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기록

이기주의자를 위한 영웅론

야슈톨라, 숲에서 2년을 지내다

-주의: 메인 퀘스트 5.3 크리스탈의 잔광 스포일러 포함 / 대명사 '그'는 성중립 대명사로 쓰였습니다.

야슈톨라 룰은 이기적인 사람이다.

야슈톨라는 여태껏 이 명제를 의심한 적 없었다. 누군가 그를 가리켜 이기주의자라고 하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작 이 정도의 자기애를 이기주의라고 한다면 댁의 인생도 가엾기 짝이 없다는 동정은 덤이다. 갓 현인 인증을 받았을 때는 이렇게 받아치지도 못했다. 야슈톨라에게도 고지식하고 순진한 어린 시절이 있었다. 귀 기울여야 하는 말과 무시해도 되는 말을 구분할 줄 몰랐다.

먹이고 입히고 가르친 스승과도 말싸움하며 자란 덕에 크게 흔들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당신은 이기적이라는 문장을 두 번 생각하고 넘어갈 정도로는 신경 쓰였다. 물론 언젠가는 아무 가치도 없는 말임을 알아차렸겠으나, 스승의 귀신같은 눈치가 깨달음의 때를 앞당겨 준 건 분명했다.

마토야는 무슨 일이냐고만 물었다. 평소의 야슈톨라였다면 포괄적인 질문에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무슨 사고를 쳤는지 읊으라던 때처럼 엄한 목소리가 습관을 건드렸다. 어쩌면 조금쯤은 타지 생활에 지쳐 있었던 걸지도 몰랐다. 또 조금쯤은 동굴에서 수학하던 시절로 돌아간 듯 안정감을 느꼈던 걸지도.

‘마토야 눈에도 제가 이기적인 애로 보이나요?’

마토야는 드물게 정색했다. ‘누가 그런 헛소리를 지껄여?’ 묻는 목소리가 꽤 무서웠다. 누가 그런 말을 했는지, 말의 맥락이 어땠는지, 듣는 너는 어떤 기분이었는지…. 한바탕 캐물은 뒤에는 야슈톨라의 직장을 원격으로 한바탕 뒤집었다. 막상 야슈톨라는 민망했다. 독립한 뒤에도 스승의 로브 자락을 쥐고 있는 어린애가 된 기분이었다. 자신에게 핀잔을 주던 사람이 입을 열지 않는 것은 편했지만.

괴팍한 성격에 한 번 정도는 놀릴 법도 한데, 마토야는 그날의 일을 한 번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어린 제자가 치고 다녔던 사고를 끄집어낸다면 모를까. 야슈톨라는 궁금했다. 왜 스승님은 나의 바보짓을 감싸주는지.

좀 더 나이를 먹은 야슈톨라는 이유를 안다. 마토야 역시 똑같은 말을 듣곤 했을 테니까. 어쩌면 그도 이기적이지 않은 사람의 함정에 빠진 적이 있으리라. 어쩌면 야슈톨라처럼 누군가가 수렁에서 구해줬을지도 모를 일이다. 스승은 젊은 시절 얘기를 해준 적 없고 제자가 찾아볼 수 있는 거라곤 수십 권의 논문뿐이지만, 자신을 위한 말을 구분할 수 있게 되면 모를 수가 없다. 그조차 깨닫지 못하는 아이를 현인 마토야가 제자로 키웠겠는가?

우습게도 야슈톨라는 자신에게 이기적인 면이 없지는 않다고 자평했다. 친구나 연인으로 깊이 사귀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사람. 적당히 거리를 두었을 때 가장 건실한 관계를 쌓을 수 있는 사람. 그 이상 가까워져도 맘고생 없이 남을 수 있는 사람들은 정해져 있다. 누구든 놀랍도록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사람, 그 정도 이해력은 없지만 자기가 준 만큼 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 관심사가 일치하는 사람. 마지막 유형은 희망 사항에 가까웠다. 세상의 진리를 그저 탐구욕만으로 파헤치기에는 다른 매력적인 인생 목표가 더 많았다. 그래서 야슈톨라가 마토야의 제자인 거겠지만.

확률을 따져보지 않아도 첫 번째보다는 두 번째 유형이 더 많을 것 같았다. 직접 뛰어든 표본 조사에서는 정반대의 결과가 나왔다. 첫 번째 유형, 구세시맹에 가입해서 한 명. 그 한 명에게 설득당해 합류한 새벽의 혈맹에서 몇 명 더. 그들 모두와 똑같은 거리로 떨어져 있는 건 아니지만, 그들 모두 놀라울 정도의 깊은 이해 끝에 각자 거리를 벌리거나 좁혔다. 반면 두 번째 유형은….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놀랍지는 않았다. 준 만큼 받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거래에 응하지 않는 상대방을 이기적이라고 비난하기 마련이니까. 야슈톨라를 이기주의자라고 부른 사람의 절반 정도는 한때 등을 맞댈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 거기에 유감은 없었으나 그는 자기 주변에 선을 그었다. 침입자에 대비해 농담과 신중함, 무자비한 질문과 결정적인 순간의 침묵으로 무장했다. 야슈톨라 룰이 이기적이라는 명제보다 더 참인 명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야슈톨라 룰은 사람이다.

때문에 야슈톨라는 이렇게까지 밤의 주민들과 밀접하게 지낼 생각은 없었다.


소환 마법에 휩쓸린 세 현인 중, 수정공에 대한 분노나 남은 이들에 대한 걱정을 가장 빠른 속도로 일소한 사람은 야슈톨라였다. 여기가 어디인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후드를 벗을 수 있는지, 당신의 목적은 무엇인지…. 등등을 매섭게 캐물은 뒤에는 박물진열관에 처박혀 장서를 독파했다. 모렌의 사정에 못 이겨 읽던 책을 들고 계단 식당으로 향하는 야슈톨라는 한동안 크리스타리움의 시계나 다름없었다. 수정공에게도 없는 대출 권한으로 말이 많았으나, 책을 함부로 다룰 학자는 아니라는 수정공의 보증에 불만은 쏙 들어갔다.

야슈톨라가 박물진열관의 서적을 정복하는 데는 3달쯤 걸렸다. 다음으로는 도시 바깥의 지식을 구하고자 했다. 수정공의 ‘두 세계 멸망 저지 계획’이 실현 가능한 것인지, 그가 새벽의 혈맹을 기만하는 건 아닌지 판단하기 위해서는 1세계의 정보가 필요했다. 가야 할 곳은 명백했다. 롱카 문명의 발상지인 라케티카 대삼림.

율모어는 폐쇄적이었다. 외부자는 노동시민 자격으로나 발을 들일 수 있었는데, 그런 지위로는 도시를 자유롭게 조사하기 힘들었다. 옛 푀부트 왕국 지역, 일 메그는 바깥의 지식을 더 그러모은 뒤에나 갈 만한 곳이었다. 아므 아랭은 범람과 맞닿은 최전선이었으나 나바스아렝 왕국의 유산은 야슈톨라가 원하는 지식과는 분류가 달랐다. 상업을 중시하는 사막 도시는 세계의 진리처럼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소홀히 대했다.

라케티카 대삼림의 공동체는 율모어와 마찬가지로 폐쇄적이었다. 다른 점이라면 밤의 주민들의 폐쇄성은 생존을 위해 형성된 특질이라는 점이다. 그들과 교역하는 상인의 도움을 받아 야슈톨라는 라케티카 대삼림에 발을 들였다.

곤 요새는 밤의 주민들의 여러 거점 중 가장 컸다. 인간의 손으로 만든 구조물이라는 점이 감흥을 더해주었다. 재료가 온통 나무인 것은 아쉬웠지만, 공동체 규모를 볼 때 돌을 캐고 다듬을 인력은 없어 보였다.

상인은 동행인의 체류 허락을 받기 위해 최선을 다해줬다. 밤의 주민들로서는 갑작스러운 장기 투숙객을 반기기 힘들었다. 입이 늘면 필요한 물자도 덩달아 늘어났다. 어둠 신앙을 믿는 신도가 라케티카를 찾아오는 일도 드물어진 실정이었다. 그러나 야슈톨라가 실력 있는 마도사라는 점에서 고민의 시간은 짧았다.

약 1년 동안 야슈톨라는 곤 요새의 손님이었다. 숲에서는 화폐를 쓸 일이 없었으므로 그는 숲길 순찰, 사냥, 부상자 치유 등의 노동으로 숙박비를 치렀다. 나머지 시간에는 밤의 주민들 사이에 구전되어 내려오는 정보를 기록하거나, 새로운 마법을 창안하는 등 수련에 매진하거나, 숲 곳곳에 남은 유적을 조사하고 다녔다. 요새 밖을 돌아다닐 때는 경험이 적은 청년 몇몇과 노련한 투사 한둘로 이루어진 호위대가 붙었다.

야슈톨라의 지식욕은 사치재였다. 곤 요새에서 책과 종이가 가장 많이 쌓여 있는 곳은 그의 숙소뿐이었다. 지낼 방을 받았을 때 야슈톨라는 지하실 확장 공사를 요구했다. 사방 벽면에 빈틈없이 짜 넣은 선반을 책, 서적, 그리고 고서가 빼곡히 채웠다. 야슈톨라의 기묘한 지하실을 볼 때마다 밤의 주민들은 이 미스텔족 마도사가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되새기곤 했다. 손님 역시 빛에 드러낼 이름을 짓긴 했지만, 곤 요새의 대부분은 손님을 그저 손님이라고만 불렀다.

야슈톨라로 말할 것 같으면, 밤의 주민 사이에 섞이지 못한 것이 유감스럽지 않았다. 일원으로 인정받은 사람에게만 공개하는 무언가가 있다면 모를까, 손님 자격으로도 필요한 지식은 모두 얻을 수 있었다. 밤의 주민들은 그들이 물려받은 여러 가지 관습과 이야기에 어떤 가치가 있는지도 몰랐다.

호위대의 젊은이 중 유독 야슈톨라를 따르는 청년인 루나르는 이를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집이 가까웠던 탓에 그는 종종 야슈톨라의 식사를 챙겨주었다. 지하실의 연구가 어떤 것인지 처음으로 질문한 사람이기도 했다. 관련된 정보를 더 얻을 수 있을까 싶어 입을 열었던 것이 요즘은 청하지 않아도 먼저 말을 꺼내게 되었다. 루나르에게 사심이 있다는 걸 모르지는 않았지만, 의식적으로 드러내지 않아 친분을 유지하기 편했다. 다른 말동무가 찾아온 건 그즈음이었다.

위리앙제는 백성석을 만들기 위해 빛 속성이 강한 지역 어디든 머물고자 했다. 수정공은 일 메그를 추천했다. 크리스타리움의 유일한 픽시 손님 페오 울의 말에 따르면, 일 메그 호수 위의 성에 대죄식자가 된 요정왕이 봉인되어 있었다. 대죄식자의 소재가 명확하니 백성석 제작에 도움이 될 터였다. 문제가 있다면 요정에 대한 정보가 너무 적다는 거였다.

페오 울은 위리앙제를 계약자로 고려하지 않았다. 계약자가 아니니 신뢰할 수 없다는 이유로 쓸모 있는 정보를 알려주지도 않았다. 수정공은 페오 울을 관찰하며 알게 된 픽시의 행동양식을 알려주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박물진열관의 장서 중에도 요정에 관한 언급은 손에 꼽았다. 그중 요정이 본래 숲에 살았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원초세계의 정령이 그리다니아의 숲에 기거하듯이, 1세계의 요정이 라케티카를 터전으로 했을 가능성이 컸다.

크리스타리움에 그러한 정보가 흘러들어온 경위도 상상이 갔다. 어떤 라케티카 사람은 빛의 범람을 피해 레이크랜드로 도망쳤을지도 몰랐다. 그는 고향을 그리다가 밤의 주민들 속에 끼어 숲으로 되돌아갔을 것이다. 또 어떤 라케티카 사람은 빛의 범람에 잠길 각오로 고향에 남았을지도 몰랐다. 재해가 일단락된 후, 숲을 찾아온 밤의 주민들을 기쁘게 맞아주었을 것이다.

위리앙제의 기대대로 숲에는 도움이 될 만한 지식이 구전되고 있었다. 집을 빛에서 보호해준다는 주술이 사실은 요정막이 주술이었다. 아마도 원래는 ‘요정의 장난, 즉 나쁜 것을 막는 주술’로 통용되고 있었을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나쁜 것을 막는 주술’로만 전해진 끝에, 100년 전부터는 ‘빛을 막는 주술’로 설명이 변한 것일 터였다. 이 발견을 시작으로 위리앙제는 요정 대책 수집에 박차를 가했다. 밤의 주민들은 사교에 서툰 ‘두 번째 손님’이 내비치는 열정을 신기해하며 어울려주었다.

밤의 주민들이 새로운 만남에 감사하는 기도를 올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곤 요새는 그날도 평화롭게 일상을 이어 가고 있었다. 순찰 인원이 교체되고, 누군가는 밭을 돌보고, 누군가는 위리앙제의 조사에 어울려주고 있었다. 야슈톨라는 루나르의 권유에 못 이겨 막 지하실에서 나온 참이었다. 망루의 정찰대가 죄식자의 출현을 알린 것 또한 일상의 범주 내였다. 요새 수비 담당을 맡은 밤의 주민들이 무기를 잡고, 적에 대한 정보를 망루 담당과 큰 소리로 주고받았다.

이르게 돌아온 순찰대가 이변의 시작을 알렸다. 그들은 요새로 허겁지겁 뛰어오며 목청이 터질 정도로 외쳤다. ‘다들 당장 대피해!’ ‘요새 문을 닫아!’ ‘무기를 들어!’ ‘죄식자 떼!’ ‘죄식자 떼가 몰려온다!” “빨리 피하라니까!” “싸울 수 있는 사람은…!” 그때, 네 발 달린 맹수처럼 생긴 죄식자가 순찰대원 하나를 발톱으로 낚아챘다. 붙잡힌 이는 다음 순간 절명했다.

사람들은 재빨리 요새 문을 닫았다. 달려오던 순찰대원들은 요새 벽의 각자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다. 맹수나 죄식자의 습격을 피하는 등의, 급히 복귀할 때를 대비해 순찰대원들은 목책을 타고 오르는 훈련을 했다. 이를 위해 요새 벽 바깥에는 얕게 파인 홈이 군데군데 나 있었다. 요새 벽에 올라가 있던 궁수와 마도사들의 지원에 힘입어 순찰대는 더 이상의 피해 없이 복귀했다. 망루에서는 죄식자의 수와 종류를 포함한 전황 보고가 이어졌다. 전투 인원들이 죄식자를 저지할 동안, 비전투 인원들은 지하를 통해 근처의 다른 거점으로 대피했다.

땅을 달리는 죄식자들을 저지한 건 사람 키를 넘는 길이의 요새 벽이었다. 궁수들이 멀리 있는 적을 견제하는 동안 창술사와 마도사들이 목책 아래의 죄식자를 죽였다. 주술봉을 휘두르던 야슈톨라는 불길한 예감에 고개를 들었다. 멀지 않은 허공에서 무수한 빛이 무리짓고 있었다. 점점 가까워졌다. 나이트시커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곤 요새의 또 다른 첫인상은 위에서의 공격에 취약한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었다. 날아다니는 죄식자 한두 마리는 처리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떼로 몰려온다면…. 야슈톨라는 불안을 먹이 삼아 많은 수의, 혹은 강력한 죄식자를 일소할 수 있는 마법을 고안했다. 제아무리 높이 난다고 해도 하늘에서 떨어지는 불덩이를 피하기는 어려울 테지.

야슈톨라는 위리앙제를 소리쳐 불렀다. “나 대신 이것들 좀 막아 줘요!”

위리앙제가 빈 전력을 메우는 동안, 야슈톨라는 서서히 가까워지는 적에 시선을 고정했다. 힘 있는 목소리에 이때껏 누구도 들은 적 없는 주문이 실렸다. 떨림 한 점 없는 영창이 거대한 마력의 목적과 방향을 제어하고, 파괴의 형태를 올바르게 빚어냈다. 끝맺음의 순간 야슈톨라는 확신했다. 자신이 첫 시연을 완벽하게 끝냈음을.

‘첫 번째 손님’의 활약에 일순 사기가 올랐다. 그러나 죄식자의 수가 너무 많았다. 야슈톨라는 마력을 바닥까지 긁어 썼다. 원초세계의 금기를 어기고 환경 에테르로 마력을 수급한 뒤에는 다시 불덩이를 퍼부었다. 그래도 미처 죽이지 못한 죄식자가 바로 옆의 누군가를 앗아갔다.

이 정도 규모의 습격에는 분명히 대죄식자가 관련되어 있다. 어쩌면 라케티카 지역의 대죄식자가, 자신이 마법을 고안하며 뒤흔든 에테르를 위협으로 느낀 나머지 작금의 사태가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그런 의심이 고개를 들었으나 야슈톨라는 칼같이 떨쳐냈다. 강력한 마법을 부릴 때 잡념이 섞이면 반드시 무언가 틀어졌다. 자신의 실수로 아군의 희생을 만들 순 없었다.

얼마나 많은 죄식자에게 불의 심판을 내리고,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목책에서 내려갔는지 셀 수 없었다. 야슈톨라는 죄식자가 더이상 늘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이 정도면 한 방 승부를 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의 목에 증폭 마법을 건 뒤,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계획을 설명했다.

밤의 주민들은 선뜻 움직이지 않았다. 야슈톨라는 지금까지 죄식자를 가장 많이 죽인 사람이 누구냐고 소리쳤다. 당신들은 희생을 결심한 사람에게 뒤를 맡기고 도망가는 게 아니라고. 남은 죄식자를 한 번에 요격하려면 망루로 올라가야 하는데, 그동안 당신들은 습격을 막으며 대피까지 해야 한다고. 과연 어느 쪽이 더 위험할지는 어린아이도 알겠다고.

“그러니 믿고 맡길게요!”

외친 뒤, 야슈톨라는 망루 쪽으로 달려갔다. 전열은 천천히 퇴각했다. 야슈톨라가 망루 꼭대기에 올라설 즈음에야 피신이 끝났다.

불타는 요새가 발밑에 펼쳐져 있었다. 땅을 달리던 죄식자도, 날아다니던 죄식자도 지상에 유일하게 남은 기척을 노리며 요새를 맴돌았다. 야슈톨라는 심호흡했다. 평소였다면 이 정도 마법을 계획하며 긴장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마력이 여러 번 고갈된 육신과, 긴 시간 전투를 치르며 바닥난 정신력이 실패할 가능성을 점쳤다.

마법을 준비할 때와는 조금 다른 침묵이 이어졌다. 위리앙제는 야슈톨라의 뒤에서 망루로 접근하는 죄식자를 견제하던 중이었다. 그는 여유가 생기자 카드를 꺼내 들었다.

“점을 봐 드리겠습니다.”

“길거리 점술사 같은 말이네요. 샬레이안에서 그런 말을 했다가는….”

야슈톨라는 입을 다물었다. 지금은 엄호를 위해 따라온 동료를 평소처럼 비꼴 때가 아니었다. 위리앙제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자,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마토야….”

그 이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곳에 없는 스승의 호통이 들린 것 같았다. ‘뭘 걱정해서 손 놓고 멍청히 있는 게야!’ 야슈톨라는 위리앙제의 다음 말에 집중했다. 귀가 뒤쪽으로 팽팽하게 젖혀졌다.

“운명에 대항할지, 또는 받아들일지. 어느 쪽이든 퇴로는 없습니다.”

퇴로 운운하는 의도가 뻔히 보였다. 야슈톨라는 고개를 치켜드는 호승심에 이성을 맡겼다. 어떤 카드를 고를지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마녀 마토야는 나이트시커를 고쳐 잡았다.

“도망쳐? 그럴 필요 없어.”

이 순간 어째서 빛의 전사가 떠올랐는지 모를 일이다. 야슈톨라는 스스로의 심리 해석 같은 건 미래에 맡기기로 했다.

“그 사람이 돌아올 때까지 이 땅은….”

마녀가 지팡이를 휘두르자,

“내가 제압할 테니까.”

무수한 운석이 빛무리를 덮쳤다.


 

이틀 밤낮 타오르던 불은 사흘째의 폭우에 진화되었다. 그동안 밤의 주민들은 부상자를 돌보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의논했다. 그들이 잃은 것은 비단 삶의 터전뿐만이 아니었다. 노련한 전사들은 전투에 서툰 이들의 앞에서 싸웠다. 지혜로운 노인들은 어린아이들을 먼저 대피소로 보냈다. 죄식자는 용맹한 사람과 배려심 있는 사람을 구분하지 않았다.

야슈톨라는 손님으로 남을 수 없었다. 의논을 들으며 참고하라고 내놓은 의견을 사람들이 그대로 채택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어느새 그는 곤 요새의 전사자 시신을 수습하는 자리에 같이 가 있었고, 사냥과 순찰 조를 짜는 기준을 정해주고 있었다. 심지어는 습격 몇 주 뒤 교역을 위해 찾아온 상인을 상대하기까지 했다. 야슈톨라는 이제 마토야로 불리고 있었다. ‘손님’은 위리앙제만을 가리키게 되었다. 그마저도 위리앙제가 피해 복구를 도운 뒤 조용히 떠난 탓에 오래 불리지는 않았다.

밤의 주민들이 일상을 회복하는 동안 마토야 역시 바빴다. 일상이 돌아왔다는 신호는 마토야가 마음 편히 롱카 문명의 이모저모를 탐구하고 있을 때 찾아왔다. 그는 문득 자신의 연구를 아무도 방해하지 않은 지 일주일이 넘었음을 깨달았다. 지위가 변했으므로 이전과는 조금 다른 하루를 보내야 했지만.

사방에서 들려오는 마토야의 이름에 적응해가던 어느 날, 야슈톨라는 곤 요새가 파괴되었던 날 빛의 전사를 떠올린 이유가 무엇일지 따져보았다.

가장 그럴듯한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그 당시 야슈톨라 자신의 상황과, 빛의 전사가 그동안 겪었던 위기 상황을 겹쳐 본 것이다. 게다가 빛의 전사는 언제가 됐든 이 땅에 발을 디딜 터였다. 수정공의 계획은 원초세계의 영웅을 불러오는 것에서부터 시작했으니까.

빛의 가호를 받은 사람들은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지나치지 못했다. 그들은 자신을 베푸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야슈톨라가 잘 아는 누군가는 세상으로 돌아오는 길을 포기하고, 낯선 이름의 이방인들이 태어난 세계를 구하러 떠나버렸다.

원초세계의 모험가는 1세계에서도 영웅이 될 것이다. 야만신을 토벌하고, 에오르제아 삼국 연합과 협력해 알테마 웨폰을 저지하고, 천 년 용시 전쟁을 끝내고, 알라미고와 도마를 식민지에서 해방했듯이. 기대는 사람이 많을수록 걸음은 무거워질 것이고, 끝내 영웅은 그 무게에 무릎이 꺾일지도 모른다. 그를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마침 야슈톨라는 짐을 덜어줄 기회를 잡았다. 선언했다. 그의 빈자리를 내가 채우겠다고.


그로부터 2년이 흘렀다. 어둠의 전사들은 아씨엔 에메트셀크를 처치하고, 원초세계로 돌아갈 방법도 찾아냈다. 마지막 아씨엔을 패퇴시키며 1세계에서의 모든 모험이 끝났다. 이제는 고향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세 현인과 쌍둥이는 각자의 연고지에서 그간 맺은 인연들과 작별의 시간을 보냈다.

마토야의 진짜 이름을 알게 된 뒤에도 밤의 주민들은 야슈톨라를 마토야라고 부르곤 했다. 당신의 정체가 무엇이든 밤의 주민들에게는 우리의 지도자, 마녀 마토야일 뿐이라는 의미를 담아서.

똬리가지 마을은 마토야가 돌아온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했다. 마녀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일만은 번복하지 않았다. 다시 돌아온다면 그것은 더욱 확고한 이별을 위해서였다. 마토야는 본명으로 어느 종족의 양식에도 맞지 않는 이름을 썼다. 마치 다른 세계에서 온 것처럼.

마토야는 그동안 모은 책을 그대로 두기로 했다. 마녀의 지식을 얻고 싶은 사람은 밤의 주민들에게 적절한 값을 치러야 할 것이다. 훗날 똬리가지 마을의 누군가가 이 책을 읽고 롱카 문명의 탐구나 세계의 진리를 밝히는 일에 뛰어들지도 몰랐다. 자신의 통칭을 직접 고를지도 모르지. 그런 사람은 마토야의 이름을 이을 자격이 있었다.

마토야가 세계를 구하러 떠났던 동안 루나르가 임시로 수장 자리를 맡았다. 돌아온 뒤 그는 루나르에게 정식으로 지도자 자리를 넘기고 싶다는 의견을 밝혔다. 루나르는 이방인을 가장 스스럼없이 대해 준 사람이었다. 그의 다정함에 기대어 똬리가지 마을은 조금 더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영웅은 각지의 동료들에게 정확한 출발 시각을 전하는 일을 도맡았다. 마토야는 떠나기 직전까지는 여유를 부리기로 했다. 인수인계 핑계로 루나르를 앉혀 놓고 차를 마셨다. 한 계절마다 책을 볕에 널어두라거나, 오밀조밀 빗자루를 사용하는 방법 등을 일러주면서.

“섭섭하지 않나요?”

갑작스러운 물음에 루나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누님, 혹시 내가 그런 티를 냈어?”

마토야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아니지만…. 제가 이 마을을 이끌었던 건 수장의 지위가 앞으로 할 일에 필요해서였는걸요. 이제 노르브란트 전역에 밤이 돌아왔으니 이곳에 계속 있을 이유도 없죠. 저는 돌아가야 하니까.”

루나르는 여전히 아리송했다. 마토야 누님은 늘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도록 의사를 전달했다. 지금처럼 말을 빙빙 돌려서 원하는 답을 유도한 적은 없었다.

‘어째서 누님은 내가 당신을 비난하길 바라는 것처럼 말하는 걸까? 반드시 다시 볼 수 있을 테지만, 그래도 오래 헤어질 텐데. 울고 화내는 얼굴을 마지막으로 보여주기는 싫은데….’

그러다 보니, 본인의 바람과는 다르게 저절로 눈물이 고였다. 초월하는 힘이 없는 마토야는 눈물의 이유를 잘못 짚었다. 곧 닥쳐올 이별에 서글퍼서 울기 직전인 거라고.

“루나르, 나도 돌아가는 게 마냥 기쁘지는 않아요. 고향이 그립지만, 거기서는 똬리가지 마을을 그리워할 테니까요. 그냥 당신이, 밤의 주민들이…. 나를 탓하지 않을까 싶어서요.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다음 문장으로 ‘그래도 나는 언젠가 돌아올 테니 그때는 환영해줘야 해요.’라는 말이 준비되어 있었지만.

“누님! 무슨 그런 말을 해! 이기적인 사람이라니!”

루나르의 우렁찬 목소리에 묻혔다. 생각지도 못한 누님의 자기비하에 청년은 금방이라도 흘러넘칠 것 같았던 눈물이 쏙 들어가 버렸다. 이번에는 마토야의 눈이 동그래졌지만, 루나르는 그 희귀한 광경을 눈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당황한 상태였다.

마토야가 놀란 것도 잠시였다. 그는 곧 이기심의 정의를 말하며 자신의 행동이 그것과 부합한다고 주장했다. 루나르는 열심히 반박했지만 어쩔 수 없이 논리에 휘말리곤 했다. ‘어, 그러고 보니…. 아니야! 그건 그렇지만…. 아닌 건 아니야, 누님!’ 같은 식이었다.

“아무튼 신뢰가 ‘필요’해서 우리를 ‘이용’했다 쳐도, 마을이 큰 은혜를 입은 건 사실이야. 설령 누님이 정말로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해도 우리는, 아니, 나는 신경 안 써.”

“…그럼 이번만은 비긴 걸로 하죠.”

마토야가 판정을 내렸다. 루나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내 그는 이별이 임박했음을 눈치챘다. 마토야는 떠나기 위해, 루나르는 배웅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슬슬 가야 해요. 다음에 봐요, 여러분. 다른 분들께도 인사 전해줘요.”

마토야는 마지막으로 밤의 주민들을 둘러보았다. 다음으로는 마치 숲길을 순찰하러 가듯이, 평소와 다름없는 걸음걸이로 똬리가지 마을을 나섰다. 루나르가 뒤늦게 ‘마토야 누님!’하고 부르며 뒤따랐지만, 마녀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원초세계로 돌아온 뒤, 육신의 회복에 힘쓰던 어느 날.

“당신을 존경하게 됐어요. 영웅 노릇도 쉽지 않더군요. 저 같은 사람한테는.”

빛의 전사는 뜬금없는 화두에도 당황하지 않고 말을 받아주었다.

“슈톨라 같은 사람이 어떤 사람인데?”

“이기적인 사람이죠.”

이어진 대답은 의외였다.

“사람은 다 그래!”

야슈톨라는 턱을 괴었다. ‘당신도?’ 묻자 시원시원한 대답이 돌아왔다. ‘물론이지!’

“그렇다면 당신이 영웅인 이유는 뭘까요?”

빛의 전사는 고민했다. 평소 생각해 보곤 했던 주제였는지 금방 입을 열었다.

“누군가를 지키려고 해서 아닐까? 나는 늘 그래 왔거든. 이유는 때마다 달랐지만.”

“지키는 거군요….”

“그런 의미에서 슈톨라는 영웅이 확실하지.”

“…칭찬 고마워요.”

빛의 전사는 자신이 세운 기준이 마음에 들었는지, 르베유르 쌍둥이에게 얘기해줘야겠다며 자리를 떴다. 똬리가지 마을의 영웅은 멀어지는 발소리에 잠시 귀를 기울이다 산책을 하러 돌의 집을 나섰다. 세계의 틈을 뛰어넘을 마법을 구상하기 위해서라도 지금은 건강을 회복하는 일에 집중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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