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기록

유언집행자의 농담

크리스탈 타워의 조사가 끝난 뒤, 람브루스는.

-주의: 크리스탈 타워 연대기 결말 스포일러 / 그라하 교우관계 날조 있음

젊은이들이란 아주 무책임하기 짝이 없다. 그리다니아 비공정 승강장에서 그라하 티아의 지인을 기다리던 람브루스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내 스스로가 편협한 노인네 같은 소리를 했다는 사실에 진저리를 치며 입을 문지르긴 했지만.

사실 그라하 티아가 자신의 의무를 방기하지는 않았다. 노아 프로젝트의 감시자로서 샬레이안에 보내야 하는 이런저런 문서들을 서명된 위임장과 함께 준비해놓았음은 물론이다. 쓰던 막사도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어서 따로 손댈 것이 없었다. 심지어 개인 물품을 어떻게 처분하면 좋을지조차 서면으로 남겨놓았다. 그가 미처 헤아리지 못한 것은 이런 것들이었다. 남은 사람들이 그 광경을 보며 어떤 기분이었을지, 그리고….

람브루스의 상념은 그쯤에서 끊겼다. 웬 젊은이들이 그를 아는 체했기 때문이다. 인상착의로 보아 그라하가 지정한 위탁인이 틀림없었다. 바다늑대 부족 여성과 엘레젠 남성. 그라하의 편지를 부치고, 물건 배송 문제로 몇 차례 연락을 주고받은 덕에 따로 통성명할 필요는 없었다.

젊은이들은 람브루스에게 양해를 구한 뒤 그라하가 남긴 것을 확인했다. 물건이 담긴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고, 그 앞에 쪼그려 앉아서, 둘이 머리를 맞댄 채. 등 뒤로 누가 지나가거나 말거나, 친구의 직장 동료가 그들을 관찰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정말 떠났구나….”

먼저 입을 뗀 사람은 엘레젠 쪽이었다. 바다늑대 쪽은 신음소리를 냈다.

“졌다, 졌어.”

람브루스는 그들이 굳이 에오르제아까지 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실감이 들지 않았으리라. 친구가 살아서는 만날 수 없는 곳으로 영영 떠났다는 실감이. 그라하가 편지에서 어떤 사실을 얼마나 밝혔는지는 모르겠으나, 가까운 이들에게는 말했을 것이라고 람브루스는 짐작했다. 오랜 시간 잠드는 것뿐이니 괜찮다는 헛소리를.

그라하 티아의 막사를 정리할 때까지만 해도, 람브루스는 그다지 슬퍼하지 않았다. 오히려 젊은이의 희생정신, 미래에 대한 신념, 이상을 향한 마음가짐에 감탄마저 하던 차였다. 문이 닫히던 그 자리에 있었던 모두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나이 든 현자가 깨달은 것은 서류 더미 위, 눈에 잘 띄는 자리에 놓여 있던 물품 처분 지침을 읽으면서다. 물건은 누구에게, 이 편지는 다른 누구에게, 저 편지는 아버지에게…. 그는 유서에 어떤 이야기가 들어가는지 슬슬 익숙해질 나이였다. 깨닫고 나니 태연하게 서 있을 수 없었다. 마음을 정리하고 막사 정리를 마치는 것만 이틀 걸렸다.

젊은이들은 코를 훌쩍거리며 일어섰다. 바다늑대가 유품 상자를 들고, 엘레젠이 람브루스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샬레이안으로 회항하는 비공정이 뜨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승강장에서 기다릴 예정이라고 했다. 람브루스는 상자를 소중하게 받쳐 든 손이며, 슬픔에 잠긴 목소리를 무시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젊은이들과 함께 칼라인 카페로 올라왔다.

따뜻한 음료수나 먹일 생각이었던 것이 언제부터 그라하 티아에 대한 험담으로 변질하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라하를 오랜 시간 알아 왔던 친구들의 묵은 감정이 람브루스의 감정보다 한 수 위였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특히 바다늑대의 불만이 대단했다. 집안 어른들에게 굽실거릴 생각을 하니 두통이 인다, 그 자식은 비슷한 처지면서 왜 나한테만 가족 운운을 하냐….

“하지만 라하가 탑에서 나올 때까지 버틸 만한 건 너희 집안정도니까….”

엘레젠의 말에 바다늑대는 투덜거리던 입을 다물었다. 람브루스는 알지 못했지만, 바다늑대의 집안은 샬레이안에서도 알아주는 명문가였다. 재해가 또다시 세상을 쓸어버리지 않는 한 샬레이안은 굳건할 터였다. 그 나라를 지탱하는 가문들도 마찬가지다.

“망할 놈. 등 떠밀지 않아도 돌아갔을 텐데.”

딱 하나 마음에 드는 점은 그라하가 쥐여준 핑계였다. 가문을 번성시키고 오래오래 유지해서, 나중에 자신이 탑을 나온다면 맡긴 물건을 되돌려달라니. 본가 어른들이 들으면 뒷목 잡을 소리였다. 남의 자랑스러운 집안을 유실물 보관소로 취급한 게 아닌가. 오늘 본 친구의 직장 동료가 앞에 있다는 것도 잊고, 그녀는 킬킬 웃었다.

젊은이들이 자기들만 아는 이야기를 나눌 동안, 람브루스는 잔을 홀짝거렸다. 그들이 대화 상대를 자연스레 따돌렸음을 눈치채기 전에 화제를 돌렸다. 본국에 돌아가면 무엇부터 할 것이냔 질문이었다. 그들은 그라하의 유언 집행으로 만난 관계일 뿐이니, 서로 모든 것을 알 필요는 없었다.

“집부터 정리해야겠죠….”

엘레젠이 대답했다. 그것이 그에게 남겨진 말이었다. 그라하는 집을 놔두고 샬레이안을 떠났다. 관리는 친구들에게 부탁했다. 어째서인지는 얘기해주지 않았지만, 남자는 아마도 돌아올 이유를 남겨둔 것이리라 짐작했다. 그라하는 떠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지 어딘가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이는 아니었다. 그 녀석이 집을 정리하러 돌아온다면 그것이 마지막이겠지. 결국에는 돌아오지도 못했지만. 코가 시큰거렸던 탓에 엘레젠은 급히 잔을 비웠다. 차는 식어 있었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쪽은 람브루스였다. 샬레이안 회항 비공정이 뜨기까지는 워낙 여유 시간이 많았고, 그가 성 코이나크 재단 캠프를 오래 비울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교통편이 불편한 것도 한몫했다. 정류장마다 초코보를 갈아타며 달릴 걸 생각하니 벌써 허리가 쑤셨다.

두 젊은이는 람브루스를 배웅하러 따라 나왔다. 노인은 마지막으로 위로의 말이라도 건넬까 싶었지만, 그건 친구를 다독이는 바다늑대에게 맡겨둬도 될 것 같았다. 대신에 그는 무책임하게 떠난 젊은이를 골려줄 방법이 없을까 생각했다. 초코보 안장에 실려있는 동안은 아무리 실없는 공상도 몰두할 거리가 되는 법이다.

공상은 정교한 자동인형의 형태로 수렴되었다. 람브루스는 자동인형을 머릿속 한구석에 잘 앉혀두었다. 언젠가 그것을 현실로 꺼낸다면 오늘 만난 젊은이들에게도 보내줘야겠다, 다짐하면서. 자동인형을 본 그라하 티아는 당황할 것이다. 그 내력을 말해줄 사람이 남아 있다면 더더욱. 그것만큼 나이 든 현자를 기쁘게 할 일도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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