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기록

영웅의 기분

영웅이 새벽+a를 껴안으며 기분전환 하는 얘기

-주의: 5.3 크리스탈의 잔광 이후 시점 / 암흑기사 50Lv. 잡 퀘스트 스포일러 / 특정 빛전 묘사가 없으며, 대명사 '그'는 성중립 대명사입니다.

어느 날 빛의 전사는 무척 기분이 나빴다. 새벽의 혈맹은 모두 그 사실을 알았으나 이유를 추측하려 들지는 않았다. 그저 영웅이 알아서 기분을 풀기를 기다렸을 뿐이다. 그가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을 굳이 밖으로 꺼내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감정을 억누른다기보다는 나쁜 것을 나누려고 들지 않는 태도에 가까웠다. 물론 빛의 전사의 친구이고, 동료인 새벽의 혈맹은 그런 짐을 부담으로 느끼지 않을 터였지만.

모험가의 상태 이상은 다음 날까지 이어졌다. 가장 먼저 기습당한 사람은 알리제였다. 알리제는 그 사람이 오늘도 기분이 나쁘려나, 걱정한 나머지 알피노도 떼놓고 돌의 집에 왔다. 오래 찾을 필요도 없었다. 빛의 전사는 돌의 집 홀에 놓인 테이블 중 하나에 멍하니 앉아 고개를 한들한들 끄덕이고 있었다. ‘당신!’하고 부르자 ‘왔어?’라고 대답해주는 것이 꼭 알리제가 이리로 올 줄 알고 있었던 사람 같았다.

정말 이상한 일은 다음 순간에 일어났다. 그 사람이 알리제를 힘껏 끌어안았기 때문이다. 모험가보다 머리 하나 이상은 작은 알리제가 품에 폭 파묻힐 정도였다. 16살이 된 뒤로 그런 포옹을 한 건 샬레이안을 떠날 때, 어머니와의 기억이 마지막이었다. 알리제는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싶었다. 하지만 그의 두 손은 할아버지와 만나고, 헤어졌을 때처럼 모험가를 마주 안아주었다.

뒤늦게 도착한 알피노가 ‘뭐, 뭐 하는 짓인가?’하고 외쳤다. 모험가는 알리제를 놓아주며 격려하듯이 어깨를 꽉 잡았다 놓았다. 그러곤 알피노에게 걸어가 아까처럼 끌어안았다. 알리제와는 달리 알피노는 얌전하게 포옹에 응하지 않았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건지,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는지 걱정을 담은 말이 쏟아졌다. 모험가는 대답 대신 웃기만 했다. 와중에도 알피노를 안은 팔은 꿋꿋했다.

알리제는 쌍둥이를 한심해하며 그 꼴을 구경했다. 충분히 시간을 줬다고 판단한 뒤에는 알피노와 모험가의 팔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할아버지와 먼저 인사하겠다고 아옹다옹 싸웠을 때처럼. 그 결과 함께 포옹하게 된 것마저 똑같았다. 할아버지는 너털웃음을 터트렸지만, 빛의 전사는 두 사람의 등을 가만히 토닥였다는 점을 빼면 말이다.

다음 타자는 돌의 집에서 밤샘한 위리앙제였다. 그는 미명의 방에서 비척비척 나오자마자 자신을 마주 안는 단단한 팔에 갇혔다. 졸린 머리가 순간적으로 이제는 만날 수 없는 오랜 친구의 이름을 찾았다. 기억하던 것과는 팔의 위치가 달랐던 덕분에 다행히 실수를 저지르지는 않았다. 두 팔은 반사적으로 오랜 친구를 맞아주듯이 등을 감쌌지만…. 육신의 반사적인 반응은 어쩔 수 없는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사람이 모험가였다.

문브뤼다는 반가움의 표현 이외로도 위리앙제를 종종 껴안곤 했다. 아마 이것도 그런 다양한 표현의 일환이겠지. 그가 어제의 걱정거리를 묻자, 모험가는 지금 해소하는 중이라고 대답했다. 위리앙제는 오랜 친구에게 으레 그랬던 것처럼 모험가를 한 번 더 가볍게 안아주었다.

그라하 티아는 꼬리털이 단박에 부풀 정도로 놀랐다. 그도 그럴 게 뒤에서 팔이 뻗어 나왔던 탓이다. 오랜만의 재회로, 혹은 일상적인 인사로 나누는 포옹에는 익숙했다. 다만 이토록 우정 어린 포옹이 기척도 없이 다가왔다는 점이 문제였다. 모험가가 오늘 좀 이상하다는 얘기를 듣기는 했지만, 그게 이런 식일 줄이야!

다행히 포옹은 짧았다. 뒤를 돌아보자 모험가는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건넸다. 무슨 일이야? 묻자, 친구에게 고맙다는 얘기를 한 적이 없었던 것 같아 다들 한 번씩 꽉 안아주고 다닌다는 답이 돌아왔다. 포옹은 수정공과 그라하의 몫으로 한 번 더 이어졌다.

야슈톨라는 포옹을 사전에 고지받은 유일한 사람이었다. 어째서요? 묻자 기분 전환을 위해서라는 답이 돌아왔다. 야슈톨라는 더 구체적인 이유를 듣고 싶었다. 하지만 모험가가 그동안 속을 털어놓은 일이 드물었던 것을 참작해 오늘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어쨌거나 그는 이 모험가를 꽤 아끼고 있었다.

포옹은 정중했다. 야슈톨라는 자신 쪽에서 마주 안아주는 것으로 격식을 무너트렸다. 모험가는 안심한 듯 마녀 마토야에게 힘껏 친애를 표현했다. 포옹을 푼 뒤에 손을 잡아도 된다고는 한 적 없지만, 기왕 너그러운 마음을 먹었으니 그것도 봐주기로 했다. 모험가는 어린애처럼 손을 잡고 몇 번 흔들었다. 마지막에는 정중히 악수한 뒤 놔 주었다.

산크레드는 빛의 전사가 마중을 나오는 게 꽤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모험가는 새벽의 혈맹 업무 이외에도 하는 일이 많아 돌의 집에는 좀처럼 붙어 있던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산크레드는 오늘에야 돌의 집으로 복귀했기 때문에, 모험가가 전날부터 기분이 나쁘단 걸 모르는 유일한 혈맹원이었다.

악수 정도야 늘 하던 거였다. 그래서 일은 잘 끝났냐며 가벼운 안부를 주고받다가, 악수하던 손부터 그대로 끌려가 포옹을 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힘으로 지지는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잠깐 망설인 뒤, 산크레드는 한 손을 들어 모험가의 등을 툭툭 두드려줬다. 잠입 임무를 끝낸 뒤라 행색이 꽤 거지꼴이었다. 남의 옷에 때를 묻힐 수는 없었다. 모험가가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고 이러고 있지만, 어쨌든.

오늘의 포옹 행진에는 에스티니앙도 포함되어 있었다. 느닷없는 악수를 끝낸 뒤, 에스티니앙이 모험가에게 건 어깨동무를 포옹 비슷한 것이라고 치면 말이다. 낯간지러운 짓은 싫어할 줄 알았다는 모험가의 말에 에스티니앙은 뭘 당연한 걸 묻냐고 대꾸했다. 하지만 등을 맡길 수 있는 사이에 그런 행동을 가리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가. ‘좀 더 편하게 대해도 돼, 친구.’ 그에 모험가는 친구의 갑옷이 뾰족하다는 이유로 정중히 거절했다.

자체적으로 정한 업무 중 휴식 시간을 누리던 타타루도 예외가 아니었다. 모험가는 타타루 앞에 무릎을 꿇고 팔을 활짝 벌렸다. ‘드디어 저에게도 찾아오셨군용!’ 모험가의 심신 상태를 보살피는 것도 타타루의 업무였다. 새벽의 혈맹 접수원에서, 나아가 전반적인 운영을 책임지게 되면서 생겨난 인식 변화였다. 타타루는 조잘조잘 어제 건네지 못했던 위로를 풀어놓으며 모험가를 안아주었다.

마침 둘만 남았을 때 쿠루루는 먼저 포옹을 요청했다. 모험가는 흔쾌히 몸을 낮췄다. 운을 어떻게 떼야 할지 몰라서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던 차였다. 쿠루루는 모험가의 목을 껴안고 귓가에서 작은 소리로 말을 건넸다. ‘앞으로도 마음이 말하는 것에 귀를 기울여 줘. 어제처럼 혼자 삭이지 말고…. 우리는 모두 당신을 도울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당신이 우리를 기꺼이 도와주는 것처럼.’ 모험가는 가만히 귀를 기울이다가 말했다. ‘고마워, 그리고 고맙다고 전해달래.’ 귀가 좋은 쿠루루에게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들렸을 테지만.

이윽고 혼자 남았을 때 모험가는 투덜거렸다. ‘프레이! 얼마나 잔소리를 퍼부었는지 이제 알겠지. 쿠루루가 들었다고!’ 누군가의 말을 주의 깊게 듣는 것처럼 고개가 한쪽으로 기울었다. ‘물론 이쪽이 줄곧 추천했던 과격한 선택지보다는 낫지만….’ 모험가는 중얼거렸다. ‘흠, 이제는 꽤 마음을 열었구나, 그렇지?’ 혼자 묻고 혼자 답하듯이. 그러나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모험가 자신이 가장 잘 알았다. ‘마지막으로.’ 모험가는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껴안는 것처럼 팔을 둥글게 둘렀다. 그 찰나에 검은 에테르로 이루어진, 모험가와 머리부터 발끝까지 똑같은 형체가 포옹에 응했다.

위로해줘서 고마워. 모험가는 감사를 건넸다. 오늘 포옹에 응해준 친구들 모두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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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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