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뭄의 끝

시련을 견뎌낸 꽃망울이 열매를 맺어

재회

*Warning: 심해, 가스라이팅, 포켓몬(동물) 사망, PTSD, 폭발로 인한 부상(화상) 묘사

BGM

BGM 2



"날이 참 좋아, 그렇지?"

"그렇네."

시안은 짤막한 반응에 그저 푸스스 웃기만 했다. 곁에 앉은 사람만 겸연쩍게 볼을 긁적였다.

"...무척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 시안."

"응? 천만에, 우리 한달 전에 만났잖아. 그 정도면 딱히 오랜만은 아닌걸."

"한달 전... 그랬어?"

"그렇지, 넌 금방 잊어버리곤 하니까."

리안은 자신과 쌍둥이가 나란히 걸터앉은 담벼락을 내려다보았다. 어쩐지 낯익은 문양이 새겨진, 아주 낡아빠진 기왓장이 불규칙적으로 배열된 담이었다. 언젠가 이 담을 뛰어넘어가서 모든 걸 버리고 모든 걸 시작했던 것 같다. 그땐 이렇게까지 낡진 않았을텐데.

"....그렇네."

맥이 빠져 중얼거리자, 시안은 이번에는 그저 가만히 응시하기만 했다.

"... ...왜?"

그 빤한 시선에 부담감을 느낀 리안이 묻자, 톡 튀는 대답이 들렸다.

"우리 얘기좀 할까? 시간이 별로 없는 것 같아서 말야."

무슨 시간? 쌍둥이가 자신의 승낙을 듣기도 전에 먼저 담을 내려가버려서 리안은 물음을 입 밖에 내지 못했다. 시안이 오늘 따라 이상했다. 리안은 할 수 없이 아래로 훌쩍 떨어져 내렸다. 발에 닿은 것은 딱딱한 흙바닥이 아닌, 잡초가 무성한 풀밭이었다. 이제 형제는 오솔길을 따라서 폐허가 된 정원을 거닐고 있었다.

"리안, '죽음'의 무게를 실감하게 된 건 어때?"

리안은 대답을 보류한 채 질문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다. 죽음의 무게라. 최근에 그것 때문에 심리적으로 고생을 했던 것 같다. 다시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겠지만 본능이 이를 거부하고 있었다. 리안은 풀냄새를 맡아 보며 느릿느릿 말했다.

"벌을 받고 있는 거라 생각했어. 전장에서 서슴없이 손에 피를 묻혀왔던 내가 직접 죽음을 겪어보고 나서야... 그게 뭔지 제대로 깨닫게 되었던 걸까 싶어서."

자신이 시안에게 '죽음의 경험'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었던가 되짚어보는 순간, 약간 앞서가던 시안이 우뚝 멈춰섰다.

"...그 손에 묻은 피를 씻어내려고 지금의 일을 시작한 거야?"

말라죽은 풀이 버석버석 밟히기 시작했다. 리안은 이에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아예 입이 통째로 사라진 것처럼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시안은 그를 돌아보지 않은 채 머리 위의 나뭇가지를 뚝 꺾어내렸다. 리안은 그 행동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채 목소리가 갑작스레 튀어나오고 만다.

"그럴지도."

"피는 씻어내지 못해, 리안. 내가 너만큼 잘 알아."

그의 손가락이 감긴 나뭇가지에 파릇파릇한 기운이 도는가 싶다가 이내 도로 썩어버리고 말았다. 시안은 그제서야 고개를 돌리고 미소를 지어보였다. 지독히도 슬픈 미소라서, 리안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꾹 깨물었다.

"차라리, 네 과업을 묵묵히 해내고 있다고 생각해봐. 그게 훨씬 말이 될 거야. 마음도 조금이나마 놓일 거라고."

"시안, 날 원망해?"

'널 버리고 떠나버린 나를 원망해?' 그에게 쭉 묻고 싶었던 것을 드디어 터뜨려버리고 말았다. 두렵기 그지없었지만, 미련의 무게를 더이상 견딜 수 없어서, 때문에 반드시 확인해야만 했다. 시안의 미소가 조금 흐려진 것 같았다. 썩은 나뭇가지가 손끝 사이에서 갸냘프게 떨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게 너한테 한이 되었나보다. 내가 아무리 울고 화내면서 달래도 또 그렇게 묻는 걸 보면. 아니, 별 수 없나..."

시안은 한숨을 폭 내쉬고 혼자서 중얼거리고는, 제가 쥐고 있던 나뭇가지를 리안의 손에 냅다 쥐여주었다. 영문을 모르고 나뭇가지를 넘겨받은 리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가 '왜?'라고 묻기도 직전에 시안의 목소리가 매끄러이 이어진다.

"솔직히 말하자면, 미웠어. 엄청나게. 너 때문에 나 혼자서 싸우는 처지가 되었으니까. 그때 무척이나 외로웠거든."

"... ..."

예상했던 그대로의 답이었다. 리안은 다시금 목소리를 잃었다. 어서 잘못을 빌어야 하는데, 이러면 곤란한데. 그저 눈만 데록데록 굴리다가 고개를 밑으로 툭 떨궜다. 메마른 흙 위로 검은 자국이 두어 개는 생겨난 듯 했다. 약간 신경질적인 목소리와 함께 턱이 위쪽으로 들어올려지자 뺨을 흐르던 물방울이 흩어졌다.

"또 운다, 또! 안되겠어. 이번엔 똑똑히 기억해 뒀다가 나중에 어디 적어두기라도 해. 리안, 나는 네 덕분에 내 의지로 살아남을 수 있었어. 내 인생은 결코 떳떳하다고 말할 수 없지만, 누군가가 피눈물을 흘리게 만들지 않을 수는 있었어. 너무 길면 이것만 기억해. 네가 미웠지만 원망 안해."

리안은 멍한 표정으로 입을 벙긋거렸다.

"......둘이 같은 의미 아냐?"

"아냐, 어감이 다르잖아."

시안은 그리 우기며 소매로 눈물을 벅벅 닦아낸 다음 리안을 놓아주었다.

"나는 네가 살아돌아오기를 바랐어. 결국 돌아오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네가 이렇게 살아있으니 됐어. 만족해."

그는 그렇게 말하며 넌지시 윙크했다. 리안은 나뭇가지가 제 손아귀에서 되살아나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당황했다.

"시안, 이거..."

"시간이 별로 없으니 빨리 움직이자."

시치미를 떼려는 건지, 아니면 정말로 촉박해서인지, 시안은 쌍둥이 언니의 말을 들은 체하지 않고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리안은 하릴없이 그의 뒤를 따르면서 나뭇가지를 골똘히 살펴보았다. 이제는 새순까지 달려 생기를 되찾은 모습이 신묘하기만 했다. 그러는 사이 정원의 풍경은 저택 내 복도로 바뀌어 있었다. 리안은 관리를 받지 못해 벽지가 찢어지고 창문이 금간 것을 둘러보며 물었다.

"우리 어디로 가는 거야?"

"네가 가야 할 곳으로. 그전에, 리안."

"응?"

"좋아하는 사람 있지?"

나뭇가지를 거의 부러뜨릴 뻔했다. 리안은 누오의 흉내를 낼 것처럼 입을 벌렸다가 황급히 닫았다.

"... ... ... ..."

하지만 금방 부정하지 못하고 다시금 벌리고 만다. 시안은 그 반응이 퍽 재밌다는 듯이 킬킬 웃었다. 리안은 기어가는 목소리로 웅얼거리며 나뭇가지를 괜히 만지작거렸다.

"웃지 마... 대화도 못하게 됐는데 내가 좋아한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어."

"정말로 소용이 없다고 생각해?"

이제 그들은 일층과 이어진 중앙계단 위에 서 있었다. 시안은 계단을 내려가지 않고 꼭대기에 멈춰서서 리안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리안은 그 시선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다. 청자빛 눈동자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리안, 너는 왜 그 사람을 소중히 생각하게 되었어? 평생 나만을 생각할 것처럼 굴었던 너잖아."

약간 짖궂은 감이 섞인 질문이다. 리안은 가지 끝에서 맺히는 꽃봉오리를 내려다보며 그와 비슷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살아갈 수 있는 세계를 열어줘서."

"흠, 납득이 가긴 하지만 조금 두루뭉술하다. 나중에 씩씩하게 발표할 수 있게끔 더 상세한 부분을 생각하고 있어봐."

"응..."

쌍둥이는 나란히 서서 계단을 걸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살아남은 사람만이 변화를 이룩할 수 있으니까, 너는 당당히 하고 싶은 일을 해. 행복을 위해서든, 미래를 위해서든, 소중한 무언가를 거머쥐기 위해서 인간은 살아가잖아."

"응."

"너는 생에 충실할 줄 아는 사람이야, 리안."

일층에 다다라 앞으로 성큼 나아간 시안은 대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그는 자신의 형제를 보고는 작별인사를 건넸다.

"나는 여기까지 배웅해 줄게. 이제는 네가 해야 할 일을 하러 가 봐."

활짝 피어난 매화의 향기가 코끝을 은은하게 간지럽혔다. 리안은 생기를 완연히 뿜어내는 가지를 들고 그대로 문을 나서려다,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우리 또 만날 수 있을까, 시안?"

이제 그는 쌍둥이와의 만남이 꿈이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시안의 얼굴은 역광을 받아 표정을 읽어낼 순 없었지만, 그의 고개가 위아래로 천천히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그럼, 너한테서 들을 이야기가 한참 많아. 그래도 다음번엔 제발 그 원망 어쩌고 하는 질문 가져오지 마."



“또 만나네.”

오른팔에는 꽃바구니를 걸고, 오른손에는 포장지에 감싸인 꽃을 들고, 왼쪽 어깨 위에는 화살꼬빈을 얹은 이가 니스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니스는 신문지를 황급히 접으며─거의 구기다시피 하며─방문객을 맞이했다.

"레인저 리안, 어떻게 여기까지... 아니, 이마에 그건 뭐죠? 어디 다치셨어요?"

"간단하게 리안이라고 불러줘. 이건 어젯밤에 넘어져서... 혹만 났어, 별거 아냐."

리안은 일방적으로 붕붕 휘둘리는 악수를 나눈 뒤 오른쪽 이마에 붙인 반창고를 어루만졌다. 간밤에 복도 중간에서 기절하는 바람에 바닥에 호되게 부딪혔던 모양인지, 아침에 눈을 떠보니 이런 꼴이 되어 있더랬다. 리안은 기지내 식구들에게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걱정과 호들갑을 듣고 다니느라 오전의 대부분을 허투루 날리고 말았다. 니스의 표정을 보아하니 비슷한 소리를 듣게 될 듯 했다.

"그나마 크게 다치지 않으셔서 다행인 걸까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예후 잘 살펴보시고요. 음... 아, 참! 지난밤에는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했어요. 워낙 정신이 없어서 따로 감사를 전해야 한다는 걸 깜박했네요."

어쩐지 미션 때와는 사람의 분위기가 미묘하게 다르다 싶었다. 니스는 거듭 감사를 표하며 또다시 커다란 악수를 했고, 그 탓에 주인의 어깨자리에서 두번씩이나 쫓겨난 포켓몬의 심기를 거스르고 말았다. 니스는 조로아크의 언어로 이루어진 호된 꾸지람을 들으며 쩔쩔맸다.

"제 정신좀 봐... 리안 씨는, 역시 선배님 병문안을 오신 거겠죠?"

"응. 그 사람은 좀 어때."

리안은 파트너를 익숙하게 진정시키며 지나가듯이 물었다. 니스는 질문을 듣자마자 눈썹을 축 늘어뜨렸다.

"통 깨어나질 못하고 계세요. 기관지만 부은 걸 빼면 눈에 띄는 이상은 없는데 의식을 되찾을 기미가 도무지 보이지를 않는다고... 거의 가사상태라네요..."

니스는 리안의 표정을 보고 말끝을 흐렸다. 연청색 눈이 공허한 빛을 띠고 그를 응시했다.

"괜찮다면, 병실로 안내해줄래? 아스펜... 의 상태를 내 눈으로 꼭 보고 싶거든."

평온하기 그지없는 얼굴이었으나 그 이면으로는 거절을 명확하게 거부하고 있었다. 니스는 무어라 말하려다 그만두고 천천히 일어나 섰다.

"선배님은 일인 병실에 계세요. 복도를 돌아가야 해서 거리가 좀 됩니다."

리안은 휴게실을 앞서나가는 니스의 뒤를 따라붙으며 꽃바구니를 다른 손으로 고쳐쥐었다. 원래는 원무과에 문의해서 혼자 찾아가려고 했는데 외부인은 면회 금지라는 단호한 퇴짜를 맞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물러나온 참이었다. 첫 관문부터 막혀버려 낙담한 와중에 희미하게나마 익숙한 파동을 느껴 휴게실로 와 보니 환자의 직장동료가 눈에 들어온 것이다. 리안은 니스의 등을 바라보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이런 행운이 앞으로도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는데. 내가 해낼 수 있을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초조한 상념에 발걸음이 빨라지려는 찰나였다.

"저... 리안 씨, 조금 실례가 될 수 있는 질문이겠지만... 혹시... 선배님께 어떤 도움을 받으신 적이 있나요?"

니스가 어깨 너머로 조심스레 보낸 질문에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리안은 갈피를 잡느라 뜸을 들였다. 지난밤의 미션 도중 들은 '동기'에 대한 질문의 연장선인걸까. 리안은 화살꼬빈─아인스와 눈빛을 주고받으며 조용히 답했다.

"내가 미혹의 숲에서 조난을 당했던 적이 있어. 그때 아스펜 요원이 나를 발견했거든."

그의 도움을 받아 신분을 만들었다거나 진로를 잡을 수 있게 되었다는 세세한 이야기까지는 말하지 않아도 될 성 싶었다. 곧장 알겠다는 탄성이 뒤따라온 것이다.

"아! 역시 그 분이셨군요. 어쩐지 리안 씨의 파트너가 굉장히 눈에 익었거든요. 정확하게는 그 일루전이... 어쨌든 선행이 돌고 돌아왔네요. 조로아크 씨, 그때 도와줘서 고마웠어요."

니스는 화살꼬빈으로 둔갑한 조로아크에게도 대뜸 고개를 꾸벅여 인사를 하고 복도의 모퉁이를 손짓해보였다.

"저길 돌아서 바로 보이는 오른쪽 병실에 선배님이 계세요. 일반적인 면회 시간은 한 시간이라... 때가 되면 제가 리안 씨를 다시 찾는... 게 규칙인데요."

한 시간, 너무 촉박한데. 리안은 그가 말꼬리를 늘리며 뒷머리를 긁적이는 모습을 보고 의중을 숨기듯 고개를 기우뚱했다.

"음... 길면 길수록 나야 좋긴 한데. 왜?"

"제가 금방 본부로 돌아가봐야 해서요... 상황을 봐서 다른 요원이 리안 씨를 부르러 올 수도 있어요."

리안은 눈썹을 미미하게 모았다가 별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볼 일만 보고 돌아갈게. 여기까지 안내해줘서 고마워.”

니스는 벙긋 웃더니 조로아크의 눈치를 슬쩍 보고 이번에는 차분한 악수를 건네왔다. 단순한 인사치레일텐데도 특유의 쾌활함까지는 숨기지 못하는 동작이었다. 아니면 우울함을 숨기기 위해 부러 밝은 척을 하고 있다거나. 리안은 국제경찰 요원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 병실 문 앞으로 다가가 섰다. 굳게 닫힌 문이 두 번째 관문처럼 보였다. 이 문을 열고 들어가서 보게 될 장면은 과연 얼마나 두렵게 느껴지려나. 리안은 손잡이를 잡고 속으로 삼초를 센 후 문을 천천히 열어젖혔다.

은엽은 마치 깊이 잠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무성하던 수염은 누군가가 임의로 깎았는지 거뭇한 자국만이 남았으나, 리안은 그렇게 드러난 얼굴이 얼마나 수척해졌는지, 얼굴에 얼마나 많은 상처가 남아있는지 굳이 관찰하고 싶지는 않았다. 간밤에 그를 발견했던 순간 느껴본 파동만이 리안의 감정을 뒤흔들어 놓았었다. 기억보다도 훨씬, 훨씬 약해지고 잠잠해진 파동은 시간이 흘렀어도 본래의 주파수를 되찾지 못하고 있었다. 미약하게 흐르는 숨소리가 그나마 위안이 되었을까. 병실 바깥에서 걱정했던 것과 달리 평정심이 어느 정도 유지되고 있는 까닭에 리안은 약간의 놀라움을 느꼈다. 아무래도 간밤에 맛본 충격이 오늘에 와서는 완충제 역할을 해주는 듯했다.

리안은 병상으로부터 억지로 고개를 돌려 빈 꽃병을 찾았다. 시오레가 본가의 꽃집에서 가져왔다며 반강제적으로 안겨준 꽃다발은 여전히 싱그럽게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볕이 잘 드는 창가에 정돈된 꽃병을 올려두고 오니 파트너는 이미 둔갑을 풀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조로아크와 시선을 맞춘 리안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미리 일러준 대로 해줘, 아인스.”

조로아크는 잠자코 주억거리고는 병실 전체를 환영으로 뒤덮어버렸다. 리안이 '작업'에 집중하는 동안 닥쳐올지도 모르는 방해를 막아내기 위한 일종의 방어막이었다. 만일 한정된 면회 시간이 모두 지나더라도 아인스의 일루전이 연장전을 마련해줄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준비과정이 끝나자, 리안은 가볍게 몸을 풀고 나서 간병인 전용 소파베드를 끌어다 은엽의 곁자리에 앉았다. 상대방의 동의없는 접촉은 매너가 아니라고 했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허락없이 만져서 미안..."

리안은 입속으로 중얼거리며 주삿바늘이 꽂히지 않은 쪽의 손목을 쥐고 손바닥을 펼쳤다. 은엽의 손바닥은 이전보다도 굳은살과 흉터가 늘어나 거칠어진 느낌이었다. 포켓몬이 물거나 할퀸 흔적들은 기본이고, 손바닥을 가로지른 커다란 흉터는 손금을 끊어놓다시피 하고 있었다. 리안은 별안간 치밀어오르려는 감정을 꾹 누르고는, 이내 손목에 도드라진 혈관 위에 엄지를 대었다. 따끈따끈한 돌덩어리 같은 감촉이었다. 맥박과 체온 모두 그의 육신에 숨이 잘 붙어있음을 증명해주었다. 리안은 이쯤에서 만족하기로 마음먹고는 다음 단계로 건너뛰었다.

파동사는 대상에게서 감지하는 파동을 통해 그의 감정을 읽어낼 수 있다. 생명체가 드러내는 감정은 특별한 에너지로써 파동을 전달한다. 대상이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는다면, 혹은 감정을 드러낼 수 없는 상태에 머물러 있다면, 그 파동은 어떤 에너지도 가지지 않은 고요한 흐름으로 읽힌다. 때문에 이를 두고 혹자는 ‘물결이 잔잔한 수면’ 또는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 매끄러운 거울’이라 비유하기도 했다. 리안이 지금 느끼고 있는 은엽의 파동이 바로 그러했다. 평소에는 그 특유의 깊고 넉넉하기 그지없던 흐름이 지금은 꽝꽝 얼어붙은 것처럼 정체되어 있었다. 이를 감지하고 있는 리안마저 오한을 느낄 정도였다.

'집중하자.' 리안은 스스로를 다잡으며 미지의 영역에 한걸음 들어섰다. 타인의 파동을 감지해서 그가 현재 어떤 상황에 놓여있는지, 그리고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유추해보는 것은 쉬웠다. 그러나, 타인의 파동에 직접 간섭하여 그의 감정이나 상태에 변화를 주는 것은 리안이 지금껏 시도해 보지 못했던 일이었다. 과거, 자신이 전투인형으로 움직이던 시절에 '제거대상의 감정에 귀를 기울이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말라'는 세뇌에 반발심을 가졌으면서도 결국 따르게 된 이유를 되짚어보면, 시도 자체를 피해 온 것일지도 모르겠다. 문득, 리안은 자신의 아버지가 파동 간섭에 특화한 인물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떠올렸다. 하지만 이제 와서 깨달아봤자 무엇이 달라질까. 나의 과거 행적이 바뀌는 것도 아닌데. 리안은 초점을 지금 이순간으로 맞추기 위해 천천히 심호흡을 하고는, 제 손 위로 흐르는 파동에 대고 자신의 파동을 겹쳐 흘리기 시작했다. 연못 위로 떨어진 빗방울들이 그려내는 수십의 동심원들이 어느 순간 희미해지고 잔잔한 수면 속으로 가라앉는 장면을 연상해내며, 자기 또한 연못 속으로 빠져드는 하나의 빗방울이라 여기고, 누군가의 심상을 들여다보는 것은 연못 아래 풍경을 굽어보는 것과 같음을 머릿속에 새겼다.

은엽의 파동을 완전히 각인하면서 호흡이 차츰 느려진다. 자신의 파동을 가라앉힐 무렵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가 희미해진다. 은엽과 자신의 파동이 평형을 이루었을 때, 리안은 어느덧 자신이 어디론가로 빨려가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이 일이 잘 되고 있는지, 잘못 되었는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저 은엽의 파동이 자신을 집어삼키도록 내버려둘 뿐이었다. 파트너의 걱정 담긴 무사기원이 의식의 빈 공간을 떠돌다 사라졌다.


춥다. 겨울도 아닌데 왜 이렇게 추운 걸까.

리안은 반사적으로 몸을 웅크리려다, 자신이 어딘가에 누워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게슴츠레 눈을 떴다. 시야는 어두컴컴하기만 했다. 자신의 파트너도 보이지 않았고, 침대 위에 누워있는 은엽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리안은 벌떡 일어나 앉아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곳은 어느 병원의 병실이 아니었다. 리안은 파트너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 입을 벌렸다. 그러자 물방울이 터지듯 솟구쳐올랐다.

'물 속인가?'

리안은 무심코 바닥을 짚었던 손을 들어 한움큼 잡힌 무언가를 쏟아보았다. 손아귀를 빠져나가는 모래의 감촉이 버석거렸다.

"이건... 내 예상과는 한참 다른데."

리안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뒤 자신이 처한 상황을 천천히 분석해보기 시작했다. 파동을 조율하는 것으로 은엽의 심상 속에 들어오려 했었는데, 이 시도가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조차 모르는 상황이었다. 자신은 물 속 깊은 장소에 빠져 있으며, 더럽게 추운데다, 파트너와 다른 엔트리들은 곁에 없고, 보이는 게 거의 없지만, 다행스럽게도 말을 하거나 숨을 쉬거나 촉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니 주변에 어떤 위협적인 요소가 있는지 파동을 감지해보기만 하면... ...

"아."

실은 몹시 중대한 문제가 하나 있었다. 마치 숨을 쉬듯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여겨오던 감각 하나가 송두리째 사라져버린 것이다. 리안은 제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 감각을 쓰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사고회로가 제대로 멈춰서고 말았다. 어떡할까. 어떡할까... ...

"젠장. 어쩔 수 없지."

이곳에서는 물리법칙이 무시되는 모양이라, 리안은 결국 단순하게 생각하고 행동하기로 마음먹었다. 파동술을 사용할 수 없으면 직접 몸으로 부딪쳐보는 수 밖에 도리가 없다. 은엽의 심상 속으로 들어왔다는 가정 하에 애써 긍정적으로 사고해보자면, 파동술을 사용할 경우 오히려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몸이 무의식적으로 금제를 걸었을 수 있다. 리안은 스스로 세운 가설의 신빙성을 고민하며 한숨을 쉬었다. 파동사 전용 교재가 있으면 참 좋겠다. 그렇게 허심탄회스러운 마음가짐으로 무작정 발걸음을 옮겼을 무렵, 주위가 급격하게 밝아지는 바람에 시력을 완전히 빼앗긴 그는 이윽고 정신이 아득해짐을 느꼈다.

'파동을 사용하지 못하니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리안은 쓰디쓴 독백을 흘리면서 눈을 뜨려 애썼다. 그리곤 간신히 자신의 앞에 떠오르는 실루엣을 응시한다......

나는 충격과 경악에 차서 건너편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아니, 노려보았다. 방금 내가 들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저들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가 대체 무엇인지.

“하운이는 외가댁에서 잘 지낼 거야. 가족들 전부가 바쁘다 보니까 둘째를 제대로 돌봐줄 만한 사람이 없잖니.”

그 말을 들은 나는 식탁보를 당장 잡아뜯을 것처럼 움켜쥐었다가 숨을 들이켰다.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가족들 전부 바쁘다'니 핑계가 참 그럴싸하다. 어머니, 당신께서 드래곤조련사의 삶에 귀속되라는 친정의 강요와 압박에 오랜 기간 시달리셨음을 나는 이해하고 있었다. 친정의 입김을 피해 바다 건너 지방에서 당신만의 진로에 집중하며 생활하고 계신 것을 알았다. 그리고 진로가 가로막히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자식들에게서 거리를 유지하며 생활비만큼은 꼬박꼬박 보내주시는 것을 그나마 다행이라고 여겼다.

나는 내 하나뿐인 동생이 나와 똑같은 유년기를 보내는 것만큼은 견디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잘 알았으며, 설상가상으로 그애가 어머니의 친정의 눈독에 올랐음을 알아차리면서부터는 공포심에 떨어야 했다. 그래서 어머니께 '하운이만큼은 외가에 보내면 안 된다'며 몇번이고 신신당부를 했고, 그러마는 약속을 받았을 때는 안심하고 말았다. 그렇게 지난 수 년 간은 남매끼리 탈없이 지내왔기에, 외가로부터 어떤 입장도 들려오지 않아서, 나는 어머니께서 외가의 조손녀에 대한 욕심을 차단해주신 줄로 굳게 믿었다. 그리고 하운이가 스스로 똑부러지는 앞가림을 하게 되자 방심한 나는 경계심을 해이하게 풀어버렸다. 하운이가 다니는 보육원에서 단기 캠프를 떠난 동안, 나는 평소 여행을 가고 싶었던 지방으로 떠났다. 수 년 간 소식 하나 없던 어머니로부터 전화를 받은 날, 나는 내가 바보처럼 순진했음을 절실히 깨달았다.

"두 분께서 바쁘시다면 제가 계속 하운이를 돌보면 될 일인데, 어떻게 저한테 아무런 말씀도 없이 그런 고립된 곳에 그 애를 맡길 생각을 하세요? 지금까지 두 분을 대신해서 하운이를 돌봐온 사람도 저인데, 어떻게, 어떻게 저한테 상의 하나 없이…!”

이렇게까지 분노한 적이 생애 통틀어 몇 번 있었는가? 나는 격앙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숨을 헐떡였다. 머리에 피가 몰려서 시야가 붉게 물든 것 같았다. 이제는 의문이 떠오를 차례였다. 어머니가 자식과의 약속을 일방적으로 깨 버린 이유는 무엇이고, 그리고 동생 곁에 내가 없다는 점을 어떻게 알아냈을까? 의문은 배신감을 등에 엎고 의심으로 자라나서 분노를 한층 돋궜다.

"그래도 하운이를 보냈다는 전화를 네개 해주긴 했잖니? 그럼 된 거지, 이렇게까지 화를 낼 필요 있어?"

욕지기가 치밀어오르려다 간신히 사그러들었다. 나는 이번에는 과묵함을 지키고 있는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셨어요?"

"... ..."

아버지는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고개를 슬쩍 돌리고 외면했다. 나는 대화의지를 보이지 않는 그의 태도에 기가 막혀 그만 헛숨을 들이켰다. 허공으로 증발할 뻔했던 내 궁금증은 어머니가 친절하게 받아주었다.

“네 나이를 잘 생각해보렴, 은엽아. 너도 슬슬 네 앞길을 챙길 시기 아니니? 널 생각해서라도 그렇게 결정할 수밖에 없었어.”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날카롭게 웃음을 터뜨렸다. 일부러 노력을 들이지 않고도 코웃음이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언제부터 저한테 신경을 쓰셨는지 모르겠네요. 제 일은 제가 해결하면 될 일이지만 하운이는 겨우 아홉 살이에요. 아직 열 살도 안 된 어린애라고요. 외가댁에서 자라게 된다면 분명 사방이 꽉 막힌 환경에 나아갈 길은 딱 하나만 주어질 텐데, 그런 삶을 어린 나이부터 어떻게 견뎌요. 하운이가 원하는대로 경험하게 해 주어도 한참 모자랄 나이인데, 두 분은 어떻게 그걸 싹 무시해버리세요?”

“너의 그런 태도가 오히려 하운이를 구속하는 셈이라는 생각 안 드니, 은엽아? 너는 줄곧 네 동생을 감싸고 보호한답시고 하운이가 드래곤조련사에 관심을 가지는지 제대로 물어보지 않았을 것 아니니.”

“어머니께서 친정에서 싫은 소리 더 듣지 않으시려고 하운이를 데려다 바친 게 아니라요?"

벌떡 일어나는 동작에 밀려난 의자가 끝내 뒤로 쓰러지며 우당탕 하는 요란한 소리를 내었다. 어머니는 자리를 박차고 선 나를 차갑게 응시했다.

"네가 좋을 대로 생각하렴. 이제는 대화가 통하지 않을 것 같네."

갑작스레 들이닥친 현실이 끔찍하고 지긋지긋하고 한심스러웠다. 말 한마디 추가할 필요성마저 느끼지 못해, 나는 짓씹듯 그자리에서 절연 선언을 내뱉고는 동생을 되찾아오기 위해 장소를 뛰쳐나왔다.

"이제는 나의 말을 알아들어야 할 때가 되었을텐데."

화산재 쌓인 땅 위로 흙안개가 내려앉았다. 누군가의 포켓몬이 흘린 피가 무릎을 적셨다. 나는 숨을 헐떡이며 높새의 상처를 손수건으로 겨우겨우 감쌌다. 연고와 손수건을 뚫고 스며나온 진득한 액체가 손가락을 미끄러뜨렸다.

"아, 안돼, 왜 상처약이 듣질..."

땅에 내동댕이쳐지고서도 삼삼드래의 이빨 속에서 한참을 버둥거렸던 높새는 이제 숨을 옅게 내쉬고 있었다. 그 동안 외조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높은 위치에서 나를 굽어보기만 했다. 나는 울분을 견디다 못하고 그를 향해 소리질렀다.

"왜,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 겁니까!"

배틀은 배틀로 끝나야 마땅한 것을, 저 삼삼드래가, 아니, 외조부가 멋대로 한 발 더 나아가버린 것이다. 노인은 아주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이 호통쳤다.

"우리는 소중한 것을 두고 승부를 보기로 하였다. 그렇다면 그것을 거머쥐기 위해서는 필사적으로 행동해야지. 그런 잡것으로 승리를 넘보다니 어리석기 그지없구나."

"그걸, 그걸 말이라고..."

높새의 신음이 울화를 끊고 귓속에 파고들었다. 나는 순간 화를 내던 것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높새를 붙든다.

"그, 그래, 가자, 센터에 데려가줄게, 조금만... 견뎌, 높새."

혀를 날름거리며 피맛을 음미하는 삼삼드래가 공포스럽기 그지없었다. 나는 서둘러 높새를 몬스터볼 안으로 불러들이고는 비틀비틀 일어나 섰다. 무릎이 깨져 피가 흘렀지만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턱이 절로 덜덜 떨릴만큼 진한 공포심과 절망감이 시각과 청각을 제외한 모든 감각을 마비시켜버린 듯 했다.

"가서 다시는 얼씬하지 말거라."

나는 몬스터볼을 품에 꽉 묻고 최선을 다해 다리를 움직였다. 한시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뒤를 이은 외조부의 예언이 차디찬 칼바람처럼 내 등을 베었다.

"내 손녀는 너같은 약해빠진 놈은 거들떠도 보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눈물 흘릴 자격마저 빼앗긴 채 용의 전장에서 도망쳐 나왔다.

리안은 턱까지 차오른 숨을 다급히 뱉고 나서 바닥에 쓰러졌다. 그리곤 곧바로 벌떡 일어났다. 이럴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윙윙 맴돌았다. 자신의 가슴팍을 더듬어 무엇인가를 찾으려던 그는 손아귀에 잡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깨닫고 망연해졌다.

"높새를... ..."

리안은 자신의 목소리에서 기시감을 느끼고는, 이윽고 그 기시감에 의문을 표했다. 내 목소리가 아닌 게 아니고... 맞는데. 왜 내 목소리가 아니라고 순간 착각했지? 그러나 여전히 머릿속에는 지금껏 느껴왔던 감정들이 찌꺼기처럼 잔존하고 있었다. 그 모든 일로 인해 리안은 분노했고, 절박함을 느꼈으며, 공포감에 젖어들었다. 마치 자신이 그 일을 직접 겪은 장본인이 된 것마냥. 이유 모를 피로감에 푹 젖어 온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듯 했다. 그제서야, 그는 방금 본 장면들이 심상의 주인이 가진 기억의 일부였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우리는... 비슷한 경험을 했구나. 그래서 내가 모르는 사이에 당신에게 동질감을 느끼게 된 걸까."

동생에 대한 깊은 애정과 강제된 단절, 그리하여 얻게 된 관계에 대한 두려움, 그래서 보호자랍시고 대리만족을 위해 내게 빚을 잔뜩 지워놓고는 홀로 훌훌 날아갔던 거구나. 남의 처지를 이용해서 대리만족을 채운 건 괘씸했지만, 솔직히 불쾌하지는 않았다. 그가 자신에게 베푼 마음씨는 진심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건 역시 내 예상과 한참 다르단 말야. 파동을 이렇게저렇게 조율해서 여차저차 정신 되찾게끔 하려고 했는데 당신 기억을 이렇게 생생하게 엿보게 될 줄은 몰랐다고..."

앓는 소리를 내던 리안은 이윽고 짐짓 씩씩하게 일어섰다. 초반부터 고생 시작이었지만 나침반이 돌고돌아 올바른 장소로 오게 되었으니, 이제는 지도를 보면서 보물을 찾으러 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심해처럼 펼쳐진 심상세계를 향해 무작정 한걸음 내딛었다. 이곳에는 어떤 기억들이 있는지, 기억 속으로 빠져들면 감정이 동화되는 것 이상의 어떤 일을 겪게 될지에 대한 통찰을 버린, 즉 완벽한 무방비 상태로. 머잖아 리안은 시커먼 바닥 아래로 훅 꺼져드는 느낌을 받고 숨을 멈추었다......

불꽃이 타오르고, 연기가 피어오르고, 곳곳에 쓰러진 동료들과 포켓몬들, 새카맣게 타서 무너진 목재건물들, 연달아 터져나오는 비명과 절규, 매캐하게 타는 냄새가 끊이지 않아, 진한 핏물이 시야를 가로질러 뚝뚝 흘렀다. 몸이 불에 달궈진 듯 고통스럽기 그지없는 통각으로 활활 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마저 내 움직임을 멈추지는 못했다. 거친 아스팔트가 팔에 긴 자국을 남긴대도 멈출 수 없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나의 파트너가 있었다. 어서 빨리 파트너에게 가야만 했다. 느릿해서 미칠 것만 같은 움직임에 소리없는 탄식을 흘리며 손으로 땅을 짚었다. 차라리 걸어서 가야지. 왜 진작 생각을 못했을까. 실낱같은 기쁨에 입꼬리가 올랐다.

"서리야, 내가 곧 갈게."

내 목소리가 이상하게 갈라져 있지만 그다지 중요한 건 아니다. 내 파트너가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넘어졌구나. 어쩌다 넘어졌니. 꼼짝도 하지 않는 모습을 보니 무릎이 깨진 모양이다. 얼른 일으켜세워주고, 먼지를 털어주고, 안부를 확인해야겠다. 서리는 겁이 많은 루카리오라 눈물도 많았다. 저렇게 넘어진 채 펑펑 울고 있을 것이다. 주변에서 비명이 끊이질 않으니 더더욱 무서울 것이다. 어서 빨리 달래줘야지. 그런데 누가 자꾸 비명을 지르고 있는 걸까. 왜 탄내가 가시지 않는 걸까... 찰나의 의아함에 몸이 기우뚱 기울어졌다. 바닥에 우스꽝스럽게 나동그라졌다. 눈앞이 새카매졌다 새하얘지기를 반복했다. 그정도 쯤 걸었다고 숨이 차다. 나는 눈을 부릅떠 앞을 보았다. 내 바로 앞에 서리가 있다.

"서리야. 괜찮아. 나 여기 왔어. 일어나야지..."

왜 떨리고 있는지 모르겠는 손길로 서리의 등을 토닥였다. 서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기절이라도 한 걸까. 넘어지면서 많이 다치기라도 한 걸까. 그나저나 서리의 몸이 이렇게 뻣뻣했던가. 나는 온힘을 다해 서리를 안아들었다. 역시 무거웠다. 내 품안에 든 서리가 축 늘어졌다. 서리는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 기절한 건 아닌가? 나는 멍하니 서리를 흔들었다.

"서리야... 서, 서리야."

지금이라도 나를 보고 웃기라도, 아니면 울기라도 해야 할 텐데, 서리의 얼굴 표정은 공허하기만 했다. 나는 다시 그를 흔들었다.

"서리야, 정, 정신 좀. 제발... 정신 차려봐. 서리야?"

그러는 동안 내 가슴이 차츰 선뜩해졌다. 나는 이번에는 서리를 꽉 끌어안았다. 이상하다. 아까 전에도 이렇게 가까이 있었던 것 같은데, 어느 사이에 이렇게 멀리까지 떨어지게 된 걸까. 서리가 펼쳐내는 방어가 얼마나 단단한데.

"아아."

그 푸르스름한 막이 산산조각났었다.

"아... 으, 아..."

굳건한 앞발이 나를 뒤로 밀쳐냈었다.

"... ...아..."

나는 서리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서늘하면서, 뜨겁고, 축축했다......

귓가에서 한동안 가시지 않았던 비명이 그쳤다. 나는 그제야 멍하니 고개를 돌려 바깥을 내다보았다. 바닷가 마을의 시끌벅적한 하루가 바야흐로 끝나가고 있었다. 확성기를 들고 장사멘트를 외치던 상인들이 하나둘 씩 천막을 내리기 시작했다. 장터 거리를 그득히 메웠던 손님들도 이제는 드문드문해졌다. 나는 팔 안쪽으로 헐겁게 고정한 알을 가벼이 쓰다듬었다.

"이제야 좀 조용해졌네. 바깥 구경은 재밌었니."

알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온기는 이전보다 잘 느껴졌다. 서리가 급습 작전에 들어가기 전에 선배에게 맡겼다는 알이었다. 나는 서리가 언제부터 알을 가지고 있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지만, 선배는 '포켓몬의 생태는 원래 그런 식'이라며 나의 자책을 빼앗아갔다. 나는 알껍데기에 뺨을 대고 천천히 자장가를 흥얼거렸다. 트레이너 캠프 시절 서리의 알을 한창 돌볼 때 만들었던 자장가였다. 그 시절에는 꽤 잘 만들었다며 흡족해 했던 것 같은데,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다시 끄집어내본 노래는 단순하고 단조롭게만 느껴졌다. 나는 자장가를 부르다 말고 어렴풋이 웃으며 알을 끌어당겨 안았다. 채 낫지 못한 화상이 뜨끈하니 당겼지만 괘념치 않았다.

"자장가 대신으로 네 이름을 만들어줄까. 네 자장가를 따로 만들기 전까지는 매일 그 이름을 불러줄게."

고개를 계속 기울이고 있으려니, 가슴께까지 자란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알의 일부를 담요처럼 덮었다. 나는 남은 손으로 알의 옆구리를 감싸며 속삭였다.

"봄에는 꽃샘추위를 몰고 오는 바람, 가을과 겨울에는 마구 회오리치며 부는 바람을 소소리바람이라고 해. 너는... 세상에 나오면 네가 하고 싶은 일만 해도 돼. 날 따르지 않아도 괜찮으니, 개구쟁이여도 좋으니, 나는 네가 마음껏 활기차게 뛰놀면 좋겠다. 소소리바람처럼 말야."

나를 끝까지 감싸고 혼자서 세상을 떠났던 그와는 다르게 말이다.

"잘 자렴, 소소리. 내일 또 보자."

어둑어둑해져가는 하늘이 커튼에 가려지니 방 내부에도 옅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리안은 문득 자신의 얼굴을 만져보았다. 물기로 흠뻑 젖어 미끌거렸다.

"...이걸."

헛구역질이 나오고, 잠시나마 멈췄던 눈물이 다시금 터졌다. 기억을 지나오면서 내내 울었을텐데도 감정이 쇄도하여 흘려보내길 멈추지 못했다. 방금의 기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단순히 괴로운 기억이 아니었다. 이것은 아무리 많은 시간이 흘러도 결코 치유되지 않을 상흔이었다. 떠올리는 순간마다 발화하여 고통에 무뎌질 때까지 열상(熱傷)을 남기는 이러한 기억을 무엇이라 부르던가.

"이건 악몽이야..."

리안은 흐느끼듯이 중얼거리고는 자신이 뱉은 단어에 흠칫 놀랐다. 자신이 두려워 마지않는 악몽은 상실과 부재의 상황이었고, 언젠가 그것을 겪게 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떠느라 밤을 지세운 적이 숱했다. 그런 것들을 어떻게 견뎌낸다는 말인가. 가장 가까이서 버팀목이 되어주던 존재를 삽시간에 잃고 얻는 충격을 어떻게 다스릴 수 있다는 건가. 리안은 문득 현실에서 자신의 곁을 지키고 있을 파트너를 떠올렸다. 전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때, 죽음을 맞이하던 때, 시간을 건너뛰어 미래에 다다르던 때, 그리고 지금에마저 언제나 함께 해왔던 영혼의 단짝인데, '내가 너무 이기적으로 굴어왔구나.' 주체못할 죄책감이 뒤를 잇고 마는 것이다. 만일 내 삶에서 아인스가 사라진다면 가슴이 통째로 뚫리는 통증을 앓겠지. 은엽은 이미 그 구멍을 지니고 통증에 익숙한 삶을 살아온 것이다.

"...익숙한 거 맞아?"

그의 앞에서는 감히 꺼내지 못할 질문이었다. 리안은 루카리오의 시신을 끌어안았을 때 느꼈던 감촉을 무심코 떠올리고 어깨를 떨었다. 익숙한 것이 아니고, 괜찮은 척을 하는 쪽이 아닐까. 은엽은 무엇을 표출하기보다는 꼭꼭 숨기려고 하는 성격이었고, 그런 데 도가 튼 인물이었다. 그러니까 이렇게 선명한 악몽이 되어 내부를 갉아먹히고 있는 것일 테다.

"그 점도 나랑 비슷하네..."

그래서 자신은 예전에 시오레에게 혼났었다. 꿈 속에서도 시안에게 혼났던 것 같다. 리안은 오열하던 끝에 겨우 되찾은 숨을 조심스레 골랐다. 이번의 기억에 감정이 필요 이상으로 동화되는 바람에 시간이 지체되고 있었다. 그는 마지막 즈음에 안아보았던 알을 마음속으로 그리며 일어설 힘을 그러모았다.

"소소리 덕분이구나..."

파트너의 흔적에 이름을 붙이고 매일 밤마다 이름을 불러주며 다음날을 기약했다. 끊이지 않는 악몽이 결국 환청으로 남아버린 현실 속에서, 은엽은 그런 식으로 하루하루를 버텼을 것이다. 이 앞으로도 여전히 고통스러운 사건들을 수없이 겪었을 터이나 은엽은 쉬지 않고 꾸준히 걸어갔을 것이다.

그렇다면 질 수 없지. 리안은 조용히 독백하며 다시금 앞으로 나아갔다. 심상세계 속에서도 파트너와 함께였다면 두려움은 덜했을 텐데, 리안은 홀로 각오를 다지기 위해 눈을 바로 뜨고 어둠 속을 걸었다. 귀를 가만히 기울여보면, 어딘가로부터 이질적인 음성이 고요를 흩뜨리고 있었다......

낭랑한 안내방송이 공항청사 내 대기실에 울려퍼지고 있었다. 여름휴가철을 맞이하여 공항은 여행객들로 붐볐고, 군중의 소리는 꾸준히 방송의 안내 기능을 흐뜨려놓았다. 바로 곁에 앉은 친우의 목소리까지 한음절 씩 묻히곤 했다.

"U시라. 좋겠네."

"경호 업무 전에 답사하러 파견 나가는 것뿐인데 뭐."

"파견이든 뭐든 일단 천상의 의료서비스가 제공되는 휴양지라잖아. 나도 거기서 의사일 하면서 돈 좀 만질 자신 있는데."

"...그 쪽이었던 거니."

"농담. 화상 입은 건 좀 어때."

"이제 거의 완전히 나았어. 네가 좋은 의사 알아봐준 덕분이겠지."

"그래? 하운이가 시름 덜었겠네. 그 친구 말로는 너처럼 회복 빠른 환자는 의사 인생에 처음이라던걸."

"...흉터는 평생 남을 거란다."

"뭐... 그렇겠지."

가급적이면 친우가 던져주는 말에 정성껏 대답해주고 싶었는데, 낯선 장소가 마냥 신기해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개구쟁이를 지켜보느라 문장이 짤막하게 끊겼다. 수많은 비행기가 이착륙하며 그리는 풍경, 수많은 인간들이 네모난 짐을 끌고 돌아다니는 풍경, 생전 처음보는 포켓몬들이 실내에 조성된 정원에서 뛰노는 풍경 등등, 어린 리오르에게는 공항에서 볼 수 있는 모든 풍경들이 짜릿한 자극으로 느껴질 것임을 알았다. 하지만 이런 번잡한 장소라면 요주의 관찰대상에게서 눈을 떼는 즉시 놓치게 될 터라, 나는 근처로 돌아와 얼쩡대는 소소리를 번쩍 들어 안았다. 한창 혈기넘칠 시기인 소소리는 아직 보고 싶은 게 많이 남았다며 열심히 우겼다. 나는 내 팔 위에서 바동거리는 소소리를 달래느라 진이 거의 빠지고 말았다.

친우는 턱을 괴고 이를 지켜보다 후후 웃었다.

"애아빠 다 됐네. 애들 돌보기 힘들지 않냐?"

"그럭저럭 익숙해."

그래도 소소리가 아직 유년기임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라 눈을 깜박거리며 졸린 티를 금방 내기 시작한다. 여러 사람들이 지나치면서 무수한 감정의 파동을 퍼뜨리고 있을텐데도 졸음기를 느낄 정도면 과히 신나게 놀았던 게 맞다. 친우는 내가 아기 포켓몬을 재울 동안 조용히 기다려주었다. 나는 마침내 잠든 소소리를 볼 속으로 돌려넣고는 고맙다는 뜻으로 엄지를 올려보였다. 친우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내게 물었다.

"비행기 뜨는 시간은 언제야?"

"세 시간 정도 남았어. 이제 슬슬 들어가야지. 바래다줘서 고마워."

"이 정도 가지고 뭘." 피식 웃음을 흘리던 친우가 떠올랐다는 듯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아, 맞다. 나는 앞으로 알로라에서 지낼 거야."

"알로라에? 멀리 가는구나."

내가 중얼거리자 친우는 일견 시큰둥하게 응답해주었다.

"알로라도 짱짱한 휴양지 타이틀을 걸고 있으니까. 뭐... 시간 나면 한번쯤 놀러오든지. 고맙다고 했으니 찾아와서 밥이나 사라."

"그럴게."

친우는 의자에 길게 늘어앉아 기지개를 키는가 싶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양팔을 널찍이 벌리고 나를 바라보는 것이다.

"우리 헤어지기 전에 우정의 포옹 한번만 할까?"

얘가 갑자기 안하던 짓을. 나는 일순 주춤했지만 친우가 '나도 쪽팔려 죽겠으니 얼른 오기나 하라'는 의미를 담아서 눈을 부릅뜨는 바람에 어색하게 다가갔다. 그는 내 허리를 꽉 끌어안고는 곧바로 나를 뒤돌려세워서 쭉쭉 밀기 시작했다. 나는 어쩐지 기진해져서 그가 조종하는대로 걸어갔다. 그렇게 친우가 나를 바래다준 곳은 보안검색대로 향하는 통로였다.

"아무튼 좀 늦었지만... 다시 세상에 나온 걸 축하한다, 친구야. 소소리한테도 인사 전해주고."

다른 사람이 들으면 내가 죽었다 살아난 줄 알겠다. 나는 별말없이 웃고는 손을 흔들어주었다. 친우는 주머니에 손을 꽂아넣고 서서 나를 향해 눈을 찡긋했다.

자동문이 스르르 닫혔다.

겹겹이 세워진 격문이 열리고 드디어 대피소 내부의 정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창문이 없어 햇볕 하나 들지 않는 공간이 삭막하기 그지없었으나, 이곳은 대규모 생화학 테러가 터진 U시에서 제일 안전한 장소 중 하나이기도 했다. 나는 여러번 반복해서 쓴 탓에 너덜너덜해진 방독면을 벗어내렸다. 실내의 공기가 탁하게 오염된 폐 안으로 흘러들어오면서 곧바로 구토감을 일으켰다. 그러나 일행들 중 아무도 이쪽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나는 무관심을 무관심하게 대하며 조용히 헛구역질을 삼키고 견뎠다. 내가 지정해둔 휴식 자리로 걸어가는 몇걸음이 어제보다 곱절은 무거워진 듯 했다.

나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서 얼굴을 길게 쓸어내렸다. 며칠 다듬지 못해 거칠어진 수염이 손바닥에 금방 걸렸다. 하운이가 이 꼴을 본다면 지저분하다고 질색하겠지. 이윽고 나는 하운이를 살아서 다시 만날 수 있을 지 잠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야 했다. 그랬으면 좋겠는데, 날이 갈수록 숨을 쉬는 게 힘들었다. 동행하는 사람들 중에는 이미 건강이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된 이들도 많았다. 다들 단 하나의 희망, 탈출로버가 위치한 중앙탑까지 다다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으나......

아, 지금은 헛된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나는 개인짐에서 수첩을 꺼내 펼쳤다. 조사기록을 남겨둬야 다음 번 있을 조사에서 헤매지 않을 수 있었다. 빈 페이지를 찾아 수첩을 뒤적거리다보면 글씨가 안농처럼 구불거리는 듯한 착시현상이 일었다. 아니면 환각이라거나... 약해진 집중력이 기억을 흐리기 전에 작업부터 얼른 마쳐야 했다. 나는 펜을 쥔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그 옆으로 붉은색 잉크가 툭 떨어졌다. 검정색 펜촉이 잉크의 테두리에 닿아 움찔한 것 같았다. 나는 잉크를 대충 지워내려 손가락을 움직이려다 그대로 입을 막았다. 끈적하고 거무튀튀한 것이 덩어리채 쏟아졌다. 그러잖아도 턱턱 막히곤 하던 호흡이 이번에는 도리어 폐를 찢기 시작했다. 시야가 급격히 앞으로 기울어졌다.

"소소리, 나오, 지, 마..."

나는 소소리가 안쪽에서 날뛰고 있을 몬스터볼을 꽉 움켜쥐며 속삭였다. 애원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볼은 멈추지 않고 이리저리 들썩여댔다. 소소리는 리오르라서 이렇게 바로 내 문제를 감지할 수 있었고, 아직 어린 리오르였기 때문에 맹독성 포자가 매캐하게 퍼진 장소로 빠져나와서는 안됐다. 보라는 그나마 튼튼해서 어느 정도는 버텨주고 있었지만 틀림없이 한계에 다다랐을 것이다. 소소리처럼 면역력이 완전히 형성되지 못한 어린 개체는 몬스터볼 밖의 환경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소소리의 볼이 다시금 진동했다. 나는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목소리를 짜낸다.

"세밤만 자자... 그 다음에 꼭 꺼내줄게. 착하지... 소소리. 난 괜찮아."

괜찮아, 괜찮다. 자기암시를 하듯 몇 번이고 되뇌었다. 몬스터볼의 떨림이 멈칫했다가 간헐적으로 떨리기를 몇 번. 마치 소소리가 우는 것 같았다. 나는 차가운 바닥에 얼굴을 댄 채 희미하게 웃었다. 울보인 건 서리를 꼭 닮았구나. 원망을 받지 않으려면 이곳에서 반드시 살아서 나가야 하지 싶었다.

그래, 밖에서 만나야 할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입속으로 읊조리며 눈을 감는다.

리안은 가슴을 움켜쥔 채 눈을 부스스 떴다. 눈을 감으나 뜨나 어두운 건 여전했으나, 이제는 격통이 사라져 있어서 기억이 전부 끝났음을 인지할 수 있었다. 리안은 환각통으로 답답하게 꽉 막혔던 호흡을 소심하게 마시고 뱉어보았다. 걸리는 숨이 없음을 확인하고 나서야 가슴에서 손을 툭 떨어트렸다.

"죽었다 살아난 것 맞잖아."

기억 속의 은엽은 토혈까지 할 정도로 몸이 망가져 있었다. 대체 어디에 다녀왔던 것인지, 결과적으로는 탈출에 성공한 모양이었지만 그 이후로 꽤 길게 앓아야 했을 것이며, 주변을 슬프게 만들었을 것이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가족이라든지, 소소리를 비롯한 엔트리 포켓몬들이라든지, 사이가 친밀한 벗이라든지... 그러면서도 그는 쉼없이 '나는 괜찮다'고 되뇌었을 것이다. 직후 시기의 기억까지는 보지 못했기에 은엽이 실제로 그러했을 지는 미지수지만, 리안은 어쨌든 확신할 수 있었다. 모른다고 판단을 유예하기에는 자신이 지금까지 그의 시점에서 지켜본 일들이 수두룩해서, 굳이 직접 확인하지 않더라도 자연스레 알 만 했다.

그러고보면 입원 생활이 길수록 고역이라는 뉘앙스의 말을 했더랬다. 시기상 이때 이후 병원에 장기간 갇혔던 모양이다. 리안은 과거 어느 순간을 기억하며 한숨을 쉬었다.

"그거 알아? 나 요즘 당신 때문에 한숨이 부쩍 늘었어."

정신을 차려보면 바닥에 쓰러져 있는 상황이 점점 익숙하게 느껴졌다. 리안은 드러누운 자세 그대로 하늘─혹은 수면─이 있을 곳을 한없이 쏘아보았다. 당연히 심상세계의 주인이 들을 리는 없겠지만, 혼잣말로라도 푸념을 터뜨리지 않으면 갑갑했다. 이에 더해, 계속해서 타인의 감정에 이입하며 기억 속을 휩쓸려다니고 있으려니 정신적으로 피곤하기 그지없었다. 이제 벌써 네번째 악몽을 지나쳐 왔지만 심해로 가라앉았다는 영혼은 찾아볼 수 없었다. 설마 이보다도 더 밑바닥이 있는 걸까.

"그럼 다시 간다... 끝까지 움직여야지 당신을 만날 수 있으니까. 기다려."

리안은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조금이라도 더 휴식을 취하고 싶었지만 스스로를 향한 채찍질을 그만둘 수는 없었다. 보물은 오리무중 속에 놓여있고, 가야할 길은 멀었으니까. 리안은 그렇게 자기자신을 어르고 다독이며 앞으로 걸어나갔다......

지방의 중부와 동부를 잇는 대교는 평일 오후 시간대에 이르러 시원하게 뚫린 고속도로로 변모하고는 했다. 오늘같이 청명한 날에는 마음이 덩달아 붕 뜨는 나머지 악셀을 밟아댈 운전자들이 자주 나타날 것이다. 내 차를 추월해서 저 멀리 앞질러가는 차량을 뒤쫓을까 고민을 잠깐 떠올린 나는 그냥 보내주기로 했다. 오늘은 연차를 낸 날이고, 바로 옆좌석에는 차멀미에 취약한 과거인이 앉아 있으니까. 나는 기절하듯 잠들어있는 리안을 곁눈질로 살펴보고 시선을 먼 곳으로 고정시켰다. 방금의 추월차량 하나를 제외하고는 뒤를 따라오거나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차들은 없었다. 속도를 조금 더 낮춰도 될 성 싶었다.

정말로 흔치 않게 평화로운 날이다. 그 덕분에 마음이 느슨해지기라도 했는지, 히터에서 뿜어져나오는 열기가 사고를 녹여내리고 있는지, 나는 한없이 이어지는 도로 위를 앞으로도 영원히 달려갈 것만 같다는 착각을 언뜻 떠올리고 만다. 리안이 제가끔씩 뱉는 숨소리와 코고는 소리만이 현실감각을 지탱해주고 있었다. 그간 평화로움을 느낄 새가 별로 없었다보니 단 몇초만에 취해버리고 말지만, 그렇다고 이 평화로움을 가져다준 사람에게 생명의 위협을 가져올 수는 없으리라. 나는 하품을 하다말고 눈을 부릅떠 잠기운을 쫓았다. 그럼에도 지루한 등속주행은 끝나지 않는다...

그때 갑자기 라이브캐스터가 진동했다. 스치는 시선으로 알람을 확인해보니 본부로부터 호출이 들어와 있었다. 졸음운전은 면할 수 있게 되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나는 속으로 앓는 소리를 내며 운전대를 틀었다. 다리가 하도 길어서 그런지 휴식 목적으로 마련된 주차공간이 바로 보였다. 갑자기 차량 바깥으로 나오니 추위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차에 시동을 걸어두었으니 리안은 안에서 계속 따뜻하게 잘 수 있을테고, 나는 이를 위안으로 삼기로 하며 라이브캐스터의 버튼을 눌렀다. 이어지는 통화음과 사무적인 목소리를 묵묵히 듣는 동안, 내면에 겨우 들여놓은 평화가 찬찬히 바스라졌다. 졸음기 또한 완전히 가셨다.

"...일단 알겠습니다. 지금 보고 있는 용무만 마치고 곧장 복귀하도록 하지요."

최대한 빨리 끝내고 와달라는 채근을 마지막으로 통화는 끊겼다. 나는 통화기기를 주머니 속에 쑤셔넣고는 수평선을 멍하니 노려보았다. 복귀 조건에 개인의 휴식시간을 보장한다는 조항을 넣어두고서도 보기좋게 무시당하는 꼴이라. 하긴, 내가 원래 순진한 편이긴 했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인가.

"...아참."

상념으로 시간을 허비할 때가 아니다. 리안이 제때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도록 하려면 서둘러야 했다. 레인저 양성학교의 입학처 사무소는 금요일에 일찍 문을 닫는 편이었다. 나는 성큼성큼 차로 되돌아가 운전석에 올라탔다. 리안은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자세로 여전히 잠든 상태였다. 퇴원을 겨우 하고 한창 회복기에 들었는데 저렇게 비뚤어진 자세로 자고 있으면... 그리 생각하며 그의 어깨를 살짝 짚었을 때였다.

"... ...지 마."

나는 멈칫하며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살짝 벌어진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방금 들은 건 잠꼬대인가? 내가 무엇을 들었는지 곱씹는 동안 그는 고개를 내쪽으로 툭 떨군다.

"...여기 있어... 은엽." 그는 숨을 잠깐 헐떡이고는, 이내 더욱 깊은 잠에 빠져든 듯 숨을 길게 내쉬었다.

방금 뭐였을까.

나는 쥐어짜이듯 뛰는 심장을 느끼며 뒤로 풀썩 주저앉았다. 세레비의 힘을 빌어 머나먼 과거에서 날아왔다는 이 사람은 지난 일주일간 기상천외한 언행으로 나를 곤혹스럽게 만들어 왔었다. 그리고 오늘도 이렇게... ...

마른세수를 하고 얼굴을 가린 손 사이로 심란한 한숨을 뱉었다. 금방 헤어질 사람에게 이렇게나 신경이 쓰이면 곤란해질텐데. 당신은 오늘 어떤 꿈을 꾸셨나요. 어떤 꿈이었기에 그리 우셨을까요. 나는 평생토록 꺼내지 못할 궁금증을 뱃속으로 밀어넣으며 운전대를 쥐었다. 그토록 성가셨던 졸음기는 찬바람 속에 떠난 이후로 결코 돌아오지 않았다.

"잘 잤어요, 매니저님?"

나는 쥐어짜이듯 꿀럭대는 심장을 느끼며 눈을 게슴하게 떴다. 마른 숨을 들이쉴 때마다 목구멍이 갈라지는 듯한 통증이 일었다. 침이라도 삼켜야 할텐데, 그마저도 잘 고이지 않아서 이제는 정말 한계에 다다랐음을 자각할 수 있었다. 나는 방금 들은 질문을 가만히 곱씹었다. 잘 잤나. 잘 잤을까. 글쎄... 잘 모르겠는걸. 나는 몽롱한 피로감에 다시 눈을 감았다. 언제 찾아왔는지 모를 수마는 단순히 눈을 감는다고 다시 찾아와주지 않았다. 나는 야속함을 느끼며 맞은편 허공에서 불쾌한 웃음을 흘리고 있는 팬텀을 바라보았다.

"어떤 꿈을 꿨어? 이젠 좀 알려주는 게 어때? 팬텀이 이렇게까지 약올라 하는 모습은 처음 보는데..."

어쩐지 만족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지금까지 알아낸 건 거의 없는 모양이구나. 내가 이 정도까지 버틸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꿈을..."

체감상 오랜 시간이 지난 끝에 건조한 목으로 말을 꺼내려니 기침이 어김없이 튀어나왔다. 염력으로 허공에 묶인 몸이 들썩였다.

"당신은... 꿈을 기억합니까."

기억하는 꿈도 없는데 어떻게 꿈으로 남의 기억을 엿보려고 하나.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가슴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덩달아 흘러나왔다. 나는 실장의 짜증스러운 눈길을 받으며 기침으로 웃음기를 끊었다. 저주의 후폭풍이 떠날 줄을 몰랐다.

"...사람... 잘못 보셨어요. 저한테서는 아무것도 알아내실 수 없을 겁니다."

아무것도. 나의 과거나 행적, 내가 쌓아 온 인연들, 그 아무것도 내어줄 수 없었다. 내가 그쪽 조직에서 어떤 정보를 탈취했는지, 어떤 뒷공작으로 일을 방해했는지도 알 수 없을 것이다. 설령 저 팬텀이 '꿈먹기'를 몇 번이나 거듭하더라도... 그러고보니.

"이젠 제가 물어봐도 될까요. 꿈먹기 기술을 몇 번이나 지시하셨습니까? 벌써 제... 생명력을 꽤 가져간 것 같은데."

실장의 입술이 조용히 말려올라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팔짱을 끼고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나를 응시했다.

"안 세어봐서 모르겠는걸. 당신이 이렇게까지 독하게 나올 거라고는 전혀 몰랐지 뭐야. 흠, 그동안 당신이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큼은 즐거웠나."

악취미... 소리없는 단어가 입술 위를 스쳤다. 나는 단 하나의 백열전구가 달린 천장을 올려다보며 실장과 팬텀을 외면했다. 그때 문득 떠오른 생각은, 이번의 잠입 임무를 배정받은 사람이 나여서 다행이라는 것. 이런 인간을 맨정신으로 대할 방법이 없으니 나라도 이렇게 그를 붙잡아둬야 했다. 그 뒤의 일은 다른 사람들에게 맡겨놓게 된 꼴이라, 이런 점은 유감이었다. 후회되는 부분이라면... 나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인사를 남기지 않았다는 점일까.

"아... 어쩔 수 없네. 그럼 꿈먹기는 여기서 끝."

의문이 고개를 붙잡고 밑으로 끌어내렸다. 실장은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끔찍한 수를 떠올릴 때 딱 저렇게 웃던데. 팬텀은 내게서 눈을 떼지 않고 탐욕스럽게 웃었다. 그러고보니 나를 이 팬텀의 먹잇감으로 던지겠다고 했었지. 그런데도 이상하게 두렵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는 무엇이 문제인걸까.

"당신이 잠든 사이에 팬텀의 기술배치를 조금 더 손봤어. '저주'를 다른 기술로 바꿨거든."

주인이 손짓하자 팬텀은 내게 가까이 다가섰다. 최면을 걸기 위해 마주보는 눈빛이 새빨갛게 번들거렸다. 머릿속이 둔감해져 무엇을 떠올리기가 힘들었던 나는 이어지는 실장의 말을 그저 무력하게 들었다.

"꿈을 기억할 수 없댔지? 그럼 영원히 기억하게 될 꿈을 선사해 줄게. 당신이 꾸는 악몽은 어떤 내용일까 궁금한데..."

실장의 목소리는 처음 들었던 때와 마찬가지로 갑작스럽게 흩어졌다.

악몽의 검은 소용돌이가 의식을 빨아들여 아득한 무저갱으로 잡아끈다. 아래로, 아래로 끊임없이 끌려내려가는 동안 후회심과 죄책감과 미련의 무게가 머릿속을 뭉근하게 짓누른다. 켜켜이 쌓아왔던 과오가 그물로 변해 의식을 옥죄었다. 그는 그리하여 흑암(黑暗)에 유폐되었다. 결코 끝나지 않을 악몽을 반복해서 꾸며 무의식 속을 헤매고, 그러는 동안 그의 자아는 심연에 가라앉아 두 번 다시 떠오르지 못했다. 자신의 생사마저 자각하지 못한 채로 고독에 시달리며 자신의 공포를 끝임없이 맞닥뜨리게 되었다.

소중한 대상을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적이 있었는지, 상실감에서 벗어나려 시도를 거듭했던 적이 있었는지, 최후까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쳤던 적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도망치고 도망친 끝에 결국 죽음의 덫에 걸려버린 한낱 미물이었다.

'당신은 누구지?'

까마득히 먼 옛날에 누군가가 그런 물음을 던졌던 것 같다.

그는 누구였을까? '나'는 어떻게 대답했을까? 어떤 관계였을까? 여러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무용(無用)이 되어 흩어졌다. 대답해줄 이가 아무도 없는 까닭이다.

태초부터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 ... ...

-... ...리안.

그리운 음성이 맴돈 것 같았다.

그러나 무엇을 의미했는지 알 수 없었다. 잘못 들은 것이라 치부하기엔 미련이 짙게 일었다.

'한 번만 다시.'

그는 염원을 했고, 기다렸다. 조바심이 사치가 되어버릴 정도의 시간이 흘렀으므로, 그는 무한히 기다릴 수 있었다. 이를 칭하는 단어가 따로 있었던 것 같다. '기대'라고 하던가.

-...눈을 떠, 리안.

그 음성이 이번에는 또렷하게 들려와, 그는 기꺼운 마음으로 그 의미를 분석해 보았다.

'눈을 뜨라니, 눈을 떠도 감은 것이나 다름없는데.'

생각을 하며 의문을 가지는 행위가 의식을 한 단계 일깨웠다. 머잖아 그는 '리안'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내 이름을 불러줬어. 너는...'

무(無)에서 자아를 인식하고 정체화하는 과정을 지나고 나면 타자를 인식하기 위해 눈을 떠야 했다. 벽력과 같은 깨달음을 얻은 리안이 목소리를 따라 '눈을 떴다.'

심연의 공간 속에서 보이는 것이라고는 어둠 이외에...

"은... 엽?"

리안은 무심코 그 이름을 불렀고, 지금껏 망각하고 있었던 전부를 순식간에 기억해냈다. 자기자신이 누구였는지부터 시작해 그간 지나온 여로와 사건사고, 각오와 다짐, 그리고 이곳까지 온 목적까지, 줄곧 머릿속에서 떠나보내지 않았던 것처럼. 리안은 몸을 일으키자마자 저만치 떨어진 곳에 누워있는 소년을 발견하고 정신없이 달려갔다. 자신의 이름을 부른 사람이 누구였을지 의문을 갖는 것도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토록 찾아해맸던 대상을 드디어 만났다는 환희를 느낄 새도 없었다.

"은엽, 눈을 떠. 은엽!"

심연 속에서 영혼이 닳고 닳은 끝에 이런 모습이 되었다. 리안은 그가 어린 아이의 외형을 취하고 있는 이유를 본능적으로 깨닫고 일전의 목소리처럼 은엽을 깨우려 애썼다. '어릴 적의 모습은 이렇구나'따위의 감상에 젖을 여유도 없었다. 여기까지 와서 그를 깨우지 못하면 모든 일이 물거품이 되는 셈이었다. 몸을 흔들어보거나 귀에 대고 목소리를 높여봐도 이렇다 할 소용이 없자, 리안은 다른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너무 추워서 눈을 못 뜨는건가, 그렇지만 나는 아직 멀쩡한데. 레인저로 활동하다 보면 인명구조에 망설임은 없어야 했기에, 리안은 더이상 따지지 않기로 하고 생각을 행동으로 옮겼다. 즉, 그를 일으켜앉히고 온몸으로 감싸안았다.

"일어나, 은엽. 내가 왔어. 일어나야 해."

품속에서 작고 차가운 몸이 축 늘어진다. 리안은 기억 속에서 안아들었던 루카리오의 시신을 떠올려내고 소스라치며 은엽을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제발, 응? 은엽, 눈을 떠봐. 내가 여기 왔잖아..."

너무 늦어버렸다는 낭패감은 금방 자책으로 뒤바뀌었다. '죽지는 않았으나 산 것도 아니다.' 정체불명의 조력자가 말했던 바는 이런 상황이었을까. 시간을 너무 지체했다. 당신은 늦기 전에 나를 찾아내어 목숨을 구해줬는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당신에게 진 은혜를 아직 갚지도 못했는데, 당신을 이대로 포기하기 싫은데...

리안은 그를 끌어안은 채로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되짚어보기 시작했다. 악몽에 휩쓸려 오랫동안 정신을 잃어서, 악몽을 하나하나 살펴보고 감정을 소진하는 데 시간을 소모해서, 심상에 접근할 때 뜸을 들여서, 병원을 너무 늦게 찾아와서, 지하연구실에서 그를 구출하기까지 시간을 지리하게 낭비해서...

'오만했다.'

리안은 진한 후회에 몸서리치면서도 끌어안은 이를 놓지 못했다. "미안해..." 하염없이 눈물을 쏟으며 의미없는 사과의 말을 흘리고 만다.

'시안, 이번엔 네가 틀렸어. 원하는 걸 거머쥐지도 못했는데 내가 달리 무엇을 할 수 있겠어.'

끝내 체념의 단계에 접어들어 그의 어깨 너머로 고개를 떨어트리고 말았다.

"...누구... ..."

화들짝 놀라 떠오르는 시야 안으로 짙푸른 빛깔이 희미하게 들어섰다. 리안은 자신을 공허하게 응시하는 눈을 바라보며 나지막히 탄성을 흘렸다.

"은엽, 나야, 리안. 기억 나?"

체념을 밀어내고 쓰나미처럼 쏟아진 환희가 언어회로를 마구 뒤섞어놓았다. '무엇을 기억하고 있나, 나를 기억하나, 움직일 수는 있나'따위 질문을 던져봐도 망각에 함빡 적셔진 눈동자와 얼굴표정은 혼란에서 벗어날 줄을 모르는 채로 하염없이 질문자를 응시했다. 리안은 기억을 떠올리도록 하는 일이 역시 쉽지 않을 것임을 알고서 안도와 염려 섞인 한숨을 쉬었다.

"이제 밖으로 나가야지. 그동안 기억을 천천히 떠올려 봐. 아직 걸을 수 없다면 내가 도와줄게..."

지금껏 맥없이 반쯤 감겼던 눈이 '나가자'는 말을 들은 순간 휘둥그렇게 뜨였다. 리안은 그 눈동자 속에서 극한의 두려움을 읽어내고 숨을 멈췄다.

"시, 싫, ..."

은엽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치는 바람에 리안은 그를 도리없이 놓아주고 말았다. 그리고는 소년이 잔뜩 겁먹은 얼굴로 제게서 주춤주춤 물러나는 모습을 보며 또다시, 소리없는 한숨을 쉬었다. 정말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 저... 누나."

"그냥... 리안 씨라고 불러. 아니면 그냥 리안이라고 불러도 좋고..."

자신이 아무리 수백년을 앞섰던 인물이라지만, 역시 이 사람에게서 '누나'라는 소리를 듣기에는 좀 그랬다. 리안이 거북해하거나 말거나 은엽은 저 혼자서 한참을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는 이내 힘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 리안... 씨. 그, 죄송해요."

그러니까, 별안간 구조자에게 소리를 지르고 발버둥치며 거친 반응을 보인 데 대한 사과였을 것이다. 리안은 '그걸 내내 신경쓰고 있었구나'싶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옛날부터 조숙했구나, 너."

"네?"

은엽이 의아한 듯 눈을 둥글게 뜨자 리안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냐. 신경쓰지마. 오히려 아무것도 모르는 널 억지로 끌고 가려 한 내 잘못이지."

이제 그들은 약간의 거리를 두고 나란히 웅크려앉은 자세로 서로의 손만을 잡고 있었다. 앞서 낯선 인물의 품에서 억지로 벗어났던 은엽은 상대방이 한걸음 물러나자 오히려 허겁지겁 달려들었었다. '혼자 있기도 싫다'고 호소하는 소년을 한참 달래주고 나서야 겨우 제대로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고, 리안이 '날 붙잡고 싶어하니 손을 잡게 해주겠다'고 제안해서 지금의 상황에 이른 것이다. 리안은 자신의 손을 야무지게 꼭 쥐는 손가락들을 느끼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곳에서 홀로 영겁의 시간을 체감했을테니 외로움을 극심하게 타는 것도 당연했다.

"그럼... 네가 좋아하는 주제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너는 무엇을 좋아하니?"

은엽의 기분을 낫게 하려면 무엇이든 시도해야 했으므로, 리안은 머리에 떠오르는대로 궁금증을 꺼내보았다. 서먹함을 깰때 단골로 나오는 질문이었던가. 은엽은 질문을 듣자 나름대로 골똘히 생각에 잠기는 듯 했다. 그와 만나고 은근히 자주 보이는 버릇이다.

"좋아하는 거... 사람도 되나요?"

"물론이지."

"전... 제 동생이 좋아요. 아니, 동생을 사랑해요!"

소년이 사랑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듯이 당당하게 힘주어 말했다. 리안은 언뜻 흐뭇한 심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질문을 잘만 활용한다면 기억이 돌아오는지 여부 확인도 겸사겸사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리안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연이어 묻는다.

"동생이 있어?"

"네, 이름은 하운이라고 해요. 라하운... 예쁜 이름이죠?"

은엽은 금세 기운을 회복하고는 자신의 동생에 대한 자랑을 시작했다. 리안은 어쩐지 데자뷔를 느끼며, 언젠가 들었던 것과 비슷한 내용을 열심히 들어주었다. '아직 어린 나이인데도 야무지고 똑부러졌고요, 어떨 때는 저보다도 어른스러워요. 배틀도 좋아하고 노래하기도 좋아하고... 좋아하는 게 많아서 나중에 크면 뭘 할지 고민이 된대요. 그런데 저는 하운이가 뭐든 해도 잘할 것 같다고 생각해요. ....아! 나쁜짓은 빼고요. 우리 하운이 엄청 착하다니까요!' 그렇게 열심히 떠들던 은엽은 끝에 가서 기운을 다시 잃었다.

"동생이... 혼자 있을텐데, 이곳을 빠져나갈 수 없어요. 가장 중요한 순간에 동생 옆에 있어주지 못한다면 어쩌죠?"

리안은 아래로 쏠리는 은엽의 정수리를 가만히 내려다보고는 시선을 앞으로 향했다.

"누군가가 널 애타게 기다리면... 너는 반드시 그에게로 가게 돼. 넌 하운이를 다시 만날 수 있을거야."

은엽의 손이 안쪽에서 꿈지럭대는 듯하다가 멎었다.

"... ...리안 씨도 동생이 있나요?"

"응. 쌍둥이가 있어."

"동생분을 사랑하시나요?"

"응."

"동생분을 만나러 가시겠죠?"

"...네가 나갈 때까지는 기다릴 수 있어. 내 동생, 시안은...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거든."

어린 아이의 모습을 한 은엽 앞에서 이미 고인이라고 직접적으로 밝힐 수는 없었다. 그런 식으로 에둘러 말한 리안은 문득 제가 못난 말을 했다고 여기면서 옅은 웃음을 흘렸다.

"...부러워요... 저도 꼭 돌아가고 싶네요."

은엽은 아직 기억을 완전히 되찾지 못한 듯한 반응을 주었다. 리안은 조용히 긍정하고는 다른 질문을 골랐다.

"파트너 포켓몬은 있니? 네 나이쯤 되면 포켓몬을 데리고 여행을 나간다던데."

매끄럽게 이어진 질문에 눈을 데구르르 굴리던 소년은 고개를 갸웃했다.

"으음... 파트너라면... 어떤 포켓몬을 뜻하는 건가요?"

"말하자면 영혼의 단짝이라고나 할까. 네가 가장 의지하고 신뢰하는 아이 말야."

"아, 그렇다면... ..."

은엽이 내세우는 침묵이 묘하게 길었다.

"...서리... 루카리오를 제 파트너라고 할 수 있겠네요."

"서리?"

"서리 위를 지나는 바람처럼 섬세하고 겁이 많은 아이라서 이름을 그렇게 지어줬어요."

일견 차분한 어조로 설명하던 그는 어딘가 아릿해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리안의 손을 붙잡고 있던 손가락들이 느슨하게 풀렸다.

"하지만 위험하거나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는 어김없이 힘을 빌려주곤 했습니다. 제가 힘든 일을 겪을 때면 의지가 되어주기도 했죠. 배려심마저 깊은 아이였습니다."

"...과거형이구나."

"...네."

어느덧 기억을 되찾은 소년의 손은 어느샌가 멀리 떨어졌다. 리안은 심연의 차가운 기온을 손등으로 고스란히 느껴보며 중얼거렸다.

"소소리도 널 기다리고 있을텐데."

계산성 없는 순수한 질문이 은엽의 말문을 잠시 막히게 한 모양이었다. 엷은 한숨소리가 일었던 것 같다.

"소소리에게는... 항상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절 단순한 '트레이너'가 아닌 '어버이'로 여기고 따라주는데도... 제가 늘 실망을 안겨줬거든요. 이번에는 결국... 이렇게 되어버렸네요."

그 말을 듣자마자 리안은 고개를 홱 돌리고 소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갑작스러운 눈맞춤이었을 텐데도 소년은 놀라는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리안은 슬픈 빛을 띤 눈동자를 똑바로 들여다보며 힘있게 말했다.

"미안하게 생각한다면 더 늦기 전에 용서를 구해야 한다고 생각해. 그게 어버이의 의무 중 하나니까."

주인의 목숨이 위험한 상태임을 알았어도 몬스터볼 속에서 빠져나갈 수 없어 슬피 울던 리오르는 이후의 현실을 어찌 받아들였을까. 주인을 사지에 버려두고 도망치라는 명령을 받았던 이어롭과 플라이곤은 지금쯤 어떤 마음으로 현실을 바라보고 있을까. 리안은 서서히 흔들리는 눈빛을 응시하며 나직이 읊조렸다.

"...소소리뿐만 아니라 네 동생한테도. 너를 기다리는 다른 모두한테도. 용서를 구할 시기를 놓치면 기회는 두번다시 오지 않아. 미루면 안 돼."

관계에 깃든 후회나 미련은 시간이 흐를수록 고착되어 떨어지지 않는다. 그렇게 늘어난 무게는 남은 생에 유해한 짐이 되어 괴로움이 배가될 것임을 리안은 직접 겪어 알고 있었다. 은엽은 제눈에 떠오르는 감정을 숨기듯 고개를 돌려 가만히 침묵을 지켰다. 그 자신도 알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나한테는... 뭔가 할 말 없어?"

그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거의 충동적인 물음이 튀어나갔다. 타인의 자기평가를 묻는 질문은 자칫 독이 될 수도 있었으나, 그럼에도 리안은 확인해보고 싶었던 마음이 큰 나머지 이를 묻고 말았다. 나는 당신에게 있어서 그저 대리만족을 채우기 위한 대상에 지나지 않았는지, 단순히 신경쓰이는 피보호자'였던' 인물인지.

이번에도 침묵이 길었다.

"......미안합니다, 리안 씨."

그것을 끝으로 은엽은 더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리안은 한참을 무표정하게 있다가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이렇게나 멀어진 거리에서 무엇을 캐물으려 한들,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으리라 깨닫고 이만 만족하기로 했다. '이런 감정을 만족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리안은 자리에서 먼저 천천히 일어나 섰다. "...그거면 됐어. 이제 돌아가자."

은엽은 여전히 요지부동의 자세로 고개를 흔든다.

"전... 돌아가지 못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해?"

"전 이미 죽었으니까요. 어차피 돌아가려 한들 다시 악몽에 짓눌릴테죠."

시간차를 두고 빠르게 오간 문장들 너머로 당혹스러운 여운이 남았다. 리안은 그제서야 현실의 은엽이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이유를 한가지 더 깨달았다. 자신의 죽음을 굳게 확신하고 있으니 스스로 깨어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질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리안은 마지막 악몽을 떠올리자마자 터져나오려는 장탄식을 아슬아슬하게 밀어넣으며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넌 아직 살아있어."

"예?"

이번에는 은엽의 음성에 당혹이 깃들었다. 리안이 삼킨 장탄식은 커다란 심호흡으로 변모되었다.

"어쨌든 넌 아직 살아있어. 그러니까 이렇게 나와 대화하고 있는 것 아니겠어?"

거짓된 믿음으로 점철된 확신은 돌연한 충격을 받고 흔들리는 듯했지만, 방어기제로써 자기부정을 내놓는 것이다.

"돌아가더라도... 이제는 자신이 없습니다. 저는 소중한 것들을 지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상처까지 남겨버렸으니까요."

은엽이 사용하는 말씨와 달리 외모는 아직 소년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다행스러웠다. '성인의 모습이었다면 꼴불견같은 소리 말라고 왈칵 성을 냈을텐데.' 리안은 지금 나오는 한숨이 이곳에서 쉬는 마지막 한숨이기를 간절히 바라며 차분히 응했다.

"자신이 없는 게 당연해. 넌 그동안 혼자서 많은 걸 떠맡고 홀로 싸워왔으니까. 그런데 넌 천하무적이 아니잖아. 주변에 도움을 청하고, 함께 싸워야 승산이 있는 거지. 홀로 강하려 하지 말고, 다함께 강해지자고. 그래야 소중한 걸 제대로 지킬 수 있을테니까 말야."

이것은 리안이 두 번의 기적과 한 번의 기회를 걸쳐 맞이한 삶으로부터 배운 깨달음이었다. 그 말을 듣는 이의 눈에 아주 처음으로 빛이 들었던가. 리안은 그 빛이 머금은 감정을 가만히 헤아려보며 손을 다시 내밀었다.

"...가자, 은엽. 네 악몽은 모두 끝났어."

여명이 떠오르고, 영원히 빛이 들지 않을 것 같았던 심연에도 빛이 들기 시작했다. 주위를 잠식했던 어둠이 하얗게 소멸하여 눈처럼, 별가루처럼 쏟아져내렸다. 은엽은 리안이 내민 손을 천천히 맞잡으며 혼잣말을 하듯이 중얼거렸다.

"...이건... 우리의 대화는... 역시 꿈일까요."

긴 공백 끝에 다시 닿게 된 온기가 마냥 따스했다. 리안은 고요히 미소했다.

"네가 편한대로 생각해도 돼. 어차피 꿈은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또 다른 현실일 뿐이니까."


정말 정신없는 하루였다.

'그 일' 이후 어떻게 병원을 빠져나왔는지도 제대로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정신없었다. 면회에 주어진 제한시간을 넘기지 않았다는 사실만 간신히 기억나고, 도중에 마주친 사람이 있었는지, 자신이 다른 누군가와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등등 자잘한 사건은 기억의 베일 너머로 흐릿하게 가려졌다. 병원을 빠져나온 직후 레인저 기지로 돌아와서는 한참 정신을 잃어서 그사이 자신과 시오레의 동반 승진이 결정된 일이나 니스 요원으로부터 문자메시지가 날아온 것도 까맣게 몰랐다.

해가 완전히 넘어간 후 잠에서 깨어난 리안은 통신기기에 남은 문자메시지를 확인하고 나서야 자신이 병원을 빠져나오기 직전에 니스와 연락처를 교환했다는 사실을 떠올려낼 수 있었다. 걱정을 쏟아내며 제 옆으로 몰려드는 엔트리 포켓몬들을 달래주느라 잠시 정신이 팔렸던 리안은 뒤늦게나마 조로아크의 기분이 가라앉은 상태였음을 알아차렸다.

그렇게 밤이 늦은 시각, 리안과 그의 파트너는 기숙사동 옥상에서 나란히 바람을 맞으며 도시 야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는데도 조로아크의 침묵이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아 리안은 예고없이 운을 터뜨렸다.

"아인스."

-왜 부르나.

"...그때 그 목소리, 너였지."

-그때라니, 언제.

"내가 그 사람 심상에 빠져 있을 때... 위기를 잠깐 겪었던 적이 있었거든."

-나한테는 매 순간이 위기로 보였는데.

줄곧 밋밋한 어조로 짤막한 답변을 뱉기만 하던 조로아크는 이윽고 한차례 심호흡을 했다. 마치 속에 품고 있었던 것을 한꺼번에 터뜨리기 전에 마음을 가다듬는 듯한 모습이었다.

-아주 미약하게나마 느껴지던 네 파동이 어느순간 완전히 멈춘 때가 있었다. 너는 그때 숨조차 쉬지 않았어. 거의... ...죽을 뻔했지. 나는 내 주인의 죽음을 또다시 겪고 싶지 않아. 그래서 내 파동을 네게 보탰다. 이 시대의 인간 언어로 심폐소생술이라고 하던가... 그와 비슷한 걸 시도했지. 그로 인해 네가 그 인간의 의식을 일으키는 데 실패했더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나한테는 네가 훨씬 더 소중하니까.

파트너의 시점을 간과한 대가는 컸다. 리안은 파트너가 차곡차곡 쌓아둔 감정들불안감, 두려움, 당황, 안타까움, 슬픔─을 고스란히 전달받으며 어마어마한 죄책감을 느껴야 했다. '내가 너무 무신경하고 이기적으로 굴었다.' 리안은 악몽 속에서 떠올린 자각을 반추하며 조로아크를 끌어안았다.

"...내가 미안해, 아인스. 그리고 정말 고마워. 네가 세상에서 최고야."

거칠고 부들거리는 검정색 털 속에 얼굴을 한껏 묻고 중얼거리자, 조로아크는 나직이 숨을 내쉬고는 리안의 등을 가만 토닥여주었다.

-...알면 됐다. 내일도 그 인간을 만나러 갈 건가?

털 속으로 느껴지는 파트너의 체온을 조용히 만끽하던 리안은 그 말을 듣고 얼굴을 빼냈다. 병원을 나선지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선배님의 의식이 돌아왔다'는 니스의 문자메시지가 흘러들어왔지만, 반가움이나 기쁨보다는 조금 다른 종류의 정서를 맛본 리안은 붕 뜬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글쎄... ... 잘 모르겠어."

리안이 눈을 내리깔고 그리 중얼거리자 조로아크는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안 갈 수도 있다는 말로 들리는걸. 나는 네가 그 인간을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그렇게... 티가 났어?"

주인의 눈이 금세 커다래지는 모습을 본 조로아크는 황망스레 입을 벌렸다. 이걸 말해주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이 망설이던 파트너는 결국 리안으로서는 듣기 힘겨운 문장을 내놓았다.

-...네 주변에서는 다 눈치채고 있을거다. 하다못해 그 어둠대신의 파트너 요원도 대충 알고 있는 모양이더라.

리안의 얼굴이 조로아크의 가슴털 밑으로 도로 가라앉았다. 체념의 도피였다. 리안은 요괴여우 포켓몬의 품속에서 헤어나올 줄을 모르며 억눌린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말 그대로 모르겠어. 내가 그 사람을 정말 좋아한다 치자. 그럼 그 사람은? 내가... 싫다거나 성가시다고 여길 수도 있잖아. 뭐랄까... 얼굴을 볼 자신이 없어. 허락없이 기억을 훔쳐본 것도 있고..."

-...목숨을 구해준 은인을 홀대하는 게 인간의 예법이었나?

조로아크는 황당스러워 하면서도 얼핏 못마땅해하는 울음소리를 내고는, 주인의 어깨를 붙잡고 제게서 떼어냈다. 리안은 살짝 충혈된 눈으로 파트너 포켓몬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불확실성에 얽매이지 말고 네 눈으로, 네 감지력으로 직접 확인해 봐라. 성급하게 굴지 않고 시간을 들여서 말이다.

리안은 조곤조곤한 어조로 자신을 타일러 오는 파트너를 하염없이 바라보기만 하다, 이윽고 배시시 웃음을 흘렸다.

"...아인스가 그 사람을 싫어하는 줄 알았어."

조로아크는 시큰둥해진 표정으로 멀리 떨어진 도시정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딱히. 그는 네게 은인이니 내게도 은인이다. 하지만 내 주인은 아니지. 우선순위가 명확할 뿐이다.

리안은 그를 따라서 시선을 옮겼다. 어스름이 완전히 내려앉은 하늘은 군청의 빛깔로 물들어 근교지 일대를 뒤덮고 있었다. 격동하는 하루일정 때문에 무겁게 가라앉은 머릿속을 어떻게 비워야하는지, 막연한 심정으로 먼 지점을 바라보기만 하는 리안에게 불현듯 파트너의 음성이 다가왔다.

-나는 네가 행복하기만 하면 돼. 그게 내 행복과 연결된다.

그리고는 초록색 시선이 이쪽으로 와 닿는다. 리안은 그 다감한 눈빛 속에서 애정을 읽고 문득 북받치는 감정을 느꼈다.

-리안, 네 행복은 뭐냐.

이어진 질문에 쉬이 대답할 수 없을 정도로 말문이 닫혀버렸다.

"내 행복은... ..."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