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주
뱀파이어x뱀파이어헌터x성직자 AU
영원한 것은 없다. 다만 이어질 뿐. 어쩌면 모든 것은 예속의 결과이다. 남자는 좁은 관이 아닌 푹신한 침대 위에서 눈을 떴다. 선홍빛 아래 들어오는 것은 없었다. 사위가 어둡고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방 안에서, 남자는 곧 제게 들려와야할 소리가 없는 것을 눈치챈다. 손등으로 제 눈을 가리고 언제나와 같은 피냄새가 나지 않아 안심한다. 다만 여기서 의문이 있다.
그래.. 다 알겠고 좋은데. 나 왜 깼냐? 헛웃음이 나오는 것을 구태여 참지 않았다. 제가 몸을 일으키는 것은 언제나 넌덜머리가 날 정도로 제게 끔찍한─그래, 끔찍히 아끼는 그것 말이다. 물론 다른 쪽의 의미로도 루카스에겐 통용되는 단어가 맞았다.─ 아드리안 아스카니엔이 챙겨주는 '식사' 뿐이었으므로.
하나 오늘은 그의 다정한─진짜인지는 필히 의문이나─배려 없이 일어났으니. 분명 이유가 있음에도 아직 깨닫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허기가 지진 않았다. 정확히는 입맛이 없었다. 오늘이 며칠이고, 몇 년이며, 잠들기 전부터 어느정도의 시간이 지났는지는 의미가 없었다. 잠들기 전 마지막 기억은 선명하다. 그는 '아직' 깨어날 이유가 없다.
서서히 감각이 돌아온다. 눈으로 보지 않아도 저택의 정보가 들어온다. 이곳이 온전한 제 영역은 아니었으나 현재 아드리안 아스카니엔이 보이지 않으니 일대를 떠도는 눈에 간섭하는 것 정도는 가능했다. 바람이 스치는 것을 느끼며 루카스 아스카니엔은 눈을 뜬다. 귀찮은 일에 휘말릴 것이다. 죽은 척 할까.. 말도 안되는 생각을 접고 일어선다. 손님을 맞아야 했다.
"──검문 나왔습니다~!"
아주 우렁차다. 루카스 아스카니엔은 조금은 황당한 얼굴로 정문을 열고 들어온 자를 응시한다.─이걸 열었다고 할 수 있으면의 이야기다만 그들은 저 큰 문을 '차고' 들어왔다. 정확히는 백발에 가까운 백금발의 인간이. 이후 금발의 인간 또한 따라 들어오며 한숨을 쉬었다.─그래, 누가 사고치는 쪽인지는 감이 잡힌다.
능청스럽게 웃음을 흘리며 들어온 인간은 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총구를 겨눴으나 쏘진 않았다. 그에 제 눈썹이 휙 올라가는 것은 당연했다. 인내심이 좋은 건지 걸리는 게 있던건지. ─차림새를 보아선 뱀파이어 헌터와 같았는데, 제가 보던 복식과는 차이가 있는 것을 보면 퍽 시간이 흐른 것은 분명했다.─ 백금발의 인간은 으음~? 같은 영문모를 소리를 흘리더니 뒷목을 문지르고 있는 인간 쪽으로 입을 열었다.
"순혈이라고 하지 않았어? 약한 건 아니지만~, 위협적이다 라고 느껴질 정도는 아닌데?"
"순혈이라는 걸 아는데 이렇게 들어온거군."
내 말이. 자신감 하나는 끝내준다. 최소 몇년만에 만난 인간 중에 가장 황당한 놈과 만났다는 것에 자조했다. 한 치 앞을 예상할 수가 없네. 하지만 꽤 정확한 눈이다. 제가 순혈이라는 것은 눈치 못했어도 뱀파이어라는 것은 알았으며 어느정도의 수준인지까지 파악했다. 다만 그럼에도 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어찌되었던 간에 제가 뱀파이어라는 건 변함이 없다. 그렇다면 인간들은 저를 적대함에 마땅한 '이유' 정도는 성립한다. 하물며, 뱀파이어 헌터라면. 그렇다면 세울 수 있는 가설은 두 가지.
첫째, 실력에 어지간히 자신이 있는 쪽. 무턱대고 쏘지 않는다고 해서 무른 것은 아니다. 아까부터 금발 쪽의 시선이 제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대치상황을 만들어내고 있으며 자유롭되 경계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기습적인 면모에서는 실패했으니─애초에 기습할 생각이 없었던 것 같긴 하다만─ 이 얼척없는 대화들이 제 방심을 끌어내기 위한 화법일 경우도 고려하지 않을 순 없다. 이 가설은 일부 성립한다. 제 앞에 있는 것들이 어중이 떠중이가 아니라는 점은 굳이 맞붙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둘째,
"게다가 생김새도 듣던 거랑은 다르잖아! 금발에 푸른 눈이라며? 이쪽은 검은 머리에.. 마젠타 색인데? 뭐, 생긴 건 이쪽이 더 뱀파이어 같긴 하네!"
"확실히, 그건 그렇지."
목표가 내가 아닌 경우. 루카스 아스카니엔은 느리게 침음을 삼킨다. 하필 자리를 비운 차에 이리 되었으니 퍽 곤란했다. 자는 동안의 일은 뇌에 남지 않는다. 하물며 다른 인격체가 저지른 일을 알 수 있을리가. 그저 뱀파이어이기 때문에 사냥당한다는 건 익숙한 일이었으나... 루카스 아스카니엔은 고개를 기울였다가 입을 연다.
"그건 제 형님입니다만.."
"아~ 형님?"
대치의 끝이었다. 손 끝에 튀는 마력이 충돌하고 긁힌 쇳소리가 기분나쁘게 홀을 울린다. 일어나자마자 하는 운동이 과격하다. 보통이 아닐 것을 짐작했지만 성가심의 수준을 넘어섰다.
"그럼 형님은 어디계신대? 동생 놔두고 튄 거야?"
"엘리아스, 말투."
"이젠 뱀파이어 앞에서까지 말투 지적을 받아야해?!"
잘들 논다.. 대답할 여력이 없는 건 아니다만 굳이 정보를 쥐여줄 필요는 없지. 머리 위로 날아드는 검날을 피하면 복부쪽으로 마법이 날라든다. 땅을 박차 물러나 거리를 벌리고 임시방편으로 집어든 촛대를 까딱이다가 땅에 버리자 휙, 눈썹이 올라간 두 인간이 보인다.
"귀족들인 것 같은데. 왜 뱀파이어 사냥에 직접 나서지?"
"특이한가? 그래 보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생사여탈을 남에 손에 쥐여주고 싶지 않은데에 귀족이고 평민이고의 구분이 필요하던가? 그보다.."
생사여탈이라.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금 거리가 좁혀진다. 아까도 생각했지만 쓸데없이 빠르다. 끝나면 집안 꼴이 말이 아니겠군. 사실 이미 반쯤 무너져도 할 말이 없다. 계산은 마쳤다. 덩쿨이 날아든다. 아, 숲. 성가신 능력을 가지고 있다.
"아까부터 도망치기만 하고 반격이 없는데. 뭐하자는거지?"
"..."
"노코멘트?"
샐쭉 기울어진 눈웃음이 보인다. 제가 그렇게 만들고 있다는 생각은 그에게 없는 듯 했다. 손아귀에서 단검을 돌려 역수로 잡으면 사선으로 공격이 날아든다. 다시금 거리를 벌려 난간에 발을 걸친다. 이번에, 그는 쫓아오지 않았다. 기묘한 아이컨택이 이어졌다.
"아드리안 아스카니엔은 어딨지?"
모른다. 그놈이 어디갔는지 내 알바인가. 알았으면 당장 넘기고 다시 자러갔을 거다. 나는 침묵했다.
"몰라? 흠, 이거 곤란한걸. 우리 목표는 아드리안 아스카니엔인데.."
"..."
아까부터 드는 이 위화감을 아마 상대도 느꼈을 터다. 백금발의 남자가 제게 한 번 거뒀던 총을 겨누며 웃는다.
"그건 그렇고, 왜 공격을 안 할까? 응?"
자, 이제 악당은 어느쪽이지. 몇백년동안 잠자고 먹기만 반복한 나. 갑자기 남의 집에 쳐들어와서 대문 부수고 1층 홀을 난장판으로 만든 인간.
"공격,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거잖아."
정확하다. 입꼬리가 비틀어 올라갈 뻔 한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그보다 아까부터 이쪽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는 금발 쪽도 부담스럽다. 눈에 힘이 있었다면 뚫렸을거다.
"나랑 그렇게 술래잡기가 하고싶어? 술래가 둘인 건 룰 위반이라 좀 그런데~."
"룰 위반이 무슨 상관인데.."
"이런, 낭만도 모르는 친구 같으니. 당연히 양심의 문제지!"
"...하.."
다시금 대치상황이다. 그들은 제게 함부로 다가오지 않았고 함부로 마법을 쏘지도 않았다. 무슨 꿍꿍이가 있길래 이러는 건가 싶은 마음도 존재하겠지만 기본적으로 대화를 하려든다. 이는 그들이 나─뱀파이어 또한 인격체로 본다는 뜻이다.
"대화 좀 할까요."
금발쪽 얼굴이 구겨지는 건 무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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