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루카스 아스카니엔, 알버트 메클렌부르크, 그리고

우아한 하루 b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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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행하지 아니함이로라
푸 @22thank_y


세상이 빙글 돌았다. 암전. 그리고 소음이 고막을 때린다. 알버트 메클렌부르크는 혼란함 속에서 눈을 떴다. 그는 낯선 곳으로 떨어졌다.

제대로 땅을 딛고 서 있는 게 맞는지도 알 수 없다. 균형 감각이 이상했다. 숨을 겨우 내뱉는다. 메클렌부르크가 흐린 눈으로 푸른 하늘과 그 밑에 펼쳐진 풍경을 바라본다.

주위엔 구인류밖에 없었다. 들리는 말은 죄다 알지 못하는 언어였다. 어지러움이 조금 가시자 메클렌부르크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는 구인류들의 생김새로 이곳이 동양이라는 사실만 간신히 추측할 수 있었으나, 대한제국인지 청인지 그도 아니라면 다른 나라인지는 알 수 없었다. 처음 보는 복식에 처음 보는 풍경뿐이다.

분명, 머리를 맞은 것 같았는데. 그가 자신의 머리와 얼굴을 더듬다가 팔을 내려 제 모습을 확인했다. 멀쩡하다. 제 것이 아닌 셔츠와 재킷을 입고 있었지만, 무리 없이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메클렌부르크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도 침착하게 행동하고자 했다.

저 멀리 구인류들이 밀집된 장소가 보였다. 언어를 알진 못해도 무언가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거란 생각에 메클렌부르크가 그곳에 가까이 다가갔다—적지만 동양인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거기 있었기에 내린 결단이다. 메클렌부르크는 구인류 남성의 신장을 쉽게 압도했으므로 굳이 인파를 헤치지 않고 구인류들 뒤에 적당히 섰다. 그곳에선 용도를 알 수 없는 다양한 장비가 두 인물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뭘 하고 있는 거지?

어느 순간 메클렌부르크는 이 장소의 중심에 선 인물과 눈이 마주친 것도 같았다. 아니, 착각이 아니다. 눈을 마주친 이가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메클렌부르크는 옆으로 흘리던 시선을 다시 그에게로 고정했다.

놀란 눈을 하던 구인류는 금방 이전처럼 점잖은 얼굴로 돌아오긴 했으나, 메클렌부르크를 향한 노골적인 눈빛을 숨기지 않았다. 메클렌부르크는 그 눈싸움을 받아들였다. 그가 자신이 이곳으로 오게 것과 관련이 있으리라는 직감이 들었다.

현장은 복잡했고 가운데 선 인물들은 같은 말과 행동을 몇 번씩 반복하기도 했다. 의미 모를 되풀이였지만 메클렌부르크는 많은 이들 앞에서 직접 개입하는 리스크를 질 정도로 인내심이 낮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이 자리를 파할 때까지 기다렸다.

메클렌부르크는 인적이 드문 곳을 찾다가 커다란 탈것이 모여 있는 곳을 발견했다. 그곳 뒤로 공원이 이어져 있었지만, 시야가 너무 확 트여 있는 탓에 이대로 탈것들 사이에 서 있기로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자가 메클렌부르크를 찾아왔다. 현장이 마무리되는 분위기가 될 때쯤 또 한 번 시선을 교환했었다. 메클렌부르크는 그가 자신을 따라올 것이라고 예상했고, 실제로 그 예상은 적중했다.

“안녕하세요.”

그가 먼저 메클렌부르크에게 말을 걸었다. 메클렌부르크가 눈썹을 까딱이곤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모르는 언어다.

그러자 구인류가 마주 웃으며 능숙하게 말을 꺼냈다.

“안녕하세요. 이제 좀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

“…예. 이 나라 사람인 듯한데, 독일어를 잘하시는군요. 제가 독일인이라는 걸 어떻게 아셨는진 모르겠지만.”

가까이서 본 구인류는 신인류처럼 보이기도 했다. 메클렌부르크는 가만히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홍채가 그다지 밝지 않다. 검은 머리야 101기의 아스카니엔이나 파르네세 같은 신인류도 가지고 있다지만, 이들 모두 눈만큼은 밝게 빠진 색을 가지지 않았던가.

눈앞의 인물은 단정한 인상으로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리고 여전히 입꼬리에 호선을 그리며 물었다.

“내 이름을 아십니까?”

뜬금없다. 하지만 대답하지 못할 것도 없다.

“압니다.”

“응? 왜 알지?”

“유명하니까요. 이름 정도는 저도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윤—”

그자가 메클렌부르크의 입을 막았다. 메클렌부르크가 질색하며 그의 손을 떼어놓자 이번엔 팔을 붙잡고 어딘가로 이끌었다. 구인류의 악력은 그다지 세지 않다. 메클렌부르크는 그것을 뿌리치는 대신 얌전히 걸었고 계속해서 그를 경계했다.

현장에서 사람들이 그를 부르는 말이 있었다. 주위에 모여든 자들이나 장비를 만지는 자들이나 공통적으로 이 사람을 그렇게 불렀다. 그렇다면 이는 이름이 아닌가? 내가 이자의 이름을 아는 것이 이상한가? 왜 이상한가, 내가 외국인이라서?

하지만 그전에 이자는 나를 어떻게 알고 있는가? 그는 분명 나를 아는 눈치였으며 동양의 땅에서 동양인의 얼굴로 나의 모국어를 자연스럽게 사용했다. 마치 그곳에 사는 현지인처럼.

생각을 다 마치기도 전에 구인류가 자동차로 추정되는 탈것의 문을 열고 메클렌부르크를 그 안으로 집어넣었다. 방향제의 백향목 냄새가 그나마 그의 마음을 안정시켰다.

“그 시간에 용케도 이름을 주워 들으셨군요.”

“뭐라고요?”

“패닉에 빠지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혼자 다른 곳으로 갔다면 난감했을 텐데, 먼저 접선을 유도해 주셔서 감사하네요.”

당연하다는 듯 익숙하게 말을 붙여온다. 메클렌부르크는 낯선 얼굴 위로 누군가가 겹쳐 보였고,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누가 알았겠는가. 바이에른의 차기 수상이자 특임장관이 제국의 황실마법사연합회에 떡하니 소속되어 있을 줄!

“당신….”

“…….”

“지금 내가 생각하는 게 맞습니까?”

“제가 대답을 해야 아십니까.”

“아뇨. 됐습니다. …맞는 것 같네. 맞아.”

복합적인 감정이 뒤섞여 헛웃음이 튀어나온다. 메클렌부르크가 장갑 낀 손으로 제 눈가를 덮고 시트에 머리를 기댔다. 묻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어이없는 상황에 말문이 막혔다. 이게 누굴 놀려? 처음부터 동양어로 말을 건네고 자신의 이름을 아느냐 물었던 건 대체 뭐였는데?

메클렌부르크가 한숨을 쉬며 손을 내렸다. 그러자 아스카니엔의 얼굴이 불쑥 가까워졌다.

“뭐, 뭡니까?”

“안전벨트요.”

아스카니엔은 어깨와 허리를 걸쳐 메클렌부르크의 장치를 걸고서 자신도 그렇게 했다. 그가 시동을 켜고 운전대를 잡았다.

“…작동시킬 줄 알아?”

“보시다시피. 가면서 얘기하죠. 어떻게 된 일인지 기억하십니까?”

어깨를 으쓱인 아스카니엔이 조수석의 메클렌부르크에게 곁눈질했다.

“병실에 있었죠. 당신이 과일 바구니를 들고 온 것과 갑작스럽게 폭발음이 들린 것이 기억납니다. 그 뒤로는 정신을 차려보니 이곳이었고요.”

잠시 떨떠름한 시선으로 아스카니엔을 흘겨본 메클렌부르크가 앞의 투명한 창으로 눈을 돌렸다. 회색 도로와 키 높은 건물들이 보였다. 낯설다.

부드럽게 도로를 주행하던 차가 빨간불 앞에서 멈춰 선다. 아스카니엔이 운전대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렸다. 백미러에 비치는 밝은 갈색 눈동자에 혼란스러운 감정이 담겨 있었다.

* * *

그래. 갈색 눈. 호박색이 아니라서 바로 알아보지 못했다. 나는 메클렌부르크와 눈이 마주치고 나서야 그가 나와 함께 휘말렸음을 알아챘다. 이제껏 체계는 나에게만 영향을 끼쳤으나, 새로운 엑스트라 챕터를 만듦으로써 그 영향력을 확장했다.

“완드를 들고 대처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정확히 무슨 상황이었는진 몰라도, 내가 이렇게 살아있는 걸 보면 당신이 나를 살린 거겠죠. 어떻게, 매번… 당신에게 목숨을 빚지고 있군요.”

이어서 묻지도 않는 말이 줄줄이 튀어나온다. 이거 왜 이래.

“인사치레는 됐습니다.”

“인사치레가 아니라…!”

“감사 인사는 돌아가서 듣기로 하죠. 제가 폭발 피해를 경감시켰지만 완전히 막지는 못했습니다. 정황상 잔해를 맞고 기절한 뒤 이곳에 온 건데… 저도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바뀐 신호에 따라 다시 액셀을 밟았다. 몇 개월 만에 보는 21세기의 풍경이었지만 썩 반갑진 않았다. 설마하니 한국어도 모르면서 내 이름을 알고 있을 줄이야. 머리를 한 대 쳐서 기억을 없앨까.

“눈을 왜 그렇게 뜹니까?”

그대로 있으면 한 대 맞을 걸 어떻게 알았는지 메클렌부르크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바라봤다. 내 눈이 뭐. 나는 선량한 웃음으로 응수했다. 메클렌부르크의 표정은 미묘했는데, 아무래도 내 얼굴이 어색한 것 같았다.

하지만 당황스러운 건 이쪽도 마찬가지다. 마리아와 엘리아스는 아스트랄계에서 루카랑 반쯤 섞인 모습으로 대면했는데. 이 얼굴 그대로 메클렌부르크와 마주하게 될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어떤 의미로는 다행이다. 상대가 레오였다면 내가 지금처럼 한가롭게 운전대를 잡고 있진 못했을 것이다. 나는 그가 던지는 질문마다 끊임없이 벌주를 마셔야 했으니.

메클렌부르크는 차창 밖의 이질적인 거리를 살폈다. 나에게는 익숙하기 그지없는 도시였으나 그에게는 새로운 세계였다. 비유가 아니라, 말 그대로 정말 ‘새로운 세계’. 나는 조수석의 창문을 흘끔 쳐다보았다.

“창문 열어 드려요?”

“열지 마세요.”

“…….”

창문을 완전히 밑으로 내렸다. 계속해서 바람이 들이닥치며 메클렌부르크의 머리카락이 마구잡이로 휘날렸다. 그가 미간을 찌푸린 채 황당하다는 얼굴을 했다. 나는 정면을 응시한 채 입을 열었다.

“실수.”

“장난합니까?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서…. 아니. 당신은 알겠군요. 구인류들 사이에 있었죠. 이 나라 말을 쓰고 본 적 없는 기구를 잘도 다루고. 당신 대체 뭡니까. 이것도 신력? 민간인도 당신 이름을 알던데. 새 신분치곤 제법 유명인 같습니다, 후배님.”

진실을 어디까지 알려야 하는가. 우선 ‘나’라는 존재는 숨길 수 없다. 함께 휘말린 이상 나는 그에게 정체를 드러내야만 했고, 생판 남으로 접근해서는 그의 신뢰를 얻을 수 없다. 만약 메클렌부르크가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사라져 버린다면 그것이 가장 큰 문제가 된다. 내가 루카스 아스카니엔임을 밝히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이 얼굴과 이름, 유명세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답은 간단하다.

“저도 모릅니다.”

“뭐?”

“모른다고.”

내가 쭉 모르쇠로 일관하면 그는 어이없겠지만 어떻게든 납득할 것이다. 납득하지 않는다면 납득하게 만들면 그만이고.

“제가 눈을 뜬 건 이곳에서였습니다. 그때는 다른 운전사가 있었고, 곁눈질로 배울 수 있었죠. 처음에 제 손에 무엇이 있었는지 아십니까? 대본입니다. 저는 연극을 준비했고, 그곳에서 실행했습니다. 그게 답니다. 모르는 상황 속에 내던져진 건 선배님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나는 내 얼굴도 방금 거울을 보고 알았습니다.”

차창을 다시 올려 닫았다. 메클렌부르크는 여전히 의심이 가시지 않은 눈초리였다. 백미러 속 자신의 눈동자를 확인한 그가 잠시 눈가를 찡그렸다. 그리고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돈하며 말했다.

“임기응변이라. 그렇다면 이건 당신이 의도한 모습이 아니란 말입니까?”

“전혀.”

“그 말은 꼭 다른 사람의 몸을 쓰게 됐다는 것처럼 들리는군요.”

이 자식 어떻게 알았지. 내가 루카 몸 쓰는 거 본 적 있나. 아니 당연히 본 적 있겠지. 내가 의도한 건 아니지만, 이건 실제 내 몸이 맞다. 만일 저 말을 루카 몸으로 들었다면 기분이 꽤 오싹했을 것이다.

현재 메클렌부르크는 눈동자 색을 제외하면 원래의 몸과 다른 부분이 없다. 신인류답게 큰 키나 재수 없는 미소를 띤 얼굴 생김새가 본래의 것과 똑같이 일치한다.

반면에 나는 모든 것이 다르다. 루카와 같다고 봐줄 수 있는 건 이곳에서는 흔해 빠진 검은 머리카락뿐이다. 도착하면 얼굴을 바꿔야겠다. 그편이 좀 더 자유롭게 활동하기 편할 테다.

“잠깐만요. 지금 신력을 사용할 수 있습니까?”

“왭니까.”

“나는 마력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런. 충격적인 소식이다. 메클렌부르크의 안색도 좋지 않았다. 바깥 구경 그만하고 이걸 진작 말해줬어야지. 나는 신호가 걸린 틈을 타 손가락을 튕겼다. 아무런 마력 반응이 나타나지 않았다.

엑스트라 챕터는 호스트가 살던 시대를 그대로 반영한다. 내가 살던 현대에 이온 포르소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마력도 신인류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나는 돌아온 것인가? 혹은 긴 꿈을 꾼 것인가? 스스로 망상일 리 없다 치부하지만 세상에서 유리되는 감각에 등골이 서늘해진다.

나는 핸들을 꽉 쥔 채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옆을 흘겨보았다. 이곳에서 지난 수개월의 나를 기억하는 자는 눈앞의 메클렌부르크뿐이다. 안도감인지 허탈감인지 모를 웃음이 나왔다.

“선배님.”

“…….”

“축하드립니다. 구인류가 되셨군요.”

“…?!”

메클렌부르크가 경악했다. 그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두 사람 다 마법을 쓸 수 없다는 것, 자신이 구인류와 별다를 바 없어진 것. 둘 중 어느 것에 더 큰 타격을 입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주차를 마칠 때까지 메클렌부르크는 믿을 수 없는 현실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그에겐 자신이 마력 없는 신인류 내지 구인류가 되었다는 사실이 절망적일 것이다. 나는 손을 뻗어 그의 입을 한 대 쳤다. 닥치라는 의미였는데 메클렌부르크는 닥치지 않았다.

“당신은 뭐가 이렇게 태평해?!”

“일단 내리세요. 상황을 해결하면 원래 몸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겁니다.”

나는 먼저 차에서 내렸다. 뒤이어 그가 나오길 기다렸지만, 메클렌부르크는 그대로 차 안에 있었다. 뭐 하자는 거야? 조수석 문을 열자 메클렌부르크가 쩔쩔매는 모습이 보였다.

“이거 어떻게 풉니까? 당신 혼자 가버리면 나는 어떡하라고…!”

가지가지 한다. 나는 조수석 안으로 머리를 들이밀고 허리를 숙였다. 차내 안전벨트는 20세기 자동차 경주가 유행하면서 사용되기 시작했기에 메클렌부르크가 모르는 건 당연했다. 잠금 푸는 법을 알려주고 내릴 걸 그랬군. 버튼을 누르자 달칵 소리와 함께 메클렌부르크의 안전벨트가 풀렸다.

몸을 뒤로 물리고 메클렌부르크를 내려다보니 그의 얼굴이 빨개져 있었다. 나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메클렌부르크는 이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문 앞에서 비켜서자 메클렌부르크가 기다렸다는 듯이 밖으로 빠져나왔다. 예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질 않아서 웃음도 안 나온다. 나는 엘리베이터와 반대 방향으로 몸을 튼 그를 붙잡아 내 쪽으로 당겼다.

공동 현관을 지나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가 잠시 메클렌부르크를 살폈다. 내 시선을 눈치챈 그가 할 말이 있으면 하라는 듯이 고개를 까딱였지만,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메클렌부르크가 나를 따라 탔다.

“미리 말 좀 해 주면 덧납니까?”

뭘 묻는지 알겠다. 하지만 이걸 미리 말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나.

얼굴을 식힐 틈이 없던 탓에 메클렌부르크는 삼면이 거울로 둘러싸인 곳에서 붉은 기가 남은 자신의 얼굴을 마주해야만 했다. 나는 메클렌부르크의 떨리는 주먹을 외면했다.

“이미 여러 번 봐서 익숙합니다.”

“여러 번?! 그렇게 말할 정도로 많지 않습니다!”

“네. 그러시겠죠.”

“이…!”

그에겐 단 한 번의 기억으로 남았겠지만 당시에 이쪽은 47일을 그와 함께했다. 질릴 만큼 익숙하지. 새빨간 얼굴로 주저앉은 모습이나, 붉은….

고개를 흔들며 잡념을 털어낸다. 나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 현관문의 도어락을 연 뒤에야 메클렌부르크의 팔을 놓아주었다.

“당신 진짜 몇 살입니까?”

“몇 살이길 원하는데요?”

그렇게 말하며 구두를 벗었다. 그리고 신발장 한편에 자리 잡은 실내용 슬리퍼를 향해 고갯짓했다.

“슬리퍼 신고 들어오셔도 됩니다.”

돌아오는 말이 없길래 뒤를 돌아보자 메클렌부르크가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당신은 뭐가 이렇게 자연스럽고 능숙합니까?”

나는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메클렌부르크에게 모든 걸 설명할 수는 없다. 그는 이미 내 주장에 어폐가 있음을 알고 있으며, 나는 그에게 눈 감고 넘어가 달라고 부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런 때에 더 거짓을 고하고 싶지 않다.

메클렌부르크는 가지런히 신발을 벗어 두었고, 실내용 슬리퍼를 새로 신었다. 슬리퍼가 한 켤레만 있는 관계로 나는 양말만 신은 채 그를 거실 소파로 이끌었다.

“선배님. 당장 궁금한 게 많을 것으로 사료됩니다만.”

“알긴 아는군요. 여긴 어딥니까? 이 집은 당신 겁니까? 그 몸 주인의 집을 어떻게 알았습니까?”

“아무것도 묻지 마십시오.”

“뭐?!”

호스트는 나다. 손님을 내쫓을 수는 없어도 규칙을 정할 권리는 나에게 있어야 한다. 미안하지만 이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

“제가 무엇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왜 알고 있는지 묻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이에 대해서 그 어떤 답도 드릴 수 없습니다.”

“수상하게 말해 놓고 묻지 말라는 건 뭡니까?”

“답할 수 없다고 말씀드렸는데요.”

“하…. 알겠습니다. 그럼 이것만 말해주십시오. 이곳은 어디이며, 우리가 독일로 어떻게 돌아가면 좋겠습니까?”

그건 나야말로 궁금하다. 우린 어떻게 돌아가야 하는가. 나는 이번 엑스트라 챕터에서 내 의지로 나갈 수 없었다. 손님을 두고 호스트가 나가는 걸 체계가 허락하지 않는 것일까? 그렇다면 손님과 함께 나간다면 해결되는 일 아닌가? 메클렌부르크에게 엑스트라 챕터의 개념은 없을 테지만, 그도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건 똑같지 않은가? 호스트와 손님 모두 나가길 희망해도 엑스트라 챕터는 우리를 현실로 꺼내주지 않는다. 섭취한 혈액의 양만큼 머무는 시간이 비례하는 유리의 엑스트라 챕터와는 다른 특수한 사례다.

나는 지금 루카스 아스카니엔도 니콜라우스 에른스트도 아니다. 이 상태로 뭘 해야 하는가. 차라리 대플레로마 작전을 수행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될 정도로 난감한 처지에서, 그것도 연합회 선배를 데리고, 대체 뭘? 21세기의 독일로 가는 것은 일차원적이다. 해결책을 독일에서 찾을 수 있으리란 보장도 없으며 이 시기엔 일정상 출국이 불가능하다. 나는 바로 내일도 촬영 때문에 6시에 기상해야 한다.

체계가 나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궁극적으로, 생존. 메클렌부르크는 나의 생존에 도움이 된다. 아니, 그보다는 그가 나의 생존을 바란다고 표현하는 게 맞겠지.

양손을 맞잡고 메클렌부르크를 응시하자 그가 긴장한 얼굴로 침을 삼켰다. 그는 이 모든 상황에 대해 무지하며 평생 제 것이던 능력을 잃었다. 나의 존재와 앎에서 나오는 여유는 그에게 있어서 나로부터 상황을 파악하고 능력을 되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암시한다. 그러나 나는 정보를 제한했다—정확히 말하자면 정보의 출처, 즉 ‘나’라는 인물이 가진 지식의 과정과 연유를 궁금해하지 말라 선언했다. 무지와 소멸은 공포심을 불러일으킬 만하므로, 메클렌부르크는 목숨의 위협까지는 아니더라도 큰 두려움을 느꼈을 공산이 크다. 이곳은 역량 강화나 평가를 위한 미메시스 훈련장이 아니다. 우리가 나가면 멈출 세계이지만, 모든 것은 우리에게 실제 상황이다.

메클렌부르크는 나에게 많은 것을 양보했다. 아는 것이 없는 상태에서 나를 따르는 것만이 유일한 선택지였을진 몰라도, 그는 부러 나에게 많은 것을 묻지 않았다. 내가 모른다 따위의 얼토당토않은 말을 한 시점에서부터 그랬다. 메클렌부르크가 나를 믿기에, 나는 그에게 아무것도 묻지 말라고 부탁할 수 있었다.

“이곳은 마법이 없는 세계입니다. 우리는 21세기의 대한민국에 떨어졌으며, 대한제국이 공화정을 수립한 미래입니다. 과연 우리가 사는 세계와 다른 점이 존재하는 세계를 ‘미래’라고 부르는 게 맞는가 싶기도 하지만요.”

“미래? 마법이 없는 세계라니, 그게 무슨…. 그렇다면 이 세계엔 신인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애초에 이온 포르소가 없는 세계이므로 신인류와 구인류가 구분되지 않습니다. 오로지 ‘인류’만 존재할 뿐이죠. 제가 선배님께 구인류가 되었다고 한 말은 이온 포르소 이전과 다를 바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허…. 믿을 수 없군. 당신은 이걸…. 아니, 미안합니다. 마법이 없다면 우리는 이곳으로 어떻게 온 거죠? 마법 없이 우리가 원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이 있습니까?”

“이 또한 모른다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번엔 진심입니까?”

“정말 모릅니다.”

‘이번엔’ 진심이냐니. 차에서 아무렇게나 둘러댄 걸 이렇게 찌르니 겸연쩍다. 나를 가늠하듯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웃어 보이고, 나는 한동안 적당한 선에서 이 세계의 상식을 그에게 알려주었다.

“아무튼 돌아가는 방법은 우리가 직접 알아내야 합니다.”

탁상에 놓인 시계를 확인했다. 잘 시간이 훨씬 넘었다. 내일 컨디션은 조졌군. 자리에서 일어나자 메클렌부르크의 시선이 나를 따라왔다. 그는 답지 않게 의기소침한 모습이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르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도 없다고 여겼을 것이다. 나와 사이비 소굴에서 탈출을 도모하던 그날과 달리 그는 완전히 무력하다.

내가 가볍게 메클렌부르크의 어깨를 두드리자 그의 얼굴에 불쾌감이 스몄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몸을 숙여 그의 재킷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뭐야?!”

“아, 여기 있다.”

“사람 몸을 멋대로 만지고선 무슨…!”

신분증. 재킷 안주머니에서 메클렌부르크의 여권을 발견했다. 알버트 메클렌부르크, 독일인, 연도가 달라도 나이는 똑같다. 그는 자신이 입고 있던 옷에 무언가가 들어있었다는 사실에 놀란 듯했다.

“좋습니다. 선배님은 그대로 알버트 메클렌부르크네요.”

“당신은 다르잖습니까. 얼굴도 그렇고, 이름도…. 당신은 왜 그런지 알려주지 않겠지만.”

아스카니엔의 얼굴이 아니라서 그가 보기엔 덜 거북하려나.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여기선 후배님이라고만 부르십시오.”

내 몸으로 루카의 이름을 빌리긴 좀 그렇다. 그리고 메클렌부르크가 이미 내 이름을 알고 있으니 이쪽을 허락하면 편하겠지만, 그가 내 이름을 부른다면 조금 적응하기 힘들 것 같았다. 그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도로 여권을 덮고 그에게 건네주었다.

“선배님. 저에게 목숨을 빚졌다고 하셨죠.”

“…틀린 말은 아니지 않습니까.”

“목숨을 빚진 쪽은 접니다.”

갈색 눈동자가 일렁이며 나를 담는다. 엘리아스가 나를 살아가게 한 것과는 또 다른 결의 이야기다. 그의 인간성이 후지다는 건 변호할 수 없는 사실이나, 사라진 시간 속에서 그가 많은 순간 나를 위해 목숨을 내던졌다는 걸 안다. 대답을 바라지 않는다고 말했음에도 그는 최선을 다해 나에게 대답했다. 메클렌부르크의 향상심은 한심한 부분이 있을지언정 빛나는 구석도 있었고, 완전하지 않기에 가치가 있었다. 그가 내게 마음이 동하는 것을 물었을 때 나는 이미 그의 마중물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았다.

“이곳에서 선배님을 만났으니 운이 좋다고 할 수밖에 없군요. 저를 설득하는 것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세상입니다. 생의 가치도 의무도 퇴색되었다면 욕심만이 이를 붙잡는 것 아닙니까.”

낯선 여권을 쥔 메클렌부르크의 입이 살짝 벌어진다. 나는 다시 누구에게나 어려운 문제를 그에게 청한다.

“제가 이 세상에서 살아서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Extra Chapter

Behind Stage 1: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카테고리
#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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