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판14

[에메히카] 명경

laid back by A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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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10 작성

※ 커미션

※ 6.0까지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명경 >

“나가.”

“엔디미온.”

“어서.”

축객령을 내리는 엔디미온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당장 나가지 않고 뭘 하느냐는 듯 눈앞에서 앞섶을 풀어 내리는 손은 일말의 망설임조차도 없어 보였다. 벌어지는 옷자락 사이로 비치는 하얀 살결, 그 위로 새겨진 긁히고 베인 자국. 시선으로 드러난 살갗을 훑던 에메트셀크는 일순간 시선을 돌렸다. 엔디미온이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셔츠를 벗는 것으로도 모자라 속옷의 버클을 풀어내려 손을 움직인 탓이었다.

결국 더 말을 붙이지 못하고 나와 방문을 닫는 에메트셀크의 낯에 실금이 나 있었다. 아래로 늘어지는 옷자락은 분명 액체를 머금고 묵직하게 흔들렸다. 돌아오는 길에는 비 한 방울 떨어지지 않았으며, 물벼락을 뒤집어쓸 일도 없었다. 그러니 저토록 옷이 젖을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피. 남의 것이거나, 어쩌면 제 것이거나.

수시로 전장을 오가는 엔디미온은 때때로 선봉에 섰다. 적과의 충돌은 필연적이었으며, 그럴 때면 그는 드물지 않게 피를 뒤집어썼다. 비릿한 쇳내는 그처럼 전장을 구르는 이들에게는 원하든, 원치 않든 익숙해지기 마련이었다. 그 탓에 엔디미온이 비릿한 혈향을 풍기며 제 옆을 지나쳐 갈 때 당장 붙잡지 않았다.

그러나 장비며 내의 아래 살갗에까지 남은 상처를 본 이상 그저 타인의 피겠거니, 하고 넘길 수는 없었다. 그 본인이 치유 마법을 사용할 수 있으니 도움은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일 테지. 정확히 이유를 짚어낼 수도 없는 불쾌함이 치솟으면, 에메트셀크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무모하게 구는 모습을 보는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피와 체액을 말끔하게 씻어내리고 상처까지 수습한 후에야 다시 모습을 보일 터였다.

그 사이 제가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고매한 영웅님께서는 그 누구에게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했으므로. 차오르는 불쾌감, 일순간 가슴 언저리에 묵직한 통증이 퍼졌다. 저미는 듯한 혹은 후벼파는 것 같은 날카로운 고통. 그건 어쩌면 불에 덴 것 같기도 했다. 기나긴 삶 내도록 경험한 어떤 고통과도 완전히 같지 않은, 드물게 낯선 감각이었다.

본래의 육신은 진작 스러져 인제 와서는 백골조차 찾을 수 없었다. 지금의 몸뚱이는 일종의 부품에 가까웠다. 문제가 생기면 얼마든지 갈아 끼울 수 있는 소모품. 그러니 일상 속에서 전조도 없이 찾아오는 통증은 기이했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엔디미온을 뒤로하고, 제 거처로 돌아온 에메트셀트가 옷깃을 풀어 헤쳤다.

정확히 심장이 위치하는 곳 바로 위쪽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거울 탓에 뒤집어져 있어도 단번에 읽어낼 수 있는 익숙한 이름. 에메트셀크의 표정이 한층 더 구겨졌다. 그는 옷깃을 대강 여미고 소파에 얕게 앉았다. 신체 어딘가에 이름이 새겨지는 건 현생 인류에게 드물지 않은 빈도로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과거 저와 제 동포들이 살아가던 시절에는 분명 존재하지 않았건만.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자리를 잡았다.

신체에 새겨지는 이름의 주인이 운명의 상대라고 하던가. 터무니없는 이야기였다. 에메트셀크는 운명을 믿지 않았다. 아니, 믿지 못했다. 그런 것이 존재했다면, 제 세상이 그런 식으로 멸망했을 리 없었으므로. 게다가 그들이 말하는 운명은 퍽 우스운 모양새였다. 뒤늦게 타인의 이름이 나타나 결혼까지 한 이들의 관계가 파투 나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이름의 주인을 만나고도 만족하지 못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 꼴이니 그에게 운명이란 언제나 뜬구름 잡는 소리로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이것은 분명 현생 인류에게도 나타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현상이었다. 그런데 제게 왜 이름이 나타난단 말인가. 에오르제아의 영웅, 엔디미온의 일격으로 제 영혼이 돌이킬 수 없이 부서졌다고 한들 저들과 자신은 달랐다. 같을 수는 없었다. 만에 하나라도, 자신과 그들이 다르지 않다면. 찰나 숨이 막혔다. 여전히 저 깊은 바닷속에 잠겨 있기라도 한 듯. 차라리 모든 일이 끝났을 때 심해 속으로 잠겨 들었어야 했다.

핏기 없는 얼굴, 다시 한번 옷깃을 잡아 벌린 에메트셀크의 눈이 거울을 뚫어지라 응시했다. 마치 노려보기라도 하면 심장 위에 이름이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허공에 틈을 만들어 낸 그는 한 치 망설임 없이 검은 기운 속으로 몸을 던졌다. 잠깐의 울렁임, 그 끝에 다시금 펼쳐진 공간은 방치된 티가 나는 연구실이었다. 여기저기 더께가 앉은 곳이었으나 기계는 여전히 작동하며 희미한 빛을 흘렸다.

거대한 시험관 앞에 선 에메트셀크의 몸뚱이가 맥없이 무너지고, 동시에 액체에 잠긴 채 잠들어 있던 몸뚱이가 눈을 떴다. 몸을 빼내고, 옷을 구현하기도 전에 같은 위치에 똑같은 통증이 일었다. 물기가 다 마르기도 전에 또다시 떠오르는 이름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이었는지. 입안으로 욕지거리를 짓씹은 에메트셀크는 의복을 정돈하고서도 오랫동안 서 있었다.

이름을 확인한 직후부터 매 순간 그의 걸음은 충동으로 가득했다. 긴 한숨과 함께 에메트셀크는 바다 깊은 곳, 무광층에 위치한 자신의 근간으로 향했다. 생사를 건 마지막 결전, 그 끝에 패배한 이후에도 강대한 에테르는 쉬이 흩어지지 않고 잔존했으므로. 수중에 세워진 도시는 언제나 진득한 습기를 머금었다. 아주 먼 과거에 시간이 멈춰 버린 듯한 도시였으나, 이곳을 직접 만들어 낸 그는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시간이 흐르며 이끼가 표면을 덮고, 알 수 없는 식물이 자라나 길을 막았다. 영혼이 조각난 지금, 다소 무리하더라도 이곳을 유지보수할 수는 있었다. 이 장소의 근간은 결국 자신의 마력이었으므로.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로 세월 속에 부식되어 가는 도시를 응시했다. 심장 위에 새겨진 이름으로부터 도망치는 것만큼이나 무의미한 일임을 아는 탓이었다. 헛된 바람으로 가득 찬 도시를 아무리 쓸고 닦는다 한들, 종래에는 흩어지고 말 터였다. 지녔던 사명은 끝내 패배하여 꺾였으며, 그에게 남은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부서진 영혼, 그리 오래 지나지 않은 과거에 비해 더없이 약해진 능력과 끝끝내 버리지 못한 미련.

벗어날 길 없는 시간의 흐름은 끝내 제가 이루어 낸 환영을 집어삼킬 터였다. 죽지 않고서는 지울 수 없는 이름의 주인은 제 영혼을 이토록 불완전하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그래, 더는 찬연했던 과거로는 돌아갈 수 없다고 선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자신조차도 알고 있는 사실을 별 볼 일 없는 육체에, 반쪽짜리 영혼에 기어이 낙인찍듯. 강대한 마법사이자 마지막 에메트셀크의 역사는 패배로 끝을 맞이하였으며, 다시는 돌이킬 수 없다고.

그는 느리게, 그러나 더없이 꼼꼼하게 제가 꾸며낸 거짓된 도시를 살폈다. 이 순간이 지나면 자신은 이곳에 제 발로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직감한 탓이었다. 에메트셀크의 고적한 순례는 출발점으로 되돌아오며 끝이 났다. 뒤돌아선 이는 혹여나 미련에 발이 붙잡히지나 않을까 한 번 뒤돌아보지도 않고 희미한 빛을 흘리는 도시를 나섰다. 모래로 이루어진 땅은 느린 발걸음 소리를 쉬이 삼켰다. 뒤돌아보지 않을지언정 바람처럼 떠나지는 못하는 제 꼴이. 에메트셀크는 짐짓 짜증스레 길을 열었다. 돌아가야 할 곳이 있었다, 제게도. 비록 그 대상이 제게 영원한 패배를 선사한 이라 한들.


더없이 익숙해진 거주구로 돌아왔을 때, 엔디미온은 이미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처음부터 다친 적 없는 것처럼. 허공에서 시선이 얽히고, 더없이 짙은 벽안은 제 상태를 꿰뚫듯 살폈다. 약간이나마 흐트러진 옷차림, 완전히 꾸며내지 못한 표정 따위를 보고도 엔디미온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늘 그런 식이었다. 무엇이 됐건 묻는 법이 없었으며, 호기심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굴었다.

한 번 고개를 치켜든 충동심은 쉬이 가라앉지 않는 성질의 것이어서, 에메트셀크는 보란 듯 제 앞섶을 잡아 벌렸다. 이것 좀 보라고, 영웅님. 내내 잠잠하던 눈이 설핏 찌푸려지고, 이내 설명을 요구하듯 다시금 시선을 맞춰 왔다. 잠시간 의문스러워 할 뿐, 당혹감 따위는 조금도 내비치지 않는 이를 앞에 두면 치미는 충동 따위는 쉬이 가라앉고 말았다.

옷깃을 정리한 에메트셀크가 코웃음을 쳤다. 감정의 대부분을 소실한 듯 구는 이가 이름의 존재 따위를 신경 쓸 리가 없었다. 적어도 엔디미온에게는 제 이름이 새겨진 곳이 없었다. 이름은 신체의 어느 부위라도 떠오를 수 있으니 옷으로 가려져 제가 볼 수 없는 부위에 존재할지도 모를 테지만, 애초에 그 이름이란 것이 늘 쌍방은 아니었다. 때문에 에메트셀크에게는 제 살갗 위에 새겨진 엔디미온의 이름이 목줄처럼만 느껴질 뿐이었다.

구구절절 설명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쩌면 지금 보여준 이름조차 동명이인이라고 생각할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제게도 이름이 발현될 수 있음을 알게 된 순간부터 에메트셀크는 확신할 수 있었다. 애초에 그 외에 누구의 이름이 제게 새겨진단 말인가. 늘어지는 에메트셀크의 침묵을 가만히 흘려보내던 엔디미온이 몸을 일으켰다.

“내 이름이라고 생각해요?”

“……”

대답 없는 이는 심통이 난 것처럼 보였다. 제 태도에 화가 난 걸까. 그는 언제나 속내를 시원하게 털어놓는 법이 없었으므로 아무것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의 심장 위에 위치한 이름은 아마도 제 것이 맞을 터였다. 그러나 제 몸은 티 하나 없이 깨끗하기만 했다. 어쩌면 에메트셀크는 이 점마저도 예상하고 불쾌해하는 건지도 모르지.

에메트셀크는 한참이나 자신을 바라보다, 여느 때처럼 긴 한숨을 내쉬고 자리를 떴다. 정말로 이름이 그 이유라면 그의 기분을 풀어줄 방법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제게도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 한. 아니, 떠오른다고 한들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는 저를 여러모로 신경 쓰는 것 같았으나, 그건 다만. 생각의 흐름이 일순간 끊어졌다. 에메트셀크가 제게 내보이는 감정을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탓이었다.

그러나 가만히 앉아서 그의 감정에 골몰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당장 내일도 마물 토벌이 예정되어 있었으며, 언제 어디서라도 새로운 일감은 생겨날 터였다. 세계의 멸망을 저지했다 한들 여기저기 마물을 비롯한 온갖 위험 요소가 잔재하였으므로. 엔디미온은 무기에 묻은 피 따위를 말끔히 닦아내고, 내일을 대비해 장비며 물품을 챙겼다. 모든 준비를 끝마칠 때까지도 에메트셀크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적당한 때가 되면 다시 돌아오겠지. 못내 신경이 쓰이는 건 사실이었으나, 그를 찾을 필요까지는 느끼지 못한 엔디미온은 잠자리에 들었다.

첫새벽까지도 에메트셀크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귀찮다며 동행하지 않는 일은 흔했지만, 이번에 유독 그의 부재가 신경이 쓰이는 것은 그의 살갗에 새겨진 제 이름을 본 탓인가. 엔디미온은 짧은 한숨과 함께 상념을 털어내고 거처를 나섰다. 오늘은 일선에 서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마음 편히 대기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치유사의 길을 선택한 것이 분명 제 의지라 한들, 무엇 하나 쉬운 적 없었던 탓에.

 


토벌을 위해 모인 이들 중 몇몇은 잡담을 나누기도 했지만, 엔디미온은 무리에서 한 걸음 정도 떨어져 홀로 걸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마물의 거처가 있었다. 오늘 동원된 이들은 대개 노련한 모험가였다. 현재 속도로 걷는다면 오 분 내로 도착할 위치, 순간 메마른 바람이 옷깃을 스치고 머리칼을 흔들었다. 직전까지도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던 이들이 금세 불온한 기색을 알아채고 전열을 가다듬었다.

모습을 드러낸 마물이 주위를 살폈다. 이쪽을 이미 알아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이변이 있음을 깨달은 것일 터였다. 그들 사이에 짧은 수신호가 오가고, 수비를 담당하는 이들이 앞서 걸음을 옮겼다. 세로로 긴 동공이 단박에 앞으로 나선 인간을 향했다. 그것이 이들을 발견한 순간부터, 기척은 죽일 필요가 없었다. 일선을 담당하는 이들 뒤로 날 듯이 달려와 마물의 단단한 살갗을 할퀴었다.

자극받은 괴수가 제대로 움직이기 시작하면, 첫 번째로 피를 흘리는 것은 언제나 가장 앞서는 이들이었다. 그건 곧 엔디미온이 제 역할을 본격적으로 수행하기 시작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긴 지팡이 끝에 모이는 마력은 곧 빛이 되어 상처를 회복시키고, 고통을 경감시켰다.

전투는 지난했다. 마물의 단단한 살갗에는 창칼이 쉬이 박혀 들지 않았으며, 거친 공격은 쉬이 상처를 입히고 사기를 떨어트렸다. 차라리 제가 일선에 서는 게 나았을지도 모르겠다고, 문득 생각했으나, 치유사가 저 하나뿐인 지금 이제 와서 전열을 바꿀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엔디미온 개인의 기준에서 보자면 고착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 그 틈새로 상념이 슬금슬금 머리를 디밀었다.

지난 저녁부터 보이지 않던 에메트셀크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자신의 머릿속에서 자꾸만 그의 살갗에 새겨진 제 이름이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왜 계속 제 곁에 머무르는지. 홀로 고민하는 것만으로는 알 수 없는 것투성이었다. 에메트셀크에게 찾아가 묻는다 한들, 제대로 된 대답이 나올 리도 없었다. 그는 모든 일이 끝난 지금도 털어놓는 것보다 숨기는 것이 더 익숙해 보였다.

문제는 자신 또한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그와는 무엇을 숨기고 있는 것이냐며 따져 물을 만한 관계가 아니었으며, 당장 저도 에메트셀크에게 지닌 감정을 깊이 생각한 적 없었다. 그게 별달리 이상한 건 아니었다. 그와 적대할 때는 관계가 더할 나위 없이 명확했다. 그러나 제 손으로 그를 쓰러트리고 예상치 못한 순간에 그의 과거를 마주한 순간부터는 도무지,

“……씨! 엔디미온 씨!”

“……”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그의 말은 정중하였으나, 그 뒤에 숨겨진 의사까지 예의를 갖춘 건 아니었다. 토벌 중에 정신을 팔고 있으면 어쩌자는 거냐고 따져 묻는 셈이었지. 엔디미온, 영웅이라 불리는 제 이름의 무게가 함부로 입을 놀리지 못하게 할 뿐이었다. 어쨌거나 그의 말은 정당했다. 고착 상태라 한들 생각에 지나칠 정도로 빠져든 것은 사실이었으므로.

이렇다 할 동요를 내보이지 않은 채, 새파란 눈은 천천히 마물과 전열을 맡은 이들을 차례로 훑었다. 한순간에 엔디미온이 든 무기 끝에 짙은 에테르가 모였다가, 전방으로 뻗어나갔다. 그들의 표정에서 고통스러운 기색이 사라지고, 비교적 멀끔한 꼴이 되었다. 짙은 얼룩이 남은 맨바닥 외에는 부상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도록. 대답보다 앞선 행동을 목도한 이는 잠시간 입을 달싹이다가 이내 멀어졌다.

전투는 여전히 지난했다. 한숨을 삼켜가며 영창을 이어가던 엔디미온이 퍼뜩 고개를 돌렸다. 주위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지만 분명 적의가 느껴졌다. 그러나 그 외에는 아무도 느끼지 못한 듯, 당장 눈앞의 마물을 상대하는데 바빴다. 예민하게 날 선 감각이 다시금 주위를 훑었으나 이상하게도 같은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단순한 착각일까. 확신할 수 없었으나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길고 지루한 전투라 한들 마물에게는 끊임없이 피해가 누적되고 있었다.

“얼마 안 남았다! 쓸 수 있는 건 다 퍼부어라!”

마물은 때때로 휘청거리고, 발악하듯 울부짖었으나 그게 전부였다. 단단한 가죽이 갈라져 새빨간 속살을 드러내고, 벌어진 살 틈으로 새는 피가 마물의 움직임에 따라 비산했다. 흙바닥이 더는 피를 받아 마시지 못하고, 곳곳에 고여 웅덩이를 만들었다. 상처가 더 커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공격을 감행하는 마물은 얼마 남지 않은 생명력까지 연료로 삼는 것처럼 보였다.

더, 조금만 더. 승리에 목마른 이들이 한 걸음씩 다가설 때마다 마물은 비틀거리며 물러섰다. 마침내 거체가 쓰러지는 순간, 토벌에 참여한 이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마물의 숨아 깔딱였으나, 이대로 내버려 두기만 해도 곧 완전히 목숨이 끊어질 터였다. 누군가가 마물의 숨통을 완전히 끊고, 누군가는 전리품이 될 만한 것을 챙겼다.

기쁨과 안도가 뒤섞인 현장에서, 엔디미온은 홀로 우뚝 서 있었다. 찰나라 한들 제가 적의를 착각할 리 없었다. 혹시 모를 비상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토벌 예정일이 되기 며칠 전부터 근방은 허가받지 않은 인원의 출입이 통제되었다. 마지막 점검 시점까지도 방금 막 죽은 저것 외에 다른 마물의 흔적은 확인되지 않았다. 애초에 대부분의 마물에게는 무리를 짓는 습성이 없었다. 이번에 토벌한 개체 또한 마찬가지였다. 한숨을 삼킨 엔디미온은 한층 풀어진 분위기의 토벌대에게 다가섰다.

“전리품은 챙긴 것 같으니…… 먼저 돌아가세요.”

각양각색의 눈이 서로를 힐끗거리며 의아함을 표했다. 물론 그들이 직접 물어오더라도 이유를 말해 줄 생각은 없었던 엔디미온은 다만 침묵했다. 떨떠름하게 시선을 교환하던 이들이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의 몫은 총사령부를 통해 전달하겠다는 말과 함께 인사를 건넨 이들은 올 때와는 달리 빠르게 철수했다.

깊은 숲속, 바람이 불 때마다 잎사귀가 부딪히며 스산한 소리를 울렸다. 좁은 오솔길조차 끊어지고, 조심스레 내딛는 걸음마다 마른 낙엽이 부스러졌다. 걸음 소리에 주의하며 이동한 지 십 분가량이 흘렀을 즈음, 저 먼 곳에서 기척이 스쳤다. 엔디미온은 즉시 걸음을 멈추고 고목에 등을 기댄 채 몸을 숨겼다.

마물 같은 게 아니었다. 나무 사이로 얼핏 스친 그림자였으나 엔디미온은 확신했다. 분명 사람이었다. 그것도 적어도 둘 이상. 인형처럼 무감하던 낯에 실금이 갔다. 총사령부를 통한 공식적인 작전이었으니 정보가 새어 나갈 곳은 짐작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 물론 마물 토벌 의뢰가 하달되는 과정을 생각하면 애초에 기밀일 수조차 없는 사안이었다. 찾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제가 참여한다는 사실도, 작전지의 위치도 알 수 있을 터였다.

삽시간에 피로감이 밀려왔다. 원한 적도 없는 유명세, 그 이면에는 그만큼 진득한 적의가 뒤따랐다. 그 어떤 무엇보다 사람을 지치게 만드는 건, 단순하고 무조건적인 적의였다. 여느 적대 세력처럼 그의 손속 아래 친인척이며 친구 따위를 잃은 것도 아니었으며 또한 직접적인 피해조차 없는 이들. 개중에는 그럭저럭 괜찮은 모험가로 활동하는 이도 존재했다.

엔디미온은 한 번도 그들에게 응답하지 않았다. 그럴 가치가 없는 것은 물론이고, 그런 것들을 상대하기에는 그리 한가롭지 않았던 탓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뒤에서 주둥이를 멋대로 놀릴 때의 이야기였다. 토벌 현장까지 쫓아올 정도라면 문제가 더 커지기 전에 싹을 밟아 놔야 했다.

“……문제 ……맞아? 이…… 뭐야?”

“아무 ……도 없었다고. ……갑자기 ……나타……”

어렴풋이 들리는 대화의 내용이 예상과는 달랐다. 의심과 경계가 뒤섞인 말이 향하는 건 분명 이쪽이 아니었다. 스치는 바람결에 희미하게 비릿한 냄새가 섞였다. 대화의 절반 이상이 들리지 않았으나 상황을 파악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그들 외의 누군가가 더 있는 게 분명했다. 그들의 신경이 쏠려 있는 사이, 엔디미온은 걸음 한 번 잘못 내디디면 들킬 만큼 가까이 접근했다.

새파란 눈은 기척을 감춘 채 상황을 훑었다. 무심한 눈에 의아한 빛이 감돌고, 저 가운데 피 흘리며 방치된 이의 정체를 깨닫는 순간 엔디미온은 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얼빠진 소리를 낼 뻔한 탓이었다. 분명 아는 얼굴이었다. 이런 곳에서, 겨우 저 정도 상대에게 당할 만한 인물이 아니었건만. 머리칼이 피에 젖어 엉기고, 그는 드문드문 잔기침을 내뱉었다. 그 꼴을 한 이를 앞에 두고서도 그들이 긴장을 풀지 못하는 건, 분명 그가 얌전히 당하지 않은 탓이리라. 평정심을 되찾고 바라본 이들 또한 멀쩡한 꼴은 아니었다.

살펴보는 것은 충분했다. 자세한 정황은 에메트셀크에게 직접 들으면 될 일이었다. 그가 이곳에 있는 이유 또한. 그들이 회복할 시간을 줄 생각은 없었다. 엔디미온은 나무의 형상이 그대로 살아있는 지팡이 대신 검을 꺼내 들었다. 서슬 퍼렇게 선 날을 가볍게 훑은 이가 곧장 바닥을 박차고 뛰어들었다.

울창한 숲, 하늘을 메운 이파리 틈새로 새는 볕이 검신에 부딪혀 반사되었다. 하나가 제 쪽으로 정체를 알 수 없는 가루를 흩뿌리고, 그와 동시에 무기를 꺼내려던 이의 몸이 무너졌다. 사방으로 흩날리는 가루는 자연에서는 보기 힘든 푸른 빛으로 반짝였다. 일순간 호흡을 멈췄으나 미세한 분말을 피하는 데에는 충분하지 않았는지, 단시간에 이상이 느껴졌다. 에테르의 흐름이 비정상적이었다.

환상적으로 빛나는 푸른 빛, 에테르를 제대로 사용할 수 없는 육체의 반응까지. 짐작 가는 건 딱 하나뿐이었다. 모르포, 푸른 빛이 아름다운 나비. 개체 수가 얼마 되지 않아 돈을 준다고 해도 구하기 어려운 생물이 대체 어떻게 이 정도로 어설픈 이들의 손에 들어간 건지 알 수 없었다. 미세한 가루를 들이켠 목이 까슬했다. 밭은기침을 내뱉으면서도 엔디미온은 검을 바로 들었다.

“마법은 못 쓸 거다!”

수준 낮은 도발은 엔디미온의 신경에 작은 흠집조차 남기지 못했다. 그의 말대로 이 상태라면 마법은 쓸 수 없었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자신이 고작 마법 하나 쓰지 못한다고 제깟 것에게 약점이라도 내보이리라 생각하는 걸까. 우스운 일이었다. 그들이 기습에 성공했다면 아주 작은 가능성이나마 남아 있었겠지만, 입장이 반대가 된 지금에는 스스로 무릎을 꿇는 편이 그 자신의 신변에 더 도움이 될 터였다.

등 뒤에서는 낮게 앓는 소리가 샜다. 별바다에서 돌아온 에메트셀크의 육체는 이전만큼 강대하지 않았다. 그의 본질이 변하지 않았음을 증명하듯 그는 여전히 이런저런 마법을 일상생활에 애용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면, 엔디미온은 요사이 에메트셀크가 규모가 큰 마법을 시전한 적 없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단지 전투에 임할 일이 없기 때문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가. 엔디미온은 당장 뒤돌아 사실을 캐묻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나타난 이의 뒷모습은 그야말로 영웅 같았다. 고통이 온몸을 들쑤셨다. 이토록 처참하게 당해본 것이 얼마 만이던가. 기침을 내뱉으면 새빨간 피가 튀고, 얻어맞은 뱃가죽이 아파 자꾸만 몸을 옹송그렸다. 피로 젖어 축축한 입가를 대충 닦아낸 에메트셀크는 비틀거리면서도 몸을 일으켜 앉았다. 자꾸만 목구멍 아래에서 피가 받쳐 올라와 숨을 쉬기가 어려웠으므로.

금빛 눈은 오로지 한 사람만을 향했다. 당장 그 옆에서 피를 죽죽 흘리며 도망치려 움직이지 않는 몸을 어떻게든 버둥거리는 이 따위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엔디미온이 검을 휘두를 때마다 길게 늘어진 머리칼이 흔들렸다. 그 앞의 상대는 시시각각 상처가 늘어가고 있음에도, 엔디미온에게는 피 한 방울 튀는 법이 없었다. 호흡조차 흐트러지지 않는 단단한 뒷모습이.

내내 밀리기만 하던 남자가 끝내 제 발에 걸려 엉덩방아를 찧었다. 은빛 검날이 볼품없이 주저앉은 이의 목울대에 닿았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이 길게 늘어진 검은 머리칼을 흔들었다. 집요하게 엔디미온을 살피던 에메트셀크는 흑단 같은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하얀 목덜미에 새겨진 이질감을 발견해 냈다. 유려한 글씨체로 새겨진 이름은 분명 제 것이었다. 하데스, 오랫동안 불리는 일 없던 제 이름.

이상한 일이었다. 제 몸에 엔디미온의 이름이 새겨졌을 때도, 그에게 새겨진 제 이름을 보았을 때도. 세상에 같은 이름을 지닌 이는 분명 존재할 테지만 그 이름의 주인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묘한 부분에서 둔한 구석이 있는 엔디미온은 이름의 존재 여부조차 알지 못할 테지만 상관없었다. 이름은 원한다고 새기거나 지울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어쨌거나 그에게 새겨진 이름은 자신이었으므로.

한 걸음 내디디면, 엔디미온이 뒤돌아섰다. 바닥에 주저앉았던 남자는 그사이 목숨을 잃었는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동정심, 혹은 그 비슷한 것조차 담기지 않은 금빛 눈이 잠시간 시체에 머물렀다가 도로 돌아왔다. 무기를 집어넣고 다가오면서도 엔디미온은 에메트셀크의 상태를 살폈다. 늘 무감하기 그지없어 차라리 보석을 박아넣은 것 같던 눈에 희미한 걱정이 서려 있었다.

고통은 봄날 눈 녹듯 사라졌다. 그리고 끝끝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엔디미온은 제게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며, 스스로 목줄을 매고 받을 생각도 하지 않던 이에게 고삐를 건네주었음을. 별바다 속에 잠겨 어렴풋한 의식을 지닌 채 잠들어 있던 저를 불러낸 건 분명 엔디미온이었으나, 밟는 것만으로도 불쾌해지고 마는 땅 위에 발 붙이고 선 건 제 의지였다. 미련,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자신의.

“엔디미온.”

몇 번이나 내뱉은 기침 탓일까, 혹은 복받쳐 오른 감정 탓일까. 목소리가 듣기 싫게 갈라졌다. 늘 말이 없는 엔디미온은 이번에도 대답 없이 그를 올곧게 응시했다. 체념하듯 전부를 인정하고 나면, 새삼스레 입을 떼는 것이 어려웠다. 이제 와 제 감정을 솔직하게 토로한들 엔디미온에게서는 어떤 반응도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았다. 하얀 목덜미에 새겨진 제 이름은 그저 가능성을 시사할 뿐이었으므로, 그것만으로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엔디미온은 검 대신 지팡이를 들었다. 제가 그러했듯 그 또한 마법을 제대로 쓸 수 없는 상황일 텐데도. 엔디미온의 미간에 얕은 주름이 파이고, 주문을 읊는 목소리가 불쾌한 듯 가라앉았다. 그럼에도 엔디미온은 포기하지 않았다. 반쯤 억지로 모은 에테르가 제 몸에 쏟아부어졌다. 무리할 것 없어. 그런 짓을 하다가는 외려 제 몸에 부담이 갈 터였으나, 엔디미온은 들은 척조차 하지 않았다.

“설명이 필요한데, 에메트셀크.”

불어오는 바람, 잎새 부딪히는 소리는 이전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으나 어째서인지 스산함은 사라진 것 같았다. 억지로 힘을 끌어낸 탓에 속이 메스꺼웠다. 약간의 내상을 입었을지도 모르지. 그건 당장 피를 토하는 것도 아닌 이상 모르포의 효과가 떨어지면 말끔히 해결될 문제였다. 눈앞의 적을 해결하고 나니, 더 많은 의문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에메트셀크가 이곳에 있는 이유는 물론이고, 겨우 이런 것들에게 그만한 부상을 허용한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왜 여느 때보다도 올곧게 자신을 응시하는지.

“돌아가서…… 엔디미온, 그 후에 말하지.”

지금 당장 말하지 못할 타당한 이유라도 있는 걸까.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어림짐작조차 할 수 없어, 엔디미온은 한숨을 삼켰다. 그가 왜 이곳에 있는지는 설명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가 무슨 이유로든 제 뒤를 좇는 일이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그러나 하나, 약해졌다 한들 에메트셀크쯤이나 되는 이가 어쭙잖은 모험가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한 이유만큼은 알아야 했다.

한 박자 늦게, 엔디미온은 제 생각이 아집에 가까움을 자각했다. 에메트셀크는 이제 더 이상 전투에 나서지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이번처럼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면 위험해질 일도 드물었다. 게다가 그는 몸뚱이가 죽는다고 여느 인간처럼 죽음을 맞이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구할 수 없다고 알려진 모르포가 이렇게나 어설픈 이들의 손안에 들어간 꼴을 이미 목도하지 않았는가. 지팡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 마디가 하얗게 질렸다.

“그러지 마, 엔디미온.”

큼지막한 손이 엔디미온의 손 위를 덮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행동은 온갖 생각과 불쾌함을 일시에 누그러트렸다. 사람에게도 전원이 있다면, 잠깐이나마 스위치가 내려간 것처럼. 제 표정이 어땠는지 알 수 없었으나 에메트셀크는 제가 더 놀란 것처럼 손을 떼어냈다. 다시금 침묵이 찾아들면, 이상하게 가슴 언저리가 간지러웠다. 참지 못하고 헛기침한 엔디미온은 뒤돌아 곧장 걸음을 옮겼다.

“총사령부에 들러야 해요.”

“……”

“금방 돌아갈 테니까…… 기다려요. 도망칠 생각 말고.”

에메트셀크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하지만 어디 그가 입을 다물고 침잠한 것이 한두 번이었던가. 엔디미온은 이미 뱉은 말을 철회하는 대신 희미하게 웃었다. 혼자 돌아갈 수 있죠? ……그래. 가타부타 입을 여는 법 없이 에에메트셀크는 보란 듯 마법을 시전했다. 검은 균열 속으로 에메트셀크의 그림자마저 사라지면, 마법의 흔적을 잠시간 응시하던 엔디미온도 자리를 떴다.

 


집 안에는 온통 어두컴컴했다. 분명 에메트셀크가 먼저 도착했을 텐데. 묵직한 가방을 현관 옆에 내려두고, 스위치를 눌러 불을 켰다. 한 번 깜박이고는 환히 켜지는 천장등, 그 아래 소파에 앉은 에메트셀크의 모습이 드러났다. 어둠 속에서도 저를 바라보고 있던 건지, 곧바로 마주치는 금빛 눈이.

돌아오는 길 내내 엔디미온은 에메트셀크를 생각했다. 제 감정은 언제나 깊이 생각해야 할 만큼 복잡한 구석이 없었으며 쉬이 흔들리지도 않았다. 에메트셀크의 살갗 위에 새겨진 제 이름이며, 피투성이가 되어 나뒹굴던 모습을 목도하기 전까지는. 그의 존재가 지니는 의미를 다시 정의해야만 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제 숙적이 아니었으나 동료라 부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의 모든 것이 끝난 이후로 에메트셀크가 제게 내보이는 감정은 어느 때에는 기대감이었고, 어느 때에는 미련이었다. 또 어느 순간에는 설움이 섞였고, 그 모든 것이 뒤섞여 복잡미묘할 때도 있었다. 하나 엔디미온은 이제 단언할 수 있었다. 적어도 그는 내보일 일 없으리라 생각해 은근슬쩍 넘겨 버렸던 감정의 이름을.

“먼저 말해두자면, 이번 일은 내 실수다. 마비나 침묵의 독도 아니고 모르포를 쓸 줄은 몰랐는데…….”

상황 설명을 들어야만 하겠다며 에메트셀크를 붙잡은 건 맞지만, 생각을 거듭하고 나니 그런 건 아무래도 좋은 일 같았다. 대충 고개를 끄덕이면 에메트셀크가 대번에 그 기색을 알아채고 눈을 가늘게 떴다. 그는 먼저 입을 열 생각이 없을 터였다. 당연했다. 그 이름이 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말한 게 자신 아니었던가.

“거기 왜 왔어요? 그날 그렇게 가 버렸으면서.”

“……네가 보고 싶어서, 엔디미온.”

말문이 턱 막혔다. 가라앉은 목소리는 당연한 사실을 읊듯 담백했다. 고작 하루 사이에 태도가 바뀐 이유를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걸리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애초에 에메트셀크가 제게 이름을 보여준 이후로 전투지에서 얼굴을 마주한 게 처음이었다. 고작 하룻밤하고도 몇 시간이었다. 그러니까, 가능성은 하나뿐이었다. 제게도 그의 이름 같은 게 존재하는 걸지도 몰랐다. 그것도 언제, 어디에 이름이 새겨졌는지도 모르는 채로.

그의 시선이 제게 향해 있음을 알면서도, 엔디미온은 팔을 걷어붙이고 제 몸을 살폈다. 그러나 옷을 벗지 않은 채 확인 가능한 어느 부위에도 그의 이름은커녕 흉터조차 보이지 않았다. 목덜미. 한 마디 툭 던진 에메트셀크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손끝으로 더듬은 살갗은 다른 곳과 매한가지로 매끄러울 뿐이었다.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거울 앞에 서면, 그가 당연한 듯 작은 거울을 제 앞에서 들고 섰다.

길게 늘어진 머리칼을 대강 잡아 올리면, 그곳에 정말로 그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하데스, 알고는 있었으나 부를 일 없던 이름이. 하데스……. 속삭이듯 중얼거리는 목소리. 거울을 쥔 에메트셀크의 손이 일순간 움찔거렸다. 엔디미온은 아랑곳하지 않고 거울에 비친 상을 살폈다. 이런 곳에 있으니 어지간해서는 알아채지 못할 만도 했다.

“에메트셀크.”

“그렇게 부르지 마.”

“하데스. 나를 사랑해요?”

“……그래.”

“왜?”

새파란 시선이 저를 옭아매는 것 같았다. 질문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의도를 안다 한들 명확하게 대답할 수 있는 질문도 아니었다. 왜라니, 제가 어떻게 그 이유를 알겠는가. 무슨 이유로든 엔디미온을 오랫동안 지켜본 탓일지도 모르고, 어쩌면 그저 살갗에 새겨질 뿐인 이름이 정말로 운명을 품은 탓일지도 모르지. 그러나 에메트셀크는 여느 때처럼 침묵하지 않았다.

“글쎄. 확실한 건, 사랑하지 않았다면 내가 다시금 이 땅 위에 발 붙이고 서지도 않았겠지. 엔디미온, 사랑은 머리로 하는 게 아니야.”

“그러면 하데스, 나도 당신을 사랑하는 걸까?”

섣불리 대답하지 못한 이의 입술이 달싹였다. 마음 같아서는 무작정 긍정하고 싶다가도,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입을 막았다. 충동적으로 매만진 엔디미온의 긴 머리칼은 생각보다도 더 부드러웠다.

“나는 모르지. 하지만…… 함께 알아봐 줄 순 있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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