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기록

영웅의 죽음

22.05.28 작성

-주의: 5.3 크리스탈의 잔광 스포일러 / 도탈 족 환생 설정 날조 있음 / 특정 빛전 묘사 없음 / 대명사 '그'는 성중립 대명사로 쓰였습니다.

빛의 전사가 죽었다. 너무 이르지도, 헛되지도 않았으나 슬픈 죽음이었다.

모르도나의 타타루에게 사망 소식을 전한 사람은 알리제와 알피노였다. 마침 영웅과 여행을 떠났던 이가 그 둘이었기 때문이다. 부고를 품고 에오르제아로 돌아오는 동안 남매는 울지 않았다. 슬픔을 드러내면 영웅의 죽음을 영영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아서.

알리제와 알피노가 급하게 퍼붓는 치유 마법의 빛 속에서, 영웅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사랑해…. 너희…. 모두.’ 르베유르 남매는 알 수 있었다. 빛의 전사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모두 부르기에는 그에게 허락된 시간이 너무 짧았다는 것을. 그 짧은 유예마저도 남매가 에테르를 낭비해 매달린 덕에 생겨났다는 것을.

타타루도 비슷했다. 영웅의 사망 소식에는 충격을 받았고, 영웅의 유언을 듣고는 눈물을 보였다. 타타루는 방랑을 업으로 삼은 새벽의 혈맹 중 유일하게 한곳에 정착한 사람이었다. 빛의 전사가 유언장을 맡긴 건 그 때문이었다. 영웅은 생각날 때마다 유언장을 고쳤는데, 새로운 모험에서 돌아온 직후에는 반드시 타타루를 만나러 왔다.

타타루는 언젠가 유서 뒷부분을 슬쩍 들춰 본 적이 있었다. 첫 장에는 시신의 처리, 장례 방식, 유산 분배 방식 같은 것이 적혀 있었다. 다음 장부터는 부고를 전할 사람들의 이름이 빼곡했다. 모험가가 세계 각지를 누비며 인연을 맺은 사람들의 이름이었다. 영웅의 마지막 말은 그가 남긴 유언장과 다를 바 없었다. 자신의 최후를 모르는 채로 남긴, 그 최후와 꼭 어울리는 유언장과…. 타타루가 건넨 유서를 읽은 뒤에야 알리제와 알피노는 울었다.

에오르제아의 장례 풍습은 일반적으로 매장이었다. 그러나 영웅은 시신을 화장해 달라고 부탁했다. 타타루가 눈물을 닦자마자 새벽의 혈맹 전원에게 연락을 돌린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영웅의 전우들이 영웅의 얼굴을 본 뒤 그를 떠나보낼 수 있도록.

새벽의 혈맹은 화장에 동의했다. 아씨엔이 시체를 그릇으로 사용한 전례가 가장 큰 이유였다. 매장지를 고르기도 쉽지 않았다. 영웅의 무덤을 만들고자 하는 나라는 많을 테니까. 저마다 강력한 명분을 가지고 있었거니와, 영웅의 무덤에는 관광 수익이며 국가의 위상과 같은 여러 이득이 걸려 있었다. 외교적 마찰이 발생하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했다.

장례식에 관한 사항을 모두 논의한 뒤, 현인들은 오랜만에 역할을 나눴다. 야슈톨라는 림사 로민사에, 산크레드는 울다하에 소식을 전하기로 했다. 그리다니아를 담당했던 사람들은 모두 혈맹을 떠났기 때문에 위리앙제와 알피노, 알리제가 맡았다.

울다하로 가던 산크레드는 문득 중얼거렸다. 영웅은 죽은 뒤에도 편하지 않군…. 민필리아도 그랬다. 세계도, 남겨진 사람도 그 애를 귀찮게 했다. 빛의 전사는 그나마 나은 처지였다. 이제는 적어도 세계가 그에게 매달리지 않았으니까. 남은 사람끼리의 일은 남은 사람들이 해결할 수 있었다.


티타니아는 자신의 어린나무가 별바다로 돌아갔다는 것을 알았다.

픽시에게 죽음이란 큰 의미가 없다. 에테르는 순환하고 죽은 자는 다시 태어난다. 그처럼 페오의 어린나무 역시 다시 세상으로 돌아올 것이다. 아쉬운 건 그때까지 어린나무를 볼 수 없다는 것뿐.

나의 어린나무, 픽시의 기억력은 아주 형편없어. 백 년 전 같이 놀았던 아이는 기억하지만, 그 아이가 지금 어떻게 되었는지는 기억 못 하지. 그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잠깐 궁금할 뿐이야. 나는 아마 이 순간이 지나면 네가 별바다에 간 것조차 잊을지도 몰라. 나무가 없으면 가지도 없는걸. 하지만 픽시의 형편없는 기억력으로 노력해 볼게. 네가 보여준 것들을 잊지 않을게.

그러니 다음에도 너의 모험을 내게 보여줘.


도탈 카에 날아든 부고를 읽고 사두는 생각했다. 자신이 아직 죽지 않은 이유는 이 소식을 듣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고.

오래전 에오르제아의 영웅은 사두에게 상담한 적이 있었다. 도탈족이 아닌 전사도 도탈족으로 환생할 수 있느냐고 말이다. 사두는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대답해주었다. 가끔 환생해야 할 도탈족의 수보다 많은 아이가 태어나곤 했다. 대체로 쌍생아고, 혼을 확인해보면 도탈족과 격렬한 싸움을 벌이다 동귀어진한 적인 경우가 많다고. 하지만 도탈족으로 환생했다는 건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는 뜻이니 함께 키운다고.

자신도 도탈족에서 환생할 수 있을까 묻는 영웅의 목소리가 진지했다. 사두 도탈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니 오래 살라’는 뒷말에는 정색했다. ‘이게 무슨 악담이냐?’ 묻자 영웅은 환생한 자신의 이름을 불러 줄 사람은 사두밖에 없지 않냐고 대답했다. ‘난 오래 살 테니까 사두도 오래 살아야지.’

그렇게 말한 사람치고 일찍 갔구나, 사두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털어냈다. 우리는 곧 다시 만날 테니, 오래 슬퍼할 필요는 없지.


린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어둠의 전사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이 분명하다고.

영웅이 1세계에 발길을 끊은 지도 오래되었다. 그는 1년에 단 한 번뿐일지라도 린을 만나러 오곤 했다. 그런 해에는 모험하느라 바빴다는 말과 함께 이런저런 여행담을 들려주었다. 산크레드와 위리앙제의 근황 얘기도 그만큼 길어졌고.

어둠의 전사는 종종 좀 더 자주 오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린이 성인이 되고, 크리스타리움의 첫 동성 부부로 가이아와 혼인 신고를 한 뒤에는 말하지 않게 되었지만. 그렇게 어른 대접을 해주더라도 어둠의 전사는 린을 아끼고 염려했다. 1세계에 올 수 없는 산크레드와 위리앙제의 몫을 제외하더라도 그랬다.

소식이 끊긴 지 3년째 되던 해, 린은 영웅에게 변고가 생겼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 뒤로 린은 매일 어둠의 전사가 무사하기를 기도했다. 몇 년 전부터는 가이아도 함께 손을 모았다. 한 사람보다는 두 사람의 기원이 더 강하지 않겠느냐며. 그 덕분일까, 린은 뒤늦은 부고에도 놀라지 않았다.

전령을 맡은 사람은 야슈톨라 룰이었다. 그는 얼마 전 차원 이동 술식 안정화에 성공했다. 아직은 혼자서 이동하는 게 다인 데다가 에테르 소모량 절감에 대해 더 연구해야 하지만, 성공은 성공이었다.

야슈톨라는 챙겨온 것을 내밀었다. 편지와 유골함이었다. 꼭 시신이나 뼈가 있어야지만 무덤을 세울 수 있는 건 아니었으니, 영웅의 무덤입네 주장하는 빈 묘가 여기저기 생길 지도 몰랐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뼈를 가루로 만들어서 뿌리자는 의견이 나왔다. 그렇게 하면 빛의 전사는 온 세상에 묻히는 셈이니까.

유골함에는 원초세계에 뿌리고 남은 뼛가루가 들어 있었다. 야슈톨라가 말했다. 영웅은 그저 자기 시신을 태워 달라고 했을 뿐이지만, 우리 결정을 들었더라면 1세계도 잊지 말라고 했을 거라고.

어둠의 전사가 남긴 마지막 말을 린 역시 들었다. ‘사랑해, 너희 모두.’ 흘러넘치기 직전의 슬픔에 일곱 개의 음절이 물방울처럼 떨어졌다. 슬픔이 범람해 그제야 린도 울었다. 야슈톨라는 린이 울음을 그치고, 어둠의 전사가 남긴 편지를 다 읽을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린은 이 부고를 들을 때까지 긴 시간을 기다렸으므로.

린이 마음을 추스른 뒤, 야슈톨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골을 뿌리는 건 맡길게요. 지금의 1세계를 가장 잘 아는 건 당신일 테니까요.”

“가시게요? 바로 떠오른 곳이 있는데….”

“다음에 다 같이 듣죠. 좀 오래 걸릴지도 모르지만….”


그라하 티아는 부둣가에서 바다를 보고 있었다.

새벽의 혈맹은 영웅의 뼛가루를 바다에 뿌렸다. 혼이 죽어서 가는 곳을 별바다라고 부르기도 하고, 물이 세상을 순환하며 어디로든 간다는 점에서 모험가에게 어울리는 장소였다. 1세계의 린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레이크랜드의 호수에 뼛가루를 뿌렸다고 했다.

이제는 영웅이 죽어도 8번째 재해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라하가 되돌리고 싶었던 과거는 여전히 이곳에 있다. 빛의 전사가 세상을 떠났음에도.

모험가는 수명이 짧다. 직업으로서도, 직업 종사자로서도. 그래서인지 영웅은 친구와 동료들에게 보낼 편지를 상자째 쌓아뒀다. 아마 세상에서 가장 많은 편지를 유품으로 남긴 모험가일 것이다. 유언장을 부탁받은 타타루가 새벽의 혈맹을 조르르 세워놓고 두툼한 편지를 나눠주는 장면은 제법 웃기기까지 했다. 살아있었더라면 이 정도일 줄 몰랐다며 민망해했을 것이다.

그라하에게 남긴 편지에는 이런 말이 있었다.

‘함께 모험을 떠나자, 약속해놓고 어겨서 미안해. 그렇다고 모험을 포기하진 말았으면 좋겠어. 나는 나만의 모험을 할 테니, 그라하는 그라하만의 모험을 해줘.’

물이 모여 바다가 되고, 가볍게 떠올라 구름이 되고, 다시 모인 끝에 비가 되어 내리듯이. 우리가 별바다를 거쳐 다시 세상에 돌아왔을 때, 비록 서로가 서로인 것을 아무도 모른다 해도.

‘다시 만나면 서로 어떤 모험을 겪었는지 얘기해주기로 하자.’

출항이 임박했으니 어서 배에 타라고 누군가 소리쳤다. 알리제가 그라하에게 빨리 오라는 듯 손짓을 했다. 오랜만에 새벽의 혈맹이 다 함께 움직이는 자리였다. 모험가를 심심하게 만들 순 없었다. 그러자면 지금의 여행에 충실해야겠지. 그라하는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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