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눈에는 아직 부족하겠지만
갈레말드 지역 스토리 보며 뒷목 잡은 끝에 나온 날조연성
-주의: 6.0 효월의 종언 스포일러 / 특정 빛전 묘사가 없으며, 대명사 '그'는 어떤 성별로 읽어도 무관함
생각해보면 빛의 전사는 처음부터 갈레말드 행을 탐탁잖게 여겼다. 그는 에오르제아 총사령부의 요청에 이렇게 대답했다. ‘의뢰를 받아들이겠다’고. 알리제 르베유르는 갈레말인을 도우러 가는 것과 의뢰를 받아 같은 일을 하는 것의 차이점을 알았다. 빛의 전사는 업무로서 갈레말 구호에 나서겠다고 말한 셈이다.
알피노를 쿡 찌르자 ‘당한 게 많으니 그럴 수도 있다’라는 속삭임이 들려왔다. 물론 알리제는 빛의 전사가 사사로운 원한으로 도리를 외면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다만 이때의 대답은 알리제의 마음 한구석에 돌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현지의 생존자를 수색하다 일어난 비극에 알리제는 충격을 받았다. 상대방이 자신의 호의를 믿지 않는 건 그렇게 드문 일도 아니다. 하지만 누군가를 믿지 않은 결과로 목숨을 잃는다니, 이건 지나치게 가혹하지 않은가…. 그들은 유품 삼아 갈레말 국가가 나오는 라디오를 가져가기로 했다.
빛의 전사는 반대했다. 라디오에서 죽은 바리스 황제의 목소리가 나온다는 게 수상하다는 거였다. 라디오를 듣고 있었던 사람들이 신도화를 면하기는 했지만, 그건 라디오의 충전지 덕이지 라디오가 실어나르는 내용 때문은 아니지 않으냐고. 알리제와 알피노는 죽은 자매를 추모하고 싶다며 의견을 밀어붙였다. 빛의 전사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여차하면 부술 거야.’ 누군가의 신뢰에만 기대어 위험한 상황에 뛰어들 때면 늘 하던 말과 함께.
시신을 매장하고 무덤 근처에 라디오를 걸어두면서 알리제는 조마조마했다. 빛의 전사가 당장이라도 라디오를 부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또, 알리제는 보았다. 알피노가 이 죽음은 우리 탓이라고 자책하던 때, 빛의 전사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그는 못마땅한 듯이 인상을 쓰고는 침묵했다.
구호군 본부에 자매의 일을 보고한 뒤, 세 사람은 잠깐 휴식했다. 아이들이 받았을 충격을 배려한 루키아의 조치였다. 알리제는 샬레이안에선 성인이라고 투덜거렸지만, 얌전히 따랐다. 묻고 싶은 게 있었기 때문이다. 따뜻한 게 마시고 싶다며 가져오라고 알피노를 쫓아냈다. 동생이라는 게 이럴 때는 편했다. 둘만 남은 뒤 조심스레 물었다.
“저기, 아까 왜 그런 표정이었어?”
빛의 전사는 ‘어떤 표정?’하고 물었다가 이내 깨달은 듯 놀란 얼굴을 했다. 알리제는 당신이 무슨 생각 중인지 궁금하다며 대답을 졸랐다. 빛의 전사는 한숨을 쉬더니, 먼저 이렇게 말했다. 알리제를 가르치려는 게 아니야, 그건 알아둬.
“너희가 이상한 죄책감을 느낀다 싶어서, 그게 좀 싫었어.”
차근차근 설명이 이어졌다. 물론 그 두 사람의 죽음은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가 생존자와 접촉할 때, 타국인에 대한 제국인의 관점을 면밀하게 고려했더라면 그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뿐으로, 알리제나 알피노가 자신들을 가해자로 여길 이유는 없다. 우리 아닌 다른 사람들이 그들과 마주쳤더라도 똑같은 결과가 나왔을 거다.
“그럼 그 사람들을 가해자라고 할 거야, 알리제?”
물론 아니었다.
“자신에게 엄격한 거,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그렇지만 자기 자신을 부당하게 대하지는 말아.”
알리제는 빛의 전사를 냉정하다고 해야 할지, 다정하다고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다정함이 자신과 알피노, 새벽의 혈맹에 향한다는 점은 좋았다. 늘 새삼스럽지만, 빛의 전사 역시 보통 사람과 다를 바 없었다.
갈레말 제국은 빛의 전사가 그동안 보여주지 않았던 여러 가지 부정적인 얼굴을 끌어냈다. 율루스의 말에 따박따박 대꾸하며 속을 긁는 건 그 축에도 못 꼈다. ‘너희는 화합을 말하면서 왜 갈레말의 지배는 받지 않겠다고 하는지’ 묻는 I군단장을 비꼴 지경이었으니까. ‘외지인이 내민 구호의 손길을 침략의 손길이라고 왜곡하는 사람들이라 그런가, 아주 헛소리가 수준급이야.’
르베유르 쌍둥이가 포로로 잡혔을 때도 빛의 전사는 침묵하지 않았다. ‘그 애들한테 생채기라도 났다간, 테르티움 역은 불바다가 된다.’ 알리제는 그가 처음으로 무서워졌다. 협박은 진심이었고, 진실이었다. 조금이라도 도울 일은 없는지 물으며 애써 씩씩하게 굴었던 건 그래서였다.
청린수를 찾으러 갈레말드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쌍둥이는 율루스와 조금 친해졌다. 빛의 전사는 내내 율루스에게 시비를 거는 통에 그러지 못했다. 율루스는 빛의 전사가 청린수를 찾기 위해 맨손으로 연못을 뒤진 일에 감명을 받은 것 같았지만…. 안타깝게도 호감으로 이어지진 못했다. 언 몸을 녹일 때, 빛의 전사는 혓바닥부터 녹는 게 분명했다.
“이 엄동설한에도 따뜻하던 집, 뭐, 이해는 한다. 그리울 수 있겠지. 근데 갈레말드 전역의 집을 따뜻하게 데운 건 뭐였을까? 너희가 ‘집’에서 끌고 온 식민지 사람들이 캐낸 청린수였잖아. 그 사람들 아직도 못 돌아가고 얼음동굴에서 노숙하고 있더라.”
기껏 자신의 추억을 꺼내놓았던 율루스는 진저리를 쳤다.
“너는 관계도 없는 얘기를 갖다 붙이는 게 취미냐?”
“저런, 네게는 너무 어려운 비유였구나. 갈레말 제국의 일상이 식민지를 착취해서 얻은 이득을 바탕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면 이해할 수 있겠니?”
“말이 안 통하는 작자로군.”
율루스는 대화를 포기했다. 빛의 전사는 물고 늘어졌다.
“이 빌어먹을 도시 어디에서 청린수를 구할 수 있는지나 얘기하는 게 좋을 거야. 갈레말인도 평범한 사람이니, 뭐니 하는 것 따위엔 관심 없어. 당연한 소리니까.”
평범한 사람이니 잃어버린 고향을 그리워하고, 국가가 어떤 착취를 저지르는지 모르고, 심지어는 세뇌까지 당하는 거라고 빛의 전사는 말했다.
“너희가 갈레말인이라서 싫어하는 게 아니야. 누굴 싫어하는 이유로 들기에 출신지는 너무 부족하지. 갈레말 제국이 저지른 착취에 너희들이 동조했기 때문이고, 심지어는 자랑스러운 조국이 어떤 착취를 벌였는지도 몰라서 싫은 거다. 안타깝게도 갈레말드에서 지금까지 만난 인간 중에는 그걸 아는 사람이 없었지만. 널 포함해서.”
율루스 최후의 변론은 다음과 같았다.
“…모르는 것도 죄인가?”
빛의 전사는 짜증을 냈다.
“그래서 지금까지 실컷 읊어줬잖아! 너는 그걸 코로 들었냐?”
역으로 돌아왔더니, 군단장은 기껏 구한 청린수를 난방에 쓰지 않았다. 빛의 전사는 이번엔 비꼬지 않았다. 대신 나직하게 욕설을 뱉었다. 자신과 눈이 마주치고는 놀라서 입을 막는 것까지 한 편의 막간극 같다고, 알리제는 생각했다. 16살이면 샬레이안에서는 성인인데 말이다.
에오르제아 구호군을 공격하러 간 I군단 선발대는 X군단이 투항했다는 소식을 듣고 전의를 잃었다. 구호군은 물자와 함께 테르티움 역의 생존자들을 지원하러 출발했다. 짧은 휴식 뒤에는 다시 난장판이었다. 빛의 전사가 수상하게 여겼던 라디오가 사달을 냈다. 깨진 유리 전초지에 머무르고 있던 I군단 선발대가 바리스 조스 갈부스의 목소리를 듣고 신도화되어 사람들을 공격했다. 그 사이에 아씨엔 파다니엘이 빛의 전사를 납치했고, 그의 몸을 탈취한 제노스가 이름 모를 제국군의 몸에 들어간 빛의 전사와 싸우고…. 많은, 아주 많은 일이 지나갔다.
새벽의 혈맹은 다시 비밀 결사로 돌아갔고, 알리제는 알피노와 함께 테르티움 역으로 돌아왔다. 빛의 전사는 가끔 방문해서 허드렛일을 도왔다. 돌아올 시각을 넘긴 사람을 마중 나가고, 골치 아픈 마도 병기를 처리해주었다. 피난 도중 가족과 헤어진 아이의 부탁으로 그 애의 어머니를 찾아주기도 했다.
테르티움 역에는 아이들도 몇 명 있었는데, 빛의 전사는 역을 찾을 때면 가끔 그 아이들을 심각한 얼굴로 보고는 했다. 알리제는 이제 그가 무엇 때문에 그런 표정을 짓는지 알 것 같았다. 저 아이들이 갈레말 제국의 과오를 배우지 못하고, 기억하지 못하고, 오로지 영광만을 간직한 채로 자라는 것을 걱정하는 거겠지.
“뭘 그렇게 보고 있어?”
빛의 전사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신경 쓸 거 없다는 듯이 알리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또 애 취급이지, 알리제는 투덜거렸다. 그러곤 테르티움 역의 근황을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도시를 떠도는 마도 병기들은 차츰 정리되고 있다. 에블라나 빙원에서 청린수를 다시 시추하게 되었다. 돌아가지 않기로 한 식민지 출신 노동자들에게 일을 맡겼는데, 소장이라는 사람이 그 자리에서 고개를 숙였다더라. 요즘 막시마가 애들을 가르치러 테르티움 역에 온다. 그런데 율루스가 오가는 길 호위를 맡아서 둘이 자주 어울리는 것 같다….
“어때? 나쁘지 않은 변화지? 당신 눈에는 아직 부족하겠지만.”
“변화가 있는 게 어디야?”
애초에 기대한 적도 없다는 냉소가 뒤따랐다. 문득 알리제는 그가 예전에도 딱히 냉소를 숨긴 적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짜증을 내고, 비꼬고, 딴지를 걸었던 건 1세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세계 통합 계획에 대해 알게 된 뒤 빛의 전사는, ‘고대인들이 장례식만 치를 줄 알았다면 지금 같은 난리는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 적도 있었다. 주로 아씨엔 에메트셀크 앞에서였던 탓에 잘 기억나지 않은 것이다. 그때는 알리제 역시 화를 냈기 때문에. 아씨엔의 행동이 가진 문제를 지적하고, 우리의 세계가 존속할 가치가 있는지 고민했기 때문에.
“하지만 믿어야겠지. 더 나아질 거라는 걸.”
“맞아. 그러니까 당신은 나만 믿어.”
알리제가 장난스레 으스댔다. 빛의 전사는 ‘믿음직해!’라고 말하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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