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기록

두 번의 반란

에메트셀크가 예전에도 아젬의 조각을 만난 적이 있다면

-주의: 메인 퀘스트 5.0 칠흑의 반역자 스포일러 / 특정 빛전 묘사 없음 / 대명사 '그'는 성중립 대명사로 쓰였습니다. '그'가 지칭하는 인물을 어떤 성별로 읽어도 무관합니다.

하데스는 절반 조금 넘게 빛을 회복한 혼을 본다. 그는 일곱 번의 재해로 세상을 쓸어버리는 중에도 혼의 빛깔을 잊은 적 없으나, 일곱 번의 죽음을 거친 혼은 그를 모른다.

재현된 최초의 종말 가운데서도 ‘빛의 전사’ 일행은 입을 다물지를 않는다. 영웅 나으리는 이런 상황에까지 와서도 말을 아끼시는군. 하데스는 내심 빈정거린다. 예상외로 힘을 쓰기는 했으나 곧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반절 조금 더 되는 혼에 걸었던 기대가 박살이 났으니 앞으로도 지루하기는 마찬가지겠지만.

바로 그 순간 영웅이 입을 연다.

“너희는 왜 다른 존재들마저 너희가 겪었던 비극에 밀어 넣는 거지?”

언젠가 한 번 들었던 문장이다. 하데스는 잠시 연대를 혼동한다. 그다지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과거의 실수가 기억의 수면 아래에서 떠오른다.

윤회자를 찾는 일은 보통 하데스의 몫이었다. 거기엔 그의 에테르 감별안이 뛰어나다는 사실이 한몫했다. 원형은 고작 셋뿐이었기에 일의 효율을 따져서 움직였다. 덕분에 하데스는 친우의 혼이 어떤 그릇에 들었는지 가끔 살필 수 있었다.

일부러 찾은 적은 없었다. 종말 이후 인간의 생은 너무나도 짧아졌다. 친우의 혼은 수백 번 에테르의 바다에서 흘러나갔고, 흘러들어왔다. 여섯 개의 재해가 지나간 뒤에야 원초세계는 그나마 봐줄 만해졌다. 물론 처음과 비교할 때나 그랬다. 절대평가로 가면 하데스의 기준에는 한참 못 미쳤다. 친우의 혼도 비슷한 꼴일 터였다.

네 번째 세계 통합 계획의 주요 부품은 하나의 나라였다. 하데스는 부품에 알라그라는 이름을 지었다. 그리고 이런 설명이 적힌 꼬리표를 달아주었다. ‘폭주하는 욕망에 올라타 자멸하는 집단.’ 그렇다면 불완전한 것들의 주제넘은 욕망이 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하데스에게 답은 하나뿐이었다. 완전한 존재들을 감히 흉내 내는 것. 새로운 개념의 전능한 창조주가 되는 것. 세상의 주인으로 행세하는 것. 하나가 된 온전한 세상의….

아씨엔 에메트셀크는 악의를 담아 알라그의 근간을 다졌다. 최초의 키메라 연구가가 되어 선민사상을 퍼트렸다. 제국의 깃발로 이교도들의 사원을 부쉈다. 제국은 예정된 멸망으로 순조로이 나아갔다. 하데스는 계획이 어긋나지 않아 흡족했지만, 한편으로는 지루했다. 약간은 실망했다. 정말로 이것들이 내가 사랑한 시민들의 조각이란 말인가? 그러한 의문을 파고드는 대신 그는 속 편한 길을 택했다. 갈가리 찢긴 영혼의 불완전성을 탓한 뒤 잊어버렸다.

이대로 알라그를 방치해도 네 번째 재해가 일어나는 데에는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잔데의 부활 정도에나 손을 쓰면 될 것이다.

슬슬 눈을 떼려던 찰나, 하데스는 친우의 혼이 담긴 그릇을 발견했다.

그릇은 알라그 제국의 식물학자였다. 또, 반골이었다. 그는 착취에 주안점을 둔 제국의 외교방침에 비판적이었다. 고등 교육 기관을 수석으로 졸업했음에도 키메라 연구 분야로 진출하지 않았다. 식물학자들이라고 키메라 연구자들보다 얌전한 것은 아니었지만. 알라그 제국 과학자들 손에 들어간 식물종의 운명은 동물종과 다를 게 없었다.

그릇이 반골이 된 것은 천성일까, 학습의 결과일까? 이를 판단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하데스가 눈길을 준 시점에서 그릇은 이미 괴짜로 통하고 있었다. 바탕이 되는 종의 장점을 강화하는, 비효율적인 품종개량법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 기존의 식물 품종을 보존해 다양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

그릇은 말은 사실 키메라 연구에 대한 쓴소리였다. 실용성만을 이유로 이 종과 저 종을 이어붙이고, 그 결과 생물이 겪을 부작용은 고려조차 않는 것은 비윤리적이다. 알라그 제국의 지배자들이 키메라 연구를 승인한 것은 잘못되었다…. 다만 그릇이 반골임을 눈치챈 사람은 별로 없었다. 알라그 제국식 세뇌교육 덕분이기도 했고, 그가 주변 사람들의 안위를 걱정해서기도 했다.

그릇을 지켜보며 하데스는 문득문득 옛날 일을 떠올렸다. 어느 날 친우가 혼자 화산섬의 폭발을 막으러 갔을 때라거나. 14인 위원회의 좌를 맡았던 만큼 그는 자연재해를 막을 능력이 충분했다. 그래도 하데스는 한 소리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에는 혼자 뛰어든 무모함을 질책했다. 다음으로는 위원회의 징계를 걱정했다. 친우는 거기서 나는 포도가 맛있으니 다음에 회의실에 가져오겠다고 대꾸했다. ‘라하브레아 학장님도 그걸 맛보면 이런 과실을 잃을 순 없지, 하고 좀 봐주시지 않을까?’

누가 봐도 포도는 핑계에 불과했다. 이걸 믿는 놈은 바보가 아닐까? 하데스가 말문이 막힌 사이 친우는 말을 이었다. ‘게다가 지원이 언제 올지 모르는 일에 누굴 데려가겠어? 혼자가 편하지.’ 그 뒤로도 친우는 단독 행동의 장점을 줄줄 늘어놓았다. 일의 규모를 살필 때나 소환 마법을 펼칠 장소를 찾을 때 기동력이 좋다느니, 어쩌니….

편하다는 말은 즉, 무슨 피해를 봐도 일단은 자신만의 일이니 편하다는 뜻이었다. 하데스는 그 점을 지적하며 화를 냈다. 친우는 끝내 혼자 다니는 버릇을 고치지 않았다. 옳다고 생각한 일에는 또 어찌나 뚝심 있게 행동하는지 몰랐다. 조디아크 소환을, 또 소환에 희생된 사람들을 되살릴 방도가 의제로 올라왔을 때였다. 친우는 위원회 자리를 박차고 떠났다. 12명의 위원들은 아젬의 좌에 관한 크리스탈을 남기지 않기로 결정했다. 에메트셀크도 그에 동의했다. 하데스는 친우에 대한 기억을 크리스탈에 남겼지만.

하데스는 그릇과 친우의 차이점이 얼마나 큰지 집착적으로 되새겼다. 친우는 결국 화산 폭발을 막았고, 그릇은 키메라 연구를 저지하기는커녕 대놓고 비판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영민한 두뇌는 의문을 품었다. 친우가 그릇과 같은 상황이었다면 과연 다른 선택을 했을까? 그는 직감적으로 떠오르는 답을 무시하기 위해 애썼다.

본인에게 대답을 들을 방법이 없진 않았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크리스탈이 문제였다. 편향된 시각도 시각이지만, 하데스는 스스로가 어둠에 물들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다. 윤회자들과 같은 각성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여차하면 그릇을 죽일 각오도 필요했다. 그가 아는 친우라면, 비록 쪼개진 혼일지라도, 원형들의 계획을 대규모 학살이라고 말할 테니까.

막상 그릇의 기억을 끌어낼 때는 실패를 각오할 겨를이 없었다. 다른 두 원형의 눈을 피해 그릇과 단둘이 있을 기회가 쉽게 찾아오지는 않았다. 실랑이 끝에 그릇은 크리스탈을 손에 쥐었다. 크리스탈에 담긴 기억을 계승하면 제국이 키메라 연구를 자행하는 이유를 알려주겠다는 미끼 덕분이었다. 알라그인에게 소울 크리스탈은 익숙한 개념이어서 따로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하데스는 기다렸다.

크리스탈이 빛나기 시작한 뒤에도 그릇은 알쏭달쏭한 듯했다. 기억을 되찾았다기에는 미지근한 반응이었다. 매개체에 결함이 있으니 시간이 더 필요한 것일지도 몰랐다. 하데스에게 여유 부릴 시간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그는 결국 크리스탈을 쥔 그릇의 손을 잡았다. 좀 더 생생한 친우의 기억을 크리스탈에 담는 동시에 옛 추억을 읊기 시작했다.

그릇은 점점 더 기억을 찾아가는 듯 보였다. 먼저 질문을 던지거나, 하데스도 기억하지 못하는 일을 확신에 차서 얘기했다. 어느덧 하데스의 기억은 친우가 위원회를 떠나는 대목에 이르렀다. 그제야 그는 마주 앉은 사람의 눈을 보고 있지 않다는 걸 알아차렸다. 의견 대립이 심했지, 문장을 마무리하며 고개를 든 뒤에….

하데스는 깨달았다.

역시 자신의 기억만으로는 할 수 없었다는 것을.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허탈했다. 게다가 기억을 직접 전달하다가 말하지 않으려던 것까지 흘러 들어간 모양이었다. 살아남은 원형 셋이 지금까지 무엇을 했는지. 세 번의 재해가 지나갔고, 알라그 제국이라는 다음 재해의 씨앗이 뿌려졌다는 사실까지. 그릇이 손을 뿌리치고 하데스의 반대쪽으로 뒷걸음질 치는 것을 보면 확실했다.

‘끔찍한 사람들 같으니.’

그릇이 가장 먼저 한 말이었다. 아주 놀랍지는 않았다. 모든 윤회자들이 세계 통합 계획에 찬성했던 것은 아니다. 그럴 때는 죽일 수밖에 없었다. 윤회자는 보통 사람들보다 많은 것을 방해할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하데스는 선뜻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위대한 알라그 제국은 장례식 대신 부활 의식을 빙자한 학살을 벌이는 작자들 손에서 태어났군요. 그래서 목숨을 경시하고 불필요한 고통을 당연하게 여기는 거네요. 당신들이 이데아를 창조하듯 우리는 키메라를 만들고, 당신들이 종말을 맞았듯 우리도 종말을 맞아야 하는 거로군요! 완전한 인간이 이렇게 유치한 복수극을 벌이다니요. 심지어 누구에게 복수해야 할지도 모르면서!’

하데스가 망설이는 동안 그릇은 비난을 이어갔다. 말투와 목소리, 하데스를 노려보는 눈, 무엇 하나 닮은 게 없는데도. 같은 혼을 가지고 있어도, 기억을 찾지 못한 이상은 다른 사람인데도.

‘당신들은 왜 다른 존재들마저 당신들이 겪은 비극에 밀어 넣는 거죠?’

친우가 말했다. 하데스는 눈앞의 사람이 친우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도망치는 그릇을 잡으려고 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하데스의 손이 순간 짐승의 앞발처럼 뾰족해지며 허공을 할퀴었다. 묵직한 것이 손가락 사이에 걸리는 느낌이 났지만 이내 사라졌다. 살해 시도가 전혀 효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릇의 피로 보이는 혈흔이 벽에서 바닥까지 일자로 튀었다. 모양이 이상한 걸 보니 공간을 접어 이동했을 것이다.

하데스는 얼마간 그릇이 사라진 벽을 바라보았다. 추적해야 한다는 걸 알지만 의욕이 바닥났다. 출혈량을 가늠해보니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기도 했다. 행방을 모르더라도 괜찮겠지. 명계를 살펴보면 그것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있을 테니까.

관찰을 소홀히 한 탓인지 친우의 혼은 에테르의 바다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하데스는 명계를 들여다보지 않게 되었다.

“사람들이 크리스탈로 신을 소환하는 걸 보면서 아무 생각도 안 들었어?”

기억 속의 목소리와는 또 다른 목소리가 하데스를 현재로 되돌려놓는다.

“너희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았잖아. 서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고, 남은 사람들이 자아를 잃어버릴 걸 모르지 않았잖아. 완전한 인간? 남의 고통을 헤아릴 줄도 모르면서 완전해? 너희는 불완전한 인간이 계기만 있으면 악행을 저지른다, 비난할 자격 없어. 너희들도 똑같으니까!”

오랜 시간이 지난 덕에 하데스는 이제 상심하지 않는다. 불완전한 혼이 지껄이는 헛소리 따위, 완전한 세계가 도래하면 잊힐 테니까. 기억은 죽음 앞에 무력하다. 죽음이 영원한 망각이라고 불리는 이유다. 다만 의문을 품는다. 완전한 혼을 되찾은 친우는 어떨까? 세계를 되돌리는 과정에서 죽은 불완전한 것들에게 신경 쓸까? 그는 선뜻 아니라고 답할 수 없다. 전생의 기억도 없는 주제에 전생과 똑같은 말을 하는 빛의 전사 탓이다.

하데스는 자신이 지친 늙은이가 되었음을 깨닫는다. 세계 통합 계획이 지금 같은 방해를 다시 받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다. 혼이 점점 더 완전해지면 반항아들을 제압하는 것도 힘에 부칠 것이다. 이 난리를 다시 겪을 걸 생각하니 진절머리가 난다. 그래도 물러설 마음은 들지 않는다. 나이가 들면 관성을 깨기 힘들어지고, 실패를 두려워하게 되는 법이니.

그러니 어디 한 번 나를 끌어내려 봐라. 그러면 인정해주지.

하데스가 종장을 알리는 대사를 읊으면, 여덟 번째 재해를 막기 위해 시공을 건너온 자가 그 너머의 영웅들을 부른다. 전사는 두 세계를 지키기 위해 손을 내밀고, 또 다른 전사가 그 손을 잡으며 몸을 일으킨다. 무기를 든다. 한 걸음 내디딘다.

영웅, 빛의 전사, 모험가의 품 안에서 소울 크리스탈이 빛난다.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미약한 빛이 모험가를 격려하듯 어깨 위를 두른다. 이것은 먼 옛날, 세계를 위협하는 망집에서 도망친 자의 유품이다. 후일 그에 대항하고자 하는 누군가에게 힘을 주기 위해 남긴 것이다. 마침 손에 쥐고 있던 크리스탈에 자신의 생명력을 쏟아부어서. 가장 적절한 자의 손에 도달하기를 기원하면서.

크리스탈이 오래된 소명을 다하는 것과 동시에, 최후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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