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a-Cat-Time
엘리아스 호엔촐레른, 레오나르드 비텔스바흐, 루카스 아스카니엔, 나르케 파르네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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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a-Cat-Time
푸 @22thank_y
님펜부르크 궁 정원에 티 테이블이 차려졌다. 병상에서 일어난 지 얼마 안 돼서 집무실에 출근하니 레오가 일주일간 휴가라며 쫓아낸 일의 연장선이다. 그래도 침대에 꽁꽁 묶어두진 않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이것도 엘리아스가 레오를 설득한 덕분이지만.
“아~ 햇볕 좋다.”
엘리아스는 정원으로 나오자마자 티 테이블을 보지도 않고 바닥에 뒹굴었다. 풀밭에 드러누운 모습이 태평하다. 가만히 앉아서 그를 지켜보자니 나르케가 옆에 와선 찻잔에 차를 따라주었다.
“티타임은 오랜만이네.”
“그러게. 매번 엘리가 술 마시자고만 해서.”
“거기 뭐야? 내 얘기 중?! 험담하는 거 아니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딱 한 마디 꺼냈을 뿐인데도 귀신같이 알아챈다. 나르케가 한 손으로 손나발을 들고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는 비둘기의 순백색보다 평화로운 색깔을 그려낸다. 나는 평화의 조각을 눈에 새기곤 조용히 찻잔을 쥐었다.
따뜻한 바람이 정원에서 연주를 지휘한다. 나뭇잎과 풀잎이 바람결을 따라 몸의 현을 늘어트린다. 자연의 소리 사이에 엘리아스의 웃음소리가 녹아든다.
‘휴식도 좋을 때가 있군.’
어차피 해야 할 일은 휴가 중에도 했다. 레오한테 들켜서 잔소리를 듣긴 했지만 어쨌든 그건 꼭 확인해야 하는 일이기도 했고. 내일이면 일주일 휴가도 끝이니 복귀를 위해선 완전히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다.
“어, 고양이다.”
셔츠를 풀색으로 염색할 기세로 바닥을 구르던 엘리아스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나무 그늘에서 고양이 몇 마리가 모여 있었다.
고양이라는 말에 제 몫의 찻잔에 차를 따르던 나르케도 시선을 들어 고양이 무리를 찾았다.
“쟤 토끼랑 털색이 비슷한 것 같은데. 나르케, 이쪽으로 와 봐! 토끼도 데려와 줘.”
“아냐, 색은 조금 달라. 그리고 고양이 앞에 두면 파이가 무서워할걸.”
“그런가. 토끼는 겁이 많으니까.”
파이가 겁이 많다고 말하는 사람은 엘리아스뿐일 것이다. 동물의 경우는 모르겠지만 파이가 마주치면 바들바들 떠는 인물은 아직까지도 엘리아스가 유일하다. 그나저나 자기 앞에서 파이가 떤다는 걸 알게 됐을 줄이야. 언제 그렇게 발전한 거지.
몸을 낮추고 고양이들에게 접근하는 엘리아스의 뒤를 따라 나르케가 사뿐사뿐 걸어갔다. 안 봐도 두 사람의 눈동자가 반짝거릴 것이 훤하다. 찻잔 속에 웃음기가 스민다.
사람들이 다가가자 고양이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사람 손을 타지 않은 듯했으니 당연하다. 그러나 딱 한 마리는 여전히 그늘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다.
“오. 혼자 남았어. 대장 고양이인가.”
“사람이 익숙하면 안 도망갈 수도 있지. 얘 덩치가 엄청 크다. 사람들한테서 잘 먹고 자란 거 아닐까?”
커다란 치즈 고양이는 두 사람이 가까이 가도 피하지 않았다. 덩치가 하도 커다래서 식빵 굽는 모습이 꼭 왕돈가스처럼 보일 정도였는데, 그 정도면 누가 덤벼도 이겼을 테니 엘리아스 말대로 그가 대장 고양이일지도 모른다.
“냐옹~”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어디서 가져온 건지 엘리아스가 기다란 풀을 휘적휘적 고양이 앞에서 흔들었다. 나르케가 짧게 웃고서 고양이 소리를 흉내 냈다.
“미야옹~”
…잠깐. 처음 들었던 고양이 소리가 엘리아스가 낸 소린가?
방금까지 개털 날리며 놀던 것들이 고양이 앞에서 야옹야옹 울기까지 하니 웃기기만 하다. 엘리아스나 나르케나 서로 이런 코드가 맞아서 다행이다.
엘리아스가 고양이처럼 울며 바닥의 고양이를 향해 두 팔을 활짝 벌렸다. 그게 썩 탐탁지 않은지 불만스럽게 노려보던 고양이가 주먹으로 엘리아스를 퍽 때렸다.
“고양이가 날 때렸어! 엇, 우왓, 잡았다!”
“안 다쳤어?”
“좀 긁혔는데. 그래도 얘도 진심은 아니었어서.”
이런. 고양이의 솜 주먹을 가드하다가 발톱에 할퀸 듯했다. 얼결에 달려든 고양이를 품에 안은 엘리아스가 뿌듯한 얼굴로 웃었다. 팔에는 약하게 긁힌 자국이 나 있었다. 나르케는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엘리아스의 팔을 살펴보았다.
“피는 안 나네. 정말 고양이가 봐준 건가 봐.”
“나르케. 근데 얘 레오 닮은 것 같지 않아?”
묵직하게 안긴 고양이는 금방 품에서 벗어날 거라는 예상을 깨고 얌전히 엘리아스에게 안겨 있었다. 엘리아스가 치즈 고양이를 꼭 안고서 나르케에게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갔다.
음. 이번엔 드물게도 엘리아스와 의견이 갈린다.
‘미안하지만 레오는 너희랑 같은 개다.’
차를 한 모금 마시자 나르케가 웃음을 터트렸다.
“푸흡…. 하하하!”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이것 봐. 생긴 것도 그렇고, 날 엄청 무자비하게 쳤으면서도 좋으니까 안겨있는 거잖아.”
“그러게. 그런데 루카스가 레오는-”
텁. 마력으로 나르케의 입을 막았다. 이런 생각을 한 걸 레오한테 들키면 곤란해진다.
‘설마 듣진 않았겠지.’
나는 슬며시 눈동자를 굴려 정원에 들어선 레오를 바라보았다. 업무를 마치고 곧바로 왔는지 바이에른 왕실 예복을 갖춘 채였다.
“내가 뭐?”
귀도 밝군. 나르케의 입을 막았던 마력을 거두었다. 나르케는 여전히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말해 줄까?”
“마음대로 해.”
나르케의 물음에 레오가 무심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엘리아스가 한 팔로 고양이를 안고 레오에게 덥석 어깨동무를 했다.
“또 이러네. 왕자님, 이럴 땐 그냥 말해 달라고 솔직하게 얘기해도 된다니까.”
“손에 있는 건 뭐야?”
“고양이.”
“누가 그걸 몰라서 물어?”
“너랑 닮았지!”
엘리아스가 활짝 웃으며 치즈 고양이를 레오 앞에 내밀었다.
거듭 생각하는 거지만 저 고양이와 레오가 얼마나 닮게 생겼든 간에 레오는 고양이가 아니라 개다. 오히려 셋 중 그나마 고양이라고 할 만한 사람은 나르케겠지.
어느새 두 사람의 대화에서 빠져나온 나르케가 슬쩍 내 옆으로 다가와 어깨를 붙여 온다. 팔뚝이 맞닿고 그의 머리카락이 내 피부 위를 조금씩 스쳤다.
“나는 개야, 고양이야?”
“읽지 말라니까.”
“그냥 들렸어…. 그런데 마침 네가 내 생각을 한 거야.”
나르케가 찻잔을 쥐며 웃었다. 말간 뺨의 광대와 입꼬리가 살짝 위로 솟는다. 기쁨의 계절이 금색 눈동자 속에 있었다.
나는 손을 들어 그의 머리 위에 올렸다.
“으응? 뭐야?”
“엘리가 가끔 하던 걸 봐서.”
그대로 나르케의 머리카락을 슥슥 만졌다. 엘리아스가 하던 것처럼 마구 헤집는 방식은 아니지만. 내 행동이 의외였는지 나르케가 작게 입을 벌렸다.
“너는 둘 다. 지금은 개야.”
흠. 이렇게 만져보니 엘리아스가 왜 나르케의 머리를 헤집는지 알 것 같기도 하다.
“우와. 들었어? 루카가 나르케한테 개 같다고 했어.”
“너도 충분히 개 같아.”
고양이를 데리고 옥신각신하던 두 사람은 이제 보니 고양이 털을 잔뜩 묻힌 채였다. 레오가 휘두른 주먹을 피한 엘리아스가 이쪽으로 곧장 달려왔다. 요란하게 내 옆자리를 차지한 엘리아스가 나를 꽉 끌어안았다. 고양이는 어디다 두고 나한테 이런담.
“루카아아아아.”
“힘 빼. 숨 좀 쉬자. 너 때문에 털 다 묻었어.”
“털은 이따 내가 떼줄게. 너 살 빠졌나?”
“아니. 그대로…. 윽.”
순간 찌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테이블에 뒤이어 도착한 레오가 나한테 들러붙은 엘리아스를 보더니 내 코어에 충격을 가한 것이다. 제정신인가. 내가 황당하게 레오를 쳐다봐도 그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맞은편에 의자를 빼 앉았다.
“너무 세게 안았나. 갈비뼈 부러진 거 아니지?”
“멀쩡해. 그 정도로 부러지진 않아.”
“그럼 다행이고.”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하던 나르케가 이쪽을 바라보곤 미소 지었다. 웃기냐. 매번 당하는 입장으로선 피곤하다.
엘리아스가 찻주전자를 들고 레오와 본인 몫의 잔에 차를 따랐다. 아직 나르케와 내 찻잔에 차가 남아 있는 걸 본 엘리아스가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레오가 테이블 주위로 차음 마법을 치고 입을 열었다.
“루카스. 휴가는 이틀 연장이야.”
“연장이라니? 원래는 내일이 끝이잖아.”
“미안. 하지만 이 상황에 널 바로 복귀시킬 수는 없어. 이틀 동안 너에게 부탁하고 싶은 일도 있고.”
그가 할 말은 대강 예상된다. 부탁이라기엔 어차피 내가 하려고 했던 일이기도 하니 상관은 없으려나.
옆에서 불량한 자세로 앉은 엘리아스가 찻잔에서 입을 떼지 않고 차를 꿀꺽꿀꺽 마셨다. 레오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찻잔을 테이블에 내려두었다.
“…엘리아스.”
“캬아. 응?”
“차를 술로 바꿔? 너 엘릭서에도 자꾸 손대는데 장난해?”
“이 정도는 술도 아니지. 주스… 아니 그냥 물 수준이야. 그래도 지금까지 줬던 것들 입맛에 잘 맞지 않았어?”
조용히 차를 마시던 나르케가 찻주전자 뚜껑을 열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웬일로 술 냄새가 거의 나지 않았다. 제대로 코 박고 맡지 않으면 모르고 마실 법도 했다.
“내가 따를 때까지만 해도 차였는데. 언제 바꾼 거야?”
“다 방법이 있지.”
나르케의 물음에 엘리아스가 어깨를 으쓱이곤 킬킬 웃었다. 이 자식 나르케와 내 찻잔에 술을 따라주지 못해서 아쉬운 표정을 지었던 거군.
레오가 찻잔을 밀어내며 한숨을 쉬었다.
“네가 술로 바꾼 엘릭서 전부 루카스한테 줬어.”
“뭐어?! 네 생각 하면서 고른 건데 그게 루카한테 갔다고?”
엘리아스가 양손으로 테이블을 짚고 나를 쳐다보았다.
“맛있더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곤 찻잔에 남은 차를 비웠다.
“다음엔 루카 것도 같이 넣어줘야겠다.”
“그만두겠다는 선택지는 없는 거야?”
이렇게 말하지만 레오도 엘릭서 병에 담긴 술을 마신 적이 있다. 엘릭서인 줄 알고 마셨더니 술인 상황이 당혹스러운 거지, 엘리아스가 레오 취향대로 넣어준 술 자체가 싫은 건 아니니까 말이다.
“안에 있던 차는 어디로 갔어?”
“아, 그거. 다시 바꿔줄게.”
엘리아스는 술이 든 찻주전자를 들더니 금방 이전의 내용물로 바꿔 냈다. 나르케는 밝게 웃는 얼굴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엘리아스가 열어보라는 듯 찻주전자를 내밀자 나르케가 찻주전자의 뚜껑을 들어 올렸다.
“진짜 바뀌었네. 어떻게 한 거야?”
“하이케한테 배운 걸 응용한 거지.”
그가 코를 찡긋하며 웃었다. 그리고 내 찻잔에 차를 따랐다.
“자, 루카. 리필해줄게. 레오 넌 이리 줘. 내가 비우고 다시 차로 따라줄 테니까.”
레오의 찻잔을 휙 가져간 엘리아스는 그대로 술을 자기 입에 털었다. 왕실에서 사용하는 찻잔에 술을 담아서 마시는 걸 보니 헛웃음만 튀어나온다. 엘리아스가 그렇게 빈 잔에 차를 따르고 레오 앞에 도로 놓았다.
“씁. 입가심도 안 된다.”
차로 속이겠다고 도수 낮은 술을 가져온 건 엘리아스 본인이다. 매번 상상 이상으로 기상천외한 모습을 보여주는군. 이런 고양이 털 날리는 티타임은 처음이다.
“티타임이잖아. 너도 이제 차를 마셔봐, 엘리아스. 찻잔에 고양이 털 들어가지 않게 조심하고.”
“그래야지. 레오 머리카락이 차에 들어가면 왕자님이 화낼 거야.”
“이미 들어갔어. 내 머리카락이랑 고양이 털을 똑같이 말하지 마.”
“오. 당연히 고양이 털보다 네 머리카락이 훨씬 더 부드러우니까 걱정 말고.”
엘리아스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는 차분히는 아니지만 아까보다는 덜 경박하게 차를 마셨다. 레오는 찻잔에 그의 한숨을 담았다. 평온한 일상이다.
그들은 여상하게 10년 뒤를 맞이할 것이며 다가오는 20세기를 뒤엎을 것이다. 아마 나르케 또한 그렇겠지. 하지만 나는 여명의 시간이 끝나면 나 자신이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다. 나뿐만 아니라 루카도 마찬가지다. 변경 가능성을 높이는 것 외에도 따로 대비가 필요하다.
“루카스.”
레오가 손끝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나는 이야기를 듣고 있다는 뜻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씨알도 안 먹히겠지만 뭐 어쩌겠는가.
그러다 나르케와 일순 눈이 마주쳤다. 나르케가 해맑게 웃으며 초콜릿이 찍힌 포크를 내게 내밀었다.
“필요해?”
티타임 디저트로 곁들여 나온 파베 초콜릿이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그가 내민 초콜릿을 물었다.
“조금.”
가죽 장갑의 질긴 느낌이 떠오른다. 그러나 반대로 입안에서는 초콜릿이 부드럽게 녹아갔다. 나는 많은 것을 그와 함께 삼켜서 숨겼다. 나르케 앞에서 이런 생각은 삼가야지 싶다가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이는 경계가 아닌 염려다.
디저트를 입에 넣는 엘리아스와 나르케를 양옆에 두고, 나는 맞은편의 레오를 응시했다.
“계속해. 집중할 테니까.”
일주일. 오래 쉬었다. 연장된 휴가를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 준비해야 할 것이 산더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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