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의 제자
베네
-주의: 6.0 효월의 종언 스포일러 / 특정 빛전 및 아젬 묘사 있음 / 특정 캐릭터 환생 날조 있음
케이와 엘로이즈
눈이 마주친 순간 케이는 확신했다. 그러곤 냅다 아이를 안아 들고 야슈톨라에게 뛰어갔다.
“어때?”
야슈톨라는 붙어 있으니 헷갈린다며 일단 아이를 내려놓으라고 케이에게 말했다. 아무리 급해도 애를 그렇게 들고 뛰면 안 된다, 는 말에 케이는 반성했다. 힘들지 않았냐는 말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보통의 성인 남성은 자기 어깨까지 오는 어린이를 케이처럼 가볍게 들고 뛰기는 힘들다…. 그렇게 말해줄까 하다가, 야슈톨라는 질문에나 대답하기로 했다.
“아이가 가진 에테르가 평균 이상인 건 맞아요. 하이델린의 에테르와도 비슷하게 보이고. 하지만 그 정도 유사성은 당신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는 거라…. 제 눈에는 그냥 우연 같네요.”
케이는 수긍했다. 슈톨라가 아니라면 아닌 거겠지. 하지만 아이의 흰 머리카락과 푸른 눈, 웃음 짓는 듯 올라간 입꼬리가 자꾸 시선을 잡아끌었다. 아이는 낯선 사람이 무섭지도 않은지 케이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너 대체 여기까지 어떻게 왔니?”
조사대에 합류한 비에라들의 얼굴을 떠올려 봤지만 닮은 얼굴을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하이델린과 관련 없다고 슈톨라가 확인해줬으니 마을 아이는 맞을 텐데. 어린애가 조사대가 꾸린 거점까지 무사히 왔다는 것도 문제였다. 자칫 잘못하면 납치범으로 오해를 살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겨우 조사 허락을 받았는데 이런 식으로 틀어지게 할 수는 없었다.
몇 달 전, 골모어 대밀림에서 에테르 이상 현상이 관측되었다. 소식을 접한 발데시온 위원회가 조사대를 보냈다. 위원회는 지난 10여 년간, 발 섬 침몰 이전의 위상과 인력을 어느 정도 회복했다. 그러나 시간을 다툴 일이 생겼을 경우는 아직 일손이 부족했다. 그래서 케이와 야슈톨라가 용병으로 불려왔다. 일행을 호위하고 조사를 돕기 위해서였다.
현지에서 도움을 얻기는 쉽지 않았다. 이상 현상 발생 지역을 관리하는 비에라 씨족은 조사대의 출입을 거부했다. 상황이 변한 것은 케이와 야슈톨라가 뒤늦게 지원군으로 도착한 뒤였다. 족장이 보낸 전령이 빛의 전사를 지목하며 대화를 요청했다. 그때 야슈톨라는 인수인계를 받느라 바빠서 동행하지 못했다. 무슨 얘기를 했는지 묻자 케이는 별일 없었다고 대답했다.
“옛날에 맡은 의뢰 얘기를 묻길래 이것저것 말해준 게 다야.”
“협조해주겠다고 하던가요?”
“거점을 세울 만한 땅이 어디인지 알려주겠대. 안내인도 몇 명 보내주고.”
당장 며칠 전에 그런 대화를 나눴더랬다. 안내인을 믿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도 그 사람뿐이었다. 하루 안에 접촉할 수 있는 현지인인데다, 외지인에게 거부감이 적은 인선이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조사대가 결백하다는 주장을 들어는 줄 테니까.
아이를 데리고 안내인들에게 갔더니 그 사람들도 무척 당황했다. 조사대 거점과 마을 사이에는 꽤 거리가 있었다. 성인이라면 모를까, 아직 무기도 제대로 고르지 않은 아이가 걸어오기에는 길이 위험했다. 어떻게 온 거냐는 물음에 아이는 ‘하얀 유령을 따라왔다.’고 대답했다. 그날 하루로 끝났다면 신기한 일도 다 있지, 하고 넘어갔을 텐데…. 안타깝게도 그렇게 끝나지는 않았다.
아이는 다음날에도 조사대 거점에 와 있었다. 그런 일이 며칠 반복되자 마을에서는 아이를 조사대가 맡아 주었으면 한다고 부탁했다. 원인이 밝혀지기 전까지만이라도. 케이가 돌보미 역할에 자원한 덕분에 조사대는 큰 마찰 없이 아이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아이의 잠자리는 안내인 숙소에 꾸려졌다.
아이의 이름은 나타샤였지만, 안내인들은 ‘냇’이라고 불렀다. 케이가 어느 쪽이 좋은지 묻자 아이는 짧은 쪽이 좋다고 했다. 그렇게 조사대 거점의 모두가 냇을 알게 되었다.
냇은 8살짜리답지 않게 얌전하고 조용했다. 그래서일까, 케이는 툭하면 아이를 안아 들고 여기저기 뛰어다녔다. 그러면 냇은 속도감에 신이 나서 꺅꺅 비명을 지르곤 했다.
케이가 이따금 ‘하얀 유령’을 지나친 뒤로 냇은 안기는 것보다 손을 잡는 쪽을 선호하게 되었다. 몇 번인가 아이는 케이에게 하얀 유령이 가까이 와 있다고 말해주기도 했다. 케이의 눈에는 그저 안개나 아지랑이처럼 보일 뿐이었다. ‘유령이 지금 뭘 하고 있지?’ 물으면 냇은 대답했다. ‘케이를 보고 있어요. 적절한 때를 기다리면서.’
어느 밤, 케이는 정신을 뒤흔드는 다급한 감정과 함께 깨어났다. 다른 사람의 감정이 벽을 넘어 마음을 두드리는 느낌이 아주 생경했다. 눈을 뜨자 냇이 울상을 지은 채 케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유령이 왔어요.”
다음 순간 케이는 짧은 현기증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눈앞을 짐승의 환영이 스쳐 지나갔다. 어둠 속에서 가죽에 맴도는 파르스름한 전기가 보였다. 순간적으로 튀는 반짝임 아래로 누런 털빛이 보였다. 독을 머금은 침이 바닥에 떨어져 풀과 흙이 녹았다. 마치 누군가가 머릿속을 열어 보여준 것 같은 광경이었다. 천막 안에는 케이와 냇, 둘 뿐이었지만.
케이는 오래 지체하지 않았다. 냇에게 짐승이 다가오는 방향을 확인한 뒤 빠르게 무장했다. 그만한 짐승을 상대할 만한 사람은 케이 혼자였다. 다른 전투원들은 조사대의 대피를 도와야 할 거다. 운이 좋다면 야슈톨라 정도는 지원하러 와줄 수 있겠지. 더 운이 좋다면, 마을의 비에라들이나 숲을 지킨다는 남성 비에라들도….
그때까지 생존하려면 주술봉보다는 도끼가 나았다. 케이는 자신이 흑마법의 대가라는 사실을 늘 자랑스럽게 여겼지만, 그만큼 마법의 한계점도 뚜렷이 인지하고 있었다. 기댈 동료가 있을 때는 주술봉을 들어도 괜찮았다. 하지만 누군가가 나를 신뢰해야 하거나, 믿을 게 나 혼자뿐일 때는…. 도끼를 들자 문득 가슴에 뿌듯함이 차올랐다. 아르버트의 영향인 걸까? 기왕 존재감을 드러낼 거면 실전도 도와줬으면 좋겠는데.
냇은 자기도 가겠다고 떼를 썼다. 케이는 야슈톨라의 허락을 받으면 따라와도 된다고 했다. 그러고는 아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었다. 거점의 사람들을 깨워서 대피 명령을 전달하고, 야슈톨라와 안내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것.
“믿을게. 어서 가!”
케이는 냇의 등을 떠밀었다. 그러곤 뜀박질을 시작한 아이를 걱정스레 지켜보다 몸을 돌렸다. 냇이 알려준 방향으로 얼마쯤 가다 보니 어둠 속에서 희게 빛나는 형태가 나타났다. 저게 ‘하얀 유령’인 걸까? 유령은 케이를 보자마자 부산스럽게 손짓했다. 오냐, 그쪽이구나. 알 수 없는 고양감을 느끼며 케이는 발걸음을 옮겼다.
유령과는 좀처럼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재촉하듯이 뒤를 돌아보고, 콧노래를 부르듯 고개를 까딱거리고, 가끔 폴짝 뛰었다. 약 올리는 건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케이는 거리를 좁히려 들지는 않았다. 짐승과의 일전이 예고된 마당에, 유령 하나 잡으려고 괜한 힘을 빼고 싶지는 않았다.
문득 케이는 눈앞이 밝아졌다는 걸 깨달았다. 나무 사이사이의 높다랗고 좁은 틈새로 새어들던 달빛이 갑자기 넓게 내리쬐는 듯했다. 다음 순간 깨달았다. 짐승이 이동하며 나무를 다 쓰러트려 놨다는 것을. 시야를 틔워 준 건 고마웠지만, 홀로 상대해야 할 짐승이 집채만 한 크기를 자랑하며 서 있는 건 별로 고맙지 않았다.
짐승은 커얼 종류처럼 보였다. 번개 치는 날 고지 드라바니아에 등장하는 커얼레기나와 몸집이 비슷했지만, 뿔도 없고 훨씬 날렵하게 생겼다. 털가죽에 흐르는 전기며 입에서 떨어지는 독이며…. 냇이 초월하는 힘으로 전달한 광경과 다를 게 없었다. 전기 계열 공격은 커얼과(科 ) 생물의 공통점이니 그렇다 쳐도 독은 반칙 아냐? 실없는 생각을 곱씹으며 케이는 허리춤을 더듬었다. 바로 꺼낼 수 있는 위치에 해독제를 넣어둔 것이 다행이었다.
처음 얼마간 짐승은 유령의 움직임에 주로 반응했다. 그러나 유령이 사라지자마자 케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감각이 예민하거나 그 이외의 감지 수단이 있다고 봐도 될 것이다. 케이는 도끼를 고쳐 잡고 심호흡을 했다. 짐승이 포효를 내지르는 것과 동시에 함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다른 모든 생물이 듣지 못했더라도 짐승의 두 귀에는 똑똑히 들렸다. 존재감을 주장하며 신경을 긁는, 다른 어떤 저항보다도 주의를 쏟게 되는 불쾌한 소리가.
도끼를 몇 번 찍어보니 우려한 것과는 달리 제법 날이 잘 박혔다. 관건은 도끼가 무뎌지기 전에 놈을 처치하는 거였다. 혹시 몰라서 손도끼며 너클 등의 근거리 무기를 바리바리 싸 들고 오긴 했지만.
원초가 온몸을 두 번째로 잠식하고 지나간 직후 케이는 전략을 정했다. 다리 관절부터 부수자. 커얼이 전기를 발생시키는 기관은 보통 어깨관절에 있었다. 근육을 긴장시켰다가 포효와 함께 전기를 방출하는 식으로 공격이 이루어졌다. 이 짐승도 전격을 내뿜는 과정에서 비슷한 움직임을 보였다.
독은 해독제로 해결한다 쳐도 몸이 마비되면 답이 없었다. 짐승이 한번 전기를 끌어올린 뒤에는 가죽에 전류가 5분 정도 흘렀다. 가장 버티기 힘든 구간이었다. 도끼를 찍으면 손이 저릿하고, 막아도 팔에 경련이 일고…. 원초를 해방해 몸이 회복되는 속도를 증폭한 직후에는 더했다. 막 재생된 근육으로는 마비에 저항하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부상을 방치할 수도 없고!
케이는 짐승의 관절에 무아지경으로 도끼질을 했다. 언제까지 이성을 유지하며 버틸 수 있을까? 원초에 잠식되면 두들겨 패서 제압하는 것밖에는 답이 없었다. 제압한다고 무조건 정신을 차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슈톨라는 어떻게든 방법을 찾을 테지만, 그동안 자신이 원초에 잡아먹힌 채 숲을 떠돌지도 모른다는 게 문제였다. 같은 일을 겪었던 험난한 산이 숨어 지낸 곳은 겨우…. 정신 차려!
상념에 빠지는 순간 이빨이 쇄도했다. 케이는 간신히 팔을 비틀어 뺐다. 스치기만 했는데도 팔이 저린 걸 보니 아주 고약한 독이었다. 딱 한 번만 더 공격하면 관절을 부술 수 있을 것 같아서 오기로 도끼를 휘둘렀다. 짐승의 한쪽 앞다리가 무너지는 동시에 거리를 벌리고 해독제를 마셨다. 해독 효과가 도는 걸 기다릴 틈이 없었다. 케이는 도끼를 고쳐잡으며 짐승의 어깨에 달려들었다. 원초가 핏줄을 내달리며 새롭게 힘이 솟았다. 팔근육이 순간적으로 부풀었다. 세 번의 도끼질로 짐승의 어깨를 부쉈다.
다른 쪽 어깨를 찍어낼 때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짐승이 한쪽 다리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데다 전기 공격의 위력이 줄어서 한층 수월했다. 그러나 케이도 힘이 빠졌던 탓에 짐승에게 두 번쯤 더 물렸다. 지원군이 와준 덕에 해독제는 제때 마실 수 있었다. 적의 주의를 끄는 건 계속 그의 역할이었다. 케이는 몇 번이나 소리를 지르며 짐승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야슈톨라의 강력한 영창이 마지막이었다. 짐승은 양어깨가 부서진 채로 쓰러졌다. 케이는 덜덜 떨리는 손아귀로 도끼를 쥔 채 경계 태세를 풀지 않았다. 냇이 뒤에서 달려드는 바람에 급히 도끼를 내던져야 했지만…. 몸을 돌려 아이를 안아주려다 다리가 풀려서 케이는 결국 주저앉았다.
“살…았다.”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자 야슈톨라가 타박했다. “그럼 죽게 내버려 둘 줄 알았나요?” 비에라들이 주위를 정리할 동안, 그는 케이의 몸 상태를 봐주었다. 이런 몸으로 지금까지 잘도 버텼다, 해독제 마시는 걸 봤는데 왜 몸에 독이 남아 있냐, 숲을 나가자마자 다른 사람들에게 연락을 돌릴 테니 그렇게 알아라, 마지막 자비로 휴양지 정도는 고르게 해 주겠다…. 같은 잔소리가 치유 마법의 빛과 함께 케이에게 쏟아졌다.
“슈톨라, 나도 할 말 있어. 냇은 대체 왜 데려온 거야?”
“그야 당신이 짐승을 끌고 이 근방을 헤집고 다녔으니까요. 냇의 안내 덕에 금방 찾았죠.”
냇은 여전히 케이를 끌어안고 있었다. 케이는 달빛에 희게 빛나는 아이의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냇을 껴안은 쪽 손을 아이의 머리에 올린 뒤 섬세하지 못하게 쓰다듬었다. 사람들을 모두 대피시켰는지, 야슈톨라를 어떻게 설득했는지…. 궁금한 것을 묻고 대답을 들은 뒤에는 이렇게 말했다.
“잘했어, 정말 잘했어, 냇.”
케이는 고개를 숙여 냇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네 덕분이야….’ 그런 말을 느리게 반복하면서 나머지 팔로도 아이를 껴안고 등을 토닥였다. 아이를 처음 본 순간부터 계속 말해주고 싶었다. 아니, 사실은 그보다 더 전부터…. 종언을 부르는 자를 막아낸 뒤, 답을 찾은 메테이온을 송별한 그 순간부터. 당신은 지금까지 정말로 잘해주셨다고. 이 결말을 맞을 수 있었던 건 모두 당신 덕이라고.
케이가 당사자는 결코 들을 수 없는 감사를 중얼거리는 사이, 냇은 숨을 씩씩거리다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손을 얹은 등이 들썩거리는 걸 느끼고, 케이는 아이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 얼굴을 보려고 했다. 냇이 고집스레 품에 얼굴을 묻은 탓에 왜 그러냐고 물어볼 수밖에 없었지만…. 그게 기폭제였다. 다정한 염려에 냇은 울음소리를 죽일 수가 없었다. 케이가 죽을까 봐 무서웠다, 늦으면 안 되니까 꾹 참았는데, 싸우는 중에도 너무 무서워서…. 그런 말이 눈물과 함께 이어졌다.
“하지만, 나를, 믿는다고, 했으니까. 나도 케이를, 믿어줘야지, 싶어서.”
어쩌면 하이델린, 베네스의 혼이 한 조각이라도 남아 있었더라면, 세상을 구한 뒤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해 주지 않았을까? 케이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때 무언가가 기척도 없이 다가왔다. 하얀 유령이었다.
가까이서 보니 실로 유령다웠다. 얼굴도 없고 윤곽뿐인, 에테르로 이루어진 비정형의 형체. 희미한 몸뚱이에 비해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이 느껴졌다. 유령은 경계하는 야슈톨라와 멀뚱히 응시하는 케이를 아랑곳하지 않고 냇에게 손을 뻗었다. 동시에 짧은 파동이 한 차례 세 사람 주위에 울렸다. ‘임무 완료!’라고 말하는 경쾌한 목소리가 들린 듯했다. 다음 순간 유령은 냇의 몸을 둥글게 껴안는다 싶더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후일 야슈톨라는 그 에테르 덩어리가 그날 냇에게 흡수되었다고 말해주었다. 혼에는 뚜렷한 변화가 없었지만, 그날 이후 아이는 가끔 낯선 사람들이 나오는 꿈을 꾸었다. 케이는 냇의 꿈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복식이 고대인의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흰 머리 여자는 보나마나 베네스겠지만, 붉은 머리 여자의 정체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유령은 하이델린이 빠트린 조각이었을지도 모르죠. 기억이나 상념 같은…. 그런 게 숲을 떠돌게 된 경위는 영영 알 수 없겠지만요. 우리가 별바다로 돌아간 뒤에도.”
야슈톨라는 냉정하게 결론을 내렸다.
“케이, 설령 당신의 추측이 맞았다고 해도…. 난 인정할 수 없어요. 냇은 냇이에요. 베네스도 그런 건 원하지 않았을 거고. 우리의 신은 인간이 불완전한 서로의 팔에 기대어 나아가는 꿈을 꿨으니까요.”
완전한 존재들은 퇴장해야만 했다. 케이도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섭섭하고 아쉬울 뿐.
“냇을 냇으로 대할 자신이 정말 있나요? 그 애와 그 애의 전생을 연관 짓지 않을 수 있어요? 그런 각오가 없다면 나는 반대예요.”
“당연하지, 슈톨라. 내가 무슨 에메트셀크도 아니고.”
옥신각신하는 사이 두 미코테의 귓가에 가볍고 경쾌한 아이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둘은 얼른 말싸움을 멈추고 냇을 반겼다. 아이는 오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잘거리며 케이와 야슈톨라를 한 번씩 끌어안았다. 얼마간 잡담을 이어가던 중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은 케이였다.
“있지, 냇. 우린 며칠 뒤에 떠나잖니.”
냇은 지금 그런 말을 왜 하냐는 듯 입을 비죽거렸다. 그렇지만 예의 없는 행동이라는 걸 이내 깨달았는지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거대 커얼 습격 소동이 지나간 뒤, 조사대는 거점에 남아 있던 에테르 측량 기기의 수치를 보고 기함했다. 몇 달 전 골모어 밀림에서 발생했다던 에테르 이상 현상과 비슷할 정도의 수치가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누군가가 냇이 말한 하얀 유령의 출현 주기, 그리고 조사에 착수한 후 간헐적으로 기록되었던 이상 수치 사이의 관련성을 알아냈다. 덕분에 냇은 지금까지 거점에서 생활하는 특혜를 누렸다.
조사대에게 남은 과제는 그런 에테르 형체가 어째서 생겨났는지 해명하는 일뿐이었다. 케이와 야슈톨라는 이쯤에서 슬슬 철수해도 되겠다고 합의를 봤다. 쿠루루에게 보고서를 보내며 일의 진상에 대해 언급해두면 조사대도 곧 물러날 것이다. 케이는 비에라 마을 쪽에 이 정보를 슬쩍 흘린 뒤, 조사대가 떠날 때까지는 부디 잘 돌봐달라고 부탁했다.
남은 건 이별뿐이었다. 물론 케이는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도 있다는 이치에 순응할 마음이 없었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내 제자가 될 생각 없어?”
물론 제자가 되지 않아도 괜찮았다. 케이는 시간이 허락하는 한 냇을 보러 올 생각이었다. 하지만 골모어 밀림은 멀었고 아이는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랐다.
“개인적인 욕심을 부리자면, 네가 크는 모습을 가까이서 보고 싶어. 숲 바깥의 다른 땅도 보여주고 싶고. 이 세상에 나만큼 널 잘 가르쳐줄 선생님은 없을걸.”
케이는 공평하게 자신의 제자가 되었을 때의 단점도 꼽아주었다. 직업이 직업인 만큼 한곳에 정착하더라도 종종 집을 비울 거다. 가능하면 데리고 다니겠지만 같이 갈 수 없는 일도 분명 생길 터였다.
“하지만 약속할게. 늘 최선을 다해 네 스승이 되어 주마. 너에게 내가 없어도 될 때까지.”
케이는 그런 말로 제안을 끝냈다. “한번 생각해보렴. 마을 어른들은 내가 설득할 테니 신경 쓰지 말고.” 냇은 덩달아 심각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는 씩 웃으며 분위기를 전환했다. ‘그럼 어제 설치한 새덫에 뭐가 걸렸는지 보러 가 볼까!’ 외치며 냇의 손을 잡고 뛰었다.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 결론부터 말하자면, 새벽의 혈맹은 오랜만에 돌의 집에 모였다. 영웅에게 제자가 생겼다는 소식은 각자의 길을 걷던 사람들을 부르기 충분한 이유였다. 알리제와 알피노는 조카라도 보러 오는 것처럼 선물을 잔뜩 사 왔다. 둘의 선물 공세를 지켜보던 에스티니앙은 빈손으로 삼촌 자리를 채갔다. 쌍둥이의 거센 항의에 5초 만에 반납해야 했지만.
산크레드는 아이가 너무 어리니 육아 팁은 몇 년 뒤에나 줄 수 있겠다고 농담을 건넸다. 위리앙제는 앞으로의 사제관계가 순탄하길 빈다고 진지하게 기원해주었다. 타타루는 특유의 친화력으로 아이의 나이부터 옷 취향까지를 탈탈 털었다. 케이가 ‘또 옷을 만들어주려고?’ 농담하자 ‘어머 무슨 소리세용! 당연히 사셔야죵! 제자에게 그 정도 돈도 못 쓰시나용!’ 하고 정색하며 받아친 건 덤이었다.
그라하는 이 자리에서 빠졌다. 의뢰 보고서를 읽은 쿠루루가 참석해야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내보였기 때문이다. 발데시온 위원회의 수뇌부가 모두 자리를 비울 수는 없었다. 이틀 동안의 치열한 토론 끝에 결국 쿠루루가 이겼다. 링크셀로 참석 여부를 통보하면서 쿠루루는 한참 동안 케이를 붙잡고 있었다. 그렇게 할 말이 많아 보였는데 정작 아이와 통성명을 할 때는 환영 인사만 간신히 건넸다. 쿠루루는 이 이상 대화를 하려면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소곤거렸다. 그 심정을 케이는 충분히 이해했다.
“그럼 자기소개해야지, 엘로이즈.”
냇은 이름을 바꿨다. 숲을 떠날 때 새 이름을 짓는다는 관습을 따라서였다. 물론 다른 이유가 더 컸다. 나타샤의 애칭인 냇은 베네스의 애칭이기도 했던 탓이다. 케이는 야슈톨라의 도움을 받아 에오르제아식 이름 목록을 짜냈다. 냇이 아직 글자를 배우기 전이어서 이름을 하나씩 읽어주며 후보를 간추렸다. 그동안 별빛처럼 흰 머리카락에도 서서히 색이 깃들었다. 골모어 밀림의 나뭇결 같은 밤색이었다.
언제나처럼 케이는 엘로이즈의 등을 한쪽 팔로 성기게 감싸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 순간, 격려하듯 제자의 한쪽 어깨를 짚어주고서 팔짱을 꼈다. 이상하게도 엘로이즈는 손의 온기가 계속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림사 로민사 근방의 바닷가 마을에 집을 구한 뒤 이웃에 인사를 다녔을 때처럼. 혹은 스승의 가족들 틈에서 며칠 휴가를 보냈을 때처럼.
엘로이즈는 떨지 않고 인사를 마쳤다. 새벽의 혈맹은 다시 한번 입을 모아 케이의 제자를 환영해줬다. 이 자리의 목적은 그것뿐이었기 때문에 모두가 이다음엔 뭘 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했다. 타타루만 빼고.
“이렇게 될 것 같아서 제가 미리 식당을 예약해 뒀답니당. 회비 걷어야 하니 줄 서세용.”
예전 같았다면 쿠루루가 도왔을 테지만, 그는 휴가를 와서까지 일하기는 싫다며 양해를 구했다. 그래서 산크레드가 타타루 옆에서 수금을 보조했다. 그런 뒤에는 둘이서 머리를 맞대고 식당에 대한 정보를 주고받았다.
실무자들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밀린 소식을 나누었다. 그런 다음에는 다들 케이가 제자를 들이게 된 사연을 궁금해했다. 엘로이즈에게 말을 걸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을 다잡은 쿠루루를 빼면 말이다. 현장에 있었던 야슈톨라는 케이가 얼버무리고 넘어가는 정보를 보충해주는 역할을 맡았다. 이야기 중간중간 케이가 빈축을 사는 데 일조했음은 물론이다. 알리제는 무모한 짓은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느냐고 투덜거렸고, 위리앙제는 제자가 생겼으니 앞으로 그러지 않으면 된다며 뼈가 있는 평가를 했다.
저녁을 먹으러 가는 길에는 망자의 종소리가 얼마나 발전했는지 감탄하는 시간을 가졌다. 예약한 식당은 모르도나에 정착한 지 10년째인 타타루가 엄선한 맛집이었다. 산크레드의 평가에 따르면 입지 조건에 비해 놀라울 정도로 음식의 질이 좋은 식당이라나. 그 말대로였다. 입맛이 가장 까다로운 알피노조차 얼굴에 화색이 돌 정도로 맛있었다. 그 모든 것을 엘로이즈는 주의 깊게 보고, 듣고, 느꼈다.
식당을 나설 즈음에는 맑았던 날씨가 변해 있었다. 엘로이즈는 오묘한 자줏빛 안개가 낀 하늘을 보며 케이의 소매를 꽉 쥐었다. 놀란 제자를 위해 케이는 얼른 모르도나의 특색 있는 날씨에 관해 설명해주었다. 특이한 현상은 아니라는 걸 강조하다 보니 어느새 대화 주제는 세계 각지의 특이한 날씨들로 확장되어 있었다. 엘로이즈는 주위에 다른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도 잊어버린 듯 저도 모르게 푸념했다.
“언제 그걸 다 보러 가죠?”
케이는 크게 웃었다. 사제관계를 제안하긴 했지만, 엘로이즈가 꼭 모험가가 될 필요는 없었다. 애초에 아이의 적성에 맞는 길이라면 무엇이든 지원해줄 생각이었다. 결심이 무색하게도 제자는 모험가가 적성인 것으로 보였다. 밟은 적 없는 땅에 대한 호기심은 모험가가 되기 위해 가장 필요한 자질이었으니까.
하긴, 엘로이즈는 제자가 되겠느냐고 물어본 지 한나절 만에 이렇게 대답했다. 숲을 떠나도 괜찮을 거 같다고. 그때부터 예견된 일이었다. 비에라는 오래 사는 종족이고, 너는 아직 사춘기도 되지 않았으니 벌써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말하다가…. 케이는 문득 깨달았다.
너의 여행은 내게 남은 시간보다 길게 이어지겠지. 나의 스승이 그랬듯이 나 역시 너를 끝까지 지켜볼 수는 없을 테다. 그러나 허락된 시간 동안만이라도 너와 함께할 수 있다면, 나는 더없이 기쁠 거라고.
케이는 비로소 베네스의 선택을 이해할 수 있었다. 당신도 이런 마음이었겠군요, 그렇죠?
“스승님?”
엘로이즈가 소매를 흔들었다. 케이는 잊었던 게 떠올랐다고 얼버무리며 엘로이즈의 손을 고쳐 잡았다. 집이 어느 정도 정리되면 가까운 곳부터 구경을 가자고 약속했다. 약간 망설이다가 더 먼 곳까지도 함께 보러 가자는 말도 덧붙였다. 케이가 잘 아는 쪽은 아무래도 남겨진 사람의 마음이었으니까. 힘닿는 데까지 약속을 지키려면 역시….
“오래 살아야겠다.”
혼잣말이 조금 컸는지, 엘로이즈가 무슨 말이냐며 고개를 갸웃했다. 케이는 ‘이런 말이지!’라고 외치며 제자를 번쩍 안아 들었다. 그대로 뛰기 시작하자 당황한 일행들이 부르는 소리가 등 뒤로 멀어졌다. 돌의 집에 도착하면 또 잔소리를 듣겠지만, 엘로이즈가 신나게 웃었으니 그걸로 된 거였다.
베네스와 포이베
베네스는 오랜만에 제자를 만나 담소를 나눴다. 아젬은 늘 바쁜 사람이었지만 경애하는 스승의 요청에는 언제나 시간을 할애했다. 아젬의 직책은 남들의 고민을 들어주기 위해 있는 것이지만, 그만큼 아젬 본인도 자기 자신을 잘 보살펴야 한다. 이번 대 아젬에게는 스승님과의 만남이 곧 자신을 돌보는 일이었다. 장소는 제자의 집이었다. 둘은 집에 들어서는 순간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가면을 벗어 로브에 갈무리했다. 늘 그랬던 것처럼.
포이베, 만약에 우리가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건가요?
스승은 오래 끌지 않고 본론에 들어갔다. 제자는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이 어떤 것인지 질문했다. 베네스는 미래에서 온 여행자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해 주었다. 종말, 종말을 막기 위한 시도, 희생된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되돌리려는 시도에 대해서. 귀를 기울이는 얼굴에 다양한 표정이 떠올랐다. 말을 끝마쳤을 때 포이베는 거참 어려운 사고실험이라는 감상을 말해주었다.
별바다로 가는 사람들에게도 똑같은 생각일까요? 시민들을 원래대로 되돌리자고 주장하는 이들이요.
같은 종류의 문제라고 생각하는군요?
제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그 둘을 다르게 취급한다면 정신 차리란 말밖에 해 줄 수가 없네요. 14인 위원회가 정말로 그런 결정을 내린다면 저는 실망스러울 것 같아요. 가끔 우리의 동포들은 잃는 걸 너무 두려워하는 듯 보여요. 모험과 불안을 즐길 수 없는 사람도 있다는 건 물론 알지만.
그러면 포이베, 만약 당신이….
베네스는 앞서 한 얘기에 자신의 계획을 적당히 이어붙여 말해주었다. 종말의 진정한 원인을 막기 위해 또 다른 신이 되어 세계를 쪼갠 사람과, 그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은 몇 명의 사람들에 대해서. 포이베가 만일 생존자 중 한 명이 된다면 어떤 선택을 할지.
쪼개진 사람 중엔 베네스도 있나요?
장담 못 해요. 신을 창조하는 일을 거들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있다고 치죠.
그럼 저는 온 세계를 건너다니면서 당신을 찾을래요. 친구들을 함께 찾아봐도 좋겠죠. 전엔 모르던 사람과 친분을 쌓을 수도 있을 거고. 슬프겠지만, 즐겁기도 할 거예요.
다른 생존자들이 세계를 원래대로 되돌리려는 시도를 계속한다면?
제가 새로 알게 된 사람들이 그 과정에서 별바다로 돌아가나요?
일단은요.
그럼 막아야죠.
그들은 결국 세상에 다시 돌아오는데도?
베네스, 꼭 제 친구들처럼 말씀하시는군요? 언제 그 정도로 친분을 쌓으셨어요? …그야 걔들 눈에는 돌아오는 걸로 보이겠죠. 하지만 제 눈은 평범한걸요. 저의 판단 기준은 ‘우리 혼에 쌓인 진주와도 같은 불순물’ 뿐이랍니다. 별바다에서 모두가 씻어내는 그것 말이죠.
제자가 인용한 문장은 <자아의 동일성에 관한 논고>에 나오는 문장이었다. 베네스는 옛 생각이 나 후후 웃었다.
그 오래된 논고를 배울 때는 무척 고역스러워하지 않았나요?
친구들이 제 혼의 색에 대해 얘기해줬거든요. 그걸 듣고 나니 갑자기 흥미가 마구 샘솟는 거 있죠? 결국 도서관에서 뜬눈으로 밤을 새웠지 뭐예요! 아차…. 말이 샜군요. 아무튼 저한테는 별바다로 가면 ‘누구도’ ‘돌아오지’ ‘않으니까’요.
제자는 젊은이다운 열정으로 강변했다. 베네스는 경청했다.
‘죽음’이라고 하셨죠. 시간이 흐르면 신체를 구성하는 에테르가 반드시 스러지고, 그릇을 잃은 혼이 자연스레 별바다로 흘러가는 현상을…. 쪼개진 세계의 사람들에게는 ‘죽음’이 반드시 찾아온다고요. 그렇다면 누가 삶을 지루하게 여기겠어요? 그들의 생명은 우리가 가진 소명과 같은 무게를 지니게 될 겁니다. 그런 걸 다른 누군가가 마음대로 할 수는 없죠. 아무리 불완전한 존재라고 해도 그들은 본래 우리였으니까.
포이베는 숨을 고른 뒤 이렇게 물었다.
베네스, 그 모든 일이 언제쯤 벌어지나요?
베네스도 그것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쪼개지지 않은 인간의 기준으로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 터였다.
저는 14인 위원회에 동의하지 않지만, 스승님께 도움을 드릴 수도 없어요….
알아요, 포이베.
혹시 제가 생존자가 되기를 원하시나요? 당신께 찾아왔다는 미래의 여행자를 제가 수색하고 보호해야 할까요?
그건 아니에요. 당신은, 좀 더 어렵고 힘든 길을…. 걸어가 주었으면 해요. 다른 모든 이들과 마찬가지로….
아젬의 자리는 대대로 말과 감정을 민감하게 다룰 수 있는 이들이 도맡아 왔다. 베네스의 제자는 그 말만으로도 자신에게 맡겨진 역할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쉽네요. 더없이 가혹하고.
…마음에 드는 세계일 거예요. 일단 제게는 그랬답니다. 위안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 그렇다면 좋은 점이 하나쯤은 있군요.
조금 들려줄까요?
괜찮아요! 직접 겪고 싶은걸요.
별바다에 씻겨 내려간 기억을 되찾을 길이 없는데도, 포이베는 그렇게 대답했다. 베네스는 알 수 있었다. 오늘이 제자와 보낼 수 있는 마지막 날이리란 사실을. 이후로는 둘 다 서로에게 낼 시간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다한 이별은 반드시 지금이어야만 했다.
말없이 팔을 벌리자 제자는 옛 시절처럼 씩 웃으며 안겼다. 우습게도 그것만으로는 향수에 잠길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이 처음부터 돈독한 사제관계를 맺은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시 베네스는 어느 마을 주민들의 부탁을 받아 근방의 골칫거리들을 해결하던 중이었다. 조물원 직원들의 손길이 닿았을 생물들을 이런 식으로 처리하자니 마음이 좋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지상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이상 우선순위를 정할 필요가 있었다. 어린아이 발이 닿는 범위 내의 위협을 줄이는 정도라면 균형이 맞겠지.
숲을 한 바퀴 돌며 공격성이 강한 생물들과 한차례 붙었다. 다음으로는 아이들 정도의 에테르를 가진 허수아비를 여러 개 빚었다. 이동 능력이 있고, 비상시 창조주에게 좌표와 위협 경고를 보내는 기능이 있는 단순한 창조물이었다. 분신들이 나무 사이로 사라진 뒤 베네스는 기다렸다.
가장 많은 분신을 습격한 것은 고양잇과에 해당하는 생물로 꽤 크기가 컸다. 마을 사람들이 골칫거리라고 말한 만큼 사살하지 않고 제압하기는 다소 어려웠다. 체내의 에테르를 전기로 변환해 내려치는 공격이 제법 강력하고 변칙적이었다. 베네스는 점점 온몸의 근육과 신경이 깨어나는 기분이었다. 아주 즐거웠다. 그때 웬 여자가 끼어들었다. 짐승이 한 차례 전기를 끌어올리고 있던 차였다. 불청객은 가죽에서 일어나는 전격을 아랑곳하지 않고, 주먹으로 짐승의 턱을 쳐올렸다. 무시무시한 힘에 짐승은 나가떨어졌다. 전기 세례는 불발되었다.
여자는 소매를 팔뚝까지 단단히 걷어붙이고, 로브 자락 역시 허리까지 걷어 몸통에 야무지게 묶은 차림이었다. 가장 인상적인 점은 가면을 쓰지 않았다는 거였다. 그럴 정도였으니 로브에 달린 모자는 당연히 벗겨져 있었다. 한 갈래로 대충, 그러나 단단히 묶은 붉은 머리카락이 불꽃처럼 흩날렸다. 숲의 녹음과 저녁놀을 닮은 푸르고 노란 눈에 투지가 어려 있었다.
전기를 쓰는 생물과 격투를 벌이기에 맨손은 일견 적절하지 않은 것 같았지만…. 베네스는 이내 자신의 오판을 수정했다. 불청객의 두 주먹과 온몸에 밀착된 에테르 방어막을 본 뒤였다. 술식의 구조나 정교함은 보완해야겠지만 배울 점이 있는 발상이었다. 유연하고 재빠른 팔다리가 순간순간 가장 적절한 틈에 주먹을 내지르고, 발로 걷어찼다. 정말로 잘 싸웠다.
베네스가 다시 공격에 가세하려던 차에 불청객이 경고했다. ‘조심해! 저놈 독 쓴다!’ 베네스는 짐승이 팔을 물어뜯으려 이빨을 들이댄 것과 간발의 차이로 방어막을 쳤다. 몸에 닿지 못하고 흘러내린 침이 바닥에 닿았다. 풀이 부식되는 광경을 보며 베네스는 점점 흥이 올랐다. 조물원 창조 생물 범례에서 본 고양잇과 생물의 주된 능력은 전기 계열이었다. 독을 함께 쓰는 사례는 자신이 아는 한 찾아볼 수 없었다. 이것이 의도된 설계인지, 아니면 지상에 방사된 뒤로 갖게 된 능력인지 너무나 궁금해졌다!
짐승의 힘을 한껏 빼놓은 뒤 베네스는 밧줄을 창조해 놈을 묶었다. 그가 생물의 특징을 살피는 동안 불청객은 단검을 꺼내 목을 찌르려 들었다. 베네스는 급히 제지했다.
‘뭐야? 당신도 이걸 죽이러 온 거 아니었어?’
죽이려면 진작 죽일 수 있었다는 말에 불청객은 인상을 썼다. 베네스는 이 짐승과 관련해 조사할 게 많다고 주장했다. 독을 쓰는 유사 개체가 더 있는지, 약한 생물에게 적개심을 드러내는 이유가 있는지, 혹시 새끼가 있는 건 아닌지 등등을 조사해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 걸 살피기 위해서는 당장 죽이면 안 된다고. 물론 위험을 줄이기 위해 어느 정도 조치를 해둬야겠지만.
불청객은 한마디, 한마디 들을수록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베네스는 이 젊은이가 사회 규범에 별로 익숙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뭐, 그럴 수도 있지. 그는 오랜 시간 세상을 떠돌며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종종 벌어지곤 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사회화되지 않은 성인 정도는 평범한 범주에 속했다.
‘대체 그런 헛고생을 왜 하는지 묻고 싶은 얼굴이군요. 괜찮다면 배워보겠어요? 내가 왜 이러는지 말이에요.’
젊은이는 한숨을 푹 내쉬며 사양했다. 혼자 상대하기 위험한 짐승을 잡으려고 하기에 도와줬더니, 사실은 도움이 필요하지 않았다는 사람을 더 귀찮게 할 생각은 없다는 거였다.
‘아까 팔에 두른 방어 마법, 내 마법을 흉내 낸 거지? 방어막 생성 속도가 훨씬 빠르던데. 게다가 전투 중에 몇 번이나 썼다가 해제하고.’
자기가 그런 걸 보는 눈은 별로 없지만, 발상이 같아서 구조며 효율성을 바로 알아봤다고 했다.
‘내 마법은 발동되기까지 느리고, 필요한 곳에만 쓸 수 있을 정도로 섬세하지도 않아. 전투 시작 전에 써서 계속 에테르를 공급하며 유지해야 해. 비효율적이지.‘
베네스는 그런 차이점을 알아봤다는 점에서 당신은 재능이 있다고 말하려고 했지만,
‘아무튼 하던 거 해! 경비 서줄 테니까.’
일단은 배려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짐승에게 필요한 조치를 해두는 동안 젊은이는 평범한 옷차림으로 돌아왔다. 그걸 보자니 실감이 났다. 정말 어리구나! 마을로 돌아가는 내내 베네스는 붙임성 있게 말을 걸었다. 젊은이는 좋은 대화 상대였다. 말투가 좀 사납기는 했지만.
‘포이베! 좋은 이름이네요. 사실 아까 당신이 싸우는 걸 보면서 불꽃을 떠올렸거든요. 이런 말은 실례일지도 모르겠지만…. 얼굴을 볼 수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답니다!’
대화가 어찌나 즐거웠는지 베네스는 싸우다 벗겨진 로브 후드를 다시 쓰는 것도 깜빡 잊었다. 마을 사람들을 마주친 뒤에야 머리카락을 훤히 드러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동행인이 가면조차 쓰지 않은 포이베여서 위화감을 못 느낀 탓도 있었다.
포이베는 베네스가 즉석에서 다듬은 자신의 방어 마법 술식을 알아내려 애썼다. 베네스는 술식 개량을 도와주는 조건으로 자신의 제자가 되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포이베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펄쩍 뛰었지만 확실하게 거절하지는 않았다. 끈질긴 제안 끝에 포이베도 결국 조건을 내걸었다.
‘마법을 쓰지 않고, 체술만으로?’
‘그리고 다시 도전해서 이기면 언제든 하산한다는 조건으로.’
포이베는 일주일 내내 베네스에게 도전했고, 일곱 번 다 손 쓸 틈도 없이 패배했다.
‘기습은 좀 너무했던 것 같아요, 포이베.’
‘다 막아내신 분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
그때쯤에는 숲에서 발견한 짐승에 대한 분석도 끝이 났다. 베네스는 조물원과 창조물 관리국으로 보고서를 보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짐승이 창조되며 받은 것 이외의 능력을 개발한 사례는 드물었다. 그런 다음에는 처음에 만들었던 것보다 더 튼튼한 허수아비를 빚어 온 숲에 뿌렸다. 관련 기관에서 관찰자와 전투에 능한 관리인을 보내기 전까지는 그것들이 짐승의 주의를 끌어줄 터였다. 약간의 지성과 기억을 불어넣어 길 안내 기능도 추가했다.
‘그거 어디까지 돌아다니나요?’
‘어디 보자. 마을을 기준으로 여기서부터…여기쯤까지?’
베네스는 지도를 펼쳐 허수아비의 활동 반경을 표시했다. 포이베는 그 범위의 두 배쯤 되는 영역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짐승의 영역이 대충 그 정도 될 테니 허수아비도 확실하게 따라다니는 게 좋을 거라면서.
‘제 고향이 이쯤인데, 근처에서 그 짐승을 본 적 있어요. 한 15년, 20년 전?’
‘생각보다 멀리 돌아다니는군요. 같은 개체던가요?’
‘아마도…. 그때 남긴 상처가 있던데요.’
놈에게 호되게 당한 덕분에 지금 쓰는 방어 마법을 고안할 수 있었다고, 포이베는 말했다. 베네스는 그 얘기를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하지만 온 아이테리스를 함께 떠돌며 별처럼 많은 이야기를 나눈 후에는 그럴 수 없었다. 짐승과 마주쳤을 때 포이베는 성인이 되기 전이었고, 그 결과 왼쪽 옆구리에 큰 흉터가 생겼다는 걸 알게 된 뒤에는.
‘눈치라도 주지 그랬어요. 섭섭했을 텐데.’
‘베네스, 그러지 마세요….’
결과를 바꿀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곱씹게 되는 일이 있는 법이다. 베네스에게는 마지막 제자의 일이 그런 것이었다. 포이베는 난감해하다 가면을 벗었다.
베네스의 제자가 된 이후 포이베는 많은 걸 배웠다. 베네스와 함께 개량한 방어 마법은 전투 중에도 자유자재로 펼칠 수 있게 되었고, 말투는 스승을 닮아 둥글게 깎여나갔으며, 단둘뿐인 방 안에서도 가면을 쓰고 있을 정도로 관습에 익숙해졌다. 그렇다고 해서 스승의 슬픔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보세요, 베네스.’
포이베는 스승의 가면을 벗기려다가 실패했다. 가면에는 식별 마법이 걸려 있어서 다른 사람은 벗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의도는 전해진 것 같았다.
‘저는 정말 괜찮아요.’
그전에도 제자는 스승의 포옹을 못 이긴 척 받아주고는 했다. 하지만 이번처럼 먼저 껴안은 건 처음이었다. 약간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에, 베네스가 ‘아닌 것 같다’고 놀린 뒤에는 투덜거리며 떨어졌지만. 그로부터 다시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제자는 스스럼없이 친밀감을 표현할 줄 알게 되었다. 포옹을 청하는 베네스에게 망설임 없이 응할 정도로.
다음에 만나면….
먼저 운을 뗐지만 베네스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다. 포이베는 스승의 침묵에 귀를 기울였다. 충분히 들었다, 싶을 즈음에 대신 말을 이었다.
그때는 먼저 안아드릴게요. 늘 아쉬워하셨잖아요.
베네스는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아낀 불꽃은 이런 사람이었지. 시기적절하게 농담할 줄 알고, 두려움을 알지만 움츠러들지는 않고, 쓰러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는.
약속을 지키는지 두고 보겠어요.
그럼요. 절 믿으세요.
인사를 나누긴 했으나 이대로 헤어지는 건 여전히 아쉬웠다. 둘은 이전까지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일을 하기로 했다. 치열한 의논 끝에 그들은 다시 가면을 쓰고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스승과 제자는 마지막으로 사이좋게 팔짱을 낀 채 산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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