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젬에메

[아젬에메] 호기심이 목을 조인다

매일 5천자 이상 작업하기 셀프 챌린지

* 파이널판타지14 확장팩인 효월의 종언과 8인 레이드 판데모니움, 그리고 작성자의 개인 해석과 설정을 덧붙힌 것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공식 비화나 인게임 스토리 등 여기저기서 다 가져와 보고 싶은 내용으로 버무렸으므로 열람시 주의를 요합니다.

정말 강한 스포를 담고 있으니 효월 미 클리자가 열람시 책임은 저에게 있지 않습니다 ㅠ___ㅠ)...

효월 다 깨고 읽어주세요! 효월 깨고 판데모니움까지 다 깨고 읽어주세요!

* 공식 설정을 기반으로 날조한 부분이 많습니다 특히 에테르, 기억 관련해서 걍 다 날조입니다

* 아젬의 외모 묘사가 없으나, 트레일러에 등장하는 남중휴 '메테오'를 베이스로 삼고 있습니다.

* 분열 전 고대세계를 배경으로 아젬 X 에메트셀크 BL 입니다

* 매일 5천자 이상 작업하기 셀프 챌린지 2일차로 업로드했던 [웃기지도 않는 일]과 이어지는 내용이라 기존 글을 내리고... 합쳐서... 새 글과 함께 올렸습니다. 챌린지 의미가 있나? 싶지만 꾸준히 쓴다는 거에 의의를 두기로...

* 동일 내용 포타에도 백업해두었습니다. 어디서 본 것 같다면 저입니다...

누군가 제게 그렇게 말했던 것 같기도 했었다.

언젠가 네 호기심이 네 목을 옥죄고 숨을 앗아갈 날이 반드시 올 거라고.

그건 에메트셀크였는지 라하브레아였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렇게 말하는 얼굴을 보고 언제나처럼 웃어 보였던 거 같기도 했다.

여행과 모험을 사랑하는 제게 있어, 호기심이란 발을 움직이는 원동력이었으니 명계로 가는 날까지, 아니 명계에 도착해서도 저는 두리번거리며 새로운 것을 쫓고, 제 머릿속에 들어있던 지식과 상식을 모조리 꺼내어 새로운 것과 비교해보고 짜 맞추다 끝내는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말 거라고. 그게 아젬이라는 좌의 숙명이었고, 자신을 아우르는 모든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하지만, 아젬은, 모험가는, 모든 것을 듣고 자신만의 답을 내어주는 자리의 남자는.

처음으로, 자신의 호기심을 저주했다.


시작은 언제나처럼 아주 사소한 것이었다.

휘틀로다이우스와 에메트셀크가 14인 위원회의 일로 엘피스에 방문할 거라고, 혹시 너도 올 생각이 있느냐고 넌지시 물었을 때, 가고 싶은 마음은 정말 굴뚝같았으나 아젬으로서 아모로트 밖을 살펴봐야 하는 일정과 겹쳐 합류하지 못할 것 같다 했을 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와오, 성실한 아젬이라니! 하고 휘틀로다이우스가 놀라고 에메트셀크가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느냐며 저를 빤히 바라봤을 때만 해도 언제나 같은 하루로 끝날 거로 생각했었다. 세상을 두 다리로 돌아다니는 것도 물론 즐겁고 유쾌한 일이지만, 친구들과 함께 있는 시간도 즐겁기에 가능하면 일을 빨리 끝내고 엘피스의 신선한 창조생물들을 구경하며 놀고 싶었는데.

이상하게 자꾸만 일이 꼬였다.

엘피스에서 성공적으로 관찰을 끝내고, 창조물 관리국에 이데아까지 등록하여 아모로트 바깥의 자연에 풀어놓은 창조생물이 무언가 말썽을 일으켰다고 했다. 엘피스에서 그러는 건 이데아를 등록하기 전 일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아모로트 바깥에까지 풀어놓을 정도로 성공적인 창조생물이 그러는 경우는 제법 드문 일이여서, 어떤 말썽이 자신을 기다릴까 조금은 두근거렸던 것도 없지 않아 있었는데. 기대감을 정확히 배신당했다고 해야 할까……. 지루한 토론이 이어지고 이어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는 건 재미 없었다.

누군가의 의견을 듣고, 결정을 내려주길 바란 거면 아젬을 부를 게 아니라 엘리디부스를 불러야 하는 일이 아니었을까? 몸이 근질근질하고,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하기 짝이 없는 시간이 흐르고서 자연 진화하여 이데아와 다른 양상을 띠게 한 개체를 모조리 '에테르로 되돌려서' 이데아에서부터 다시 창조하자는 결과로 끝이 났을 땐 하품까지 날 정도였다.

세계가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별이 더욱더 선한 미래로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간의 의견을 교환하고 답을 구하는 것이 토론이었으니까, 토론의 결과는 아모로트던, 아모로트 바깥이던, 14인 위원회던, 14인 위원회가 아니던 늘 한결같았으니 더더욱.

차이점이 있다면 14인 위원회의 토론은 별을 위한 큰 방침을 내리는 토론이고, 이 별을 살아가는 인간들의 토론은 사소하기로는 오늘 저녁의 식사 메뉴부터 시작해 크게는 거주지의 안녕과 마을의 발전을 위한 토론이라고 해야 할까.

어느 쪽의 토론이든, 인간이 살아가는 데에 있어 필요한 지식을 교류하는 것이라는 것은 여기나 저기나 다름이 없다고 느끼는 제가 아젬 자리에 앉아있는 게 우스운 일일지도 모르지만……. 결과가 뻔히 보이는 재미 없는 토론에 붙들려 있자니 엘피스에서 즐겁게 있을 친구들이 생각나 조금은 한숨이 나왔던 것 같기도 했다. 이번엔 또 어떤 창조생물들이 휘틀로다이우스의 눈을 빛내게 할까? 에메트셀크는 또 얼마나 한숨을 쉬고 있을까? 아, 생각만 해도 재밌는데 직접 보는 건 또 얼마나 재밌을 거야.

힘을 쓰는 건 자신의 특기 분야였기에, 가볍게 목을 움직여 어깨 근육을 풀었다.

빨리 해결하고 보고서를 대충 쓴 다음에 바쁘게 엘피스로 날아가면, 친구들의 일정에 아주 조금이나마 끼어들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조금이나마 웃음이 지어졌지만……. 엘리디부스가 아니라 아젬을 불렀을 때부터 이상하다 싶었던 일은, 결과적으로…….

자신에게 정말 잘 맞는 일이여서 미간이 구겨졌다.

손바닥으로 막을 걸 대검으로 막게 되었다고 해야 할까.

개체 수를 줄이기 위해 베어낸 창조생물이 두 개로 늘어날 때까지만 해도 어라, 싶었다.

그 두 개가 네 개가 되고, 네 개가 여덟 개가 되었을 땐 대체 평범한 자연에서 어떻게 진화를 해야 세포 분열을 하게 되는 거냐며 비명을 지르고 싶을 정도였고, 총 다섯 마리였던 특이한 종이 오십 마리로 늘어났을 땐 삭신이 쑤시는 기분이었다. 이래서는 간단하게 끝날 일이 아니었다. 분명 라하브레아가 이 특이 종에 눈독을 들일 테니 아주 상세하고 정확한 보고서를 써야 했을 거였고, 창조생물뿐만 아니라 이 지역 일대의 자연에 관해서도 보고서를 써야 할 테니 동물의 알로그리프나 식물의 할마투르에게 보낼 서류도 써야 할 테고, 어떻게 진화했는지 이치를 따져봐야 할 테니 파다니엘에게도……!

아, 젠장! 저절로 이가 득득 갈리고 쇳소리가 배어 나왔다.

대체 보고서를 몇 개를 써야 하는 거야? 이래서야 합류는커녕, 도와달라고 친구들한테 싹싹 빌어야 할 듯했다.

몸을 쓰는 거라면 자신 있었지만, 차분하게 앉아 보고서를 작성하는 건 정말이지 젬병이었다. 모든 정보는 투명하게 공유되어야 하므로, 이 자리에 없는 사람도 보고서를 읽고 똑같이 재연해볼 수 있도록 정확하고 구체적이며 사실적이게 써야 하니, 머리를 아무리 쥐어짜내봐도 자신은 정말로, 매끄러운 문장 같은 걸 쓰는 게 너무나도 어려웠으므로……. 한숨을 깊게 내쉬며 로브의 안주머니를 뒤적거려봤지만, 오늘따라 손끝에 걸리는 크리스털의 느낌조차 없어서 엎친 데 덮친 격이라는 말뜻을 이해해버리고 말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이데아 크리스털 가지고 올걸. 창조생물 몇을 돌려보내면 되는 일이라고 해서 두 손 가볍게 왔는데 이게 뭐람. 현장 녹화를 해서 정례 회의에 틀어버릴걸……. 듣고 보고 느끼고 알아서 판단하고 토론하시라고 할걸. 착잡한 마음에 몇 번이고 로브 안쪽의 주머니에 손을 넣어 더듬었지만 아무리 주머니를 뒤적거려봐도 크리스털 쪼가리도 손끝에 닿질 않아서 땅이 꺼질 만큼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젠장……! 철야, 확정이다.

마구잡이로 분할하는 개체를 어떻게 하지 못하고 끙끙대다, 우연히 잘린 단면을 불로 지져버리면 분열이 멈춘다는 것을 깨닫고 공기 중에 떠다니는 불의 에테르를 다 끌어모아 남발했다. 쉬엄쉬엄했다간 또다시 분열해서 증식할 테고, 너무 많이 증식했다보니 마을이 절반 이상 붕괴할 위험도 있어서, 결과적으론 힘으로 찍어 누르는 수밖에 없었다. 혹시라도 마을에 불똥이 튀면 안 되니 마을 주민들을 대피시키고, 몽긋 몽긋 불쾌하게 움직이는 것들을 최대한 외부로 끌어내어 불로 지지고, 태워버리고, 차라리 용암지대로 전부 끌고 가 던져버릴까 싶은 충동도 삭여가며 뛰고, 달렸다.

그렇게 49마리의 개체를 에테르로 돌려보내고, 남은 한 개체는 보고를 위해 가까스로 생포했을 땐, 과도하게 모인 불의 에테르로 공기가 매우 건조해져 있는 상황이었다. 습기가 바짝 말라버리니 수분기도 없었고, 수분기가 없으니 식물들도 바짝바짝 말라붙어 죽어버렸으며, 사람과 사람 사이 스치며 생기는 정전기로도 불꽃이 튈 정도라 손쉽게 마른 것들에 불이 옮겨붙고, 여기저기서 크고 작은 화재가 연속으로 발생하고, 그럼 그 불을 꺼야 하니 물의 에테르를 끌어왔지만, 불의 에테르로 가득한 대기에 물의 에테르를 끌어오는 건 지금 썼던 자신의 에테르의 두 배 이상을 소모하는 거라 정말이지 자기 자신을 탈수기에 넣고 빙빙 돌리기라도 한 것처럼 에테르를 바닥까지 쓰고 말았다.

아주 작은 일이었던 것이 이렇게까지 커질 줄은 저도 몰랐고 마을 사람들도 몰랐기에 허둥지둥 뛰어다니고 비명을 지르고 어이없어하다가도, 이것이 토론으로 결정된 합리적인 일 중의 하나였다는 것을 깨닫고는 이를 악무는 수밖에 없어서 기가 찼지만……. 그런데도 다른 14인 위원회를 부르는 게 아니라 혼자서 해결하고 나니 그래도 제법 보람찬 일이어서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균형이 깨져 엉망진창이 돼 버린 마을을 정상으로 복구하고나니 무려 3주나 지나있다는 걸 깨달았을 땐 황당하기도 했지만…….

에메트셀크와 휘틀로다이우스는 엘피스에서 아모로트로 돌아갔겠지?

일이 끝나자마자 그런 생각부터 들었다.

나 너무 많은 일이 있었어, 힘들었어! 하고 울며 안겨들고 싶은 심정이라 울컥했지만 이대로 아모로트로 돌아갔다간 보고서부터 쓰고 와! 하며 내쫓길 판이라, 코를 훌쩍대며 보고서부터 쓰려고 자리에 앉으니 하얀 건 종이고 까만 것은 글씨라, 집중은커녕 그냥 쉬고 싶어서 의자에 몸을 늘어트렸다.

한계까지 체내 에테르를 끌어 썼던 후유증일까, 마음이나마 편해지니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 몰아닥치는지 온몸이 뻑적지근하고 근육이 비명을 지르는 듯해서 오늘은 파업하기로 하고 눈을 감자, 자신과 똑같은 권능을 지닌 것이 엘피스 쪽에서 느껴졌다는 게 떠올라 눈이 번쩍 뜨였다.

에테르를 보는 눈이 없는 자신도 느낄 정도였는데, 거기에 있던 휘틀로다이우스와 에메트셀크는 단번에 알아보지 않았을까? 세상에 똑같은 권능의 소유자가 둘이나 존재할 리가 없으니, 다른 사람들은 아젬이 만들어낸 사역마 중 하나일 것이라 추측할 테지만 그 누구보다 가까이 지내는 두 사람만큼은 본질을 꿰뚫는 눈을 쓰지 않아도 눈치챌 것이 분명했다. 지금 자신이 해결한 창조생물처럼 자연스럽게 생겨난 일종의 이레귤러적 존재라는 것을. 어쩌면 에테르를 보는 눈으로 샅샅이 훑어보고 그것이 어떤 존재인지 파악하려 들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아젬은 빙긋 미소지으며 확신했다.

아마도 그 존재는, 자신을 매우 많이 닮았지만, 에테르는 희박한 그것은 자신처럼 친구들을 많이 좋아했을 거라고.

분명, 그들을 돕기 위해서 나타났을 거라고.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었지만 그런 확신이 들어 웃음이 났다. 그렇지 않고서야, 타이밍 좋게 엘피스 쪽에 나타날 리가 없었을 테니까. 장난기 많고 다정한 자신의 친구들이 그를 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지도, 어떤 행동을 했을지도 눈앞에 훤히 그려지고 있었지만 그런데도 궁금했기에 아젬은 몸을 일으켰다. 그 상황에 관해서 이야기를 듣고, 경험을 나누어 받는다 한들 직접 두 눈으로 보는 것과는 다르리라.

그러면 직접 가서 '보면' 되는 일이었다.

아젬은 씨익 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몸이 피곤한들, 이 호기심이라는 것은 언제든 아젬의 발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었으므로.

ㅡ그리고, 지금. 아젬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공간의 에테르에 새겨진 기억은 사라질지언정 변조되지 않는다.

물에 아주 짙은 농도의 시럽을 타면 투명하고 맑았던 것이 시럽의 맛과 향으로 바뀌는 것처럼, 평범한 인간과 동식물이라면 강한 에테르로 덮어 그들의 혼에 새겨진 기억을 어떻게 인위적으로 조정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세계는, 별의 기억은 조정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혼에 기억이 새겨지듯 별을 구성하는 에테르에도 기억이 새겨지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그것을 인지하고 들여다볼 수 있는 존재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이건 '권능'의 영역에 가까운 것이라, 에테르를 넘어 혼을 들여다볼 수 있는 휘틀로다이우스와 에메트셀크처럼, 에테르에 새겨진 기억을 자유자재로 읽고 해석할 수 있는 건 자신과 베네스 외에는 드문 능력이라 대부분의 사람은 모르지만…. 아무리 농도 짙은 시럽을 떨어트려 조정하려 든다고 한들, 별은 물이 아니라 원액 그 자체에 가까우므로 공간의 에테르에 새겨진 기억은 인위적인 개입으로 변경되거나 조정되지 않았다. 그저 세계의 순환에 따라 시간이 흘러가며 자연스럽게 옛 시간에 새 시간이 밀려와 덮어씌워져 사라져가는 것일 뿐.

그래서, 아젬은 전부 읽고 말았다.

자신의 권능을 가지고 있던 존재가 무엇이었는지. 그가 자신의 친구들과 스승님과 헤르메스와 어떤 대화를 하였으며 어떤 궤적을 그렸는지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헤르메스가 움직인 카이로스는 엘피스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닌, 휘페르보레아 조물원 전체를 대상으로 하고 있었으니 조물원 내에서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까지는 읽을 수 없었지만……. 그런데도 전후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정보는 전부 얻었기에 아젬은 참담한 마음으로 눈을 감았다. 드문드문 지워지고 구멍이 난 정보여도 얼추 끼워 맞출 수는 있었지만, 끼워 맞추고 파악할수록 머리가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에메트셀크가, 그 하데스가, 그……. 착하고 선량한 사람이.

쉽게 믿을 수 없는 정보들을 너무 많이 머릿속에 집어넣은 탓일까, 몸이 휘청거려서 맥없이 넘어질 뻔했지만 이를 악물고 참아내고 기억을 따라 걸어가다 보니 그가 처음 엘피스에 발을 댔을 때부터 떠날 때까지 발자취가 선명하게 남아있는 에테르 발자국이 느껴져 홀린 듯이 그 길을 따라 걸었다. 자신의 에테르와 같은 찬란한 주황색의 에테르는 너무나도 미약하고 옅어 금방이라도 사라져버릴 것 같았지만, 그 걸음을 따라 걷기만 해도 그가 느꼈던 감정들이 피부에 와 닿는 것처럼 느껴져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생각해보면, 사역마에 가까울 정도로 흐릿하고 옅은 에테르를 품고 있는 존재가 어떻게 그렇게 뚜렷한 발자국을 남겨놓을 수 있었나 싶었지만, 이곳에 왔던 '별'이 자신의 '환생체'이기 때문일 거라 생각하자 헛웃음이 났다. 아마 베네스도 이 발자국은 읽지 못하겠지.

오로지 자신만이, 이것을 느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무의식적으로 들어 괴로웠다.

이런 정보까지 알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그저 아주 약간의 호기심과, 저는 힘든 일을 하고 있었을 때 휘틀로다이우스와 에메트셀크는 즐거운 일을 하고 있었겠지 싶은 질투에 그런 거였는데, 생각지도 못한 거대한 해일에 몸부림치지도 못하고 그대로 쓸려나가는 느낌이라 아젬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그 길을 따라 걷고 또 걸었다.

휘페르보레아 조물원의 입구에서, 아무런 기억도 하지 못하고 투덜대고 있는 에메트셀크의 기억부터 제피로스의 갈채에서 베네스와 대련하던 기억과, 지성의 과수 아래에서 함께 기억을 읽던 모습이나……. 이 넓은 엘피스를 발로 뛰고 걸으며 에메트셀크와 휘틀로다이우스와 이야기하던 내용과, 프로필라이온에 처음 도착해서 에메트셀크를 보고 놀라던 모습과 베네스의 작별 인사와 함께 사라져버린 뒷모습까지 전부 읽고 나니 가슴을 강하게 얻어맞은 것처럼 아파져 와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지금 자신이 본 것은 진실이었을 터였다. 세계에 새겨진 기억은 조정할 수 없었으므로, 다소 사라진 것이 있더라도 내용 자체는 온전한 진실로 이 세계가 곧 파멸할 것이고, 그 파멸에는 별 바깥의 존재가 있음을 이제 자신도 알게 되었다.

그런데도, 아젬은. 자신이 지금 보고 듣고 느낀 것을 베네스에게조차 쉬이 꺼내지 못하리라는 것도 깨달았다. 그녀에게 자신도 보았음을, 기억하고 있음을 이야기한들 자신은 베네스의, 14인 위원회의 의견에도 찬성하지 않을 테니까.

낙원을 되찾기 위해 지금 인류의 절반이 희생했음에도 돌아오는 것은 없었지 않나. 그렇다면 희생만이 답은 아니었을 터였다. 종말이 어떻게 발생하는지는 보지 못했으나, 조물원에 같이 들어갔으나 함께 나오지 않고 모두의 기억에서 잊혀버린 메테이온이라는 존재가 종말에 관여되어있다면 에테르가 아닌 뒤나미스라 명명된 그녀가 다루는 미지의 힘 때문이었을 테고, 그렇다면 그 미지의 힘을 이겨낼 방법을 찾으면 되는 것이 아닐까. 아모로트에서도 가장 뛰어난 14인 위원회가 방법을 찾지 못했다면, 아모로트 바깥에서 찾으면 되는 거였다. 자신은 아젬으로서, 아모로트 바깥의 일을 듣고, 해결하는 사람이었으니 이 별의 구석구석을 다 돌아다녀서라도 방법을 찾아내면, 그러면.

"……하데스."

하지만, 자꾸만 가슴이 먹먹해지고 고통스러워서 울음이 새어 나왔다. 하데스, 네가 왜. 네가.

싫다 안 한다 삐죽한 말만 잔뜩 하는 주제에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고 다니는 네가 걱정스러워서, 일부러 더 짓궂게 군 적도 없지 않아 있었다. 원리원칙을 따지고, 본인이 이해하지 않으면 움직이지조차 않는 고집쟁이의 짐을 나누어 받으려면, 그를 설득하거나 이해시키는 방법밖에 없었으므로, 일부러 괴롭히고 장난쳐서라도 그 몸을 거꾸러트리고, 넘어져 있을 때 낼름 짐덩어리들을 짊어지고 도망쳐버리면 어쩔 수 없이 포기하곤 했으니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언젠가 의무와 신념에 짓눌려 죽어버릴 것만 같아서 자꾸만 그의 샛노란 별빛 색 눈을 들여다보게 되었으니 그가 얼마나 다정하고 선량한 사람인지는 누구보다 저 자신이 더 잘 알았다.

자신이 아젬 자리에 오르기 전부터, 그가 에메트셀크가 아닌 하데스라 불릴 때부터 알고 지냈던 사이였고, 지금은 누구보다 가까운 사이였으니 더더욱.

그러나, 그가 맞이할 미래가 너무나도 안타까운 나머지 자꾸만 울음이 북받쳐왔다.

네가 왜 그런 일을 겪어야 해.

하데스, 왜 그렇게 오랜 시간을 매달려 있었어. 다 내려놓고 쉬어도 아무도 네게 뭐라 할 사람이 없었잖아.

네가 그리워하고 추억하는 이들조차 너를 떠올리지 못하고, 우리의 낙원은 부서진 채로 바닷속 깊은 곳에 가라앉았지. 나도 너를 잊고……. 네가 그렇게 자랑스러워하던 라하브레아도, 우리를 아끼던 엘리디부스까지도 전부 변하고 망가져 갈 때, 혼자서 또렷한 정신으로 선량한 네가 제정신일 땐 하지 않았을 일들을 하나하나 하면서 너는 무슨 생각을 했어. 왜, 과거를 내려놓지 못하고…….

살아남은 너라도 살았어야지. 왜 너의 무한한 에테르로 우리의 낙원을 다시 빚고, 추억하고…….

끄흑, 하고 울음이 터져 나와 양 뺨을 적셨다. 코끝이 시큰하고, 목에서 울음이 북받치는 게 느껴졌지만, 이 서러움을 어디다 토해낼 수도 없었다. 누구를 붙잡고 토로할 수 있을까. 어떻게든 해결하고자 혼자 뛰어다닐 베네스에게? 전부 잊어버린 에메트셀크와 휘틀로다이우스에게? 모든 일의 시작인 헤르메스에게? 어디로 사라졌는지도 모를 메테이온에게? 아니면, 이 모든 기억을 남기고 간 '별'에게?

왜 알려주었느냐고 원망하고 울분을 토해낼 존재라도 있었다면 삭힐 수 있었을 감정이, 둑을 터트리고 제게 쓸려 들어 온다.

오로지 기쁨만 알고 있던 낙원의 존재에게, 지독한 절망과 슬픔을 알게 해 준 별이 원망스러웠다.

이대로 멈춰있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별이 일러준 대로 이 세계는 끝나버릴 테니, 지금이라도 두 발로 뛰고 날아다니며 방법을 찾아야만 했을 터였다. 14인 위원회보다 먼저, 베네스보다 먼저……. 그렇지 않으면, 애써 별이 과거까지 거슬러 올라와 미래를 이야기해준 보람이 없어지지 않나.

하데스, 이 바보야. 네가 그런 짓을 한다고 해서 우리가 고마워할 줄 알아. 네가 그렇게 오랜 시간을 힘들어하고, 고통스러워하고, 결국엔 다 내려놓고 쉬고 싶었음에도 쉬지도 못하고, 그렇게나 자는 것을 좋아하는 네가 잠들지도 못하고 계속해서 깨어있었다는 사실을, 누가 좋아했을 것 같아?

평소처럼 싫어, 하고 거절하지 그랬어. 미친 생각이라고, 그렇게 될 리가 없다고 그 좋은 머리로 냉정하게 판단하고 딱 잘라내지 그랬어. 너는 사람이 너무 좋아서, 제대로 거절하지 못하니까……. 그러면서 온갖 일을 떠안고 힘들어하니까, 너를 혼자 둘 수가 없는 건데.

눈물이 그치지 않고 쉼 없이 흘러나왔다. 양 뺨이 뜨겁고, 머리가 어지러우면서 호흡이 모자라, 거칠게 숨을 내쉬면서도 뺨을 닦지도 못한 채로 멍하니 울음만 터트리고 있었다. 이 바보야, 이 미련탱이야, 이 멍청아, 똑똑한 척은 다 하면서 결국 순박해 빠진 사람아…….

그렇기에 너를 좋아했고, 그렇기에 너와 함께 하고 싶었어.

지금, 이 순간, 괴로워 죽을 것만 같은데도 네가 너무 보고 싶어.

 


가끔 상상해 본 적은 있었다. 저 빌어먹을 놈이 정말 슬퍼서 우는 얼굴이 보고 싶다고.

아젬으로서 아모로트 바깥을 떠도는 사람이 돌아오면 제일 먼저 자신에게 찾아오는 게……. 내가 있어야 할 곳은 네 옆이잖아 하면서 치대오는 몸짓에, 그게 본심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술렁거리는 제 마음이 싫었다. 낯선 향을 덕지덕지 묻히고 생전 가야 본 적이 없는 에테르로 범벅이 되어선 보고 싶었다며 곰 같은 덩치를 비벼대고 입을 맞춰오는 게, 싫다 싫다 하는 저를 깔아뭉개고 기어코 열어젖히고 마는 손길이 싫었다.

모자란 하데스를 채워야겠다며 저를 울리고, 잠 못 들게 괴롭히고, 내일 일정 따위는 상관없다는 것처럼 저를 열어젖히고 끝내는 탈진하게 만드는 그 손이……. 그러면서도, 제 옆에서 세상모르고 곤하게 잠들어 있는 얼굴을 보면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풀어지고 마는 것도. 벗은 몸에 새로운 흉이 져 있지는 않은지, 그의 찬란한 태양 빛 에테르가 소실되거나 모자란 곳은 없는지 꼼꼼하게 살피는 것이 어느샌가 버릇처럼 굳어져 버린 것도…….

생각해보면 이건, 정말로. 다 아젬 녀석이 저를 이상하게 만든 탓이니 정당방위라고 생각했다.

이쪽은, 매번 괴롭히고 괴롭혀서 울다가 지쳐 잠드는데. 저는 한 번도 그 녀석이 진짜로 우는 얼굴을 본 적이 없었으니까.

알겠으니까 제발 적당히 좀 하라고 밀어내도 꼭 울 때까지 밀어붙여선, 지금 아니면 언제 보겠느냐며 히죽대고 얼굴을 들이미는 게 진짜 최악이었다. 싫다고 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하는데도 하데스가 말하는 '싫어'는 '좋아' 아니야? 하면서 히죽대고 히끅, 히끅 숨이 넘어가는 와중에도 울면서 소리치면 '그래, 나 때문에 하데스가 이상해졌으니까 내가 평생 책임질게.' 따위의 말을 하며 제 등을 쓸어내리는 가칠가칠한 손가락이 정말 싫었다. 다 싫어 죽겠는데 자꾸만 저도 모르게 그의 태양 빛 에테르를 쫓고 마는 게…….

스스로가 정말로 어이없고 우스운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쩌겠는가.

그 녀석의 새파란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히면 내가 넘어갈 것 같아?! 하고 모난 소리를 하다가도, 나도 모르게 멈칫하고 마는 걸 저 자신보다 저 녀석이 먼저 눈치를 챈 것 같아 어이가 없기도 하다가, 제 약점이라는 것을 알고 매번 써먹곤 하는 영악한 놈들을 - 그래, 무려 둘이나! - 정말 울려버리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한번은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의 낙원은 언제나 행복하고 즐거웠기에. 혹은, 행복하지 않으면 행복할 수 있도록 이 별을 보살피고 가꾸는 것이 우리 14인 위원회의 일이기에, 어쩌면 나는 평생을 가도 저 녀석이 슬퍼서 우는 얼굴은 볼 일이 없겠다 싶어서 희미하게 웃음을 지었던 것 같기도 했다. 저도 어쩔 수 없는 생리현상으로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거였지, 정말 속상하고 아파서 울었던 적은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더 그 녀석이 기를 쓰고 매달려서 끝끝내 보고 마는 거겠지만.

아니, 사람이 우는 얼굴을 대체 왜 보고 싶어 하는 거람. 나가서 대체 뭘 배워서 왔길래 그런 악취미가 생겼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이쪽은 저놈들이 매번 장난처럼, 눈물을 눈꼬리에 매달고 '에메트셀크 제발~!' 하며 우는 건 진짜로 슬퍼서 우는 게 아니라는 걸 아는데도 멈칫하게 되는데, 대체 어떻게 된 머릿속이어야 그걸 보고 웃을 수 있느냐고.

함께 보낸 밤이 수백 번쯤 되다 보니, 이제는 아젬이 달려들고 비비적대는 귀찮은 짓도 우리만의 다녀왔어, 어서 와 쯤의 인사로 받아들이게 되었음에도 고집스럽게 환영의 인사보다 싫다고 밀어내버리는 건, 아무래도……. 그 녀석이 우는 얼굴을 보고 싶다는 삐죽한 마음 때문일 거라고, 매번 저를 울리고 웃음을 짓듯이 언젠가 한 번쯤은 저처럼 울다 지쳐 잠드는 꼴을 꼭 봐야겠다고 다짐했던 그 마음 때문일 거라고, 에메트셀크는 애써 생각했다.


"끄흑, 하데스……. 하데스…!"

아모로트에 돌아오자마자 제 집에 들이닥쳤는지, 코끝에 매캐한 에테르의 냄새가 났다. 화염 속성의 에테르가 재 하나 남김없이 활활 타오른 듯한 매캐함에 인상을 찌푸리자, 허리가 부러질 듯한 강도로 저를 와락 끌어안고 어깨에 고개를 묻은 아젬 녀석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갑자기 들이닥친 놈을 받아주느라 제 몸이 휘청거려 바닥에 넘어졌는데도, 평소라면 헤헤 웃으며 보고 싶었다고 입술을 문대고 얼얼한 뒤통수며 꼬리뼈 부근을 손으로 살살 쓸어주고 얼굴을 붉혔을 녀석이.

"뭐야, 왜 그래……."

이런 아젬은 낯설었다. 엉, 엉 소리를 내며 아이처럼 울며 저를 꽉 끌어안고 우는 아젬 같은 건 몰랐다.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아서, 혹은 엉망진창이 되어 아젬 혼자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게 되어서, 혹은 결과적으로 자신이 하려고 했던 일의 정반대로 진행이 되어 속상할 때도 눈물 한 방울 보인 적이 없던 녀석이 목 놓아 우는 모습이 너무나도 낯설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퉁퉁 부어버린 얼굴로, 자신의 어깨가 축축하게 젖었는데도 그칠 생각도 없이 울고 있는 모습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되어 허공에 뜬 손이 바르르 떨렸다. 왜, 왜 우는 거야? 그렇게 서럽게. 베네스가 아젬에서 내려올 때도, 명계로 가실 거냐며 눈물을 뚝뚝 흘렸던 녀석이긴 하지만 그때도 이렇게 서럽게 울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왜……?

한 번쯤은 이 녀석이 서럽게 우는 게 보고 싶다고,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정말로 서럽게 우는 얼굴을 보니 누군가 뒤통수를 강하게 내려친 것만 같은 기분이 되어 입술이 달싹이다가도 다물렸다. 나가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너를 이렇게 힘들게 한 일이 있었어? 목구멍에 그런 말이 걸렸다가도, 뱉어낼 수가 없어 목구멍이 바짝 조여들었다. 하데스, 하데스… 하면서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물기가 진득하게 배이고, 서러움과 비통함이 그득그득 쌓여, 서럽게 목 놓아 우는 목소리가 점점 갈라지는 게 이러다 큰일이 나겠다 싶었다. 육체를 구성하고 있는 수분을 다 짜낼 것처럼 히끅대고 우는 아젬은, 정말로 낯설기 그지없었고 충격적이어서 호흡조차 잠시 멎었던 것 같았다. 왜, 왜 그렇게 우는 거야.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눈동자가 데구르르 구르다가 아젬을 지나 익숙한 바닥을 바라봤다.

여전히 손은 공중에 붕 뜬 채지만, 저를 간절하게 붙잡고 있는 아젬의 손을 떨어트리지도 못한 채다.

이걸 놓으면 떨어져 죽기라도 할 것처럼, 간절하고 긴박하게 붙들고 있는 손이 로브를 쥐어 채다 못해 제 피부까지 쥐어 잡아서 아릿하게 아팠지만, 그 아픔보다 더 이 녀석이 왜 우는지 가늠조차 안 되니 어쩐지 저도 서러워지는 듯한 기분이다.

옆에서 엉엉 울고 있으니 감정이 옮기라도 한 건지, 눈가가 시큰하고 코끝이 매워져 가슴이 콱 답답하고 숨이 바르르 떨렸다. 평소엔 시답잖은 일로도 소환진을 열더니, 네가 이렇게 울면서 아모로트로 뛰어올 때까지 왜 혼자 있었던 거야. 내가 아니면 휘틀로다이우스라도 불렀어야지. 엘리디부스라도 불렀어야지. 왜 서럽게 여기까지 혼자 뛰어온 건데.

……네가 이렇게 힘든데, 왜 나를 부르지 않았어?

목 끝까지 그런 말이 올라오다 꾹 삼켜졌다.

어쩐지, 말을 뱉어내면 저 녀석이 더 서럽게 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저 묵묵히 안겨만 있을 뿐이었다.

다독여주지도, 그렇다고 닦아주지도 못한 채로 한참을, 정말 한참을 저를 붙들고 울던 아젬의 몸에서 힘이 빠져서 깜짝 놀라 아젬을 내려다보니 양 뺨이 물에 젖은 채로 시뻘겋게 달아올라선 색, 색 숨을 내쉬는 게 울다 지쳐 잠든 것 같아 심장이 발끝으로 떨어졌다.

쿵, 쿵, 쿵 하고 숨이 가쁘게 쉬어지고, 이 녀석이 대체 왜 이러나 싶었지만 하도 울어서 온몸이 뜨끈한 녀석을 일단 눕혀야 할 것 같아 에테르를 움직여 간단한 마법을 썼다. 축축하게 눈물에 젖은 로브 두 개를 흩트리고 새로이 창조한 후에, 아젬의 몸을 띄워 침대에 천천히 눕혔다. 평소보다 조금 더 두툼하게 이불을 변경하고 미지근한 물을 만들어 아젬의 얼굴을 닦아주었더니 눈은 퉁퉁 붓고 얼굴은 시뻘겋게 열이 오른 데다 내쉬는 숨까지도 뜨겁고 불규칙적이라, 무거워진 마음으로 침대에 앉아 가만히 손을 들어 아젬의 뺨을 만져주었다. 한없이 낯설고, 어색하고, 민망하고, 또…….

……이상하게 코끝이 자꾸만 아려왔다. 네가 우는 얼굴을 보고 싶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렇게는 아니었어.

네가 이렇게 속상해하고, 서러워하고, 어쩔 줄 몰라 하며 우는 얼굴을 보고 싶은 건 아니었어.

혹시, 내가 그런 것을 바랬기 때문에, 네게 나쁜 일이 생긴 거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그렇게 반나절을 꼬박 자고 일어난 아젬은 퉁퉁 부어버린 얼굴로 부스스 웃어 보였다.

언제 울었느냐는 듯, 말끔해진 얼굴이었으나 붙잡고 몇 번을 캐물어도 묵묵부답이기만 하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말해보라고 달래고 회유하고 화를 내고 짜증을 내봐도 그냥, 이상하게 울고 싶어졌었어 하며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는 답답함에 조금, 아주 조금 서운하기도 했다. 이상한 곳에서 고집이 센 놈이라는 건 이미 애초에 알고 있었다. 그 라하브레아 앞에서도 고집을 꺾지 않는 놈이었고, 한번 마음먹은 건 어떻게든 파헤치고 끝끝내 본질에 닿고 마는 놈이라는 건 그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그건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신념과도 같은 거라고, 베네스가 웃으며 말하기 전부터 파악하고 있었던 거니까 이 녀석이 숨기려고 하면 얼마든지 숨길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그럼, 보여주지 말았어야지.

서럽게 울면서 매달리는 꼴 따위는, 숨길 거면 철저하게 숨겼어야지.

자꾸 신경 쓰이고 무슨 일인지 도와주고 싶어지잖아.

네가 부탁하지 않아도 내가 먼저 나서서 네 일을 도와주고 싶게 만들지 말았어야지.

"이봐, 아젬. 정말 말 안 해줄 거야?"

"으음……. 그렇게 신경 쓰여?"

여전히 퉁퉁 부어있는 얼굴로 웃는 꼴이 자꾸만 거슬려 미간이 좁혀진다. 지금 제 얼굴이 어떤 꼴인지 모르니까 저렇게 말하는 거다 싶다가도, 아모로트에 오면 꼭 제 몸을 열어젖혀야만 성에 찬다는 것처럼 조급하게 굴던 녀석이 멀찍이 떨어져서 거리를 두고 있는 게 자꾸만 눈에 거슬렸다. 싫어 죽겠는 것들이 익숙하게 되도록 만든 게 누군데, 인제 와서 어색하게 굴면 티가 안 나는 게 더 이상한 일 아닐까. 저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것도, 미묘하게 거리를 두려는 듯한 몸짓들도. 그런 걸 보면 자꾸만 저 녀석이 운 이유가 자신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어버리니까.

"……나 때문에 운 거냐?"

직설적으로 캐물으니, 아젬 녀석의 표정이 묘하게 굳는다. 또다시 눈이 축 처지고 습기가 차오르는 게 정말 무슨 일 있다 싶어 이제는 들어야겠다는 마음으로 가까이 다가가자, 아젬이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는 미안- 다음번에, 다음에 꼭 이야기해 줄게. 하며 지맥을 타고 사라져서 멍하니 아젬이 앉아있던 곳을 바라봤다. 네가 이러면, 나는 어떻게 생각해야 해.

매번 날 울리고 고집스럽게 밀어붙여서 속내를 다 까발리게 만든 건 너였잖아.

나는 네가 바라는 대로 해줬는데, 너는 그렇게 도망가버리면 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 이하 잡소리 *

판데모니움 하다가, 테미스가 말하는 '아젬이 빛전을 인식하고 있었으며 그가 도움이 될 거라고 믿었기에 나도 너를 믿었다'를 보고 혹시 이런 일이 있었지 않을까 생각하고 날조해본 결과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젬이 조디아크 소환에도, 하이델린 소환에도 찬성하지 않고 위원회를 박차고 나가 독자노선을 탄게 아닐까...... 사랑하는 친구들이, 스승님이, 아끼는 동생이, 매번 투닥거리고 싸우는 꼬장꼬장한 노인네가 1만 2천년이나 고생하고 그 사이에 몇 번이고 빠그러지는 미래를 엿본 아젬이라 혼자서 개고생하다 죽었...

...죽...

......었을거라 생각하면 제가 참 힘드네요 ^_T) 흑흑 효월비화 앙코르가 저를 죽였어요... 그게 마지막일리가 없어 우리 애들 그렇게 헤어지고 1만 2천년 후에 되다만쪼가리로 만난게 실화냐고요.......

오전 내내 매달려서 작업하면서도 훌쩍훌쩍 울었더니 진이 빠져서 내일은 조금 더 행복한 내용으로 써야겠습니다

마침 내일 기다려 마지않던 도쿄 펜페날이니 즐거운 소식들이 많았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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