게 생긴 것 치고는 냉정을 유지하는 태도가 퍽 마음에 드는 이였다. 어째서 아인스의 시선을 자꾸만 피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본 작전에서 사용되는 모든 계획 및 행동 지시는 아스펜 요원이 잠입 기간 동안 입수한 정보에 기반하여 이루어집니다. 오늘 저희가 급습할 시설은 외부에 사설 연구소로 신고되어 그간 관계자들 외에는 출입이 불가능한 곳이었습니다만, 실제로는 소위 ‘포켓몬 보관소’라고 불리는, 즉 전국 각지에서 밀렵당한 포켓몬들이 밀매지에 전송되기 전까지 감금을 당하는 장소입니다. 따라서, 임무 수행 중 비인간적인 행위의 흔적을 다수 목격할 수 있음을 미리 유념해 주세요.”

미션에 직접 참여하는 여섯 레인저들은 진중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니스는 그들의 반응을 확인한 후 시설의 설계도를 보여주며 내부 구조를 대략 안내하고, 국제경찰 측과 레인저 측이 각자 도맡게 될 역할을 착실히 설명해주었다.

“이쪽, 슬로스 요원이 우선 보안 시스템과 예비용 보안 시스템을 모두 해제하는 작업을 맡을 예정입니다. 여러분이 시설에 안전하게 진입할 수 있도록 말이죠. 잠입 미션에 투입되신 레인저 분들께서는 2인이 1조를 이루어 각 동에 진입하신 후, 그 곳에 감금되어 있는 포켓몬들을 전부 해방시켜 주시면 됩니다. 시설 내부에 있는 출입문들은 이 복제 카드키를 사용해 통과하실 수 있습니다.”

리안은 제게 전달된 얇은 카드키를 돌려보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제법 본격적인 걸.' 과거 시대에서 특수 부대원으로 참여했을 때 받았던 임무도 이 비슷한 분위기로 진행되었던 것 같기도 한데, 그 때문인지 필요 이상으로 긴장감에 젖지 않을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여겼다. 리안은 자신의 동기를 따라서 카드키를 주머니 속에 잘 여며넣고는 니스의 이어지는 말에 귀를 기울인다.

“각 동마다 스물다섯 내지 서른 개체의 포켓몬들이 수용되어 있다고 하는데, 시설이 3개의 동으로 이루어진 만큼 구역도 넓으니 구출 활동에 누락이 없도록 신경을 써주시되 경비 인원을 특히 주의해주세요. 그들이 감금 장치를 풀 수 있는 열쇠를 지니고 있을 테니, 최우선으로 그들을 제압 후 활동을 개시해주시고요. 저는 그 동안 아스펜 요원의 위치를 확정해 구출에 나서도록 하겠습니다. 이상의 내용에 질문 있으신 분은 자유로이 발언해 주시면 됩니다.”

그는 분업이 확실히 이루어졌으니 별다른 질문이 없을 것이라 지레짐작했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껏 벽에 기댄 채 쭉 침묵을 지켰던 리더 레인저가 불쑥 질문을 던질 때 저토록 움찔하는 반응을 보였겠지.

“아스펜 요원이 저기에 붙잡혀 있는 줄은 어떻게 확신하지? 그쪽 설명을 들어보면 저 보관소라는 시설 외에 본거지나 다른 시설도 있다는 뉘앙스인데, 여기 말고 그 장소들 중 한 군데로 끌려갔을 가능성도 있지 않나?”

멍하니 리더를 응시했던 리안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희번득이며 니스 쪽으로 홱 돌아갔다. 그는 리더가 던진 질문의 내용과 레인저의 사나운 시선에 당황하는 기색을 숨기는 것 같았다.

“근거에 대해 따로 언급한 내용은 없었습니다만, 자신이 어디에 감금될 것인지에 대해서만 간략하게 명시한 바가 있었습니다.”

“뭐... 하긴 붙잡힌 마당에 뭔가를 세세하게 신경 쓸 요량은 없었겠구먼. 알았다, 고맙네.”

리안은 리더의 수긍을 들으며 눈썹을 도로 축 늘어뜨리다, '이해해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치레가 돌아오기 무섭게 떠오른 질문을 그대로 던졌다.

“그쪽에서 파견된 인원이 너무 적지 않아요? 그러니까... 말씀하신대로 구역이 3개 동이나 되는데 혼자서 요원 한 명을 찾아내려면... 힘드시지 않겠느냐는 뜻이에요. 이쪽은 잠입조, 대기조, 정찰조까지 꾸렸는데...”

다른 레인저들까지 그게 궁금했다는 듯이 시선을 한데 모으는 가운데, 리안은 요원들이 나란히 떠올려내는 씁쓸한 감정을 읽어내고 목소리를 늦출 수밖에 없었다.

"...인력이... 넉넉치 않은 실정이라고만 말씀드릴 수 있겠네요."

그 대답에는 아주 많은 의미가 담겨있었다. '이유는 따로 알려드릴 수 없다'든지, '우리도 힘든 상황이다'라든지, '이런 상황을 우리도 원치 않았다'든지. 어째서 레인저 측에 협조 요청이 쇄도했는지에 대한 이유를 대강 알 만했다. 일찍이 시오레도 국제경찰에 대해 설명해주었을 때 '소수정예'라는 말을 했었다. 누구도 의문을 제기할 생각을 못했고, 회의소 내부에 쎄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 때, 싸한 분위기에도 눈 깜빡 않고 있던 리더가 돌연 박수를 쳐 모두의 주의를 끌어낸다.

“적지 않은 목숨이 달려 있으니 신속히 움직이도록 하지. 자네들이 보안 시스템을 무력화하는 동안 우리는 따로 조를 짜서 임무에 들어갈 준비를 하겠다.”

그 곳에 있던 인원들이 저마다 고개를 주억이고 트레일러 바깥으로 나와서 각자의 자리로 분주히 움직이는 동안, 리더는 직속 레인저 두 명을 손짓으로 불러낸다.

“저쪽 기합이 빠릿빠릿하게 들어간 걸 보아하니 적어도 실수 같은 걸 해서 일을 그르치진 않을 것 같다만, 그래도 영 시원찮아서 말이지. 리안 넌 이제 진정이 좀 됐냐?”

조로아크를 대동하고 선 리안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레인저 기지를 빠져나오기 직전 터뜨렸던 울음도 가라앉은 지 오래였으니 특별히 무슨 일이 벌어지지 않는 한은 평온함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신입 레인저의 얼굴을 지그시 내려다보던 리더는 어깨를 한차례 으쓱인 후 손가락을 까닥였으며, 그러자 그의 뒤편에서 대기하고 있던 바랜드가 앞으로 당당히 걸어 나왔다.

“실내 미션에서는 이 녀석이 많은 도움을 제공할 게다. 시오레 네가 바랜드를 데려가도록 해라. 나는 그 대신 네 워글을 빌려 가마.”

“아, 네.”

시오레는 자신들을 향해 부담스러운 시선을 주는 바랜드를 어색하게 올려다보다가, 자신의 워글에게 손짓을 해 보이는 것으로 자리를 옮겨가도록 지시했다. 리더는 워글의 목덜미깃을 쓰다듬어준 후 그들을 돌아보았다.

“나는 너희들이 미션을 진행하는 동안 시설 근처에서 정찰을 돌고 있겠다. 대개 이런 시설 주변에는 경비 인력이 따로 잠복하고 있기 마련이거든. 무슨 일이 있으면 스타일러로 연락하도록 하지.”

이제 그 자리에는 시오레와 리안, 그리고 그들의 파트너 포켓몬들만이 남아서 국제경찰이 우선순위 작업을 끝내기를 대기하고 있었다. 시오레는 나무 기둥 너머로 동태를 확인하는 듯하더니 리안에게 조심스레 물어왔다.

“정말로 괜찮아진 거 맞지…?”

리안은 얼굴을 온통 찌푸린 채로 시설 구조물을 쏘아보고 있다, 시오레의 물음을 듣자마자 움찔하듯 표정을 무로 되돌렸다.

“확실히 나아졌어. 사고 안 칠 자신 있으니까 걱정 마.”

시오레는 그의 한층 고요해진 표정을 유심히 쳐다보다가 빙긋 웃는다.

“응, 그래야 내 파트너지.”

리안은 동기의 가벼운 격려를 들으며 어렵사리 미소를 지었다. 얼마 후, 국제경찰 측에서 보안 시스템을 모두 해제했다는 신호를 듣자마자 두 레인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섰다.

“듣기만 했을 땐 시간이 오래 걸릴 줄 알았는데, 꽤 빠르네.”

“뭐… 국제경찰의 저력이란 거겠지.”

시오레는 흥얼대듯 대꾸하곤 동기를 따라서 비탈길을 내려갔다. 미션 시작 시각, 오후 열한 시 삼십 분이었다.



국제경찰에서 내부 구조를 알려준 덕분에 길을 헤맬 염려는 없었다. 조명이 기분 나쁠 정도로 침침하다는 것만 제외하면 활동하기에 큰 문제도 없었고. 세 개의 동 중 B동을 담당한 그들은 가장 먼저 박스 구조물의 뒤편에 몸을 숨긴 다음 작전을 짜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 구역에 우리 외의 인간은 딱 한 명뿐인 것 같더라. 위치는 여기서 한 블록 정도 떨어진 곳…. 넓은 시설 치고는 경비가 꽤 허술한데.”

시오레는 가만히 리안의 해석을 듣고 있다가 시니컬한 미소를 지었다.

“그 보안 어쩌고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해. 거기에 돈을 꽤 쏟아부었을 테니 인적 자원을 돌리는 데 드는 비용을 최소화한답시고 한 구역 당 한 명씩 배치해 둔 거겠지. 아직 잠잠한 걸 보면 얘네, 자기들 방어막이 뚫린 것조차 모르는 모양인데?”

“…그런 걸까? 그럼 우리야 편하지.”

요즘 사병들은 기강이 해이하구나. 리안은 그런 식으로 결론 짓고 조로아크에게 지시를 내렸다.

“아인스, 일루전으로 적의 시야에 우리가 보이지 않도록 조작해줘. 마침 이쪽으로 가까이 접근하고 있는 중이야.”

조로아크는 동료들을 지키기 위해 주변 환경을 통째로 환영으로 뒤덮어 버린다고 하던가. 시오레는 주위의 배경이 미미하게 일렁이다가 제 모습을 유지하는 광경을 지켜보며 가만히 감탄했다. 리안은 곤봉을 거머쥔 이가 길목을 따라 걸어오고 있는 모양을 주시하며 시오레와 시선을 주고받는다. ‘제압은 내가 할 테니 네가 무기를 뺏어.’ 그들은 조직원이 엄폐물 앞을 완전히 지나칠 때까지 기다린 후 일사불란하게 달려들어 저마다 맡은 역할을 이행했다. 몸싸움이 일어날 때 흔히 들릴 법한 소란스러움마저 없이, 제압은 무척 간단하게 이루어졌다.

“… …얘 설마 기절했니?”

멀찍한 곳에 무기를 밀어두고 돌아온 시오레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조직원을 내려다보면서 의아한 소리를 냈다. 리안은 조직원의 품에서 찾아낸 카드키를 시오레에게 건네며 무심히 말했다.

“힘 조절 잘했으니 죽진 않았을 걸. 아마도….”

“…얘가 진짜 큰일 날 소리를 하네.”

시오레는 가볍게 눈을 흘기며 카드를 받아 챙긴 뒤 조직원을 제압했다는 내용의 짤막한 통신을 내보냈다. 그쪽으로 가겠다는 대기조 레인저의 답신이 금방 돌아왔으며, 그들은 조직원이 연행되어 가는 것까지 확인하고 나서야 미션의 다음 과정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감금 시설은 동 출입구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곳, 즉 건물의 가장 깊숙한 지점에 있었다. 여기까지 들어오는 동안 아무것도 마주치지 않아서 조금씩 긴장이 풀리고 있었는지, 시오레는 자신감 충만한 동작으로 리더기에 카드를 인식시켜 감금 시설의 출입문을 열었다. 열린 문 너머로 다양한 크기의 유리 케이지들이 줄지어 나열된 모습이 드러났다. 그 안에 갇힌 포켓몬들에게 시선을 빼앗겼던 리안은 날카롭게 찔리는 듯한 감각을 느끼고 다급하게 속삭였다.

“시오레, 물러서!”

기운없이 정체되어 있던 수십의 파동들이 급작스럽게 공포에 질려가는 한편, 평소에 야생에서 접하던 것보다 몇 배는 더 큰 적개심이 동시에 엄습했다. 그들은 감금 시설의 가장 어두운 곳에서 천천히 걸어 나온 폭음룡의 험상궂은 얼굴을 똑바로 마주하게 되었다. 거대한 소음포켓몬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닥이 육중하게 흔들렸으며, 신체 곳곳에 위치한 구멍으로부터 바람이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시오레는 적을 확인한 소음포켓몬이 입을 쩍 벌리는 것을 보고 작게 기겁하는 소리를 낸다. 저기서 터져 나올 폭발음이 시설 바깥까지 퍼져나가기라도 한다면, 그간의 잠입 행적이 말짱 도루묵이 되고 말 것이다.

바랜드가 저돌적으로 달려들어 폭음룡의 팔뚝에 이빨을 박아넣고 강력한 턱힘으로 움직임을 제지한다. 다른 방향에서 조로아크의 악의가 듬뿍 담긴 파동기술이 폭음룡에게 벽력처럼 덮쳐들었다. 울부짖음부터 어떻게든 틀어막아야 한다는 판단하에 각자의 파트너에게 주문한 기술들은 폭음룡을 완전히 풀 죽게 만들어버릴 수 있었다. 타이밍을 잡아낸 레인저들이 스타일러를 휘둘러 캡쳐를 시도하나, 폭음룡은 팔을 휘둘러서 제 옆구리에 붙은 바랜드를 떨쳐냈다. 그 직후 열기를 가득 머금은 이빨로 한꺼번에 두 인간을 태워삼킬 것처럼 공격을 가해오는 바람에 캡쳐라인이 팽팽히 늘어지다 결국 끊어져 버렸다. 레인저들은 급히 물러서서 태세를 정비했다.

“…이 폭음룡, 캡쳐가 들어갔어. 역시 누군가의 소유는 아니구나. 그나마 다행이야.”

리안은 왼손으로 스타일러를 고쳐쥐며 낮게 중얼거렸다. 방금 전의 캡쳐에 흘러들어온 포켓몬의 감정이 어쩐지 익숙하게 느껴졌다.

“다음의 한 번으로 끝낼 수 있을 거야. 스타일러에 남은 에너지는 충분하지?”

시오레는 자신들을 경계하는 폭음룡의 움직임을 주시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다음의 공격까지 감당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은 해볼 만 해.”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한번 더 스타일러를 휘둘렀고, 리안도 그 뒤를 따르며 라인을 조작했다. 난동을 부릴 기세로 발을 치켜들던 폭음룡은 다음으로 이어진 리안의 목소리에 주춤하는 기색을 보였다.

“우리는 네게 아픔을 주려고 온 게 아니야. 내가 네 고통을 이해해줄 수 있어.”

폭음룡은 저항하는 것처럼 으르릉거리는 소리를 냈지만 리안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하게 속삭였다.

“우리가 도와줄게.”

서서히 망설이는 빛을 내던 폭음룡은 결국 한 발자국 물러서는 행동으로 적개심을 한 겹 거두었다. 시오레는 십년감수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떤 사정이라도 있대?”

야생 포켓몬과의 소통은 파동사에게 맡겨두는 편이 훨씬 나았다. 리안은 폭음룡에게 자뭉열매를 건네며 침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강한 포켓몬을 구역마다 선별해서 강제로 길들인 다음 감금 시설을 지키도록 만든 모양이야. 조직원이 아닌 외부인을 만나면 공격하게끔 한 거지. 저기 갇혀있는 아이들의 안전을 담보로 잡혔으니 그렇게 필사적으로 굴었던 거고.”

리안의 입에서 짜증스러운 한숨이 저절로 새어 나왔다. 어느 시대를 가든 남의 마음을 가지고 노는 작자들이 꼭 있다는 사실이 환멸스럽기 그지없었다. 시오레는 동기의 반응에 조용히 공감하며 포켓몬들을 가둔 우리의 문들을 하나씩 열기 시작했다. 공간 안이 구조를 기다리는 포켓몬들의 불안한 울음소리로 웅성웅성 차오르기 시작했다. 시오레는 바랜드의 등 위에 올라타서 가장 위쪽 칸의 수댕이를 마지막으로 꺼내주던 도중 문득 미간을 찡그렸다.

“이상해. 스물다섯 내지 서른이라고 했는데 여기 있는 포켓몬들의 숫자는 그 최솟값에도 한참 못 미쳐.”

리안은 폭음룡의 팔뚝에 붕대를 감다말고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전부 몇인데?”

“…열 다섯.”

시오레는 자신이 빠트린 숫자가 있는지 몇 번이고 반복해서 포켓몬들의 머릿수를 헤아리다가 낭패어린 얼굴로 동기를 바라보았다. 리안은 다급히 폭염룡에게 말을 걸었다.

“다른 아이들 더 없어? 여기 있는 애들이 전부? 나머지는 어디 갔어?”

“… … ….”

삽시간에 다가온 침묵에 그들은 어깨 위가 싸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시오레는 폭음룡의 눈빛에 스며든 절망감을 응시하며 가만히 스타일러를 들어 올렸다.

“B동 미션 진행 상황 보고합니다. 감금되어 있던 포켓몬들 구출까지 끝냈는데, 기존에 고지해주신 것보다 수가 모자라요.”

-… …확인했습니다. 구출 미션을 끝내신 레인저 분들께서는 일단 A동으로 와주세요.

바로 되돌아온 무전은 일시중단을 요청하고 있었다. 두 명의 레인저들은 잠시 서로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집결지로 이동할 채비를 했다. 주변에서 머뭇거리며 얼쩡대던 포켓몬들이 자기들을 구해준 인간들의 뒤를 곧장 따르기 시작했다. 포켓몬들의 생존욕구가 이렇게나 강한데도, 전부를 구해낼 수 없었다. 리안은 자신의 동료가 조용히 터뜨리는 분노를 덩달아 곱씹었다.



A동의 지정된 장소로 모인 레인저들은 저마다 잔뜩 지친 기색을 띠고 있었다. 대화를 들어보니 각 조마다 난폭한 포켓몬을 만나서 대응에 애를 먹을 수밖에 없었으며, 설상가상으로 구출 대상 포켓몬들의 수가 부족한 것도 매한가지라고 했다. 시오레는 구석에 무리를 지어둔 포켓몬들을 착잡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소형부터 대형까지, 타입이나 종족에 상관없이 닥치는대로 포획해온 것 같았다. 저들 중에는 원주인과 강제로 헤어진 포켓몬들도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이 아이들만이라도 구해내서 다행이라고 스스로 되뇌면서도, 공백으로 남아버린 숫자가 마음 한 켠을 무겁게 내리누르고 있음을 느껴야 했다. 니스 요원이 저조한 분위기 속에 잠겨있는 레인저들을 조심스럽게 불러냈다. 다수의 시선이 제게 집중된 것을 확인한 그는 이윽고 입을 열었다.

“피곤하신 분들이 많아 보이니 본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전체 구역을 수색해보아도 아스펜 요원을 찾을 수가 없어서이 대목에서 리안은 무심코 헉, 하는 소리를 냈다가 황급히 제 입을 틀어막았다추가로 숨겨진 장소가 있는지 확인해본 결과, 지하에 별도의 공간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니스 요원의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지하층을 수색해보고 싶은데, 구출 미션을 끝낸 레인저들 중 여유가 남은 인원들의 도움을 받아 수색에 소모되는 시간을 단축시키고 싶다고. 안타까운 한숨 소리가 레인저 진영에서 속속 흘러나왔다.

“미안하지만 한카리아스를 상대하느라 스타일러 에너지를 거의 다 소모해서….”

“이쪽도 마찬가지. 난동부리는 펜드라의 뿔에 받혀 죽을 뻔했어.”

"그럼 우리가 갈게요."

한 쌍의 손이 불쑥 올라왔다. 시오레는 얼굴색이 차츰 어두워지는 리안을 대신해 말했다.

"레인저 리안의 또 다른 특기가 탐색이거든요. 저는 힘이 남아돌고, 레인저 리안도 마찬가지라 아직 움직일 수 있어요."

"저 친구라면 확실히 도움이 되겠지. 인기척 따위를 귀신처럼 잡아내더군."

시오레는 자신의 뜻을 거들어 준 동료에게 방긋 웃어주고는 니스 요원을 바라보았다. 그는 표정관리에 실패해 구세주를 마주한 듯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동료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갸륵하게 여긴 시오레는 다음 스테이지를 서두르기로 했다. 나머지 레인저들은 미션을 마치고 외부에서 대기하겠다며 건물을 벗어날 채비를 했다.

“우리는 그 동안 이 포켓몬들을 안전한 곳까지 바래다주고 있을게.”

"네, 그리고 레인저 미란다께는 대신 전달 부탁드릴게요. 정찰을 돌고 계실테니 당장 무전을 치기가 좀 그래서."

"...그러지."

미묘하게 앞선 침묵에 쿡쿡 웃던 시오레는 옆을 돌아보았다. 리안은 감정이 아예 사라진 낯으로 심호흡에 집중하고 있었다. 애써 감춰둔 절박한 심정이 떠오르는 모양이었다.

"지하층으로 통하는 입구는 아세요?"

"저, 그게... 말 그대로 숨겨진 지하층이라 입구부터 찾아야 해요."

"그냥 바닥을 뚫어버리자. 응? 나 할 수 있어."

"...진정해, 리안. 바로 밑에 암반층이 있을 지 어떻게 알아."

시작부터 난관이었다. 시오레는 트레이너 스쿨 시절 참여했던 팀프로젝트를 떠올렸다. '그 때보다 더한 걸작이 나올 줄은 몰랐는데.' 시오레는 이성을 잃기 직전인 레인저 동료와 평정심을 절반 잃어버린 국제경찰을 외면하고 싶었다. 바랜드의 후각이라면 무언가 기대할 만은 한데, 길찾기에도 효과가 있을 지 모르겠다. 시간이 금보다 귀한 상황인데 진척이 없다보니 조급함과 짜증만 곱절로 늘어나고 있었다. 시오레는 바닥에 틈새같은 건 없는지 살펴보려 애쓰면서 궁시렁거렸다.

"이럴 때 숨겨진 조력자가 짠, 하고 등장하면... 역시 그건 픽션이겠지."

벽을 똑똑 두드려 빈 공간을 확인하던 리안이 고개를 슥 돌렸다. 시오레는 자신의 동료가 어딜 보고 있는지 신경을 기울이지 않은 채 바닥에 계속 집중했다.

"미스터리 영화에서 클리셰처럼 나오잖아. 숨겨진 장소를 찾아 헤매던 주인공 일행 앞에 정체불명의 조력자가 나타나서 길안내를 한다..."

"시오레?"

"주인공 일행은 자신들이 어디로 가는 지 알지 못한 채 조력자의 뒤를 따른다... 어쩌고저쩌고."

"레인저 시오레?"

"왜?"

시오레는 고개를 확 치켜들었다가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거대한 형체의 무언가가 일행 앞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니스와 리안은 이미 각자 파트너를 대동하고 그와 대치 중이었다. 시오레는 바랜드가 옷깃을 물어 일으켜주고 나서야 제대로 설 수 있었다. 크고 붉은 외눈이 이쪽으로 스르르 움직였다.

"...야느와르몽이... 왜? 여기서?"

어둠대신이 니스의 앞을 가로막은 채 캭 소리를 지르며 경계심을 가감없이 드러냈다. 조그마한 몸체가 바들바들 떠는 모습은 하찮기 그지없었지만, 용기 있는 모습만큼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해주고 싶었다. 이런 상황이 아닐 때라면 말이다. 그러나 야느와르몽은 작은 인형포켓몬이 제게 어떤 위협을 표시하건 일절 신경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니스 요원이 표정을 굳혔다.

"아스펜 요원을 습격했던 자가 고스트타입 익스퍼트라고 했습니다. 어쩌면 이 야느와르몽은... ..."

"이런 덩치 큰 야느와르몽은 처음 봐요... 진짜 만만찮겠는걸."

엉덩방아 찧은 부위에서 통증이 아련하게 올라왔지만 시오레는 차마 이를 덜지도 못했다. 족히 3m 정도는 되어보이는 덩치 자체가 엄청난 위압감을 주고 있는데다가, 저 섬뜩한 시선이 자신에게로 쏠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에 어떻게 저런 포켓몬이 존재할 수가 있나. 시오레는 소리없는 탄식을 뱉으며 제 목소리가 떨려나오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왜, 나를 쳐다보는..."

"넘어진 데 괜찮냐고 묻네."

이번에는 모두의 시선이 저쪽으로 쏠렸다. 리안은 자기 몫의 경계까지 조로아크에게 넘기고서 야느와르몽에게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시오레는 입을 벙긋거렸다. 무지막지한 위압감을 자랑하는 주제에 답지않게 걱정을 해주는 움켜쥐기포켓몬에게 어떤 답을 줘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 괜찮아. ... ... ...고마워요?"

지나치게 당황한 나머지 물음표 붙은 평서문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시오레의 심정을 대변하듯 바랜드가 곁에서 얼빠진 콧소리를 냈다. 야느와르몽은 이에 만족한 듯이 등을 돌렸다.

"그럼 자길 따라오래. 우리가 가야 할 곳.... 그러니까 지하층이 어디에 있는지 안내해 주겠다는데."

이번에는 니스 요원이 입을 헤벌렸다. "왜죠...? 적이 아닌 겁니까?"

리안은 이에 고개를 저었다. 아예 야느와르몽의 입이 되어 줄 심산인 듯 했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대. 그러니까... 자세한 얘기는 못 해주지만 적의 적은 동지다... 라는 것 같은데."

"적의 적?"

시오레는 뒤늦게나마 엉덩이를 문지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리고는 여전히 의심을 놓지 못하는 니스와 어둠대신에게 슬쩍 귀띔한다.

"정말 적이었다면 리안이 제일 먼저 반응했을 거예요. 기회가 왔으니 얼른 따라가 보죠. 이 중에서 당신이 제일 절박하잖아요, 어서요."

니스는 제 품속에서 진동하기 시작한 어둠대신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평정심을 되찾은 듯한 모습에 시오레는 미소를 짓고 말았다. 야느와르몽이 복도를 꽉 채우며 움직이는 바람에 서두르고 싶어도 서두를 수 없었지만, 이런 행운에는 일단 감사해야 마땅했다. 정체불명의 조력자가 실존하다니, 픽션에 가까운 현실이 된 모양이다. 그나저나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야느와르몽인지 통 모르겠다며, 시오레는 골똘히 생각에 잠겨들기 시작했다.


"묘하게 열받아."

시오레가 출입구를 노려보며 중얼거리자 리안이 말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야느와르몽이 안내한 지하층 입구는 가까운 곳에 있었고, 평소라면 접근하기 어려운 위치에 있었다. 그러니까 감금 시설의 가장 안쪽, 규모가 제일 큰 우리의 벽면에 입구가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폭음룡이 튀어나왔을 장소에 야느와르몽이 그대로 밀고 들어가서 벽 속으로 사라진 다음의 시오레가 뱉은 반응이 위와 같았다.

"어쩔 수 없지. 다들 내 뒤로 물러나 봐."

리안은 참을성을 모두 소진한 사람의 태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벽면으로 성큼성큼 걸어들어갔다. 시오레는 니스에게 귀를 막으라는 의미의 제스쳐를 보냈다. 국제경찰 요원이 어리둥절한 낯으로 귀를 막는 것을 확인한 리안은 숨을 한차례 들이켰다. 그가 주먹을 내지른 지점에 큼직한 구멍이 뚫리는 광경을 지켜본 요원은 경악에 찬 시선으로 레인저를 바라보았다. 또 다른 레인저가 귀에서 손을 내리며 이해한다는 웃음을 지었다.

"과연 보통 인간이 저런 짓을 하겠어요."

"굉장하시군요. 손은 괜찮으세요?"

"천만에. 손도 멀쩡해."

발로 벽을 몇 번 걷어차서 입구를 충분히 넓히니, 아래층으로 통하는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계단참의 높이와 가파르기를 보아하니 지하층은 꽤 깊은 곳에 지어진 듯 했다. 간격을 확보하려면 포켓몬들은 어쩔 수 없이 볼 속에 들여넣어야 했다. 셋은 짤막한 대화를 마지막으로 침묵을 유지하며 아래로 향했다. 천장에 붙은 형광등이 거의 꺼질 듯한 빛으로나마 간신히 공간을 밝혀주고 있었다. 리안은 아래로 내려갈수록 공기가 점점 탁해지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지하 특유의 축축함이라면 모를까, 이렇게 농도가 짙은 공기는 썩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앞서 내려간 야느와르몽은 온데간데 없었다. 얼마나 내려가야 끝에 다다를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 무렵, 일행은 계단의 가장 마지막 층계에서 철문을 마주하고 멈춰섰다.

"잠금장치 같은 건 안 보이는데. 한 번 열어볼까? 안쪽에서 인기척은 딱히 안 느껴지긴 하는데."

"설마... 이렇게까지 꽁꽁 숨겨놓은 장소에 그렇게 보안을 허술하게 해 놓았을까."

두 레인저가 소곤대며 문손잡이를 만져보는 사이, 여태 침묵을 지켜 왔던 요원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이렇게 협력해 주시니 그저 감사해야 할 따름입니다만... 두 분께선 따로 특별한 동기를 가지고 계시는지요."

'갑자기?'라는 의문을 담은 한 쌍의 시선이 니스에게로 쏠리자, 그는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며 덧붙였다.

"직업의 사명감만 가지고는 장애물을 쉽게 뚫을 수 없게 마련이더군요. 그런데도 두 분께서는 거침없이 길을 달려와 주셨고요. 그래서 어떤 동기를 가지고 계실 지... 쭉 궁금했습니다."

리안과 시오레는 잠시간 서로를 바라보고는 제각기 쓴 미소를 떠올렸다.

"아스펜 요원은 당신한테도 소중한 사람이겠지. 나한테도 마찬가지라서... 당연하다면 당연하달까. 세세한 얘기하려면 시간이 걸려서 무리지만, 아무튼 그래."

"저는 굳이 밝히자면... 동료애? 당신과도 한 배를 탄 이상 저 혼자 물러날 수는 없으니까요. 제법 오글거리지만, 음, 대충 그래요."

니스의 질문은 조금 뜬금없는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한껏 내려앉은 분위기를 달래는 데 충분한 효과를 내었다. 리안은 요원으로부터 퍽 진하게 전달되어 오는 감동을 느끼며 문손잡이를 돌렸다. 철문은 둔탁한 소음을 내며 스르륵 열렸다.

"어? 열려 있어. 그런데... 이거 무슨 냄새야?"

리안의 말대로, 문 틈새로 희미하게 자극적인 냄새가 풍겨나오고 있었다. 시오레는 약간의 불쾌함을 느끼면서도 고개를 갸우뚱했다.

"글쎄, 나도 잘..."

"잠깐만요. 이건... 포르말린 아닙니까?"

누군가가 문을 확 열어젖히는 바람에 내부에 갇혀있던 공기가 일행을 덮쳤다. 세 사람은 입구에 서서 일제히 얼어붙고 말았다. 인간이 인간성을 저버리고 욕망을 철저히 따라 만들어낸 결정체들이 그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지하층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실험실이었다. 벽을 따라 설치된 선반 위에는 한때 고상한 신비로움을 품었을 생명체들이 딱딱하게 숨을 잃고 박제된 채로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었으며, 캐비닛들마다 들어찬 유리병들의 내부에는 어떤 포켓몬의 신체부위였을 조각들이 형태를 고스란히 유지한 채 방부액에 갇혀 있었다. 그 종류 수는 이루 셀 수조차 없었다. 아까 전 리안이 폭음룡에게 재차 물었던 내용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나머지는 어디 갔어?’ 시오레는 처음에 분재로 착각했던 것이 사실은 꼬지지의 박제였음을 뒤늦게 알아차리고 피가 차갑게 식는 느낌을 받아야 했다. 책상들 위에는 실험 파일들이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지만 그들은 무엇 하나 들춰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이 실험실 자체가 그야말로 판도라의 상자였던 셈이다.

“…인간의 바닥이 어디까지 떨어질 수 있을지… 여긴 그걸 알아보기 위한 하나의 실험장 같군요.”

니스 요원이 탁한 음성으로 중얼거리며 주변을 주의 깊게 둘러보았다. 아마도 숨겨진 장소가 더 있나 살펴보고 있는 것이겠지. 시오레는 그를 따라서 주변을 돌아보려다 멈칫했다.

"잠깐, 리안? 리안이 이상해요!"

리안은 머리를 싸맨 자세로 어깨숨을 쉬고 있었다. 사람의 피부가 이렇게까지 하얗게 질릴 수 있었나, 시오레는 식은땀까지 흘려가며 괴로워하는 그에게 어떤 조치를 해 주어야 할 지 몰라 쩔쩔매기 시작했다. 재빨리 다가온 니스 요원이 리안의 상태를 살폈다.

"공황이 온 것 같습니다. 레인저 리안, 거동은 가능한가요?"

리안은 눈을 잠시 꽉 감고 심호흡을 하려 노력했다. 깨물린 입술에 잇자국이 선명하게 번져갔다.

"괘, 괜찮아. 괜찮아야... 아냐, 괜찮아."

그는 끊임없이 괜찮다는 뜻을 비쳤지만 신빙성이 전무했다. 사실은 리안 또한 자신의 상태를 잘 알고 있었다. 만물의 파동을 느낄 줄 안다는 것은 대상의 생사를 가리지 않고 그 에너지 파장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는 의미이기도 하였으며, 연거푸 헛구역질이 나오는 까닭은 박제된 생명과 인식한 죽음 사이의 거대한 괴리감 때문이었다. '죽음을 경험하지 않았더라면, 조금은 나을 수 있었을까. 확실히 그 전까지는 이런 적이 잘 없었는데.' 리안은 실소를 흘리는 한편으로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를 바로세웠다. 땅으로 꺼질 듯한 현기증이 일었지만 어떻게든 견뎌야 했다. 이곳 어딘가에 있을 그 사람을 생각하면 한 걸음이라도 더 움직여야 했다. 주인의 이러한 투지에 반응한 조로아크가 볼 밖으로 스스로 튀어나왔다.

"아인스... 여긴 네가 나올 곳이 아닌데..."

-걱정 말아. 내게 네 죽음보다 더 두려운 건 없으니까.

조로아크는 눈만을 굴려 상황을 파악하고는 주인을 부축해 주었다. 그의 동료들이 염려스러운 시선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둘째치고, 리안의 동요를 어떻게든 완화시켜줄 필요성을 느낀 조로아크는 자신만의 특기로써 문제를 간단히 해결했다. 즉, 실험실의 지옥도와 같은 풍경을 일루전으로 지워버렸다. 퀴퀴한 약품 냄새까지는 어쩌지 못했지만, 적어도 시각에서 오는 공포나 역함 따위는 차단시켜 줄 수 있었다. 이런 방법을 진작 생각해내지 못했다며 가벼운 자책을 남긴 시오레가 얼른 리안의 상태를 살피러 다가왔다.

"괜찮아?"

리안은 조로아크의 어깨에 기대어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생명이 붙어있는 파동이 선명하게 느껴지는 것 같아서 한결 나았다.

"...응. 걱정 끼쳐서 미안해."

"이런 광경을 처음 접하면 누구나 제정신을 유지하기가 힘들죠... 이해해요."

니스 요원이 나직하게 위로하며 조로아크를 힐긋 바라보았다. 요괴여우 포켓몬은 그 시선을 외면하고 지하층의 반대편을 향해 고갯짓을 했다. 일전에 모습을 감춘 야느와르몽이 그 끝에서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감정없는 외눈이 여전히 음산했으나, 야느와르몽은 인간들과 한 마리 포켓몬이 다가올 때까지 제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리안이 약간 쉰 목소리로 속삭였다.

"벽 너머에 숨겨진 공간이 하나 더 있대. 웬만한 힘으로는 파괴할 수 없을 텐데... 자기가 열어주겠다고... 하네."

말미에 들인 뜸이 의미심장해, 시오레와 니스의 시선이 잠깐 마주쳤다. 입을 연 사람은 용건이 시급한 쪽이었다.

"물론, 요구하는 바가 있겠지요. 그렇지만 먼저 열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생명이 달린 일이에요."

야느와르몽의 눈이 한동안 니스에게 머물렀다. 무언가를 거스르기라도 했을지 몰라서 그는 리안을 돌아보았지만 묵묵부답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야느와르몽은 이전처럼 일행을 남겨두고 벽을 통과해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뒤이어 흐르는 정적.

"제가... 뭔가 말실수를 했을까요?"

니스가 기다림에 지쳐 갈라지는 어조로 중얼거렸다.

"...리안?"

시오레는 리안의 파리한 안색을 조심스레 살폈다. "야느와르몽이 뭐라고 했어?"

"... ...걱정 마. 열어줄 거야."

침묵이 길었다. 시오레와 니스의 시선이 다시 마주쳤다. 이번에는 불안감을 그득 실은 눈빛이 오갔다.

이윽고 벽이 흔들렸다. 일루전으로 덮여 매끈하기만 한 위치에 제일 먼저 뛰어든 사람은 리안이었다.


"에나코코아라도 마실테냐?"

리안의 코 앞으로 따뜻한 단물이 그득 담긴 컵이 불쑥 들어왔다. 그는 조건반사적으로 컵을 부여잡은 후, 이제껏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간신히 그친 눈물이 다시 쏟아져나오려 했다. 리더 레인저는 그 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그러다 아침에 눈 못 뜰라. 시오레도 상태가 여간 좋아보이지 않았는데, 둘다 제대로 된 휴식기를 가져야 할 것 같군."

'휴가를 얼마나 줘야 하려나.' 리더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소파 옆자리에 풀썩 앉았다. 리안은 컵을 쥔 자세 그대로 소파시트에 가라앉았다. 리더 레인저가 특별히 타온 음료에 입을 댈 생각조차 못하는 모습이었다. 리더는 공허한 얼굴로 휴게실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구급대원에게서 신체적인 부분은 문제가 없다는 얘기를 전해들었다. 구름시티의 전문병원으로 실려갔으니 좋은 소식을 기다려보자고."

"리더는 영혼의 존재를 믿으세요?"

예고없이 튀어나온 질문에 화자가 도리어 놀라고 말았다. 리더는 조금 황망한 시선으로 리안의 정수리를 바라보지만 대답만큼은 착실히 돌려주었다.

"...그게 없다면 세상의 이치가 설명이 되지 않는다, 라는 주의이긴 하다만. 뭔가 걸리는 게냐?"

초점 잃은 연청색 눈이 컵테두리 안쪽에서 출렁이는 액체를 내려다보았다. 몇 번인가 달싹이던 입술이 겨우 형체 가진 단어를 구사해냈다.

"그 안에서 마주친 야느와르몽이 말했어요. 그 사람, 죽은 건 아닌데 살아있는 것도 아니라고. 영혼이 의식 밑바닥에 깔려버려서 다시 일깨우기 힘들 거라고... ..."

"그거 저쪽... 그러니까 국제경찰 녀석들에게는 말해줬냐?"

사이의 침묵이 길게 이어진 것 같았다. 리안은 안도감과 슬픔에 범벅이 되다시피 하던 니스 요원의 감정을 되새기며 고개를 저었다.

"차마 그러진 못했어요."

"그러냐."

침묵. 리안은 천천히 식어가는 에나코코아를 억지로 한모금 삼켰다. 자판기에서 내린 기성의 맛이 목구멍 언저리에서 덜컥 걸리는 듯 했다. 그 때도 이런 맛이었는데. 리안은 액체를 위장 속으로 밀어내리며 눈을 내리깔았다.

"아스펜이라고 했던가? 걘 너한테 어떤 사람이었냐."

리더의 성격을 감안하면 이런 개인적인 질문을 던지는 경우는 꽤 흔치 않았지만, 리안은 이에 신경을 쓰지 못한 상태로 웅얼웅얼 말했다.

"절 위기에서 건져내 준 은인이에요. 그 사람의 도움이 없었다면 지금의 저는 어떻게 되었을 지 상상조차 못할 정도로... 아주 커다란 은혜를 졌어요."

컵 손잡이를 거머쥔 손가락에 문득 힘이 들어갔다. 이 상태로 영영 대화조차 하지 못하게 된다면, 리안은 이 다음의 가정을 차마 떠올리지 못하고 하염없이 공포에 떨었다. 어째서 자신이 이만한 감정을 가지게 되었는지조차 고민할 여념이 없었다. 사람은 언젠가 죽는다. 자신은 망자들을 수없이 봐 왔으며 심지어는 제 손으로 목숨을 취하기까지 한 적도 숱했다. 그런데 왜 지금 와서는 이미 죽어 사라진 목숨, 곧 꺼질 목숨 따위에 벌벌 떨게 되었는가. 생명을 구하여 과오를 덮겠다는 위선에 대한 형벌인가? 리안은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괴물이라는 이명을 가졌으면서도 인간의 마음을 품겠다고? 참으로 웃기는 생각이구나, 세를리안.' 그동안 거의 망각하고 있었던 속삭임이 머릿속을 헤집기 시작했다.

"리안, 그 컵 내놓고 얼른 들어가서 자라. 너 미션을 두 탕하고도 반이나 뛰었잖느냐."

리안은 헉 소리를 내며 눈을 깜박였다. 어쩐지 숨이 가빴다. 손에 들려있던 컵이 어느 새 사라져 있었다. 그는 멍하니 고개를 들고 리더 레인저를 쳐다보았다. 그 무심하기 짝이 없는 잿빛 눈동자가 이번에는 근심을 담고 있었다.

"지금 너한테 필요한 건 휴식이다. 내일부터 일주일 간 휴가를 줄테니 원하는 만큼 쉬어라. 필요하면 연차도 몇개 더 얹어주지. 일단 당장은 깊게 생각하지 말고 자거라. 알았지?"

리안은 자기가 대답을 했는지 분간하지 못한 채로 비틀비틀 일어났다. 잠을 잘 수는 있을지, 잠에 빠지더라도 어떤 꿈을 꾸게 될 지 두려워진 나머지 이성이 달아나버린 듯 했다. 리더 레인저가 제 뒤에 대고 무어라 첨언한 것 같았는데, 리안은 자신이 무엇을 들었는지 곱씹어보는 것도 잊고 휴게실을 나섰다.

기숙사동으로 향하는 복도는 어두컴컴했다. 리안은 그 어둠을 지켜보다 끝내 스스로 의식을 닫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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