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루카] Flug oder Sturz?
추락 혹은 비상?
"지금은 대추야자 씨가 싹트는 아름다운 시절! 추락하는 이마다 날개가 달렸네요. (중략) 우리는 자러 가야 해요. 사랑하는 이여, 놀이는 끝났어요. "
-잉게보르크 바하만,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
https://www.youtube.com/watch?v=pmK238ZZex4&t=1207s
애정하는 가경자를 위한 생일 기념 연성입니다. 언제나처럼 적폐 날조와 함께한다는 점 유의해 주세요. 이 글의 모티브가 된 노래는 Gang of Youths 의 "Achilles Come Down"입니다. 이 글을 다 읽으신 후에 한번 들어보시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감사합니다. 과몰입하시려면 위의 링크 노래 틀고 들어주세요.
***주의!! 이 연성은 다소 원작과는 방향이 다른 내용입니다. 만약 그날 광장에서 나르케가 레오보다 먼저 왔다면? 이라는 가정을 담고 있습니다. 원작과 방향이 매우 다릅니다. 작가의 망상을 기반으로 한 적폐 날조이니 주의하고 감상해 주세요.***
추락하는 모든 것에는 날개가 있다.
지상의 모든 존재들에게 공평하게 작용하는 중력은 그들의 두 발이 지상에 붙어 있도록 그들을 땅으로 끌어내린다. 전통적으로 하늘은 인간의 손이 닿을 수 없는 신의 영역이기에, 인간은 위로 날아오르기를 항상 욕망하면서도 높이 비상할 방법을 찾지 못해 그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며 어떠한 영적인 존재를 갈망해 왔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게 신은 직접 두 발로 내려와 지상으로 강림하셨다. 그는 드높은 구름을 밟고 거친 흙바닥에 맨발로 서서 수십 만 명의 백성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두 눈을 감으셨다. 가장 고귀한 자가 가장 낮을 자들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며 스스로 이마를 지상에 가져다 대는 그 모습은 가히 신성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인간들이 여태껏 형상화해 왔던 초월적 존재의 근본적인 목적을 보여주는 아름답고도 인간적인 행위였다.
거대한 영적인 존재에 자신의 존재를 의탁하는 동시에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부각하는, 그런 의도적인 신화는 참으로 그럴듯하기에 아름답다. 하지만 그것이 실제로 한 주체적인 인간에 씌워지는 순간, 그것은 그 자체로 비극이 되어 버린다. 그 사람이 겪어 왔던 수많은 고난들은 성인이 되기 위한 필연적인 시험으로 정당화되고, 그가 체념하여 포기하는 그 절망적인 결말은 종교적 프레임에 갇혀 정당화되어 버린다. 하나의 인간이 운명이라는 거대한 늪에 잠겨 죽어가는데도, 아무도 도와주지 않고 박수만 치며 기도하는 꼴이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참으로 덧없다고, 나르케 파르네세는 문득 생각했다.
그는 넓은 광장의 가장자리에 서서, 수백명의 인파 사이를 들여다보았다. 이곳에 루카스가 있었다. 나르케는 레오나르드처럼 그와 코어의 감각을 공유한다거나 할 수는 없었지만, 그런데도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섬찟한 감각이 그의 목덜미를 서늘하게 했다. 불안함에 쿵쿵거리는 심장 소리가 귓가에서 마구 울려대는 것을 무시하며, 그는 계속하여 몰려드는 사람들을 뚫고 광장 한가운데로 들어섰다.
그곳에, 연설용으로 놓인 제단에 그가 서 있었다. 흰색 마력 가면을 쓰고 머리를 금발로 바꾼, 니콜라우스 경의 모습인 루카스 아스카니엔이 말이다. 가면 때문에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두 손으로 교황청 스태프를 잡은 채로 비틀거리며 제단의 난간에 기대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넘어져 인파 사이에 깔리는 것이 아닐까 싶어, 나르케는 다급하게 제단 앞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마침내 제단 앞에 도달한 그는 무언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하고도 익숙한 감각을 느꼈다. 한마디 말도 없이 서 있는 친구에게서 그는 교황청의 세례 의식에서 흘러나오는 신력의 기운을 감지했다. 고위 성직자들이 신에게 자신을 바치며 눈을 감고 기도할 때 생성되는 그런 기운이 지금 니콜라우스 에른스트에게서 나타나고 있었다.
잠시 비틀거리다 균형을 잡은 니콜라우스는 고개를 지상을 향해 숙였다. 그리고는 바닥에 찍은 스태프를 잡고 천천히 두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그의 두 손에서 신력이 스며 나와 교황청 스태프를 부드럽게 감싸며 순백의 빛을 내뿜었다. 금색 열쇠와 비둘기들이 짤랑거리며 흰색 빛무리 사이에서 반짝였고, 니콜라우스 경의 검은 수단과 붉은 파시아가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며 점점 지상에 가까워졌다.
망명 높은 추기경의 거룩한 모습에 시민들은 환호하며 더욱 가까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광적인 눈동자로 금발의 신인류에게 손을 뻗으며 그에게 닿고자 하였다. 알아들을 수 없는 목소리로 성경 구절을 중얼중얼 외우며, 그들은 한없이 낮은 곳으로 추락하는 자의 옷깃 하나라도 잡으려 갈망했다. 무아지경에 빠진 가엾은 고행자는 표식을 바라는 수십 명의 카인에게 자비를 내리며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그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며 무지한 자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바라보았다. 불투명한 가면 너머로, 초탈한 물빛 눈동자가 무언가에 홀린 듯이 크게 뜨여 자신을 끌어당기는 낮은 자들의 면상을 하나하나 무거운 전두엽에 새겼다.
그들은 무지하다. 무지하기에 악하다. 고대 신의 땅에서 친동생인 아벨을 죽인 카인의 이마에 새겨진 피의 표식은 오늘날 이 자리에서 재현된다. 영혼의 본질을 위해 투쟁하던 인간은 운명이라는 거대한 바위에 묶여 돌산 아래로 굴러떨어진다. 수없이 바위를 밀어 올린 그였지만, 유한한 인간의 정신으로 언제까지나 시련을 견딜 수는 없는 법이다. 불행히도, 한 개인의 인생 동안 그러한 고초를 뼈저리게 겪은 인간은 점점 마모되고 깎여나가며 자신의 자아가 점점 무너진다.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잃으며 절망의 늪으로 침잠하는 그를 사람들은 '성인'이라고 부른다.
이토록 잔혹하고도 아름다운 성인의 탄생은 경사일까, 비극일까? 나르케 파르네세는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가 어릴 적부터 배워 온 바에 따르면, 인간이 신이 안배한 길을 걷기로 선택하는 것은 축복이자 그가 행해야 할 의무였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인간의 고통과 자아의 손실은 그의 영혼을 훼손시키는 것과 같았다. 인간보다 상위의 영역인 신을 섬기기 위해 인간성을 버리라고 강요하는 모습과 다름이 없는 것이었다.
평생토록 심장에 새겨 온 종교적 교리는 오늘날 나르케에게 행동의 근거가 될 수 없었다. 그는 급하게 완드를 스태프로 바꾸어 바닥에 내려찍고는 워프 좌표를 외웠다. 순식간에 제단에 내려선 그는 완전히 무릎을 꿇기 직전인 루카스의 팔을 탁-하고 잡았다. 그의 파시아 자락이 지상에 완전히 포개지기 전에, 나르케는 어깨에 친구의 팔을 두르고는 다급하게 생각나는 대로 워프 좌표를 외웠다. 잠시 후, 허공에서 떨어진 그들은 광장 바로 옆 건물의 지붕에 큰 소리로 추락하며 떨어졌다.
경사가 깊은 지붕의 난간에 간신히 걸터앉은 나르케는 추락하기 직전인 루카스의 손을 온 힘을 다해 잡았다. 루카스를 끌어올리고자 안간힘을 쓰던 그는 순간 환상과도 같은 것을 보았다. 의식이 다 돌아오지 않은 친구의 등에 수십 개의 깃털들이 자라나 있었다. 천사의 것과 같은 흰색 날갯죽지 위에 갈색 밀랍으로 섬세하게 고정된 흰색 깃털들이 거센 바람에 펄럭였다. 그것들을 잡아두던 유일한 접착제가 마치 인간의 덧없는 욕망처럼 녹아내렸고, 그것에 의지하던 비상의 매개체들은 하나둘씩 허공으로 추락했다.
맥없이 흔들리는 친구를 힘겹게 끌어올리며, 나르케는 간절한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루카스, 일어나. 제발... "
굳게 닫혀 있던 눈꺼풀이 뜨이고 이전보다 선명한 푸른 눈동자가 나르케를 바라본다. 그의 시선은 나르케의 얼굴을 한번 보고는, 이윽고 그를 지나 저 하늘의 먼 곳으로 향한다. 그것이 그의 자의가 아니라, 신의 뜻에 체념하여 자신을 잃어버렸기 때문임을 나르케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그렇기에 그는 더욱 더 필사적으로 루카스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영혼을 깨우려 애썼다.
그는 애타는 마음으로 친구의 이름을 부르고 그와 함께했던 순간들을 이야기하며 그의 자아를 불러오려 하였다. 하지만, 그의 모든 시도에도 불구하고 루카스 아스카니엔은 여전히 아득히 먼 곳을 보는 눈빛으로 나르케를 응시했다. 그는 자신을 붙잡고 있는 나르케의 손을 부드럽게 건드리며 초연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그에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르케."
힘이 빠져 덜덜 떨리는 몸이 지붕 너머로 넘어가는 것을 겨우 막으며, 나르케는 자신을 부르는 친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부드럽게 웃으며 자신을 붙잡은 나르케의 손을 살짝 힘주어 맞잡았다. 그는 그저 나르케의 이름 다섯 글자를 불렀지만, 그의 미약한 손길은 마치 자신을 떨어지게 두고 너는 떠나라는 무심하지만 다정한 메시지라는 것을 나르케는 분명히 인지했다. 눈물을 머금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애정하는 친우를 응시하던 그는 상체를 숙여 난간 쪽으로 고개를 더 깊이 빼내었다.
흔들리는 나르케의 눈동자와 달리, 루카스의 것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것은 모든 것을 받아들인 순교자의 것처럼 평온하고도 초연했다. 그는 눈가를 부드럽게 휘며 그의 영혼을 절박하게 붙잡아 두는 친구를 향해 다정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입을 열어 그에게 전했다.
"고마워."
그의 마지막 말에 녹아든 인간적인 감정들이 중저음의 목소리를 타고 귓가로 들어와 나르케의 심장에 흠뻑 스며들었다. 자신의 운명을 바꾸려고 시도해 준 것에 대한 고마움과 자신과 같은 고행길을 걸어온 동료에 대한 애정과 연민이 나르케에게 전해지며 몇 개 남지 않은 그의 인간으로서의 파편을 전해 주었다.
잠깐의 눈깜박임과 함께, 루카스의 눈빛은 다시 저 먼 하늘을 향했다. 그는 비로소 인간의 자아를 모두 잃고 성인으로 다시 태어났다.
인간 나르케 파르네세는 오늘 이 순간 애정하던 친우를 잃었다. 하지만 추기경 나르케 파르네세는 새로운 성인의 탄생을 목격했다. 그의 눈가에서 눈물이 고이며 한 두 방울씩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점점 힘이 빠져가는 손을 끌어올리며, 그는 입꼬리를 힘없이 올렸다가 다시금 얼버무렸다. 웃음과 울음 사이의 표정을 한 그는 마지막으로 친구였던 성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더 이상 향하지 않는 물색 눈동자를 잠시 바라보던 그는 슬프게 웃으며 자신이 내릴 수 있는 가장 신성한 축복의 말을 건네었다.
"하나님의 축복, 하나님의 영원한 선의, 하나님의 평안, 하나님의 강함과 온기가 우리 가운데, 우리 사이에 지금, 또 항상 함께 있을지어다. 오 하나님, 우리 앞에 길을 열어주소서. 오 하나님, 우리 곁에 친구들이 있게 하소서. "
서서히 빠져나가는 친구의 손을 놓아주며, 그는 눈을 감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오 하나님, 우리 안에 당신의 사랑이 있게 하소서."
추락하는 루카스의 얼굴에 담담한 웃음이 슬며시 퍼졌다. 허공에 추락하는데도 편안한 그의 표정은 바로 신이 그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신의 사랑을 표방하고 있었다. 새의 날개가 모두 떨어진 후에 허공에 흔들리는 앙상한 날갯죽지에서 뭉뚝한 흰색 털이 서서히 자라나더니, 거대한 순백의 날개 한 쌍이 그의 등에서 솟아났다. 마치 하늘이 최초의 대천사에게 내려 준 날개와도 같은 신성한 외관의 날개는 녹아 없어진 이카로스의 날개의 자리를 대신한다.
운명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한 배우의 덧없는 욕망은 뜨거운 태양에 녹아 사라지고 말았다. 운명의 족쇄가 기어이 그를 잡아채 달관의 길로 이끌고 가버린 지금, 그의 영혼의 마지막 파편들을 손에 쥔 나르케는 그의 추락을 지켜보며 숨죽여 울었다.
아니, 정말 추락이 맞는가? 그것마저 확실하게 말할 수가 없는 일이다. 그는 표식을 원하는 자들이 거하는 가장 낮은 곳으로 추락하며 그의 사람됨을 잃는다. 이것은 확실한 손실이며 추락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누구보다도 하늘과 가까운 자가 되어가며 무지한 자들에게 무한한 포용과 연민의 마음을 베푼다.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잃었지만, 그 자리에 들어선 것은 닳고 닳은 끝에 남겨진 빛나는 신성(神聖)이다. 그것이 거룩한 동시에 너무나도 안타까워, 나르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애정했던 친우의 영혼의 비상을 무력하게 바라보기만 하였다.
성인의 강림에 수많은 군중이 다시금 몰려왔고, 그들은 그토록 원하던 표식을 받고 기뻐하며 날뛰었다. 그들은 마치 그를 잡아먹을 듯이 함성을 외치며 그를 에워쌌다. 그들의 부름에 성인은 자애롭게 웃으며 신의 사랑을 그들에게 전했다.
이 거룩하고 아름다운 관경을 지켜보며, 나르케 파르네세는 조용히 묵념했다. 언젠가 자신이 함께했던 친구의 영혼이 안식에 들기를, 운명이라는 이름의 시련이 만든 생채기들이 친구에게 더 이상 상처가 되지 않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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