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즈시마] 밀실대담

논커플링 / 쿠즈미 + 시마 카즈미 11화 정사 이후

MIU404 by 시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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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U404 시마 카즈미 + 쿠즈미 논커플링(논로맨스) 글입니다

11화 정사 이후 시점

별 원인도 맥락없이 그냥 두 사람이 밀실에 갇혀서 방탈출을 합니다

쿠즈미에 대한 해석이 안 맞으실 수도 있습니다. 캐해는 사바사니까.....


기도를 둘러싼 연질의 근육은 조금만 압박을 가하면 쉽게 짓뭉개질 것만 같았다. 식도보다 앞에 나와있는 숨구멍을 힘주어 틀어막기만 하면, 사람은 죽는다. 이 얼마나 부질없는 목숨인가? '쿠즈미'는 잠시 시마의 목에 엄지와 검지를 펼쳐대어 무언가를 가늠해보다가, 흥미를 잃은 듯 손을 거둬버렸다.
그게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시마 카즈미는 눈을 떴다.

분주소의 낯익은 풍경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자신의 집인 것도 아니었다. 공기부터 전해져오는 낯선 느낌, 그리고 누군가의 기척. 정신을 차린 시마는 섣불리 움직이기 전에 도로 눈을 감고,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부터 확인했다. 입은 막혀있지 않고, 손가락도 잘 움직이고, 족쇄 같은 것도 없고, 그런데 한쪽 손목에 닿는 차가운 감각은...
인지하기도 전에, 제 손목이 덜렁 들어올려졌다.

"좋은 아침? 시마쨩."

수갑을 찬 채 손을 흔드는 인영은, 순간 역광 탓에 알아보기가 어려웠지만, 그는 분명.

쿠즈미. 시마는 순식간에 몸을 일으켜 쿠즈미를 제가 누워있던 자리로 거꾸러뜨렸다. 이어서 체중으로 짓누르고, 손을 제압... 하려던 찰나, 그의 왼손과 자신의 오른손이 수갑으로 연결돼있는 것을 발견했다. 무슨 꿍꿍이지? 인상을 찌푸린 채 시마가 첫마디를 뗐다.

"어떻게 나온 거지?"
"무-거워-! 비켜달라고~!"
"묻는 말에 대답해."
"난- 아무짓도 안 했어~ 눈 떠보니 여기였다니까?"
"그걸 믿으라고?"
"시마쨩~ 내가 그랬으면 시마쨩을 데리고 나올 이유가 없잖아? 설마 그랬을 거라 생각해?"

몇번의 입씨름을 하며 시마는 주위를 확인했다. 우선 소지품은 없음, 바닥은 다다미 열여섯 장 남짓한 정사각형의 구조, 천장에는 백색등, 창문은 없음, 책이 꽉 들어차있는 높은 책장, 나뭇결 재질의 테이블, 같은 재질의 의자 두 개.

이질적인 공간이다. 문이 없다는 점이 그랬다. 천장과 바닥에도 눈에 띄는 부분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방은 입구도 출구도 없다는 거였다.
그 사실을 확인한 후, 시마는 미간을 좁히고는 쿠즈미의 위에서 비켜섰다. 쿠즈미는 즉각 일어나진 않았다. 수갑을 차지 않은 손으로 허공을 빙글빙글, 방 이곳저곳을 가리키듯.

"시마쨩도, 봤지? 작고 귀여운 방에 문은 커녕 창문도 없음, 일말의 틈도 없음. 우리 갇힌 거라고."

이어 수갑에 채인 손을 또 들어올리고 히죽히죽.

"봐, 누굴까? 시마쨩과 나를 이런 꼴로 가둬놓은 사람. 오, '친해지길바래' 같은 건가? 그거 아냐? 방송?"

"이야깃거리가 되는 건 싫은 쪽 아니었나?" 

쿠즈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곤 입을 비죽이면서 눈동자를 한 바퀴 굴린다. "그 대화" 이후로는 한 마디도 안 하고 있었다면서, 지금은 주절주절 잘도 떠드는 이유가 뭔지. 순순히 말해줄 리는 없으니 추궁은 미루기로 했다. 대신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다른 이야기를 꺼낸다.

"너도 짐작가는 사람은 없다는 얘기군."
"내 친구들 중엔 이런 취미가 있다는 사람은 없었는데~"
"글쎄, 새로 생긴 취미일지도 모르지. 도넛EP가 없어졌잖아? 그 대신으로."

쿠즈미가 우습다는 듯이 웃었다.

"그럴만한 생각과, 행동력이, 있었을 거라 생각해?"

그 모습을 바라보던 시마는 잠깐 뜸들이다 짧게 대답한다. 

"아니."

시마는 대뜸 쿠즈미의 손목을 잡고 몸을 일으켜세웠다. 엉거주춤, 두 사람이 모두 일어나자 종이가 팔랑,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제야 누워있던 자리를 확인해보면, 쪽지 한 장이 있었다.

끝에서 열린다



시마는 방 곳곳을 조사했다. 수갑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혼자서 움직일 순 없으니, 쿠즈미의 협조가 필요했다. 안 되면 끌고다닐 생각이었지만, 쿠즈미는 순순히 따라주었다. 재밌다는 표정이었다.

맨 처음 확인한 것은 렌즈나 도청 장치 따위가 있는지였고,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최대한 샅샅이 뒤져본 결과 이곳에는 감시를 위한 장치가 단 하나도 없었다. 그건 그거대로 문제였다. 더더욱 범인의 의도를 알 수 없었으니.

그 다음 확인한 것은 숨겨진 문의 가능성이었다. 벽을 쳐보거나 바닥을 두드려보거나 천장으로 뻗어보기까지 했지만, 벽은 두꺼웠고 어디서도 반응이 없었다. 책장을 밀어보고 서랍장을 옮겨봐도 마찬가지였다. 시마쨩, 이제 힘은 그만 빼는 게 어때? 그냥 따라다니기만 해줄 뿐 거든 것은 하나도 없는 주제에 쿠즈미는 지분거렸다. 물론, 그렇게라도 협력해주는 게 어딘가 싶었지만.

마지막으로는 구조물들의 조사. 책장에 있는 책들은 중학교 문제집이나 전문 요리책부터 시작해서 분류가 완전히 중구난방이었고 별달리 유익한 내용도 없었다. 
테이블은 허리까지 오는 정도의 높이, 단단하게 코팅된 나무 재질. 혹시 몰라 아래를 살펴봤으나 테이블 밑에 붙어있는 것은 없음. 의자도 동일.

문은 커녕 당장 수갑을 풀 열쇠조차 보이지 않았다. 시마는 입술을 핥으며 다시 생각에 잠기려고 했다.

"초동수사 대실패네~"

테이블에 걸터앉아 웃는 쿠즈미가 거슬렸다. 감정을 낭비하기엔 아직 상황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했다. 무표정으로 시선을 고정하고 입을 열었다.

"왜 그렇게 여유로워?"
"응?"
"갇힌 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이런 꼴로." 시마는 연결된 수갑을 흔들었다.
"응? 아~" 

쿠즈미는 딴청을 피우듯 고개를 돌렸다가 피식 웃는다.

"뭐, 아무래도 상관없잖아? 이대로 갇혀있어도 달라질 거 없다고?"

이내 수갑을 찬 손을 흔들면서 입꼬리를 올린다. 그걸 보던 시마는 속으로 욕설을 뇌까렸다.

쿠즈미는 형기를 막 시작한 복역수다. 감옥에 갇히든 어딘지도 모르는 공간에 갇히든 별다른 차이가 없을 테다. 아니, 오히려 지금이 더 마음에 들지도 모른다. 감시중인 사람이라곤 시마 뿐이고 그마저도 똑같이 갇혀있는 신세. 게다가 쿠즈미를 잡은 사람은 시마와 이부키다. 아직 갱생되기 전의 범죄자라면 복수를 원하겠지.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꿍꿍이를 갖고 있는지조차 지금은 알 수 없다. 경계해야 할 대상은 밖이 아니라 안에 있었다.

쿠즈미는 빙글빙글 웃기만 하며 시마를 본다. 노골적인 발언에, 짧지 않은 침묵과 아무런 변화도 없는 표정.  시마 카즈미는 분명히 동요하고 있다. 나를 경계한다. 내가 무슨 속셈인지 알고싶어한다.

단지 그런 사실만으로도, 쿠즈미에겐 이 공간이 즐거울 뿐이었다.

"시마쨩, 그렇게 경계하지 않아도 된다고? 내가 여기서 뭘 어떻게 하겠어? 엘리트 수사관을 상대로."

"......."

"시마쨩 유명하던데~ 수1에 있었댔나? 나 안방에서 이런저런 얘길 많이 주워들었거든."

"네 이야기는 안 들렸어? 입 좀 열었으면 좋겠다던데."

"시마쨩, 파트너를 죽였다면서?"

시마는 또다시 대꾸를 멈췄다. 쿠즈미에게는 신호와도 같은 반응이었다.

"어떻게 죽였어?"
"총으로 쐈어?"
"칼로 찔렀어?"
"찻길에 밀쳤어?"
"다리에서 떨어뜨렸어?"

시마는 고개를 작게 기울이고 대답한다.

"궁금하면 나가는데 협조해."

아, 재미없는 반응. 쿠즈미의 표정이 굳는다. 그러나 여기가 메인은 아닐테니까.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고는 테이블에서 내려선다.

 

시마는 책장 앞에 서서 다시 한 번 책장을 보았다. 책의 분류는 알파벳순, 책등만 봤을 때 특별히 튀는 책은 없음, 높낮이도 균일했고, 책과 책 사이에 끼어있는 것도 안 보이고, 책등무늬가 연결되거나 의미를 담은 부분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모르니 손가락으로 하나씩 훑으면서 질감을 체크해본다. 일말의 힌트라도 얻고자 두번 세번 반복했지만, 결국 수확은 전무했다.

이어서는 책을 한 권씩 뽑아들어 펼쳤다. 책장들 사이에 끼인 종이가 있는지, 내지에 숨겨진 암호가 있는 건 아닌지 확인해보려는 거였다. 이 책들이 그냥 배치된 건 아닐 테니까.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본다.

협조하라고 말은 했지만, 시마는 쿠즈미의 적극적인 협력을 기대한 건 아니었다. 방해나 안 하면 그만일 뿐. 기대한 덕분인지 쿠즈미는 손목이 끌린 채 빤히 책장을 훑고 있을 뿐 별다른 말이 없었다. 시마가 네 번째 책을 뽑아들 때까지는 그랬다.

"시마쨩, 그거 계속 볼 거야?"

"힌트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시마쨩도, 바보네~ 책 안에 숨겨놨을리가 없잖아~"

"그럼?" 시마는 책을 덮고 쿠즈미를 마주봤다.

"너라면 힌트를 어디다 숨겨둘 건데?"

음. 쿠즈미는 생각에 잠기듯이 고개를 젖히며 책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음. 음.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며 책장 앞을 서성인다. 시마는 잠자코 기다려준다. 상식인의 입장에서 생각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니, 오히려 쿠즈미 쪽의 직감이 필요한 때인지도 몰랐다. 물론, 그 직감을 신뢰할지 의심할지는 신중히 판단해야겠지만.

쿠즈미가 입꼬리를 비틀어 웃었다.

"봐, 시마쨩. 내가 이걸 알려주면- 시마쨩이 죽인 파트너 얘기, 해줄거야?"

시마는 눈을 감았다.

"네가 흥미를 가질 만한 얘기가 아냐."

"뭐 그렇겠지~ 나는 '시마쨩이', '죽였다'는 이야기가 궁금한 거야."

쯧, 시마는 속으로 혀를 찼다. 내키지 않지만 지금으로썬 방도가 보이지 않으니.

"...일단 풀어봐. 여기에 뭐가 숨겨져있는데?"

쿠즈미는 가볍게 책 몇 권을 뽑고는, 그 자리에 거꾸로 꽂아넣었다. 어떤 건 아예 뒤집어서 꽂기도 했다. 시마는 지켜보고 있으면서도 의도를 파악하기 어려워 눈살을 찌푸렸다. 집어대는 책들의 공통점을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쿠즈미는 가장 아랫줄의 책까지 빠짐없이 돌려놓고는, 마지막 책을 밀어넣었다.

그와 동시에 다섯 번째 줄의 아홉 번째에 꽂힌 책이 툭 책장 밖으로 튀어나왔다. 빠진 자리를 확인해보자, 안쪽에 돌출된 무언가가 보였다. 팔을 뻗은 시마는 곧 작은 상자를 꺼낼 수 있었다.

잠기지 않은 작은 나무상자. 안에는 날카로운 단도와, 열쇠 하나, 그리고 얇은 카드가 있었다.

시마가 곧바로 단검을 집었다. 예리한 날은 스치기만 해도 베일 것만 같았다. 조심히 다뤄야 한다. 쿠즈미에게 뺏겨서도 안 된다... 그 사이에 쿠즈미는 열쇠를 집었다.

"이거, 수갑 열쇠겠지?"

"그래."

그러니까 쿠즈미가 수갑을 풀고 나면 제 것도 풀어야겠다고 생각하던 찰나였다. 쿠즈미는 씨익 웃으며 열쇠를 달랑달랑 흔들었다. 그리고 시마를 봤다. 시마 또한 그 눈빛을 읽었다.
방심한 건 맞지만, 설마 쿠즈미가 열쇠를 냅다 삼켜버릴 줄은 몰랐기 때문에. 

"뭐 하는 짓이야!"

시마가 곧장 쿠즈미에게 달려들어 입을 열려고 했지만, 이리저리 고갯짓하며 손길을 피하던 쿠즈미는 기어코 꿀꺽, 소리를 내며 목젖을 움직였다. 뒤늦게 입이 열렸으나 안엔 아무것도 없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시마와는 대조적으로, 쿠즈미가 한껏 여유롭게 눈썹을 올렸다.

"뱉어, 당장!"

"무리야 무리~ 이미 삼켜버렸다고?"

시마는 입술을 짓씹었다. 쿠즈미가 비상식적인 일을 얼마든지 저지를 수 있는 인간이라는 걸 잊고 있었다. 설령 그것이 두 사람에게 도움이 안 될 일이더라도. 아니, 이제와서 도움이 되냐 마냐는 쿠즈미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걸 잊고 있었다. 빠르게 굳은 시마의 얼굴과는 대조적으로,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쿠즈미가 고개를 까딱였다.

"말했잖아? 난 아무래도 상관없다니까~ 이대로 못 나가도, 손목을 잘라야 해도! 아-무 상관이 없어~"

"......."

"시마쨩은 아닌가보네~"
"그럼 내가 방법을 알려줄까?"

"......"

쿠즈미는, 느긋한 손짓으로, 시마가 가져간 단도를 가리킨다.
뒤이어 손가락은, 쿠즈미, 자기 자신을 향했다.

"아직 소화되기 전이야~ 그러니까, 여기를 열고 꺼내면 돼. 간단하지? 그 나이프로 말이야."

"......"

명백한 도발이었다. 응하는 순간 쿠즈미 식의 복수가 달성하고 말아버리는.
시마 카즈미가 과거에 동료를 죽였는지 아닌지는 이제 와서 알 필요가 없어져버렸다. 그저 지금 이 순간 그가 수단으로써 살인을 택하느냐 아니냐가 쿠즈미에게는 최고의 관심사였기에.

살아서 우리와 함께 고통스러워해.

시마 카즈미는 그런식으로 쿠즈미의 발목을 잡았다. 쿠즈미를 가둬버렸다. 그러니 쿠즈미는 고대하고 있다. 시마 카즈미가, 그의 손으로 직접 내 감옥을 부숴버리기를. 그 끝에는 시마 쨩의 패배야, 라고 말할 수 있기를.

"협조하지 않을 거라고~ 그러면 더 움직이기 힘들어질거야~ 어떡할래? 갇혀서 평생 있을거야? 어떡해? 어떡하지, 시마쨩? 곤란하네-!"

"......."

시마 카즈미는,
핏기 서린 눈으로 쿠즈미를 노려보다, 이내 고개를 돌리고서 픽 웃음을 흘렸다.

수갑을 찬 손을 내려다보았다가, 쿠즈미에게 시선을 옮긴다. 

쿠즈미는 그 시선을 마주하고,
화면 너머로 그를 마주보았던 순간을 떠올렸다.

시마는 쿠즈미의 멱살을 움켜쥐고 단박에 일으켰다. 곧장 벽으로 밀어붙인다. 수갑으로 연결된 손을 뒤로 돌려 뒤통수를 붙잡았다. 컥 소리와 함께 쿠즈미의 입이 열리면 안으로 손가락을 밀어넣는다. 반사적으로 깨무는 것에 아랑곳않고 깊이 쑤셔박는다. 그대로 목젖을 자극할 때까지. 무식하기 짝이없는 방법임을 시마도 알았다. 그러나,
제정신이 아닌 녀석을 상대로 상식적인 대응을 해봤자 패착이 될 뿐이다. 그래선 이 녀석의 의도대로 휘둘리기밖에 더하겠는가? 적어도 지금은,
이 미친개에게서 마운트를 되찾는 게 중요하다고.

거북한 소리와 함께 내용물이 바닥에 흩어진다. 열쇠를 제외하곤 형태가 있는 게 없었다. 쿠즈미가 콜록거리며 몸을 가누는 동안, 시마는 이빨 자국이 선명하게 남은 손으로 열쇠를 집어들었다. 곧이어 두 사람을 연결한 수갑을 풀고 만다. 딱 맞춰서 돌아간 열쇠는 그대로 부러져버렸다. 다시 쓸 순 없겠군.

쿠즈미는 한 방 먹었다는 표정으로 시마를 봤다. "시마쨩, 엄청 과격하네~ 사실은 이런 성격인 거야?"

시마가 무심하게 말했다. "말했잖아. 나는 타인따위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헤- 그런 말을 했던가?"

정확히는 꿈에서 했지. 시마는 구태여 덧붙이지 않고 손목을 털었다. 이제야 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겠군.
또다시 수틀리는 일을 벌일 지도 모르니 단도의 관리에도 특별히 신경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제야 상자를 갈무리하면서 안에 든 카드를 확인할 수 있었다.

"...'빛이 없는 곳에 문이 보인다'."

끝에서 열린다는 말에 비해 비교적 직관적인 말이었다. 보호할만한 것이 있다면 좋겠지만, 별 수 없지. 시마는 테이블을 끌어다 전등 아래에 두고 테이블 위로 올라섰다. "다치기 싫으면 물러나." 쿠즈미는 반응 없이 시마가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뭐, 경고는 한 번으로 충분하다. 시마는 단도의 손잡이 부분을 위로 쥐고 있는 힘껏 전등을 가격했다.

요란한 파열음과 함께 깨진 조명창이 아래로 후두둑 떨어진다. 방을 밝히는 빛은 줄어들지 않았다.
전등이 있던 자리에 정사각형의 통로가 나 있었다. 깊은 통로의 벽면에는 돌출된 손잡이들이 사다리처럼 나 있었다.
시마는 단도를 정리해 넣은 뒤, 손잡이를 잡고 위로 올라갔다. 혹시나 다른 기척이 있을지 곤두세우며. 쿠즈미도 별 말없이 그 뒤를 따랐다.

올라온 곳은 낮은 천장의 방이었다. 단지 한쪽에 문이 나 있고, 가운데에 관이 있을 뿐인.

시마는 관을 내려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정말이지 악취미로군. 문은 예상대로 잠겨 있었고, 그 힌트는 관 안에 있을 터였다. 시마는 입술을 핥았다가 고개를 숙여 관뚜껑을 열어젖혔다.

안에는 인체 모형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근육과 장기, 혈관 따위를 큼직하게 본떠 놓은 모형이었다. 재질이 플라스틱이 아니라 점토같은 무언가라는 점만 빼면, 과학실이나 어린이과학관 따위에서 쉽게 볼 수 있을 것 같은 모양새의.
다만 심장 모형에는 X자 모양으로 긁힌 흔적이 있었다. 여기가 표적이었다는 건가? 시마는 그 앞에 쪼그려앉은 채 턱을 짚고 생각에 잠겼다.

느지막히 올라온 쿠즈미는 주머니에 손을 꽂고서 빙글빙글 방을 돌았다. 슬쩍 어깨너머로 관 안쪽도 훔쳐보고, 안 열릴 게 뻔한 문손잡이도 돌려보고, 그러고 나면 몇 걸음 떨어진 시마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주머니 속에 넣어온 전등 조각을 만지작거린다.

목격자도 감시자도 아무것도 없는 이 공간에서라면- 시마 카즈미를 죽여도 알 사람이 없다. 유리조각은 흉기로 충분했다. 몇 걸음만 가서 있는 힘껏 저 목덜미에 찔러넣으면 끝난다. 무방비하게 드러나있는 저 목덜미에.

거슬리고 짜증나게 하는 건 필요없어. 귀찮기만 해. 그런 제멋대로의 감상. 어린아이같은 감상.
이곳에서 나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조차 자신에게는 별 의미가 없는 짓이다.
시마 카즈미에게 협력해줄 필요가 없다. 이유도 없다.
설령 저 문 바깥에 자유가 있다고 해도 시마 카즈미가 함께 있다면 방해만 될 뿐.

생각할수록. 쿠즈미에게 득이 될 것은 명확했다.

시마는 뒷목에 닿은 서늘한 감각을 느끼고 생각을 멈추었다. 그것은 퍽 날카로워서 고개를 돌리는 것만으로도 깊은 상처가 날 것 같았다. 단도는 자신이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건 어디서 난 거지. 숨겨진 무기가 있었나. 소지품을 확인해봤을 땐 없었는데. 어딘가에 숨겨져 있었던 걸지도.

어쨌든. 쿠즈미가 다시 마운트 싸움을 걸어오는 거였다. 응해줄 수밖에. 시마는 마른침을 삼키고서 입을 열었다.

"이제 와서 어쩌고 싶은 건데?"

"시마쨩, 생각해봤는데 말이지, 이렇게 하는게 나한테는 베스트야."

"아, 그래?"

"재미없잖아. 시마쨩 생각보다 훨-씬 재미없었어. 그러니까 이게 최선이야."

"나한테 복수하고 싶었나보군."

"복수라니, 그것도 재미없잖아~ 그냥 하고싶은대로 하는 거야, 나는."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맞혀 볼까?"

시마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살갗을 파고드는 따끔한 감촉을 느끼면서도 대범하게 고개를 돌렸다. 얕게 그이는 붉은 줄, 이부키의 책망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도 했다. 시마는 언젠가 이렇게 웃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입가를 비틀어 웃는다.

"너는 이게 신이 준 기회라고 생각하는 거야. 너를 심판하고 벌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 그 아래에서 네가 가장 욕망하는 죄를 저지르고 신이 주는 형벌을 받아들이고 싶은 거지."

쿠즈미는 여느 때처럼 웃는 얼굴이다.

"그리고 그 대상을 나로 고른 거지. 죄를 저지를 대상도 용서받을 대상도."

"시마쨩이, 신이라도 된다는 소리?"

"아니."

시마는 천천히 전등의 조각을 움켜쥐었다. 총열을 잡았을때와 달리 직접적인 상처가 남아버린다. 이빨 자국에 이어 생겨나는 찔린 자국들. 쿠즈미는 그것을 보고만 있었다. 시마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듣고 있었다.
문득, 상대가 듣고 싶어할 만한 이야기를 흘리면서 시간을 끄는 것이 어디서 본 듯한 수법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간단해. 그냥 내게 복수하고 싶은 거야."

"그러니까, 그런 건 재미없어서 싫다니까~"

"네가 깔본 인간들과 똑같이 격을 낮춰버린 게 마음에 안 들었던 거지, 넌."
"그래서 신에게 닿지도 못했다는 사실을 극복하고 싶은 거고."
"왜냐면 네가 맞이한 죄의 결말이 네가 유지했던 너를 훼손시켰기 때문이야."
"그러니까 복수를 원하는 거야. 너는. 나와 이부키한테."

쿠즈미는 입꼬리를 아래로 떨어뜨렸다. 손 끝에 쥔 전등 조각에 반대쪽의 힘이 실린다. 두 사람의 손이 닿았다. 같은 온도의 살갗이 마찰한다.

"시마쨩. 나랑 똑같네."

"그 말도 들었어."

꿈속에서. 역시 입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시마는 비릿하게 웃었다.

상대를 다 안다고 생각하지. 틀려도 맞아도 상관없어. 맞다고 생각하면 맞는 거야. 타인의 사정 따위 알 필요 없어. 언제나 내가 옳으니까. 쿠즈미는 항상 그랬다. 지금의 시마 카즈미처럼. 그러면 보통 상대는 어떻게 했더라. 틀린 적이 없어서 모르겠는걸. 하지만 지금은 틀렸으니까. 아, 모르겠다.

"재미없어."

쿠즈미는 전등 조각을 놓고서 양손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맥없이 떨어뜨린다. 손끝에는 시마의 손을 타고 흘렀던 피가 묻어 있었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시마의 손에서는 피가 뚝뚝 흐르고 있었다. 퍽 쓰라릴 텐데도 대수롭지 않은 양 다시 관을 조사한다. 더이상 신경 쓸 필요는 없다.

시마는 자신이 쿠즈미와 닮았다고, 닮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실은 귀찮으니까. 남들을 신경쓰는 것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었으니까.
단지 사회에 속해있기 때문에, 튀고 싶지 않아서. 남아있어야 해서 적당히 맞춰줄 뿐.
그래서 어쩌면, 다 내던지고 저렇게 제멋대로 굴고 싶은 욕구가 있지 않았을까. 그만큼 지친 상태였지 않았을까. 부메랑같은 거 맞고 싶을리가 없으니까.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는 건, 누군가를 엇나가게 만드는 스위치가 되고 싶지 않아서야.

그래서 시마는 쿠즈미와 달랐다. 지금은 그걸로 충분했다.
시마에게는.

쿠즈미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사실은, 시마가 손수건으로 제 피를 닦아줬을 때부터 불쾌함이 떠나질 않았기에. 이유를 탐구해볼 생각 따위는 없었다. 그냥 기분이 안 좋았고, 그 느낌이 시간이 지나도 떨어지지 않는 것마저도 불만스러웠을 뿐.

그렇게 버려뒀던 감정을 시마 본인이 분석한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게 맞는지 틀린지를 재 볼 생각은 없지만, 그냥 우스웠지. 내가? 격이 끌어내려져서 불쾌했을 거라고? 그 따위의, 시마 카즈미가 봐온 '케이스'에 자신을 끼워맞춘 것 자체가 기분나빴을 뿐.

입장이 반대였으면 자신도 시마의 피를 닦아줬을까?

그랬어도 너와 내가 느끼는 감상은 달랐을걸. 넌 흥미로 움직이니까. 
- 그리고 너처럼 자포자기한 짓은 안 해. 난 멍청이가 아니거든.

절대로 틀리지 않을 예상을 떠올린다.
쿠즈미는 헛웃음을 흘렸다.

그 사이에 시마는 관의 수색을 끝냈다. 

정확한 재질을 알 수 없는 이 모형은 예리한 것으로 베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걸 위해 단도가 준비되어 있었던 걸까. 진짜 사람이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그만큼까지는 악랄하지 않은 건지. 어쨌든, 중요한 건 어디에 잠긴 문의 열쇠가 있느냐는 거였다. 주어진 힌트는 하나뿐이었으니.

노골적으로 표시돼있는 것은 심장. 이것이 '끝'인가?

무엇이 끝일까?

관에 누워있는 모형은 곧 시체의 모형이었다. 사인은 심장. 그렇다면 심장을 기점으로, 끝에 다다른 것은 무엇이었을까. 의학적으로 접근해보면. 죽음 후에. 죽음의 끝에 맞이하는 것...
인간의 육체에서 가장 마지막에 기능을 멈추는 것은 뭘까. 청각이 가장 오래 남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귓구멍에는 아무것도 없다. 귀. 청각. 감각과 연결되어 있는 것. 

뇌.

시마의 단도가 부드럽게 뇌 모형을 갈랐다. 틱, 무언가가 단도의 날끝에 걸렸다. 느낌상 금속질의 단단한 무언가였다. 시마의 피가 묻어 불그스름해진 뇌 모형을 쪼개어보자 드디어- 열쇠가 보였다. 여느 열쇠보다 좀 더 커다란, 큼직한 고리를 가진 투박한 모양새의 열쇠였다. 삼키기는 어렵겠군. 시마는 열쇠를 집어들고 몸을 일으켰다. 문에 다가가, 열쇠를 꽂는다.

철컥, 딱 들어맞는 소리.
그대로 돌리면, 문이 열리고, 너머는 새하얀 빛이다.

시마는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빛 속으로 나아가면, 여기서 벗어날 수 있다는 걸.

"어이."

여전히 제 것도 아닌 관 앞에 서 있는 쿠즈미를 불렀다. 고개를 든 쿠즈미와 눈이 마주쳤다.

"이쪽으로 와. 나갈거니까."

"난 나간다고 한 적, 없는데."

"착각하고 있나본데, 네가 여기서 할 수 있는 건 나가는 것밖에 없어."

"내가, 여기서- 뛰어내리면-?"
"밑에, 많잖아? 반짝반짝하고, 따끔따끔한 것들이~"

웃음기 없는 얼굴. 이게 마지막 마운트 쟁탈 시도인가, 하며. 시마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인다. 
응해줄 생각은 없었다. 쿠즈미도 알고 있을 것이다.

"마음대로 해. 전력으로 널 살릴 거니까."

"시마쨩, 마음에 안 들어."

"네 어리광을 받아주길 바란다면 상대를 잘못 골랐어. 나 말고 이부키를 골랐어야지."

"하-? 그쪽은 내가 사양이야."

"그럼 그만하고 와. 안 오면 데리러 간다."

전의상실. 그래도 쿠즈미는 움직이지 않는다.
결국 시마는 쿠즈미에게 다가간다. 뒷덜미를 붙잡고 지옥으로 끌고간다.

"시마쨩, 참 귀찮게 사네."

"경찰이니까."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마침내 빛 속에 삼켜졌다.



뭐 그러고 밖으로 나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원래 왔던곳으로 돌아갔겠죠... 아무것도 달라진 것 없이... 단지 대화를 나눴다는 것만........ 어쩌다보니 시마 이야기는 맥거핀이 되고만

"나는 타인따위 아무래도 상관없어 사실은
걱정하는 척을 하고 선인인 척하고 인간답게 보이기 위해 행동하는 것뿐"

"나랑 똑같네"

"그러니까 간단하게 방아쇠를 당길 수 있어"

이 대화가 뭐라고........ 시마가 쿠즈미를 지혈해준게 뭐라고..............ㅋㅋㅋㅋㅋㅋ  쿠즈미와 시마가 서로 어떻게 생각하는지? 서로와 엮일 때 어떤 생각을 가졌을지? 같은게.. 흥미로워서 주절주절 하려다보니 두서없이 길어졌습니다 이걸로 끝!! 끝!!!!

쿠즈미에게 개인적인 서사를 주고싶지 않았기 때문에 (작품 의도도 그랬으리라 생각하기에) 급전개가 좀 ... 있는거같지만.... 아무튼 즐거우셨다면 기쁠거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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