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기록

할로네 거베라를 쥔 손

지인 리퀘스트

-주의: 3.0 창천의 이슈가르드 스포일러

아이메리크를 손수 구금하고 오는 길이었다. 제피랭은 교황의 집무실 앞 복도에 떨어진 할로네 거베라 몇 송이를 발견했다. 모두 허리가 분질러져 있거나 꽃잎이 볼품없이 찢겨 있었다.

주신이 아꼈다는 꽃은 5년 전, 이슈가르드가 얼어붙은 뒤부터 노지에서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문을 닫아건 뒤 성도에 드나드는 극히 적은 물류 중에는 이 거베라도 당당히 한 자리 차지하고 있었다. 전에도 귀한 몸이었고, 이제는 금처럼 귀한 몸이 된 꽃은 교황청의 할로네 신상 앞이나 고위 성직자들의 집무실에 장식되고는 했다.

범인은 교황과 독대한 아이메리크 경이리라, 짐작하며 제피랭은 미간을 찌푸렸다. 조심스러운 손길로 거베라를 주워 모았다. 이걸 대체 어쩐다? 그는 레이디에게 받은 꽃을 검집에 장식할 줄은 알아도 죽어가는 꽃을 살리는 법은 몰랐다. 하지만 무려 전쟁신께 사랑받은 꽃이다. 시들기 전에는 함부로 할 수도 없는 노릇. 제피랭은 손수건으로 거베라를 잘 감싸 품에 넣었다.

아이메리크를 구출하러 온 것은 용을 죽였다는 이방인과 그 떨거지들이었다. 제피랭은 교황이 탈출하는 동안 엄호를 맡았다. 뒤를 경계하지도 않고 달려 나가는 등이 우스웠다. 꿰뚫어주마, 그것이 주신의 뜻을 방해한 자에게 합당한 섭리일 터…!

정작 창에 꿰인 것은 포르탕 가의 방패였다. 푸른 머리 기사가 힘없이 무릎을 꿇었다. 불경한 이방인은 거기에 신경이 쏠려 발을 멈췄다. 교황의 비공정은 무사히 약속된 땅으로 출발할 수 있었다.

비공정에 오르면서 제피랭은 섭리가 아주 빗나가지는 않았다고 여겼다. 어디서 굴러먹었는지 모를 이방인이나, 정교의 축복 바깥에서 태어나 자란 ‘그레이스톤’이나 할로네의 뜻에 반하는 존재인 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마대륙으로 향하는 내내 그는 불어오는 바람에 힘없이 흩날리던 푸른 머리카락을 생각했다.

토르당 1세 소환을 앞두고 교황과 창천기사단은 몸을 정결히 해야 했다. 추적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마대륙에 사는 마물들과 언제부터인가 마대륙 일부 지역을 점령한 제국군이 그들을 막아줄 테니까. 정작 무장을 풀고 몸을 닦는 사람은 에르메노와 벨긴 뿐이었다. 제피랭은 목욕재계 용도로 나눠준 성수가 손이며 갑옷, 무기를 닦는 데에 낭비되는 꼴을 봐야 했다. 그는 기사들에게 무구는 신체와 같다는 격언을 애써 되새기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교황을 돕느라 제피랭은 창천기사들 중 가장 마지막으로 씻게 되었다. 목욕을 위해 세운 간이 막사를 혼자 쓸 수 있다는 점은 좋았다. 그는 빠른 손놀림으로 갑주를 풀다가 손수건에 싸인 할로네 거베라를 발견했다. 꽃은 한층 숨이 죽었다. 몇 시간 전에는 조금이나마 생기를 간직하고 있었는데.

제피랭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꽃을 쥐고 잠시 애도했다. 길을 잘못 든 젊은이를 가엾게 여긴 할로네의 은혜가 닿은 것일까? 문득 그는 잊고 있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푸른 머리카락의 소년이 자신의 검 앞에 무릎 꿇은 광경을….

그때만 해도 할로네 거베라는 성도 여기저기 무성하게 피어 있었다. 5월 말, 거베라가 꽃대를 올리기 시작하면 신전기사단은 검술 대회 참가 신청을 받았다. 그러는 동안 기사단 건물은 영광을 거머쥘 생각으로 눈을 반짝이는 청년과 소년들, 자식을 따라온 극성 부모들, 더 나아가 자식이 내가 놓친 영광을 거머쥐리라는 욕망에 사로잡힌 아버지들로 북적였다.

발루르당 경은 아들의 독립심을 존중했다. 덕분에 제피랭은 혼자 신청서를 내러 올 수 있었다. 귀족 자제들의 기세에 한참 밀려 쩔쩔매긴 했지만. 그는 순서를 다투며 아우성치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발을 재게 놀렸다. 얼른 돌아가서 검이라도 한 번 더 휘둘러야지. 그 생각뿐이었다. 조금 전의 자신처럼 사람들 뒤에서 주뼛거리는 푸른 머리카락의 소년을 보기 전까지는.

제피랭은 썩 좋지 않은 사교성을 한껏 끌어올렸다. 소년은 마감 시간 직전에야 사람들을 뚫고 들어가 신청 접수를 끝냈다. 고맙습니다, 인사하는 말끝이 무뚝뚝하게 떨어졌다. 그런 태도 때문에 제피랭은 남은 사교성까지 닥닥 긁어낸 뒤에야 소년의 이름을 들을 수 있었다.

“오르슈팡…그레이스톤입니다.”

발루르당 경의 부인은 남편이 미처 챙기지 못한 섬세한 대소사를 돌볼 줄 알았다. 그녀가 돌보는 일 중에는 아들의 교우 관계도 포함되어 있었다. 덕분에 제피랭은 소년의 정체는 물론 그가 포르탕 백작의 무엇인지도 알았다. 이름이 밝혀진 뒤 급격히 낯을 가리는 모습에 소년은 화도 내지 않았다. 그저 얼굴을 한층 무표정하게 굳혔을 뿐.

대회는 할로네 거베라가 만개하는 6월 초입에 치러졌다. 하루하루가 아까울 시기에 제피랭은 이틀째 오르슈팡이 신경 쓰였다. 짬을 내서 아들의 오후 수련을 보러 왔던 발루르당 경은 내일도 집중하지 못한다면 대회 참가를 물리겠다고 혼을 냈다. 그래서 제피랭은 포르탕 가 저택 근처를 얼쩡거릴 수밖에 없었다.

일단은 오르슈팡 그레이스톤을 만나야 했다.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무시해서 미안하다고? ‘그레이스톤’이라는 성씨를 쓰는 사람을 처음 봐서 그랬다고? 상상 속의 오르슈팡은 차가운 눈으로 이쪽을 노려볼 뿐이었다. 결국 현실의 오르슈팡이 등장한 뒤에야 제피랭의 고민도 끝이 났다.

“누구시죠?”

‘심부름을 다녀오는 길이라 오래 노닥거릴 시간이 없다’는 오르슈팡에게, 제피랭은 시선을 내리깔고 빠르게 중얼거렸다. 이틀 전에 너를 도와줬던 사람인데 그때는 미안했다고. 제피랭은 또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싶어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그러다 소년과 아직 통성명을 끝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제피랭이야. 발루르당 경이 내 아버지시고.”

“…의외네요.”

제피랭이 고개를 들자 놀라워하는 오르슈팡이 보였다. 하필 그때 기다림에 지친 하인이 오르슈팡을 찾으러 나오는 바람에, 오르슈팡은 말을 잇지 못했다. 굼벵이처럼 굴지 말라는 타박에 미련 없이 몸을 돌린 소년의 등을 보다가, 제피랭은 한 가지 묘안을 떠올렸다.

“그레이스톤! 내일부터 나랑 검술 대회 날까지 대련하기로 한 거 잊지 않았지?”

제피랭은 아버지의 이름까지 팔았다. (‘발루르당 경도 기대하고 계셔!’) 하인이 금방이라도 그게 무슨 소리냐 캐물을 기세여서 제피랭은 얼른 자리를 떴다.

다음 날부터 오르슈팡은 제피랭 옆에서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가끔 발루르당 경이 훈련을 봐주러 찾아왔기 때문에 오르슈팡은 제피랭을 이름으로 불렀다. 정작 본인은 여전히 성씨로 불리기를 고집했다. 우리가 한 살 차이인 것까지 알게 됐는데 왜 나는 이름을 못 부르는 거냐고 제피랭이 투덜거렸지만, 오르슈팡의 고집에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두고 보자. 예선에서는 결국 오르슈팡으로 불릴 테니까. 모르긴 몰라도 그레이스톤이 너만 있는 건 아닐 테지.”

오르슈팡은 코웃음 치며 응수했다. “기사 작위나 받고 말해. 그땐 대들 명분도 없으니까.”

소년들이 웃고 떠들며 검을 나누는 사이 할로네 거베라는 꽃을 피웠다. 대회가 시작되었다.

제피랭과 오르슈팡은 무사히 1차 예선을 통과했다. 신청서를 낸 시간이 비슷해서인지, 평민 신전기사의 아들이 사생아를 이기는 그림을 누군가 계산해서인지…. 제피랭은 2차 예선에서 오르슈팡과 붙었다.

시합을 본 사람들은 발루르당 경의 아들을 높이 평가했다. 대담한 무기 선택으로 자신의 약점을 솜씨 좋게 보완했다고 말이다. 그러나 제피랭은 호의적인 평가에 귀를 기울이기는커녕, 검을 놓친 친구가 숨을 몰아쉬며 자신의 칼 앞에 무릎 꿇은 광경을 보고 있었다.

제피랭은 대회에서 우승하지는 못했지만, 15세 치고는 제법 높은 순위로 본선에 입상했다. 발루르당 경은 신전기사단 입단서를 쓰는 자리에 함께했다. 입단 절차는 길지 않았으나 아버지를 따라 기사단 사람들에게 눈도장을 찍다 보니 하루가 다 갔다. 다음날 예정된 입단식 준비를 위해 제피랭은 집에 일찍 돌아가기로 했다.

신전기사단 건물을 나온 제피랭은 정문 근처에서 안을 기웃거리는 오르슈팡을 발견했다. 얼굴을 본 것은 대회 2차 예선 이후 처음이었다. 제피랭은 덜컥 겁을 집어먹었다. 오르슈팡이 나를 원망하면 어쩌지? 오르슈팡이 팔을 뻗었다. 제피랭은 주먹질을 예상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뭐하냐?”

눈을 뜨자 오르슈팡은 어이없어하는 얼굴로 손에 쥔 것을 흔들었다. 허리가 꺾인 할로네 거베라 몇 송이가 눈앞에서 한들거렸다. 꽃송이를 감싼 손수건 덕분에 제법 꽃다발처럼 보였다. 어디서 난 꽃이냐, 묻자 집에 들어온 꽃다발을 다듬다가 슬쩍했다고. 제피랭은 포르탕 가의 첫째 아들이 대회에서 몇 등이었는지 잠시 기억을 더듬어 봤다. 그렇게 잘 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백작 내외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첫째 도련님도 할로네 거베라를 받는데, 네가 못 받을 게 뭐냐. 깨끗한 꽃은 아니지만…. 어차피 버릴 테니까. 그럼 내가 주워간다고 뭐라 할 사람이 없지.”

그 뒤로 제피랭은 신전기사단에 적응하느라 매일 바빴다. 오르슈팡과는 휴일과 비번일 때 가끔 만나는 게 다였다. 부인이 아들의 교우관계를 염려한 지 3년째 되던 어느 날, 발루르당 경은 신전기사단의 일원으로서 충고했다. 오르슈팡 그레이스톤과 친분을 유지하는 게 제피랭의 앞날에 좋지만은 않을 거라고.

충고한 보람은 별로 없었다. 얼마 뒤 오르슈팡이 기사 서임을 받고 포르탕 저택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 뒤로 제피랭은 신전기사단 건물에 드나들며 할로네 거베라가 핀 화단을 눈에 담고는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만남은 몇 달 단위로 뜸해지다가 결국 자취를 감췄다. 그즈음부터 제피랭은 자기가 왜 화단을 유심히 보는지도 잊어버렸다. 신전기사단 동료들은 그 버릇을 신앙심으로 해석했다. ‘자네는 할로네 거베라를 좋아하나 보군? 역시 성실하고 신실한 제피랭 경이야!’ 다른 이유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제피랭은 동료들의 말에 수긍할 뿐이었다.

재해가 닥친 뒤 화단에 남은 것은 눈더미뿐이었다. 온 성도가 얼어붙은 첫날, 제피랭은 괜히 화단을 뒤적이며 냉해를 입고 시든 할로네 거베라를 오래 바라보았다. 아이메리크가 신전기사단 총장이 되고, 창천기사단으로 소속을 옮긴 뒤에는 그 기억조차 잊었다.

그리고 지금이다. 누군가 이름을 부르며 몸을 흔들고 있었다. 제피랭은 자신이 몸을 웅크린 채 숨을 헐떡이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런데 왜 이렇게 슬픈 건지 모를 일이다. 숨도 못 쉴 정도로 울 상황이 아니지 않은가? 고작 오르슈팡 경이 죽은 걸…. 그 순간 제피랭의 눈앞이 흐려졌다. 오랜 시간 휘하 기사의 에테르를 오염시킨 교황의 세뇌가 작동했다. 제피랭이 제피랭으로서 충성을 바치기 위해서는 그 기억이 없어야 하므로…. 결국 그는 이렇게 중얼거리고 말았다. 고작 꽃 몇 송이 시든 걸 가지고.

목소리의 정체는 벨긴 경이었다. 막사에서 한참 나오지 않는 게 불안해 들어와 봤더니, 제피랭이 바닥에 쓰러진 채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단다. 숨을 제대로 못 쉬고 있어서 갑옷을 마저 벗겼다고 했다. 소란 탓인지 교황마저 와 있었다.

제피랭은 자신이 교황 성하의 발치에 널브러져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부끄러움에 몸 둘 바를 몰랐다. 토르당 7세는 총장의 추태를 짐짓 눈감아주는 척 손을 내밀었다. 제피랭은 고개를 들어 다가오는 손에 감히 뺨을 기댔다.

교황은 눈물을 닦아주며 꾸짖었다. ‘첫 살인도 아니거늘 어찌 이리 괴로워하느냐?’ 제피랭은 숨을 헐떡이며 변명했다. ‘그게, 그게 아닙니다, 성하….’ 할로네의 대리인이자, 애검 ‘조각난 마음’을 받은 순간부터 따르고자 한 주께서는 서릿발 같은 음성으로 종을 질책했다. ‘제피랭 총장, 자네 새삼스레 마음이 흔들렸는가?’ 제피랭은 횡설수설했다.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저의 신심은 변함이 없고 반석같이 단단합니다….’ 그는 얼른 무릎을 꿇었다. 교황의 손을 자신의 두 손으로 받들고 이마를 댔다. 복종의 예를 표하느라 손수건과 시든 꽃 따위는 바닥에 내팽개친 지 오래였다.

할로네는 자신의 영지가 들꽃 피는 목초지였던 시절에도 냉혹한 군주였다. 그녀는 한 번 자비를 걷어찬 자에게 두 번째 은총을 내리지 않았다. 방금 제피랭에게 돌아온 기억이 바로 그것이었다. 창이 잘못된 상대를 관통한 뒤, 가슴 속에 차오른 슬픔의 기원을 떠올릴 마지막 기회. 그러나 제피랭의 마음이 진작 조각나 있었던 탓에 기억은 오래 머무르지 못했다. 절망할 이유, 후회할 이유, 눈물 흘릴 이유, 그 모두를 영영 잃었다. 되돌릴 수도 없게 되었다. 한껏 피어난 할로네 거베라는 반드시 시들고, 꽃에 영원한 명예를 부여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과 기억이므로. 그것이 섭리였다.

제피랭이 가짜 섭리에 머리를 조아릴 동안 진정한 섭리가 시든 꽃과 손수건을 낚아챘다. 막사 안까지 불어온 바람이 할로네의 손길이었음을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전쟁과 분노의 신은 어리석은 종이 내버린 유일한 이정표를 손안에서 굴리다가, 유실물과 가장 어울리는 매장지에 장사지내 주었다. 구름바다는 언제나처럼 신의 뜻을 따랐다.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